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임오화변 壬午禍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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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1762년 7월 4일 (음력 윤5월 13일) |
발생 위치 | 조선 한성부 창경궁 휘령전[1] |
가해자 | 영조 이금, 노론 일부 |
피해자 | 사도세자 이훤(처형), 세손 이산, 혜경궁 홍씨, 윤숙, 임덕제, 서필보, 정중유, 엄홍복, 조재호, 가선, 박필수, 평양 기생 5명, 세자의 궁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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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
사도세자의 유언
영조 38년(
1762)
윤
5월 13일,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영원히[2]
서인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가두어 8일만에 굶겨 죽인 사건. 당시로서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비상식적인 재난이나 변괴를 뜻하는 '화변'(禍變)으로 명명되었다.사도세자의 유언
사실 조선 역사에서 왕이 자신의 친아들인 왕자를 죽인 것은 이 사건 이외에도 중종이 1533년 서장자인 복성군을 사사한 선례가 있긴 했다.[3] 복성군 사사도 심각한 일이었으나 임오화변과 비교하면 심각한 정도가 매우 다르다. 물론 동생 광해군이 동복 형 임해군을 사사한 것도 나름대로 충격적인 선례이긴 하지만 임해군은 조선 왕실 역사상 최악의 문제아라 어쩔 수가 없었다.[4] 굳이 임해군 사사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억지스러운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왕 혹은 왕위 계승자가 아들이나 형제를 죽이는 사례는 대개 자신 혹은 자신이 지목한 후계자의 경쟁자 제거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지만, 임금이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을 이토록 잔혹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사례는 조선 왕조 500년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5] 비견될 일이라면 루스 차르국의 이반 4세가 황태자 이반을 때려죽인 예가 있지만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경우가 조금 다르다. 춘추전국시대나 위진남북조시대 같은 난세의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임오화변에서 앞글자 임오는 임오년(壬午年)이며 화변(禍變)은 앞서 서술했다시피 재앙이나 재변을 말한다. 아무리 여러 사정이 있었다지만 아버지 임금이 아들 세자를 죽인 이 사건이 당대에부터 가히 재앙 수준으로 취급받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 전개
《영조실록》 영조 38년 윤5월 13일세자 시절의 후반부에 부자 관계가 파국에 치달으면서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 38년( 1762) 영조의 명에 기습적으로 폐서인되고 27세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한여름 뙤약볕 아래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8일 만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황은 이렇다. 윤 5월 13일 영조는 동궁(東宮)에서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와 동궁을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들도 모조리 자취를 감췄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사도세자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곁에 있던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학질에 걸렸으니 세손의 휘항(揮項)[6]을 달라."며 그것을 쓰고 영조에게 자신이 병이 있음을 어필하려고 했지만 혜경궁은 '(어린 아이라)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며 세자의 것을 가져왔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그토록 아끼는 세손의 휘항을 쓰고 나가 '내가 바로 당신이 그리 아끼는 손자의 아버지요!'라는 것을 내세워 살아 보려고 한 것이었겠지만 애초에 가망이 없었다. 크기뿐만 아니라 영조가 사도세자를 처분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배경이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이 있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어필해 봤자 영조 본인이 이미 아버지이면서 친자를 죽이려는 마당에 화만 돋구어 더 거친 언사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러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남겼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단순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의도를 그냥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영조는 급히 온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를 모신 선원전으로 갔다. 당시 영조는 평소에 만안문으로 자주 다녔고 흉한 일을 할 때만 경화문을 사용했다. 세자를 데리고 굳이 경화문을 통과했음은 흉한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영조는 창덕궁 선원전에서 절을 올린 뒤 다시 세자와 창경궁[7] 휘령전[8]으로 간 뒤 휘령전에 있던 정성왕후 서씨의 신위에 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했다. 직후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지간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이어 순식간에 시위군을 시켜서 여러 겹으로 전문을 막고 총관을 시켜 군사들을 배열하여 칼을 뽑고 궁의 담을 겨누게 했다. 영조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영의정 신만(申晩, 1703~1765)만이 겨우 들어 왔을 뿐이었다.분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다고 하고 《한중록》에 따르면 "아버님,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씀도 잘 들을 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라고 빌었지만[9] 영조는 요지부동으로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하였다. 놀란 세자는 울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영조는 차갑게 거절하면서 당장 자결하라고 화를 내며 매섭게 하자 견디다 못한 세자는 끝내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세자의 스승 임덕제(林德躋, 1722~1774)와 춘방[10]의 신하들이 달려와서 칼을 치우며 이를 막은 다음 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영조한테 간언했다. 영조는 세자의 자결 시도가 임덕제와 춘방의 신하들 때문에 실패하자 그들에게 크게 화를 내며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바로 내리고 군병들을 시켜서 세자 폐위에 반대하며 세자를 변호하는 춘방의 신하들을 내쫓으며 임덕제에게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이 있겠는가?"라며[11] 역시 붙들어 내보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울부짖었고 임덕제도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면서 끝까지 세자를 변호했으나 그를 끌어내라는 영조의 명이 서슬퍼런지라 결국 군병들에게 끌려나갔기 때문에 이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임덕제는 끌려나간 뒤에도 세자를 구하려고 직접 세손을 업고 와서 세손과 함께 영조한테 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간언했지만 이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영조한테 밉보여 파면되고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나중에 유배가 풀리고 1763년 함평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재직 중이던 1774년에 사망했는데, 1783년 임덕제를 정조가 예조판서로 추증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임덕제 외에도 몇몇 관료들이 영조의 화를 풀기 위해 세손을 데려왔으나 모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2.1. 뒤주에 들어가다
세자를 폐(廢)하는 반교문(頒敎文)
왕(上)은 이르노라, 세자의 광패(狂狽)함이 전에 없던 일이라 종사(종묘사직)를 위하여 어찌 한번 깨우쳐주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노심초사하는 것은 내가 세자를 자애(慈愛)하는 뜻이다. 지금 만고에 없는 윤상(倫常)의 변고를 당하여 오늘 휘령전에 이미 패악한 아들 모(某)를 우선 안에 엄중히 가두고 세자의 직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전교를 아뢰었다. 그 본래의 일이야 중외에서 어찌 알겠는가. 한건의 글을 내려 널리 반포하노라.
아! 모(某)가 광패(狂狽)하여 밤낮으로 종사(宗社)와 백성(百性)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나와는 부자의 윤리가 있으니 생각해보면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지금 영빈(세자의 생모)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환관, 나인, 노비 등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12]이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참혹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刑具)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것으로 수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長番, 교대없이 장기근무)하는 내관을 내쫓고 어린 환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어울리며 궁중의 물품을 두루 나눠주었습니다. 이 무리는 기생, 승려들과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일삼았으며, 제 시종들을 불러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근자에는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을 꾸미는 것이 심해져 한번 아뢰고자 하였으나 모자 간의 은정(恩情)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분(憤)을 묻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중드는 사람에게 머리를 풀고 날카로운 칼을 옆에 두게 하여 예측할수 없는 일을 행하려 하였습니다. 지난번 창덕궁에 갔을 때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모면하였습니다. 제 한몸이야 비록 돌아볼 것이 없다 해도 우러러 생각건대 주상의 옥체야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저번 어문의 노상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마음 속으로 기원하기를
'주상의 옥체가 평안하다면 3일 안에 비가 내릴 것이고, 패악한 아들이 뜻을 얻게 되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과연 비가 내리니 이로부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옥체(玉體)의 위기가 경각에 달렸으니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아뢰지 않겠으며 이러한 때 어찌 화평(和平)한 모습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빈은 말을 마치고 비 오듯 눈물을 계속 흘렸다. 아. 저 푸른 하늘이 나로 하여금 모면하게 하고자 이러한 거둥이 있게 하였고 이러한 말을 듣게 되었는데, 오늘 행차함에 일의 기미가 먼저 새어나갔다. 아. 말로 하기 어려운 변고(變苦)가 있어서 기우제를 핑계하고 이곳에 오게 된 일을 휘령전에 이미 상세하게 아뢰었다. 아! 백발의 늙은이가 말년에 지난 역사에 없던 일을 만났으니, 무슨 얼굴로 절을 하겠는가. 비록 미쳤다고 하나 종사와 백성을 위해 어찌 처분을 내리지 않으리오. 내가 친히 반교문(頒敎文)을 쓰고 눈물로 적삼을 적시며 휘령전으로 온 것은 이 처분을 또한 정성왕후와 함께 한다는 뜻이다.
아! 이미 내린 처분은 일종의 호령(號令)의 일이다. 여러 신하는 낙선당의 일을 보지 않았는가. 이 때문에 세자를 안에 엄히 가두게 한 것이다. 생각이 엄중한 곳에 미치니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아! 대리청정 14년 만에 부득이하게 정사에 복귀하며 초심을 돌아보니 눈물을 삼키며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명하였을 때 널리 알리지 않아 지금 다시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일체의 내용을 온 나라에 알려 모두 알게 하라.
왕(上)은 이르노라, 세자의 광패(狂狽)함이 전에 없던 일이라 종사(종묘사직)를 위하여 어찌 한번 깨우쳐주려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여전히 노심초사하는 것은 내가 세자를 자애(慈愛)하는 뜻이다. 지금 만고에 없는 윤상(倫常)의 변고를 당하여 오늘 휘령전에 이미 패악한 아들 모(某)를 우선 안에 엄중히 가두고 세자의 직위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전교를 아뢰었다. 그 본래의 일이야 중외에서 어찌 알겠는가. 한건의 글을 내려 널리 반포하노라.
아! 모(某)가 광패(狂狽)하여 밤낮으로 종사(宗社)와 백성(百性)을 위해 노심초사하였다. 나와는 부자의 윤리가 있으니 생각해보면 어찌하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지금 영빈(세자의 생모)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세자가 환관, 나인, 노비 등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12]이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참혹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刑具)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것으로 수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長番, 교대없이 장기근무)하는 내관을 내쫓고 어린 환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어울리며 궁중의 물품을 두루 나눠주었습니다. 이 무리는 기생, 승려들과 밤낮으로 음란한 짓을 일삼았으며, 제 시종들을 불러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근자에는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을 꾸미는 것이 심해져 한번 아뢰고자 하였으나 모자 간의 은정(恩情)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요즘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분(憤)을 묻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중드는 사람에게 머리를 풀고 날카로운 칼을 옆에 두게 하여 예측할수 없는 일을 행하려 하였습니다. 지난번 창덕궁에 갔을 때 거의 죽을 뻔하였다가 가까스로 모면하였습니다. 제 한몸이야 비록 돌아볼 것이 없다 해도 우러러 생각건대 주상의 옥체야 어찌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저번 어문의 노상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마음 속으로 기원하기를
'주상의 옥체가 평안하다면 3일 안에 비가 내릴 것이고, 패악한 아들이 뜻을 얻게 되면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과연 비가 내리니 이로부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옥체(玉體)의 위기가 경각에 달렸으니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아뢰지 않겠으며 이러한 때 어찌 화평(和平)한 모습으로 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빈은 말을 마치고 비 오듯 눈물을 계속 흘렸다. 아. 저 푸른 하늘이 나로 하여금 모면하게 하고자 이러한 거둥이 있게 하였고 이러한 말을 듣게 되었는데, 오늘 행차함에 일의 기미가 먼저 새어나갔다. 아. 말로 하기 어려운 변고(變苦)가 있어서 기우제를 핑계하고 이곳에 오게 된 일을 휘령전에 이미 상세하게 아뢰었다. 아! 백발의 늙은이가 말년에 지난 역사에 없던 일을 만났으니, 무슨 얼굴로 절을 하겠는가. 비록 미쳤다고 하나 종사와 백성을 위해 어찌 처분을 내리지 않으리오. 내가 친히 반교문(頒敎文)을 쓰고 눈물로 적삼을 적시며 휘령전으로 온 것은 이 처분을 또한 정성왕후와 함께 한다는 뜻이다.
아! 이미 내린 처분은 일종의 호령(號令)의 일이다. 여러 신하는 낙선당의 일을 보지 않았는가. 이 때문에 세자를 안에 엄히 가두게 한 것이다. 생각이 엄중한 곳에 미치니 온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아! 대리청정 14년 만에 부득이하게 정사에 복귀하며 초심을 돌아보니 눈물을 삼키며 탄식하게 된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명하였을 때 널리 알리지 않아 지금 다시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일체의 내용을 온 나라에 알려 모두 알게 하라.
세자가 춘방의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으니 사서 임성(任晠, 1713~?)이 "다시 전정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세자는 곡(哭)하면서 엎드려서 개과천선하겠노라 호소했지만 영조는 이번에도 차갑게 거절하며 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영빈의 말을 옮기면서 세자를 죽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1708~1764)[13]은 "전하께서는 어찌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을 듣고 국본(國本)[14]을 해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하자 영조는 격노하여 도승지를 처벌하라 명했다가 곧 거두었다.
그 외에도 한림 윤숙(尹塾, 1734~1797)이 홍봉한을 면전에서 비난하고 울부짖은 일로 다음날 전라도 해남으로 귀양을 떠났다. 윤숙일기, 이광현일기 등에 따르면 윤숙은 대신들에게 너희같은 대신들을 대체 어디에 쓰겠냐고 울부짖으면서 비난했고 임덕제는 대신들보고 애비도 없는 놈들이라고 울부짖었다. 이광현도 대신들에게 세자를 위해서 뭐라도 좀 하라고 독촉했으나 윤숙, 임덕제와 달리 공손한 어조로 요청한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두 사람과 다르게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어서 영조는 세자를 끝내 뒤주에 가두었다. 세자를 가둘 뒤주는 밧소주방에서 가져왔고 뒤주에 가두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후술할 혜경궁의 기록으로 보아 세자는 큰 저항 없이 들어간 것 같다. 혜경궁은 세자가 '대 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절부절못하다 오후 3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칼로 두 차례나 자결하려고 했으나 주위에서 말리며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혜경궁은 세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으나 근위병들의 제지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슬피 울었다.
이후 혜경궁은 '죄인의 아내로서 궁에 있을 수 없으니 친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내시에게 시켜 영조에게 보내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잠시 후에 혜경궁의 오빠 홍낙인이 찾아와서 동생 혜경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 동궁(東宮)을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嬪宮, 세자빈)도 더 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15]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혜경궁도 통곡했다.
영조는 세손과 혜경궁을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도록 조치한 다음 밤이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 명령을 널리 반포하여 알림)하였는데 이는 사관이 차마 꺼려서 감히 쓰지 못했다. 사관은 그 전교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들 세자를 며칠 있으면 용서하고 풀어주리라 생각했는지 근위병들은 그리 엄격히 감시하지 않았다. 특히 세자는 갇힌 지 얼마 안 되어 근위병들이 뒤주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뒤주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다가 영조가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뒤주에 강제로 돌아갔고 궁인들이 찾아와 세자에게 제호탕[16]과 음식, 부채를 주자 세자가 이를 먹었다. 하지만 영조는 이를 알게 되자 오히려 격노하여 뒤주를 꽁꽁 묶어버리라고 명령했고 이때부터 세자는 정말로 갇혔는데 뒤주 위에는 빛과 물이 새지 않게 떼[17]를 덮었다고 한다.
《대천록》에선 이를 홍인한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고 《임오일기》에선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 서술했다.
