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7:09:26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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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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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
佛祖直指心體要節 (下卷)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高麗大藏經板-諸經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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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기록물

동학농민혁명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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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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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1. 서울 숭례문
  1.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2.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3. 여주 고달사지 승탑
  4.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6.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7.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8.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9.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10. 익산 미륵사지 석탑
  11.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12.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13. 영천 거조사 영산전
  14. 안동 봉정사 극락전
  15.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16.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17.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18. 영주 부석사 조사당
  19. 경주 불국사 다보탑
  20.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21.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
  22.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23. 경주 석굴암 석굴
  24.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1.#26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1.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2.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3. 성덕대왕신종
  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5. 경주 첨성대
  6.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7. 창녕 진흥왕 척경비
  8.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9.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10. 상원사 동종
  1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12.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13.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14.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15.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16.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17. 혜심고신제서
  18. 장흥 보림사 남 · 북 삼층석탑 및 석등
  19.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20. 부석사 조사당 벽화
  21.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22. 평창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23. 예산 수덕사 대웅전
  24. 영암 도갑사 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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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51~1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76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1.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1)
  3.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
  4.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5.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6.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2-2)
  8.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9. 금동신묘명삼존불입상
  10.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11.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2. 금관총 금제 허리띠
  13.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14. 경주 부부총 금귀걸이
  15.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16.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
  17.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18. 청자 참외모양 병
  19. 청자 투각칠보문뚜껑 향로
  20. 청자 구룡형 주전자
  21. 청자 음각연화당초문 매병
  22. 청자 상감모란문 항아리
  23.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24.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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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101~1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01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1.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탑
  2.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3.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4.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5.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6.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7. 계유명삼존천불비상
  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9. 이제현 초상
  10. 안향 초상
  11. 경주 감은사지 동 · 서 삼층석탑
  12. 청자 철화양류문 통형 병
  13. 청자 상감모란국화문 참외모양 병
  14. 청자 상감당초문 완
  15. 청자 상감모란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16.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17.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964)
  18.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19. 용주사 동종
  20.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
  21.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22.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23.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24. 녹유골호(부석제외함)
1.#126 불국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 서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
  2. 금동관음보살입상
  3. 금동보살입상(1968)
  4.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
  5.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6. 징비록
  7. 청자 동화연화문 표주박모양 주전자
  8. 금동보살삼존상
  9.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10. 금동 용두보당
  11.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검 및 칼집 부속 / 투겁창 및 꺾창
  12. 전 고령 금관 및 장신구 일괄
  13. 김홍도필 군선도 병풍
  14. 나전 화문 동경
  15. 정문경
  16. 동국정운
  17.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8.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19. 귀면 청동로
  20. 전 논산 청동방울 일괄
  21.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22.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6 / 십칠사찬고금통요 권17
  23.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4, 5 /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
  24. 송조표전총류 권7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151~2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176 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1.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2. 분청사기 음각어문 편병
  3.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4. 김정희필 세한도
  5. 장양수 홍패
  6.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7.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
  8.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
  9. 상지은니묘법연화경
  10. 양평 신화리 금동여래입상
  11.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12. 천마총 금관
  13. 천마총 관모
  14. 천마총 금제 허리띠
  15. 황남대총 북분 금관
  16.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17.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18.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19. 토우장식 장경호
  20.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
  21.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22. 단양 신라 적성비
  2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24. 금동보살입상(1979)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201~25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01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1. 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7
  2.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
  3.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4. 충주 고구려비
  5.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
  6.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7. 도리사 세존사리탑 금동 사리기
  8. 보협인석탑
  9. 감지은니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13
  10.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11.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언해)
  12. 금동탑
  13.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14. 감지은니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 31
  15. 정선필 인왕제색도
  16. 정선필 금강전도
  17. 아미타삼존도
  18.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19. 청자 상감용봉모란문 합 및 탁
  20.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21. 백자 청화매죽문 유개항아리
  22. 경복궁 근정전
  23. 경복궁 경회루
  24. 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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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251~300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1.#251 초조본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
  1. 청자 음각'효문'명 연화문 매병
  2. 청자 양각연화당초상감모란문 은테 발
  3. 청자 음각연화문 유개매병
  4. 전 덕산 청동방울 일괄
  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
  6.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
  7. 백자 청화죽문 각병
  8. 분청사기 상감운룡문 항아리
  9. 분청사기 박지철채모란문 자라병
  10. 백자 유개항아리
  11. 백자 달항아리(1991)
  12.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
  13. 포항 냉수리 신라비
  14.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
  15.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75
  16. 초조본 아비달마식신족론 권12
  17. 초조본 아비담비파사론 권11, 17
  18. 초조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 권6
  19.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20. 초조본 현양성교론 권12
  21.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32
  22.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15
  23. 귀함별황자총통(1596년조)
  24.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1.#276 초조본 유가사지론 권53
  1.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
  2. 태종11년이형원종공신록권부함
  3.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4
  4.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5. 백자 병형 주전자
  6.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7. 통감속편
  8. 초조본대반야바라밀다경 권162, 170, 463
  9.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0. 백자 ‘천’ ‘지’ ‘현’ ‘황’명 발
  11. 백제 금동대향로
  12.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13.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4. 양산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
  15. 용감수경 권3~4
  16. 평창 상원사 중창권선문
  17.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18.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
  19. 나주 신촌리 금동관
  20.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
  21.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
  22. 갑사 삼신불 괘불탱
  23.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
  24. 장곡사 미륵불 괘불탱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301~336호]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min-width:max(12%, 7em)"
{{{#!folding [ 번호 없음 ]
{{{#!wiki style="margin:-10px 0"
<table bordercolor=#fff,#1f2023>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파일: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로고.svg 파일:문화재청 CI_상하.svg
이름 한국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공식명칭 한글 조선왕조실록[1]
영어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한자 朝鮮王朝實錄
프랑스어 Annales de la Dynastie Jo-Seon 영어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남시, 부산광역시, 평창군 분류번호 국보 151호
소장·관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가기록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 정족산사고본: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 103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태백산사고본: 부산광역시 연제구 경기장로 28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
오대산사고본: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적상산사고본: 서울시 용산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평안남도 평양시 김일성종합대학
기타산엽본: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모당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등재유형 기록유산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고본
등재연도 1997년 시설 1181책[2], 848책[3], 75책[4], 21책[5], 6책[6], 4책[7]
제작 주체 각 시기의 사관 및 실록청 지정연도 1973년 12월 31일
1차 사료 승정원일기 제작시기 조선, 1392년~1863년
첫 구절
태조 1년 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올랐다. 마지막 구절
철종 14년 12월 8일
대왕 대비전에서 흥선군의 적자인 제2자에게[원문각주] 사위시키라고 명하고, 영의정 김좌근과 도승지 민치상을 보내어 잠저에서 봉영하여 오게 하였다.[9][10]

1. 개요2. 편찬
2.1. 세초(洗草)
3. 보관, 그리고 수난4. 갖가지 에피소드5. 평가
5.1. 내용의 방대함5.2. 지우개를 쓰지 않는 역사5.3. 사관의 촌평5.4. 한계
6. 사관들의 집념7. 현대화 노력
7.1. 영인7.2. 번역과 전산화7.3. 번역의 문제점7.4. 실록 전산화의 영향
7.4.1. 사극7.4.2. 교양서7.4.3. 그 외
8. 목록과 분량
8.1. 태조 ~ 철종실록8.2. 고종 ~ 순종실록
9. 의의10. 여담11. 외부 링크
11.1. 사이트11.2. 영상
12. 같이 보기
12.1. 관련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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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조선왕조실록.png
조선왕조실록
조선 왕조가 자신들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

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었다.

국가유산청에서는 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조선왕조실록으로써 취급하여 국보 151호 지정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정도 이들 기록에만 되어 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로서 편찬되었으나, 이 실록을 편찬할 때는 이미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전통 방식을 100% 따라서 편찬하지 않았고, 일제가 정략적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국가유산청에서는 별도로 취급한다.

북한도 적상산사고본의 대부분을[11] 보유했는데, 북한에서는 '조선봉건왕조실록', '리조실록' 등으로 칭한다. 북한에 있는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대한민국의 손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되지도 못했고, 유네스코에 북한과 공동등재하지 않았으므로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빠졌다.

영어 명칭은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는 대략 '연대기' 정도의 의미로, 풀어 쓰면 ' 조선왕조 연대기' 정도 의미다.[12] 등재 당시 국가유산청에서는 아래 4가지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로 밝혔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일본, 중국, 월남( 베트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13]
  3.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권수로 치면 중국 명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수로는 조선왕조실록이 이보다 훨씬 많아 분량면에서 세계 제일이다.
  4. 일본, 중국, 월남의 다른 실록들은 모두 당대 만들어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2.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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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사초인 인조 16년 무인년(1638년)사초
실록 편찬은 고려 고려실록부터 있었는데, 조선건국 시에도 마찬가지로 춘추관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그 이외에도 춘추관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14]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했다.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국왕 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거의 없다.[15] 연산군 무오사화 때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오해로 연산군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그마저도 직접이 아니라 문제가 된 부분만 신하가 베껴온 것을 읽었다. 그리고 이마저도 최악의 선례가 되어 오히려 더욱 금기시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16], 현직 국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국왕의 실록을 편찬했다.

편찬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지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방(房) 1-3곳으로 나누고(세종, 성종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를 했는데, 이것에 대해선 하위 문단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2.1. 세초(洗草)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생김을 막고자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의 '세검정'.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하다.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는 꽤 검소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다. 조선 조정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아까운 지출이었다. 굳이 검소를 표방하지 않았더라도, 당시 종이는 현대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물건이었고, 반도 내에 널리 퍼져있는 험난한 산세같은 환경의 문제들로 인해 세금을 거두는 것이 한계가 있었던 조선 입장에선 너무 많은 지출이었다. 특히 한지는 제작공정이 까다로워서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고, 고급지는 더욱 귀했다. 여기에 두 가지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 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여 정초본이 완성되면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의 종이를 재활용하고 전부 세초하는 것. 한지는 찢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물로 잘 씻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2. 사초 기록에 있어 사관들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정쟁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어떤 상황에 대해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사관들이 화를 입거나 정쟁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연산군 김일손의 사초에서 비롯된 무오사화는 사초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무오사화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신하들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으로 세초를 하고, 아예 세초를 의무로 규정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17] 연산군 이후 사초를 보려 한 임금은 없었다. 연산군 이후 사초 열람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다! 하고 선언하는 짓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국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지는 않되,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국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과거에는 연산군 때부터 세초가 시작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성묘보전세초록이 발견되며, 조선 초기에도 세초가 행해져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작업 때문에 사라진 어마어마한[18]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게 여기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나마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다른 자료들도 남아있지만 조선 전기는 하필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기록이 거의 증발했으니...

단,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있다. 이는 광해가 폐위되었고 그의 세력이 재기할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중초본을 없애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조선 왕조 내내 사초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도록 하는 금기가 대체로 지켜져왔고, 왕이라고 할지라도 이를 깨고 열람을 시도할 때마다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에 의해 뜻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관이 나에 대해 어떻게 써 놓았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신하들이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전대의 역사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옵니다."라고 나오자 더 말을 못 한 적이 있다. 세종 태종실록 편찬이 끝난 뒤 부왕의 실록을 보려고 했다가 '열람한다면 후대 임금들도 본받아 실록을 보고 고칠 겁니다.' 하고 신하들이 반대해 뜻을 접었다. 세종 13년 기사 같은 기사에 따르면 이 금기의 원형은 태종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당시에는 사초와 역대 실록 전부를 포함하는 전적인 금기는 아니었고 선왕의 실록만 열람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이후 세종이 태조실록 편찬본과 태종실록의 사초를 열람하면서 태종실록을 열람하지 않은 이유로 태종실록 편찬자가 아직 살아있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든 것을 보아 태종 역시 비슷한 이유로 열람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19]

3. 보관, 그리고 수난

컴퓨터도, 소규모 기억장치도 없던 시절에 백업을 정말 철저하게 했다.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소실을 대비해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고려실록도 몽골제국의 고려 침략전쟁이나 거란군의 고려침략전쟁인 여요전쟁으로 파괴당했고, 홍건적 왜구와의 전쟁때도 소실되기도 하는 등 이렇게 오랑캐의 침략으로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20]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 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해서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방의 세 곳은 충주[21]· 전주· 성주였는데,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22]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2년이 지나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를 바꾸진 않았다. 그런데 54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전주 사고본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23] 전주 사고본도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서 지켜보며 간신히 지켜냈다(이때 안의가 남긴 기록이 수직상체일기).[24][25] 결국 광해군 때 춘추관과 함께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하여 실록 5부를 갖추었다. 그랬는데도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26] 옮겨졌다.

