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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관계3. 여담4. 관련 기사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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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정부 위구르 인권 문제나 독립운동 관련하여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2. 역사적 관계

2.1. 고조선 ~ 삼국시대

고대 타림 분지 지역과 한반도가 직접 교류한 것을 증거하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중국 사료 중에는 이를 짐작하게 할 만한 사료들이 남아있다. 흉노 전쟁을 벌이던 전한 한무제는 흉노를 공격하기 앞서서 흉노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알티샤르 일대에 이광리 등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같은 시대 흉노의 왼팔 취급을 받았던 고조선 역시 한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위구르는 고구려, 발해와도 교류를 했다. 위구르는 당나라군의 번병으로써 당의 고구려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돌궐이 무너지고 그곳에 새로 일어난 위구르 족장 비속독이 661년 고구려-당 전쟁 철륵의 우두머리로 봉기를 일으켜 고구려의 승리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 때 당나라는 부여도행군총관 소사업의 부대를 급히 선악도행군총관[1]으로 새로 임명해 철륵 전선으로 빼야 했고 심지어는 연남생과 전투 중이던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까지도 빼야 했다. 덕분에 평양성을 포위하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과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모두 외부의 지원이 끊기며 고립되었고 결국 평양성을 굳게 수비하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깔끔하게 도륙이 나며 소정방은 부랴부랴 신라 김유신이 제공한 군량만 받아챙기고 몸만 빠져나가기 급급했다.

2.2. 남북국시대

발해는 왜 많은 에너지와 인력을 소모하면서까지 확장했을까를 생각해보자. 니콜라예프카, 콕샤로프카 등 발해의 한카호 이북의 성지는 공통적으로 1) 동물뼈가 대량으로 출토되는 등 복합생계경제(특히 유목 및 수렵)의 비중이 높음, 2) 중앙아시아 및 초원 지역과의 관계 밀접, 3) 모피, 산삼 채취도구 등 이 지역 특산품개발 등의 흔적이 보인다. 바로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특산품의 채취 및 교역 거점의 확보를 통한 경제적인 이득이 더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콕샤로프카의 위구르 계통 토기로 볼 때 발해가 한카호 일대로 확장한 것은 적어도 8세기 중후반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즉, 발해가 건국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북쪽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1) 당나라와 신라의 팽창으로 자신의 영역을 동, 남, 서쪽으로 쉽게 확장할 수 없었던 점, 2) 중앙아시아 등 초원 지역의 교역로를 개발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함 등이었다. 8세기경에는 이후 발해의 주적인 여진이나 거란이 아직 득세한 시기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북방지역으로의 확장이 아주 어려웠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북쪽으로 확장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북변을 지배했는가 이다. 콕샤로프카 성지의 6년간 발굴성과는 이 문제에 대한 좋은 답을 제공한다. 당-발해와의 관계와는 별도로 당시 몽골초원에서 강성했던 위구르 제국 실위를 사이에 두고 발해와 접했다. 신당서에 따르면 위구르의 영토는 동쪽은 실위, 서쪽은 알타이, 남쪽은 고비 사막 등 흉노의 옛 영토에 걸쳤다. 이러한 판도에서 실위가 특별히 적대적이지 않다면 발해와 위구르는 큰 무리 없이 교역할 수 있다.

더욱이 위구르 제국의 교역은 소그드인들이 담당했었기 때문에 두 제국 사이의 교역은 더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가 북방의 험한 지역으로 성지를건설하며 그 영역을 확장하는 배경에는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역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 자료로 본 발해와 위구르 제국 #

발해 위구르 칸국과도 담비의 길과 비단길의 지류인 초원길로 무역도 했으며,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했었다.