그다음엔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을 시켜서 뒤주를 지키게 했고 세자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서 말을 걸게 했다. 세자가 누군지 묻자 구선복이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고 세자는 어찌 직함은 말하지 않느냐고 꾸짖어 구선복은 그제서야 자신의 직함까지 말했다. 일설에 따르면 구선복과 병사들은 뒤주 옆에서 오줌을 싸고서 밥을 먹고 술과 떡을 먹으며 방자하게 굴었고 세자에게 " 좀 줄까?"하고 물으며 놀렸다고 하지만 정말로 이런 일을 벌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18][19]
2.2. 8일 만의 죽음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뒤주를 둔 창경궁에서 머무르며 하루에 한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째 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인들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대답했다."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
다만 세자는 전날에 이미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 뒤주를 열고 시신을 확인한 시점이 8일째였을 가능성이 크다. 사후 뒤주를 열어보니 사도세자가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이때 영조는 세자의 측근들까지 가차없이 처벌했는데 윤5월 14일에 세자의 측근들인 여승 가선과 환자 박필수, 평양 기생 5명을 세자를 타락(墮落)시킨 죄로 처형했고 홍봉한, 신만, 김성응(金聖應, 1699 ~ 1764) 등이 주청하여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도 유배했다. 윤숙과 임덕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에 울부짖으면서 홍봉한 등을 꾸짖어 거조를 잃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이후 선인문 앞에서 세자의 개인 물건들을 태우라고 지시했는데 여기서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戲嬉奇怪之物]" 등이 나와 영조가 분노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윤 5월 15일 영조는 공식적으로 세자를 폐서인한다고 공포하며 같은 날 서필보(徐必普), 정중유(鄭重維) 등을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했다. 이후에도 엄홍복(嚴弘福, 1718 ~ 1762), 조재호(趙載浩, 1702 ~ 1762)[20] 등을 각각 처형/유배형에 처하고 세자의 궁노들을 민가에 폐단을 끼친 죄로 다스렸다.
결국 윤 5월 21일에 세자가 숨을 거두자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의 위호(位號, 신원)를 회복시켜 주었다. 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영조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혜와 의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21]은 하지 말고 오모(烏帽)·참포(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1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22]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흔히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23] 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 있는 8일 동안 평소대로 수라를 받고 정무를 보았다고 한다.
시호 자체는 영조의 심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이 시호(諡號)를 정하는 시법(諡法)을 따른 것이다.
追悔前過曰思. 思而能改.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이전의 과오를 뉘우쳤을 때는 사(思)로 한다. '사'(思)는 (그런 과오를) 능히 고친 것이다.
年中早夭曰悼. 年不稱誌.
(연중조요왈도. 연불칭지)
연중[24]에 일찍 죽었을 때는 도(悼)로 한다. 그 해가 아니라면 칭하거나 부를 수 없다.
(추회전과왈사. 사이능개)
이전의 과오를 뉘우쳤을 때는 사(思)로 한다. '사'(思)는 (그런 과오를) 능히 고친 것이다.
年中早夭曰悼. 年不稱誌.
(연중조요왈도. 연불칭지)
연중[24]에 일찍 죽었을 때는 도(悼)로 한다. 그 해가 아니라면 칭하거나 부를 수 없다.
즉, 영조는 세자가 죽음으로써 과오를 뉘우쳤다고 판단했고 세자가 죽은 때가 한여름인 윤 5월 21일( 1762년 7월 4일)인 데다 죽을 때 나이가 28세(만 27세)로 젊었기 때문에 딱 걸맞은 시호를 내렸을 따름이다.
윤 5월 25일에는 세손이 영조에게 문안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분(處分)한 후에 답이 없었으니, 네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한쪽 청구(靑丘)[25]에 단지 나와 너뿐이니 인사(人事)를 닦아 너를 돕겠다는 자를 너는 모름지기 물리치고 네
할아버지를 생각하여 마음을 편히 해 잘 조처(助處)하라.
즉 이 하교는 '이 세상에 네가 믿을 것은 나 뿐이니, 너를 돕겠다고 아첨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사리에 맞게 판단하라'는 뜻이다.
다만 《실록》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뒤주에 물이나 음식 등이 들어갈 틈이 있으면 영조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음을 근거로 들어 뒤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고 실제로는 세자를 골방에 가두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도 있다. 《실록》에는 굶겼다는 말도 없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고만 적었지만 《실록》 말고 무수한 기록이 뒤주에 가뒀다고 적었고 후에 홍봉한도 '뒤주를 바친 죄'를 운운했으며[26] 세자가 들어갈 수 있는 뒤주를 찾기 위해 밧소주방을 뒤졌다는 기록도 《 한중록》에 있으니 억측이다. 게다가 처음 감시가 설렁해서 세자가 밖을 배회하고 음식물도 받아먹었고 영조가 이에 격노하여 뒤주를 묶어버리고 구선복을 시켜 지키게 했단 기록으로 앞의 의문은 설명된다.
3. 해석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약이나 교형이 아닌 뒤주에 가둬서 죽인 이유는 세손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로 영조가 세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이고 처음에 영조가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한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약이나 교형은 엄연히 죄인에게 내리는 공식적인 형벌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세손을 후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이 바로 왕위에 오르면 세자가 임금의 생부로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를 노릇이니 영조 입장에서 연산군과 같은 미치광이 폭군을 만들지 않으려면 반드시 세자를 죽여야만 했다.그런데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로 죽는다면 세손(훗날의 정조)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모든 자식들은 죄인의 자손으로서 정통성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왕위계승자가 사라지므로 인조(4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왕족을 찾아 왕을 옹립해야 할 상황이 된다. 원래 왕족도 9촌이 넘어가면 왕족의 지위가 사라지기 때문에[27] 이씨 왕조는 이어진다 쳐도 효종으로부터 이어온 왕권의 혈연적 정통성이 많이 뒤흔들릴 게 너무나 뻔하였다.
즉 세손의 정통성을 다지려면, 사도세자는 “공식적인 형벌이 아니면서 죽음에 의문이 남아서도 안 되는“ 방법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상술했지만 형벌로 죽이면 사도세자 및 그 자손은 죄인의 자식이 되어 보위에 오를 수 없었고, 그렇다고 조용히 처리한다고 독살이나 사고사로 죽여 죽음에 의문이 생겼다면 세손의 정통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나이는 28세로 젊어, 병으로 인한 급사를 바랄 형국이 아니기도 했다.
거기에 독살이나 사고사로 위장해 죽여 일국의 왕세자가 의문사한다? 당연히 당시 노론 및 소론의 정치다툼 및 왕세자의 불안정성을 말미암아 혼란이 올 것이 명약관화했다. 또한 차후에 배후로 영조가 시킨 짓임이 밝혀진다면 이후 세손의 정통성과 영조 본인의 명분도 훼손될 것이 분명했다. 사실만 늘어놓고 보면 “아비가 손자를 사랑해 보위에 올리려고 잘못없는 아들을 비겁하게 암수를 써 죽이고 손자를 왕위에 앉힌다“는 천하의 막장 스토리가 탄생한다. 이러면 사도세자를 죽인 의미가 사라지고 조선 왕실의 정통성의 근간부터가 흔들린다.
당장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 본인부터가 형인 경종이 병사하는 과정에서 올린 식사와 약 처방으로 인해 정통성에 훼손이 생겼고, 그로 인해 나주 괘서 사건과 이인좌의 난 등 숱한 혼란에 심지어 반란까지도 맞서야 했음을 상기해 보자. 당시의 연잉군 역시 왕세제였고 경종에겐 장성한 자식이 없어 유일한 대안인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혼란이 불거졌는데 사도세자가 독살이나 사고사 등 의문사로 죽고 아직 어린아이였던 세손만 남겨진다? 그럼 영조가 즉위할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의구심과 이로 말미암은 혼란이 올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이 과정에서 대규모 옥사가 벌어질 가능성도 컸고, 정조도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사실이든 아니든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차기 계승 예정자인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자“로서 정통성이 흔들려 왕권을 다잡기 위해 반대파를 숙청해야 했을 것이며 이로 인래 조선 왕실이 혼란해질 가능성이 컸다. 정조가 아니더라도 의심받을 외척 세력이나 사도의 반대파 등 갖다 붙일 명분은 충분했기 때문. 그리고 굳이 정조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아니더라도 왕세자인 사도의 죽음으로 인란 정치적 논쟁과 왈가왈부는 또 다른 사건이나 역모를 불러올 공산이 있었다. 당장 인조와 소현세자를 생각해보자.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혼란이 벌여졌고, 이는 이후 조선 최대의 당파 갈등 중 하나인 예송논쟁로 번졌다. 그만큼이나 차기 계승 0순위인 왕세자가 가지는 영향은 컸고, 그 왕세자의 죽음은 왕조의 정통성 시비로 번지기 쉬웠다. 특히나 그 죽음의 원인이 자연사가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했고 신하들이 반대하여 실패하자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임으로써 법적인 형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아들을 훈계하다 벌어진 사고사 정도로 처리하려고 한 것이다. 세자에게 내린 시호 중 '사'(思) 자는 영조가 대외적으로는 '비뚤어진 아들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이라는 뜻을 전하려고 했다는 한 가지 증거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 세자는 칼을 들고 수구(수로 입구)를 통해 경희궁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 소문이 퍼지고 영빈 이씨가 이를 공론화하여 '대처분'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세자가 공식적인 형벌을 받고 죽으면 세손을 비롯한 왕손들은 단순한 죄가 아닌 역모죄에 연좌될 수가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왜 죽였는지는 조선 역사상 최고의 논쟁거리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도 여러모로 엇갈린다.[28][29]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게 된 이유는 사관들이 끌려나가는 바람에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매우 간략하게만 적혀 있으며[30] 당시 상황을 가장 잘 기록했을 《 승정원일기》를 세손 시절 정조가 영조에게 요청하여 파기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세손은 《승정원일기》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 혹은 누가 봐도 강상죄 및 반역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행동들이 그대로 담겼기 때문에 폐기해달라고 영조에게 청했다 한다.
정조도 자신의 일기인 《 일성록》을 임오화변 전후를 포함해 두 달 이상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정확한 상황이나 정조의 심정도 파악하기 힘들다.
즉, 사건의 원인을 차치하고라도, 정리하자면 군주가 아들이자 왕세자를 뒤주에 넣어 숨지게 한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조건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1. 영조는 사도세자 대신 세손인 정조를 왕위에 올리려 했다.
- 영조에게 다른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세손을 택할 것도 없이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웠던 것 처럼 폐세자하고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면 그만이었지만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다른 아들도 없는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했다. 이것이 만일 가능했다면 사도가 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사도의 자식이 아니라면 효종 대로 올라가야 했는데, 과연 엄연한 적통의 왕세자를 두고 효종 대까지 올라가서 이미 왕위 계승 법통에서 멀어진 종친을 뜬금없이 내세운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었다.
2. 세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생부인 사도세자가 살아 있을 경우, 왕권에 혼란이 올 것이다. 따라서 1이 결정된 순간 왕위를 위협할 사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다.
- 대원군으로 사도세자가 살아있거나 한 경우, 세손이 왕위에 오를 때는 미성년이 가까울 것이고 사도세자는 이미 완숙하고 노련한 3~40대의 한창 때이므로 왕권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당장 단종과 세조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세손인 정조는 14년 뒤인 1776년에 2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데,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1762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그의 나이는 41세였다.[31] 물론 40대의 나이면 조선 기준으론 적지 않은 나이긴 하나,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고 국정에 개입한지 30년은 되었을 상황이라 세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강했을 것이다.
3. 거기에 세손의 즉위를 위해서,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기엔 부적합하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합리적인 이유로 말미암아 세자를 제거해야 했다. 즉 세자를 제거한다 + 세손을 올린다가 함께 이뤄져야 하는 것. 영조 본인만이 이를 감행할 수 있었다.
- 무작정 폐세자를 한다면 이미 영조의 나이가 노년에 다다른 이상 강한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컸고, 설사 폐세자만 하더라도 살아있으면 세손의 통치기 내내 위협이 될 공산이 크다. 거기에 영조가 손을 쓰지 않으면 정조의 경우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데 이러면 조선의 근본 이념인 유교 사상이 뿌리채 흔들릴 것이었다.
4. 그렇다고 해서 사도세자가 죄인으로서 공식적인 문초를 받고 처벌되며 죽어서는 안 됐다. 죄인의 자식은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세손의 정통성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5.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의 과정에는 한 치의 이의 내지는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암살이나 사고사로 위장 등 사도의 죽음에 석연찮은 점이 남을 경우, 세손의 즉위 이후에도 계속 의문으로 남아 왕권을 위협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 당장 영조 본인부터가 형인 경종의 죽음 과정에서 의문이 남아 즉위 내내 이에 시달렸다. 나주 괘서 사건이나 이인좌의 난 등이 대표적.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세손을 택한 명분이 훼손되며, 세손 역시 즉위 내내 왕권을 다지기 위한 숙청을 지속해야 할 것이었다.
- 그렇기에 영조는 사도세자의 자결 혹은 훈계 중 사고사라는 방법으로 그를 죽여야 했고, 이에 대한 의문을 차단하기 위해 훈계를 한다는 명목으로 군주이자 아버지로서 조정의 온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분을 단행해 죽음의 과정에 의문을 남기지 않았으며, 폐세자 및 사후에 걸쳐 교서를 내려 세자는 죽어야 했고 이는 군주이자 아버지인 영조 자신의 결정임을 명명백백히 밝혀 논쟁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
위의 다섯 가지를 고려하면 결국 사도세자를 죽이긴 해야 하는데 몰래 죽일 수도, 형벌로 죽일 수도 없었다. 그만큼 왕의 적자로서 왕세자의 지위는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버지이자 군주인 영조마저도 쉬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왕세자라는 그 자리 때문에, 사도세자는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3.1. 노론의 음모인가?
사도세자의 정신병 편력이 널리 알려지기 전까지 과거 가장 보편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가설은 화변이 노론의 음모라는 것이었다. 정순왕후 김씨와 김귀주, 홍봉한 등 노론들이 사도세자가 친소론임을 두려워해 모함해 죽였다는 것이다.[32]이는 과거 훌륭한 임금에게 인격적 결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구태의연한 편견, 이런 대형 사건에는 반드시 정치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 그리고 정조가 사도세자를 띄우기 위해 왜곡한 사료인 현륭원 지문이 한때 한중록보다 신뢰성 있는 사료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인데 현륭원 지문에는 사도세자가 역적들을 막으려고 한 뛰어난 세자로 나오지만 아들 정조의 눈물어린 왜곡에 불과하다. 가령 정조는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사도세자가 역모를 막기 위해 떨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도세자를 수행한 군관 일기 등을 보면 그냥 명승지 돌아보면서 술먹고 놀았다. 즉 당대 비판처럼 그냥 논 것이 맞았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다는 연구는 의외로 60년대부터 있었으나 학계간 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과거의 한계로 인해서 사학계에서는 이런 의학계의 연구를 수용하지 못했고 한중록에 대한 의심도 다른 사료에 대한 의심에 비해서 과하게 계속되었다.
사도세자가 노론 때문에 죽었다는 설은 이덕일 등이 현대 들어 주장해 온 것은 아니고 조선 후기부터 있었다. 아무래도 '세자가 미쳐서 자결시켰다'는 적나라한 내용보다는 '일부 신하들이 음모를 꾸며 왕의 눈을 흐리게 했다'는 주장이 왕가 체면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영•정조 시절에 소론이 공격한 대상은 노론 벽파였고 홍봉한에게는 우호적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도 1960년대부터 이은순 교수 등이 노론 주도설을 주장하였지만 그런 주장들은 《사도세자 행장》이나 《 한중록》 등에 의존했을 뿐이라 《 조선왕조실록》까지 참조한 후대의 주장들에 비해서 설득력이 약하다. 심지어 이은순 교수조차도 논문에서 자신의 주장은 한 가지 가정적 추론일 뿐 직접적인 근거가 없고 더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고 명시했다. 노론 음모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두 친노론, 식민사학적 시각으로 몰아붙이며 매도하는 사람은 이덕일 정도다.
