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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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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국 지배 이전3. 영국령 홍콩
3.1. 영국의 홍콩 점령3.2. 일본의 군정3.3. 전후와 사회운동3.4. 반환 협상
4. 반환 이후
4.1. 민주화 요구4.2. 홍콩 민족주의

1. 개요


홍콩의 대략적인 지역사를 설명한다.

2. 영국 지배 이전

홍콩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홍콩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의 거주 흔적은 2003년에 신계 지역 동남부에 위치한 사이쿵구에서 발견된 35000~39000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현재의 홍콩인/ 마카오인을 포함한 광동인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한족으로써의 정체성을 지니지만, 원래 이 지역에 살던 민족은 백월로 칭해지는데 이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다이카타이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동남아시아 계통의 종족들이 터 잡고 살고 있었고 이를 중국에서는 월(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광동어의 이명(異名)은 월어(粵語)라고 불린다.[1] 홍콩의 기원지인 광동성 일대는 고대에 월(越/粵) 내진 남월(南越) 지방이라고 했는데 월나라보다 남쪽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들은 진나라 한나라 한족 왕조의 정복으로 인해 복속되고 전란을 피해 중국 대륙 중북부의 한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섞여 들어와서 한족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DNA도 홍콩인이나 광둥성, 광시좡족자치구, 하이난성 쪽의 한족은 중원이나 화북 지방의 한족보단 오히려 베트남인, 태국인과 유사하다.[2]

역사 시대에는 진시황에게 병합되었다가 진시황 사후 이 곳에 파견되었던 임효와 그의 부관이었던 조타[3] 광저우시를 수도로 남월을 건국했다. 남월은 남쪽 월나라라는 뜻이다. 남월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 하이난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일부와 베트남 북부를 아울렀으나 전한 시대 무제에게 정복당해 이후 중국의 영역에 들어가고 한족화된다. 중국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 영국령이 되기 전까지의 시기는 둥관시 선전시와 지역사를 공유한다. 동진 시기인 331년에 현재의 둥관시의 전신이 되는 보안현(寶安縣)이 설치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대에는 동관현(東莞縣, 757년에 보안현에서 개칭)의 관할 구역에 속하였으며, 무역항과 해군 기지로서 활용되었다. 송나라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가 이 근처에서였고 여기서 원나라에 패배한[4] 조씨 황족들은 전부 구룡반도에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원나라는 대만을 공략하고 베트남 미얀마를 정벌하는 기지로 사용했다. 물론 베트남 원정과 미얀마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때 홍콩은 광저우의 몽골만호부가 관할해 수비군이 주둔했으나 대게 한족들이 알아서 자치를 하는 곳이었고 몽골족 관리는 없었다.[5]

이후 명나라가 들어서자 명나라의 양광지방으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 홍콩 연안엔 왜구가 기승이었다. 왜구들은 대만을 기지 삼아서 광동성과 푸젠성 연안을 약탈하는가 하면 베트남 북부까지 약탈했다. 그리고 포르투갈이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게 이 시기다. 포르투갈인들은 홍콩 북쪽 신계 연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명나라 수군에 포로가 되어버렸고[6] 이때 명은 마카오를 떼 주며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살게 허락해 주는 한편 그 반대급부로 유럽식 화약무기를 받아들여서 조총이 아시아에 최초로 소개되고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도 소개되었다. 1573년에 지금은 선전시가 된 신안현(新安縣)이 둥관현에서 분리 신설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어 난징 조약 전까지 신안현의 일부였다.

