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21:29:38

7천인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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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
3.1. 분산주의 및 마오쩌둥 책임 문제3.2. 류사오치의 연설3.3. 린뱌오의 연설3.4. 마오쩌둥의 연설3.5. 덩샤오핑 저우언라이의 연설
4. 결과5. 참고 문헌

1. 개요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확대 중앙회의. 중앙 정부 관료, 성, 시, 현 및 주요 공장과 탄광 5급 지도간부 7118명이 회의에 참석해 '7천인 대회'라고 불렸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야기된 대기근을 수습하고 공산 체제를 재정비하는 목적으로 개최된 대회였으나 마오쩌둥을 비롯한 정부의 실책에 대한 비판의 장으로 변모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계기로 실권을 잃고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이 그를 대신해 실권을 장악한다.

2. 배경

1958년, 마오쩌둥은 '삼면홍기(三面紅旗: 총노선,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를 전면적으로 선포하고 전 국민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경제개발을 개시했다. 그러나 3년에 걸친 경제개발 프로젝트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중국 인민 수천만 명이 3년간의 대기근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로 인해 민심 이반이 심각한 수위에 이르고 중앙과 지방 정부 간의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자, 중공 중앙은 경제적 난국을 돌파할 해법 마련에 고심했다.

중앙 정부는 특히 식량 공출계획이 붕괴된 것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1961년 11월 중순 무렵 중앙 정부가 지방으로부터 공출한 식량은 당년 목표의 20%에 불과했고 베이징, 톈진, 상하이 3대 도시는 식량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당 중앙은 이런 상황에서도 6개 중앙국 제1서기 회의를 소집해 내년 공물 공출량을 전년도보다 100억근 늘어난 820억근으로 결정했다. 중앙은 도시 인구가 전년도보다 1000만명 감소했지만 전시 대비 식량은 이미 전용이 다된 상태이고 국가에서는 수입 물량을 마련하지 못해 도시 식량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기에 이에 대한 청원이 많이 일어난다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820억근의 식량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지방 각급 당서기들은 중앙에서 임무를 상향조정하는 분배안에 따르겠다고 했지만 농촌 정세가 매우 험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시간을 좀더 늦춰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중남국 서기 타오주가 차라리 베이징에서 전국의 지방 당위원회 서기회의를 열어 중앙과 지방간의 생각이 통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건의했다. 덩샤오핑 중앙 총비서는 타오주의 건의를 받아들여 베이징에서 지방위 이상 간부의 회의를 개최하고 사상을 통일해 이른바 '분산주의'와 '자기 본위주의'를 극복하여 국가정량 임무를 실현할 것을 제안했다.마오쩌둥은 당초 이 대회가 대약진 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장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공용급식소 해체, 공업 및 농업 증산 지표 축소, 인민공사의 기본 채산단위를 생산대로 낮추고 도시로 강제 유입된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농촌으로 귀환시키는 등 일련의 구제조치를 취했으니 대약진운동에 대한 추가적인 수습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회의가 단순히 업무회의로서 식량 공출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중앙과 지방간의 의견 합의를 이루리라고 여기고 별다른 부담 없이 회의를 수락한 후 베이징을 떠나 한달 동안 휴가를 보냈다.

회의 진행을 맡은 덩샤오핑은 중앙선전부 부부장 천보다에게 류사오치가 발표할 확대회의 서면 보고를 작성하게 했고, 이를 대회에서 토론과 수정, 통과를 거쳐 당내 통일사상의 문건으로서 교육과 당원 동원에 쓰도록 했다. 1961년 11월 13일, 덩샤오핑은 천보다에게 확대회의 서면 보고서를 받아보고 정독한 뒤 대약진 운동 관련 상황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이에 천보다는 관련 문서를 빌려 보고서 편집에 참고했다. 하지만 천보다는 대약진 운동에서 불거진 폐단은 마오쩌둥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간부들의 잘못이라며 마오쩌둥이 져야 할 책임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1961년 12월 16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이틀 후에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7천인 대회 준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을 내렸다.
1. 집중통일은 과거의 가장 중요한 경험이며, 대약진 기간 중 지방 각극 당위의 적극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원래 중앙 정부에 집중됐던 많은 권력이 지방으로 분산되어 전체 당 내에서 심각한 분산주의가 일어났다. 이제 오래된 중앙집중식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2. 노란 꽃은 비록 좋지만 늘 푸른 잎으로 받쳐줘야 하며, 좋은 총노선이 있으면 또 완전한 정책이 나와서 배합해야 한다. 다만 대약진은 4개의 과도한 기준(높은 지표, 과다 산정, 높은 구매, 높은 분포), 몇 개의 대규모 토목공사(대규모 치수사업, 대규모 교통사업, 대형 양돈장(養豬場) 등), 과도한 공공사업 등 몇몇 사례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중앙에 책임이 있고 각급 지방당위원회도 책임이 있다. 이전에 지방에서 성서기와 대화를 나눴는데, 자신들에겐 책임이 크지만 중앙은 책임이 전혀 없다며 마치 "영명한 영도자"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3. 지방에서 제공하는 메시지는 확실치 않지만, 중앙은 진위를 구별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마오쩌둥은 이 '중앙'에 자신이 포함되는 지를 확실히 말하지 않았지만,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삼면홍기는 실수가 없었으며 자신들이 집행을 담당할 때 많은 결점과 착오가 생겼다며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렸다. 이후 천보다는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집행을 담당한 이들이 자아비판하는 내용의 확대 중앙회의 서면보고 원고를 작성했고, 류사오치가 7천인 대회에서 이 보고서를 낭독할 에정이었다.

