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16:22:08

작서의 변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작서의 변3.2. 유생 이종익이 일으킨 파란3.3. 가작인두의 변3.4. 이후의 일3.5. 범인은 누구인가?
4. 야사5. 소설6. 드라마

1. 개요

조선 중종 22년(1527) 일어난 무고사건.[1] 작서(灼鼠: 불에 탄 쥐)의 변(變)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사건의 계기가 불로 지져진 쥐였기 때문. 시작은 작서의 변이지만 가작인두의 변과 그 이후까지 사건의 흐름이 길게 이어진다. 중종, 김안로, 경빈 박씨 복성군, 그리고 어쩌면 문정왕후도 엮였을지 모르는 복잡한 정치적 음모이다.

2. 배경

중종은 평생 3번 결혼했다. 제일 먼저 연산군 5년(1499), 아직 진성대군이던 시절에 형 연산군의 총신인 신수근의 딸과 결혼했으나 1506년 중종반정 성공으로 반정공신들 등쌀에 폐서인이 돼 쫓겨났다.[2]

그해에 중종은 반정 공신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여 숙의(淑儀) 직첩을 내렸으니 숙의 윤씨, 숙의 박씨, 숙의 홍씨였다. 중종은 숙의 윤씨, 즉 파원부원군 윤씨의 딸을 골라 결혼하였으니 바로 인종의 친어머니인 장경왕후이다. 장경왕후는 중종 10년(1515)에 미래의 인종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빈 박씨 중종에게 총애받던 후궁이었고, 장경왕후와 같이 궁궐에 들어와 숙의 직첩을 받았던, 역시 중전이 될 수도 있었던 후보였다. 당시 조선에는 임금이 왕후를 후궁 중에서 고르는 관례가 있었으므로[3] 경빈 박씨도 중종의 세 번째 왕후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중종의 마음도 내심 경빈 박씨에게 있었으므로 대신들에게 물어 타진해보려 하였다.

다만 경빈 박씨는 경상도 상주의 한미한 사족 박수림의 여식이라 집안에 힘이 없었다.[4] 실록에도 채홍사의 눈에 띄어 궁중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보다 앞서 곤위(坤位)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을 때(중종 10/1515)에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후궁 가운데에서 총애가 으뜸이었으므로, 장경(章敬)의 예를 따라 스스로 중위(中位)에 오르고자 하였었다. 상도 이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대신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겠으므로, 정광필·김응기·신용개 등에게 간곡한 말로 물어서 그 뜻을 시험하였다.

그랬더니 김응기는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신용개는 약간 허락하였으나, 정광필만이 분연히 허락하지 않으며 아뢰기를 '정위(正位)는 마땅히 숙덕(淑德)이 있는 명문(名門)에서 다시 구해야 할 것이요 미천한 출신을 올려서는 안 됩니다.' 하고, 진서산(眞西山)의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제가(齊家)하는 요체(要諦)와 범조우(范祖禹)가 후비 간택을 논한 일을 진간(進諫)하니, 박씨의 뜻은 마침내 저지되고 상의 뜻도 새 왕비를 맞기로 결정되었다. 사림(士林)에서 이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정광필의 이번 일은 송(宋)나라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이라 해도 더 낫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7월 22일 12번째 기사
위에 인용한 사신의 평에서 나오듯, 1515년 장경왕후가 죽어 차기 중전을 논의할 때 정광필은 '박씨의 집안이 명문이 아니라 미천하기 때문에 왕비가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 사림 또한 이를 칭송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유, 또는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했다. 당시 대신들이 경빈 박씨가 왕비 됨을 경계한 진짜 이유는 국본(國本), 즉 왕세자 문제였다. 정광필이 총대를 메고 반대 의견을 표하자 다른 이들도 여기에 말을 함께 붙였다. 그리하여 중종도 물러났다.

그런데 여기서 중종의 말을 보자.
내가 듣건대 성종(成宗) 때에 공혜왕후(恭惠王后)께서 승하하시매, 그 해(1474)에 곧 처녀를 간택(揀擇)해 두었다가 3년 뒤에 정하였다고 하는데,[5] 이는 그때에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서둘러 할 것은 없다. 다만 궐내(闕內)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로 할 것인지 각별히 뽑을 것인지를 정승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나, 3년 뒤에 명문의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야 하리라.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10월 2일 첫 번째 기사
예전에 뽑아두었던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은 전례가 있지만 그때는 세자(국본)가 없었고, 중종 자신의 경우에는 세자가 이미 있으니 꼭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중종이 이 말을 한 이튿날, 중종은 정광필 등 대신 여러 명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대놓고 '적서' 문제와 '국본'을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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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이) 유순ㆍ정광필ㆍ김응기ㆍ김전ㆍ남곤ㆍ성몽정 등을 인견하였다. 유순이 아뢰기를,

"이번에 중궁을 책립(冊立)하는 것은 국가의 큰 일이니, 근일에 행할 일이 아닐지라도 성려(聖慮)에 미리 헤아리셔야 합니다. 신이 《대학연의》에서 범조우 등의 바른 논의를 보고 상께서 아셔야 하겠으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습니다. 이 일은 상께서 반드시 고례(古禮)를 따르셔야 합니다.