명이 망한 뒤 남명이 잠깐 들어섰다가 강희제의 친정으로 남명이 망하면서 완전하게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청은 여기에 주방 팔기군을 주둔시키고 치발령으로 한족 남성들의 머리를 모두 깔끔하게 변발로 밀었다. 한족 여성들도 알아서들 여진식 복장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원과 청 둘다 북방 계통의 정복왕조라 자신들의 고향인 내몽골, 만주나 수도인 베이징시, 강남의 중심지 항저우시와도 멀리 떨어졌고 가까운 곳에 광저우시가 있기때문에 이 당시 홍콩은 광저우의 배후지 정도의 취급이었다. 물론 청은 더 철저히 이 지역을 직접 다스려서 팔기군을 광저우를 기지로 박아놓고 변발도 강요했다. 이따금 일어나는 저항은 주방 팔기군이 모두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3. 영국령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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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영국의 홍콩 점령

1513년 포르투갈인 호르헤 알바레스(Jorge Álvares)가 서양인으로써 최초로 홍콩에 상륙한다. 물론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조차하자 그 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광저우의 공행을 통하여 유럽과의 접촉이 이어지다가 마침내 영국 동인도 회사 광둥성 근처 도시에 무역항을 건설하면서 처음으로 홍콩과 영국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1841년, 제1차 아편전쟁 홍콩 섬 영국 해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홍콩 섬 센트럴엔 영국 해병대가 상륙하여 영국 국기가 게양된다. 그리고 다음해의 난징 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정식으로 양도되었다. 이듬 해에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의 건립과 함께 총독부를 신설하였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셈이다.
지금 대황제(大皇帝: 청 황제)가 장차 홍콩을 대영국 군주에게 급여하니, 사후 왕위를 세습하는 자가 항상 영원히 장악하고 편의에 따라 법도를 세워 다스리도록 맡긴다.

중국 황제 폐하 대영제국 여왕 폐하에게 홍콩 제도를 양도한다. 홍콩 제도는 영원토록 대영의 여왕, 그 상속자와 후계자의 소유가 될 것이며, 대영제국의 여왕 폐하가 직접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같은 법률과 규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이다.
난징 조약》 제3조, 한문 영문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Hong_Kong_in_First_Convention_of_Peking_in_1860.jpg
파일:external/i0.wp.com/Zolima_Boundary.jpg
1860년 영국으로 할양되어 영구 귀속된 영역. 현재의 모습을 보면 갯벌을 죄다 간척해버린 육지의 확장으로 해안선에 많은 변화가 있다. 이때 삼수이포와 몽콕 쪽은 바닷가였으나 간척으로 내륙으로 쑥 들어갔다.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터진 제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한 이후 베이징시까지 털리면서 체결한 베이징 조약을 통해 추가로 영토를 할양해 홍콩의 범위가 확장되는데 바운더리 스트리트(Boundary Street, 限界街)의 남쪽 구룡반도 남단[7]과 스톤커터스 아일랜드(石環島)가[8] 베이징 조약으로 영속적으로 영국에 추가 귀속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The_Convention_for_the_Extension_of_Hong_Kong_Territory_in_1898_-_1.jpg
1898년 추가 조차되어 편입된 지역으로 청나라 신안현의 상당부분을 신계로 편입해버려 홍콩 면적이 넓어졌다. 현재의 지도와 거의 같다.

파일:Map_of_Hong_Kong.svg
홍콩 지도다.
  • 1842년 귀속된 곳은 초록색이다.
  • 1860년 귀속된 곳은 지도 14번을 포함해 바운더리 스트리트 남쪽 구역이다.
  • 1898년 10~13번과 신계가 추가 할양되었다.

1898년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산까이(新界, 신계)를 당시 충분히 영구 양도받을 수 있었음에도 99년간 조차했는데 유효 기간은 1997년까지였다.

여기서 왜 굳이 영구할양도 아닌 99년 조차인가에 대하여는 당시 서구 다른 열강들이 영국의 영향력이 중국에서 강해지는 것에 대한 견제심리를 의식해서 99년 조차로 청나라 관리와 합의했다는 설과 영국이 오만하게 청나라가 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조차로 시작해 슬그머니 영구 강점하는 계략이었는데 신해혁명으로 일이 꼬여버렸다는 등이 있다. 후자는 좀 들이맞는 게 실제로 영국은 바운더리 스트리트 이북인 카이탁에 공항을 만들고 삼수이포와 쿤통, 그리고 샤틴/췬완/콰이충 등 신계 남부를 신구룡(新九龍)으로 부르며 도심용 빨간 택시를 집어넣고 나머지 신계와 다르게 취급한 것 등이 있다. 신계 대부분을 약속대로 99년 조차 만료 후 중국에 돌려줘도 신구룡만은 잃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99년 조차 조항은 홍콩 전체가 중국에 반환되는 계기가 된다.

