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19:18:04

화협옹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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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colbgcolor=#94153e><colcolor=gold> 출생 1733년( 영조 9년) 4월 20일
사망 1753년( 영조 29년) 1월 1일
(향년 19세)
조선 한성부 중부 관인방 사저[1]
부왕 영조
생모 영빈 이씨
부군 영성위 신광수(永城尉 申光洙)
자녀 친자 없음
양자 - 신재선(申在善)

1. 개요2. 생애
2.1. 혼인2.2. 미움받는 딸2.3. 죽음
3. 무덤 발굴4.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의 서7녀이다.[2]

2. 생애

2.1. 혼인

영조 19년(1743) 2월 18일 옹주로 책봉되면서, '화협'(和協)의 작호를 받았다. 이어서 영조는 2월 21일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는데, 이때 금혼대상은 11세부터 13세까지 소년이었다. 3월 11일 초간택, 3월 15일 재간택, 4월 2일 삼간택을 치르고 경기감사 신만(申晩)[3]의 아들 신광수(申光洙)가 부마 간택됐다.

그해 윤 4월 28일, 화협옹주는 가례를 올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극심한 가뭄이 닥치는 바람에 혼인을 더 미룰 수 없는 사정으로 검소하게 치렀다.

당시 화협옹주와 사도세자는 두 살 차이였는데, 혼인의 순서를 두고 영조와 신하들이 의견 차이가 있었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먼저 태어난 누나'라서 사도세자보다 먼저 혼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하들은 장차 '대를 이을 세자'이므로 민간에서처럼 태어난 순서를 따지면 안 된다고 여겼다.[4] 영조는 세자의 지위는 남들과 다르지만 형제간의 순서는 뛰어넘을 수 없다며 누나인 화협옹주의 혼인 날짜부터 먼저 잡으라고 결정했다.

2.2. 미움받는 딸

혜경궁 홍씨의 《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는 자신의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고 편애하는 아버지였다.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인데도 화평옹주 화완옹주는 귀애하고,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화협옹주는 1733년생이니, 1728년 영조께서 효장세자를 잃고 아들이 태어나기만 기다리시다가 또 딸이 나오니 애달파 그리하셨던지, 그 옹주가 용모도 빼어나고 효성도 있어 아름다우시되 부왕 자애를 입지 못하니라. 그때 영조께서 화협옹주가 아들이 아닌 것이 애달파, 심지어 당신이 사랑하시는 화평옹주와는 서로 한집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시니, 화평옹주가 홀로 부왕의 자애를 받는 일이 숨은 아픔이 되어 부왕께 ‘마옵소서’ 여쭈나 아무리 해도 영조께서 듣지 않으시니 할 수 없었느니라. 더욱이 화협옹주로 인하여 그 부마인 신광수까지 사랑을 못 입으니라.
《한중록》[5]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잃고 후계자가 될 아들이 태어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는데, 내리 네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에 화협옹주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바로 다음에 아들로 태어난 사도세자를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세자가 태어난 후 약 삼년 정도만 세자, 라며 유난을 부렸을 뿐이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 귀를 씻고 양치질을 했으며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렸다. 동병상련 처지였던 세자와 화협은 서로를 동정하며 각별한 남매사이를 유지했고, "우리 남매는 귀 씻을 준비물이로다"라고 한탄하며 서로 웃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 영조실록》과 《 일성록》 등을 보면 《한중록》의 이러한 묘사와 대치되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영조는 화협옹주의 사저에 직접 거둥하기도 하고 화협옹주방에서 진 외상 빚을 모두 갚아주기도 했다. 화협옹주의 궁방은 다른 옹주들과 비교해서 그 규모가 결코 적지도 않았다. 이런 면을 종합해보면 화평옹주나 화완옹주에 비해 사랑을 덜 준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미워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화협 옹주가 어머니 영빈 이씨를 매우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랑하는 화평, 화완 두 딸의 어머니이자 명실공히 영조의 평생 가장 사랑받은 후궁 영빈 이씨를 닮은 딸이라면 엄청 미워하기도 어려웠을 듯.