그리고 이들 사고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왕실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각 사고가 소재한 산의 사찰에 있던 승려들, 승군들이었다. 정족산의 전등사[27],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 안국사[28]가 모두 사찰에 속해서 유사시 승군으로서 동원되는 승려들로 사고 관리 및 보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29]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따라 관리를 받았다. 실록을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한 곳도 경성제국대학이었다. 그리고 오대산 사고본[30]은 일제가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했는데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날려먹었다.[31] 정족산본은 경성제국대학에 살아남았다가 서울대학교 개교 이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있던 실록들은 임시수도 부산으로 수송되었는데, 서울대 도서관의 태백산사고본과 정족산사고본 등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으로 수송되어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상남도청 창고 등에 보관되었다. 창경원의 적상산본은 제때 피난하지 못하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월북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건의를 김일성이 받아들여 평양으로 옮겼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소장한 듯하다. 이는 북한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조실록 판본으로,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하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 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판본이다. 분명히 피난 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했음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통째로 사라져버린 6·25 전쟁의 미스터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인민군이 기차를 통째로 노획했던 것.[32] 그렇게 북한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생각한 적상산본은, 다는 아니지만 일부가 남한에 남아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권 그리고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서각에서 3권을 발견했다. 관련 기사[33]

최종적으로 현재 남한에는 사고본 2종이, 북한에는 1종이 남아있다. 이 중 태백산본은 만일을 대비해 1985년부터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하고 있다. 일본에 있다가 일부만 남은 오대산본은 2006년에 영구대출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되었다.[34]

반환 직후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소장되었는데, 소장 장소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본래 사고가 있던 월정사에선 사고본을 월정사의 조선왕조실록박물관으로 옮겨야 합당하다고 주장하고, 문화재청에서는 국보급 문화재를 민간 전시관에서 보관하기엔 곤란하다는 입장을 폈던 것. 사고본의 복제품과 영인본을 월정사 측에게 기증해서 보관·전시 중이지만 월정사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계속 원본 소장을 주장했다. 여기에 서울대까지 나서서 서울대에서 기증받았으니 서울대에서 소장해야 한다며 실록을 서울대 박물관에 두려고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월정사가 경내에 건립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오대산본 실록의 원본을 전시하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 애초에 오대산본 실록의 환수 과정에서 월정사가 일조한 부분이 적지 않았기에[35] 월정사의 요청이나 오대산본과 관련한 월정사의 역사적 인연을 무시할 수 없었기도 하고.



이렇게 온갖 수난을 회피했음에도 남아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가 아니다. 문종실록을 편찬할 때 전주 사고본의 제11권 표지를 제9권에다 입히는 실수를 하는 바람에 전주 사고에는 제11권이 없고 제9권만 두 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11권이 없는 전주 사고본만 살아남고, 이후 판본은 전주 사고본을 원본으로 삼아 복제한 것이기 때문에 문종실록 제11권은 소멸되었다.

4. 갖가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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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5.1. 내용의 방대함



권수나 책수로는 동시대 중국의 명청실록에 비해 적지만,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인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권수 자체는 적지만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이 훨씬 더 많다. 대명실록은 2909권이지만 글자는 1600만 자 정도로, 4965만 자인 조선왕조실록의 1/3에 불과하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글자 수가 곧 내용의 양.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존속 기간이 조선에 비해 절반 정도에 지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명, 청은 중국을 통치하는 거대국가였음을 감안하면, 중국에 비하여 강역이 아주 작은 조선이 수십 배 큰 중국의 국찬사서의 몇 배나 되는 분량을 기록한 게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정보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했듯이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실제 실록에 있는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경상도 동래현(東萊縣)에서 세 사람, 양주(梁州)· 창원(昌原)· 비옥(比屋)에서 각각 한 사람씩 벼락을 맞았다.

震慶尙道東萊縣三人梁州昌原比屋各一人。
태종 9년(1409) 6월 15일 병진 3번째 기사
평안도 삼화현(三和縣) 사람 박독동(朴禿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

震平安道三和縣人朴禿同及狗兒。
세종 5년(1423) 7월 21일 기해 2번째 기사
충청도 회덕현(懷德縣)에서 사람이 벼락을 맞았다.

忠淸道懷德縣人物雷震。
현종 9년(1668) 6월 28일 을미 2번째 기사

어째 언급된게 하나같이 벼락맞았다는 내용이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관료제 사회였는지를 알 수 있다. 별 볼일 없는 평민과 동네 개가 벼락을 맞았다는 기록마저 적혀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일식이나 월식 뿐만 아니라 각종 천체활동에 대한 자료도 방대하게 기록해놓았다. 이중에는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하여 '케플러 초신성'이라고도 불리는 SN 1604에 대한 기록도 있다. 케플러는 이 초신성을 거의 1년 가까이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도 이에 못지 않게 7개월 가까이 이를 기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천체를 보고 각각 남긴 기록이 지금까지 남았다는 점이 흥미로운 점. 아래는 7개월간 기록된 내용들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밤 1경에 객성(客星)이 천강성(天江星) 위에 나타났는데, 미수(尾宿)와는 11도(度)이고 북극성과는 1백 9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는데, 동요하였다. 3경과 4경에 달무리가 졌다.
선조 37년(1604) 9월 22일 1번째 기사[36]
묘시와 진시에 안개 기운이 있었다. 진시에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 1경에 객성이 천강성 위에 나타났는데, 형체의 크기는 금성(金星)만하였고 광망이 매우 성하였으며 황적색으로 동요하였다. 위치한 곳의 성수(星宿)의 도수(度數)와 북극성과의 도수는 달과 가까이 있는 데다가 유기(游氣)가 있어 측후할 수 없었다.
선조 37년(1604) 윤9월 7일 2번째 기사
1경에서 3경까지 달무리가 졌다. 5경에 객성(客星)이 구름 사이로 조금 보였다.
선조 38년(1605) 3월 15일 1번째 기사

특히 여진족의 중흥을 연구하는 데 1차 사료로 꼽힌다. 청나라 건국 전에 여진족 스스로 남긴 사료가 거의 없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을 항상 관심지역으로 여겨 국가 안보를 위해 여진족의 동태를 열심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37] 아래 기사를 보면 동태를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록에 집착하는 광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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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이사철(李思哲)이 임금의 유서(諭書)로 인하여 도절제사(都節制使)와 더불어 야인 부락(野人部落)과 족류(族類)의 강약(强弱)을 등급 매겨서 아뢰었다.

"화라온(火剌溫)[38] ·수빈강(愁濱江)[39] ·구주(具州)[40] 등지의 우디거(兀狄哈)[41]은 깊고 먼 내지(內地)에 거주하고 일찍이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그 부락(部落)과 족류(族類)의 강약과 휘하의 이름과 숫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우량캐(兀良哈)[42]와 알타리(斡朶里)[43] · 여진(女眞)[44] · 콜칸 우디케(骨看兀狄哈)[45] 내의 추장(酋長)들은 등급을 나누는 것이 어렵겠으므로 아울러 1등으로 시행하고, 비록 추장의 부락이 아니더라도 족류가 강성한 사람도 또한 1등으로 시행합니다. 그 나머지 각 사람들은 족류의 강약을, 2등·3등·4등으로 나누어, 그 강약을 상세히 알 수 없는 자들도 또한 사유를 갖추어서 훗날이 참고함에 증빙 증거로 쓰게 합니다.

회령진(會寧鎭)에서 북쪽으로 20리 강내(江內)[46] 오롱초(吾弄草)에 거주하는 알타리 만호(斡朶里萬戶) 이귀야(李貴也)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호군(護軍)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는 상경(上京)하여 시위(侍衛)[47]하고, 다음 아들인 사직(司直) 아이다가(阿伊多可) · 다음 아들 처거내(處巨乃) 이상은 4등입니다. 호군 동남라(童南羅)는 고 도만호(都萬戶) 아하리(阿下里)의 아들인데, 족류가 강성하니 1등이고, 자식들은 미약합니다.

호군 동모다치(童毛多赤)는 족류(族類)가 강성하고 아하리(阿下里)의 아우인데, 시위하니 2등이고, 아들 야거석(也車石)은 4등이고, 다음 아들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군 낭가가내(浪加加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호군 낭삼파(浪三波)는 시위하니 4등이고, 다음 아들 사직(司直) 낭금세(浪金世)·다음 아들 낭사오개(浪沙吾介) · 다음 아들 사을지(沙乙之) · 다음 아들 낭삼하(浪三下) · 다음 아들 모가(毛可) 이상은 4등입니다. 호군 박눌어치(朴訥於赤)[48]는 시위(侍衛)하니 2등이고, 아들 사직 모도오(毛都吾) · 다음 아들 사정(司正) 가로(家老)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군 낭수불로(浪愁佛老)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낭가을수(浪加乙愁)는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만호(副萬戶) 동돈도(童敦道)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이온치(李溫赤)도 또한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도로고(都老古)는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낭하모라(浪下毛羅)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아하(阿下)는 4등입니다 사직 이도치(李都致)는 이귀야(李貴也)의 아우인데 2등이고, 아들 저거내(這巨乃)는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아롱가(阿弄可)는 3등이고, 아들 아고치(阿古赤)는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동속시(童束時)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사직(副司直) 동야음부(童也音夫)는 4등이고, 아들 아가(兒家)는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이주음비(李注音比)는 이귀야(李貴也)의 조카인데 3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만호(副萬戶) 동소을오(童所乙吾)는 3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군 문가을거(文加乙巨)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공시대(公時大)는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40여 가(家) 내에 장정이 80여 명인데, 이상은 아울러 이귀야(李貴也)의 관하(管下)입니다.

회령진에서 북쪽으로 10리 강외(江外)[49] 사오이(沙吾耳)에 거주하는 우량캐 호군 야내(也乃)는 〈내지(內地)〉 깊은 곳에 오가면서 사변을 보고하니 3등이고, 아들 조치(照赤)·다음 아들 조가(照家) 이상은 4등입니다. 우랑거(亐郞巨)는 야내(也乃)의 아우인데 4등이고, 아들 대이수(大伊愁) · 다음 아들 대하(大下)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정(司正) 상도(常道)는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위의 마을 7가(家) 내에 장정이 1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4리 강내(江內) 오음회(吾音會)[50]에 거구하는 알타리(斡朶里) 도만호(都萬戶) 마구음파(馬仇音波)는 족류가 강성하고 추장 마변자(馬邊者)의 조카이고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의 매부(妹夫)인데 1등이고, 아들 호군 벌이다(伐伊多)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모다치(毛多赤) · 다음 아들 아당가(阿唐可) 이상은 4등입니다. 도만호 동망내(童亡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호군 이시가(伊時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사직 약사(約沙)·다음 아들 마사(麻舍)·다음 아들 보랑가(甫郞可) 이상은 4등입니다. 상호군(上護軍) 마주음파(馬朱音波)는 마구음파(馬仇音波)의 아우인데 2등이고, 아들 보랑가(甫郞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보다치(甫多赤)는 4등입니다. 상호군 마금파로(馬金波老)는 마구음파(馬仇音波)의 아우인데 2등이고, 아들 사직 마천리(馬千里)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다롱가(多弄可) · 다음 아들 아을다(阿乙多)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만호(副萬戶) 동삼파로(童三波老)는 족류가 강성하고도 도만호 오사개(吾沙介)의 아들인데 2등이고, 아들 호군 이시가(伊時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사정(司正) 자토(者吐) · 다음 아들 자읍가(者邑可) 이상은 4등입니다. 호군 마가롱가(馬加弄可)는 마구음파(馬仇音波)의 아우인데 2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9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3리 강내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중추(中樞)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청주(靑周)는 2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 모두 미약합니다. 사직 고나읍다손(高羅邑多孫)은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사직 고나린가(高羅麟可)는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호군 동이린가(童伊麟可)는 자식이 없는데 4등입니다. 양리인(楊里人)[51] 동후후리(童候候里)는 4등이고, 아들 삼하(三下) · 다음 아들 삼파(三波)는 4등입니다. 양리인 이다비(李多非)는 4등이고, 아들 좌오하(佐吾下)·다음 아들 좌화로(佐化老)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양리인 10호(戶) 아울러 15가(家) 내에 장정이 30여 명인데, 이상은 모두 오음회 사람 동소로가무(童所老加茂) · 마구음파(馬仇音波) 등의 관하입니다.

회령진 서쪽으로 20리 강내의 하보을하(下甫乙下)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도만호 동오사가(童吾沙可)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호군 동송고로(童宋古老)는 4등이고, 호군 동오을사(童吾乙沙)는 고(故) 도만호 인두(因豆)의 아들인데 아들이 없고 2등입니다. 사직 아하대(阿下大)는 4등이고, 아들 눌허(訥許)는 4등입니다. 사직 동사하지(童沙下知)는 아들이 없는데 4등입니다. 호군 동부리가(童夫里可)는 고(故) 도만호 야오태(也吾太)의 아들이고 동망내(童亡乃)의 조카인데 2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指揮) 다가(多可)는 동오사가(童吾沙可)의 사위[女壻]인데 3등이고, 아들 가로(家老)는 4등입니다. 사직 동속시(童束時)도 또한 동오사가(童吾沙可)의 사위[女壻]인데 아들이 없고 3등입니다. 위의 마을 7가(家) 내에 장정이 15여 명인데, 이상은 아울러 동오사가(童吾沙可)의 관하입니다.

