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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둔자에 대해서는 허밋 항목 참조.
해당 사진은 은자 50냥의 가치를 가진 원보元寶,[1] 말발굽(馬蹄) 모양이라고 하여 마제은馬蹄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1. 개요
銀子전근대 중국에서 일종의 대체통용화폐로써 활용된 여러 종류의 은괴들을 통칭하는 말.
2. 역사
중국은 고대 춘추전국시대부터 명나라와 청나라 때까지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동전을 발행하여 법정 화폐로 통용했으나, 시대가 지나며 민간 경제가 성장하자 법정 화폐만으로는 그것을 다 커버할 수 없게 되어, 민간에서 자체적으로 은을 대체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일단 당나라 시대에부터 그 전조가 나타나는데, 당태종 때 은의 가치는 1냥 당 1관=1천 문, 즉 동전 천 개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계산이 딱 떨어지는 가치로 매겨졌던 것에서 보이듯 은은 이 시대에 이미 상당히 표준적인 가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국제적으로 가치가 통용되기 쉬운 귀금속이라는 점에도 힘을 입었다.
송나라 때는 국가 정부의 회계 처리나, 요나라, 금나라에 대한 세폐로 지급 등 은의 활용이 더 늘어난다. 송나라 시대에는 상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민간경제의 성장으로 화폐가 극심히 부족해졌으므로, 은은 대체화폐로서 가치도 올라갔다. 이 시기는 화폐가 너무 부족해서 민간에서 구리가 아닌 철, 납으로 주조한 짭화폐인 사주전의 유통도 사실상 허용했을 정도였다. 물론 관이 정식으로 발행한 관주전에 비해 가치는 낮긴 했다. 하여간 이 시기 은의 가치는 동전 2관(2000개)에 달했다.
하지만 은이 중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명나라 시대로, 사실 중국은 은을 이전부터 준화폐로 쓴 것 치고 중국 본토에는 이렇다 할 만한 은광이 없었기 때문에 은이 전면적으로 화폐처럼 유통되기에는 양이 항상 부족했다. 그러다가 명나라 중기부터 대외무역을 조금 개방하자, 일본인과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은의 가치가 수상할 정도로 고평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금과 은의 가치비가 최소 12~17배 정도 차이가 났지만, 중국에서는 유독 교환비가 낮아 2~6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에 방문한 스페인인은 우린 금은 가치비가 20배인데 중국은 4배 밖에 안되니 은을 가져오기만 해도 5배는 이득을 본다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금은의 가치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동적이니 정확히 몇 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하여간 아무 생각 없이 중국에 은을 가져가도, 시세가 안 좋은 상황이었어도 환차익을 2배는 볼 수 있었다. 이런 남는 장사를 마다할 상인들은 없었고, 이것은 명 중기 이후 전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몰려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유명한 대항해시대의 후추거래가 사실 당대 사료를 살펴보면 차익이 50% 정도 밖에 안된 것에 비하면 진짜 돈이 복사가 되는 거래는 중국에 은을 가져가는 것이었던 것이다.
재상 장거정이 시행한 재정개혁인 일조편법으로 인해 은화인 은자가 생겼다고 쓴 경우가 있는데, 앞뒤가 뒤바뀐 소리다.[2] 사실 명나라가 해금을 풀기 이전부터 이미 은의 고액 화폐화는 이미 진행되어 있었어서, 15세기에 이미 지방 정부에서는 세금을 걷을 때 은으로 대체해서 걷는 경우가 알음알음 있었다[3]. 장거정의 시대에는 이미 해금령이 폐지되어 본격적으로 명에 은이 유입되었고 은의 유통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 장거정의 일조편법은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조세를 은납화를 법적으로 전면적으로 도입한 것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는 민간 상업이 더욱 발전하여 상업조합인 항(行)이 생겨나 그 중 은을 다루는 은항도 생겨났으며 후일 은행의 어원이 된다.