남편인 신광수는 사람 됨됨이가 좋지 못해서 영조 37년(1761) 관아에서 일하는 서리를 폭행하여 영조가 파직을 명한 적도 있고, 지나치게 재물을 탐하여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부마들이 이 정도 문제를 일으키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오히려 화협옹주의 남편 신광수를 제일 미워한 사람은 사도세자였다. 《한중록》에서는 신광수의 아버지 신만이 자신을 참소한다고 생각하여, "그 정승 복 없고 밉다." 하였고, 나중에는 신광수를 잡아다가 죽이려고까지 하는 모습이 나온다.《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뻑하면 신광수를 잡아온다 죽인다 소리를 달고 살았고, 실제로 잡아다가 죽이진 못했지만 대신 신광수의 관복, 조복, 군복 및 날마다 쓰는 여러 기구와 패옥, 띠까지 다 가져다가 불태우고 박살내니 영성위 목숨이 달아나기는 시간문제라고 노심초사한 상황이 있다.

2.3. 죽음

기품은 침착하고 맑았으며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고 시아버지에게도 한결같이 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담박하고도 고요하여 조금도 간여하는 바가 없었으니 마치 듣지 못한 듯이 보지 못한 듯이 한 것이 곧 화협의 성품이었다.
<어제화협옹주묘지>(御製和協翁主墓誌)

화협옹주는 20세 젊은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옹주의 집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김약로 등이 영조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해 만류했다. 특히 이전에 화평옹주의 사망 때 영조가 가는 것을 막지않아서 영조가 몸이 상했던 것을 예로 들며 우려했는데, 그러자 영조는 "내가 아팠던 건 당파싸움 때문이지 딸이 죽어 슬퍼했기 때문이 아니다." 라고 꽥 고함을 질렀다.[6] 그렇지만 지난 해 효부라며 딸처럼 아끼던 현빈 조씨가 떠났는데, 화협옹주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영조의 건강이 아주 좋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영조의 자식들은 모두 오래 살지 못했는데 그나마 오래 산 자식들이 정조 대까지 살았던 화완옹주, 화유옹주와 순조 대까지 살았던 화령옹주 세 사람이었다.

《사도세자 행장》에서는 화협옹주를 두고 "나는 이 누이에 대해 각별한 정이 있는데, 이제 갑자기 죽었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기겠는가."라고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7]

화협 옹주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도세자도 홍역에 걸리고, 그 몸으로 엄동설한에 영조에게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터울도 제일 가깝고 서로 처지에 동질감을 느끼던 누나의 죽음이 사도세자의 비행과 몰락에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3. 무덤 발굴

파일:화협옹주_출토유물.webp
화협옹주 묘 출토 명기
2016년 12월 28일 문화재청이 남양주에서 화협옹주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 1970년대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한 관계로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발굴시 나온 지석에는 아버지 영조가 젊은 나이에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슬픔을 적은 글이 있었다. 같이 발굴된 석함에서 화장품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나와 왕실 여인들의 실생활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4. 가족 관계

  • 남편 : 영성위 신광수(永城尉 申光綏, 1731 ~ 1775)
    • 양자 : 신재선(申在善, 1753 ~ 1810) - 신광면[8](申光勉)의 차남


[1] 대사동에 있었다. [2]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으나 화협옹주 위로 태어난 세 딸들은 모두 요절했다. [3] 훗날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는 현장에서 방관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4] 《영조실록》 영조 19년(1743) 2월 22일 1번째 기사 # [5] 혜경궁 홍씨, 정병설 편역, 《한중록》, 문학동네, 2010. [6] 《영조실록》 영조 28년(1752) 11월 27일 1번째 기사 # [7] 《정조실록》 정조 13년(1789) 10월 7일 4번째 기사 # [8] 남편의 8촌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