류사오치의 서면보고 원고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의 제목은 <현재의 형세와 임무에 대하여>이고, 두번째 부분은 <집중통일을 추진하고 분산주의를 반대하자>이고, 세번째 부분은 <당의 문제>였다. 이 보고서의 전체적인 맥락은 대약진 이후의 오류가 모두 고쳐졌거나 개선되고 있으며 나라 전체가 약해지지 않고 나아지고 있으니 사상을 통일하여 국가 건설에 매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류사오치는 "단점을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며 중앙이 대약진 이후의 결점을 인정하고 앞장서서 잘못을 인정해야 하고 특히 당내 투쟁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해 많은 간부들에게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그역시 권력 '하방'으로 인해 각각의 정치경제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분산주의 반대, 중앙집권 회복이 급선무라는 데 동의했다. 그는 천보다에게 분산주의의 구체적인 표현을 삽입하게 했고, "성마다, 각 부마다 모두 중앙을 따라야 하며 단 하나의 예외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문구를 넣게 했다.

덩샤오핑은 대회를 잘 개최하기 위해 중앙판공청 주임 양상쿤에게 각종 보안 및 경호에 관한 임무를 맡게 했다. 대회 참여자가 7천여 명에 달해 조직적인 토론이 어렵다고 판단한 양상쿤은 성 별로 35개조, 지역별로 400여 조로 나누게 했다. 이리하여 공산 중국 성립 이래 최초로 7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확대회의가 개최되었다.

3. 경과

3.1. 분산주의 및 마오쩌둥 책임 문제

7천인 대회의 원래 의사일정은 류사오치가 1962년 1월 11일에 서면 보고문을 낭독하고 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의 토론을 걸쳐 10일 후 서면 보고서를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대회가 정식으로 열리기 이틀 전인 1962년 1월 9일, 류사오치는 관례에 따라 먼저 소형 공작회의 심의 서면보고를 한 후 마오쩌둥에게 전문을 최종 결정하도록 했다. 마오쩌둥은 1월 10일 오전 이 문서를 본 후 "좋다."라고 말하면서도 "아직 1,2부만 대강 보고 3부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서 자신이 서류를 제대로 검토할 때까지 사흘 동안 류사오치의 발표를 미루게 했다. 그러면서 그가 가장 관심을 갖는 농촌 기본 채산단위 및 소공 22대 등의 문제를 토론하게 했다. 이후 회의에서, 일단 대회를 열어서 토론을 벌인 후에 류사오치가 뒤에 발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월 11일 7천인 대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이유로 정례적인 개막식이 생략되었고 7천여 명의 대표가 즉시 류사오치의 서면보고 원고를 받아 하루종일 조를 나누어 토론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정치국 후보위원 캉성에게 편지를 써서 궈모뤄의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약간의 시간 동안 레닌이 남긴 유언을 읽었다. 레닌의 유언에 관한 일부 자료는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가 전 서기장 스탈린을 비판한 이후 계속 발표된 문건으로, 레닌은 정치후계자 선정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면서 스탈린에 대해 "거칠고 잔인하며 국가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이 왜 이 시점에서 이것을 읽었는지, 이것이 마오쩌둥의 행보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오쩌둥은 레닌의 유언을 정독한 후 1월 13일에 류사오치에게 "관례대로 원고를 읽지 말고 자유롭게 마음 속에 품은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회가 서면보고 원고를 토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전체 회의 일정을 1월 28일까지 연기했다.