진서산(眞西山)이 옛일을 여러 가지로 인용하였으나, 오로지 첩을 아내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옛 제후는 한 번에 아홉 여자를 얻고, 세 나라에서 잉녀(媵女)를 보내되, 한 사람만을 비(妃)로 삼았는데, 그 비의 자리가 비게 되어도 차서에 따라 계승(繼陞)하지 않은 것은 한때 같은 무리로 있던 사람이 자리가 높아지면 아랫사람이 존경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이를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므로, 이처럼 염려한 것입니다. 후세에서 계립(繼立)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고는 하나 같은 무리에 있던 자를 올려서는 안 되고, 새로 가려서 세워야 적처를 다투는 일이 없고 궁중이 다 새로운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어 체모가 매우 합당하므로, 표를 붙여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신 등의 생각은 유순이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대개, 범조우의 말이 곧 정례(正禮)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상께서 정례에 따라서 행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원자(元子)께서 어리더라도 인심은 크게 정해졌으니, 신의 마음에는 늘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하고, 또 이어서 중궁이 되신 이도 자기 소생을 사사로이 사랑하지 말고 원자를 자기 소생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으며, 정례도 저러하므로, 신의 생각을 아뢰었습니다.

상께서 내정(內政)을 워낙 우연하게 하지 않으시니 어찌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이어서 중궁이 되신 분이 만약에 '이는 내 소생이고 저는 남의 소생이다.'라고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이런 생각이 싹트게 되면 일이 크게 어그러질 것입니다. 또,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正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鏌鎁)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 정적(正嫡)을 존중하는 것은 바른 예에 맞을 뿐 아니라, 만세를 염려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조종조에서 승봉(陞封)한 전례가 있을지라도 실로 정례에 맞지 않으며, 시세(時勢)도 다릅니다. 그때는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박절하도 참람한 마음이 없었으나, 지금은 국본이 이미 정해졌고 만세를 염려해야 하니, 성심(聖心)에 먼저 정해진 의향이 계셔야 하므로 아뢴 것입니다."

하고, 김응기가 아뢰기를,

"신 등이 한때에 함께 의논하였으므로 뜻도 같습니다. 이제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적서의 분별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분명하게 하지 않고 문란하게 하면 마침내 염려할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적서의 분별을 현격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이 일에는 이미 옛 관례가 있으나, 국가의 전례(典禮)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전(慈殿)께서 위에 계시니, 널리 가려서 보신다면 어찌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아낼 수 없겠습니까?"

하고, 유순이 아뢰기를,

"어질고 덕이 있는 자를 알고자 하신다는 분부는 지당하십니다. 처음 가릴 때에 자전께서 덕용(德容)과 위의(威儀)를 두루 보신다면 어진지를 알 수 있으니, 궁중에 오래도록 두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의(衍義)》에 실린 옛사람의 말은 참으로 만세토록 지당한 말이다. 정위(正位)가 엄하지 않으면 엿보는 폐단이 많을 것이다. 다만, 비(妃)를 맞아들이는 일은 한번 정해지면 가벼이 고칠 수 없고, 어질고 덕이 있는지도 하루아침에 알 수 없으므로 조종조에서 곧 정하지 않고 궁중에 오래 들어와 있게 한 뒤에야 정하였다. 측실(側室)은 명분이 이미 정해져 있는 자이므로 승봉하는 것이 이미 온편치 못하고, 새로운 사람은 문득 그 어질고 덕이 있는지를 알 수 없으며, 또 대신의 의향을 아직 모르므로 묻는다."

(중략)

유순이 아뢰기를,

"상께서 거기까지 염려하시는 것은 지당합니다. 덕이 없는 자가 계립(繼立)하여 자기 소생이냐 남의 소생이냐에 뜻을 두면, 국본이 계시므로 마침내 지극히 어려운 일이 있게 될 것이니, 정중하게 가려야 합니다."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대신이 아뢴 것이 다 충성된 말이요 지극한 생각이며, 상께서 때아니게 전좌(殿坐)하여 마음을 비워 놓고 받아들이시니, 참으로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국가에 어찌 이처럼 중대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제 국가에 변고가 있어 궁중의 정위가 비게 되었으니, 이어서 명분을 닦는 일을 처음부터 바르게 해야 합니다.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은 집을 다스리는 데에 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자면 먼저 집안의 일을 바루어야 하니, 적서의 분별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근래 천재가 잇달아 이르며,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고, 남도(南道)에서도 세 발 달린 닭이 났는데, 옛글에 다 여자로 인한 화난인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옛글은 비록 끌어대어 얽매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나, 내정(內政)은 더욱이 엄해서 처음부터 엿보는 조심이 없게 해야 마땅한데, 이 또한 천변에 참되게 응답하는 것이 됩니다."

(중략)

김전이 아뢰기를,

"근래 천재가 매우 많으니, 공경(公卿)의 자리에 있는 자라면 누구인들 두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연의》에 표를 붙여서 바친 것은 처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군자의 도는 부부(夫婦)에서 시작한다.' 하고 또 '부부는 생민(生民)의 시초이고 만복의 근원이다.' 하였거니와, 적서의 분별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면 마침내 화환(禍患)이 클 것입니다.

조종조의 고사가 있기는 하나 시세가 다르니 지금에 있어서는 마땅하지 않으며, 지금은 원자(元子)께서 어리시니 더욱 신중히 해야 할 때입니다. 신중할 수 있다면 미리 궁내에 들어오게 하지 않더라도 어진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융례(隆禮)에는 기한이 있는데, 처음부터 명분을 바르게 하지 않고서 오래 궁중에 있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중종실록 중종 10년(1515) 10월 3일 2번째 기사
대신들이 경빈 박씨를 거부한 진짜 이유는 명확하다. 박씨를 중전으로 들이면 '적서의 차별이 깨진다.'는 것이다.

