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1 10:46:03

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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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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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제2대 주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정체 陳雲
간체 陈云
한국식 독음 진운
영문 Chen Yun
출생 1905년 6월 13일, 청나라 강소성 우장국[1]
사망 1995년 4월 10일 (향년 89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직업 정치가
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경력2.2. 중일전쟁 시기2.3. 국공내전 시기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2.5. 문화대혁명 시기2.6. 마오이즘을 비판하다2.7. 중국 경제개혁 추진에 한몫하다2.8.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에 속도조절론을 제기2.9. 사망
3. 사상4. 가족 관계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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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덩샤오핑, 펑전, 보이보, 양상쿤, 덩잉차오 등과 함께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925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중국 공산 혁명에 한몫을 톡톡히 했고 중일전쟁 종결 시점에 이미 최고지도부에 진입해, 개혁개방 시기 당내 원로들 중에서는 당내 경력과 관록이 가장 앞서는[2] 인물이었다. 신중국 수립 이후에는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맡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재정 및 경제 정책의 최고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총서기였던 덩샤오핑이 당 주석 마오쩌둥의 부사수였다면 상무부총리 천윈은 총리 저우언라이의 부사수였던 셈이다.

덩샤오핑이 그의 대표 정책 개혁개방 때문에 경제 전문가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그는 당 관료들과 군부의 우두머리였고 최고영도자에 올랐을 당시에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써 국가주석이나 총서기 등을 자기 사람으로 세우고 간접적으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했다. 그리하여 경제는 마오쩌둥 시절부터 개혁개방 시기까지 쭉 천윈이 관장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실권을 잃었으나[3] 마오쩌둥의 사망과 사인방의 몰락 이후 복권되었다. 개혁개방 시기 전임 주임 덩샤오핑을 이어 실질적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고문위원회[4] 2기 주임으로서 중국의 경제 개혁을 주도하며, 사실상 덩샤오핑과 동급의 당내 거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천윈은 당내 보수파의 수장으로서 천안문 사태와 동구권 붕괴, 급격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고조된 급진적 개혁개방에 대한 반대여론을 이끌며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후야오방, 자오쯔양을 밀어내는[5] 데 성공한다. 이후 천윈은 후계자를 자신의 노선을 따르는 장쩌민으로 교체해 덩샤오핑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러나 천윈 등 보수파는 항상 당내 권력투쟁에서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하는 당과 군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군부와 여론을 등에 업은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통해 명분에서까지 우위를 점해 개혁개방을 당의 확고한 방침으로 못박으며 권력투쟁은 덩샤오핑의 판정승으로 끝이 난다. 그럼에도 천윈을 필두로 한 보수파는 남순강화 이후에도 여전히 당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혁개방파와 보수파, 혹은 덩샤오핑파와 천윈을 필두로 한 반덩샤오핑파 사이의 대립은 지금까지도 당내 역학구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파일:Chenyun-young.jpg
청소년 시절 천윈

천윈은 1905년 장쑤성 쑤저우부 우장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빈농이었고, 그나마도 그가 두 살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네살 때는 어머니가 사망하는 바람에 생활이 극도로 어려웠다. 그는 외할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근근히 먹고 살았다. 1917년, 천윈은 초등학교 교장 두형백(杜衡伯)의 권고로 안강(顏安) 초등학교에 무료 입학했다. 그러나 1919년 가난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초등학교 교사 장항공(張行恭)의 소개로 상하이 상무인서관에 가서 견습공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상업 운영과 재무 거래를 배웠고, 이는 그가 상업과 경제에 해박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천윈은 1925년 5.30 운동 때 상무인서관 파업 임시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마오둔(沈雁冰)과 함께 파업을 이끌었다. 뒤이어 둥이샹(董亦湘)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중국 공상인서관 총지부 간사, 발행소 서기를 역임한 후 3차례에 걸친 상하이 노동자 파업에 참가했다. 1927년 10월, 그는 칭푸에 가서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그해 12월, 천윈은 중국 공산당 친푸현 당서기를 맡아 농민 혁명군을 조직하고 칭푸특위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28년 1월에 그가 상하이에 가서 무기를 조달하러 갔을 때, 칭푸군 부대는 국민혁명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28년 9월, 천윈은 조직을 재건했고 11월에 장쑤성 상무위원을 맡았다. 또한 1929년 4월에 중국 공산당 장쑤성 후닝 순시원을 맡았고 1930년 7월엔 중국 공산당 상하이 자베이취(閘北區) 당서기를 겸임했다. 이후 천윈은 1930년 9월 24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중국 공산당 6기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 후보위원에 당선되었고 1931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6기 4중 전회에서 마침내 중앙위원에 당선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만으로 스물 다섯이었다.

1931년 3월, 중국 공산당 경호대장이었던 구순장이 국민당으로 변절했다. 이에 친원은 저우언라이를 자신의 집에 숨겨줬다. 그러던 6월 말, 중국 공산당 총서기 샹중파가 구순장의 밀고로 체포된 직후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천윈은 '이개생'(李介生)이라는 가명을 쓰며 공산당 보안특위를 재조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앙 기관을 중앙 소비에트 지역으로 옮기고 제4과를 폐지했으며 다른 과 인원을 축소했다.