그런데 토론이 이틀 정도 진행되던 1월 16일 마오쩌둥은 갑자기 대회의 의제를 바꿨고 회의 대표자 몇몇이 류사오치의 보고서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보고서 초안 작성을 위해 21인 초안작성 위원회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류사오치의 서면 보고는 1월 27일로 연기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지방 대표자 몇명이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지방의 분열주의가 심각하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는 대약진운동의 문제는 지방의 분열주의로 야기된 것이라며 모든 수준의 당위원회 비서들이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기술되었다. 그러나 주 정부와 지방 당위원회 서기들은 실제로 과도한 지표와 과도한 공출 명령을 내린 것은 류사오치 본인이며 자신들은 시킨대로 했을 뿐인데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귀결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양상쿤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오늘 오후 일부 문건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특히 각 분조에서 분산주의 반대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많았는데 주로 성 간부들 사이에서 이런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공업에는 분산주의가 있지만 농업에는 집중이 너무 많기 때문에 분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업에서의 분산주의는 또 여러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면 1957년 이전으로 회복될 것이고 화를 낼 이유도 없다!

양상쿤은 중남국위원회 제2서기이자 후베이성 위원회 제1서기인 왕런중(王任重)이 이러한 반대의견의 가장 유력한 대변인이라고 기록했다. 왕런중은 "성 간부는 모두 대약진의 선봉이 아니었고 중앙 정부가 그 많은 양의 공업 분야 관리체계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1958년 이후의 대약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며 분산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반대 의견이 여러번 제기되어 회의장 분위기가 매우 굳어졌고 서면 보고서에 대해 공개적으로 찬성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반대의견도 어디까지나 분대 내에서 제기된 것이었으며 대외적으로 반대를 제기하는 이도 없었다. 이에 마오쩌둥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61년 11월 이래로, 우리는 연속으로 2개의 회의를 열었고 이번에 중앙공작 회의가 열렸다. 인민대회의 보고에서 전국의 형세는 대단히 좋고 온통 밝다고 말했다. 이번 7천인 대회는 완전히 반대로, 암흑이 찾아왔으며 앞날이 유망하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국 인민들에게 설명하겠는가?"

마오쩌둥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원고는 약간의 현상을 보고 분석을 하지 못했으며 완성되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으니 연구해야 하고 다시 써야 한다. 중앙이 초안 작성에 참가하지 말고 중앙 분국 사람들도 초안 작성에 참가하지 말라. 아래의 현 위원회 서기, 지위 서기가 모두 와서 집필하라."

1월 16일, 류사오치는 양상쿤의 대회 민의에 대한 보고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지들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했고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실수할 것이다."

이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만났지만, 마오쩌둥은 강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중앙 및 지방 상급자 간의 모순을 해결하고 생각을 통일한 후에 원고를 새로 써야한다는 마오쩌둥의 뜻을 받들기로 하고 21인 기안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기안위원회에 지방 당국과 지방 당비서들이 참여하긴 했지만 모든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중앙 재무장관 및 경제 담당자들과 6개 중앙위원회 의장들이 가담했고 마오쩌둥이 지정한 후베이성 당위원회 제1서기 왕런중이 초청되었다. 왕런중은 대약진운동 초기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고 후베이성에서 막대한 양의 강철과 목표치 달성을 이뤄냈지만 서면보고서와 회의 초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분열주의를 비난하는 대신 상위 계층의 "주관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났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에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중앙에 대약진 운동의 책임이 있다는 암시가 담겨 있었다.

류사오치는 1월 18일 기안위원회를 소집한 후 8차례 토론을 벌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분산주의 반대'에 대한 이의제기를 여러 차례 받아야 했다. 일부 지역 서기 및 중앙 관료들은 분산주의를 개인주의 및 본위주의와 동일시하며 분산주의는 장궈타오 같은 반역자나 부르주아 사상에 찌든 모리배의 습성, 정치 속물에 해당하는 것이지 당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던 지방 관료들에게 그런 무자비한 누명을 씌우는 것에 깊은 의혹을 품었다. 그들은 보고서가 주관주의를 언급하지 않고 상급자의 정치적 압력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지방에게 너무 일방적이라며 반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1959년 루산회의 펑더화이, 장원톈 등 우경주의 파벌에 맞서 투쟁에 참여했고 이것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지만 1959년 이후의 반 좌익 투쟁 확대는 대약진 운동의 폐단이 근본 원인이지 지방의 분산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베이징시 당위원회 제1서기 펑전은 이들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면서 그는 마오쩌둥 역시 대약진 운동의 폐단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들의 잘못은 먼저 중앙 서기처에 있다. 주석, 류사오치와 중앙 상임위원회 동지들의 책임이 아닌가? 포함이 됐든 안 됐든, 얼마의 과오가 있든 없든지 간에 마오 주석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3~5년 과도 문제와 식당문제는 모두 마오 주석이 비준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펑전이 위험한 발언을 했다고 느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우리들은 주석이 어딜 가든 가는 곳으로 간다. 주석이 말했다. '너희들의 보고는 나를 성인으로 만든다. 성인은 무슨 얼어죽을 성인이냐. 누구나 결점이 있고 과오를 범한다. 단지 얼마만큼의 과오를 범하느냐, 범하지 않느냐에 있다. 나의 결점을 말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혁명은 천두슈, 왕밍이 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것이다."