회령진 경계 바깥 서쪽으로 35리 강외의 하다 가사(下多家舍)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사직 무이응가(無伊應可)는 3등이고, 아들 벌이당가(伐伊堂可) · 다음 아들 삼하(三下) · 다음 아들 다비가(多非可) · 다음 아들 아을다(阿乙多)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모다오(毛多吾)는 동말응거(童末應巨) · 동가물(童加勿)의 아우이고 고(故) 도만호 가시파(加時波)의 아들인데, 아들이 없고 2등입니다. 위의 마을 2가(家) 내에 장정이 9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55리 상보을하(上甫乙下)에 거주하는 우량캐 상호군 낭구난(浪仇難)은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도만호 낭복아한(浪卜兒罕)의 아들인데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사정(副司正) 수당가(愁堂可)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사정 수은두(愁隱豆)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알타리(斡朶里) 사직 동타수(童他守)는 4등이고, 아들 가무로(加無老)는 4등입니다. 우량캐 호군 낭가린가(浪加麟可)는 낭복아한(浪卜兒罕)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7가(家) 내에 장정이 15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90리 사지(斜地)에 거주하는 우량캐 지휘 아롱가(阿弄可)는 3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만호 가을헌(加乙軒)은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여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구이손(仇伊孫)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로(斜老)는 3등입니다. 지휘 내이다(乃伊多)는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호군 어사거(於沙巨)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입니다. 사정 호심파(好心波)는 4등이고, 보을간다시(甫乙看多時)는 3등이고, 노호치(老好赤)는 3등이고, 수양가(愁陽可)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15여 가(家) 내에 장정이 3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35리 무을계(無乙界)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만호 누시거(屢時巨)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만호 시가구(時加具)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사직 김세(金世)는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여롱가(余弄可)는 아들이 마이두(麻伊豆)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거라무(巨羅茂)·호심파(好心波)·조양가(照陽可)·호초(胡抄) 이상의 사람들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지휘 거을가개(巨乙加介)는 3등이고, 사직 나하(羅下)는 3등이고, 사직 처리(處里)는 3등이고, 사직 나읍다(羅邑多)는 3등이고, 지휘 구수(仇守)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20여 가(家) 내에 장정이 40여 명인데, 이상은 아울러 누시거(屢時巨)의 관하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80리 잉읍포 가사(仍邑包家舍)에 거주하는 우량캐 만호 임황거(林黃巨)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도사(都司) 어거(於巨)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지휘 아구(阿具)·어구(於具)·야오내(也吾乃)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지휘 두상가(豆常可)는 3등이고, 거롱가(車弄可)는 3등이고, 모라(毛羅)는 3등이고, 다수(多愁)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20여 가(家) 내에 장정이 4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80리 화상 가사(和尙家舍)에 거주하는 우량캐 지휘 사롱가(斜弄可)·부만호(副萬戶) 자리개(者里介)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9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80리 보이하(甫伊下)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만호 김구치(金仇赤)는 족류가 강성하고, 추장의 아비는 고(故) 지휘 아고거(阿高車)이니, 1등입니다. 지휘 가다(加多)·이롱가(伊弄可)·호시내(好時乃), 사직 보을하(甫乙下)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시가(伊時可)는 3등이고, 우단(于丹)은 3등이고, 감리급(甘里及)과 시신가(時申可)는 3등입니다. 호군 이시가(伊時可)는 3등이고, 가을주(可乙主)·자종가(者從可)는 3등이고, 반거(班車)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20여 가(家) 내에 장정이 30여 명인데, 이상은 아울러 김구치(金仇赤)의 관하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210리 아치랑귀(阿赤郞貴)에 거주하는 우량캐 지휘 우로가(亐老可)·이시가(伊時可), 지휘 사직 호시내(好時乃), 지휘 우을지(亐乙之)·대보하(大甫下) 야하치(也下赤)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만호 말로(末老)는 족류가 강성하고, 김도을온(金都乙溫)의 일족이니, 2등입니다. 지휘(持揮) 자중가(者衆可)는 3등이고 다을치(多乙赤)는 3등이고, 사로(斜老)는 3등이고, 오동개(吾同介)는 3등이고, 간응라(干應羅)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50여 가(家) 내에 장정이 1백 10여 명인데, 아울러 도만호 김도을온(金都乙溫)의 관하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210리 상가하(常家下)에 거주하는 우량캐 아하(阿下), 만호 우을주(亐乙主)·보을가(甫乙可)·나출(羅出)·나오하(羅吾下)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14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207리 벌인(伐引)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사(都司) 합아독(哈兒禿)은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입니다. 대호군(大護軍) 충상(充商)은 2등이고, 만호 모당가(毛堂可), 지휘 우로아(亐老阿)·도을치(都乙赤)·아양가(阿陽可)·이랑가(伊郞可)·다을비(多乙非)·우롱가(亐弄可)·자을다(者乙多)·모하여(毛下呂)·소을오(所乙吾)·마고리(麻古里)·이롱가(伊弄可)·부리거(夫里巨)·가다(加多)·야롱가(也弄可)·다지(多只)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도만호 배마라가(裵麻羅可)는 족류가 강성하고, 추장이 성심으로 귀순하니 1등이고, 사위 오미내(吾未乃), 다음 사위 양리인 유농가(劉弄可) 이상은 4등입니다. 대호군(大護軍) 이아두(李阿豆)는 시위하니, 2등입니다. 위의 마을 45가(家) 내에 장정이 1백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270리 모리안(毛里安)에 거주하는 우량캐 부만호 소중가(所衆可)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입니다. 지휘 나읍다(羅邑多)는 3등이고, 아들 아을다(阿乙多)는 4등이고, 다음 아들 다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여라두(汝羅豆)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입니다. 지휘 소중가(所衆可)·이을다(伊乙多)·조양가(照陽可)·수은두(愁隱豆), 사직 징라우(澄羅亐)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지휘 나하치(羅下赤)는 3등이고, 지휘 임다말(林多末)·을언칭호(乙彦稱號)는 3등이고, 사직 만두가(萬豆可)는 3등이고, 다을비사(多乙非舍)는 3등이고, 어사가(於沙可)는 3등이고, 보랑가(甫郞可)는 3등이고, 기라오(其羅吾)는 3등이고, 지휘 야오다무(也吾多茂)는 3등이고, 거영거(巨永巨)는 3등이고, 만호 모다가(毛多可)는 3등이고, 어허대(於虛大)는 3등이고, 무리개(無里介)는 3등이고, 구오대(仇吾大)는 3등이고, 도개(都介)는 3등이고, 거롱거(巨弄巨)는 3등이고, 지휘 노야(老也)는 3등이고, 이시내(伊時乃)는 3등이고, 만호 소영가(所永可)는 3등이고, 아질산(阿叱散)은 3등입니다. 위의 마을 30여 가(家) 내에 장정이 60여 명인데, 아울러 합아독(哈兒禿)·마라개(麻羅介) 등의 관하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120리 하동량(下東良)에 거주하는 도만호 낭복아한(浪卜兒罕)은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호군 가린가(加麟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대호군 이승거(伊升巨)는 시위하니 3등이고, 다음 아들 사직 어을거두(於乙巨豆)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어라두(於羅豆)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군 낭장가(浪將家)는 족류가 장성하고 낭복아한(浪卜兒罕)의 종제(從弟)이니 2등입니다. 사직 여롱거(餘弄巨)는 3등이고, 호군 도로고(都老古)는 3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군 낭사은두도가(浪斜隱豆都可)는 족류가 강성하고 낭복아한(浪卜兒罕)의 아우이니 2등입니다. 여월랑거(予月郞巨)는 4등이고, 부만호 인다지(因多只)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호심파(好心波)는 3등이고, 사직 구음부(仇音夫)는 4등이고, 사직 나수(羅守)는 4등이고, 지휘 가이(加伊)는 4등입니다. 도만호 김파을대(金波乙大)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파지(波只)는 족류가 장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직 이아가(李阿可)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20여 가(家)내에 장정이 7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쪽으로 280리 중동량(中東良)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만호 아하(阿下)는 2등입니다. 호군 가가(加可)는 자식(子息)을 알지 못하는데 4등입니다. 우량캐 대호군 김두난대(金豆難代)는 족류가 강성하고 고(故) 만호 오간주(吾看主)의 아들인데 2등입니다. 지휘 자리가(者里加)·나오내(羅吾乃), 사직 낭파을생(浪波乙生), 지휘 보야(甫也) 이상은 족류가 강성한지 미약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만호 임고고(林高古)는 족류 강성하고, 낭이승거(浪伊升巨)의 처부(妻父)이니, 2등이고, 아들 사직 아구(阿具)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다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지휘 수구(愁仇)는 3등이고, 만호 구치보하(仇赤甫下)는 4등이고, 권두(權豆)는 4등이고, 잉읍대(仍邑大)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40여 가(家) 내에 장정이 80여 명인데 모두 낭복아한(浪卜兒罕)·김파을대(金波乙大) 등의 관하입니다.

회령진에서 서남쪽으로 210리 허수라(虛水羅)에 거주하는 우량캐 부만호 동파호(童波好)는 2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두읍시(豆邑時)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월허내(月虛乃)는 3등이고, 사정 나수(羅守)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내에 장정이 1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남쪽으로 210리 상동량(上東良)에 거주하는 알타리(斡朶里) 호군 동모지리(童毛知里)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며, 호군 동송고로(童宋古老)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며, 호군 동유두(童劉豆)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인데, 위의 사람들은 동간고(童干古)의 종제(從弟)입니다. 우량캐 만호 이저리(李沮里)는 이보아치(李甫兒赤)의 아우인데 2등이고, 아들인 지휘 궁시대(宮時大)는 4등이고, 부만호 아하(阿下)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10여 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회령진에서 서남쪽으로 240리 박가별라(朴加別羅)에 거주하는 우량캐 두시(豆時)는 3등이고, 이리부(伊里夫)는 3등이고, 둔두(屯豆)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8, 9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종성진(鍾城鎭)의 강내의 행성저(行城底)[52] 에 거주하는 우량캐 만호 모하려(毛下呂)는 3등이고, 아들 소응거(所應巨)·송고자(松古者) 이상은 4등이고, 사위[女壻] 부사정 나소(羅所)·양리인 소중개(所衆介)는 4등이며, 종제(從弟) 자읍동개(者邑同介)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여허내(汝虛乃)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5가(家) 내에 장정이 아홉 명입니다.

종성진에서 20리 강내의 수주(愁州)에 거주하는 우량캐 호시고(好時古)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사정 가로(加老)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사직 송소을지(宋所乙只)는 3등이고, 파음보(波音甫)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벌야(伐也)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웅거(多雄巨)는 4등이고, 어을수(於乙愁)는 4등입니다. 두이(頭伊)는 4등이고, 아들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야시(也時)는 4등이고, 부을수(夫乙愁)는 4등이고, 아들은 네 명인데 한 명은 미약합니다. 야오내(也吾乃)는 4등이고, 양리인 사직 어허무(於虛茂)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어허리(於虛里)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는데, 미약합니다. 위의 마을 양리인 아울러 15가(家) 내에 장정이 26명입니다.

종성진에서 서쪽으로 20리 강외(江外) 수주(愁州)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만호 유상동개(柳尙同介)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은 한 명인데 미약하며, 형 부만호 반거(班車)는 2등입니다. 부만호 어치개(於赤介)는 2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모이내(毛伊乃)는 3등이며, 종형(從兄) 상호군 소고(所古)는 3등이며, 조카 호군 유요시로(柳要時老)는 3등이며, 아우 어리응거(於里應巨)는 3등이고, 그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아우 좌화기대(佐和寄大)는 3등이며, 조카 사안(沙安)은 4등이고, 그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시시가(時時可)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노로호(老老好)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아을거(阿乙巨)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말을로(末乙老)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소고로(所古老)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피응자(彼應者)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다양가(多陽可)는 4등입니다. 나음다(羅音多)는 4등이고, 아들은 한 명입니다. 양리인 사직 야상개(也尙介)는 4등이고, 아들 소중가(所衆可)는 4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소시내(所時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사직 소우대(所尤大)는 4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어부개(於夫介)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사직 나송개(羅松介)·다음 아들 소오개(所吾介)·다음 아들 자읍개(者邑介)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세 명은 알지 못합니다. 남개(南介)는 4등이며, 다장개(多將介)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위의 마을 24가(家)내에 장정이 5세 명입니다. 노사(老沙)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야거(也車)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자롱개(者弄介)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미약합니다. 사주(沙主)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미약합니다. 사토(舍土)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은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사직 어부내(於夫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며, 사위[女壻] 두이응거(豆伊應巨)는 4등이고, 그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마하(麻下)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거거(巨車)는 4등이며, 아우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벌이응거(伐伊應巨)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태수(太守)는 4등이고,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가하(可下)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오로도(吾老都)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도을지(都乙之)는 4등이고, 상가(尙家)는 4등이고, 야시(也時)는 4등이며, 여칭거(汝稱巨)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비랑개(非郞介)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이시개(伊時介)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다음파로(多音波老)는 4등이고, 거부(巨夫)는 4등이고, 이칭개(伊稱介)는 4등입니다. 모을오(毛乙吾)는 3등이고, 아들 보청개(甫靑介)는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을지대(沙乙只大)는 4등이고, 아들 보랑개(甫郞介)는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23가(家) 내에 장정이 40명인데, 모두 유상동개(柳尙同介)의 관하입니다.