1931년 9월 22일, 중국 공산당 임시 중앙 정치국은 상하이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보구는 코민테른의 전보를 토대로 임시 중앙정치국 성립 비준을 선언했으며, 천윈은 임시 중앙 정치국 9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다. 이후 그는 1932년 3월 14일 중국 공산당 임시 중앙 상무위원과 전국 노동조합 당서기를 맡았고 1932년 12월 23일 루쉰과 접견해 루쉰의 집에서 극비리에 살고 있던 취추바이 부부와 만났다.

1933년 1월 13일, 중국 공산당 임시 중앙은 구순장 등 변절한 공산당원들이 속출하고 국민당 소속 비밀경찰들이 당원들을 계속 체포하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중앙 소비에트 지구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말 중앙 소비에트 지구의 수도 루이진으로 이전한 당 중앙은 보구, 왕밍, 장원톈 등의 소련 유학파들에게 장악되었고 천윈은 왕자샹, 양상쿤 등과 함께 당 간부로 지정되었다. 1933년 8월 8일, 중앙국은 당원들의 규율 위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중앙상무위원회 및 중앙소구의 각 성현 감찰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 감찰위원회 멤버로는 둥비우, 천윈, 캉성 등이 지정되었다. 1934년 1월 15일~18일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5기 5중전회에서, 천윈은 공산당 정치국 위원, 중앙서기처의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10월, 천윈은 대장정에서 홍5군 정치간부 대표가 되어 대장을 맡았다. 그는 이 시기에 샹강(湘江) 전투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군사위 제12종대가 홍5군에 합병한 후, 천윈은 12종대 정치위원을 맡아 류보청(劉伯承), 예젠잉과 호흡을 맞췄다. 1935년 1월, 군사위원회 12종대가 구이저우의 쭌이를 공략했다. 이후 천윈은 경비사령부 정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월 15일에 열린 쭌이회의에 참석한 후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 부장을 겸임했다. 5월 초에 홍군이 금사강을 건널 때, 천윈은 도하사령부 정치위원으로 근무하며 군대가 도하할 수 있도록 배를 구했고 3만 홍군은 그의 노고에 힘입어열흘 안에 금사강을 건넜다.

6월, 천윈은 공산당의 명령을 받들어 쓰촨성 천전현 영관전에 잠입해 현지 중국 공산당 조직 간부들의 호위를 받으며 여러 도시를 거쳐 충칭에 도착한 후 상하이로 건너가 지하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천윈은 상하이에서 국민당 체포조직 때문에 더이상 활동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천윈에게 판한녠(潘漢年)과 함께 소련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같은 해 9월, 천윈은 소련에 도착해 레닌 학교에 편입하여 정치경제학과를 수강했으며 영문학을 별도로 공부했다. 1936년 3월, 천윈은 모스크바 동방대학 부교수를 맡았고 '롄천(廉臣)'이란 필명으로 <수군서행견문록(隨軍西行見聞錄)>을 써서 중국 공산당 해외홍보처에 보냈다.

1936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닝샤 전투를 계획하고 서로군을 조직해 소련으로 가는 진로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서로군은 신장 군벌군의 교전에서 거의 전멸했고, 잔여 부대는 리줘란(李卓然), 리셴녠(李先念)의 인솔을 받으며 신장 성협에 숨었다. 1936년 12월 일, 천윈은 당 중앙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를 떠나 신장으로 가서 서로군영을 지원했다. 그러던 중 서안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천윈은 1937년 4월 중국 공산당의 신장 주재 대표를 맡아 신장의 디화에 가서 신장 군벌 성스차이를 설득해 홍군과의 휴전을 맺게 했고, 덕분에 서로군은 본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임무를 마친 천윈은 1937년 11월 옌안으로 돌아갔다.

2.2. 중일전쟁 시기

파일:Chen_yun_1938.jpg
1938년경 천윈

천윈은 1937년 11월 29일 왕밍, 캉성 등과 함께 옌안으로 돌아온 후 중국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 당서기처 서기에 임명되고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을 겸임했다.1938년 4월 30일, 천윈은 중국 공산당 청년공작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9월에 항일 군정대학에서 '간부 정책론' 강연을 하며 자신의 조직 사업에 대한 견해를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11월 20일 일본군이 옌안을 폭격할 때 토굴에 매몰되어 죽을 뻔했지만 동료들이 제때에 발견한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후 그는 12월에 중앙당학교 교장을 맡았다.

1940년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앙 구제위원회를 설립해 일본군과 국민당에게 체포된 동지를 구제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구제위원회의 일원이 되진 않았지만 둥비우와 함께 외부에서 구제위원회를 도왔다. 또한 천윈은 1941년 남방공작위원회를 설립하고 수년간 중국 공산당 중앙의 정치 의사결정 분야에 공산당 서기로 참여해 중국 공산당의 국통구 활동과 배치를 지휘, 지도했다. 1942년 5월, 천윈은 중국 공산당 중앙총학습위원회 위원이 되어 정풍운동에 참여해 마오쩌둥의 권력 강화에 기여했다.