이때 펑전이 끼어들었다.
"마오쩌둥의 위신은 에베레스트 봉우리도, 태산도 아니다. 그렇게 높지 않다. 현재 당내에 하나의 경향이 있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아비판하면 자리에서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마오 주석이 1백분의 1, 1천분의 1의 과오라도 자아비판하지 않으면 우리 당에 악영향을 끼친다. 성과 시 간부들이 책임을 떠맡으려 할까? 좋지 않은 것을 부하들에게 죄다 박질하면 교훈을 얻을 수 없다. 그러면 마오 주석부터 지부 서기에 이르기까지 각자 생긴대로 논다."

다음날, 천보다는 펑전의 발언에 대해 "펑전 동지가 어제 한 마오 주석과 관련한 발언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라고 평가하며, "우리는 많은 일들을 엉망진창으로 했다. 마오 주석이 책임이 있다고? 마오 주석이 자아비판을 하도록 하자고?"라며 펑전을 질타했다. 이에 펑전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마오 주석에 관한 문제는 내가 명확하게 말하겠다. 나, 펑전이 마오 주석을 비판해서는 인심을 얻지 못한다. 내 말은 그런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아)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오 주석이 스스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

이렇듯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저우언라이가 나섰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책임의 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중략) 주관적인 실수는 마오쩌둥 사상을 위반한 것에 초점을 맺춰야 하며 개인적인 문제는 우리가 잘못 집행한 상황이 문제가 되기 때무에 책임을 져야 하며 마오 주석의 책임을 물을 수는없다. "삼면홍기" 이론과 마오 주석의 뜻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지난 몇년 동안 부종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석이 조기에 시정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커져서 뇌졸중을 일으켰을 것이다. 주석은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고 준비를 마쳤다. 주석에게 책임을 물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전체 당을 위해 전심으로 노력해야 하며 중앙 집권과 단합을 강화하고 대중의 말을 듣고 중앙위원회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중앙위원회는 마오 주석의 말을 들어야 한다."

기안위원회는 저우언라이의 최종 발언을 기반으로 류사오치의 서면보고 원고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지 않고 원래의 문제제기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류사오치는 저우언라이 등의 의견에 따라 수정 원고에서 마오쩌둥의 삼면홍기와 대약진에 대해 더 많은 긍정적인 평가를 넣기로 했고 분산주의에 대한 심각한 지적을 받아들여 '분산주의'나 '분산주의 반대'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1월 23일,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보내온 서면보고 수정 원고를 읽은 후 이를 돌려주면서 "계급투쟁의 준엄함을 강조하고 미국 지도부를 비난하는 선전운동이 민심을 얻지 못하는 문제, 집단소유제의 장기화가 필요하다는 3개의 문장을 덧붙였다. 그는 두번째 원고를 다 보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주요 '방향'에는 찬성한다며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류사오치는 이 애매한 반응에 근거해 1월 25일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원고를 '기본'으로 통과시켰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류사오치가 인민공사와 '15년 내 영국 추월' 등의 구호와 강령을 언급하지 않는 지 물었다. 이에 류사오치는 이러한 구호와 강령이 이미 수정되었거나 폐기되었다며 총회 보고에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그는 이러한 구호와 강령이 마오쩌둥 개인의 책임 문제에 관련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걸 넣었다가 마오쩌둥의 진노를 살 것이 염려되었기에 넣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류사오치는 토론을 마친후 그날 밤 10여 장의 문서에 서면 요지를 작성하고 이를 보고하기 전에 마오쩌둥과 기타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소집해 자신의 발표를 설명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1월 27일 오후 4시에 발표할 예정이었던 일정을 2시간 앞당겨 오후 2시에 발표하게 했다. 또한 그는 린뱌오가 1월 29일에 구두 연설하기로 결정했다.