종성진에서 북쪽으로 15리 강내의 동건(童巾)에 거주하는 우량캐 호군 동량개(東良介)는 3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호람합(好郞哈)은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후자(厚子)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소라(所羅)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오소(吾所)는 4등이며, 아용개(阿用介)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가을소(加乙所)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약합니다. 오로이(吾老耳)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세 명은 미약합니다. 상왕(尙往)은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다지(多只)는 4등이고, 아들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10가(家) 내에 장정이 20명입니다.

종성진에서 32리 강내에 거주하는 우량캐 야음부(也音夫)는 3등이고, 아들 다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오당가(吾堂可)는 4등이며, 후랑개(厚郞介)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마리(麻里)는 4등이며, 대응거(大應巨)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은 미약합니다. 상계(尙界)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두 명은 미약합니다. 금로(金老)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다음 아들 한 명은 미약합니다. 오청개(吾靑介)는 4등이고, 아들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야내(也乃)는 4등이고, 아들 다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아우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야가치(也可赤)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12가(家) 내에 장정이 41명입니다.

종성진에서 서쪽으로 195리 아치랑귀(阿赤郞貴)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만호 김도을온은 아들이 없고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수양(收養) 조카 도지휘첨사(都指揮僉使) 김다롱가(金多弄可)는 1등이고, 그 아들 사직 아응산(阿應山)은 4등이며, 조카 호군 김당(金當)은 시위하고 도만호 김대두마(金大豆麻)의 아들이니 2등이며, 그 아우 다구(多具)는 2등이며, 그 조카 사직 사다(舍多) 롱개(弄介)는 2등이고, 그 아 들 와랑개(臥郞介)·다음 아들 오리개(吾里介) 이상은 4등이며, 그 조카 만호 김토시(金土時)는 2등이고, 그 아들 나롱개(羅弄介)·다음 아들 남낭개(南郞介)·다음 아들 이을대(伊乙大) 이상은 4등이며, 그 조카 사직 강내(江乃)는 3등이고, 그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6가(家) 상아치랑귀(上阿赤郞貴)·하아치랑귀(下阿赤郞貴)에 거주하는 사람 아울러 3백여 명은 모두 김도을온의 관하입니다. 도지휘(都指揮) 다이내(多伊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수대(藪大)는 4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며, 그 동복 동생[同生弟] 지휘 와허내(臥許乃)는 3등이고, 아들 여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만호 아하(阿下)는 족류가 강성하고, 지휘 라답자(剌答子)는 3등이고, 아우 다섯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삼촌[叔]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주장개(住將介)는 3등이고, 소롱거(所弄巨)는 3등이고, 야상거(也尙巨)는 3등입니다. 지휘 흉구대(凶仇大)는 3등이고, 아들 세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사람들은 아울러 김도을온의 관하입니다.

종성진에서 270리 이응거(伊應巨)에 거주하는 우량캐 이시내(伊時乃)는 족류가 강성하고 능히 강궁을 잘 쏘니, 2등이고, 아비 야음부(也音夫)는 3등이고, 형 주장개(朱將介)는 2등이고, 다음 형 야당지(也堂只)는 3등이고, 다음 형 도은도(都隱道)는 3등이고 다음 형 소응거(所應巨)는 3등입니다. 위의 사람들은 족류가 30여 명입니다.

온성진(穩城鎭)에서 동쪽으로 30리 강내의 미전(未餞)에 거주하는 여진 어허리(於許里)는 4등이고, 거구지(巨具知)는 4등이고, 아우 도도(都道)는 4등이고, 소라(所羅)는 4등입니다.

온성진에서 10리 강외 다온(多隱)에 거주하는 우량캐 부사정 다내(多乃)는 3등이고, 아들 영시(永時)·다음 아들 영화(永和)·다음 아들 이무(里茂) 이상은 4등입니다. 여진 부사정 도을온(都乙溫)은 4등이고, 아들 부사정 도리두(都里豆)는 4등입니다. 여진 수을두(愁乙頭)는 4등이요, 우량캐 노요고(老要古)는 4등이고, 아우 보리(甫里)는 4 등이고, 우량캐 두이응거(豆伊應巨)는 4등이고, 아우 도하(都下)·다음 동생 대이내(大伊乃) 이상은 4등입니다. 우량캐 사지개(舍知介)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7가(家) 내에 장정이 1세 명입니다.

온성진에서 서쪽으로 15리 강내의 이마퇴(尼麻退)에 거주하는 우량캐 부사정 두이(豆伊)는 3등이고, 아우 두소(頭所)는 4등입니다. 여진 어거두(於巨豆)는 4등이고, 아우 후시거(厚時巨)는 4등이고, 아들 호시로(好時老)는 4등이고, 탁다(卓多)는 4등이고, 우량캐 보양개(甫陽介)는 4등이고, 아들 말응가거(末應加巨)·다음 아들 노청개(老靑介)·다음 아들 나하주(羅下住)·다음 아들 가하자(可下者)·다음 아들 지소거(知所巨)·다음 아들 거을가(巨乙加)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마을 6가(家) 내에 장정이 1세 명입니다.

온성진에서 서쪽으로 25리 강외의 시건(時建)에 거주하는 우량캐 부사정 소시우(所時右)는 3등이고, 아들 파을도(波乙道)·다음 아들 파을대(波乙大) 이상은 4등이며, 아우 하칭개(下稱介)는 4등이고, 다음 동생 부사정 다롱개(多弄介)는 4등이고, 다음 동생 부사정 다을화(多乙和)는 4등이고, 다음 동생 아을도개(阿乙都介)는 4등입니다. 우량캐 부사정 두승거(豆升巨)는 4등이고, 아들 우을금(亐乙金)은 4등입니다. 귀이파(貴伊波)는 4등이고, 아우 아을파(阿乙波)는 4등이고, 다음 동생 가수거(加愁巨)는 4등이고, 다음 동생 가소(加所)는 4등입니다. 우량캐 대두(大豆)는 4등이고, 아우 이시(伊時)는 4등이고, 아들 가을수(加乙愁)·다음 아들 가무(加茂) 이상은 4등입니다. 우량캐 다하내(多下乃)는 4등이고, 아들 하을주개(何乙主介)는 4등입니다. 두을응말거(豆乙應末巨)는 4등이고 아우 사대(舍大)는 4등이고, 아들 비개(非介)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10가(家) 내에 장정이 2두 명입니다.

온성진에서 서쪽으로 35리 강외 보청포(甫靑浦)에 거주하는 우량캐 지휘 소징개(所澄介)는 3등이고, 아들 삼음토(三音土)는 3등이고, 아우 눌이대(訥伊大)는 4등이고, 다음 동생 거두(巨豆)는 4등입니다. 부사정 파을시(波乙時)는 고(故) 호군 거야로(巨也老)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개이내(介伊乃)는 4등이고, 형 눌어치(訥於赤)는 4등이고, 아우 하대(下大)는 4등이고, 다음 동생 침파로(沈波老)는 4등이고, 다음 동생 소기로(所其老)는 4등이고, 다음 동생 야질대(也叱大)는 4등입니다. 수랑개(愁郞介)는 4등이고, 아들 다을화(多乙和)는 4등입니다. 부사정 소고(所告)는 4등이고, 아들 마이개(麻伊介)·다음 아들 마이로(麻伊老)·다음 아들 유기(劉己) 이상은 4등이고, 아우 마이파(麻伊波)는 4등입니다. 우량캐 구이(仇伊)는 4등이고, 오을미(吾乙未)는 4등이고, 청읍사(靑邑舍)는 4등이고, 아들 나치개(羅赤介)는 4등이고, 아우 사로(舍老)는 4등입니다. 공고(公古)는 4등이고, 아들 상동개(尙同介)·다음 아들 야하(也下)·다음 아들 가응거리(加應巨里) 이상은 4등입니다. 부사정 오청개(吾靑介)는 4등이고, 아들 대두마(大豆麻)는 4등이고, 아우 후랑개(後郞介)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19가(家) 내에 장정이 30명입니다.

경원진(慶源鎭)에서 동쪽으로 39리 동림강(東臨江) 밖에 거주하는 우량캐 도만호 김권로(金權老)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대호군 아라개(阿羅介)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사정 마지로(麻只老)·다음 아들 사정 벌린거(伐麟巨)·다음 아들 사정 두언(豆彦)·다음 아들 아부(阿夫) 이상은 4등이고, 사위[女壻] 천호(千戶) 군유(軍有)는 3등입니다. 사정 수라내(愁羅乃)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난도(難道)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9가(家) 내에 장정이 30여 명인데, 아울러 김권로(金權老)의 관하입니다.

경원진에서 남쪽으로 90리 강내의 백안 가사(伯顔家舍)에 거주하는 여진 호군 눌랑개(訥郞介)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입니다. 지휘 사하지(沙下知)는 4등이고, 사정 모당개(毛堂介)는 4등이고, 아다모(阿多毛)는 4등이고, 이응개(伊應介)는 4등이고, 아조응개(阿朝應介)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6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79리 강내의 건가퇴(件加退)에 거주하는 여진 사정 지하리(之下里)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입니다. 아로두(阿老豆)는 4등이고, 아우 혜을개(惠乙介)는 4등이고, 소을비(所乙非)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3가(家) 내에 장정이 1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50리 강내의 오롱초(吾弄草)에 거주하는 여진 사정 하을금(下乙金)은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야랑개(也郞介)는 4등이고, 어을비하(於乙非下)는 4등이고, 다롱개(多弄介)는 4등입니다. 야창개(也昌介)는 4등이고, 야시우(也時右)는 4등이고, 눌어치(訥於赤)는 4등이고, 아라소(阿羅所)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6가(家) 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50리 강내의 오롱초(吾弄草)에 거주하는 여진 사정 하을금(下乙金)은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야랑개(也郞介)는 4등이고, 어을비하(於乙非下)는 4등이고, 다롱개(多弄介)는 4등입니다. 야창개(也昌介)는 4등이고, 야시우(也時右)는 4등이고, 눌어치(訥於赤)는 4등이고, 아라소(阿羅所)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6가(家)내에 장정이 2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동쪽으로 28리 강외 여보도(汝甫島)에 거주하는 여진 만호 호시내(好時乃)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입니다. 천호 도가(都可)는 3등이고, 구랑지(仇郞只)는 4등이고, 이질개(伊叱介)는 4등이고, 부가로(夫家老)는 4등이고, 파야가(波也可)는 4등이고, 원이(遠伊)는 4등입니다. 사정 모다가(毛多可)는 4등이고, 조지응개(照之應介)는 4등이고, 아이다(阿伊多)는 4등이고, 벌리자(伐之羅)는 4등이고, 다주(多朱)는 4등이고, 어을비하(於乙非下)는 4등이고, 다라(多羅)는 4등이고, 이다(伊多)는 4등이고, 야오다(也吾多)는 4등이고, 야상개(也尙介)는 4등이고, 야다하(也多下)는 4등이고, 시두개(時豆介)는 4등이고, 오두(吾豆)는 4등이고, 야한(也漢)은 4등이고, 도걸호(都乞好)는 4등이고, 사정 단초(端抄)는 4등이고, 사정 오두(吾豆)는 4등이고, 대수(大愁)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25가(家) 내에 장정이 4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40리 강외 하훈춘(下訓春)에 거주하는 여진 사정 도을보하(都乙甫下)는 4등이고, 자오두(者吾豆)는 4등이고, 아로(阿老)는 4등이고, 모다오다(毛多吾多)는 4등이고, 야시우(也時右)는 4등이고, 천호 소고지(所古之)는 4등이고, 오룡고(吾龍古)는 4등이고, 아상개(阿尙介)는 4등이고, 시우라(時右羅)는 4등이고, 도을호(都乙好)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10가(家) 내에 장정이 1다섯 명입니다. 여진 사정 구음소(仇音所)는 4등이고, 아들 오로(吾老)는 4등이고, 오시(吾時)는 4등이고, 소이응개(所伊應介)는 4등입니다. 사정 회질개(回叱介)는 4등이고, 아들 다비(多非)는 4등이고, 아우 승상(升尙)은 4등입니다. 소라(所羅)는 4등이고, 야가지(也可之)는 4등이고, 수지응거(愁之應巨)는 4등이고, 대다야가(大多也可)는 4등이고, 야랑가(也郞可)는 4등이고, 야다가(也多可)는 4등이고, 수허(愁許)는 4등이고, 이종개(伊從介)는 4등이고, 유자(劉者)는 4등입니다. 와랑이(臥郞伊)는 4등이고, 아들 가룡개(加龍介)는 4등이고, 사정 이질두마리(伊叱豆麻里)는 4등입니다. 사정 자라로(者羅老)는 4등이고, 아들 벌야(伐也)는 4등입니다. 사정 수음하(愁音下)는 4등이고, 사정 도보하(都甫下)는 4등이고, 소고(所古)는 4등이고, 조을도(照乙道)는 4등이고, 자을도(者乙道)는 4등이고, 아라(阿羅)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27가(家) 내에 장정이 60여 명입니다.