1944년 3월 6일, 천윈은 중국 공산당 서북국 위원, 서북재경사무소 부주임 겸 정치부주임, 연변의 재경업무를 맡았다. 이는 천윈이 주요 경제관리직을 맡은 첫 사례다. 이후 그는 생산, 화폐, 암시장, 예산, 환율과 무역 거래에 관한 많은 일들을 하면서 금융과 재정 경험을 쌓았고, 공산당 내에서 드문 경제전문가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1945년 6월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는 천윈을 정치국 위원에 선출했다. 이후 8월 23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충칭에 가서 장제스와 담판짓는 동안 류사오치와 천윈이 각각 당 중앙 주석과 서기를 대리하도록 결정했다.

2.3. 국공내전 시기

1945년 9월, 소련은 중국 동북 일대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가 중국 국민당의 반발, 독소전쟁의 후유증, 미국과의 갈등 우려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포기했고 대신 공산당에게 일본군이 남긴 무기와 물자를 넘겨줬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 동북 지역을 둘러싸고 첨에하게 대립했다. 9월 14일,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긴급회의를 열어 중국 공산당 중앙 동북국 사무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천윈은 동북국 위원에 임명되어 즉시 동북으로 가서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9월 15일, 천윈과 펑전, 예지좡(葉季壯), 우슈취안 등은 소련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갔다가 산해관 비행장에 착륙해 급유를 하던 도중 뜻밖에 활주로를 벗어나 밀밭에 박히고 말았다. 이에 천윈 등은 열차로 갈아타고 18일 심양에 도착해 동북지방에서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과 접촉해 동북정부를 수립할 준비 작업을 벌였다. 또한 그는 9월부터 11월까지 심양, 하얼빈 등 각지에 면밀한 토지조사 및 연구를 진행했다.

1945년 11월 16일, 천윈은 창춘으로 가서 중공의 중앙 북만주국 서기를 맡았고 뒤이어 중국 공산당 지린성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던 11월 하순, 천윈은 대도시에 집착하지 말고 여러 중소 도시 및 농촌을 근거지로 만주 지배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의견을 장원톈, 황극성, 린뱌오 등과 함께 당 중앙에 건의했다. 마오쩌둥은 이 의견을 참고해 중앙을 대신하여 "확고한 동북 근거지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동북 민주연합군 북만주군 정치위원을 맡은 천윈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철수해 빈현에 진주한 뒤 국민당과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간부들의 사상을 통제했다.

1946년 4월, 천윈은 동북 민주연합군 북만주군 하얼빈 전선 야전사령부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러던 5월 동북 민주연합군이 국민혁명군에게 연전연패하자, 천윈은 하얼빈에서 물러나 빈현으로 퇴각했다. 이에 당중앙은 동북국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중소 도시 및 광대한 시골에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라."고 지시하고 6월 12일에는 동북국 간부 문제를 동북국에게 일임한다고 지시하며 동북국 지도기구를 개편해 북만주국을 동북국과 합병했다. 6월 16일, 천윈은 동북국 부비서 겸 동북민주연합 부정치위원을 맡아 재정경제와 후방 업무를 관할했다.

1946년 10월 중순, 장제스는 심양에 친히 와서 "남공북수, 선남후북(南攻北守,先南後北)"이란 방침을 세우고 정동국을 수립한 뒤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남만주 공산당 지역을 공격했다. 공산군은 연전 연패해 북만주 지역으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11월 하순, 중국 공산당의 남만주 근거지는 무송, 정우현, 지안현 등 다섯 개의 작은 현애세 23만명의 인구와 3,4만 명의 부대가 남아있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천윈은 12월 회의에서 공산군의 남만주 포기를 반대하고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두위밍(杜聿明)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만주 공산군의 근거지를 공격하자, 천윈은 샤오창과 함께 랴오둥 군구 부대를 지휘해 유격전 전술을 구사했고, 양군은 자오장 지역에서 대치했다. 이때 린뱌오가 북만주 부대를 이끌고 송화강을 건너 국민혁명군을 견제했고, 1947년 4월에 국민혁명군을 통화시 서북쪽의 홍쓰(紅石)에서 국민혁명군을 격파했다. 그 결과, 국민혁명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했고 공산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1947년 5월, 동북 민주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만주의 각 근거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민혁명군을 대도시 및 철도 노선에 가둬놓았다. 이때 천윈은 동북행정 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7월에는 요동 전선을 이끌었다. 1948년 초 요동에서 하얼빈으로 돌아온 천윈은 3개월 간 준비작업 끝에 설립된 동북재정경제위원회의 주임을 맡아 동북해방구 재정경제 업무를 주재했다. 그해 8월, 전국 제6차 노동대회가 하얼빈에서 거행되었고, 천윈은 만주 노동조학연맹 주석에 당선되었다. 1948년 11월, 동북해방군이 선양을 함락시켰고, 천윈은 선양특별시 군사통제위원회 주임을 맡았으며 소련, 북한, 홍콩과의 무역 연락을 유지하고 화북, 화남의 중국 공산당 조직과의 협력을 적극 지원했다.