노론 음모론은 결정적으로 근거가 희박하다. 우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근거로 제기되는 점들은 다음과 같다.
- 어렸을 때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그의 궁인이 되어서 소론에 유리한 얘기를 했다는 것.
- 나주 벽서 사건 등에서 소론을 처벌하기를 거부했다는 것.
-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소론 조재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
하지만 세자가 가장 믿었던 사람은 소론 세력이 아니라 노론이었던 장인 홍봉한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비밀도 장인에겐 이야기했다. 세자를 친소론으로 유도했다고 여겨지는 경종의 궁인들은 사도세자가 7세일 때 쫓겨났다. 그들이 세자에게 공부보단 놀이와 무예를 더 좋아하게 했다는 죄는 있었지만 만약 그들이 친소론적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10여 년 뒤에 갑자기 세자가 친소론이 되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까? 애당초 그들이 세자에게 친소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소론을 편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이인좌의 난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사도세자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 세자는 대리청정을 할 때도 "알았다", "안 된다", "대조께 아뢰어 처리하겠다." 정도의 대답만 했다. 허울뿐인 대리청정이었다. 이런 일처리도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조가 크게 화를 냈기 때문에 세자가 독단적으로 뭔가를 할 수 없었다. 종사와 관계없는 사소한 일만 해도 그랬고 사법권(역모와 형벌에 관한 문제)은 아예 영조가 전담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배신감을 느끼던 상황에서도 이광좌 등 소론 계열 인사들을 보호했고 훗날 심정연(沈鼎衍, ? ~ 1755) 등이 시험장 테러를 했을 때도 박문수를 비롯한 소론 신하들을 매우 신뢰하였다.[33]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역적에 대해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에 거스르는 결정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바보가 아닌 이상 예상하고도 남는다.《실록》에서 소론의 처벌에 대해 "불허한다"는 말만 했던 세자이지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세자는 자기 판단이 아니라 영조의 뜻을 따랐다고 봐야 한다.
죽기 직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그의 장인어른 홍봉한이 사위를 포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가 기댈 곳은 조재호뿐이었다. 정병설 교수는 세자가 조재호를 불렀으므로 세자가 친소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세자가 친소론이라서가 아니라 홍봉한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소론과 조재호뿐이었다는 것이다. 조재호는 효장세자의 장인이며 효순왕후의 친정아버지고 조현명의 형이었던 조문명의 아들로, 효장세자와 조문명, 조현명 부자 모두 영조가 아꼈던 인물이였다. 앞서 말한 휘항처럼 세자는 영조가 아꼈던 인물의 핏줄에 기대 영조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고 보는게 옮음직하다.
솔직히 이건 음모론 수준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세자가 친소론이었다고 한들 신하들이 임금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궁지에 몰아넣고자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조선 같은 전제군주정 국가에서 왕의 유일한 후계자를 모함하는 미친 짓은 자살보다도 더한 짓이다. 만약 실패하면 사실상 역모로 취급되어 자신만이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몰락한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신하들이 세자를 모함했다는건 말이 안된다는걸 알 수 있는데 영조가 직접 자기 자손들을 다 박살내고 생판 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지 않는 이상 결국 왕위는 영조의 후손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당시 살아 있는 영조의 자손들이 전부 사도세자 아니면 그 자식들이었다는 점이다. 영조의 다른 아들이었던 효장세자는 사도세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10살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후손이 없었다.
즉 사도세자를 모함해서 몰아내봤자 왕위는 사도세자의 적자 정조나 사도세자의 서자들(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에게 간다. 결국 이들 중 하나에게 보복당할 미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영조에게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외에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그리로 왕위를 넘겼거나 세손을 입적시키는 등 다른 방도가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았고 결국 세손을 보위에 올리기로 마음먹은 순간, 사도세자는 세손의 장애물로서 제거될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숙종 말기에 당파 싸움의 일환에서 일종의 택군 현상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숙종의 장성한 아들이 경종과 영조 두 명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지지하는 당파와 영조를 지지하는 당파가 갈라진 것이다. 그런데 영조에게는 살아 있는 아들이 세자뿐이고 세자는 영조가 42세에 겨우 얻은 늦둥이였다. 영조가 계비를 들인다고 해도 새 왕자를 얻을 가능성은 별로 없고 실제로 영조의 정비/계비 소생 자녀는 없다. 그런데 왕의 유일한 후계자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지금 당장 신나게 세자를 핍박해서 영조의 신임을 얻는다고 치더라도 그 뒤는 어쩌는가? 훗날 세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말 그대로 모든 게 망하기 때문에 상식적이라면 세자에게 아부를 해서 그제서라도 세자의 눈에 들어서 반대파를 몰아낼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 시기 영조의 나이는 당시로선 상당히 고령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조의 어진은 51세 때 모습이다. 이미 그때 흰 수염이 치렁치렁했고 사도세자가 사망했을 때에 영조는 69세였다. 태조를 제외하면 이미 당시 기준으로 역대 임금 중 폐위된 광해군을 뛰어넘고 70대까지 살았던 태조의 뒤를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한 상태였으며 태조가 62세로 퇴위했던 것을 감안하면 살아있는 임금 중에선 누구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상황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수명이나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46세)으로 본다면 (솔직히 지금 상황으로 보아도) 충분히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34][35]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때 영조는 55세였다. 조정 입장에서는 영조의 죽음 이후를 생각할 만한 때였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옹주들마저 사도세자의 눈치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노론 입장에선 상식이 있다면 세자를 모함하는게 아니라 어떻게든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대신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온 조정이 계속 영조에게 세자를 너무 엄격히 대하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특히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은 대놓고 "세자 저하가 잘 하시는데 왜 자꾸 갈굽니까?"라고 했고 김재로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 대신들도 영조가 세자를 갈굴 때마다 말리며 세자를 거들었다. 후일 세자의 원수라고 선포된 홍계희나 김상로(金尙魯:1702~1766)조차도 세자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벌 받은 적이 있다.
이간질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김상로는 영조가 '세자가 자신을 1년이나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하자 그런 일이 있었냐고 하면서 잘 타이르면 세자 저하가 다신 안 그럴 거라고 오히려 세자를 옹호했으며 홍봉한은 사위인 세자의 비행을 나경언의 고변 때까지는 숨겼다. 나경언의 고변 때 영조가 직접 한 말을 상기해 보자.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한 사람도 내게 고한 이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세자를 비호했던 신하 중엔 영조가 후에 세손의 원수라고 했던 김상로도 있었다.[36] 세자가 죽을 무렵 김상로는 세자를 옹호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홍봉한은 영조가 이후 매번 이 일 때문에 화를 내며 그를 파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등용했다.
풍산 홍씨 가문(북당)과 경주 김씨 가문(남당)은 당파만 같은 노론일 뿐이지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거린 철천지 원수였다. 영조 시절 은언군 사건 때 김귀주는 정후겸과 연합해서 홍봉한을 역모로 공격하고 한유(韓鍮)를 사주해서 공격하는 등[37] 결국 홍봉한을 실각시켰다. 정조의 즉위 후에도 줄곧 홍봉한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정조가 세손 시절 홍봉한을 죽이기 위해 자신까지 위협에 빠뜨렸다며 정조의 명으로 도리어 귀양을 떠났다.
게다가 사도세자 생전의 평양 서행 때도 김귀주는 이를 막지 못하고 감춘 홍봉한과 정휘량(鄭翬良,1706 ~ 1762)을 공격하는 상소를 밀봉해서 영조에게 올렸을 정도로 이미 사도세자 생전부터 두 가문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이 밀봉 상소 이야기는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 8년 《실록》에서도 정조가 잠깐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이좋게 손잡고 세자를 제거했을까? 정상적으로 보자면 서로가 세자의 진정한 보호자라고 자처하여 세자에게 붙으려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두 가문은 서로가 세손, 즉 정조의 보호자라고 자처했다.[38] 굳이 따지자면 세자를 보호하려고 세자의 비행을 감춰주다가 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에게 걸려서 자신들까지 작살나게 생기자 당장 영조에게 죽을 판이라서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합세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기랑 친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자를 없앤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노론이 명백히 친소론 임금인 경종을 세자 시절에 해코지하려고 숙종과 결탁한 사례나 소론 준론이 친노론 임금인 영조를 없애기 위해 위의 김씨 성의 궁인을 찾는 옥사를 확대하라고 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도 세자를 직접 공격하지도 비방하지도 않는 형태로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세제가 명목상 반역 수괴였다던지 하는 명분이라도 나름대로 있었다.
반면 친소론이라는 증거도 없는 세자를 친노론이 아니니까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그 뒤의 정조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4년간 대리한 세자도 없앴는데 세손을 못 없애겠으며 자기네들이 죽인 세자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을 미쳤다고 지지하겠는가. 훗날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을 막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조가 노골적으로 척신인 풍산 홍씨를 멀리하는 행보를 밟아서 그랬던 거고 정조가 장성하기 전까지는 풍산 홍씨를 비롯한 노론 조정은 정조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세손과 잘 지냈으며 탕평당 소리까지 들으면서 영조의 말에 굽신대느라 당색이 별로 없던 풍산 홍씨와 적대한 후에도 정조는 정작 같은 노론이면서 의리를 내세우며 당색이 매우 강했던 경주 김씨들과는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정조 즉위 과정의 최측근 세력인 김종수(조선)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이 그 노론 벽파의 전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론 = 反사도세자'라는 것은 말이 안 되며 사도세자를 변호하다가 자살한 스승인 영중추부사 이천보(李天輔, 1698 ~ 1761), 좌의정(세자시강원 부책임자 세자부 겸임. 세자의 교육을 담당함) 이후(李𪻶, 1694 ~ 1761) 우의정 민백상(閔百祥, 1711 ~ 1761)도 당론으로 보면 노론이었다.
영조가 고령이었다는 점을 다시 감안해야 하는데 사도세자가 내일 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질 사극 보고 사람들이 영조 시절에는 당파 싸움이 잦았고 변란이나 옥사가 끊이지 않았으며 정국이 불안정한 시절로 오해하지만 실제 영조 시절에는 대규모 옥사나 반란이 거의 적었고 끽해야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괘서 사건정도였다. 특히 영조 시절은 중종, 광해군, 숙종 시절처럼 대규모 옥사나 환국이 자주 일어나거나 선조나 인조 시절처럼 대규모 외침도 없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노론이나 소론도 과거와 다르게 많이 변했다. 노론은 삼수의 옥으로 인해 노론 강경파가 사라졌고 소론도 마찬가치로 이인좌의 난과 나주 괘서 사건 이후 소론 강경파가 없어진 상황에서 당시에는 노론이나 소론 모두, 영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탕평파들이 집권한 상태였다. 그런 판국에 세자를 흔들려고 하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위였다. 세자가 공부를 안 한다고 비판하는 지평 이휘중이 영조에게 말 잘 했다고 칭찬받고 상을 받아도 노론•소론• 남인• 북인의 당색에 관계 없이 대신들이 "저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고 오히려 상을 받은 이휘중을 동정했다.
본격적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이 심해져서 궁인들을 마구 베어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찾아가서 대체 어쩌면 좋겠냐고 울면서 묻자 영빈 이씨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냐고 통곡했고 영조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혜경궁이 대경실색하며 "세자 험담을 왕에게 한 것을 세자가 알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미친 듯이 뜯어말렸을 정도였다.[39] 아내까지 저러는 판국인데 신하들은 오죽했을까.
영조가 노론의 모함을 듣고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것도 영조의 지성을 매우 폄하하는 소리다. 영조가 노론의 이간질에 함몰될 사람이었다면 이전에 정미환국이니 쌍거호대 정책을 비롯한 완론 탕평책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에도 소론 대신들을 계속 중용한 사람이 영조다. 영조는 숙종 때 역당으로 찍힌 남인 채제공조차도 중용했으며 게다가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며 "헤헷, 소론은 역적이고 우리가 정의라니까요!"라고 주장하는 노론을 개발살내고 "니들이 내 칼에 죽고 싶구나."라고 일갈하여 온 노론들에게 다신 당파 싸움 안 하겠다는 내용의 반성문까지 받아낸 임금이다. 자신과 노론의 결백을 주장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면서도 당론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을 정도다.
그런 영조가 노론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만약 세자가 죽은 시점이 영조가 나이를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70대, 80대 시절이라면 납득은 가겠는데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갈구던 시절의 영조는 아직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다 양보해서 노론이 사도세자를 싫어했다고 쳐도 사도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간질을 했다는 소리는 이미 나경언의 고변과 영조의 반응을 통해 관서행과 같은 세자의 실제 비행조차도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반박되었으며 노론 대신들은 표면상으로라도 사도세자를 옹호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을 때도 신하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세자 저하에게 조금만 더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 '힘들더라도 주상 전하를 뵙고 노력한다면 주상께서도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권고하고 더 강경하게는‘ 세자 그만 좀 괴롭히세요!’하며 관계를 풀어주려고 했다. 신하로서의 의무도 의무지만 이런 식으로 현재 권력인 영조와 미래 권력인 세자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다. 신하들로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런 노력을, 하다못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다.
게다가 당시 영조가 정말 세자를 죽이면 말 그대로 당장 왕실이 위험할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자를 죽인 뒤 영조도 곧 죽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의 세손의 나이는 11세로 몇 년 뒤면 조선 시대엔 명목상 성인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한동안 영조의 지원이 필요한데 이게 몇 년이나 갈 수 있을지 당시로선 도저히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세손이 아직 미성년자일 때 영조가 죽는다면 수렴청정이 불가피하지만 수렴청정을 해야 할 왕실의 큰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도 정작 세손과 겨우 7살밖에 차이나지 않았고 궁에 들어온 지 2, 3년차라 정치 경험도 짧다. 세손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는 왕비가 아닌 세자빈인 데다 명목상 폐세자의 아내라는 신분상 함부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며[40] 이쪽도 나이가 많지 않아(임오화변 당시 기준으로 28세) 왕실을 장악하기가 쉽지 않다. 사도세자의 친모이자 세손의 친할머니인 영빈 이씨는 궁녀 출신 후궁이어서 처음부터 제외된다.
세손이 장성할 때까지 영조가 충분히 오래 살아줘서 망정이지, 차기 국왕의 나이가 어린데 이를 뒷받침해줄 어른이 마땅치 않다면 왕실의 안위는 지극히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인조 대에서 갈라져서 8~10촌이나 되는 소현세자계나 인평대군계를 쉽게 옹립하기는 어렵다. 단종 대에 왕실 어른이 모두 사라져서 의정부가 황표정사로 위태위태하게 국정을 운영하다가 계유정난으로 피바람이 일어난 선례가 이미 있었다. 당시의 노론 신하들도 이를 무시할 정도로 바보들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방법으론 신하들이나 왕실 사람들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사도세자의 정신을 치료하려고 하고 이게 성과를 거뒀다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았겠지만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당시 조선은 엄연한 전제군주제 국가였고 일개 신하나 왕실 사람들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국왕과 왕세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사도세자를 달랠 수 있었고 영조를 상대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왕실 어른인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생존했을 때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원왕후가 정정했을 때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잔혹하게 학대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백 번 갚아도 모자랄 대왕대비의 올바른 충고 하나 안 들을 정도였다. " 경종이 상왕이 되어 이 시기에까지 장수했더라도 영조 손에 세자가 죽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영조부터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셈이다.