우량캐 만호 다을비(多乙非)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오을도무(吾乙道無)는 3등이며, 그 일족(一族) 만호 이하소(伊何所)는 3등이고, 그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반거(班車)는 4등이며, 천호 어허리(於許里)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정 대사(大舍)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오야(多吾也)는 4등이고, 가화(家和)는 4등이고, 소수개(所愁介)는 4등이며, 우지응개(亐知應介)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종개(沙終介)는 4등이고,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정 도만개(都萬介)는 4등이고, 아우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상개(多尙介)는 4등이고, 자다(者多)는 4등이며, 만호 보랑개(甫郞介)는 4등이고, 아들 두말응거(豆末應巨)는 4등입니다. 사정 우자(亐者)는 4등이고, 아들 토이응거(土伊應巨)는 4등입니다. 모다우(毛多亐)는 4등이고, 우응개(亐應介)는 4등이고, 다오응거(多吾應巨)는 4등입니다. 모다우(毛多亐)는 4등이고, 우응개(亐應介)는 4등이고, 다오응거(多吾應巨)는 4등이고, 지가(知家)는 4등이고, 사정 어두(於豆)는 4등이고, 나소(羅所)는 4등이고, 벌지라(伐之羅)는 4등이고, 반거(班車)는 4등이고, 미허(未許)는 4등이고, 아당개(阿堂介)는 4등이고, 소랑개(所郞介)는 4등이고, 인다(仁多)는 4등이고, 우이응거(亐伊應巨)는 4등이고, 가을소(加乙所)는 4등입니다. 만호 사롱개(沙弄介)는 3등이고, 아들 모도(毛都)는 3등이고, 아우 여수응개(汝愁應介)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43가(家) 내에 장정이 8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17리 훈융강(訓戎江) 밖에 거주하는 우량캐 상호군 이사토(李舍土)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부사직(副司直) 어유거(於有巨)·다음 아들 사정 자화(資和)·다음 아들 사정 어웅거(於雄巨)·다음 아들 여거(餘巨)·다음 아들 가쌍개(加雙介) 이상은 4등이고, 사위[女壻] 지휘 다사(多舍)·사정 아을대(阿乙大) 이상은 4등이고, 사정 조을도(照乙道)는 4등이고, 보고금(甫古金)은 4등입니다. 다롱개(多弄介)는 4등이고, 벌이대(伐伊大)는 4등이고, 매이하(每伊下)는 4등이고, 인대(因大)는 4등이고, 노고(老古)는 4등이고, 반거(班車)는 4등입니다. 천호 제이개(齊伊介)는 4등이고, 아들 상가토(尙加土)·조카 우리(亐里) 이상은 4등입니다. 다사(多舍)는 4등이고, 가이개(加伊介)는 4등이고, 이랑개(伊郞介)는 4등이고, 아양개(阿陽介)는 4등이고, 모다호(毛多好)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24가(家) 내에 장정이 50여 명입니다.

경원진에서 60여 리 상훈춘(上訓春)에 거주하는 우량캐 만호 파난(波難)은 족류가 강성하니, 4등이고, 아들 다소(多小)·다음 아들 나다개(羅多介) · 손자 다쌍개(多雙介) 이상은 4등입니다. 사직 사오리(沙吾里)는 4등이고, 아들 보내(甫乃)·사위[女壻] 가파(可波) 이상은 4등이고, 아우 아이대(阿伊大)는 4등입니다. 모로(毛老)는 4등이며, 모당가(毛堂可)는 4등이고, 아들 소대(所大)·다음 아들 아라(阿羅) 이상은 4등입니다. 천호 이질개(伊叱介)는 4등이고, 시가우(時加右)는 4등이고, 사위[女壻] 가오사(加吾沙)는 4등이고, 보라외(甫羅外)는 4등이고, 조카 매앙가(每陽可)는 4등이고, 가을한(加乙漢)은 4등이고, 여동개(汝同介)는 4등이고, 소보(所甫)는 4등이고, 사정 동지(童之)는 4등이고, 아질대(阿叱大)는 4등이고, 사정 마파(馬波)는 4등이고, 어치내(於赤乃)는 4등이고, 아다개(阿多介)는 4등이고, 시을두(時乙豆)는 4등이고, 주장개(朱將介)는 4등이고, 보을도(甫乙道)는 4등이고, 강리(江里)는 4등이고, 시을비내(時乙非乃)는 4등이고, 가을다무(加乙多茂)는 4등이고, 자오내(者吾乃)는 4등이고, 마리(麻里)는 4등이고, 시리우(時里右)는 4등이고, 사정 나다개(羅多介)는 4등이고, 보을도(甫乙道)는 4등이고, 소중거(所衆巨)는 4등이고, 제내(齊乃)는 4등이고, 어허주(於虛主)는 4등이고, 시리보하(時里甫下)는 4등이고, 나오라(羅吾羅)는 4등이고, 나오라(羅吾羅)는 4등이고, 이질개(伊叱介)는 4등이고, 나수(羅守)는 4등이고, 아랑개(阿郞介)는 4등이고, 좌화(佐和)는 4등이고, 보당개(甫堂介)는 4등이고, 노거(奴巨)는 4등이고, 주장개(朱將介)는 4등이고, 사정 도하(都下)는 4등이고, 나하(羅下)는 4등이고, 조동개(照同介)는 4등이고, 부여내(夫如乃)는 4등이고, 아라개(阿羅介)는 4등입니다. 박가(朴可)는 4등이고, 아들 조치(照赤)·다음 아들 시거(時巨)·다음 아들 부귀(夫貴)·다음 아들 아을이(阿乙伊)·다음 아들 벌이대(伐伊大)·다음 아들 아거(阿巨)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마을 61가(家) 내에 장정이 120여 명입니다.

경흥진(慶興鎭)에서 동쪽으로 30리 강외 하다산(何多山)에 거주하는 콜칸 도만호 김시구(金時仇)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사직 김가을부응가(金加乙夫應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주징가(朱澄可)는 4등이고, 아우 부만호 김가상개(金加尙介)는 2등이고, 다음 동생 상호군 김가양개(金加陽介)는 2등이고, 그 아들 부사정 김치성가(金赤成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상호군 유이항개(劉伊項介)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하지라(河知羅)는 4등입니다. 부만호 유힐칭가(劉詰稱可)는 3등이고, 아들 나시(羅時)·다음 아들 하하라(何何羅) 이상은 4등이고, 조카 부사직(副司直) 유보을징가(劉甫乙澄可)는 3등입니다. 상호군 유무징가(劉無澄可)는 2등이고, 아들 우을라(亐乙羅)·다음 아들 유처(由處) 이상은 4등입니다. 조카 유파사라(劉波沙羅)는 고(故) 도만호 시방개(時方介)의 아들인데 2등입니다. 유요시고(劉要時古)는 고(故) 도만호 시리주(時里主)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우 유노음호(劉老音好)는 4등입니다. 유가을빈개(劉加乙賓介)는 3등이고, 아우 나린가(羅麟可)는 4등입니다.

대호군 이도을지마(李都乙之麻)는 족류가 강성하니 3등이고, 아들 이기음금(李其音金)은 3등이고, 조카 사직 이두응구아(李豆應仇阿)는 3등이고, 사직 이모양개(李毛陽介)는 2등이고, 아들 사정 이도롱개(李都弄介)·다음 아들 이기사라(李其斜羅) 이상은 3등이고, 아우 사정 이소징가(李所澄可)는 3등이고, 그 아들 기을가시(其乙可時)·다음 아들 호을호(好乙好)·다음 아들 가모개(可毛介) 이상은 4등입니다. 만호 김양소(金良所)는 3등이고, 아들 김파을다(金波乙多)·다음 아들 첩리시(帖里時) 이상은 3등이고, 조카 사정 김사종개(金沙從介)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17가(家) 내에 장정이 36명입니다.

경흥진에서 동쪽으로 하루 걸리는 거리의 강외 초관(草串)에 거주하는 콜칸(骨看) 부만호 이아시응가(李阿時應可)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사음자(舍音者)·다음 아들 주고(朱古) 이상은 3등이고, 아우 사정 이아징가(李阿澄可)는 3등이고, 아들 네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부사정 이호이응가(李好伊應可)는 3등이고, 아들 운용가(云用可)·다음 아들 수로모(愁老毛)·다음 아들 모다시(毛多時) 이상은 4등입니다.

호군 김오을창가(金吾乙昌可)는 족류가 강성한데 고(故) 만호 두칭개(豆稱介)의 아들이니 1등이고, 조카 호군 김어허내(金於虛乃)는 시위하니 2등이고, 아들 나오내(羅吾乃)는 4등이고, 아우 사정 김지청가(金知靑可)는 3등이고, 종형(從兄) 사정 김모하사(金毛下舍)는 천호 김고을기내(金古乙其乃)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모하체(毛下體)·다음 아들 마파(麻波) 이상은 4등이고, 종제(從弟) 지휘 김오음소오(金吾音所吾)는 3등이고, 그 아들 이가로(里可老)는 4등이고, 종제(從弟) 사정 김오을고리(金吾乙古里)는 3등이고, 종제(從弟) 부사직 김오간주(金吾看主)는 시위하니 2등이고, 다음 동생 사정 김구화리(金仇火里)는 시위하니 3등입니다.

사직 김지응두(金之應豆)·아소을고(阿所乙古)는 3등이며, 만호 유소질동개(劉所叱同介)는 천호 창동개(昌同介)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아고자(阿古者)는 4등이고, 아우 부사정 유소담을금(劉所淡乙金)은 3등이고, 매부(妹夫)인 사정 유야오시응가(劉也吾時應可)는 3등이고, 아들 야오징가(也吾澄可)는 4등이고, 종제(從弟) 유비지리(劉非之里)는 고(故) 상호군 두랑개(豆郞介)의 아들인데 3등이고, 종제(從弟) 무랑가(無郞可)는 3등입니다. 만호 유호토(劉好土)는 3등이고, 아들 소을시(所乙時)·다음 아들 나로(羅老)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사직 유상상가(劉常常可)는 고(故) 만호 주랑개(朱郞介)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여오정가(汝吾正可)는 4등입니다. 사정 유토이사가(劉土伊巳可)는 3등이고, 아들 부응라시(夫應羅時)·다음 아들 부지로(夫知老)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마을 20가(家) 내에 장정이 42명입니다.

경흥진에서 동쪽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의 강외 여산(餘山)에 거주하는 콜칸(骨看) 도만호 김조랑가(金照郞可)는 족류가 강성하니, 추장은 1등이고, 아들 무거응가(無巨應可)는 2등이고, 조카 아이간가(阿伊干可)·아지가(阿之可) 이상은 3등입니다. 대호군 김선주(金先主)는 3등이고, 아들 부사직 가은당가(加隱堂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벌가응가(伐加應可)·다음 아들 모지(毛只) 이상은 4등입니다. 위의 마을 3가(家) 내에 장정이 8명입니다.

경흥진에서 동쪽으로 나흘 걸리는 거리의 강외 어지미(於知未)에 거주하는 콜칸 만호 유사을지대(劉沙乙只大)는 족류가 강성하니 2등이고, 아들 후롱오(厚弄吾)는 3등이고, 다음 아들 두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아우 만호 소을고대(所乙古大)는 3등이고, 아들 상자(上者)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2가(家) 내에 장정이 6명입니다.

경흥진에서 북쪽으로 30리 강외 회이춘(會伊春)에 거주하는 여진 호군 박파이대(朴波伊大)는 고(故) 지휘 말아토(末阿土)의 아들인데 3등이고, 아들 사직 오을빈개(吾乙賓介)는 시위하고, 다음 아들 사정 사영부하(沙迎夫下)·다음 아들 사이은가무(沙伊隱加茂)·다음 아들 사정 소이가무(所伊加茂) 이상은 4등이고, 아우 호군 박보을고소(朴甫乙古所)는 3등이고, 아들 야당지(也堂只)·다음 아들 야다무(也多茂)·다음 아들 야랑가(也郞可)·다음 아들 야라가(也羅可)·다음 아들 료고(了古) 이상은 4등이고, 아우 박부(朴夫)는 4등이고, 아들 가모리(加吾里)는 4등입니다. 여진 은속시응가(殷束時應可)는 4등이고, 아들 어을소(於乙所)·다음 아들 소롱가(所弄可) 이상은 4등입니다. 여진 호군 김주롱가(金朱弄可)는 3등이고, 아들 지휘 비상가(非尙可)는 3등이고, 다음 아들 자리가(者里可)·다음 아들 소로가(所老可)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조카 김소말응가(金小末應可)는 고(故) 소징가(所澄可)의 아들인데 4등이고, 아우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위의 마을 6가(家) 내에 장정이 21명입니다.