1949년 3월 14일, 저우언라이가 작성한 <재정경제사업 및 후방업무에 관한 중앙의 결정>에서는 화북재정경제위원회와 동북부 재정경제위원회를 통합하여 정식으로 중앙재정경제위원회를 발족시키기로 결정했다. 천윈은 5월 9일 베이징에 도착해 중앙재정경제위원회 조직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공산군이 상하이를 확보했지만 곧 상하이의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상하이는 석탄 및 식량 부족과 금융, 물가의 급변에 시달렸고 15만 명의 국민혁명군 출신 귀순자들을 부담하게 되면서 경제 붕괴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화북, 화동, 화중, 동북, 서북 5대 지역의 재경지도간부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려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천윈은 이 회의를 주관하며 상하이 경제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인민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했고, 가치가 떨어지던 금원권을 인민폐로 교환하는 화폐교환 정책을 폈고, 금원권의 가치가 위낙에 떨어졌던지라 화폐교환 자체는 순조롭게 이어졌지만 인민폐의 화폐를 안정화시킬려는 조치에도 인민폐는 여전히 상하이 금융시장에 발붙이지 못했고, 일반 상하이인들도 인민폐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며 의심하였으며 투기꾼들은 은화에 대한 투매를 벌이며 인민폐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인민폐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은화를 투매해봤지만 투기꾼들이 이를 싹쓸이 했다.[6] 인민폐의 경쟁대상이 은화라는 것을 알아챈 천윈은 중앙정부가 인민폐를 법정 화폐로 삼는 지령을 관철하기 위해 은화 투매, 은화 유통 금지 등의 방법으로 투기를 단속했지만, 효과를 미미했고, 상하이의 백화점들은 인민폐 결제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인민폐에 대한 은화의 가격이 3배 이상 폭등하자, 화동국은 상하이증권거래소를 폐쇄하는 조치를 취해 일시적으로 상하이 금융시장을 정지시켰다.[7] 이후 상하이 상인들은 곡물과 면화, 석탄을 사재기했고, 천윈은 이를 단속하기 위해 "미면전쟁(米棉之戰)" 조직을 설립해 화동 지역의 면화, 석탄, 곡물 등을 확보하고 사재기하는 상인들을 엄히 처벌해 상하이의 물가를 안정시켰다. 그때까지 상하이의 경제를 장악하던 상하이의 자본가들이나 투기꾼들은 처음에 공산당이 상하이를 장악했을때는 공산당이 시골에서나 세력을 키워서 경제를 모를것이라면서 공산당의 통치능력이 엉망일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천하를 얻었으나, 천하는 말위에서 통치할 수 없다거나 공산당은 싸움은 100점, 정치는 80점, 경제운용 능력은 0점이라고 조롱하기 바빴는데 천윈의 활약으로 자본가의 투기꾼들을 무릎꿇게 만든것이다. [8] 이후 천윈은 1949년 9월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 참석해 중앙인민정부위원, 전국정치협상위원에 선출되었다.

2.4.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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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8일 베이징에서 석유공업 발전 상황에 관한 보고를 받고 있는 천윈

1949년 10월 1일, 천윈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식에 참석했다. 그후 그는 19일 중앙인민정부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주임 및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1월에 정무원 재경위원회를 주재하여 시장 물가 안정을 연구했으며 1950년 2월에 전국 재정회의를 주재해 재정난 극복 정책을 연구했다. 이후 그는 <통일재정 경제에 관한 결정> 초안을 작성했고, 정무원은 이를 채택해 전국에 공표했다. 그 결과 1950년 4, 5월경 중국 전역의 재정경제가 안정되었고 재정수지가 균형에 근접했다.

사실 국민당의 몰락 원인의 하나는 1920년대부터 지속한 무분별한 재정정책이 화근이었다. 국민당은 공산당 및 일본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무분별한 확대재정을 폈는데 이것이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불러왔고, 재정전문가 송자문은 이를 바로잡아보려고 했으나, 장제스가 기존입장을 계속 고집했기 때문에, 송자문은 사임했고, 장제스의 뜻대로 재정정책이 실시되었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1948년에는 이를 바로잡겠다고 장경국의 주도로 신화폐를 발행하는 재정경제긴급처분령을 실시했지만 이것이 실패로 끝나면서 국민당의 주된 재정기반인 절강성, 강소성, 상해시의 경제가 붕괴하는 바람에 군사력도 박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당을 몰아내고 집권한 공산당의 재정건전성은 수권능력의 시험대였고, 천윈은 이를 유지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천윈은 1950년 5월 8일에서 26일까지 베이징, 상하이 등 7대 도시 위주의 상공 국장회의를 주재하여 상품의 체화 문제를 연구했다. 회의 후, 천윈은 국영기업과 민간 기업간의 관계를 조절했다. 그러다가 6월 4일 중국 공산당 서기 런비스(任弼時)가 중병에 걸리자, 천윈은 중국 공산당 서기처에 근무하기로 결정하고 마오쩌둥, 류사오치, 주더, 저우언라이와 함께 7기 3중전회를 구성했다. 그해 10월 런비스가 끝내 사망하자, 천윈은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 서기처의 서기를 맡았다. 1950년 11월 15일부터 27일까지 제2차 전국재정회의를 주재한 천윈은 인민해방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함에 따라 재정정책의 중점을 시장 안정에서 국방으로 돌리고 농업 경제 문제를 주관했다.