이후 청나라 시대에 대외무역을 더욱 개방하면서 청은 전세계 은의 종착지가 된다. 전세계 은의 25%~50%가 청나라에 있었다고 추산할 정도. 물론 50%는 좀 과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하여간 17~18세기 청에는 그만큼 막대한 은이 유통되었다는 것이다. 이 풍요로운 경제력은 옹정제가 사실상 인두세를 폐지하는 지정은제를 도입할 수 있게하는 재정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렇게 은이 넘쳐나다 보니 청나라 시절에는 "아무리 청렴한 사람도 3년만 관직에 있으면 하얀 은자를 산더미처럼 모은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4]
하지만 이 호황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는데, 바로 영국이 일으킨 아편 전쟁 탓. 중국에서의 차 수입으로 인해 극심한 은 유출을 보고 있었던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키며 중국을 강제로 개항했다. 하지만 아편 전쟁 후에도 영국에서 청으로 향한 은 유출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는데, 위에서 말했듯 중국에서 금은 교환비는 1:6 정도로 적었는데 국제적으로는 1:12 이상이었기 때문에, 개항을 한 뒤 영국 상인들은 되려 청으로 더욱 몰려가 은을 뿌리고 금을 퍼갔다. 그래도 당시 영국은 금본위제를 이미 채택했기 때문에 금을 퍼가는 입장인 영국 측의 무역수지는 흑자였고, 청은 본위통화였던 은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경제가 박살나게 된다. 내외적인 문제로 청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가 진행되며 화폐 제도 역시 근대화하며 은자의 유통은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은자는 꾸준히 쓰여왔으며, 국공내전 시기 때까지 널리 쓰였다가 1950년대에 물가가 안정화되고 나서야 은자의 사용 비중이 격감하게 된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수많은 군벌들이 할거하게 된 중국대륙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화폐가치를 가진 것은 은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조화폐로 꾸준히 쓰였던 것이다. 구한말 한반도 북부에서도 은자가 일본 엔화, 러시아 루블과 함께 통용됐었다. 마오쩌둥 역시 대장정을 펼칠 때 군자금으로 아편과 은자를 가지고 다녔다.
3. 특징
은자는 기본적으로 이름 그대로 그냥 은조각으로 여겨졌고 은 자체의 가치로 그 값어치가 매겨졌다. 그 때문에 은 자체의 무게가 중요했고, 매 거래 때마다 은자의 무게를 달아야했다. 반면 은의 모양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민간거래에서는 작게 쪼개진 소액 화폐라고 할 수 있는 쇄은(碎銀) 혹은 은정(銀錠)이 유통되었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서는 가위 등으로 즉석으로 은조각을 잘라서 사용했다.[6]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은자의 모습은 우영광과 견자단이 주연한 철마류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 그대로 조그마한 은 덩어리라 보면 된다. 이 문서 상단에 나온 마제은(馬蹄銀) 역시 그저 수십가지 종류 중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 특유의 모양새 덕분에 은자를 대표하는 스테레오 타입이 됐다.[7]
흔히 한국산 무협지에서는 은자를 세는 단위를 은자 하나당 한 냥으로 세는 오류를 보이는데, 중국에서 냥은 개수를 세는 단위가 아니라 30~40g 정도의 무게인 무게 단위다[8]. 한 냥 정도면 동전 모양으로 넓적하게 펴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꽤 큰 액수다.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은자는 1냥보다도 더 작은 1푼 등의 작은 크기로 조각내서 사용되었다. 조선의 화폐 단위가 냥이었기 때문이지만, 실상 사실 조선의 화폐 단위에서도 동전 하나는 1문(1푼)이고 100문이 모인 것이 1냥이었다. 당연히 냥 단위는 큰 돈이었기 때문에 고위층과 부유층이 아니면 고액거래할 때에나 볼 수 있던 단위였고, 일상생활에서는 문/푼과 전/돈(=10문) 단위로 거래했다. [9]
4. 가치