경흥진에서 북쪽으로 30리 강내의 여오리(汝吾里)에 거주하는 여진 만호 김모다오(金毛多吾)는 3등이고, 아들 도쌍가(都雙可)·다음 아들 이마두(伊麻豆) 이상은 4등이고, 아우 부사직(副司直) 김모하(金毛下)는 4등이고, 아들 진홍오(津紅吾)·다음 아들 연다(延多)·다음 아들 간아지(干阿之) 이상은 4등이고, 다음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여진 사정 김이랑가(金伊郞可)는 4등이고, 아들 호군 가화(家和)는 4등이고, 아우 김야하(金也下)는 4등이고, 다음 동생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여진 사정 박단용가(朴丹用可)는 4등이고, 형 모하례(毛下禮)는 4등이고, 아우 두롱가(豆弄可)는 4등이고 다음 동생 아양가(阿陽可)는 4등입니다. 여진 김모랑가(金毛郞可)는 4등이고, 아들 사종가(沙從可)는 4등입니다. 위의 마을 8가(家)내에 장정이 18명입니다.

경흥진에서 40리 강내의 아을아모단(阿乙阿毛丹)에 거주하는 여진 사직 김함대(金含大)는 4등이고,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하고, 아우 이리우(伊里右)는 4등이고, 그 아들 한 명은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경흥진에서 북쪽으로 20리 강내의 강양(江陽)에 거주하는 콜칸 상호군 이다롱가(李多弄可)는 천호 자읍동개(者邑同介)의 아들인데, 2등이고, 아들 두응부리(豆應夫里)는 4등이고, 아우 이유응거(李留應巨)는 시위하니 2등이고, 아우 사정 이다양가(李多陽可)는 3등이고, 그 아들 산옥(山玉)·다음 아들 독송(獨松) 이상은 4등이고, 조카 호군 이시라미(李時羅未)는 3등이고, 아들 두소응가(豆所應可)·다음 아들 도랑가(都郞可) 이상은 4등이고, 아우 시장가(時將可)는 3등입니다. 위의 마을 4가(家) 내에 장정이 10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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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3년(1455) 3월 24일 2번째 기사

현대뿐만 아니라 당대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만인지상의 존재인 임금조차 실록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지를 모르니 몸가짐을 조심케 하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5.2. 지우개를 쓰지 않는 역사

삼가 살피건대 역대에서 역사를 수찬하는 자는 모두 당시의 기거주(起居注)를 근거하고 간혹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을 간추려 채록하며 그가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을 덧붙였는데도 오히려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강목(綱目)》에도 《고증(考證)》·《집람(集覽)》·《집람정오(集覽正誤)》의 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중에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하거나, 공변되지 못하게 시비한 것이거나, 심지어 굽은 것을 곧다고 하거나, 정(正)을 사(邪)라고 하거나, 제현(諸賢)을 무함하거나 일세를 더럽게 먹칠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송(宋)나라 범충(范冲)의 사서(史書)가 바로 그것이다. (…) 무사(誣史) 중 특히 근거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기(遺記) 및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의 사실만을 가지고 이를 증변(證辨)하면서 끝내는 ' 《실록》을 살펴보건대'로 예(例)를 삼았다. 그 나머지 제신들이 무고되고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일이 거론하여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하였으나, 그 사람의 처음과 끝을 살피면 그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니, 보는 사람이 자세히 살필 일이다.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 수정에 참가한 채유후의 후기
조선왕조실록의 또다른 의의로는 이전 편집의 주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수정본을 새로 내더라도, 원래 실록을 없애버리지 않고 온전히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당대의 역사를 서술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승자에게 유리한 기록은 부풀려지고 패자에게는 다소 억울한 기록을 넣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새롭게 쓰더라도 이전 내용과 바꾼 내용을 고스란히 남겨 그 평가를 후손들에게 맡겼다.

역사학자들에게 최악의 적이 기록말살형임을 생각해본다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가 격화되고 당색에 따라 인물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져 실록에도 그대로 반영되곤 했다. 따라서 '수정실록'은 집권당이 바뀌면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자기 당에 입맛에 맞게 고치는 수정 작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편찬한 사관들도 이전 실록 편집의 주체들은 '몹쓸 신하'니 '황당한 평가를 내렸다.'느니 하면서 깠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실록 내용 그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새롭게 쓴 내용들도 어느 한쪽에 치우친 평가라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두 내용 모두 남기니 후손들이 알아서 잘보고 판단해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또한 실록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은 기존 편찬자의 잘못을 전제로 함에도 불구하고, 실록 편찬과 관련된 어떠한 이유로든 기존 편찬자들을 처벌하려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오늘날 재평가와 그에 대한 반박이 오가는 광해군이 단순히 연산군과 비슷한 폭군으로만 남을 여지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기존 기록이 없어지고 선조수정실록만 남았다면, 남는 기록이 광해군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서술된 기록이 전부라 그에 맞춰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의 주동자들이 사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성했을 것이라는 심증은 계속 남겠지만, 다른 기록이 없는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이 되기 때문. 사실 세계사의 여러 사례를 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실록의 내용 자체를 수정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데, 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이름이 후대에 재위한 왕의 이름과 겹쳐 피휘를 위해 후대에 실록에서 이름을 고친 예가 있다. 가령 선조 때 태종 대에 한성부 판관을 지낸 원황(元晃)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예종의 휘와 겹친다는 이유로 태종실록에서 원황의 이름을 元滉으로 고친 일이 있었다. #

5.3. 사관의 촌평

사신은 논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요(權要)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공(龔)·황(黃)과 같은 사람을 가려 차임한다면, 검(劎)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이토록 심하게 기탄없이 살생을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 포착하기만 하려 한다면 아마 포착하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 다 포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 3월 27일 기해 2번째기사, 개성부 도사를 무신으로 뽑아 보내 도적을 잡을 방도를 논의하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3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사관은 논한다.(史臣曰)' 하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사관이 귀띔으로 들은 정보를 기록하거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한 부분이 있는데, 사관도 사람이니 만큼 가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당파에 치우친 생각을 적어 놓았다. 사관의 평을 읽으면 공감이 가거나 통쾌할 때도 있고,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있다. 상기한 두가지 예시로, 임꺽정의 행각을 두고 사관이 아주 날카롭게 원인을 진단한 부분에서 사관은 '대신이란 놈들이 뇌물이나 먹어대고 관리들이 백성들을 쥐어짜니 임꺽정 같은 놈이 나오겠냐 안나오겠냐?'고 비판했고 이는 현대인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지만, 병자호란 속환해온 여인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과 박해에 그녀들을 보호하고자 나선 최명길을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비판한 사관의 성차별적 시선에는 현대인들은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록에 풍부하게 기록된 사실을 읽어보면 사관의 평이 옳은지, 그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사실 오히려 이는 장점인데, '사관은 논한다'로 인해 어디까지가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사관의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한 부분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서도 사람이 쓰는 것인 이상 필자의 주관이 전혀 개입하지 않기는 힘들므로, 사실과 주관을 뭉뚱그려 적는 것보다는 이렇게 사실과 주관적인 논평을 분리해서 기록하는 편이 훨씬 정확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사실을 당대 지식인인 사관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당시의 사회상을 파악하는데에 참고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5.4. 한계

조선은 철저한 수도집중 중앙집권국가였기에 지방 기록이 적다. 예를 들면 옆나라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 중앙정부가 무너져 정사 편찬에 큰 공백기가 있는 대신 각 지역의 가문들이 왕처럼 군림했기에 이들이 쓴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자신의 가문을 띄울 목적으로 과장하거나 불리한 부분을 감추는 경우가 많아 기록 하나하나의 신빙성은 많이 떨어지며 이때문에 일부 관찬 정사와 국가 공문서들만 파도 큰 틀은 잡을 수 있는 한국과는 연구 방식도 다르다.[53] 다만 서술 목적 자체가 중앙정부의 역사 기록물이라 중앙정부 중심이지 지방 관련 기록은 지역에서 올라온 주요 공문서를 모은 각사등록이라는 책이 따로 있다. 그리고 이것도 실록 못지 않게 양이 많다.

또 후대 왕이 모아서 집필하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실록의 내용이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빠진 경우도 있다.[54]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의 최후나 영정조 때 사도세자 관련 기록, 계유정난 등이 대표적인 예. 비슷하게 같은 실록인데도 후대 사관들이 정리한 내용과 사건 당일의 기록이 모순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55] 대표적으로 연산군일기에서 무오사화 때 이극돈의 행보를 들 수 있다.[56]

실록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이것만 읽으면 조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은 어디까지나 사초와 승정원일기, 각종 공문서 및 개인사료를 가져다 편집해 만든 요약본이다. 하루 종일 회의가 이어진 경우 발언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핵심적인 부분이나 결과만 수록했다. '일일이 기록한 것'을 보려면 사초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찾아봐야 한다. 다만 요약을 했다고는 해도 마구 한 것은 아니라서 실록 편찬을 맡았던 실록청의 관련 사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분량을 적절히 줄이면서도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지 고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적 견해에 치중되었다는 비판을 수용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록은 어디까지나 한양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하다 보니 각 지역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중앙정부에 반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치우친 견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즉 어떤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면 실록은 그것을 '역적의 난'이라고 하지, 일으킨 쪽 입장을 대변하여 적어주진 않는단 이야기다. 물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뭐가 문제였는가.'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과 밝혀진 사실들은 적힐 수 있지만 결국 중앙정부의 입장이라는 한계가 있다. 정조 때 실록을 읽은 다음에 북학의 같은 책을 한 번 읽어보면 같은 시대를 다룬 기록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실록은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으로 적은 사료가 아니다. 한양 중앙정치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사회의 미시적인 역사, 예를 들어 속옷의 변천사, 화폐의 유통범위 등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한 부분까지 알아내려면 가문 기록이나 야사집, 어우야담, 용재총화 같은 야담집을 비롯한 잡기류, 각종 관찬( 동국여지승람, 동국문헌비고 등) 또는 개인( 성호사설, 택리지, 임원경제지 등) 편찬 각종 유서류, 각종 일기 등도 뒤져봐야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부분이 한자라 대중적 접근도가 극히 떨어지거나 민감한 것들이 있기에 아직 연구자들만의 영역이다. 그나마 인조실록에 담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등 어쩌다 한번 나오는 식이다.

또 하나의 한계라면 역시 사람이 쓰다보니 민수의 옥 같은 사건도 있었고[57]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실록도 당파 입맛에 맞게 내용이 바뀌었다. 이른바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인데 물론 선조수정실록은 사초가 부족해서 그랬다고 반박 할 수 있지만 현종개수실록이나 숙종실록보궐정오, 경종개수실록은 당연히 사초도 많은데 "어 저거 우리 당파가 쓴 거 아니네? 거짓" 정도 논리로 나왔다. 그래도 나름 장점이 있다면 원 실록과 수정실록 두 개를 교차검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58] 또한 당시 당파가 관련 사건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헛짓거리가 후대에는 더 도움이 될 수 있음이 얄궂은 일이다. 예시를 들자면 선조실록을 두고 서인들이 실록 내용이 부실하고 당파성 있다고 여겨 인조 때 수정실록을 편찬했는데, 수정실록 또한 당파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실록 자체에 당파성이 없었다고 볼 순 없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시기에 편찬되었고 당시 왕은 광해군이었기에 아무래도 북인 입맛에 맞게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아예 세도정치의 영향인지 사초도 줄어들어 실록 내용이 많지가 않다. 그나마 그 부분은 다행히 승정원일기가 있다.

첫 부분인 태조실록과 끝 부분인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무작정 신뢰하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읽을 때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태조실록은 태조 이성계를 미화하기 위해 신화적인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태조실록 총서는 이성계와 그의 조상들이 조선 왕이 되기 전, 즉 고려의 '일개 장수'이던 시절의 기록으로써, 사관이 옆에서 보고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부분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 주도 하에 편찬되어 일본 측에 불리한 기사는 누락되거나 왜곡해 실었다는 문제가 있다.

6. 사관들의 집념

이렇게 기록이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선 사관들이 그만큼 근성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관들은 자세한 기록을 위해 왕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유명한 예로 사냥을 나간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내용마저 기어코 기록하였다.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화살을 가지고, 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니: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에서.

왕이 알리기 싫어한 일조차 기어코 사관들이 알아내어 꼼꼼하게 기록에 남겼고, 후대에도 그걸 없애지 않고 편찬까지 했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이 내용은 실록 홈페이지의 인기 검색어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특히 태종 때 민인생(閔麟生)이란 사관은 경연 때 왕이 말하는 걸 들으려고 병풍 뒤에서 숨어 있던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연회 때도 기록하려고 초대도 안 받고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심지어, 절대왕권을 지녔던 조선 초기 태종 집권기에는 이름모를 사관이 왕과 중전 등이 거주하는 내전에 몰래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 파파라치 저리가라 수준.