만약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당연히 중종의 적장자는 복성군이 된다. 원래 복성군은 서장자이고 인종이 중종의 적장자인데,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면 복성군이 적장자, 인종이 적차자가 된다.

성리학적 종법질서에서는 한번 정해진 상하관계가 깨지는 것을 거부하였다.[6][7] 임금의 어머니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한은 없지만, 그런데도 어머니로서 아들-임금보다 윗사람이 된다. 어머니는 아들보다 윗사람이고, 이 관계를 깨트림은 패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본래 서장자였으나 적장자가 되어 본래의 상하관계가 깨짐 역시 매우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정광필은 직설적으로 "왕자가 많더라도 적서(嫡庶)와 상하의 분별은 하늘과 땅처럼 현격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아들을 둔 후궁, 즉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되면 적자와 서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분이 깨진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또한 "뒤에 난 왕자도 '나도 정실(正室) 소생이고 저도 정실 소생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국가와 백성의 화가 마침내 막야(鏌鎁)보다 참혹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정광필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적서의 구별이 깨지는 것, 그리고 이 때문에 차기 임금이 누가 될지 다툼이 생기는 것이었다.

정광필뿐만 아니라 자리에 동석한 대신들은 여러 번 비슷한 문제를 거듭 강조하며 경빈 박씨를 거부했다. 다만 임금의 체면이 있으므로 완곡하게 돌려 말했을 뿐이다. 유순은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졌는데 버금자리에 있던 자가 존위(尊位)에 오르면 적처의 자리를 다투어 국본도 어려움이 있을 것"하였고, 김전은 "적서의 분별이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지면 마침내 화환(禍患)이 클 것입니다." 하였다.

게다가 당시 대신들은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도 짚었다. 만약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자기 배로 낳은 아들을 미래의 임금으로 밀어줄 테고, 복성군 또한 '나도 적자인데 왜 내가 왕이 되지 못한단 말인가?' 하며 야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차기 임금의 자리를 두고 조정이 두 쪽이 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시점(1515)에는 아직 중종은 공식적인 세자를 지정하지 않았다.[8] 만약 경빈 박씨가 왕비 자리에 올라 복성군이 적장자가 된다면, 중종이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9]

결국 중종은 경빈 박씨를 중전으로 택하기를 포기하고 재위 12년(1517)에 새로 여자를 간택하여 왕비에 올렸으니 바로 문정왕후이다. 경빈 박씨는 처음 궁궐에 숙의로 들어온 때에 장경왕후에게 밀려 중전이 되지 못했듯, 중종 12년에도 문정왕후에게 밀려 또다시 중전이 되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경빈 박씨는 미래의 인종에게 원한이 있을 수 있었고, 자신의 눈 앞에서 사라진 지위가 아쉬울 법하였다. 물론 신하들은 설사 인종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반대했을 수 있겠지만... 문정왕후가 아니더라도 조선시대의 왕비들은 희빈 장씨 같은 예외를 빼면 죄다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중종은 재위 15년(1520)에 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궁궐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임금에게 적장자가 없다면 적차자가, 적차자마저 없다면 서장자가 왕위를 계승한다. 만약 세자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문정왕후가 계속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중종의 서장자로서) 복성군이 다음 임금이 될 수도 있었다.[10]

이런 상황에서 작서의 변이 일어났다.

3. 전개

3.1. 작서의 변

중종 22년(1527) 3월 22일, 좌의정 이유청(李惟淸)과 우의정 심정 등이 중종을 알현하면서 지난 2월 25일, 세자(미래의 인종)의 생일에 누군가가 죽은 쥐의 사지를 찢고 불에 태워 세자의 침실 창 바깥쪽에 걸어두었다는 이야기를 보고했다. 중종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실록에서 사관이 부연한 바에 따르면, 세자의 외할아버지( 장경왕후의 아버지) 윤여필(尹汝弼)이 우의정 심정에게 이야기했고, 심정이 다시 좌의정 이유청과 상담한 다음 같이 중종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중종은 "이 일이 밖에 알려졌는데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고 말하고 사건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이튿날 조사해보니 죽은 쥐가 동궁 거처에 매달리긴 하였지만, 세자의 침실 창문 밖이 아니라 여러 전(殿)의 하인들이 오가는 곳에 걸렸던 관계로 쉽게 범인을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세자의 생일만이 아니라 3월 1일에도 비슷한 짓을 또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주술로 세자를 해하려 했다면 은밀한 곳에 했을 텐데, 이처럼 뻔히 보이는 곳에 하였으니 틀림없이 그로써 누군가 이득을 보려고 수작을 부린 것이라 하였다.