통일신라 시대 혜초는 타림 분지와 투르판 일대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인도 일대를 여행한 후 이를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2.3. 여말선초

위구르와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교류가 있었던 시기는 고려 시대이다. 위구르인들은 위구르 제국 시절부터 소그드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2] 마니교를 믿던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이들도 불교, 기독교, 마니교, 유대교, 이슬람에 대해서 실용적인 관점과 폭넓은 이해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역을 중시하던 소그드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위구르인들 중에서 다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많았다.[3] 서하, 요나라, 서요, 몽골 제국 전역에서 위구르인들은 지식인 관료층으로 활약했으며, 러시아에서부터 고려까지 몽골인들을 대신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고려시대 원 간섭기 시절 역관들이 가장 중요하게 배웠던 언어가 바로 위구르어였다. 조선 초기에도 역관들에게 위구르어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몽골 제국에서 활약하게 된 위구르인 중 고려에 시집을 간 몽골 공주들이라던지 다루가치들을 따라 고려에 온 사람들도 많았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회회인(回回人)으로 통칭되던 위구르인 중에는 기독교 신자나 불교 신자, 마니교 신자도 적지 않았지만 많은 수가 무슬림이었으며 몽골인 다루가치의 수행원으로 많은 위구르 무슬림들이 고려에 정착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고려 말에 귀화하여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된 장순룡(張舜龍)을 들 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그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방에 해당하는 회회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무슬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골 제국에서는 위구르인들을 색목인으로 규정해서 몽골인 바로 다음가는 인종 계급으로 분류해 여러 실무직에 앉혔고 원나라와 고려 사이의 교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위구르인들과 고려와도 주기적인 접촉이 이뤄졌다.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이슬권의 영향을 받은 만두 상점과 회회아비의 묘사가 등장한다.[4] 회회교(回回敎, 즉 이슬람) 자치구역도 있어 개성 한복판에 이슬람 성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에 정착한 위구르인 중 적지 않은 수가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시대 상황상 고려에 그대로 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수 장씨의 시조 장순룡(張舜龍)과 경주 설씨의 시조 설손(偰遜)[5] 등이 있고 고려사를 보면 우왕이 1387년에 김비(金鼻)의 집에 가서 딸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김비 역시 회회인, 즉 위구르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에 거주하는 위구르족들이 1279년에 충렬왕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고 충혜왕이 위구르족들에게서 베를 주고 그 이자를 취하였으며 소를 도축하여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6]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들도 찾아볼 수 있다.
예조에서 종묘에 배알한 뒤에 조하(朝賀)하는 의식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중략) 다음으로 승도(僧徒) 및 회회인(回回人)들이 뜰에 들어와 송축(頌祝)하고 끝나면, 판통례가 꿇어 엎디어 ‘예(禮)를 마쳤다. ’고 아뢰고, 통찬이 예를 마침을 창하면, 전하가 좌에서 내려오고 풍악이 울린다. 통찬이 ‘국궁하라.’ 창하여,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굽히고, 그 사이에 전하는 안으로 들어간다. 풍악이 그치고, 통찬이 ‘평신하라.’ 창하면 여러 관원이 모두 허리를 펴고 통례문은 문무 여러 관원들을 나누어 인도하여 차례로 나간다.
-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7일 갑술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왕세자와 문무의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의식대로 행하고,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서 조하(朝賀)를 받았다. 왜인·야인(野人)과 귀화(歸化)한 회회인(回回人)과 승인(僧人)·기로(耆老)들이 모두 조하에 참예하였다.
-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1월 1일 경인
예조에서 계하기를, "신부(新婦)가 시부모에 첫 인사를 드리는 날은, 오로지 기세를 보이기에만 힘을 써서 수레와 말과 종과 수종꾼이 찬란하게 문을 메우고, 술과 안주를 성대히 장만하여 이고 들고 가는 하인의 수가 30여 명에 이르며, 신랑집 역시 거기에 맞춰 치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 심히 많아서, 가난한 사람은 빚을 내기까지 하므로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이후로는 찬품(饌品)은 오성(五星) 두 가지, 떡 두 가지, 삼미탕수(三味湯水) 세 가지로 모두 일곱 쟁반에 불과하게 하고, 유모(乳母)는 1명, 시비(侍婢) 2명, 노자(奴子)는 10명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겠나이다."하고, 또 계하기를, "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 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 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4월 4일 임술