1951년 5월, 천윈은 티베트 평화회담을 주재한 후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고 서북 유전지대와 화이허 강(淮河) 일대를 조사했다. 그후 1952년 8월부터 9월까지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소련을 방문해 소련의 중국 건설공사 지원, 고무 생산, 중국-몽골 철도 건설, 뤼순구 해군기지 등 여러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과로한 탓에 1953년 2월 8일 정치국 회의 후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재위원회는 부주임인 보이보가 지도했다.

1953년 7월 23일, 병세에서 회복한 천윈은 덩샤오핑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중재위원회 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류사오치, 보이보와 함께 중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1953년 11월 경, 가오강이 류사오치를 축출하기 위해 천윈을 찾아가서 "마오 주석이 류사오치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며 자신과 힘을 합쳐 류사오치를 제거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천윈은 곧장 마오쩌둥을 찾아가 가오강이 자신에게 한 말을 이실직고했고, 마오쩌둥은 그해 12월에 중앙위원회에 "가오강- 라오수스 반당연합 사건"을 공표하고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가오강, 라오수스 등에게 자아비판하게 했다. 그후 1954년 2월 7일 4중전회에서, 천윈은 가오강을 류사오치를 몰아내려 한 반당분자라고 비난했다. 동북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며 친목을 다져왔던 천윈이 자신을 매도하는 것을 지켜본 가오강은 배신감과 절망에 사로잡혀 2월 17일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월 17일에 베이징 의대병원에 입원하던 중 수면제 과다 복용 방식으로 자살했다.

1954년 4월, 천윈은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 요강 초안을 작성하였고 중국의 첫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관했다. 그해 9월 29일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에 부임한 천윈은 식량에 대한 계획 수매 및 공급(일괄구매)를 개시했다. 1955년 하반기, 각지의 현지 정부는 경제 동향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평가해 중앙 정부가 농업합작화 운동과 공사합영운동의 진도를 가속화하게 하고 지나치게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1956년 초 저우언라이와 천윈 등이 현지를 시찰해 상황을 파악하고 정책을 정상화시켰다. 1956년 9월, 천윈은 중국 공산당 8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그후 그는 1957년 1월 10일 중국 공산당 중앙경제공장 팀장을 겸임해 중국 경제를 총괄 지휘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천윈의 현실주의적 정책에 반감을 품었다. 1958년 1월 난닝회의에서,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은 저우언라이와 천윈의 '반모진(反冒進: 돌격주의 반대)'을 비판하며 "이후 다시는 반모진을 거론하지 말라"는 단호한 의지를 밝혔다. 그후 2월 18일,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저우언라이와 천윈 등이 펼치는 정책은 우파와의 거리가 5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사실상 '우경 보수주의'에 불과하니 마땅히 배제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저우언라이, 천윈은 자아비판을 한 후 마오쩌둥에게 사실상 실권을 내줬고,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천윈의 경제정책을 무시하고 마오쩌둥이 주도해서 추진한 3년간의 대약진 운동은 대실패로 끝났고 중국은 수천만 명이 굶어죽으며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를렀다.

1959년 3월, 천윈은 심장병에 걸려 베이징을 떠나 항주에 휴양갔다. 하지만 그는 휴양 기간에도 동북, 화동, 저장성 등지에서 농업, 철강, 광산 등의 문제를 시찰했다. 1961년 경제위기가 극에 달하자, 마오쩌둥은 천윈을 다시 중용해 경제 전반의 문제를 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천윈은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덩샤오핑과 함께 상산하향 운동을 전개하고 강력한 통화 정책을 실시해 시중에 풀린 통화를 회수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국 경제는 1962년부터 조금씩 정상화되어 1965년 무렵엔 대약진 운동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1962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확대 중앙회의(일명 7천인 대회)를 개최해 민심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대약진 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의 장이 되었다. 이에 천윈은 그해 2월 하순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확대회의에서 "현재의 재정경제상황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몇가지 방법" 보고서를 채택해 농업 생산 증가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모색했다. 3월 7일, 천윈은 중국 공산당 중앙재경팀 회의에서 국민경제계획의 종합적인 균형 발전과 농촌의 자율생산 및 어느정도 수준의 사유재산 허용 정책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8월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열린 중앙 공작회의에서 "당내에 '흑암풍(黑暗風)'[9], '단간풍(單干風)'[10], '번안풍(飜案風)'[11]이 존재한다."며 간접적으로 천윈을 비판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8월에 8기 10중전회에서 천윈을 노고경(老右傾: 낡은 생각에 치우침)'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천윈은 심장병과 협심증으로 고생하며 수년 동안 남방 각지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5. 문화대혁명 시기

1966년 8월,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8기 11중전회에서 류사오치를 향한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후 반년도 안되어 류사오치,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이 잇달아 실각했다. 천윈은 공개 석상에서 마오쩌둥과 뜻을 함께하며 류사오치를 공격했지만, 그 역시 "오랫동안 주석과 대립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1967년 1월, 천보다의 선동을 받은 홍위병들이 천윈의 집을 습격해 재산을 약탈했다. 이에 대해 천윈은 태연하게 "상관없다. 그들이 알아서 가지게 해라. 어차피 물건은 얼마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후 홍위병들의 힘은 더욱 세졌고, '천윈연락소 비판소조'는 베이징 사범학교 교정에서 결의대회를 열어 천윈을 규탄했다.