3.2. 류사오치의 연설

1월 27일, 류사오치는 7천인 대회 참석자들 앞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논의한 요지에 따라 구두보고를 했다. 이 구두보고는 3시간 가량 소요되었다. 그는 먼저 대약진 후 공업, 농업이 예상했던 것처럼 빨리 발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하고 식용유와 돼지고기 등 부식물도 부족하며 천도 부족하다고 인정했다. 앞서 마오쩌둥이 검토한 서면 원고에는 대약진 운동의 폐단이 발생한 원인을 자세히 논하지 않고 3년 동안의 자연재해와 작업 중 잘못 등 두가지 원인만 나열했다. 그러나 류사오치는 구두 보고에서 각지의 상황이 다르다며 천재와 인재를 구분했다. 또한 서면 보고에서는 대약진의 12개 결함과 4개의 오류가 기록되었지만, 류사오치는 구두보고에서 결점과 잘못이 더 많을 수 있음을 인정했고 마오쩌둥이 과거에 즐겨 사용했던 "9개의 손가락(성과)과 한 개의 손가락(실책)"이란 용어는 현실과 맞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후난성의 농민들은 곤경의 30%는 천재 탓이고 70%는 인재 탓이라고 믿는다. (중략) 전체적으로 주된것은 우리가 성공한 것들이었고 결점과 오류는 부차적이다. 그것들은 부차적 지위를 차지한다. 비록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업적 대 실패의 비율이 7대 3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홉 손가락 대 한 손가락 비유가 모든 지역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잘못이 손가락 하나이고 성공이 손가락 아홉개인 지역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편 류사오치는 농민들이 아직까지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간부와 군대, 노동자가 배물리 먹지 못하면 문제가 커지니 간부는 어떻게 해서든 농민들을 설득하여 농민의 '정치적 각오'를 높여 국가에 식량을 공급할 것을 요구했다. 다만 농민을 배려하기 위해 외국에서 80억근의 식량을 수입하기로 했고 양곡 징수 임무를 820억근에서 800억근으로 낮추겠다고 밝혔다.

세간에는 류사오치의 이같은 연설이 마오쩌둥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 격노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앞서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함께 류사오치로부터 구두 발표할 내용에 대해 전해들었고 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류사오치가 3시간 동안 연설하는 동안 얌전히 앉아있으면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홉 손가락 대 한 손가락 비유가 소수에만 적용된다."는 류사오치의 발언에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전혀 소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허베이성에서는 20% 지역에서만 생산이 감소했고 장쑤성의 경우 전체 지역 가운데 30%가 매년 생산량이 늘었다."

하지만 류사오치가 "대체적으로 볼 때 실패가 손가락 한 개에 그친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보다는 손가락 세개에 해당하며, 신양 지역이나 텐수이 지역처럼 일부 지역들은 그보다 더 많다."라고 반박하자, 마오쩌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오쩌둥은 회의 후 '중공중앙 확대공작회의 류사오치 동지의 보고에 관한 결의'를 심의할 때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확대중앙공작회의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발표했다.
"확대중앙공작회의는 류사오치 동지를 대표하여 중앙이 이번 회의에서 한 보고와 마오쩌둥 동지와 중앙상위 몇 명의 연설을 충분히 토론하였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모든 동지들은 이 보고서의 국제, 국내 정세에 대한 분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지난 4년간의 작업에서의 위대한 성과와 주요 약점, 잘못된 예측, 4년간의 기본 경험의 교훈을 요약한 보고서가 제시한 전 당의 주요 과제와 향후 투쟁 목표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류사오치의 3시간에 걸친 구두 보고는 마오쩌둥을 불쾌하게 만드는 부분을 다뤘지만 마오쩌둥의 위신을 지키는 데에도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 류사오치는 구두보고에서 전반적인 당 노선을 옹호해 마오쩌둥의 심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애썼다.
"우리가 몇년 동안 범한 잘못된 성질은 서면보고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우리가 범한 것은 노선 상의 잘못이 아니라 총노선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일정부분의 실책을 범했다. (중략) 다시 몇년 동안의 업무에서 발생한 결점과 잘못에 대해, 우리는 서면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른바 중앙 책임이라는 것은 중앙 각 부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국무원과 국무원 산하의 각 부서를 포함한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내심 류사오치를 괘씸하게 여겼다. 그는 주치의 리쯔수이에게 속내를 털어놨다.
"인재 대 천재를 운운하더군. 이런 종류의 발언 자체가 참사야."

그러나 그는 형세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의 속내를 감췄다. 대신 그는 서면보고와 구두보고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보고서가 서로 모순되는 점을 일치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서면보고는 광명을 강조해 사기를 진작하고 구두보고는 암흑을 솔직하게 밝혀 각급 간부들을 굴복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지만, 당시 참석자들은 류사오치와 마오쩌둥이 서로 충돌할 가능성을 의식하지 못했고 당내 상층부가 단합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양상쿤은 자신의 일기에 "류사오치 동지의 보고에 모두들 만족했으며 회의 개최에 특히 만족했다." 라고 기록했다.

한편, 장원톈은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 우경주의 파벌로 몰려 자아비판 후 실각했지만, 명목상 7천인 대회 상임 이사국의 멤버였기에 기밀 총회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개인적으로 류사오치의 서면 및 구두보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류사오치 동지의 보고와 이 보고서에 대한 결의안을 완전히 지지하고 마오 의장의 지시와 중앙위원회의 여러 동지들의 연설을 지지합니다. 앞으로 이들이 실제 업무에 구현되도록 보장하겠습니다."