전근대의 물건 가치를 추산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다들 생산력이 쥐똥만한데 지역마다 무엇을 생산하는지 편차도 컸고, 무역 상업망에 대한 접근성 차이도 커서 가격 격차도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상기했듯 중국의 금은 가치비는 세계랑 따로 놀았다. 결론만 말하면 은자 한 냥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고액거래할 일이 아니면 볼일이 없을 정도로 큰 돈이었고, 무협지나 사극에서 나오는 마냥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부유층이나 고위관료급되는 사람들이었다.일단 상술한 대로 은의 유통이 본격화된 명청 시대에도 동전은 법정화폐로 계속 존재했으며, 일상적인 화폐는 계속 동전이었지 은이 아니었다. 물론 작게 쪼개서 쓸 수 있는 만큼 평생 구경도 못할 정도는 또 아니었다. 5만원권으로 일상 거래를 하기 난감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상인이 아닌 서민들이 은을 볼 때는 세금을 낼 때 정도. 또한 동전과 은의 표준 교환비는 1000문, 즉 1관 정도를 계속 유지했다.[10]
중국인들이 한 계산을 살펴보자. 명 만력 연간에 은자 한 냥으로는 보통 품질의 쌀 두 섬을 살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11] 당시의 한 섬은 약 94.4kg으로, 따라서 은자 한 냥으로 쌀 188.8kg을 구입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쌀값을 중국 시세 기준으로 하면 중국 돈 660위안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것을 다시 한화로 환산하면 약 15만원인데, 이것으로 가치를 추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장 쌀값을 중국 시세가 아니라 한국 시세로 쳐서 바로 환산하면 41만원에 달한다.[12]
그냥 명나라 당대 시세 물가로 보는 게 차라리 간단할 수 있는데, 은자 한 냥 반이면 가난한 평민이 1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고 하며, 나름 고액을 받는 병졸이 장비품에 대한 구입비를 포함해서 월 은자 한 냥 조금 못되게 월급으로 지급받았다고 한다. 명사에 의하면, 7품 지현(知縣)의 1년간의 봉급(기본급)은 겨우 45냥 백은이었다.
은의 값이 명대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청나라 말기 기준으론, 도자기 공장의 노동자의 일급이 은자 2분(分)[13](연봉으로 30~40냥), 목공이나 벽돌공의 일급은 은자0.05냥(연봉으로 은자15~20냥), 농사일 돕는 일꾼의 일급은 10~20문[14], 닭이나 오리의 고기가 든 식사는 은자0.01~0.02냥이었다고 하며,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이 20문, 은자 한 냥이 1200문[15], 비옥한 밭 한 묘(30평, 약 99.174㎡)가 은자 7~8냥 정도였다. 돼지고기를 기준으로, 한국 물가로 대비하면 청대의 은자 한 냥은 60만원에 달한다. 문서 상단의 원보 하나는 50냥이니 3000만 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셈이다. 은자 1분은 1냥의 10분의 1이었는데, 이렇게 보면 도자기 공장 노동자의 일급은 12만 원가량 된다고 칠 수 있겠다.
5. 창작물
아편전쟁 개항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 전 중국을 무대로 한 문학 작품에서 매우 자주 등장한다. 수호전, 유림외사, 홍루몽 등등 중국인들이 쓴 작품들은 물론 한국산 무협지들에서도 은자가 거의 화폐로 등장한다. 대만의 이름난 무협작가인 고룡도 "내 주머니에 은자가 얼마간 남아 있는..."라는 문장을 썼을 정도로 은자는 동양문학에서 아주 흔하게 등장한다.당대에 은자는 오늘날의 국가채권이나 당좌수표급의 매우 큰 가치를 지닌 화폐였고 일상적으로 쓰이는 건 여전히 '문文'혹은 '전錢'으로 불리는 동전이었으나, 그러한 고증은 이디로 갔는지 다들 은자를 동전처럼 쉽게 쓴다.[16] 한국산 무협에서야 외국 역사니까 좀 모를 수 있다 쳐도 중국인들이 쓴 작품들에서도 똑같다. 물론 무림인들은 방랑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들고 잔돈 갖고 다니기를 귀찮아하는 데다 관무불가침 풍습 때문에 고액권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용의 작품인 녹정기에서 모십팔이 위소보에게 먹을 것을 사오랍시고 원보를 주는 장면같은 건 심각한 과장[17]이라 할 수 있겠다. 50냥짜리 원보 1개면 지방직 7급 공무원의 1년치 봉급(!)이고, 상단 하나가 숙박할 수 있는 초대형 객잔이나 비싼 산해진미를 취급하는 최고급 기루에 VIP 예약을 잡을 수있는 초고액권이기 때문에 강희제 초기 배경에서 간단한 먹거리 정도를 취급하는 소규모 상점이라면 장사 밑천에 집안 기둥뿌리까지 다 뽑아와도 잔돈을 마련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안그래도 모십팔에게 청나라 조정의 수배령까지 내려진 상황에서 눈에 띄는 초고액권의 사용은 관의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이는 중국의 학자들도 많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이는 은이 민간에 널리 퍼진 청나라 건륭제 이후의 생활상을 작품에서 또 과장해서 반영해서 생긴 결과이다.