다음은 위에 언급된 태종 대의 사관 민인생[59]이 남긴 '근성'의 흔적이다.
  1. 근성의 시작, 연회의 불청객: 실컷 연회를 즐기고 궁으로 돌아가는 태종의 눈에 띈 사관 민인생. 태종 1년 3월 18일 기사
  2. 지칠 줄 모르는 근성의 징조: 기세좋게 편전(왕의 거처 겸 업무 공간)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당함. 태종 1년 4월 29일 기사
  3. 들이대기: "편전에서 정사 보실 때도 옆에서 '전하의 아름다운 말씀' 을 기록해도 될까요?" 태종 1년 5월 8일 기사
  4. 편전 엿보기: 민인생이라는 사관이 편전에 앉아 업무를 보는 태종을 바깥에서 엿보다가 걸림. 태종 1년 7월 8일 기사
  5. 슬픈 결말: 여러 번 몰래 엿보다 걸렸는데, 심지어 휘장을 걷고 엿본 것까지 문제가 되어서 변방에 귀양 가는 진짜(…) 슬픈 결말. 태종 1년 7월 11일 기사
  6. 11년 후 아직도 찜찜한 태종: 민인생이 일으킨 사건 후, 9년이 지나 사관의 편전 출입을 허용했지만, 뭔가 찜찜했는지 "사관이 언제부터 편전에 들어왔냐?" 하고 물어, 지신사(知申事)가 "2년 전."이라고 대답. 그러자 태종이 말이 없어서 불안해진 지신사. 태종 12년 7월 29일 기사
  7. 뒷담화: '아침마다 사관도 입시하게 해달라.'는 말이 나오자, 민인생의 이야기를 하며 불쾌해 하는 태종[60]. 태종 12년 11월 20일 기사

이러하듯 사관들의 기록정신에 성역은 없었다. 왕이 쪽팔린 일을 하고 '이거 쪽팔리니까 적지 마라' 라고 한 것도 적었고, 왕이 욕설을 쏟아내도 정직하게 적었으며, 정치가 개판이었던 문정왕후 집권기에는 대놓고 '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라고 불경한 수준의 문장까지 실어놓기도 했고, ' 도둑이 생기는 원인을 살피지는 않고 때려잡자'고만 주장하는 명종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왕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까지도 적어야 했다. '사관들이 요즘 자꾸 조는데 한번 조져야겠다'라거나, '사관들 근태 관리가 안된다. 혼쭐을 내야 겠다'라는 대신들의 논의들까지도 울면서 모두 꼼꼼하게 적었다.[61][62]

이 때문에 왕은 사관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잡아다가 벌을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 김일손이 김종직 조의제문을 실어서 터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 외에도 세조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들을 많이 실었었다. 결과는 피바다… 그리고 영조 1년 이천해(李天海)의 공초(供草)에선 영조가 사관들에게 "죄인의 흉악한 말을 쓰지 말라"고 하자, 사관이 "흉참(凶兇)하기 때문에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맞장구치며 설설 긴 모습도 있다. 이 대화를 굳이 써놨다는 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두고, 결국 적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30년 후 신치운(申致雲)이 경종 독살설 게장을 언급하여 영조가 '이거 쓰지 말라' 라고 명령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틈을 타, 당시 사관이 "지금 신치운이 치는 게장 드립이 지난번에 이천해(李天海)가 했던 소리랑 똑같습니다. 참고해두세요" 라고 재치있게 기록했다.[63] 조선시대 사관들의 30년 존버 메타

물론 사관들도 사람인 만큼, 편찬자나 사관의 당색에 따라서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일부 편파적인 평가나 곡필의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하지만 실록은 그런 편파서술이나 곡필을 분량이 압도적인 사실 서술로 극복해버리곤 한다. 즉, 일부 곡필된 부분이 있어도, 면밀하게 기록된 전후사실들을 눈 똑바로 뜨고 분석만 잘 하면, 진상이 떠오를 만큼 기록이 풍부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 당쟁으로 인해, 집권당이 바뀌어도 이전 집권당에 유리하게 기록된 기존 실록을 없애버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자신의 당에게 유리한 내용을 수정실록·개수실록·보궐정오 등으로 다시 편찬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새 집권자가 기존의 기록을 아예 없애버리는 기록말살형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가를 보면, 실록의 공정성이 새삼 느껴진다.

7. 현대화 노력

7.1. 영인

영인(影印)이란 도서, 그림 등의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요새 감각으로 말하면 스캔본.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사진판으로 영인한 적이 있었고, 해방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955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태백산본을 영인해 A4 크기의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영인이 아닌 책을 그대로 복제하는 복본 제작과정이 진행중이다. 가쿠슈인에서도 영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까진 이조실록이라고 불렀으나 이조가 멸칭이란 주장이 대두되어 1955년 10월 12일 조선왕조실록으로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리조실록이라 부른다.

7.2. 번역과 전산화

파일:북한 번역본 조선왕조실록.jpg
북한 번역본 조선왕조실록 400권 중 일부의 모습. 사진 출처

파일:국역 조선왕조실록.jpg
한국고전번역원에 소장된 대한민국 번역본 조선왕조실록 일부. 사진 출처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북한에서는 적상산본을 바탕으로 1980년 모두 400권으로 번역이 되어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남한에서는 원래 전문가들이 보는 것을 염두에 두고 번역작업을 했기 때문에 고유명사와 용어를 살린 것과 달리 북한은 대중서를 지향하여 공식용어나 표현을 모조리 현대어로 고쳐서 내놓았다. 가령 '주상이 종친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은 '임금이 가족들 데리고'로 하는 식. 심지어 임금이 받은 시호도 거의 현대 한국어로 풀이해, 가령 세종의 시호인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영특하고 문명하며 슬기롭고 용감하며 어질고 뛰어나며 명철하고 효성스러운 세종장헌대왕'으로 번역되었다. # 이러한 번역방식은 원단어의 뜻이나 늬앙스가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어쨌든 어려운 역사적 전문용어나 고어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남한 번역본보다 북한 번역본이 훨씬 읽기 쉽다. 또한 한국 정부(문화재청)의 견해와는 달리 북한 번역본은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실록의 일부로 포함하여 번역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주관하여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93년 말에야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문화체육부, 교육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민족문화추진회, 서울시스템(주)의 합의로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어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5년 CD롬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후 1997년에 1차 개정판, 1999년에 2차 개정판이자 보급판이 출시되었다. 뒤에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별도로 CD롬으로 제작했으며 원문 전산화도 뒤이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유롭게 무료로 국역본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다. 과거 네이버처럼 실시간으로 인기 검색어를 보여준다. 대마도 징벌, 측우기 등 학업을 목적으로 한 조사 키워드가 대부분인 반면 '태종 사냥 떨어져' 같은 것도 있어 태종의 수치 플레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또한 한국고전종합DB에서도 번역이 진행중인 승정원일기의 해석본과 함께 조선왕조실록의 국역본을 열람할 수 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는 주로 국역본 열람에 중점을 두고, 원문을 열람하고자 할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로 리다이렉트된다.

조선왕조실록 전산화는 전세계 지식인들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64] 전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수정되고 새로운 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도 전산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도 꾸준히 증역, 오역 수정 등으로 보완 중이다. 분량이 워낙 많아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과 더불어) 실록이 수많은 한문 학자들을 먹여살린다는 말도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번역/수정 작업이 끝도 없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

7.3. 번역의 문제점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를 혼동하여, 고유 명사로 된 것을 일반 명사로 풀어서 번역하거나 고유 명사가 아닌데도 이름이겠거니 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대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한자 하나하나 다 풀어서 '인(仁)을 일으키는 문' 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 당시에 天將이라고 하면 명나라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하늘의 장수' 로 번역하는 식. 직역이나 비표준어 같은 건 시간과 예산의 문제로 인해 번역을 빨리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지만, 이런 건 그냥 오역이다.

7.4. 실록 전산화의 영향

7.4.1. 사극

대략 1995년에 서울시스템이라는 회사에서 조선왕조실록 CD롬을 판매하자 상당수 사극에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 반영되기 시작했고,[65] 2005년에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하자 젊은 작가층도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용의 눈물[66]이나 왕과 비같은 사극도 조선왕조실록 CD롬을 참고해서 쓴 사극이다.[67]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내서 대입한다든가, 새로운 해석이 많아졌다. 진짜 검색만 해보면 다 나오는 수준이다. 조선시대 사극이 이전에는 연산군, 단종, 희빈 장씨 같은 몇몇 소재만 수십번은 우려먹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온갖 퓨전 사극이 나오는 바탕이 되었다. 꼭 이런 자료가 있어야 퓨전 사극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이러한 세세한 서술 덕분에 퓨전 사극들이 상당히 탄탄한 지형 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사극 작가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서, 약간의 고증오류만 내더라도 전국의 역덕들이 물어뜯기 때문. 실록이 존재하는 한, 고증오류는 사극작가들이 피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이쯤이면 완벽하겠지.' 싶다가도 역덕들은 실록을 통해 귀신같이 오류를 찾아낸다.

정통사극에서 이런 고증논란이 일어나는 상황이 반복되자 거꾸로 큰 줄기만 챙기고 세세한 상황은 픽션을 가미했다고 못박고 출발하는 육룡이 나르샤 뿌리깊은 나무 같은 팩션사극, 더 넘어서 아예 조선시대라는 배경과 일부 핵심이 되는 배경[68]같은 기본적인 뼈대만 남겨놓고 핵심적인 이야기는 전부 허구로 갈음한 구르미 그린 달빛이나 해를 품은 달 같은 퓨전사극이 등장하고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퓨전사극의 경우엔 아예 처음부터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완전한 허구라고 못을 박고 시작하며 성조대왕처럼 아예 없는 왕을 등장시키고 시대상도 일부러 불분명하게 하는 등 고증오류 논란을 일찌감치 피하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퓨전사극의 경우에도 허용되는 상한선이 있어서 아무리 가상이라고 해도 조선구마사처럼 조선족이 만들었냐는 논란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 치우친 역사왜곡을 한 드라마라면 쌍욕을 쳐먹는다. 판타지 사극 드라마 철인왕후는 극중 대사에 (풉)... 조선왕조실록도 한낱 찌라시네? 괜히 쫄았어.라고 연출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권고 결정까지 먹은 사례도 있다.

7.4.2. 교양서

서점가에는 조선시대 교양서가 범람하게 되었다.

대충 주제 하나를 잡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서 기사를 좀 복붙한 다음, 적당히 자신의 을 덧붙이면 그럴듯한 역사교양서가 하나 나온다.

책 쓰기 참 쉬워졌다. 실록이 공개된 후로 조선왕조를 다룬 책들은 거의 다 이런 상황이다. 덕분에, 실록만 대충 훑어보고 사료를 자기 주장에 들어맞는 것만 쥐어뜯어서 쓴 불쏘시개 수준의 역사교양서도 넘쳐나는 게 문제. 대표적인 예가 원균명장설. 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에 대해 찬양한 발언만 적당히 짜맞추고, 다른 기록과 신하들의 의견과의 교차 대조는 전혀 하지 않고 조합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실록 이외에 신뢰할 만한 사적 기록도 상당히 많은데, 원균명장설에서는 오직 '원균행장'만을 취사선택한다.[69]

7.4.3. 그 외

  • 자기 조상님의 업적을 찾아보려고 검색했더니 탐관오리였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견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는 공명첩을 사는 족보 위조나 족보 매매가 정말 흔했다. 즉, 자신의 조상이 실제 자신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제 와서는 족보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기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성도 많이 줄었다. 다만 자신의 조상이 옆동네라면?
  • 사관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적은 문서이긴 하나 일단은 공문서다보니 왕이나 주변인물들이 하던 욕설은 '흉참한 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차마 듣지 못할 하교' 같은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데, 자기 며느리와 그가 낳은 장손을 비롯 손자들에게 한 패드립에 대한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왕의 몇 안 되는 욕설 기록이다. 실록 외의 기록에는 정조 비밀 편지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인조 24년(1646) 2월 9일 1번째 기사
  • 외모평가를 거의 하지 않거나 해도 아주 박하게 평가를 한다. 만약 실록에서 외모평가가 나왔다면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특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양녕대군의 애첩이던 어리 희빈 장씨처럼 실록에서 대놓고 미인이라고 기록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문 편. 헌종도 헌종실록 1권에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큰 목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으며 '고 기록되어 있어 현대에 조선 임금 중 최고 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70]
  • 지구과학 모의고사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이용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8. 목록과 분량

실록을 포함, 전근대 동양에서 서적/출판물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 과 '책' 에서 '권'은 '내용상 구분하여 나눈 단위' 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 를 뜻한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장(챕터, 파트)' 이 당시의 '권' 이고, '권' 이 당시의 '책' 이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이 15권 3책이라고 하면, 15개 장이 3권 책에 나뉘어 수록되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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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선조 선조수정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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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경종 경종수정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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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순조 헌종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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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71] 순종 순종부록