마오쩌둥은 장원톈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불러 편지를 보여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원톈 동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천보다 등 서기처의 동지들에게 이 편지를 연구하게 하라. 장원텐은 동요분자이며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그가 말한 것이 믿을 만한 지의 여부를 연구할 가치가 있다."

3.3. 린뱌오의 연설

1월 26일, 마오쩌둥은 류사오치가 1월 27일에 구두보고를 한 뒤 사흘 동안 류사오치의 두 건의 보고를 토론 한 후 7천인 대회를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회 각 조가 류사오치의 구두보고에 일제히 만족을 표시한 바로 다음날, 마오쩌둥은 리히설을 마친 저우언라이의 연설을 취소하고 린뱌오의 발언을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저우언라이의 연설은 2월 7일 대회 마지막 날까지 연기되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린뱌오가 자신의 위신을 회복시켜주기를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린뱌오는 몸이 좋지 않아 오래 얘기할 수 없었지만, 그는 1월 29일에 무려 2시간 동안 연설해 마오쩌둥을 만족시켰다.

린뱌오는 먼저 류사오치의 1월 27일 연설 중 당 업무 부분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다음에는 총노선, 대약진 운동 및 인민공사의 삼명홍기를 평가했다. 그는 총노선이 올바른 방식으로 지도되었다고 평가했고 이에 수반된 문제는 부차적이며 불가피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대약진 이후 공업, 농업이 감산하고 물자난이 야기된 주요 원인은 연속적이고 엄청난 자연재해이며, 당연히 업무상 심각한 잘못도 있지만 노선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집행방면도 득보다 실이 많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잘못은 학교에서 희귀한 경험을 쌓은 것과 같다며 "소학생들도 공부를 위해 등록금을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국가는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당의 결속을 강화해야 한다. 시국이 어려울수록 당의 지도력, 중앙정부의 지도력, 마오 주석의 지도력을 믿어야 하며 당의 통일을 강화해야 한다. 마오 의장의 말을 듣고 마오 주석의 정신을 경험한다면, 이러한 고난의 횟수는 줄어들 것이다. 지금까지의 어려움은 훨씬 약해질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마오 주석의 생각은 언제나 옳다. (중략) 마오 주석의 우월함은 한 가지 면에 그치지 않고 여러 면에 있다. 나는 경험으로 마오 주석의 가장 뛰어난 자질에 현실주의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그는언제나 실상을 거의 정확하게 맞힌다. 그는 결코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는다. (중략) 과거 우리 일이 잘 이뤄졌을 때는 우리가 마오 주석의 생각을 간섭하지 않고 언제나 그의 생각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을 때라는 것을 통감한다. 마오 주석의 생각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거나 간섭을 겪었을 때마다 항상 문제가 생겼다. 지난 몇십년에 걸친 우리 당의 역사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국가경위 부주임이었던 위안바오화(袁寶華)는 장서 <변국(變局)> 부록에 린뱌오의 발언에 대한 참석자들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이들이 린뱌오의 발언을 듣고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부대 안에 있었다가 갑작스럽게 불려왔는데도 즉석에서 긴 연설을 했으며 그 내용에 마오 주석이 몇마디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략) 당시에는 린뱌오와 류사오치의 연설에 어떤 차이가 있는 지 느끼지 못했다. 린뱌오는 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서 몇 가지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주석의 뜻은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모두가 찬성하는 것으로, 원칙적인 말이었다. 당시 류사오치는 "천재는 삼분이지만 인재는 칠분"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농민의 말을 빌려서 한 것이었고, 사람들은 류사오치의 전반적인 연설 내용이 린뱌오의 그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류사오치 동지가 "삼면홍기"를 말할 때 역시 집행 중 잘못된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삼면홍기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마오쩌둥의 연설

1월 30일,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말을 이어받아 7천인 대회에서 즉석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녹음 원고를 1회 수정한 후 비서 톈자잉(田家英)에게 정리하게 했지만 나중에 원고가 만족스럽지 못해 녹음 원고를 다시 회수한 후 몇차례 수정 작업을 거쳤다. 그후 그는 자신의 연설 원고를 9부 인쇄해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에게 한 번 봐달라고 지시했고 펑전과 천보다에게 각각 한 부를 줬다. 마오쩌둥의 1962년 연설 원본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며 1966년판 연설문은 1962년 판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했다. 일설에 따르면, 류사오치가 문화대혁명 직전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삭제한 내용이 텐자잉이 가지고 있던 녹음판에 담겨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잘 알고 있다. 덩샤오핑 동지는 나보다 잘 알고 있고 저우언라이 동지도 나보다 잘 알고 있고 천윈 동지는 특히 많이 알고 있다."