1968년 10월, 셰푸즈(謝富治)가 중국 공산당 8기 12중전회에서 천윈의 경제정책을 비난했다. 이에 천윈은 어쩔 수 없이 자아비판을 했다. 그후 천윈은 1969년 4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정치국을 떠나 중앙위원으로서의 자격만 가지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20일, 그는 장시성 남창 청운보 석유기계공장으로 보내졌고, 그의 부인과 아이들은 각지로 분산 배치되었다. 급기야 1970년 6월, 천윈은 워러무(于若木)의 고발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격리심사를 받았다.

1971년, 린뱌오가 9.13 사건으로 사망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사건 수습을 위해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했던 당 원로들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고, 천윈은 1972년 4월 24일 남창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1973년에 당직을 되찾았다. 그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제 경제 상황을 연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정치 경제 체제에 관해 토론했다. 또한 10월 3일에 광저우로 가서 상품 교역회에 참가했으며 10월 10일 단순히 외화를 구매하는 것을 넘어 중국의 금 보유고를 증진시켜야 한다는 보고서를 국무원에 제출했다. 그후 1975년 1월, 그는 제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76년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이 잇달아 사망했다. 그리고 그해 9월 하순, 화궈펑, 예젠잉, 녜룽전 등이 사인방 일당 숙청 문제를 논의했다. 천윈은 처음에 중앙 총회를 열어 사인방 문제를 평화적으로 매듭지으려 했지만 곧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예젠잉 등의 계획을 용인했다. 그리하여 10월 6일, 화궈펑, 예젠잉, 왕둥싱(汪東興) 등이 사인방을 체포했고,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2.6. 마오이즘을 비판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덩샤오핑과 화궈펑은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에 천윈은 1977년 3월 중앙 공작 회의에서 화궈펑의 양개범시(兩個凡是)' 이론을 반대하고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그후 천윈은 1978년 11월부터 12월까지 열린 중앙 공작회의에서 단순히 사인방을 처벌하는 데서 끝나지 말고 캉성과 문혁소조가 저지른 각종 범죄행위를 조사하고 펑더화이, 류사오치 등에 대한 잘못된 판결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 상당수는 천윈의 발언에 지지를 표명했고 화궈펑은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 출석한 그는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다시 당선되었으며 중앙기율위원회[12] 제1서기에 선출되어 중앙 기율검사위원회와 공안기관을 관할했다. 이후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억울한 사건을 적극적으로 심리하며 박해받는 사람들을 추도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1979년 2월, 중앙위원회와 중앙 조직부는 류사오치 사건을 재심사하고 그가 무고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1979년 3월, 천윈은 계획경제와 시장조율의 관계를 제시하며 자원에 대한 배분 비율이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79년 3월 14일 국무원 재정 경제위원회 주임을 맡은 그는 그해 4월 당내 회의에서 중국의 경제 발전 부족과 국민의 당에 대한 불신을 개탄하면서 "만약 1949년에 문화대혁명 10년이 어떠할 지 알았더라면, 나는 장제스에게 싸울 의욕을 잃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마오쩌둥의 독재적인 방식을 비판하고 반체제 인사들에게 보다 온건한 노선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고 린뱌오와 4인방, 캉성 등이 국민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보장해줄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쉽게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3]

그해 7월, 천윈은 당내 회의에서 마오이즘 비판을 더욱 거세게 전개했다. 그는 옛 왕조와 국민당이 인민들을 억압했지만 지난 10년간은 공산당 지도부가 그들을 대신해 인민을 억압했다고 비판했고 공산당이 계속 집권하고 싶다면 국민의 지지를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종으로 살아야 하고 당과 국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당분간 자본주의적 요소와 공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걸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중국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에 빠질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천윈은 1979년 10월 결장암 진단을 받고 10월 24일 결장암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해 말 린뱌오-장칭 반역명 집단 재판 주범 10명에 대한 양형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천윈은 그들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당내 투쟁에서 살육은 피해야 한다."며 장칭 등을 사형에 처하는 것에 반대했다. 1981년, 천윈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 검사위원회를 주재해 조사 범위를 문화대혁명 이전으로 연장했다. 그는 라오수스-반한년(潘漢年) 사건을 재조사하여 라오수스가 이 사건에 한해 무고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천윈은 마오쩌둥의 중국 역사에서의 위치를 재평가하고 과거의 잘못된 정치, 역사를 반성한 뒤 간부 세대교체의 문제점을 고찰했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그는 덩샤오핑이 화궈펑의 뒤를 이어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2.7. 중국 경제개혁 추진에 한몫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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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윈과 덩샤오핑