동궁의 시녀들을 불러모아 조사해보니 이렇게 증언하였다. 2월 25일(세자의 생일)에 시녀들이 동궁의 북서쪽 담장 밖 살구나무(唐杏樹) 가지 끝에 허리가 삼끈에 감겨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은 쥐를 목격했는데, 근처에 준치의 머리와 물푸레나무 조각도 함께 매달려 있었다. 처음 이것을 본 시녀는 누군가 액땜하고자 행한 주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퍼져 이튿날 다른 시녀가 찾아가 쥐를 묶은 줄을 풀고 살펴보았더니, 쥐는 꼬리가 반쯤 잘렸고 주둥이와 눈코입이 모두 불로 지져져 있었다. 세자의 생일에, 하필이면 쥐가 동궁의 해방(亥方: 북북서)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세자를 노린 주술로 여겨[11] 대비전( 자순대비)에게 보고했더니,[12] 대비는 근처의 통행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사건이 알려진 뒤 시강원 보덕 황사우黃士祐 또한 위 시녀와 같은 논리로 틀림없이 세자를 저주하는 주술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취조를 받은 시녀는 3월 1일에도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大殿)의 곡란(曲欄)[13] 아래에 꼬리와 네 발이 달리고 불로 지져진 쥐가 버려져 있었는데, 대전의 시녀들이 세자궁으로 가지고 올 때만 해도 살아있었지만 금방 죽어버렸다고 증언했다. 그 쥐를 목격한 시녀들은 다들 "틀림없이 지난 번에 쥐를 매단 자가 했을 것이다." 하고 말했다 하였다.

4월 3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은 시녀가 증언한 바를 접하고 "강녕전(대전)에는 곡란이 없다." 하면서 좀더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알고 보니 중종은 대전의 고란(高欄)에 앉아 있을 때 아래에 죽은 쥐가 있는 것을 보고 별 생각 없이 갖다 버리라고 나인들에게 명령했는데, 바로 그 쥐가 주술에 사용된 쥐였다고 한다. 나인들이 쥐를 버리려다가 불에 지져진 것을 보고 다른 궁인들에게 이야기하고 보여준 것이다.

조선의 법률에 따르면,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나 죄인들을 풀어줄 때에도 저주를 행하다가 잡힌 자는 풀려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저주를 극악한 범죄로 보았다. 하물며 왕이나 세자, 왕비 등을 저주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는 중대한 범죄였기 때문에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현장을 오가는 궁인들을 모아 형벌을 가하면서까지 조사했지만 아무도 범인을 보았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경빈 박씨를 모시는 시녀 범덕(凡德)이 증언을 실수했다. '3월 1일 홍 귀인( 희빈 홍씨)은 대비전에 갔지만 경빈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쥐를 태운 자가 경빈이라고 억측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 것이다.

실록에 직접 나타나진 않지만, 다른 부분의 내용까지 합쳐 보면 3월 1일 홍씨와 경빈 박씨가 모두 대전에 있다가 홍씨만 대비전으로 가고, 경빈은 시녀 범덕과 함께 계속 대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대전 근처에 쥐를 버린 자가 경빈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이 궁인들 사이에서 돌았던 모양이다. 또한 이때 경빈을 모신 시녀가 범덕이었고, 경빈의 지시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였다.

범덕이야 자기 나름대로는 모시는 주인을 변호하고자 꺼낸 말이지만, 다른 증거를 잡지 못해 답답해하는 입장에서는 용의자가 제 발로 나선 격이었다. 만약 경빈이 교사범이라면 범덕은 실행범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중종에게 보고하자 중종도 의심스럽다고 하면서 고문을 추가로 가하며 심문하라고 허가했다. 그리하여 관리들이 모질게 고문하며 심문했지만, 범덕은 끝까지 견디며 범행을 부인했다. 신료들은 중종에게 저주 사건의 범인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용의자는 범덕뿐이었고[14] 그마저도 철저히 혐의를 부인했다. 범인을 벌하려 해도 범인이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중에 4월 14일 자순대비 한글로 글을 내렸다. 대비가 쓴 글의 내용에 따르면 3월 28일 경빈의 첫째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의 계집종들이 인형을 만들어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면서 "쥐 지진 일을 발설한 사람은 이렇게 죽이겠다." 하고 저주하여 욕설을 했다 하였다. 대비가 이 일을 듣고 관련자들을 모아 추궁하니 일부는 자복하고 일부는 자복하지 않았지만, 대비는 관련자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른 혐의자가 없으니 경빈 박씨의 계집종들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순대비가 경빈을 직접 범인이라고 지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번 용의자라고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15]

그래서 경빈과 혜순옹주를 모시는 시비들을 모아 고문을 가하며 추궁했지만 이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4월 21일자 중종실록에서 심정이 중종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경빈과 혜순옹주를 모시는 시비들이 6번이나 고문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죽음을 각오하고 범행을 자백하지 않으니 임금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날 중종은 경빈 박씨를 폐서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승정원에서 교지(敎旨)[16]를 작성해야 했는데, 범인이 경빈이라고 자백한 사람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 폐서인하는 사유를 교지에 뭐라고 적어야 하는가? 그래서 승정원에서 중종에게 뭐라고 적으면 좋을지 지침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중종도 할 말이 궁했는지 은근슬쩍 책임을 자순대비에게 돌렸다. 대비께서 박씨를 의심하는 글을 보내셨으니 그것에 의지하여 작성하란 것이었다.

하지만 자순대비도 자기가 경빈 박씨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4월 23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자순대비는 다시 중종에게 글을 보내어 '내가 경빈을 의심하긴 했어도 반드시 범인이라고 확정한 것은 아니다.' 하는 뜻을 강경하게 표명했다.

사건이 불거진 어느 시점부터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궐 밖에서 머물렀다. 삼사(三司)나 유생 등은 폐서인에 그치지 않고 법에 따라 벌을 주라고 중종에게 상소했지만, 중종은 두 사람을 박씨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로 유배 보내는 데에 그쳤다. 범덕을 비롯하여 문초를 받았던 나인들이나 시비들도 저마다 벌을 받았다.