한국산 무협들은 저기서 인플레이션이 몇 단계 더 진행되어 일개 식당에서 국수 한 그릇 먹을 때조차 음식값을 은자로 지불할 정도이다.
한국 장르 소설계에서는 금자 1냥 = 은자 20냥으로 정착되어 있는 거 같은데, 상기했듯 20배는 서양 판타지 쪽의 교환비에 가깝고 중국에서는 은과 금의 가치 차이가 얼마 안 났기 때문에 금이 은의 20배도 아니었고 금자가 많이 쓰이지도 않았다. 물론 무협의 이웃인 서양 중세 판타지물에서도 각종 게임과 소설, 만화에서 금화를 100원짜리 동전마냥 싸게 싸게 쓰는 건 매한가지이긴 하다(...) 일본의 경우는 특히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에서 숙식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모든 거래를 금화로 취급하는 바람에 이게 또 퍼졌다.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아예 독자적인 통화를 등장시켜 문제를 넘기는 작품도 많아졌다.
SBS 드라마 대박에서 상인으로 가장한 숙종이 투전꾼 백만금의 아내를 뺏기 위해 도박장에서 호구인 척을 할 때 판돈으로 마제은을 가져와 만지작거리며 백만금을 현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만금은 일확천금의 환상에 맛이 가서 이런 판단을 하지 못하고 내기에 응했다가 국가 스케일의 초대형 구라에 당하고[18] 전재산은 물론 마누라까지 뺏기게 된다. 그런데 마제은 하나를 은 오십 냥으로 치면 화면에 나온 마제은이 30덩이라고 쳐도 은 천오백 냥인데, 숙종 때 대마도주가 죽을 때쯤 해서 조선 조정에 예단으로 보낸 물품 중에 이천일백 냥 상당의 은이 있었고, 중국에 가는 사신에게 조정에서 공식뇌물(?) 용도로 챙겨준 돈이 은 오천 냥인데, 조선은 일본만큼 은이 많이 나거나 중국만큼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아서 은이 기축통화가 아닌 귀금속이었으므로 그런 국가 규모의 조공이나 공무역이 아니면 그렇게 많은 마제은을 볼 일이 없었다. 즉 만약 실제 조선에서 백만금같은 투전꾼 앞에 마제은 수십 덩이를 내밀었다면 돈 욕심과 술기운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게 아니라 대체 뭐하는 분이시길래 이 많은 은을, 그것도 마제은으로 깔끔하게 정리까지 해서 들고 다니시나 공포심에 질려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다.
[1]
엄밀히 말하면 무수한 종류의 은자 중 상당히 커다란 편에 속하는 것이나, 대중적으로 은자의 이미지가 이렇기 때문에 이 사진으로 대체했다.
[2]
물론 장거정이 수보대학사로 있던 만력제 때 만력은보라는 은화가 발행되기는 했다.
[3]
예를 들어 홍치 5년(1492년), 소금 전매권을 민간에 판매할 때 은을 납부하도록 했다.