이렇게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걸쳐서 위구르족들이 한반도에 와서 거주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반도에 와서도 자신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지하며 예궁(禮宮)이라고 불리는 모스크를 짓고 조정에서 이슬람교 예배를 올리는 대조회송축을 거행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1427년에 예조에서 위구르족들의 의관이 조선 사람들과 이질적이라 조선 사람들이 위구르족과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이왕 조선에 와서 살기로 했으면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나중에는 억지로 조선 사회에 동화시켜 버렸다. 사실 명나라도 쇄국정책을 실시하며 이슬람을 탄압하는 바람에 조선에 상주하던 위구르인 공동체는 다른 위구르인들과 연락과 교통이 모두 끊어진 상황이었다. 어차피 몇 세대 이후에는 동화가 필연적이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그 과정을 좀 더 빠르게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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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현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해서 고대 신장 지역 주요 유물들을 일부 보관하고 있다. # 은연중에 현재 신장 지역을 지배중인 중국이 반환을 바라기는 하지만 일단은 무시하는 중. 세계 위구르 회의, 즉 동튀르키스탄 독립 망명정부도 '중국에게 돌려줘봐야 서북공정으로 써먹을 테니, 한국이 그냥 보관하길 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8, 2009년 기준으로 위구르인 유학생들이 한국에도 일부 있었으나 요즘은 위구르인들이 이태원 이슬람 사원에 예배 보러 오는 경우가 목격되지 않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위구르인은 10명 이하에 불과하다고 한다. #

2009년 세계 위구르 회의의 3대 대통령 돌쿤 이사의 대한민국 입국이 거부된 적이 있었다. #

반미 성향이 있는 한국 진보 언론에서조차 몇몇 친중 성향 언론인을 제외하면 중국의 위구르인 인권 탄압 및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견을 내는 편이다. 서북공정·서남공정…멈추지 않는 중국 ‘패권주의’ / 이이화 동북공정 사례나 중화권-위구르 관계에서 볼 수 있다시피 중국의 위구르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는 한국 입장에서 남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소문 끝에 한국에 머물다 현재 제3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 위구르인과 연락이 닿았다. 아흐마드(가명)는 2000년대 후반 한국에 처음 유학을 왔다. 한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을 좋아했다는 그도 처음엔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망설였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위구르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렵다"고도 했다. 그는 또 “이집트에서도 공부하고 있는 위구르 학생 일부가 중국의 압박 때문에 중국으로 돌려보내진 뒤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아흐마드의 가족 중 상당수는 중국 정부가 ‘직업교육 훈련센터’라 부르는 강제수용소에 들어간 뒤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아흐마드는 서면을 통해서는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했고, 이에 따라 취재진은 그에게 고향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족들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를 물었다.
엄마가 2017년경 수용소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공안한테 받았습니다. 엄마는 그 뒤로 연락이 없습니다. 아마 엄마가 거기 간 이유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하고 딸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엄마는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 60살이었고 몸이 안 좋아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왜 수용소에 갔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딱 하나, 우리는 위구르족이고 위구르족이 그 땅의 원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없애야만 하고, 우리를 없애야만 중국이 마음 놓고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짓도 안 하고 조용히 살아도 그냥 없는 죄를 만들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60살 넘은 우리 엄마가 그 나이에 무슨 죄를 얼마나 짓겠어요?
2018년 초에 친형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한테 연락을 준 사람은 제 누나였고요.. 누나한테 형이 무슨 이유로 왜 죽었는지 물어봤는데 그냥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으라고, 위챗(중국 메신저 앱) 에서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형 소식을 전달한 누나도 그 소식을 전달한 다음날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무소식이고요. 누나가 수용소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사촌동생한테 들었습니다. 누나 남편은 누나가 사라지기 훨씬 전에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누나한테 들었고요. 우리 가족들 중엔 형이 죽었고, 엄마, 누나, 형 와이프, 누나 남편이 수용소에 있고 친척들 중엔 제가 알기로 10명 넘게 수용소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명이 더 들어갔고 몇 명이 더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용소는 말이 수용소지 거기 들어갔다 나온 위구르인들은 나와서 며칠 안에 자살하거나 미쳤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겪어서 나오자마자 그렇게 돼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은 형과 누나도 다 자녀들이 있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아마 위구르 아이들만 모여있는 수용소에 가 있을 겁니다. 거기서 위구르 말을 못 하게 하고 한족 문화, 한족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겁니다. 나중에 커서 자기가 위구르족인지 한족인지 알 수 없겠죠.
위구르인으로서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한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한국을 좋아했습니다. 한국에 사는 동안 안 좋은 일도 없었고, 안 좋은 기억도 없었으니까요. 한국 정부가 우리 일에 침묵한 이유는 아마 한국이란 나라에 아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렇겠죠. 왜냐하면 한국이 중국하고 여러 비즈니스, 또 다른 일에 엮여 있고 우리를 받아준다면 중국하고 관계만 나빠지겠죠. 그게 아니라면 시리아 난민들을 많이 받아 줬다고 들었는데 우리를 왜 안 받아 줄까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은 세계 그 어떤 난민보다 훨씬 더 참혹한데 말이죠. 수많은 위구르인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있는데 각 나라는 위구르인들을 받아주는 것이 자기네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죠. 우리를 안 받아주면, 중국에 돌려보내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에요.
지금 저는 제3국으로 왔지만 그래도 한국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한국에 와서 난민신청을 하는 위구르인들을 안 받아 주더라도 중국에 돌려 보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중국에 돌려보내지 말고 다른 난민을 받아 주는 나라에 보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스스로 제3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회나 시간을 주든지 하면 좋겠습니다.”