중종 24년(1529), 김안로의 아들이며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한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가 중종에게 아버지를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중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사면하였다. 김안로는 사면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다.

중종 25년(1530), 자순대비가 사망하여 문정왕후가 여자로서는 왕실의 가장 웃어른이 되었다.

3.2. 유생 이종익이 일으킨 파란

유생 이종익(李宗翼)은 벼슬도 없으면서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당시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가 중종 22년(1527) 6월에 처음 올린 상소는 당시 한재(旱災 가뭄 피해)가 영산군 등이 억울한 일로 벌을 받아 생긴 것이니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산군은 역모의 도당들에게 추대된 혐의로 중종 18년(1523) 유배를 떠난 사람이다. 중종실록에는 그가 올린 상소문 내용은 길게 싣고 중종의 반응은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파장은 제법 있었던 듯하다.

실록에 따르면 이종익은 이후로도 중종 24년(1529) 10월, 25년(1530) 9월, 27년(1532) 3월까지 모두 다섯 번 상소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조용한 못에 돌을 던지듯 파란을 일으켰다. 중종 25년(1530) 9월에는 자신이 과거시험의 정시에서 합격하지 못하고 낙방한 것은 심언광(沈彦光) 때문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대사간이던 심언광은 억울하다면서 중종에게 체직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 상소로 이종인은 한양으로 끌려와 옥에 수감되었는데, 이번에는 옥 안에서 '남곤(南袞), 이항(李沆), 심정(沈貞), 김극핍(金克愊)에게 박씨(경빈)가 비단 5필씩 뇌물로 보냈는데, 남곤만 거절하고 나머지는 다 받았다.' 하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이종익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는 고양군수 임계중(任繼重)을 조사해보라고 중종은 명령했다.

이종익이 폭탄을 던진 시점에서 경빈 박씨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사람들 중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출사한 사람은 심정밖에 없었다. 이종익은 미친 소리를 한단 이유로 경상도 기장(機張)으로 유배를 갔지만 심정은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받았다. 결국 심정은 파직되었는데,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는 그를 확실히 찍어내고자 하였다. 두 사람이 중종에게 보고를 올리며 말하기를, 작서의 변 때 경빈 박씨가 심정에게 뇌물로 비단과 호박영자(纓子)[17]를 보냈다 하였다. 중종 25년(1530) 11월 21일 자 실록에서 사관은 일을 논평하며 '김근사와 권예가 모두 김안로의 무리이니, 중종과 이미 의논을 마치고 심정을 찍어낸 것'이라고 하였다. 사관은 중종과 김안로 일파가 서로 미리 뜻을 맞추고 심정을 찍어내었다고 본 것이다.

중종 26년(1531)에는 종로에 비방서가 붙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비방서를 심정의 아들 심사순(沈思順)이 썼다는 이유로 심사순은 고문을 받다 죽고 심정은 사사되었다. 여기에는 작서의 변에서 심정과 심사순이 경빈 박씨와 모종의 모의를 했다는 혐의도 걸렸다.

또한 이해 4월에는 효혜공주가 병으로 죽었고, 같은해 10월에는 남편 김희가 죽었다.

중종 27년(1532) 3월 이종익이 귀양지에서 보낸 상소가 당도했는데, 유자광, 심정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벌주었던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이종익이 귀양지에 있으면서 조정의 일을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하며 그를 다시 한양으로 끌고와 투옥하여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3월 20일에는 옥중에서 이종익이 쓴 상소가 올라왔는데, 여기서 그는 '작서의 변은 경빈 박씨 복성군과는 무관하고, 김안로의 아들이자 효혜공주와 결혼한 부마 김희가 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은 중종에게는 상당히 중대한 도전으로 보인 듯하다. 상술했듯 효혜공주와 김희는 죽었고, 김안로는 이미 당대의 권신이었다. 모두 중종이나 대신들은 틀림없이 이종익의 배후에 근원이 있으리라 여겼지만 그를 광인 정도로 간주하고 묻으려 한 듯하다. 이종익은 이해 3월 26일,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인터넷으로 '작서의 변'을 검색해보면, 작서의 변이 김희가 한 짓이라고 이종익이 상소를 올림으로써 드러났다고 말하는 자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종익은 옥에 수감된 채 근거를 대지도 못하고 그저 '김희가 아버지 김안로의 지시를 받아 작서의 변을 꾸며내었다.'고 주장했을 뿐이고, 조정은 이 말이 사실인지 조사하지 않았다. 또한 이종익은 이 일로 사형을 받았다. 그가 도대체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김희가 작서의 변을 꾸민 범인이라고 주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3.3. 가작인두의 변