19세기의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었다.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써 활용되는 자유 무역항으로 선언되었고 구룡반도에서 광둥성 곳곳으로 운행하는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문화가 꽃핀 지역이다.

3.2. 일본의 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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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전후와 사회운동

1968년 홍콩 모습
일본의 패전 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돌아갔다. 영국 역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말레이 연방과 호주/ 뉴질랜드 등 각지의 식민지들을 평화롭게 독립시켜줬지만, 홍콩은 계속 식민지로 영유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고 판단해 계속 영유하기로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중국 대륙이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서자 공산주의 사막 속 자본주의의 오아시스처럼 여겨져 수많은 중국 부호들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홍콩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여 인구밀도는 이때부터 세계 최고를 찍었다.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제조업 중심의 경제로 성장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지리적 장점과 정치적 안정의 덕을 보아 동아시아 금융권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된다.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은 홍콩 할양은 아편전쟁으로 인한 불평등 조약의 결과라며 영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행정권만 인정해 왔다. 실질적으로 자기 영토로 간주하고 상호 왕래 시 내륙여행 허가증을 비자 대신 발급받을 것을 요구했다. 즉 중국 영토 중 간접통치하여 따로 노는 곳 취급을 했다.[9]

1949년 국공내전 말기 당시 승기를 잡은 중국 인민해방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고, 일부 공산당 강경파들은 100여년 간 식민지였던 홍콩까지 "해방"하자고 했으나, 광동성에서 작전하던 부대들에게 "절대 월경하지 말고, 영국군을 먼저 공격하지 말 것"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는 불필요하게 서방열강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외교적으로 중화민국을 자연스럽게 승계하려는 조치였다. 이 조치 때문인지 영국은 1950년 1월 서방 국가중 최초로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했다. 국공내전 이후 중국 공산당 정부는 영국과 벌인 홍콩 반환에 관한 협상에서 공동강령 55조를 통해 영국과의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도, 계승하지도 않겠다는 입장이긴 했지만 서방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존에 체결한 조약을 부정하는 건 무리였다.

물론 이곳도 격동의 현대사를 완전히 비껴간 것은 아니어서, 1922년 홍콩 선원 파업, 1925년 5.30 운동, 1956년 쌍십폭동(雙十暴動), 1967년 67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67폭동은 홍콩 현대사의 분수령이다. #영어판 다큐 발단은 오랫동안 저렴한 노동력이 강점으로 여겨지던 홍콩의 경제구조가 한계를 맞이하면서 사회갈등의 불씨가 된 것. 1966년에 스타페리 요금 인상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해결은 커녕 방치되면서 영국령 홍콩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다음해인 1967년,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노사분규에 경찰이 강경진압을 시행하면서 일파만파로 퍼진 것. 여기에 민주적 지식인들,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공산주의자들, 모택동주의자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대투쟁이 벌어진 것.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이 중국 본토에서 벌어지던 시기여서 굉장히 강력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친중파로 규정되지만 현재의 친중파 정당과는 달리 마오쩌둥을 따랐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좌익 운동들은 전 시민의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홍콩에서는 공산주의를 피해 본토에서 망명 온 사람들이 많았으며, 좌익 인사들이 반공 인사들에 대한 적색 테러를 감행하고 경찰들을 살해하고 본토에서 흥분한 홍위병들이 영국 대표부를 공격해 점령하는 사건이 있는 등 좌익 운동을 지원하던 중국 대륙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0] 그럼에도 폭동 초기에는 홍콩의 썩어빠진 사회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어느 정도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무질서로 인한 혼란상에 낮에 시위대가 밤에는 강도 패거리로 돌변해 약탈을 일삼고 민간인까지 살해하는 각종 트롤짓으로 인해 지지가 격감하면서 영국 식민당국이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고, 본토 문화대혁명의 광기도 어느정도 수그러드는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해 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계기가 되어 홍콩을 선진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3.4. 반환 협상