1981년, 덩샤오핑은 경제 전문가들을 대거 등용해 그동안 사회주의 이론에 치우쳤던 경제 정책을 보다 현실적이며 능률적으로 수립, 집행하게 했다. 천윈은 이들을 적절하게 이끌어 1980년대 초 중국의 경제개혁에 크게 기여했다. 사실 덩샤오핑은 천윈에게 경제개발 계획의 세부사항 수립을 맡겼고, 그가 정한 계획안을 검토한 뒤 이대로 시행하게 했다. 이렇게 진행된 경제개혁은 천윈이 1950년 중반에 시행하려 했던 경제 프로젝트의 재현이었다. 그는 이를 '새장 경제' 이론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천윈은 경제발전은 반드시 계획지도 아래 진행되어야 하며 급진적인 경제 개방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경제발전에 수반되는 민주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젊은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89년 5월 26일, 중국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및 상무위원회의를 주재한 천윈은 학생운동에 대해 군사적 수단을 통해 탄압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자신이 지명했던 후계자 후야오방 자오쯔양에게 배신감을 느낀 덩샤오핑은 결국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 보수파의 강경진압 요구에 따라 천안문 사태를 감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천윈은 덩샤오핑이 이끄는 개혁의 방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덩샤오핑이 서구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더 많은 항구를 개방하는 것에 불안을 품었다. 특히 그는 농업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던 시장 개혁을 도시 지역과 산업 부문에 적용하는 공산당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갈등은 1990년대에 이르렀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2.8. 덩샤오핑의 개방 정책에 속도조절론을 제기

흔히 천윈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반대한 보수파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천윈과 덩샤오핑은 전체적인 방향에는 일치했지만, 천윈은 급격한 개혁개방은 극심한 경제불균형과 빈부격차야기, 결과적으로 국가의 안정성을 해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균형발전 및 외형보다 내실론을 주장했다. 현재 중국의 막대한 빈부격차 및 지역격차를 보면, 어느 정도 타당한 우려였던 셈이다.

1990년대 초반, 중국은 경이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역사상 유례 없는 인플레이션 역시 맞이했다. 이는 천윈에게 있어 국가에게 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경제에서의 통화의 증가 추세는 이익을 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공직자들의 부패를 초래할 수 있었고 민간 경제를 황폐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물가 상승에 대한 정부의 첫 반응은 국영 기업 근로자들의 임금을 높임으로서 물가 상승을 만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윈은 무작정 근로자들의 임금을 올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생산성 향상 지표를 고려해 임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중국 농민들이 임금 향상 해택을 받지 못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며 당국의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중국 정부의 경제 특구 정책에 반대했다. 선전, 푸젠성 샤먼처럼 경제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것은 동의했지만 이미 경제가 발전한 저장성이나 상하이시에 설치하는 것은 결사 반대했다. 상하이가 경제특구에서 제외된 것은 천윈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에 덩샤오핑은 1991년 1월에 상하이를 방문하면서 "푸둥 개발이 5년이나 늦어졌다. 만약 푸둥이 선전처럼 특구가 되었다면 더 일찍 개발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천윈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실제로 천윈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죽을 때까지 한번도 경제 특구를 방문하지 않았다.

천윈같이 명망 높은 원로가 자신의 개혁 개방정책에 반대하자, 덩샤오핑은 1992년 구정 기간에 남순강화를 시행해 천윈 등 당내 보수파를 압박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에 중국 국민들이 덩샤오핑을 열렬하게 지지하자, 형세는 완전히 역전되었고 당원들은 천윈을 비롯한 보수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천윈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은 이미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며 자아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92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제 14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자, 천윈은 정계를 은퇴했다.

2.9. 사망

1994년 2월, 천윈은 상하이에서 설날을 보내며 상하이 현지 간부들을 격려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석상에서의 모습이었다. 1994년 5월 25일, 천윈은 폐렴으로 베이징 의대병원에 입원한 후 다시는 퇴원하지 못했다. 1995년 4월 10일 14시 4분, 천윈은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향년 90세. 그해 4월 17일, 천윈의 유해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베이징에서 화장되어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매장되었다.

3. 사상

천윈의 경제사상은 '균형 성장론'으로 정의된다. 그는 사회주의가 두 종류의 경제로 구성된다고 봤다. 하나는 공유제에 기초를 둔 '계획경제'다. 천윈은 경제 개혁을 추진하더라도 이 계획경제엔 절대로 손을 대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하나는 시장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생산하는 '시장조절'이다. 그는 인간의 욕구를 무한정 억압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사유재산 보유와 자율 시장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천윈의 원칙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새장경제론(鳥籠經濟論)'이다. 새장은 "계획"을 가리키며, 새는 "시장"을 가리킨다. 즉, 시장(새)은 허용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획(새장)이라는 일정한 범위내에서만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원래 황커청(黃克誠)이 처음 사용했고, 천윈은 황커청의 생생한 비유가 마음에 들어 공식석상에서 여러 차례 이를 인용해 계획과 시장 간의 관계를 설명했다. 그래서 새장경제론은 천윈 경제관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한 천윈은 '균형 성장'을 이루기 위한 비율에 맞는 발전을 주장했다. 그는 1954년경에 '4대 비율'과 '3대 균형' 개념을 제시했다. 4대 비율은 ① 농업과 공업, ② 경공업과 중공업, ③ 중공업 각 부문, ④ 공업 발전과 철로 운송 간의 비율을 말한다. 그리고 3대 균형은 ① 재정의 수입과 지출, ② 구매력(소비)과 상품 공급, ③ 주요 물자의 공급과 수요 간의 균형을 말한다. 천윈은 1978년 이후에 3대균형의 내용을 다소 변경해 경제 발전은 ① 재정 수입과 지출의 균형, ② 은행 수신과 대출의 균형, ③ 물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1980년대 말부터는 외환 수지의 균형을 추가해, 이른바 '4대 균형'의 유지를 주장했다.