작서의 변이 일어나고 6년 뒤, 유생 이종익이 사형을 받고 1년이 지난 중종 28년(1533) 5월 17일, 동궁의 남쪽 파자(把子) 울타리에서 또다시 저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종이로 사람 머리를 만들어 눈·코·입과 머리카락을 그리고 목패에 꽂았는데, 앞면에는 세 줄로 아래 내용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ruby(猶, ruby=유)][ruby(世, ruby=세)][ruby(子, ruby=자)][ruby(身, ruby=신)], [ruby(陵, ruby=릉)][ruby(遲, ruby=지)][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ruby(猶, ruby=유)][ruby(世, ruby=세)][ruby(子, ruby=자)][ruby(父, ruby=부)][ruby(主, ruby=주)][ruby(身, ruby=신)][ruby(乙, ruby=을)], [ruby(絞, ruby=교)][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ruby(猶, ruby=유)][ruby(中, ruby=중)][ruby(宮, ruby=궁)][ruby(身, ruby=신)][ruby(乙, ruby=을)], [ruby(斬, ruby=참)][ruby(爲, ruby=위)][ruby(乎, ruby=호)][ruby(事, ruby=사)]。
이처럼 세자를 능지하고
이처럼 세자의 아버지 임금을 교살하며
이처럼 중궁(문정왕후)을 참(斬)할 것
뒷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五月十六日, 兵曹書吏韓忠輔等十五人爲白乎事。
5월 16일, 병조(兵曹) 서리(胥吏) 한충보(韓忠輔) 등 15인이 행한 일임
이 사건을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었다(假作人頭).' 하여 '가작인두(假作人頭)의 변(變)', 또는 목패(木牌)에 꽂혀 있었다 하여 '목패의 변'이라고 부른다.

상식적으로 궁중에 대놓고 왕과 왕비와 왕세자를 저주하는 물건을 가져다 놓고 '내가 했소.' 하고 적어둘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 조정은 목패에 이름이 씐 ' 병조 서리 한충보'를 모함함으로써 이득을 볼 만한 사람을 위주로 조사했다. 하지만 소득이 없자 한충보를 조사했는데, 그가 언급한 다른 사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의 하인들이 실행범이라는 자백이 나왔다. 홍여는 폐서인된 경빈 박씨의 둘째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의 남편이다. 홍여의 하인들이 자기 주인의 명령을 받아 임금과 세자를 저주하는 가작인두를 만들어 목패에 꽂아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의 집에서는 저주에 쓰인 목패와 재질이 같은 널빤지가 나왔다.

중종은 가작인두의 변이 박씨에게 잘 보이려 한 무리들이 벌인 짓이라며 경빈 박씨에게 5월 23일 사약을 내렸지만, 아들 복성군은 어머니가 연루되었을 뿐 그 자신은 관련이 없으니 멀리 안치시키라고만 하였다.

경빈을 사사하고도 복성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었는데, 처음에는 중종도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18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18] 상소문을 18번 거절했다고는 하나, 시간으로는 겨우 사흘 만인 5월 26일, 중종은 복성군을 사사하고 두 옹주를 폐서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작인두의 변을 교사했다는 혐의를 받은 홍여는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지만 혐의를 계속 부인하였는데, 결국 (중종이 복성군을 사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5월 26일 옥사하였다.

홍여의 아내 혜정옹주는 폐서인되어 작호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도성 밖으로 내쫓겼고, 시아버지 홍서주(洪敍疇)는 유배를 떠났다.

3.4. 이후의 일

중종 29년(1534),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난 이듬해, 문정왕후가 첫 아들 경원대군(慶原大君: 미래의 명종)을 낳았다. 궁에 들어와 가례를 올린 지 무려 17년 만에 낳은 아들이었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중종의 눈밖에 나서 사사되었다. 그 뒤 김안로의 술책에 걸려 억울하게 죄를 얻었다 하는 이들을 풀어주거나 했지만,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그런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중종 34년(1539), 구언을 하자 한산 군수 이약빙이 상소를 올렸는데, 미(복성군)는 늘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아들이라 생각하였는데 미를 죽인 사건으로 전하의 자애가 손상된 것이 가슴 아프다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내용이었다.

중종은 이 상소를 읽은 뒤 당시 권간이 국권을 장악하고 간당(奸黨)이 간관의 자리를 차지하여 그들이 동궁을 핑계대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말을 못하게 하였기에, 박씨의 죄로 인하여 해가 미에게 미쳤을 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저지할 수 없었다며, 미의 죄는 명분이 없고 그 딸은 사족들이 두려워하여 혼인하려는 자가 없으니, 직을 회복시키고 무덤도 왕자의 무덤으로 조처하며 딸도 사족과 더불어 혼인할 것을 허락함으로써 자신이 추회(追悔)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약빙이 오랫동안 밖에 있으면서 반드시 생각한 바가 있어 상소를 올렸을 것이라며 이와 같은 말을 들어주면 다른 사람들도 진언하기를 즐거워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신하들의 반대로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이약빙은 추고(追考)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19] 중종은 구언의 명을 내린 후에 말한 자를 벌주기는 언로를 막는 것이고, 복성군에 대한 내용을 일반인이 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내용이 귀하며, 또 인륜을 북돋는 취지에서 올린 상소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며 이약빙을 추국 없이 파직시키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중종 36년(1541), 세자가 아버지 중종에게 용서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중종이 가납했다. 그런데 여기서 세자가 청원한 내용이 아래와 같다.
천총(天聰)을 범함이 황공하오나 정(情)이 격발하여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현지친(天顯之親)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자연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비상(非常)한 변(變)이 있었더라도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 중엔 오히려 은혜로 감추어 준 자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이미(李嵋: 복성군의 이름)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嵋)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洪礪)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翁主)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신은 천자가 되었는데 아우는 필부(匹夫)로 있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세자로서 모시고 있어 천총(天寵)이 지극한데, 두 누이와 조카딸 하나가 아직도 천민에 버려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이란 형제간에는 원망도 노염도 간직하지 않고 서로 친애할 뿐인 것인데, 신은 형제간에 무슨 원망과 노염이 있어 친애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에도 같이 화락하게 즐기지 못하여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衷情)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중종실록 중종 36년(1541) 11월 9일자 3번째 기사
요약해보면 미래의 인종인 세자는 복성군이나 경빈 박씨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박씨가 죄를 지었다 해도 복성군이 연루되진 않았을 테고, 그가 낳은 딸 하나는 민간으로 버림받아 평민과 다름없이 사는 모습이 불쌍하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딱히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된 것이 아니다. 세자 또한 그네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고, 계속 불쌍한 모습을 부각하며 형제의 정으로 견디기 힘들다고 중종에게 자비를 청했다. 그마저도 경빈을 두둔하지 않고 복성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에 중종은 세자의 청을 받아들여 복성군으로 복구하고 왕족의 예를 허락했다.