홍콩 섬 구룡반도 남부 등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구히 청나라에게 양도받은 영국 영토이지만 까우룽 반도의 나머지 지역( 신계)은 나중에 청나라로부터 99년의 기간을 정하여 추가 조차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신계의 조차 기간 만료를 앞두고 영국과 중국은 1982년부터 홍콩 문제에 관한 회담을 시작한다. 이 회담에서 영국은 조차 기간을 15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아예 중국은 청나라와 영국 간 관련 조약을 원천적으로 무효로 선언하면서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조약, 난징 조약, 그리고 신계 조차조약이 모두 무효이며 승계하지 않겠다고 건국 전인 1948년에 이미 천명하고 있었던 터였다. 사실상 이에 할 말이 없던 영국 입장에서는 홍콩을 전부 군말 없이 돌려주거나 아님 중국과 일전을 불사하면서 다 가지던가의 선택지 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이 국제적 고립을 무릅쓰고 홍콩을 무력 점령해버리면 영국이 홍콩을 지킬 방법은 많지 않았다. 혹자는 중화민국(대만)한테 돌려줬으면 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중화민국에 반환할 기회는 미국이 2차대전 승전 후 줬는데 스스로 거절했고 중국 공산화 이후엔 더이상 불가능해졌다.[11]

이때 영국은 1997년에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넘기되 행정권을 영국이 행사하는 아이디어도 제안해봤지만 중국은 이것도 단호히 거절했다. 대신 덩샤오핑이 특별행정구 관리 원칙을 제시하며[12] 홍콩을 특별행정구로 관리할 것이며 특별행정구엔 자본주의 체제를 적용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결국 22회에 걸친 협상 끝에 1984년 영국은 홍콩 전 지역을 반환하되 중국은 홍콩에 일국양제를 적용한다는 내용의 중영공동선언이 발표된다.

영국은 중영공동선언의 규정에 따라 홍콩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물론 반환 이후는 엄연히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하나의 중국을 중시하는 중국이 영국의 개입을 허락한 적은 일체 없었고 경제적 이권만 보장했으나 이것이 중영공동선언 자체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홍콩의 영유권을 지키는 선에서 영국의 경제적인 이권을 보장해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어차피 중국은 중영공동선언은 역사 속 선언으로 간주하며 특별행정구는 철저히 중국 헌법에 의거한 정치기구라고 일축한다.

반환 결정 이후 홍콩 정책에는 여러 변화가 있게 된다. 우선 홍콩 정부는 비어있는 땅이었던 신계를 1990년대부터 열심히 개발한다. 그 전에는 '1997년 되면 중국으로 넘어갈 땅' 취급당해서 영국령 홍콩 정부는 튄문 등 북부 신계 개발을 기피했다. 그래서 윈롱과 튄문 등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신계 남부는 개발을 진행해서 리카싱은 신계 남부 신구룡 신도시들을 개발하며 부동산 재벌이 되었고, 췬완(筌灣, Tsuen Wan), 샤틴(沙田, Sha Tin), 칭이 섬(靑衣, Tsing Yi) 등 빨간색 도심용 택시가 들어가는 신계 남부 신도시들은 방역/위생정책은 물론 인종별 거주지까지 영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쪽은 중국인 혈통의 홍콩 주민들이 살라고 만든 신도시라 영국 색채가 나지 않고 거리 이름이나 지명 등도 전부 청나라 때 쓰던걸 그대로 썼다. 반환 후에는 막상 영국인 혈통의 시민들이나 외국인들이 섬 쪽의 비싼 집값을 못견디고 대거 신계 남부로 이사오게 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영국령 홍콩 정부는 부분적인 민주화를 추진한다. 간선이던 구의회 선거를 완전 직선으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에도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석을 일부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런 조치들은 일당독재 체제의 중국을 긴장시켜서 중국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중국은 50년 간 불변 원칙을 영국이 어겼다고 딴지를 걸었다.[13]