[4]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당시 중국인들은 은자를 그대로 다 쓰는 게 아니라 가위로 조금씩 잘라서 무게를 달아서 썼다. 그래서 제대로 된 모양의 은자를 가지고 있는 게 별로 없었고 조그만한 은조각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세금을 내려면 제대로 된 백은(白銀)의 형태로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은조각들을 다시 제련해야 했는데,
야매로 하다보니 은이 조금씩 소실되기 마련이었다. 관리들은 이 소실된 은값에 대하여 벌금조의 돈을 내도록 했는데 이걸 화모(火耗)라고 한다. 화모는 세금으로 내는 게 아니라 관리들에게 주는 일종의
뽀찌 같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불법이었지만, 청나라 시절 관리들은 아주 박봉을 받고 일하는 직업군이라서 월급만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눈 감아주었다. 그런데 적당히 해먹질 않고 폭리를 취해서 세금 1냥을 내면 화모를 10냥 내는 폐단 수준까지 치달았다. 백성들은 화모를 내다가 세금을 못내서 파산하고, 국가는 세금을 못 거둬서 국고가 줄어들자 옹정제 시절 화모귀공(火耗歸公) 또는 모선귀공(耗羨歸公)이라는 개혁을 단행하여 이를 어느 정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5]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일단 은자라는 말은 정해진 형태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즉, 주화처럼 일정한 형태를 지니면 그건 은자가 아니다. 다만 명나라 말기 만력 연간의 만력은보라는 은화와 청나라 말기인 1833년 최초로 제조된 은화는 용은(龍銀, (Chinese) Silver Dragon)이라는
무역은이었다.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도 청나라의 용은을 흉내내어 은화를 만들고 자국 은화를 용은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세금 내는 고평은은 37.301그램, 무역에 쓰는 관평은은 37.913그램(은 함량 93.5374%)인데, 용은은 관평은을 기준으로 무게는 0.72냥, 은 함량은 0.648냥을 따랐다(간혹 0.7냥짜리 용은도 있었다고 한다.). 청국 내 시장에서 용은은 교환가치가 은0.72냥 또는 은0.69냥이라서, 전자는 칠이은(七二銀), 후자를 육구은(六九銀)이라고 불렀다.
[6]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물건을 사러 외출을 할 때면 은자를 자를 가위와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7]
일본이 자국산 은을 수출할 때 이 모양으로 제련해서 보냈다. 이게 서양에까지 퍼지면서 'horseshoe Silver' 알려졌다.
[8]
청나라 기준으로, 강희제 때 1713년 정해진 영조척고평제(營造尺庫平制, 줄여서 고평제)라는 도량형에서 1냥을 정했다. 그때 정한 1냥의 은이 1고평량은 또는 은 1고평량, 고평은 1냥, 줄여서 은 1냥이라 불렀다. 1915년 북양정부는 청나라 고평량은의 질량을 영조척 0.32미터라는 점으로부터 계량하여 1냥=37.301그램이라는 결과를 도출한다.
[9]
단적인 예로 조선의 거지들이 구걸할때 하는 말에 한<푼>만 줍쇼의 푼이 가장 작은 단위였던 1문을 의미한다.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십원만 주십쇼와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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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과 은의 표준 교환비는 1000문은 명나라 때에 관례적인 교환비였고, 청나라 때에 청조에서 정한 공식 교환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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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함풍 연간에는 은자 두 냥으로 쌀 한 섬을 살 수 있다. 쌀값 기준으로 4배가 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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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조선 기준으로 상평전 400개 = 쌀 1섬이다. 즉, 은0.8냥으로 쌀 한 섬을 사는 거라, 여기서 또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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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은 분으로 읽는 것과 푼으로 읽는 것의 가치가 다르다. 분(分)은 10분의 1, 푼은 100분의 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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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는 동전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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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에서 정한 법정화폐 동전과 징세화폐인 고평은 사이의 공식 환율은 고평은1냥 = 동전1000문이다. 그러나 청대 말에는, 1800년 무렵에 1냥=1000문, 1830년대 1400문, 1840년대 1500문, 1840년대 말~'50년대 2000문, 1880년대 1400문 등 매우 변동이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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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김용 노사의
소오강호에서 화산파 제자들이 안탕산의 고수 하삼칠이 만들어 파는 혼돈을 사먹을 때 은자가 아닌 동전으로 값을 치르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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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보다 청조 말의 물가가 2배(쌀값은 4배)인데도, 19세기에도 고기가 든 식사(1인분)가 0.02냥밖에 안 했다. 원보의 백분의 1 분량으로도 10명이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있는데 원보 1개를 통째로 주는 건 심각한 과장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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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던지기 내기에서는 군기시(국방과학연구소)에서 무조건 무게중심이 반대로 쏠리게 만든 제작한 특수 동전을 써서 백만금을 완전히 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