저 위에 기록된 세자가 한 말을 보면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前此微達, 未蒙允兪)"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비록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전에도 세자가 같은 내용을 주청하였고 중종이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중종은 결코 김안로 같은 권신의 말에 휘둘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김안로를 숙청한 다음에 모든 탓을 김안로에게 돌리며 작서의 변 관련자들을 수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김안로를 사사한 뒤에도 몇 년씩이나 자신의 피를 받은 혈육이 폐서인된 신분으로 고통받도록 내두었다. 심지어 세자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였을 때에도 최소한 한 번은 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친아들을 바로 죽이라고 명령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으므로 사흘간 반려하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지만, 중종은 서장자인 복성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행동했음이 분명하다.

이후로 실록에서 복성군은 '복성군'이라고 불리지만, 경빈 박씨는 '박빈' 또는 '박씨'라고만 언급된다. 공식적으로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작인두의 변 때 홍여의 하인들이 고문을 받아 억지로 죄상을 실토했다거나, 홍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은 실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지만, 이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폐서인된 옹주들의 신분을 복원해주었을 뿐이었다. 이후의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것 같기는 한데, 오래된 일이라 증거도 없으니 이 정도로 덮고 가자.'는 식이었다.

3.5. 범인은 누구인가?

3.5.1. 김안로

중종 27년(1532) 3월, 유생 이종익은 감옥에 갇힌 몸으로 상소를 올려 '김안로의 (상소 당시엔 이미 죽은) 아들 김희가 작서의 변을 실행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가 없었다. 또한 그가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어 이런 글을 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로도 이종익의 주장이 검증을 받지도 아니하였다. 하지만 김안로가 정말로 작서의 변이나 가작인두의 변을 사주했을 가능성은 크다.

김안로는 세자(미래의 인종)의 사람이었다. 작서의 변 이후 귀양에서 풀려나자, 김안로는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으므로 세자를 옹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정적들을 처리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두 사건은 세자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다는 눈에 보이는 물증으로 작용한 것이다. 두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많이 본 사람이 바로 김안로이다. 그래서 증거는 없지만, 김안로가 일을 꾸민 배후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것이다.

3.5.2. 문정왕후

어쩌면 문정왕후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 문정왕후가 중종과 가례를 올린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딸 둘을 연이어 낳았으므로 불임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직 아들을 못 낳는다고 희망을 놓을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은근히 다음 왕위를 기대하는 경빈 박씨 복성군이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미래의 임금 세자와 가까이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20][21] 그래서 김안로와 힘을 합쳐 두 모자를 찍어내고자 했다면, 이 또한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미래의 명종)을 낳은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세자의 편에 서서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김안로와, 자기 소생의 아들을 낳은 문정왕후의 관계는 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는 남동생 윤원로, 윤원형을 불러 벼슬을 주며 자기 세력을 키웠고, 김안로와 충돌했다.

4. 야사

야사에 따르면 이항복이 아직 벼슬을 하기 전에 복성군의 혼령이 나타나서 자신이 이미 신원된 줄이야 알지만,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항복이 '모두들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한다.'고 전하자, 복성군은 매우 기뻐하면서 이항복에게 '그대는 장차 귀하게 되리라.' 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왕자라고 민간에서도 가련하게 여기고, 봉호를 되돌려받자 복성군이 신원되었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5. 소설