4. 반환 이후

결국 홍콩은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의 임기를 끝으로 1997년 7월 1일 중국령 홍콩 특별행정구 가 되었다. 당시 영상

천안문 6.4 항쟁의 여파 때문인지 홍콩인들이 받은 충격과 불안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였으며, 실제로 과거 베트남이 공산화 되었을 때 탈출한 남베트남인( 보트피플)처럼 홍콩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 이들도 꽤 된다.[14] 특히 많이 간 곳이 캐나다에서도 밴쿠버다.[15] 이 시기의 홍콩을 무대로 한 홍콩 97 같은 작품도 있을 정도다. 반면 중국으로의 복귀를 환영, 지지한 홍콩인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홍콩 반환 이후 일국양제가 정착되고 10년간 홍콩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홍콩으로 복귀한 홍콩인들도 많아졌고 본인들은 이민가도 현지 출생 자녀들은 외국 국적이 있어 홍콩으로 귀국시켜 중국계 외국인으로 홍콩에 거주토록 했다. 그 덕분에 10~20대의 젊은 세대 홍콩인들은 캐나다 호주 국적자가 많다.

반환 이후에는 당시 타이베이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으면서 홍콩에 영사관을 설치했던 16개국[16]은 영사관을 폐쇄해야 했다.[17]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당시 중화민국과 수교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미 1996년 11월에 1998년 1월 부로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겠다는 선언을 했기에(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과도기 동안 영사관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받았다.[18] 그리고 파나마는 2017년에 중국과 수교한 후 홍콩에 영사관을 다시 설치했다.

4.1. 민주화 요구

2047년까지 홍콩은 기본법 및 중-영 간 합의에 따라 체제를 보장받는다고 했는데 홍콩 국가보안법 등 중대한 정치적 변화로 이는 사실상 끝났다고 봐도 된다. 물론 그와 별개로 특별행정구는 중국 헌법에 규정된 중국의 행정기구 중 하나로서 홍콩특별행정구는 중국법에 의거해 별도의 법 집행과 독자적 정부 구성을 보장받는다. 행정장관만 해도 원래 중국 공산당원이 맡아도 되지만 중국은 홍콩 행정장관을 간선제로 현지인 중에서 선출한다.

홍콩은 중국에 비하면 정치적으로 훨씬 민주주의적이며 영국령 홍콩에 비해 현재의 중국의 특별행정구 체제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좀 더 나은 면도 있다. 행정장관 선거 및 구의회 선거 등 선거제도 도입이 그렇다. 그럼에도 홍콩의 현재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여러 문제가 있으며, 또한 실질적인 면에서 들여다보면 일국양제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입김이나 반공 성향 정치인 및 인사에 대한 탄압이 강해지고 있어 홍콩의 자치권 및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그러나 중국 대륙 중국인들과 비교해 역사적 경험이나 기본적인 시민교육 수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홍콩 시민들의 정치 의식은 본토 중국인들과는 차이가 크다. 천안문 시위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 탄압을 비난하고 중국본토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쓰투화(司徒華)[19]라는 사람마저 있었을 정도라 중국 공산당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홍콩의 이런 진보적인 성향을 억누르려고 시도했고 결국 국가보안법으로 성공했다. 법리적으로 일국양제 원칙이 2047년이라고 폐기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 숫자는 중국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숫자다. 이미 그 불변의 50년은 이미 끝났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만약 중국 공산당이 중국화된 일국양제라는 현 추세를 유지하며 행정장관 선거나 홍콩 사법부의 임명에 대한 간섭을 계속할 경우 사실상 일국양제는 껍데기만 남고 홍콩의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실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위험성이 있었다.