2021년 월간조선에서는 워싱턴 D.C.의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 지도자 살리 후다야르와 인터뷰를 가졌다. #[7]

2월 26일, 세계 위구르 회의는 반기문 IOC 윤리위원장에게 베이징 동계올림픽 취소를 촉구했다. #

2022년 10월 6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권이사회 제51차 회기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발의한 신장위구르 인권 토의 결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 대한민국 외교부 관계자는 다음날 7일 “이번 결정의 내용과 성격, 보편적 가치와 규범 실현, 유엔의 권능에 대한 존중 필요성 등을 감안해 찬성했다”며 “규범에 바탕을 둔 국제질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외교부 “신장위구르 찬성 표결은 국익에 부합…중국과도 소통”

한국에 정착한 위구르인이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

2.4.1. 논란

한국 일부 친중 세력들 중에는 '한국에서의 이슬람공포증 역시 만만치 않은데 중국의 위구르 탄압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런 주장들은 네이버에 혐오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한국인 전반을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 이슬람공포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튀르키예가 6.25 전쟁 당시 파병한 것까지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할 정도로 이슬람혐오증에 눈이 먼 것도 아니다. 특정 소수민족들을 다짜고짜 수용소에 가두는 행위는 엄연히 인종차별, 심하면 제노사이드로 비판받을 행위인데 해당 물타기 주장은 이런 행위까지 진영 논리로 감싼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겠다. 이런 친중파들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르게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을 비판하는 것은 한국 보수 뿐만이 아니다. 한국 진보 언론 중 하나인 한겨레의 경우 오늘날보다 중국 정부의 위구르인 탄압과 박해가 훨씬 약했던 2000년대에도 중국의 위구르 소수민족 탄압을 비판하는 기사를 여러 차례 게시하였던 바 있다. 물론 2000년대의 위구르인들의 상황은 오늘날 수용소에서 고문, 강간을 당하는 상황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3. 여담