남은 건 위에 언급한 신하들의 원론적인 충고 정도가 고작인데 이걸로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18세기 중반 조선이었는데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 시기다. 기록에서 등장하는 각종 증상들을 보면 현대의 유능한 정신과 전문의 및 심리치료사들도 쉽게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데 아예 이런 개념이 없던 시대에는 더더욱 해결이 불가능했다.
정리하자면 신하들이 줄을 설 만한 사람이 현 임금(영조), 차기 왕(사도세자), 차차기 왕(정조)뿐인 상황에서, 안 그래도 지금 왕과 차기 왕의 관계가 시한폭탄이라 어느 한 쪽을 밀어주기는 지나치게 위험부담이 컸고 그럴싸한 명분도 없었다. 한 예로 임오화변의 흑막으로 의심받는 홍봉한조차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분명히 알았음에도[41]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 일을 영조 앞에서 꺼낸 사람은 나경언과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였다. 게다가 이 3명은 관계가 먼 방계지간도 아니고 심지어 3대 친부자지간이다.
더군다나 이 음모가 성사된다고 해도 뒷일을 장담하기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왕실 자체가 박살나 판이 깨져버릴 상황이었다. 나경언이 이 일을 터트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나경언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가 기어코 사단을 내 버린 게 못마땅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으로 일이 터지면서 결국 노론이든 소론이든 빨리 입장을 정리해야 했기 때문. 친아버지가 교지를 내려 친자식을 죽인 일이 벌어졌으니 세자를 죽인 것을 옹호했다가는 훗날 영조가 후회하거나 세손이 즉위하면 뒷감당이 안 되고 세자를 죽인 것을 비판하고 나서자니 당장 길길이 날뛰며 친자식도 죽여 버린 영조가 그들도 죽여버릴까봐 무서운 상황이었다.
혜경궁 홍씨나 정순왕후 김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남편이 잘못되면 혜경궁 홍씨는 당장 자신의 처분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설령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훗날 즉위한다고 해도 당장 혜경궁 홍씨 자신이 궁에서 쫓겨날 가능성은 넘치고도 남았다. 특히 사도세자가 사사되고 폐위된다면 연좌제가 존재하는 당시 상황상 정조가 즉위할 가능성도 멀어진다. 후에 영조가 바로 사도세자를 복권해 준 것도 이 때문이다. 효장세자의 장자로 입적되었다 한들 친부가 죄인이면 정통성에 흠이 남을 수밖에 없고 정통성 때문에 한평생 치를 떨어야 했던 영조가 아끼던 세손에게 그런 멍에까지 남겨줄 이유는 없었다. 거기에 정조가 성장 과정 중 잘못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도 영조에게 아들은 없어도 손자는 더 있었다. 그나마 영조가 정조를 매우 총애하고 세손으로 확실하게 인정해 주었으며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보호해서 '자궁'(慈宮)이라는 어정쩡한 위치로나마 궁에 남은 것이다. 만약 영조가 조금 더 냉혹했다면 정통성과 연좌제를 명분으로 홍씨를 폐출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정순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후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거니와 만약 사도세자를 노려 밀어내려 했다 쳐도 서슬퍼런 영조가 아끼는 세손까지 제거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오히려 정순왕후 입장에서는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게 현명했고 훗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사도세자 사사 당시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데다 왕후 자리에 앉은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친정도 큰 권력이 있지 않았다.
굳이 꼬아서 생각해 보자면 혜경궁 홍씨의 친정을 밀어내려고 사도세자를 밀어내려 했다고는 생각해 볼 수도 있겠으나,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아예 개입한 흔적이 없다.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에조차 임오화변 당시 그런 기록은 없는 것을 보면 의심할 만한 근거가 없다. 다만 훗날 정조를 둘러싸고 두 가문이 으르렁거리게 되긴 한다.
영조 성격과 당시 국정 장악력을 볼 때 궁중 여인과 그 친족들이 세자와 세손까지 좌지우지하도록 놔둘 사람도 아니었다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정순왕후가 중전으로서 사도세자를 옹호하거나 보호했다는 기록도 딱히 없지만, 이 역시 앞서 말한 어린 나이와 짧은 궁중 생활을 고려하면 애초에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영향을 끼칠 위치 자체가 아니었다.
3.2.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앓았는가?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가 쓴 책 《 한중록》은 세자가 화병으로 인해 미친 거라고 묘사하고 《영조실록》도 기본적으로 《한중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 심지어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서도 사도세자의 정신병이나 살인은 부인하지 않으며 《한중록》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42] 반면 정조의 주장이나 《고종실록》에 의하면 신동이라거나 차기 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은 조선 전기에는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한 게 큰 문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왕이 사초를 만들 때 마음대로 관여할 수 없었지만 이 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 시대의 사관들은 이상할 정도로 왕의 말을 잘 따라서 기록하지 말라는 건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다.[43]《실록》이 이럴진데 《승정원일기》는 정조의 명령으로 세초된 부분이 더더욱 많고 《영조실록》도 정조 즉위 후 편찬하면서 대신 한 사람에게 사도세자 죽음 전후 10년 정도의 기록을 맡겨서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사도세자 처분 때 《실록》을 보면 사관이 영조가 직접 지은 <폐세자반교문>마저 내용이 심해서 싣지 않는다고 쓰여 있다. 그러니 한쪽만 믿기보다는 각각 비교해 보면서 복합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영조 31년(1755)부터 세자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 영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자의 광증이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 한중록》에만 발견되니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였을 거라는 말이 있는데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발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고 적힌 부분은 최소한 그의 정신적 압박감이 크다는 점을 나타내고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는 세자가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철편을 휘둘러 사람을 때려죽인 일화가 있다. 《실록》에서도 "병이 있지만 봐 줄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정조가 김조순에게 한 비밀 얘기를 적은 《영춘옥음기》에서도 사도세자의 병을 말했다. 장인인 홍봉한에게 세자가 직접 '나에게 병이 있으니 약을 구해달라.'고 쓴 편지도 있다.
이덕일은 혜경궁이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기 친정을 위해서고 세자를 일부러 미친 것으로 묘사했다고 하지만 세자의 병에 대해서는 《실록》에서도 아들 정조도, 아버지 영조도, 장인 홍봉한도, 심지어 소론들까지도 모두 긍정했다. 2년 후인 1757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 인원왕후, 적모 정성왕후는 제일 사도세자와 가까운만큼 더욱 잘 알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들조차 생전에 할 수 있었던 조치는 대비와 중전이라는 지위에 있던 만큼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하고 학대받아 상처받은 사도세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뿐이었으며 그녀들이 세상을 떠나 이런 조치조차 없어진 후에는 결국 사도세자의 정신병이 악화되어 숱한 사람을 죽이고 나아가 임오화변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가져온다.
사도세자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평도 《행장》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것도 온양 온천에 행차했을 때 딱 한 번. 문제는 이때 그를 따랐던 사람은 500명 수준이었고 세자의 스승을 1명도 안 데려갔다고 한탄했음이 《실록》에 남아 있다. 근데 《행장》에는 온양으로 가서 매일마다 서연을 열었다고 한다. 가르쳐 줄 사람이 1명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아버지 영조의 병적인 괴롭힘으로 인해 우울증과 화병을 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쓴 편지만 봐도 가슴이 답답하며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글이 있고 《실록》에 나타난 영조와의 대화 또한 미치기엔 충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세자를 죽일 듯이 혼냈고 그때마다 세자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심지어 대답을 잘 해도 '조사하면 다 나와.' 하는 식으로 세자를 불신하며 혼냈다.
워낙 민감한 문제라 당대에도 기록하기 껄끄러운 문제였고 파기된 기록도 있는 데다 남아있는 기록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다만 남인 계열 시파인 박하원(朴夏源)이 지은 《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광증으로 죽인 사람의 수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드러난다.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고 적었는데 이는 《 한중록》에서 생모 영빈 이씨의 내인마저 죽이고 내관 등을 처참하게 살해한 정황을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바와 합치된다.
단순히 어느 남인 학자의 연구에서 그쳤다면 모르지만 문제는 그가 이 책을 《천유록》(闡幽錄)이라 이름 지어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을 알고 《대천록》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여 저자에게 다시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44] 나경언의 고변에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후궁인 수칙 박씨도 그가 의대증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죽였다. 당시 영조가 세자를 꾸짖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수칙 박씨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汝搏殺王孫之母),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실록》에 적힌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정축년·무인년(1757-58) 이후부터 (사도세자의)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사도세자가)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자
—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자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과 의사들이 《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은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다.[45]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으로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해당 논문 9페이지[46]
— 해당 논문 9페이지[46]
3.3. 관서행의 목적은?
《실록》의 기록에 사도세자는 영조 37년(1761)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서행의 목적은 임오화변 관련 논쟁의 키 포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세자가 평양으로 놀러간 것이 아니라 실은 영조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를 시도하려고 했다는 의혹이 있기 때문이다.평양은 평안도의 요충지로 조선 북방군의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사도세자의 외삼촌과 여동생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이 그 지휘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즉위 후 이 부분을 《실록》에서 날려 버림으로서 진실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결정적으로 평안도 군대와 사도세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어서 더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하다.
뒷날 정조는 사도세자의 《지문》을 지으면서 관서행의 목적은 역적들의 모의를 저지하기 위함이었으며 홍계희가 병란을 일으키려 하자 관서 지방에서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적었는데 《실록》의 기록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며 사도세자의 기록을 세초하고 즉위 초기부터 아버지의 반대파를 숙청한 정조의 입장상 아버지를 나쁘게 남기지 않으려는 시도가 계속 보이기 때문에 신용하기 어렵다.
정조의 이러한 포장은 정황상 말이 안되는 부분이 더 많다. 우선 변란을 막기 위함이라면 그냥 저런 일이 있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면 세자로서 임무는 끝이다. 굳이 자기가 평양까지 갈 필요는 없으며 아주 사소한 실수도 꼬투리를 잡고 없으면 자기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극도의 모욕을 주고 괴롭힌 게 영조다. 그런데 세자가 변란의 조짐이 있다고 '자기 멋대로' 요충지인 평양까지 굳이 가서 직접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역도를 놓치거나 모의가 발전해 실제 군사적 변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하는 잘못이라도 저지른다고 생각해 보자. 영조가 대체 세자를 어떻게 대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영조를 극도로 두려워한 세자가 이렇게 리스크가 큰 돌출행동을 할 개연성이 떨어진다.
《실록》을 보면 관서행을 안 영조의 대응이 생각 외로 온건해서 단순 유람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쿠데타 설대로라면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은 영조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나타났을 텐데 영조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기다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온 날인 4월 22일 유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유람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며 주변에서 놀자고 꾀는 무리들을 물리치라고 했다.[47] 5월 초까지 유생과 신하들의 이런 잔소리는 계속된다.
이 시점에서 유생과 신하들이 모두 세자의 관서행 자체를 확실히 알고 있었는지는 조금 불확실하다. 《실록》의 표현을 보면 '여항(閭巷, 일반 백성들을 표현함)에서 근거없이 지껄이는 말이 있다', '감히 떠도는 말에 대해 모두 믿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나오기 대문이다. 물론 관서행을 알았더라도 예의상 직접적으로 세자를 추궁하지 않고 이런 소문이 나돈다는 식으로 돌려서 말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자가 정말 관서에 다녀왔는지 확신하지는 못하고 '평소 세자께서 바깥으로 자주 놀러 나가다 보니 이젠 관서까지 가신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처신을 잘하십시오'라고 단순한 충고를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자는 그게 아버지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홍봉한에게 의논한다. 결국 진현(임금을 만남)을 하는데 이게 1년 만에 아버지에게 간 거다. 이런 모습은 뭔가 큰일을 한 다음의 모습이 아니라 큰 잘못을 저지르고 그게 알려질 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단순히 '놀러 나간' 것이 왜 잘못인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위에 언급된 것처럼 평소 영조의 질책이 도가 지나쳤고 세자가 이에 시달렸다는 점을 감안하자. 동궁에서 얌전히 공부만 하고 있어도 매일같이 혼나는 수준인데 허락받지 않고 놀러나간 것만으로도 영조가 어떻게 화를 낼지 몰라서 세자가 겁을 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자가 진현했을 때 영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세자는 자신의 관서행이 들키지 않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일이 영조에게 알려진 건 5개월이나 지난 9월이었다. 특히 유람을 다니면 안 된다고 비판하는 상소를 대간들이 올리자 세자는 "야, 내가 진작 반성했는데 어찌 내 마음을 몰라주고 이런 글을 올리냐?" 하고 벌벌 떨었다. 결국은 이런 글이 올라갔다는 글이 <조보>에 실리고 그 <조보>를 영조가 보고 격노해서 《 승정원일기》를 가져오라고 명하면서 관서행이 들키고 말았다. 그런데 영조는 그러고도 세자를 직접 꾸짖지도 않고 관련자들만 처벌하고 조용히 묻었을 뿐이다. 세자의 석고대죄에도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갔고, 덕분에 세자는 정말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사도세자 역모설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노론의 사주를 받았으니 하는 낭설이 떠도는 나경언이 고변서를 전달할 때였는데 그는 자신이 바치려는 글이 사도세자의 반란 고변이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그가 바친 상소는 세자의 비행을 나열한 것일 뿐이었으며 결국 그는 동궁을 모함하려 한 것이라고 실토하곤 처형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된 영빈 이씨의 말은 사도세자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사도세자의 반란 시도가 있었다면, 그리고 편집증 강한 영조가 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 관련자들이 임오화변 이후에 대거 처형되었어야 하는데 임오화변 이후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 내시, 여승 등이 전부였고 기껏해야 나중에 이 일을 뒤집으면 괜히 우리만 역적으로 몰린다는 홍봉한의 주장에 따라 사사된 조재호가 전부다.
3.4. 나경언의 고변
세자가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다. 그는 "반란 고변"이라고 하며 영조와 직접 만나게 된 뒤 품속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는데 그건 반란이 아니라 세자의 비행을 적은 것이었다. 총 10개 항목이 있었는데 경빈 박씨 등 사람을 죽인 것, 북성( 북한산성)으로 놀러 간 것,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안 갚은 것 등이었다. 나경언이 직접 쓴 글은 홍봉한과 윤동도(당시 우의정)가 돌려 본 뒤 홍봉한이 이런 글을 남겨두면 안된다고 말해서 영조가 불태우게 했다. 다만 저 내용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직접 따지면서 언급한다.영조는 이 글을 보고서 크게 분노하여 "지금 조정에서 사모 쓴 이들은 다 죄인이다! 한 사람도 세자의 비행을 내게 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조정의 신하들을 질타한 다음 세자를 불러 세자의 각종 비행, 그 중에서도 수칙 박씨를 때려죽인 것을 가지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매우 엄히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모함이라고 울며 주장하고 나경언과 대질시켜 달라고 간청했지만 영조는 "대리하는 저군이 대질을 해? 이 무슨 나라 망칠 소리냐?"라고 엄히 꾸짖으며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자신의 비행을 인정하고 만다.