또한 1962년판 원본에는 마오쩌둥이 류사오치가 연설에서 "최근 4년 동안 우리의 노선이 정확하고 주요 성과를 거뒀으며 실제 작업에서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쓴맛을 봤지만 우리는 더욱 강해졌지 더 약하지 않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나 1966년판에 삭제되었다고 한다.
"물론, 누명은 항상 있다. 류사오치 동지 보고서에 누명이 많이 있었는가? 분열주의는 누명이 아닌가? 그러나 함부로 누명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장삼 분산주의, 이사 분산주의, 누구라도 분산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1962년판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에 확실하지 않으며, 마오쩌둥이 7천인 대회에서 발언한 내용은 1966년판에 근거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1966년판 연설문에서, 마오쩌둥은 분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옳다면서도 집중통일에 앞서 민주적인 것을 먼저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집중제를 입에 올리면서 각급 간부가 분산주의에 반대한다는 공감대를 일으키기 전에 하급 간부에게 먼저 속마음과 진실을 털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화를 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동시에 "빚을 갚지 않고, 타격을 주지 않으며, 보복하지 않는다"며 하급자가 상급자를 비판하고 지방이 중앙을 비판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레닌주의의 기본 원칙은 하급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엄한 어조로 상급 간부를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자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판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자아비판한 관료들에게 더이상 책임을 묻지 말자고 주장했다. 장문기(張文奇) 전 중국 도시계획 설계원 고급도시 계획사의 회고의 따르면, 마오쩌둥은 자신의 연설이 모두를 감동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즉시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연설을 한 후 직접 지휘하여 성과를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2월 1일 저녁,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화북, 동북, 화동 3개구에서 먼저 자아비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현재 남아았지 않아서 일부 학자들은 중국 당국이 이를 공개할 수 없는 내부 사정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아무튼 이들의 뒤를 이어 왕런중 후베이성위 제1서기, 류쯔후 허베이성 당서기, 타오주 산시성 당서기, 장중량 전 간쑤성 당서기 등이 잇따라 자아비판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에 대한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현위원회의 지당 서기들은 성 서기의 위엄에 여전히 짓눌려 있었고 그들이 미래에도 집권할 가능성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위원과 총비서, 중앙판공청 주임을 읍에 파견해 이들을 독려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현 위원회와 지방 위원회가 여전히 서로를 마주보 며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안후이와 푸젠조, 주더와 천윈은 산시조, 덩샤오핑은 쓰촨성조에 갔다. 안후이성 서기 쩡시성은 군중 앞에서 잘못을 반성하고 "동급과 하위에 대해 비민주적이거나 펴등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에 현 관원들이 류사오치의 독려에 힘입어 쩡시성에게 비판을 퍼부었고 어떤 이는 병이 나서 공동급식소에 가지 못해 굶어죽은 이들이 허다하다며 욕을 퍼부었다.

저우언라이가 간 푸젠조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푸젠성 당서기 예페이(葉飛)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하급자에게 사죄해야 했다. 반면 덩샤오핑이 간 쓰촨조는 한동안 아무도 감히 성 서기를 비판하지 못했지만 덩샤오핑이 지속적으로 채근하자 그제서야 비판이 오갔지만 그 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결국 덩샤오핑은 쓰촨성서기 리징콴에게 식량을 조달하느라 수많은 이들을 아사시킨 것에 자기 비판을 해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현, 시 위원회 대표들의 성 서기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전반적으로 미적지근했다. 이론 상으로는 모든 당내 비판과 자기 비판은 "무보복, 무처벌" 원칙을 준수해야 하지만, 현위원회와 지당 서기는 상부의 엄명하에서 끊임없이 높은 통제와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과거 정풍운동,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 및 루산회의 이후의 우경주의 타파 운동을 겪으면서 복지부동의 태도가 몸에 배여서 감히 나서지 않으려 했다. 당시 7천인 대회에 참가했던 우파셴(吳法憲) 공군 사령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7천인 대회에 참가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대약진'호소에 호응했다. 아래는 다소 잘못을 말했고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따라서 일단 객관적인 상황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누명이 덮어질 수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 되면 관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펑더화이가 루산에서 실각당하고 비판을 받아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심이 생기게 하여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절대로 밝힐 수 없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 회의에서는 민주집중제를 발양할 수 없다."