박지원 열하일기에는 위구르인들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자세하게 나와 있다. 박지원이 동튀르키스탄 지역까지 여행한 것은 아니고 일부 위구르인들이 몽골 팔기에 소속되어 북경에 주둔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합밀왕(哈密王)의 합밀은 투르판 분지 동부의 하미(쿠물)을 의미한다. 하미는 청나라가 준가르 칸국을 토벌하기 이전부터 청나라의 세력권 안에 있던 도시였다.
동직문(東直門)을 나서서 열하를 향하여 몇 리를 못 가서 북경의 교군 30여 명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발을 맞추어 간다. 그리고 회회국(回回國 이슬람 국가)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며, 눈은 푸르고, 머리와 수염이 억세게 났다. 그 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우며, 복색이 가장 화려하였다. 붉은 전립을 썼는데, 좌우 가장자리 끝을 말아 붙이고 앞뒤 가장자리는 뾰족하여 마치 아직 피지 않은 연 잎사귀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볼 때는 경망스러워 보기 우스웠다. 마두(馬頭)들은 추측만 하고 그를 회회국 태자(太子)라고 불렀다. 앞섰다 뒤섰다 작반을 해서 간 지 사나흘 동안 때로는 말 위에서 담배도 서로 나누어 피우곤 했는데, 그 행동이 꽤 공순하였다. 하루는 한낮이 되어 너무 덥기에 말에서 내려 도중 삿자리 가게 아래서 쉬고 있는데 두 사람이 뒤따라 와서 역시 말에서 내려 마주 대면하여 의자에 앉았다.
...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회흘(回紇)의 일명은 회골(回鶻)이다."하였고, 《원사(元史)》중에는 외올얼부[畏兀兒部]가 있는데 외올(畏兀)은 곧 회골이었고 회회는 또 회골의 변한 소리다. 또 《고려사(高麗史)》에,“원(元)의 사람이 고려 사람으로 하여금 외오얼[畏吾兒] 말을 가르쳤다.”하였으니, 외오얼은 또 외올(畏兀)의 변한 말이다. 합밀은 한(漢) 때에는 이오(伊吾)에 속한 땅이요, 당(唐)에 이르러서는 이주(伊州)에 속한 땅이다. 고려 말기에 설손(偰遜)이란 이가 곧 회골 사람으로서 원에 벼슬하다가 공주(公主)를 따라 동으로 와서 이내 고려에 벼슬을 하였고,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벼슬한 설장수(偰長壽)는 곧 설손의 손자이다.
- 열하일기 합밀왕(哈密王)편 / 박지원

4.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



[1] 선악주로 가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란 뜻인데 선악주는 오늘날 몽골 셀렝게 강 인근 지역을 말한다. [2] 소그드인들은 발해 당나라로 수출하는 무역에 종사했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당시 주요 군자금 출처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지원하는 소그드인 커뮤니티가 발해산 말을 매매하면서 얻은 수익이었다 한다. [3]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서 투르크어 사전을 편찬하며 볼가 강부터 타림 분지까지의 투르크어족 문학과 언어를 집대성한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위구르인은 아니었으나 위구르인들의 교육 시스템의 수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4] 쌍화가 위구르식 삼사 혹은 아랍식 삼부사를 음역했다는 가설도 있다. [5] 이 사람의 아들이 바로 설장수다. [6] 당시 고려는 채식을 장려하던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도축 기술이 쇠퇴해서 고기에 배변 냄새 등이 배는 경우가 많았으나 무슬림들이 도축한 고기는 좀 더 발전된 도축 기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었다. [7] 인터뷰에서 중국의 장기적출이나 터키의 중국 지원 등등 근거가 부족한 내용을 다소 과장해서 말하는 부분도 있으나 원래 종교나 민족, 인종을 떠나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정확한 피해상황이나 통계를 입수하기 힘들고 이에 따라서 이런이런 의혹이 있다 같은 주장도 피력할 수 밖에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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