이 부분에서 노론의 모함이란 주장은 완전히 현실성을 잃게 된다. 세자가 실제로 저지른 비행조차 신하들과 왕실 사람들이 영조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숨긴 결과 일개 백성인 나경언이 고변한 뒤에야 비행이 드러날 정도였는데 노론이 거짓으로 모함해서 세자를 비방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48]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중
《영조실록》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중
영조는 국고를 풀어 세자가 시전 상인들에게 빌린 돈을 갚게 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또 분노했다. 《실록》에 따르면 잔치와 하사품 구입 때문에 세자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빌린 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는 나경언이 용감하게 말했다고 칭찬했지만 '세자의 비행'을 '역모'로 과장하여 조정을 어지럽힌 죄가 크다는 신하들의 비난이 커서 네 차례 매를 때리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결국은 나경언을 참수했다.[49]
3.5. 선희궁(영빈 이씨)의 고백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매일 석고대죄를 했지만 영조의 반응은 없었다[50].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도세자는 불안해졌고 나중에는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어이 없애겠다."는 등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말이 많다. 세자가 정신병에 걸려서 횡설수설했다는 얘기도 있고 부왕을 죽이겠다는 말인데 차마 이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없어서 주어(세자)와 목적어(영조)를 빼고 기록했다는 얘기도 있다. 왕이자 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을 기어이 없애겠다고 말한 게 진짜라면 《 한중록》에 나온 것처럼 궁궐 안이 흉흉해질 만하다.
이즈음 사도세자의 친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영조를 만났는데 그건 종사를 위해 세자를 죽여달라는 말이었다.[51] 영조는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세자를 죽였다.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사오니 소인이 차마 이 말씀을 정리에 못 하올 일이오되, 성궁을 보호하옵고 세손을 건지와 종사를 평안히 하옵는 일이 옳사오니 대처분을 하오소서. 부자의 정으로 차마 이리하시나 병이니, 병을 어찌 책망하오리까. 처분은 하오시나 은혜는 끼치오셔 세손 모자를 편안케 하오소서.
영빈 이씨가 말한 것은 세자가 말하기를 아버지를 죽이겠다느니 했다는 것[52], 그러니까
세손과
혜경궁을 보전하여 종사를 안전케 하려면 병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는 세자가 영조뿐만이 아니라 세손까지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
한중록》의 기록에 따르면 아내와 자녀들에게만 아니라 그나마 극진히 모시던 어머니에게까지도 나중에는 불손하게 대하는 등 병증이 심해졌다.경진 탄일에[53] 또 무슨 일로 격화가 대단히 오르셔 그날부터 부모 위하시는 공경하시는 말씀을 못하시고, 상말로, 천지를 분리하지 못하듯이 노엽고 서러워하셨다.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선희궁께 공손하지 못한 말을 많이 하시고, 세손 남매 문안하니 크게 소리 지르시며, “부모 몰라보는 것이 자식은 알아보랴! 썩 물러가라." 하시니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살 어린 아이들이 아버님 생신이라 인사하여 뵈려 하다가 엄한 호령을 듣고 크게 놀라던 모습이 오죽하리오. 병환이 심하시되 나에게나 괴로이 구셔도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그 날에는 병환을 감추지 못하셨다. 전일 선희궁께서 비록 병환 말씀을 들으셔도 혹 과한 말인가 의심도 하시다가 처음으로 보시고 크게 놀라 아무런 말씀도 못하셨다. 병환이 점점 깊어지셔서 칠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자녀를 사랑하시던 것을 잊으시고, 그리하셨다.
기록을 보면 세자로 인해 '삼종'( 효종, 현종, 숙종, 영조는 숙종의 아들)으로 이어지는 왕통이 끊어지고 왕실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영조는 '대처분'을 감행하지만 이에도 신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특히 도승지 이이장 등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직전에 어찌 아녀자의 말만 듣고 국본을 해칠 수 있냐며 반대했는데 영조는 반발한 자들을 모조리 처벌하며 강행했다.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고 해도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다는 증거도 없이 단지 그 말만 가지고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것은 영빈이씨의 말은 그저 명분 찾기일 뿐[54] 영조가 진작부터 세자를 폐하는 수준이 아니라 죽이기로 계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부분이다.[55]
그러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고 후회없는 반응을 보였던 영조와는 달리 영빈 이씨는 아들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 한탄하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영조는 종사를 위한 결단을 한 공이 크다 하여 그녀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사도세자계를 제외한 그녀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했다. 성년까지 살아서 작호를 받은 것은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3명이었으나 앞의 두 옹주는 일찍 죽었으며 아들인 사도세자 역시 일찍 죽었다. 그나마 오래 살았던 게 막내 화완옹주다.[56]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남성 직계는 헌종 때 끊기고 사도세자의 다른 아들계는 정치사에 얽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등 박살날 뻔했다가 어찌어찌 복위되었지만 결국 철종 이후로 사도세자의 남자 쪽 후손은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효종의 남성 직계는 끊어졌고 이후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후손인 고종이 조선 왕조를 이었다.
3.6. 보충
영조는 세자 생전에 선위을 하겠다고 떠 본 것만 세 번이었다. 그 중 한 번은 세자가 가만히 있자 왜 가만히 있느냐면서 화를 냈고 "내가 시를 읽을 테니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고 선위 명령을 거두겠다"고 말했다. 세자가 제대로 거부하는 행동을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것이다. 다행히 세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영조는 약속과 달리 선위를 거두지 않았다. 이후 며칠 동안 생난리를 쳤는데 세자는 이번엔 제대로 반응을 해 줬지만 영조는 계속 선위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세자가 매일마다 닫힌 문을 밀치고 들어가야 했다. 안 하면 또 불효 자식이라고 싫은 소리를 할테니 이 정도면 미칠 만하다.물론 세자가 병과 별개로 스스로도 공부와 담을 쌓긴 했다. 신하들은 세자에게 단 한가지, 공부 좀 할 것을 요청했지만 세자는 병을 핑계로 거부했다.[57] 영조는 단 한 번 세자에게 잘해준 적이 있는데 역시 반 년 만에 돌아섰다. 그 이유 역시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었고 문제는 그러면서 세자의 스승들을 모두 파직한 것이다.
중요한 건 이렇게 세자를 극한으로 몰아 붙이면서 그의 스승들을 파직했던 때와 세자의 어린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스승들을 정한 후 자주 불러내어 공부 상황을 물었던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때 세손은 정말 대답을 잘했다. 이후 영조는 그를 계속 부르는데 정작 세자의 진현은 거절한다. 세자가 아파서 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정작 세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렀다. 어느 날 영조는 세손과 문답을 한뒤 이를 칭찬하며 이런 말을 한다.
임금이 여러 강관(講官)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00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영조실록》 영조 37년(1761) 1월 5일 2번째 기사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00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영조실록》 영조 37년(1761) 1월 5일 2번째 기사
이 시기는 관서행이 있기도 전이다. 이때 영조의 마음은 이미 세손에게 가 있었다. 세자 역시 그걸 알았는지 《 한중록》에는 그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 세자의 예상대로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세손을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
세자의 관서행은 물론 각종 비행이 몇 달부터 1년이나 지나서야 영조의 귀에 알려졌으며 그게 알려진 후에도 신하들은 계속 세자를 옹호했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보호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이 때문인지 영조는 기습적으로 세자를 죽여버렸다. 영조가 세자를 역모로 몬 핑계는 앞서 본 바와 같다.
정성왕후의 혼령이 내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했다.
세자의 역모를 알린 사람은 죽은 아내의 혼령[58]이라는 얘기다. 이 정도로 세자를 죽일 명분이 없었냐는 의문이 드는 점인데 어쨌든 영조가 세자를 죽이길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음은 사실인 듯하다.
세자가 영조의 명령을 버티다가 결국엔 영조의 협박을 견디지 못하여 포기하고 자결하려고 할 때도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도승지 이이정 등 주변 신하들이 막았다.[59] 신하들은 아예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받아쓰길 거부했다. 뒤주가 나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아마 신하들은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없으니 오래 가야 2일 정도 가둔 후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영조는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근처에 계속 머물면서 세자가 죽기를 기다렸던 듯하다.
세자를 모함한 사람 중 하나란 인식을 받던 정순왕후 김씨도 실제론 세자가 죽기 2년 전에야 궁에 들어왔고 이때는 이미 세자와 영조간에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는 궁 생활 경력 있는 후궁들이 쟁쟁한 데다 아직 17세의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세자, 그것도 영조의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폐서인시킬 정도로 큰 힘을 가졌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거기다 왕후 쪽 집안이 본격적으로 힘을 쓴 건 세자가 죽고도 10년은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 조정은 사도세자의 후원자인 홍봉한이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순왕후 김씨가 권력을 확보한 것은 오히려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킨 후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이 사도세자를 음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개 유생도 아는 세자의 비행을 왜 영조에게 일러바치지 않았을까? 이걸 알리기만 해도 이간질 효과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10년 후에 홍봉한을 공격하는데 세자를 죽이려고 했고 세손을 위협하려 했다는 거였다. 문제는 이 출처가 세손, 즉 정조가 직접 정순왕후 김씨에게 한 얘기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정조가 이걸 문제삼으며 김귀주를 귀양보내지만 자기가 정순왕후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보면 정조가 정순왕후와 동맹해서 홍봉한을 공격했다가 나중에 경주 김씨 가문의 힘이 커지는 듯 하자 정순왕후와 김귀주를 배반한 것이 된다.
결국 주원인은 영조와 사도의 연쇄살인에서 찾아야 된다. 이 사이에서 이간질이 있다 하더라도 영조와 세자 간의 연결이 튼튼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임오화변 때 영조는 세자를 옹호하는 신하들을 몇 번이고 내쳤고 더 이상의 반대를 막기 위해 그것도 자신보다 사도세자와 친했던 첫 번째 아내 정성왕후의 영혼을 핑계대며 자기합리화했다. 얼마나 친했냐면 당시 정성왕후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게 사도세자다. 정성왕후가 세자를 친자식처럼 아꼈기 때문이라고. 와병 중인 정성왕후를 찾아가 "소자가 왔습니다."라고 울부짖고 정성왕후가 토한 피를 의관에게 보이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오열했다고 한다. 참고로 정성왕후는 늙은 자신보다는 앞으로 태어날 왕손이 중요하단 이유로 평소에 기거하던 대조전[60]에서 무리하게 서쪽의 관리각으로 옮겼는데 이게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영조 자체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보인다. 출생과 즉위 과정이 과정이니만큼 주변에 의심이 많았고 비천한 어머니의 출생 때문에 열등감도 심했다. 첫 번째 아내 정성왕후를 사랑하지 않고 박대했던 것도 이러한 열등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자신을 여러 차례 비호해 준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며 그것을 명분으로 삼는 반란도 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심했다. 자식들에 대해서도 편애가 심했던 사실이 기록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 화평옹주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자식' 이라며 사랑했던 반면 평소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즉시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씻고 그 물을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의 거처 쪽에 버리게 했다. 나중에는 액땜으로 아예 미리 사도세자에게 밥 먹었냐고 묻고 세자가 대답하자마자 귀를 씻었다고 한다.
영조의 모습을 현대 정신의학 진단 기준에 비춰보면 편집성 인격 장애 진단이 나온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실록》의 내용을 토대로 사도세자와 영조의 정신 건강을 분석해 재구성한 논문이 있다. # 현재 정신의학계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편집성 인격장애가 있던 영조의 핍박에 의한 중증 조울증[61]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러한 영조의 정신적 문제와 기질,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를 막다른 길로 몰고 갔고 사도세자는 부친의 심한 학대를 받은 나머지 지나치게 파탄적인 행동을 보이다가 영조가 살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름으로써 파국을 불렀다고 볼 수 있겠다. 사도세자와 반대로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자신을 학대하는 부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아래서도 잘 버텨내 훌륭한 군주가 된 경우도[62] 세계사적 사례로 나름 존재하기 때문에 영조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버지와의 성향 차이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차이만큼 극단적이지 않았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허나 다른 누가 견뎌냈다고 (나)도 견뎌야 한다는 건 힘든 상황에 놓일 때 살인까지는 안 저질렀는지, 무고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통계에 따라 참작 여부가 달라지기도 하며 사람과 환경에 가라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버텨내 뛰어난 군주가 될 수도, 아니면 정신적으로 망가져 살인을 저질러도 여러 차례 처벌을 피한 사도세자가 될 수도 있으며 영조의 문제도, 사도의 살인도 심각했다. 위에 서술한 대로 영조의 개인적인 편집증과 망상, 강박적인 권력욕으로 세자 및 주변 친족을 의심하고 편애하거나 학대하는 등 극단적으로 대했다. 조선의 왕은 명백히 유교국가에서 사대부 중에 으뜸이어야 하는데 사대부로서의 윤리 덕목을 무시하고 자식을 비정상적으로 갈구고 급기야 굶겨 죽이기에 이른 패륜을 저지른 인물이다. 사도세자는 아주 어릴 때는 딱히 반사회적 행동이나 병증이 보이지 않는 도리어 꽤 영리했단 일화도 남아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영조의 학대를 받으며 성장하면서 점차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미국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는 사도세자가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정신병까지 있었으므로 영조가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비극적인 결단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커밍스는 한국 근현대사 관련해선 큰 권위를 가진 대학자지만 전근대 조선사에 대해선 특별히 내세울 만한 학술, 대외 활동은 보여준 적 없다. 상술한 정보를 총합하면 사도세자는 사실 자질이란 면에선 다른 조선의 세자들에 비해 특별히 모자랄 것도 없었고 정신병은 누가 뭘로 봐도 학대 가해자인 영조 본인이 일으켰지만 극한상황이라고 다들 살인자가 되는 건 아니다. 이미 사도세자는 온갖 이유로 수십~백여건에 달하는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단순히 무고한 피해자로만 보기는 어렵다.
4. 갈등의 원인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 또 하나는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배경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다.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는 다르게 일종의 무골이었다. 체심비풍(크고 뚱뚱하다는 뜻)이라는 묘사가 정확히 존재하며 영조부터가 세자가 어릴 때부터 많이 먹고 비대하다고[63] 자주 언급하고 대신들에게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다는 점을 거듭 강조할 정도로 자신과는 체형이 상이함을 인식했던 것 같다. 《영조실록》에 고조할아버지 효종과 닮았다는 기록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들었던 효종의 무기를 15세에 들기도 했다. 힘도 세고 무예에 관심이 많았으며 외유나 사냥도 나갔던 점을 보면 세종이나 경종처럼 운동 부족으로 푹 퍼진 비만이라기보다는 조상 중 태조 이성계나 정종, 어깨 너비로 유명했던 효종처럼 몸집 자체가 크고 다부진 소위 근육돼지 체형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영조는 어진만 봐도 왕이 되기 전이나 왕이 된 후나 둘 다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보여준다. 일단 조상 핏줄 덕분인지 본인이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고 운동도 싫어하진 않았으며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서 승마, 달리기, 국궁 같은 격한 운동을 했고 이런 점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영조에게 이것은 그저 운동이었지, 그걸 넘어서 무예에 대한 선호로 이어지진 않았다. 영조의 주요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글 공부, 정치였으며 무예는 부가적인 것이었다.
둘의 성격도 확연히 달랐다. 외부의 요구에 느슨히 대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엔 활달하고 과감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는 매사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기민하고 민첩한 성격이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영조가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너무 조심성 없이 일을 막 처리한다고 나무라기도 했다.