홍콩에서는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간섭이나 민주주의 쇠퇴에 반대하는 여러 활동과 시위들을 벌여왔다. 2003년 국가보안법 철회 시위, 2014년의 우산 시위,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 민주주의와 일국양제 존중 및 중국 공산당의 간섭 거부 등을 요구하는 대형 시위들이 빈발했으나 2020년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시위는 금지되었다. 사실 홍콩은 중국에 속해있기에 중국이 민주화되지 않는 한 홍콩 혼자만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홍콩의 잇다른 시위들이 중국 본토에도 영향을 주어서 제로 코로나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 상하이시 등 중국 곳곳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4.2. 홍콩 민족주의

중국 중앙정부와의 갈등과 반환 이후 이주해온 대륙인들과의 갈등이 두드러지면서 홍콩에서는 스스로를 중국인도, 영국인도 아닌 홍콩인으로 규정하는 민족주의적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에서 시진핑이 집권하면서 홍콩의 자치권 및 자유에 대한 침해가 심해지자, 이런 민족주의적 여론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극단적으로는 중국이 일국양제를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으니 차라리 떨어져 나가겠다는 홍콩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지지자들은 아직 적은 편이지만 대학이나 중고등학교에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과 홍콩 정부가 긴장하는 중이었으며 결국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독립운동은 뿌리가 뽑혀버렸고 관련 단체는 모두 자진해산을 선언하고 사라졌다.