고전 소설 윤지경전이 이 사건과 기묘사화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고전 소설에서 드물게 국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6.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이 작서의 변의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김안로가 귀양간 곳에 몰래 잠입하여 김안로와 손을 잡고 김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동궁전 은행나무에 작서를 걸어두었다고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1] 후술하겠지만 무고 여부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당초 경빈 박씨가 범죄자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정황과 심증만으로 처벌받은 것이므로 무고사건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은 없다. [2] 단경왕후 신씨는 신수근의 딸이었는데 신수근은 박원종을 비롯한 공신들으로부터 반정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정작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였기에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결국 공신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당연히 보복을 두려워했던 반정공신들이 단경왕후를 반대하여 쫒아낼 수밖에... 신씨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끝까지 '폐비' 취급을 받다가 영조 15년(1739)에야 겨우 복위되었다. [3] 예종의 왕세자 시절 후궁(종5품 소훈)이던 안순왕후, 성종의 후궁(종2품 숙의)이던 폐비 윤씨 정현왕후가 그러했다. [4]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는 명문가 출신이다. 한참 뒤인 숙종 시절이 되어야 희빈 장씨가 곤위에 올랐다가 삼불거에 의하여 복위된 인현왕후에 의해 후궁으로 강등된 사례가 있다. 심지어 희빈 장씨는 비록 신분은 중인이나 당시 남인 세력들을 대표하는 남인의 구심점이었음으로 그 힘이 경빈 박씨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었다. [5] 성종 5년(1474) 공혜왕후가 죽자 성종이 재위 7년(1476)에 숙의 윤씨, 즉 (연산군의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중전으로 들인 일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중종의 말과 달리 폐비 윤씨는 공혜왕후가 죽기 전에 이미 궁에 들어와 후궁으로서 숙의 직첩을 받았다. [6] 일개 세자빈에 불과하던 인수대비가 남편인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되면서 덩달아 대비가 되고 아예 예종비 안순왕후보다 윗서열에 앉게 되자 신하들이 반발했던 것도 물론 의경세자(덕종)가 예종보다 형이긴 하나 덕종은 엄연히 추존왕이었기에 예종 생전에 인수대비는 그저 전직(?) 세자빈 신분으로 아예 왕과 왕비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와는 비빌 수도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즉, 예종 생전에 이미 안순왕후와 인수대비는 군신관계였는데 이를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었다고 바꿀 수 없는 노릇이라는게 반대측의 논리였다. 때문에 이를 추진했던 정희왕후는 세조가 생전에 안순왕후더러 인수대비를 어머니처럼 여기라고 했다는 말까지 해야 했다. [7]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대비 역시도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지만 자순대비는 왕후가 될 때 아들이 없었고 성종은 연산군의 지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애초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폐비되었을 뿐, 후궁으로 강등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산군과 중종의 적서관계는 연산군이 폐위되기 전까지 변하지 않았다. [8] 훗날 인종이 되는 왕자가 태어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보통 세자는 여덟 살에 책봉되었다. 그나마 인종은 워낙 특출나다는 이유로 남곤이 건의하여 여섯 살에 책봉되었지만, 아무튼 세자를 책봉할 여건이 아니었음은 마찬가지. 하다못해 원자로라도 책봉되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9] 그리고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외척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외척이라는 것이 성리학적 질서를 따르는 조선에서는 당연히 배제대상이다. 보통은 명예직만 전전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권신이 되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윤임이 힘이 있던 것도 시대가 권신들이 활개치는 시대였기에 가능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척은 어쨌든 왕의 외가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왕의 지지기반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경왕후는 파평 윤씨 집안이라 집안이 좋았지만 경빈 박씨는 너무 집안이 한미했다. 집안이 한미하다는 것은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전횡하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조선의 외척에 대한 태도 취지에는 좋았지만 '복성군 VS 인종' 으로 집안싸움이 날 판에서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집안싸움이 일어나면 서로의 세가 중요한데 외척 면에서는 복성군이 떨어진다. [10] 종법질서에 따르면 제위계승 순서는 적장자→적장손→적장자의 적자→적장자의 서자→적자→기타 적손→기타 서손→서장자 순이다. 근데 인종이 자식을 낳기 전에 죽고 문정왕후에게도 아들이 없다면 서장자보다 우선순위 후보자들이 모두 사라진다. [11] 인종은 중종 10년(1515 을해) 2월 25일에 태어났으므로 을해년생 돼지띠였다. 다른 날도 아니고 세자의 생일에, 또한 돼지로 상징되는 해방(亥方) 쪽에 쥐를 매달았으니 세자를 노린 주술이라는 것이다. [12]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내명부의 수장은 임금의 왕비일지라도 가장 웃어른은 대비였다. 중종실록 재위 22년 4월 3일 9번째 기사에 실린 기록에 따르면, 궁녀들이 맨처음에는 중궁전(문정왕후)에 보고했으나, 문정왕후가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궁녀들에게 '이 일은 대비전에 전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13] 꺽어지는 계단에 설치하는 난간 [14] '은이'라는 나인이 도둑으로 몰렸다며 억울하니 액땜을 해야겠다고 죽은 쥐를 한 마리 가져와달라고 환관에게 부탁했으나 들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은이가 잠시 범인 물망에 올랐으나 곧 혐의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5] 자순대비의 일생을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거진 미치광이였던 연산군이 자순대비의 침전 앞까지 쳐들어와 밖으로 나오라고 칼을 들고 소리를 질러댄 적이 있고, 자순대비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에게까지 불손한 언행을 했던 경험을 해서 후궁의 암투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테니 내명부 최고존엄의 다음 반응은 안봐도 비디오... [16] 승정원에서 임금의 이름으로 작성하는 명령서. [17] 벼슬아치의 갓끈을 꿰는 고리 [18] 나중에 복성군의 시신이라도 온전히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 사실 이약빙이 복성군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고, 단종과 연산군의 묘소를 복원하고 이들의 후사를 정하자는 내용을 상소에 썼는데(...) 당연하게도 이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이약빙은 단종의 후궁 숙의 김씨가 양자로 삼은 인물이기도 했다. [20] 실제로도 명종이 태어나기 전에는 문정왕후가 인종을 핍박하지 않았다. [21] 그리고 장경왕후나 문정왕후 모두 파평 윤씨에다 양반가 출신이다. 즉 문정왕후 입장에서는 당연히 근본 없는 집안 출신에 자기랑 별 관련도 없는 복성군보다는, 그래도 같은 양반가 집안에 본관과 성도 같은 집안 출신인 인종이 더 고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