영조는 당쟁 속에서 간신히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세력의 균형을 맞추는데 집중하고 사안 하나 하나에도 당파들의 이해 관계를 따져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반면, 세자는 탕평에 영조만큼 신경을 기울이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왕위가 약속된 어린 세자에게는 눈앞의 개혁해야 할 문제가 보였을 뿐, 힘의 균형이나 이해 관계같은 것은 겪어본 적 없기에 느끼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영조에게 자라면서 점점 자신을 닮기는커녕 외양부터 자신과 다르고 거기다 유교적 소양을 닦는 공부보다 그림, 환상 소설, 무예를 더 즐기는 모습은 영 못마땅했을 터였다. 영조는 일식삼찬과 검박한 옷[64]으로 왕임에도 최대한 소박한 생활을 지향하며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매사 근검절약하려고[65] 하는 것에 비해 사도세자는 관서 외유를 나가거나 잔치와 굿을 벌이고 하사품을 내리는 등의 일로 세자궁 예산이 텅텅 비고 민간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댔을 정도로 경제관념이 판이하게 달랐다.
게다가 세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한 의대증[66] 등 본인이 저지른 사건사고를 처리하는 데도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67] 사도세자가 한중록이 증언하고 현대의학이 판명한 조울증이 맞다면 조증 삽화기간에 벌일 수 있는 상식 밖의 사치와 돌발적인 행동력, 울증으로 인한 폭행, 자살시도같은 극단적인 행각이 설명이 되는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매일 정해진 업무일정을 소화하는[68] 의무에 충실하고 꼼꼼한 영조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보통의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자신과 성격이 너무 안 맞거나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관계가 불편해지는데 영조 입장에서는 자신이 간신히 지켜낸 왕위를 계승해야 할 아들이 생긴 외모부터 하는 행동까지 하나같이 이러니 미워질 수 밖에 없었다. 둘이 타고난 기질 차이가 이토록 큰 데다 영조는 이런 점을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갖는 '고집이 강하고 자기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며 강요하는' 특성도 있었지만 숙종 때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이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이며 강한 성격은 심지어 정조 때까지도 이어진다.
두 사람이 처해있던 환경도 너무 달랐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 복위에 힘을 보탰기에 태생적으로 노론에 속했다. 숙종과 노론이 장희빈 소생인 경종을 대신해서 자신을 차기 왕으로 밀기 시작하자 경종이 세자이던 초기 시절부터 줄곧 이복형인 그와 경쟁 관계였으며 이는 경종의 즉위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기록도 빈약하고 너무나 형편없이 격이 낮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왕세자로서의 대우나 조기 제왕학 수업을 받는 것조차 언감생심 기대할 수 없었다. 같은 어머니 소생의 동복 형제도 있었긴 했지만 모두 아기 때 요절해 아무도 영조 곁에 남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왕자라면 흔히 받을 수 있는 외가 쪽의 정치적 지원이나 마음 터놓고 어울리며 신뢰할 친 동기도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신세인데, 그 와중에 이복 형 경종은 비록 입지가 불안했지만 엄연히 정식으로 책봉받은 세자였고 어머니들 사이의 일로 악연이 있었으며 이복 동생 연령군은 아버지가 가장 귀여워하는 아들이었다. 노론도 연잉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노론 쪽 어머니를 가졌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었다.
경종도 부왕과 노론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영조 역시 연잉군 시절부터 경종이 세자로서 대리청정하던 10년의 기간과 경종으로부터 왕세제로 책봉받은 뒤 왕이 되기까지인 5년, 도합 15년여를 항상 불안한 환경에 있었다. 나약한 성격으로 평가받는 경종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숙청도 진행했었으며 이때 영조는 폐세제까지 자처해야 했다. 신임옥사 참조.
더군다나 즉위 후에는 전국적인 반란인 이인좌의 난까지 겪고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다. 이처럼 영조의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궁정 암투 한복판에 있었고 믿을 만한 이는 많지 않았으며 신분과 목숨을 늘 신하들에게 위협받는 판이었다. 실제로 영조는 왕자 시절에 가장 사랑했던 정빈 이씨와 그 아들 효장세자 등 그나마 아끼던 사람들을 정적들의 손에 잃었다.
때문에 연잉군 시절부터 왕세제 시절까지 극도의 긴장과 위협감 속에 정적들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인 행동이나 튀는 걸 자제하고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면서 모범적인 세제로 행동해야 했다. 만약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무기를 모으거나 무사를 만난 정황이 보이면 역모로 몰리기에 딱 좋았다. 여기에 아버지인 숙종에게 물려받은 온화하지 못하고 극도로 불같은 면까지 맞물리면서 영조의 성격은 나이를 먹을수록 대단히 편협하고 누군가가 마음에 안 들면 꼬장 피우며 끝까지 싫어하고 의심하는 수준으로 뒤틀린다.
반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딴판이었다. 그는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잠재적인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하나도 없었다. 이복형 효장세자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그 이외에는 전부 여자 형제들이였다. 숙의 문씨 이전까진 자신의 생모 영빈 이씨가 부왕의 사랑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가장 많은 자녀를 둔 후궁이었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대왕대비인 할머니,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해준 적모, 극진히 생각해주는 생모, 다정한 동복 누나들과 여동생까지 정서적으로 성장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지자들을 풍부히 갖추었다.
서자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효장세자도 후궁 태생의 서자였고 왕비 소생 적자가 없는 이상 문제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왕자가 단 한 명 뿐이니 노론과 소론이 각자 자기들의 왕자를 정해서 밀어주려야 밀어주기도 불가능했다.[69][70] 사도세자 생전엔 그 아니 애초에 천민 어머니를 둔 사람을 왕으로 모시는 신하들 입장에서 사도세자를 간 볼 상황도 아니었다.
이러한 조건들이 맞물려 사도세자는 모두의 축복 속에 태어나 극진히 떠받들리며 당파를 초월해서 지지를 받았고 당연히 아버지 같은 신분 컴플렉스를 가지지도 않았다. 영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숙종이 불지른 환국 정치의 후유증으로 피비린내나는 당파 싸움으로 엉망이 된 궁궐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성장했지만, 사도세자는 영조가 반역 진압과 탕평책으로 신권과 당파 싸움을 약화시키고 당정을 장악해 강한 왕권을 만들어놓은 덕분에 사대부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의 영조가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시기했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편이다.
사도세자는 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라는 신분 덕분에 대신들이 임오화변 때까지도 그의 비행을 고발하거나 의논하려고 시도하긴커녕 감추는데 급급했으며 사도세자를 처분하려는 영조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스승들은 세자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려고 할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신하들의 충성과 보호를 받았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나이가 있었다. 사도세자가 변을 당하기 전부터 이미 영조는 역대 왕 중에서 최고령이었다. 사도세자가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가능성을 크게 보지 않았을 법하며 신하들 입장에서는 당장 내일 왕이 승하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인데 언제 왕이 될 지 모를 세자를 탓하거나 비행을 고자질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이토록 영조와 반대 상황인 사도세자는 훨씬 행동거지가 자유로웠고 신하들도 사도세자가 잡서를 읽거나 무예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걸 가지고 딱히 문제삼지 않았으며 어차피 너무 이른 나이에 완벽한 교육환경을 갖춘 터라 공부 좀 덜 하더라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과거의 영조처럼 목숨마저 위험할 만큼 절실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영조가 보기에도 사도세자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어릴 때 보였던 근본 자질은 총명해 보였던 건 사실이고 국방이나 무예에 관심이 많다는 점도 분명 왕의 덕목 중 하나다. 단지 두 사람의 주 관심사, 방향성이나 전망이 달랐다.
근본적인 문제는 피비린내 나는 환국 정치의 끝자락을 경험했고 본인이 그 영향으로 당파 싸움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영조로선 세자의 이런 여유로운 행동을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부실한 정통성과 보복이 이어지는 정치 환경을 타파하고자 영조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노론의 끊임없는 토적(=소론 처벌)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영조에게 자신의 탕평책을 이어가고 정치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복잡한 당파 관계를 조율할 정치적 안목을 갖추고, 유학자들인 사대부를 찍어누르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학문적 기량을 갖춘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자칫 잘못하면 탕평책은 무산되고 자신이 겪었던 보복 정치와 환국이 재현될 터였다.
사도세자의 자질이나 관심사는 만약에 조선 초였다면 가산점이 되었지 감점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조선사 전체를 봐도 효종이나 후대 정조만 봐도 조선 왕으로서 국방 강화와 함께 무예에 관심을 보이는건 과하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영조 입장에서는 효종같이 무예 못지않게 공부와 품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면 모를까, 사도세자의 행동은 극도의 위기감을 가진 영조가 보기에는 너무나 수준 미달이었다.
영조입장에서는 자신과 달리 탄탄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정치적 세심함은 커녕[71] 유교 군주에 대한 마땅한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는 행동만 벌이는 세자에 대해 한심함과 답답함을 넘어 거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졌던 듯하다. 고령의 나이도 영조 본인에게 사실 가장 큰 압박이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로 평균수명이 왕창 깎여나갔다곤 하지만 그래도 40대~50대에 죽는 일이 흔했고 과로에 시달리던 역대 조선 왕들은 평균적으로 40대에 사망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얻었을 때 영조의 나이는 42세로, 조선 시대 기준으로 당장 몇년 후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이전에 효장세자를 잃은 경험까지 있던 영조는 하나뿐인 계승자가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크나큰 조바심을 느꼈고 사도세자를 아주 일찌감치 친어머니와 떼어내 따로 거하게 하며 2세 때 동궁으로 책봉해 왕위 계승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72] 반대로 사도세자가 보기에 부왕 영조의 압박은 너무 지나쳤고 대체 왜 저러는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도세자도 대리청정을 했고 나름대로 성과도 낸다고 자부했지만 영조의 타박은 끝이 없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정쟁 속에서 피비린내를 맡으며 홀로 크다시피 한 영조와 달리,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의 사이를 그래도 중재하고 막아주던 누이 화평옹주와 할머니 인원왕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서 애틋했던 화협옹주와 정성왕후 같은 가족 내 지지자들을 민감한 시기에 연이어 잃은 것도 감정 폭이 큰 사도세자에겐 타격이 심했을 것이다. 사랑하던 후궁과 자식들을 계속해서 잃으면서도 이전부터 척박한 환경을 견뎌 온 영조는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따사롭던 어린 날의 소중한 보호막을 잃고 무시무시한 왕인 아버지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사도세자는 그렇지 못했다.
만약 영조도 그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 안 놓이고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누리며 살아왔다면 우리가 아는 영조의 컴플렉스와 강박, 그로 인해 후계자를 향한 기대치도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아무래도 사도도 역사보다는 수월하게 세자 기간을 보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영조가 그 험난한 환경을 겪었음에도 본인은 진짜 이해심 많고 좋은 성격을 수양해서 자신과는 다른 사도세자의 성격과 입장을 감안하고 컴플렉스를 투사하지 않고 사도세자가 타고난 자질을 긍정적인 쪽으로 발전시켜 주려는 지혜로운 아버지가 되었다면 부자 관계와 왕위 계승 모두 안정적이었을지도 모른다.[73][74][75]
그러나 하필이면 당대의 정치 환경은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하는 상태인 데다 아버지이자 왕인 영조는 효종이나 현종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식을 개인적으로 대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여렸던 할머니 명성왕후도 닮지 않았고 극히 엄격하고 예민하며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조바심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한번 미운 털이 확실하게 박히자 그걸 되돌릴 수 없었다. 이런 부자간의 판이하게 다른 성격과 성장배경의 차이,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의 결과는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5. 관련 창작물
5.1.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린 만화가 박시백은 사도세자에 이런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세자가 보인 정신적 이상에 대한 부분은 윗부분과 동일하게 보지만 정신 이상으로 인해 시전 상인들에게 거액을 빌리고 이를 체납한다든지, 마구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기행으로 이어져 영조나 신하들이 그를 부적격자로 분류했다는 것. 박시백은 이를 근거로 세자의 죽음 원인이 당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다. 만약 당쟁이 원인이면 세자가 저지른 비행만으로도 충분히 폐세자가 가능하니 신속하게 고발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당시 신하들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데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영조가 이미 역대 임금 중 가장 고령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사도세자를 견제할만한 적법한 후계자가 없어서[76] 꺼린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평양 유람도 사건 발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영조에게 들어갔을 정도다.[77] 당시 노론과 소론은 삼수의 옥, 이인좌의 난, 나주 괘서 등의 사건으로 강경파가 전멸되고 영조의 탕평책의 영향으로 탕평파만 집권한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이전에 숙종과 노론의 세자(경종) 폐세자 기도와 노론과 소론의 연잉군(영조)을 둘러싼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논쟁으로 인해 서로에게 피바람을 경험했다. 그래서 폐세자 건의는 건의한 신하는 물론 나아가 당파 전체를 목숨을 담보로 잡는 논제이며, 영조가 만일 급사라도 해서 사도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당장 역모죄에 연루되어 가문이 풍비박산날 수준의 논의였다.
한편 박시백은 저서를 통해 신하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즉위할 수 있는 '다음 왕'인 사도세자의 비행을 감추려 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세와 폭력적 행동은 역사에 기록만 안 되었다 뿐이지 당대 고위직 신료들은 다 알고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괜히 사도세자의 비행을 깠다가 덜컥 영조가 승하해 버리면 이를 고발한 신하는 바로 왕을 능멸한 역적이 된다. 이게 정말 벌어졌던 사례가 연산군이었는데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악행을 아버지 성종에게 일러바쳤다는 점을 바탕으로 '위를 능멸했다'는 죄목을 붙여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고문하고 때려 죽였다. 이에 대해 실제 모함을 저지른 것은 아니고 연산군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어쨌든 연산군 본인은 그렇게 여겨 죄인 취급을 했다.
그나마도 이는 왕의 본 적도 없는 생모에 관한 문제였지 이 경우는 사도세자 그자체가 문제였으니 더 심각했다. 쉽게 말해 신하들은 '연산군 시즌2의 1호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건 연산군은 즉위 후 10년까지는 멀쩡히 집무를 잘 수행했고 다소 과격한 언행을 보인 적은 있으나 그냥 좀 거친 성격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사도세자는 이미 세자인 당시에도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고 이미 살인을 여러 차례 저지르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악행을 일러바쳤다간 세자가 즉위하는 그날부로 잔혹하게 죽임과 멸문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셈. 이러니 신하들로서는 사도세자의 악행을 고발하기 꺼려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태어났고, 덤으로 이 세손이 매우 똑똑해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어릴 때부터 증명했다.[78] 나이도 사도세자가 사망할 때를 기준으로 11세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조선 시대에는 명목상 성인이라 영조로서는 세손으로 후계자를 바꿔도 충분했다. 실록을 보면 영조가 세손을 예뻐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끔씩이나마 사도세자에게도 하던 칭찬이 완전히 사라진다.
세자는 몇 달 동안 진현하지 않아도 신경쓰지 않는 반면 세손은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 만나고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을 방문하는 등의 대외 행사에도 동석시킬 때가 많았다. 결정적으로 영조 본인이 후계자 교체를 암시하는 발언을 하고야 만다. 세손을 불러다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한 뒤 훌륭하게 대답한 세손에게 "300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는 발언[79]을 한 것이다. 아무리 세손이 영특해도 세자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마당에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이미 영조는 세손으로 후계자를 교체할 생각이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리는 행위였다고 박시백은 보았다.[80]
문제의 관서행에 대해 의외로 영조가 온건하게 대응한 것은 세자가 단순히 유람을 다녀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자를 완전히 포기하고 세손으로 후계자를 교체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만 관서행 자체는 군사 반란과 같은 심각한 사항이 아니라서 그것만으로 당장 폐세자를 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고 나경언의 고변과 영빈 이씨의 발언이 영조에게 가장 결정적인 명분을 주었다고 보았다. 박시백은 굳이 그를 죽인 이유는 사도세자를 부적격자라 폐위하는 정도로 그쳤다가는 후에 세손이 즉위한 후 사도세자가 친부에 대한 효도라는 극강의 명분 아래 신원되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거나 동로마에서 레오 2세에서 제노에게 역(逆) 부자상속이 일어난 것처럼 양위 형식으로 왕이 돼서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즉 임오화변은 광인이 임금이 돼서 미래의 폭군이 될 가능성을 없애고 똑똑한 세손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임금 영조와 신하들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벌인 일이라는 게 박시백의 주장이다.