3.5. 덩샤오핑 저우언라이의 연설

2월 6일, 덩샤오핑이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린뱌오처럼 마오쩌둥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사는 아니지만 기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중국 공산당에 좋은 지도 사상이 있고 좋은 당 중앙이 있으며 많은 양의 핵심이 있으며, 좋은 전통과 좋은 기풍이 있으며 좋은 인민이 있다고 밝히며 같은 말을 또 한 차례 반복했다. 그는 간부의 핵심적인 역할과 인민의 신뢰를 강조했으며 완전한 마오쩌둥 사상을 정확히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공산당은 좋은 사상이 있다. 바로 마오쩌둥 사상으로 대표되는 당의 지도 사상이다. 마오쩌둥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적인 진리를 중국 혁명과 건설의 구체화와 결부시킨 사상이다. 이 사상은 역사적으로 좋은 것임을 증명했다. 중국의 혁명은 다른 사상에서 승리로 인도된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이 승리를 인도한 것이다. 혁명 승리 이후에도 바로 마오쩌둥 사상의 지도 아래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은 이렇게 위대한 성취를 이뤄냈고, 계쏙 승리하며 발전해 나가야 한다. (중략) 좋은 당중앙이 있다. 이것이 바로 마오쩌둥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이다. 1935년 1월 쭌이 회의 이래 27년의 역사는 우리의 당중앙이 좋은 당중앙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덩샤오핑은 그러면서 3년 대기근이 야기되어 수많은 이들이 아사한 원인은 많은 동지들이 마오쩌둥 사상에 대해 충분히 배웠지만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2월 7일, 저우언라이가 7천인 대회 마지막 연설자로서 단상에 올랐다. 그는 과도한 곡물 징발, 생산량 부풀리기, 각 성에서의 곡물 유출과 해외로의 식량 수출 증대에 관해 개인적 책임을 지는 식으로 지금까지 잘못되어 왔던 상황의 원인을 상당부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지난 몇년 간의 오류와 부족한 점은 바로 우리가 전체 노선과 마오 주석의 귀중한 지시를 어겼을 때 나타났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후 7천인 대회는 류사오치의 보고서를 통과시키고 중앙과 지역 정부가 합심하여 당의 통합을 이루고 식량 공출과 관련해 긴밀한 협력을 유지하자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며 막을 내렸다.

4. 결과

7천인 대회가 마무리된 후,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자아비판하면서 당 주석으로서 중국공산당 내 서열 1위 위치는 유지했지만 실권을 국가원수가 된 국가주석 류사오치에게 내줬다. 이후 중국의 정국은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1] 덩샤오핑이 주도했다. 마오쩌둥은 겉으로는 그들이 잘하고 있다고 칭찬했지만 내심 자신이 실권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 대해 불만[2]을 품었고 류사오치 등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쩌지 않을 지라도 자신이 죽고 나면 소련의 흐루쇼프처럼 격하 운동을 벌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었다. 그의 이같은 불안은 1962년 7월 여름에 확신으로 굳어졌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의 전용 수영장에서 천윈과 톈자잉이 토지분배에 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히길 원한다며 마오쩌둥에게 이에 대해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폭발해[3] "나를 아주 구닥다리로 취급하는군!"이라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자 류사오치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습니다. 역사는 주석과 저를 심판할 겁니다. 심지어 식인행위도 역사책에 남게 될 겁니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폭탄 발언에 노발대발했다.
"삼면홍기는 이미 땅에 추락했고 이제는 토지를 다시 분배하라는 거군. 자네는 대체 이를 막기 위해 뭘 했나? 내가 죽고 나면 이 나라가 어찌 될까?"

두 사람은 곧 진정했고 마오쩌둥은 경제조정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제 중국판 흐루쇼프를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그는 류사오치가 분명히 자신의 모든 과오를 규탄하는 비밀 연설을 할 사람이라고 결론내렸다. 이후 그는 수년간 류사오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숙청하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기회를 엿본다.

5. 참고 문헌



[1] 7천인 대회 개최시기는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권을 움켜지고 있았지만, 당 내부에서는 대약진운동 실패로 실질적 권한이 별로없는 명목상으로 당내 서열 1위인 당 주석직이라는 위치로 물러나 있었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지금의 중국공산당 1인자 위치인 총서기와는 조금 다른 당의 모든 실무 총 책임자로서 중국공산당 내 서열 2위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물론 지금의 총서기와는 완벽하게 같은 집무를 하는게 아니지만 당시 1인자이자 7천인 대회 이후 2선 뒤로 물러나 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겸 중국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에 당 활동과 권한을 모두 대리하여 당 내 일상적인 실무를 총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2] 당시 마오쩌둥은 당 총서기로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를 죽은 아버지 모시듯이 한다."라고 비꼬았다. 즉,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최고위, 명예직인 당 주석 자리에 올려놓고 모시기는 극진히 모시지만, 대부분의 실무 의사 결정을 내릴 때는 "뭐 이런 것 갖고 주석을 귀찮게 해 드려야 쓰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 등 정치국 상무위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식으로 마오쩌둥을 배제해 버렸던 것이다. [3] 당시 류사오치의 아들은 마오쩌둥이 베이다이허에서 휴식중에 류사오치가 자신을 베이징으로 급히 호출한 것으로 인해 기분이 저기압이었고,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자 아버지가 황급히 주석에게 달려갔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