[1] 참고로 월어(粵語)는 광동어의 또 다른 이름이며 캐세이퍼시픽항공 승무원들은 구사 가능 언어를 명찰에 써 놓는데 기본이 英(영어)/粵(광동어)이고 표준 중국어가 가능하면 國語도 표기한다. 그 외 비중국계 외국인 승무원들은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아랍어, 힌디/우르두어 등 각자 모국어를 표기한다. [2] 베이징시 등 화북이나 둥베이 지방의 한족들도 중원과는 DNA 차이가 꽤 다르고 오히려 몽골인 만주족과 더 비슷해서 한족 집단 내부의 DNA 차이가 크다. 한족 문서 참고. 민족 결정에 혈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는 아랍인이나 유대인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랍인과 유대인도 언어로 민족을 정했으며 각자 인종이 각기 달라서 시리아, 레바논 등의 백인계 아랍인과 오리지널에 가까운 아라비아 반도의 갈색 인종 아랍인, 흑인 혈통의 수단, 차드, 모리타니 등 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존재하고 유대인도 백인계 아슈케나짐과 오리지널에 가까운 갈색인 세파르딤, 우즈베키스탄이나 중국 북부 등에 거주하는 황인 아랍인 등이 모두 존재한다. [3] 베트남어로는 찌에우다로 불린다. [4] 이 때 해군이 없던 몽골족들이 처음에 고전했으나 범문호 등 남송 출신 한족들이 원나라에 귀부, 원도 수군을 갖추어 전세를 뒤집는다. [5] 원의 직접 통치 영역은 화북 지방으로 화북 한족들은 변발을 강요당하고 감시를 받았으나 강남은 한족 신사층의 자치 지역이 되어 알아서들 했고 머리도 밀리지 않았다. [6] 명은 강력한 천자의 조정과 화약무기인 화창, 삼안총 등으로 무장한 강력한 수군이 존재하여 콘키스타도르 한두명이 무쌍 찍을 정도로 뒤떨어져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문명이 꽤 발달했으나 유럽보단 좀 뒤쳐졌던 인도 페르시아와는 달랐다. 말라카만 해도 꽤 문명이 발달했으나 유럽보단 뒤쳐져서 포르투갈인들이 소수 병력으로 점령했다. [7] 현재의 야우침몽 구로 침사추이, 야우마테이, 몽콕 일대다 [8] 현재는 간척으로 육지로 연담화되어 사라졌다. [9] 지금도 대만( 중화민국)에서는 홍콩을 자기네 영토로 보고 홍콩인을 자국 시민으로 간주해 병역을 제외한 납세 등 의무를 중화민국의 직접 통치 지역인 타이완 섬에 6개월 이상 거주시 부여한다. 예전엔 병역도 부과했다. [10]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1966년 파트에서는 홍콩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등장인물들이 해외로 떠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 [11] 이론상으로 가능하기는 한 것이, 영국이 홍콩을 식민지화 했을 때는 중화인민공화국도, 중화민국도 없는 청나라 시기였다. 즉, 영국이 홍콩을 반환할 때 대만에게 반환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전에 중화민국은 공식적으로 홍콩의 영국 영유권 자체를 부인하고 계속 자국 땅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당시 대만은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당시의 중국이 영국에게 세게 보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만으로 밀린 중화민국이 회수에 나서지 않아서 대만에게 홍콩을 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게 된 것이다. [12] 중국 헌법 상에 명시되어 있다. [13] 중국이 말하는 50년 불변 원칙의 기산점은 1967년 최초 반환요구 직후부터이며 2017년 이후 중국은 이 시점이 끝났다고 여겼다. 이후 2020년에 들어 홍콩특별행정구는 철저히 중국 헌법에 의거한 정치기구이며 일국양제는 영구불변한 중국 헌법에 보장된 원칙으로 더 좋은 것도 없으며 바꿀 수 없다고 하여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을 강조했다. 대신 사상적 누수는 허용하지 않아 국가보안법을 도입해 시위 등을 일절 금지시켰다. [14] 홍콩에는 베트남 화교들이 1975년 월남전 종결 이후 대거 이주하기도 했다. 4년 후 중월전쟁 발발 후 베트남 정부가 화교들은 쫓아낼 때 많이 간데 중 하나가 홍콩이기도 하다. 지금도 홍콩에서 나이든 노인 중 베트남이 고향이신 분들이 적지 않다. 베트남 화교들은 구미권에도 많이 갔으나 화교 인구가 컸던 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로도 많이 갔다. 월남전이나 중월전쟁이나 거의 반세기전 일이라서 그때 온 이들의 후손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되었다. [15] 홍콩인들의 이주로 밴쿠버 부동산이 홍콩인들에게 싹쓸이당하며 Hong Kong과 Vancouver가 합쳐진 홍쿠버란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홍콩 반환과는 상관 없는 경우지만 왕조현도 밴쿠버에 거주한 일이 있다. [16] 감비아, 과테말라, 나우루, 니카라과,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연방, 라이베리아, 벨리즈, 세인트 루시아,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코스타리카, 파나마, 파라과이, 투발루. [17] 파라과이는 영사관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일단 당시엔 아직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로 이전시켰으나, 2년 후 마카오마저 반환되면서 결국 철수해야 했다. 라이베리아 영사관은 반환 당시에는 중국과도 동시 수교 중이어서 문제가 없었으나 반환 두 달 후인 1997년 9월에 중국과 라이베리아가 단교하면서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쫓겨났다. [18] 이때 쫓겨났던 나라들 중 감비아(2013-2016), 도미니카 공화국(2018), 도미니카 연방(2004), 라이베리아(2003),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98), 코스타리카(2007), 엘살바도르(2018), 니카라과(2021), 온두라스(2023), 나우루(2024)는 후에 중국과 수교했지만(괄호 안의 연도에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감비아는 2013년에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2016년에 중국과 수교했다.) 수교 후 홍콩에 영사관을 복구하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만이 2006년까지 홍콩에 명예영사를 두었을 뿐이다. [19] 교사 출신으로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식민 당국의 우민화 교육에 반대하였다. 2011년 1월 2일 향년 79세로 타계하였으며, 워낙 홍콩 시민들에게 명망이 높아 친중파인 도날드 창 당시 행정장관마저도 공개적으로 추도했다. 1월 29일에 장례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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