실제로 사도세자도 부왕 영조가 세손을 훨씬 아낀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궁합이 어긋났고 자신이 인정했듯 영조는 성격이 괴팍하고 편벽되었으며 영조가 질책을 거듭하면서 사도세자는 갈수록 비뚤어져 이미 많은 비행을 저지르고 광증을 보였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자신의 운명이 이미 글러먹었다는 사실을 느끼고 영조가 서명응의 상소로 인해 관서행을 알면서 '(나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불안감을 내비쳤다는 이야기가 《한중록》에 전한다.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아무래도 내 아들(세손)을 더 귀여워하시니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었는데, 혜경궁은 단호히 '세손이 당신의 아들인데, 부자는 화복(禍福)이 같지 않겠느냐'는 일반론적 근거로 세자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사도세자는 "나를 내치시고 난 후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버리면 어쩌겠는가"라 하였다고. 혜경궁이 그럴 리 없다고 하였지만 사도세자는 '아버님께서 (며느리인) 자네는 귀여워하시지만 나는 이토록 미워하시니 나를 살려두시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사도세자가 했던 말은 전부 적중했다. 실제 임오화변 당일조차 상술했듯 세손의 휘항을 요구하기도 했다.
임오화변 직전에 세자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흉흉한 유언비어가 궁중에서 나돈 것도 세자가 아버지 영조는 물론이고 아들인 세손까지 해치려는 듯한[81]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란 설이다. 더 나아가 박시백은 '세자만 없애고 세손으로 후계를 삼는다.'는 계획에 영조와 신하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본 것이다. 박시백은 태종이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으로 후계를 수정한 경우에서 보듯 대안이 아우였다면 폐세자 정도로 그쳤겠지만 아들이었기에 후폭풍 방지를 위해 죽여버렸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임오화변 당시 후일 정조의 건의로 '삭제된 기록'에 대해서도 추측했는데 자신이 살아날 길이 없음을 직감한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세가 극에 달해 궁중에서 칼을 들고 "아버지와 세손을 죽이겠다." 수준의 난동을 부린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단순 유람과 달리 이는 명백히 안으로는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을 죽이겠다는 패륜이고 밖으로는 국가의 지존인 왕을 시해하겠다는 선언이었으니 '선을 넘은 행동'이었으므로, 사태가 이 지경으로까지 흘러가자 이미 세자를 포기한 영조와 그에게 맞서 세자를 보호하던 신하들마저 모두 제2의 연산군을 만들어선 안 된다는 합의점에 도달하여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내용이다. 또 15권 《영조 실록》 말미에서는 한유라는 사람이 홍봉한을 죄줄 것을 상소에 관한 내용을 그렸었다. 홍봉한에 대한 죄목에 '일물(뒤주를 일컫는 말)을 갖다 바친 죄'가 있었는데, 이 때 영조는 "저가 비록 ‘ 홍봉한(洪鳳漢)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발언했다. 즉, 홍봉한이 도와줬어도 사도 세자를 죽이는 일의 주도자는 영조 자신임을 인정한 셈. 결국 한유는 영조의 분노를 사서 처형당했다.
박시백은 역사학자가 아닌 만화가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의견은 박시백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다. 해당 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김백철 교수와 함규진 교수, 정병설 교수 등이 있다.[82] 하지만 박시백 본인도 굳이 뒤주에 가둬 굶겨죽인다는 처참한 방식으로 살해해야 했는지 의문을 품어 작중에서 백성들의 뒷담화로 표현했다.[83]
5.2. 영상물
조선 왕실에서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고 영조 및 정조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보니 직접적으로 다루거나 배경 설정으로 언급할 때가 많다. 특히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 언급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노론 음모론에 오염되어서 노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리는 창작물이 많다.- 《 하늘아 하늘아》: 1988년 KBS 드라마.
- 《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 9부 한중록 : 사도세자 역을 최수종이 연기했는데, 최수종이 연기한 몇 안 되는 조선시대 인물 중 한 명. 훗날 SNL코리아 최수종 편에서도 '사극왕 최수종' 에피소드 중 "네 이놈 수종! 네가 감히 나의 뒤주를 걷어찬단 말인가!"라는 대사로 태조 왕건, 대조영, 해신 등과 함께 아주 오랜만에 언급되기도 했다.
- 《 대왕의 길》: 전체적으로 임오화변의 배경인 영조의 학대, 그로 인한 사도세자의 심리적 묘사와 갈등을 다룬다. 비록 조기종영되었지만 긴 회차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후일 나온 사도보다 임오화변의 배경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더 꼼꼼히 묘사된다. 게다가 사도세자의 가장 큰 지원군이었던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눈물겨운 노력도 제대로 묘사되며, 어째서 사도세자가 그들의 사후에 더욱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도 잘 알게 해준다.[84] 사건자체는 마지막 회인 34회에서 거의 몰아서 일어난다. 이덕일이 노론 음모론을 본격적으로 유포하기 전이라서 음모론 내용은 덜하나[85] 몇몇 오류들이 존재한다.
- 《 무사 백동수》: 노론 음모론이 채택되었다. 드라마에서는 뒤주에 갇혀 죽은 게 아니고 뒤주를 탈출하긴 했으나, 끝까지 가지 못하고 결국 천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그 시신이 뒤주에 다시 넣어져 세간엔 뒤주에서 죽은 것으로 그려졌다.
- 《 붉은 달》: 노론 음모론을 배제하고 사도세자의 정신 질환 및 광기에 초점을 맞춘 단막극. 다만 정통 사극은 아니고 사도세자의 광기 원인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는 사극 공포물이다. 보통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때 뚜껑을 열고 위로 들어가는 데 비해 여서서는 가마처럼 옆문을 열고 들어간다.
5.3. 소설
- 충신: 임오화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6. 사건 당사자 일람
- 폐세자 이훤(사도세자) - 사건의 피해자.
- 국왕 이금(영조) - 사건의 가해자.
- 세손 이산(정조) - 사건의 발단 중 하나이자 또다른 피해자. 세손의 자질이 뛰어남을 본 영조는 세자를 포기할 의중을 연신 내보였고, 관서행 등의 비행을 보고받자 그 의중은 확신이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눈 앞에서 조부의 명령으로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것을 보며 큰 충격에 빠졌고, 유년기의 상처는 이후 정조의 국정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영빈 이씨 - 사도세자의 친모.
- 혜경궁 홍씨
- 인원왕후 - 영조의 적모이자 사도세자의 의붓할머니. 정확히 말하면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인 사도세자의 범죄가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 정성왕후 - 영조의 정비이자 사도세자의 적모.[88] 살아있었으면 임오화변을 막을 수도 있었던 인물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뒤에 남편이 자신의 영혼이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식으로 이용되고 뒤주형도 정성왕후의 위폐 앞에서 이루어진다.[89]
7. 같이 보기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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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전각 이름은
창경궁 문정전이지만 당시 영조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여 문정전을 휘령전이라고 하여 재궁을 그곳에 모셨기 때문이다.
[2]
말이 잠시였지 실질적으론 죽을 때까지였다. 게다가 뒤주에 갇힐 때 폐서인이 됐기 때문에 사망했을 때 신분은
세자가 아니었다.
[3]
중종 때 일은
복성군의 친모인
경빈 박씨가
작서의 변을 일으켜서
세자를 모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여기에 복성군이 끌려들어간 형태였다. 사실 작서의 변, 그리고 여기에 이어지는 가작인두의 변은 꽤 정황이 복잡하므로
작서의 변 항목을 참고하길 바람. 그런데 중종에게는 차기 왕위를 이을 적장자
세자와 다른 서자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세자에게 혹 장애가 될지 모를
이복형을 미리 치워 주었다는 식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임오화변 당시 영조에겐 차기 왕위 계승자가 사도세자뿐이었던 데다 당시 영조의 나이가 69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당장 내일 승하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한 사도세자가 죽어 버리면 후계구도가 복잡해졌다. 이해할 여지는 오직 사도세자에게
아들(세손)이 있어 후계구도가 파국이 되는 것은 일단 면했다는 점이다. 만약 사도세자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영조가 또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가능성도 있다.
[4]
패악질로 폐세자된
양녕대군이 정상으로 보일 정도의 막장으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 세력도 광해군에게 임해군을 사사한 죄는 묻지 않았다.
[5]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봉된 이복남동생 이방석을 죽이고 실권을 잡아 즉위한 후에도 아내
원경왕후와 아들 세종의 남동생/외삼촌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유배보내고 사형시킨 것,
세종이 유배 중인 사촌형
이맹종을 사형시킨 것,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유배보내고 죽인 것,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고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제거하고, 조카인
단종을 억지로 폐위시켜 강원도로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린 것, 숙종이 아내
희빈 장씨를 사사해 죽인 것 같이 조선 왕사에서 국왕이 혈육을 죽인 사례는 상당히 많지만 아버지가 유일한 친아들을 앞장서서 죽인 사례는 사실상 임오화변이 유일하다.
[6]
머리에서 어깨까지 쓰는 방한용 털 모자.
[7]
궁궐이 바로 건너 붙어있다.
[8]
현재
창경궁 문정전
[9]
세자가 부왕을 전하도, 아바마마도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며 애원했다는 데서 당시 사도세자가 얼마나 급했는지,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세손의 휘항을 찾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듯 사도세자는 스스로도 죽음을 예감하긴 했으나 무척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영조도 조금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던지 7월 23일 세자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라고 한 번 언급했다.
[10]
시강원. 세자의 교육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하였던 관서이다.
[11]
당시 임덕제는 세자의 스승이면서 사관이기도 했다.
[12]
이 단어에는 논란이 많다. '백'(百)이라는 단어가 당시에는 '많음'이라는 뜻도 있어 글자 그대로 정말 100여 명을 죽였는지, 그 정도는 아닌 여러 명을 죽였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13]
세자의 어린 시절에는 정 5품 시독관이었으며
문경지치를 주제로 한 세자의 경연에 영조가 못마땅해 하며 애먼 트집을 잡자 세자를 변호한 전적이 있었다.
[14]
본뜻은 '나라의 근본' 이지만 황태자 혹은 세자 등을 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15]
지붕이 없는 작은 가마.
[16]
갈증 해소에 좋은 전통 청량음료. 여러 약재에 꿀을 버무려 끓였다가 식혀서 얼음을 띄워 마시는 한방 음료다.
[17]
풀뿌리가 붙어 있는 흙
[18]
훗날 구선복은 훈련대장 자리까지 올라갔으나, 정조 10년(
1786)에 반역 혐의로 일가 친척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구선복이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위의 일화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정조가 구선복을 안 좋게 여겼음은 분명해 보인다. 정조실록 중엔 구선복은 찢어죽여도 부족하며 경연 중에는 얼굴 마주하기도 싫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9]
사실 구선복의 운명은 정조가 즉위한 순간부터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선복이 방자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자신의 친아버지를 가둔 뒤주를 지켰던 인간을 그 아들이 어찌 곱게 보겠는가?
[20]
그는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한 달 뒤에 사사되었다.
[21]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
[22]
임금을 찾아 뵙는 것
[23]
대중적으로
소현세자를 미워했다고 막연히 알려져 있는
인조가 실제로는 소현세자의 죽음을 접하고 며칠째 수라를 못들 정도로 비통해 한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24]
보통 '한 해'를 의미하지만 한 해의 중간 지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는 음력 6월~7월의 한여름 정도가 된다.
[25]
중국에서 조선을 지칭한 표현.
[26]
차마 뒤주라고 부르지 못하고 '
그 물건(一物)'으로 불렀다.
[27]
면세 혜택조차 없고 과거에 나아가는 데도 일반 양반들과 차등 없이 응시할 수 있었다.
[28]
큰 틀에서는 위 내용처럼 세손을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되지만 문제는 세손이 세자를 제치고 선택할 선택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선 사도세자 외의 아들조차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바로 왕위를 물릴 수도 없고 세손을 어디 양자로 입적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좋든 싫든 세손은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사도세자를 건드리는 것은 곧 세손을 건드리는 것이 된다. 즉 영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세손을 위한다면 사도세자의 문제를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하든지 적어도 공론화를 시켜 이런 문제가 있으니 이렇게 진행한다고 합의가 되도록 판을 벌였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삽시간에 신하들의 반대도 완전히 강압으로 뿌리치고 강행해버린다. 후에 영조가 어떤 조치를 취했건 간에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정신병이 있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하든지 자신이 사도세자에게 양위하여
형식적으로라도 즉위시키고 곧바로 세손에게 양위하게 하여 태상왕인 영조가 대리청정하든지 최소한 세손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아들로 즉위하는 일은 없게 할 수 있었음에도 영조 스스로가 세손의 정통성에 가장 큰 타격을 직접 준 것이다.
[29]
그러나 태상왕의 대리청정은 가능성이 많이 떨어진다. 일본의
인세이만 봐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이지 할아버지가 아니고 조선에서도 세종 시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버지 태종이지 법적으로 할아버지(실질적으로는 백부)였던 노상왕 이방과가 아니었으니 전례를 따지게 되면 영조 입장에서도 피곤해질 상황이었다. 당장 어린 왕의 입장에서도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한들 할아버지보다는 아버지에게 정서적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영조 본인의 나이가 이미 칠순이 가까웠다. 안그래도 사도세자가 늦둥이라 이 때 고작 27세였는데 영조가 아무리 건강관리를 열심히 해 장수한다고 해도 사도세자보다 일찍 사망할 터였고 아무리 잘 쳐도 사도세자는 40대 초반 정도의 충분히 활동할 만한 나이일 것이 분명했다.
[30]
사관들이 남긴 개인적 기록에 따르면 사관이 이런 자리에서 나갈 수 없다고 죽기살기로 버텼으나 군졸들에게 질질 끌려나갔다.
[31]
조선 왕조의 임금들의 평균수명이 47세 정도였다곤 하나 이는
단종이나
인종,
예종 등 젊은 나이에 즉위 1년만에 급사한 왕들이 포함되어 그렇지, 조선의 군주들은 충분히 50대에서 60대까지도 살았다. 실제로 27명의 임금 중 55%가 넘는 15명의 왕이 5~60대까지 살았다.
[32]
사람이나 가설에 따라선 친소론 성향은 아닌데 노론에 비판적이어서 그렇단 말도 있다. 그래도 노론 성향이 아니어서 모함당했다는 설은 맞다.
[33]
물론 당시 소론 인물들은 대부분이 탄핵당했고 무사했던 이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조정은 노론 일색이 되었다.
[34]
특히 조선시대 왕은 평균수명이 짧은데 영조 때문에 길어졌다. 조선 임금들의 대부분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조선에서 장수한 왕들은 (
태조,
정종,
광해군처럼) 대부분 죽기 전에 왕위에서 물러난 인물들이다. 영조 이전에 국왕으로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62세에 퇴위한 태조와 60세에 사망한 부왕
숙종 정도였다.