천윈은 균형을 상실한 과도한 성장을 반대했다. 그는 재정 적자에 기반한 과도한 중화학공업의 투자, 철강이나 전력 등 전략 물자의 공급을 고려하지 않은 지나친 기반시설의 확충, 화폐 발행을 통한 자금 충당과 이를 통한 확장적인 재정의 운영, 과도한 외자와 설비 및 기술의 도입에 의존한 공업 건설 등은 국가 경제를 망치는 짓이라고 간주했다.

천윈이 이렇듯 균형 성장을 주장한 것은 중국의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80%를 점하는 현실을 고려한 데서 기인했다. 그는 이와 같은 “중국의 특수성”을 명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4개 현대화를 추진해야 하며, "마르크스와 중국 혁명의 가르침에 따라" 농업, 경공업, 중화학공업 순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봤다. 그는 이와 같은 균형 성장이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빠르면서도 국가를 전반적으로 성장시키는 진로라고 주장했다.

4. 가족 관계

천윈은 1938년 자신의 개인 간호사였던 위뤄무(于若木)와 결혼했다. 위뤄무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앙 재경위원회 전문가 연락실의 비서로 활동했고 국가과학기획위원회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후 영양학과를 수강해 영양학자 칭호를 받았고 중국 영양학회 명예이사, 건강학회 명회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임신, 수유기 여성 영양 식단>, <학생영양> 등이 있다. 그녀는 2006년 2월 28일에 사망했다.
  • 장녀 천웨이리(陈伟力, 1942년 1월~)는 중국 신기술 창업투자회사 부사장, 중국 국제기술지능협력회사 사장 겸 당서기 등을 역임했다. 현재 저장성 애심자선재단 이사장이다.
  • 장남 천위안(陈元, 1945년 1월~)은 칭화대를 졸업하고 국가개발은행 이사장 겸 제12회 전국정협 부주석을 맡았다.
  • 차녀 천웨이화(陈伟华. 1947년~)는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실험중학과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실험중학에서 역사교사를 지냈다.
  • 삼녀 천웨이란(陈伟兰, 1949년 4월~)은 전 국가행정학원 부원장이었다.
  • 막내 아들 천방(陈方)은 현재 중산실업그룹 사장이다.

5. 참고 문헌


[1] 현재 상하이시 칭푸구 [2] 덩샤오핑은 당시 쓰촨성에서 구르고 있었다. [3] 다만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어서 그런지, 권부핵심에서 밀려나는 선에 그치고 덩샤오핑이나 양상쿤과는 달리 크게 고생하지는 않는다. 이는 천윈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어도 덩샤오핑만큼 그의 유산 청산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4]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천윈, 덩샤오핑,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천윈이 원로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 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 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 책임인 위원회의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 [5] 물론 덩샤오핑 역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원로들이 설정한 한계치를 넘어 월권을 저질렀다고 판단해 그들의 사임을 요구한 천윈 등 보수파에 동의한 것은 맞다. 그러나 둘은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후계자였던 만큼 그 역시 정치적 책임론과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6] 이 투기꾼들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을때 은화투기로 일본군에 성공적으로 골먹여주던 작자(일본군이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금 5톤을 도쿄에서 직접날랐지만 이를 이겨낸 사람들이었다.)들이니 간단히 때려잡을수 없을 터였고,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본 작자들이었다. [7] 이후로 베이징 증권개래소와 톈진 증권거래소를 설립해서 공산화 되었음에도 한 동안 주식거래가 가능했지만 나중에는 베이징과 톈진의 증권거래소도 폐쇄하면서 1980년대 초엽까지 중국내에서 주식거래의 명맥이 끊긴다. [8] 다만 마오쩌둥이 진짜로 천윈의 말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대약진 운동을 펼치고 다녔을때나 문화대혁명때 천윈이 실각되었을때는 진짜로 그 말이 현실화되었고(...) 장제스도 이때의 혼란기를 노려서 공산당을 제압하려고 했다. 물론 자본가들이 들고일어서기에는 이미 세력이 없었던데다가 장제스가 통치하는 중화민국은 너무도 작았던지라 진짜 정권이 뒤엎어지지는 않았다. [9] 부패한 사회에 대한 비관주의. [10] 농촌에서 집체경제를 허물고 개인경작을 선호하는 경향. [11] 우익 기회주의자와 반혁명분자들에게 내린 판단을 뒤집으려는 경향. [12] 공산당원을 감찰하고 징계하는 기관이다. 정부보다 당이 우위에 있는 중국 체제의 특성상 당원에 대한 감찰을 담당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법원과 검찰보다 우위에 있다. 때문에 부패 혐의를 받는 고위공직자에 대한 처벌을 주로 담당한다. [13] 사실 천윈 입장에서 사적을 감정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마오쩌둥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자기를 무시하고 욕하고 다녔다가 한번은 연 9%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그런대로 굴러갔던것을 3000만명 아사와 불량품의 대량 양산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며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었고 두번째는 사회혼란을 조장하며 4년 연속 10%대 성장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세으로 전환시켜버리며 애써 노력해서 거둔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니 좋은 기분이 들리는 없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