[35]
당시에는 40대만 되어도 노인 대접을 받았고 50대면 노인으로 여길 정도였다. 무엇보다 80세 넘은 노인이 있으면 그 노인의 자녀에게 효자라고 벼슬을 주거나 노비이면 면천시켜 주었다.
[36]
후엔 세자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하는데 더 이상 비호해도 소용없고 되려 자신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억지로 그랬던 것일 수 있다.
[37]
물론 한유는 사도세자를 잘못 언급하여서 영조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끔살당한다.
[38]
두 가문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에 서로가 세자를 죽였다며 사이좋게 싸우긴 했다.
[39]
실제로 영빈 이씨가 혜경궁의 충고도 무시하고 사도세자의 광증을 영조에게 폭로한 것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것 때문에 손자인 정조가 영빈 이씨를 평생 미워했다고 한다.
[40]
성종의 친모인
인수대비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인수대비는 어쨌든 남편인
의경세자가 단지 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폐세자된 것이 아닌 데다 이후
정희왕후의 지원과 주도로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어서
소혜왕후라는 시호까지 얻을 수 있었다. 반면
혜경궁 홍씨는 실제로도 세손이 명목상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서 정조의 정식 어머니 자격을 잃었고 정조가 국왕으로서 궁여지책을 강구한 뒤에야 겨우 '자궁'(慈宮)이란 호칭을 받으면서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인수대비의 아들인 성종은 인수대비 외에도 할머니
정희왕후와 숙모인 예종비
안순왕후도 있어서 뒷배경이 매우 든든했지만 세손 정조에겐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41]
사도세자가 직접 약을 구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42]
다만 《현고기》는 소론 계열 당론서로서 시종일관 사도세자에게 우호적이고 노론에 적대적이다.
[43]
그 예로 영조 1년에 사형된 이천해의 발언은 영조의 명령 탓에 《실록》에 기록되지 못했다. 기록하지 말라고 하니까 다 적어 넣은 뒤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던
태종과
세종대왕 시대와는 딴판이다. 다만 이천해가 직접적으로 말한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 뿐 사관들은
나름대로 돌려서 기록하였다.
이인좌의 난 주모자였던 심유현의 진술 내용을 기록하면서 '심유현의 말이 이천해의 말과 똑같았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다른 기록에는 이천해의 행동 자체가 심유현의 사주라는 얘기가 있다. 즉, 이천해는 행차 중인 영조를 향해 길거리에서 대놓고 "선왕 살해범은 네놈이다!"라고 외쳤다는 뜻이다.
[44]
세자가 100여 명을 때려 죽이고
영빈 이씨마저 해치려 했다는 《대천록》 내용은 소론 측 기록인 《현고기》에도 똑같이 나온다. 이는 영조가 직접 지어 전국적으로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조가 읽을 책에 선왕이 직접 지어 전국적으로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을 조작할 간 큰 신하가 있을 리 없다.
[45]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
이덕일'을 가리킨다.
[46]
상식적으로 현대적인 정신병의 진단 기준을 알았을 리가 없는 혜빈 홍씨가 순전히 창작으로서 이렇게 구체적인 증상을 지어내지는 못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47]
《영조실록》 영조 37년(1761) 4월 22일 2번째 기사
[48]
사도세자의 관서행을 의미한다.
[49]
개인적으로 세자를 미워한 신하들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왕실의 정식 후계자인 왕세자 대신 형조판서 윤급의 일개 하인의 편을 들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왕실 자체가 흔들린다. 게다가 신하들은 세자의 비행이 알려지면 영조가 어떤 반응을 보일것을 잘 알고 있어서 세자를 보호하려고 그동안 철저하게 함구했는데 나경언이 폭로를 하여 제대로 사건을 터뜨린 터라 나경언을 좋게 볼 수 없었다.
[50]
《실록》 기록을 보면 나경언이 고변한 바로 다음날부터 뒤주에 갇히는 날까지 매일 '왕세자가 시민당에서 대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종종 궁관 등을 보내어 문안을 올렸지만 영조는 답이 없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51]
이것도 세손 정조의 보위와 정통성을 지키고 궁안의 마지막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한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 당시 중전
정성왕후와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잇달아 승하하면서 세자를 뒤에서 후원해주고 빽으로 뒷받침해주던 이들이 없어지니, 영조와 세자의 부자(父子)를 중재할 왕실 어른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총대를 맬 사람은 세자의 생모인 영빈밖에 없었다.
[52]
저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충분히 할 만한 말이다. 부모 존속살해 사건의 범인
이은석의 사례나
구의동 고3 존속살인 사건에서 보듯 현대에도 부모가 자식을 하도 갈궈댄 탓에 자식이 맛이 가버려서 부모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사도세자는 무려 20년이 넘게 학대를 당해 정신병에 시달렸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마저 예상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차라리 아버지를 죽여야 내가 살겠다 같은 소리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로 영조한테 죽었고.
[53]
사망 2년 전인 1760년 세자의 생일. 참고로 영조는 세자의 생일 때마다 세자를 신하들 앞에 세워놓고 앞담화를 하고
자아비판을 시켰다. 자세한 것은
사도세자 문서를 참고할 것.
[54]
사실 세자의 허물을 굳이 찾으라면 찾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영조가 애지중지하는 세손의 입지에도 타격이 간다.
[55]
세자가 있는 상태에서 세손을 왕으로 세우기도 힘들고, 세자를 폐서인한다고 하면 세손의 정통성에 흠집이 생기고, 영조의 성격대로 강행한다 쳐도 미치광이 대원군이(게다가 당시 사도세자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멀쩡히 있는 것도 국가의 장래를 위해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56]
그나마도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과 정조가 서로 물고 뜯었다.
[57]
이에 대해 꾀병이라는 시각도 있고
마음의 병이 신체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물론 진실은 사도세자만 알겠지만.
[58]
둘의 금슬은 별로 좋지 않았다. 거의 따로 살았다고 봐야 한다.
정성왕후가 병이 들었을 때부터 신경 안 썼고 당시엔 크게 축하받을 나이인 회갑연도 무시했고 죽기 직전에야 찾아갔을 뿐이다. 거기다 정성왕후가 죽은 그날 영조가 아끼던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죽었는데 아내의 장례식이 아닌 딸내미를 달래러 정치달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정성왕후의 이름을 꺼냄은 완전히 계산이었다는 것이다.
[59]
매우 소극적인 태도긴 했다.
[60]
경복궁의 교태전처럼
창덕궁에서 왕비가 기거하던 처소.
[61]
현대 기준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우울/조울증은 장애 판정을 받을 수 있다.
[62]
프리드리히 대왕도 비행으로 인해 사도세자처럼 부왕에게 살해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부왕보다 높은 지위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말렸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63]
세자가 할머니인 인원왕후의 처소에서 과식을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소리가 거칠다, 가마에 탔는데 벌써 낑기더라, 내가 저 나이 땐 저렇지 않았다 등이 있다.
[64]
일상복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차림에 낡으면 기워입기조차 했다고 한다.
[65]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딸들의 혼례와 장례엔 아낌없이 돈을 썼다.
[66]
옷을 입을 때마다 사도세자가 족족 찢거나 태우고 그 과정에서 사람도 죽이며 난리를 피워 대서 옷 한 벌을 갈아입기 위해 수십벌이 필요했다. 한복, 그것도 세자가 왕을 뵙거나 행사 참석을 위해 예를 갖추어 입는 의장은 한벌 짓는 데 들어가는 재료, 장식, 수공도 다 엄청난 고가품이다. 세탁할 때는 그때마다 다 풀어 천 상태로 빤 다음 다시 바느질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궁에 침방이라는 부서가 따로 있고 상위부서 대접을 받았으며 빨래가 중노동이었던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더구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침방 소속 나인 혹은 이 빨래에 쓰일 물을 길어나르는 무수리였다는 설을 생각해 보면...
[67]
물론 사도세자가 사고쳐서 지은 이 빚은 영조가 다 갚아야 했다.
[68]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죽어가던 칠팔일 동안에도 변함없이 정해진 시간에 수라를 먹고 취침을 하고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69]
당장 영조의 아버지인 조선 숙종이 조선 역대 왕들중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 적장자인 동시에 외동아들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70]
종친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사도세자와 대립해서 내세울 가까운 남자 종친조차 없었다. 숙종의 아들 연령군은 자식이 없어서 낙천군을 양자로 들였고 낙천군도 자식이 없어서 달선군을 양자로 들였으나 1748년에 자살한 후 후사가 끊긴 상태였다. 즉, 영조 당대에는 숙종의 남계 후손이 사도세자밖에 없었다. 게다가 숙종은 2대 독자였기에 종친을 찾기 위해서는 사도세자의 5대조인 인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인조의 자손들은 많이 남아있었지만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 모두 왕인 사도세자와는 경쟁이 성립할리가 없다.
[71]
사실 이건 영조의 억지인게 영조야 부왕 숙종이 직접 부추기기도 했고 선왕살해 의혹 등 본인이 자초한 정치적 위기로 인하여 세심할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환경었다.
[72]
한중록에서는 이것도 사도세자의 병을 만든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현대적인 표현으론 너무 이른 연령에 애착형성이 불안해지고 행동거지가 의심스러운 양육자-궁인들에게 둘러싸여 나쁜 영향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영조는 세자의 교육에 의욕이 너무 넘쳤는지 직접 교재를 만드는 등 너무 깊고 까다롭게 개입했다. 훗날 영조도 사도세자의 일로 깨달음을 얻었는지 정조에게도 강도 높은 공부를 시키긴 했지만 적어도 사도세자보다는 진도도 천천히 나갔고 교육도 어느 정도 나이가 찬 4세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이쪽은 정조가 도리어 공부를 열심히 잘 했다.
[73]
대표적인 반대 사례가 영조의 증조부였던
효종이다. 효종도 어떤 면에서는 영조보다 더 평지풍파 지독한 정치환경을 겪고 형
소현세자의 사후 겨우 왕위를 이었지만 아내와 자식들과 사이가 좋았고 그중에서도 (사도세자처럼) 외아들인 세자를 지지해 주며 모범적인 부자관계를 유지했다. 그 세자였던
현종은 이런 안정적인 계승 과정을 바탕으로 마지막-후대에는 조선의 헤게모니(
송시열)마저 극복하고 왕권을 공고히 했다. 불행히도 영조는 이러한 증조부의 성품을 전혀 물려받지 않은 듯하다.
[74]
하다못해 효종까지 갈 것도 없이 할아버지인 현종의 온화한 성품을 물려받았어도 이런 참상은 없었을 것이다.
[75]
일각에선 친할머니인
명성왕후의 성품을 물려받아서 그렇다는 평도 있지만 이것도 사실상 틀렸는데 명성왕후 본인은 다혈질이긴 해도 자식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의외로 여러 공주들을 편애 없이 대하였고 아들 숙종이 수렴청정도 없이 친정을 단행하여도 명성왕후는 홍수의 변, 인경왕후 사후 계비 간택 같은 왕실 내 친족관계 문제에 개입하는 것 외에는 영조처럼 아들인 숙종에게 큰 압박을 가한다든가 아예 무시하다시피 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선왕의 왕비인 왕대비가 국왕인 자식을 감싸고 내정에 개입하는 건 워낙 동서고금 역사적으로 있어 왔던 일이라 문정왕후가 돌아왔냐는 궁시렁은 들어도 영조처럼 아예 이해가 안되거나 신하들이 모두 말리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애초에 대비인 본인을 확실히 지지하는 적지 않은 신하와 세력을 동원한 것이다. 한마디로 영조가 명성왕후의 성격을 상당히 물려받았다 쳐도 사도세자를 학대한 행위는 전혀 별개라고 보는 것이 맞다.
[76]
후일 세손, 즉 정조가 적법한 후계자로 즉위하긴 했지만 그럴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바로 이 사건으로 사도세자가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77]
평소 왕이 사는 궁궐 바로 옆인 동궁에 거쳐하는 세자가 왕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평양 같이 먼 곳으로 자기 마음대로 외출을 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78]
정조는 어렸을 때부터 취미가 공부였으며 아예 즉위한 후에는 신하들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쳤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우리 임금께서는 진실로 성인이셨다."라고 묘지문(墓誌文)을 적었을까.
[79]
《영조실록》 97권, 37년 1월 5일(을사) 2번째 기사.
[80]
당시의 어린 세손도 이것이 심상찮은 발언임을 알았는지 "괄목한만한 성과다."라는 칭찬까지는 《승정원일기》의 기록과 일치하지만 300년 명맥 운운하는 발언은 일성록에 적지 않았다.
[81]
영빈 이씨가
영조와
혜경궁 홍씨에게 남긴 말, 영조가 세자를 죽이기 직전의 말을 보면 '세손이 위험하다, 세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82]
김백철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도 역사학자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정병설 교수 같은 경우는 조선 시대 문학을 전공한 국문학자다. 인문학의 특성상 특정 시대 문학을 전공하려면 해당 시대의 역사를 당연히 전문가 수준으로 알아야 한다. 서구 학계에서
고대 그리스 문학을 연구하는 고전학자들은 고대사 전공자와 거의 구분이 없다.
[83]
사도(영화)에서는 이에 대한 해석으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세자로써 스스로 죽게 했어야 했다는 해석을 했다. 만약 죄인으로써 법전에 있는 형벌로 세자를 죽이면 세손은 사형당해 죽은 역적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왕통을 이을 명분에 치명타를 입게 된다. 따라서 '죽기는 했는데 죄인으로서 죽은 것은 아니다' 라는 식으로 기록을 남겼어야 했다는 것. 칼로 자결을 시키려 하자 신하들이 말리는 등 애로사항이 나왔고 결국, 사형 집행이 아니면서도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게 하면서 강제로 죽게 했어야 했다는 의미. 다만 영조가 처음부터 뒤주형을 계획한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자결시도가 실패했다고 해도 도모지형 같은 다른방법을 쓰지도 않고 오히려 전시효과와 잔혹성으로 이에 따른 후폭풍이 심각한 뒤주형으로 사도세자를 죽인점을 보면 영조도 첫날 자결시도가 실패한 이후 어쩌면 그 이전부터 사도세자를 곱게 죽일 마음 따위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84]
작중 상황을 보면
정성왕후와
인원왕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사도세자를 싫어하고 영조에 빌붙는
숙의 문씨를 제대로 제지할 수 있었고 영조에게도 당당하게 간언할 수 있는 지위와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정성왕후와 인원왕후는 영조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받는 사도세자를 위로하는 그야말로 든든한 버팀목이였다. 이러한 든든한 버팀목인 두 사람이 연이어 사망하자 걱정된다는 혜경궁 홍씨의 대사도 있다.
[85]
노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86]
다만 이와는 별개로 노론 전체를 악역으로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 무엇보다도 임오화변 관련 노론 음모론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는 정조 독살설을 채용하지 않은 점은 호평받을만 하다.
[87]
드라마는 가상의 조선. 하지만 사동세자의 모티브가 원작의 사도세자이고 뒤주가 아니라 우물에 갇히는 것 정도만 제외하면 드라마도 유사하다.
[88]
후궁 소생의 왕자는 세자로 책봉될 경우에 법적으로 중전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89]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는 정성왕후와 달리, 사도세자와 인연이 깊지 않고 그닥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오화변 당시 정순왕후는 나이가 너무 어리고 입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터라 권위가 약해서, 영조를 막을 명분과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