8.1. 태조 ~ 철종실록

제목 권수 책수 비고
태조실록 15 3 첫번째 실록
정종실록 6 1 숙종 때에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는 전부 ' 공정왕실록'이라고 적혔다.
태종실록 36 16
세종실록 163 67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유일하게 세종실록오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악보, 칠정산 내외편이 별도로 포함되어 있어 편년체 사서와 기전체 사서가 혼합된 듯한 형식을 보여준다.
문종실록 13 6 문종 1년 12월에서 2년 1월까지 다룬 11권이 표지만 11권이고 내용은 9권이기 때문에 전체 실록 중 유일하게 공백이 있는 실록이다. 원인은 인쇄 중 실수로 표지와 내용이 바뀐 책이 전주사고에 봉인된 바람에 생긴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다른 사고에 아마 표지만 9권이고 내용이 11권인 문종실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 33년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열람하다가 문종실록의 표지가 11권인데 정작 내용은 9권의 내용이 거듭 실린 것을 확인했다. 이때 권태일은 분명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훗날 영조 9년 누락이 재확인되어 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전서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대산에 있던 실록도 결국 전주에 있던 실록을 복사한거라 의미가 없었고 결국 문종실록 11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단종실록 14 6 숙종 때 비로소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에는 전부 ' 노산군일기'라고 적혔다.[72]
세조실록 49 18 세조실록악보 등이 부록으로 추가되어 있다.
예종실록 8 3
성종실록 297 47 권수가 가장 많은 실록. 원래 실록은 보통 1년치를 한 권으로 편성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년치나 2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했지만 성종실록은 기사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그냥 1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일기 63 17
중종실록 105 53
인종실록 2 2 인종 사후 명종 재위기간에 편찬되지는 않았고,명종 사후에 명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같이 편찬했다. 따라서 인종실록과 명종실록은 편찬에 관여한 사람이 같다.
명종실록 34 21
선조실록 221 116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련 자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임진왜란 이전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임진왜란부터 선조 말까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대거 들어가 분량이 비대해졌다. 선조 24년(1591)까지가 25권 12책뿐인데 비해 선조 25년부터 41년까지는 196권 104책이다. 그나마 선조 25년이 1월부터 3월까지가 빠졌음에도…
선조수정실록 42 8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집 주체가 되어 북인이 편집한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한 것. 효종 대에 완성되었다. 이이, 성혼 같은 서인 인사들에 대한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음을 목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서인만 좋게 쓰면 눈치 보여서인지 유성룡 등 대북파가 폄하한 남인도 좋게 써준 기술이 많다. 하지만 서인에 대한 왜곡은 심각하며 선조실록에서 생각보다 고쳐진 부분은 많지 않다. 원균명장론이나 십만양병설 같은 주장들과 관련이 있어서 관련 논쟁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87 64
광해군일기(정초본) 187 40
인조실록 50 50
효종실록 21 22
현종실록 22 23
현종개수실록 28 29 남인이 편집 주체가 된 현종실록의 내용을, 경신환국을 통해 서인이 집권한 후 개수한 것. 고쳐진 실록 중 가장 많은 범위에 손을 대었다. 고쳤다기보다는 아예 실록을 새로 하나 더 만들었다고 봐도 되며 기존의 현종실록보다 분량도 더 많다. 그 유명한 예송논쟁.
숙종실록 65 73
숙종실록보궐정오 노론이 편집한 숙종실록을 소론이 집권하자 고친 실록. 그런데 다른 수정실록보다 가장 고친 부분이 적다. '보궐정오'는 고친 부분을 기존의 숙종실록 권말에 '어느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다.'는 식으로 수정부분을 부록 형식으로 끼워 넣은 것.
경종실록 15 7
경종수정실록 5 3 소론 집권기에 편찬한 경종실록을 노론이 집권하자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 노론에 대한 불리한 기록이 삭제, 수정되고 상대적으로 소론에게 불리한 기록이 실렸다.
영조실록 127 83 처음 받은 묘호가 '영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혔다.
정조실록 54 56 처음 받은 묘호가 '정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정종대왕실록'이라 적혔다.
순조실록 34 36
헌종실록 16 9 헌종 ~ 철종대의 실록들은 세도 가문에 불리한 기록이 대부분 삭제되는 등, 이전 시기의 실록에 비해 분량이 적고 서술 자체가 빈약하다.
철종실록 15 9
총합 1894 888

8.2. 고종 ~ 순종실록

제목 권수 책수 비고
고종실록 52 52 고종과 순종 사후 조선총독부 이왕직에서 편찬
순종실록 4 4
순종실록부록 17 3 경술국치부터 순종의 사망까지 조선의 정세를 기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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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는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에서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고종과 순종의 기록을 실록이란 이름을 붙여서 편찬했다.

비록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었고, 관에서 공인한 최종 편집본이라 조약, 대외 공문서 등에 대한 기록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조선왕조의 전례에 따라 실록청을 열어서 편찬한 실록이 아니고, 일제에 불리한 부분이 누락 혹은 왜곡되었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의 을미사변 내용을 보면 미우라 고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구절은 단 한 문장도 없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안타깝다고 하는 등. 이 때문에 문화재청에서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제외하고 있으며, 국보 및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목록에서도 빠져 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 승정원일기》와 《 일성록》 등의 주요 관찬사료를 채택하여 쓰여졌고 주요 조서‧칙령‧법률‧조약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많이 들어가 있기에 역사학자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또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의 정부기록은 일본의 편집이 거의 없는 승정원일기[73]를 사용하며, 윤치호일기 등 개인 문집들[74] 또한 많이 참고한다.

일제의 왜곡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두 실록을 재편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다가 2017년까지 신편 고종시대사를 편찬하기로 했다. 고종시대사는 1960년대에 편찬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으로 2017년까지 15억을 들여 여러 사료들과 전거를 들어 새로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향후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재편찬할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고종실록, 순종실록, 순종실록부록을 모두 번역하여 제공하며, 다른 조선왕조실록과는 별도로 구분되어 있다.

9. 의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임과 동시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수록한 것으로서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이다. 이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했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그 때문에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삼국사기와 비교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가치를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발해와 후삼국시대까지 당시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어떻게든 긁어모아 겨우 엮어내었지만 집필 시기가 너무 늦어[75] 내용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던지라 고작 50권에 지나지 않는데, 조선왕조실록은 1000권이 넘어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왕조실록의 중요성을 단번에 알 수 있다.

10. 여담

  •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 시대 분량 ≥ 그 이전의 모든 분량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 원인. 조선시대 이전 역사가 쓰여진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모든 서적을 합쳐도 실록 하나보다 양이 적다. 그만큼 실록의 분량이 초월적으로 방대하고 자세하며, 조선시대 이전의 사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과 같이 역사서 집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은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반란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보관되어있던 전대의 역사서가 소실되어 버렸단 것이다.[76] 한국사에서 사서가 대규모로 소실된 대전쟁만 해도 10세기부터 4번이나 있다. 여요전쟁, 여몽전쟁, 임진왜란, 한국 전쟁.
  • 몇몇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났지만 중국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었다. 명나라 궁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사에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없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당시 고문을 당했던 조선 출신 궁녀의 증언을 수록하였다. 그도 그럴 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피해자도 둘 다 조선 출신 공녀였다. 중국인 여씨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성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다가 마침 급사한 조선 공녀 출신 권씨를 여씨가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 여기서 조선 출신 후궁들이 여럿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조선으로 도로 방출당했는데, 그들의 증언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덕분에 명나라 궁중의 잔인한 고문법을 현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연좌제로 얽혀서 고문받다 죽은 인물 중 하나가 영락제에게 "니 정력이 딸려서 궁녀가 내시랑 바람핀건데 누굴 탓하냐"고 일침을 날린 적이 있는데, 이게 실록에 실려 버리기까지 한다.
  • 전술했듯이 원칙적으로 왕은 절대 읽을 수 없었으며, 책벌레 겸 지식덕후였던 세종대왕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몇번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태조실록"을 제외하곤 보지 못했다.
  • 그 사례로 태조실록이 편찬된 후, 세종은 "지금 태조실록은 1책(冊)뿐이잖아?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일인데. 그러니 복사본을 만들어서 한 책은 춘추관, 한 책은 내가 볼수있게 해놓자. 이건 다 나라를 위한거야."라고 하는데 세종의 속셈을 알아챈 변계량이 "그건 아니되옵니다!"라며 결사 반대해서 결국 세종이 포기했다. (1425년 12월 5일)
  • 또한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기사를 보면 세종이 "이미 《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황희 신개 등이 "역사서를 임금이 함부로 본다면 그 내용도 임금의 입맛에 맞을 것인데, 그렇다면 먼 후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라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1438년 3월 2일)
  • 혜성의 출몰, 일식, 월식, 신성 출몰, 신성 폭발 등 각종 천문현상들도 다수 기록되었다.[77] 선조실록에 있는 SN 1604 관측기록은 이 초신성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SN 1604 관측 기록은 케플러를 비롯한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보다도 상세하며, 특히 밝기 변화가 초신성 폭발 직후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이 초신성이 I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줬다. 좀 더 이른 시기에 있었던 SN 1572 초신성에 대한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는지, 기록이 딱 한줄 남아있다.
  • 또한 지진 백두산, 한라산의 분화에 대한 기록도 있어서 한반도가 결코 지진, 화산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후대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11. 외부 링크

11.1. 사이트

11.2. 영상

12. 같이 보기

12.1. 관련 역사서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에 편찬된 여러 사료들, 심지어 개인이 남긴 일기까지 참조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2차 사료인 셈. 하지만 다행히 실록을 만들 때 참조했던 여러 사료들이 남아 있다. 어떤 면에서 실록보다 더 자세한 경우가 많고, 전공자들은 실록과 함께 아래 책들을 참조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정도지만 이 밖의 다른 자료들도 관심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진승총(震乘總)
{{{#!folding [ 본기(本紀) ] 권1기
, 제1대 「태조기(太祖紀)」, , 제2대 「정종기(定宗紀)」, , 제3대 「태종기(太宗紀)」, , 제4대 「세종기(世宗紀)」,
이단 이경 이방원 이도
권2기
, 제5대 「문종기(定宗紀)」, , 제6대 「단종기(端宗紀)」, , 제7대 「세조기(世祖紀)」, , 제8대 「예종기(睿宗紀)」,
이향 이홍위 이유 이황
권3기
, 제10대 「연산기(燕山紀)」, , 제11대 「중종기(中宗紀)」,
이융 이역
권4기
, 제12대 「인종기(仁宗紀)」, , 제13대 「명종기(成宗紀)」,
이호 이환
권5기 권6기 권7기
, 제14대 「선조기(宣祖紀)」, ,제14대 수정기, , 제15대(중초본, 정초본) 「광해기(光海紀)」,
이연 이혼
권8~9기
, 제16대 「인조기(仁祖紀)」,
이종
권10기
, 제17대 「효종기(孝宗紀)」, , 제18대( 개수록) 「현종기(顯祖紀)」,
이호 이현
권11~12기 권13기
, 제19대( 보궐정오) 「숙종기(肅宗紀)」, , 제20대( 수정록) 「경종기(景宗紀)」,
이순 이윤
부록
금상(今上) }}}{{{#!folding [ 평전(評傳) ] 평전
이용 · 김종서 · 황보인
,「부록 사육신(死六臣)」, ,「부록 생육신(生六臣)」,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김시습 · 원호 · 이맹전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folding [ 부록(評傳) ] 저자 · 부록
이민보,저자, · 당파원론 · 국조연대 · 선원록 · 호송 금부도사의 작가 · 김지남 }}}


[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기타산엽본. [2] 정족산사고본(鼎足山史庫本) [3] 태백산사고본(太白山史庫本) [4] 오대산사고본(五臺山史庫本). 27책은 1973년에 국보 지정, 47책은 2007년에 국보 지정, 1책은 2019년에 국보 지정 [5] 기타산엽본(基他散葉本) [6] 봉모당본(奉謨堂本) [7] 적상산사고본(赤裳山史庫本) [원문각주] 명복(命福)이다. [9] 세계기록유산에서는 빠진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포함한다면, 마지막 구절은 순종 3(1910)년 8월 29일자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하였다."이다. [10] 순종실록부록까지 포함한다면 실록의 마지막 구절은 순종 21(1928)년 7월 6일자 "태묘(太廟)에 순종(純宗)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순명 효황후(純明孝皇后)의 신주도 함께 모셨으며, 어진(御眞)을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하였다."이다. [11] 적상산사고본의 일부는 남한에 있다. [12] Annals of the Joseon Dynasty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명칭인데, 영미권 학계에서는 실록을 가리킬 때 實錄을 직역한 Veritable Records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라는 명칭도 쓰인다. 한편, 중국의 실록인 명실록 청실록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Ming Shilu와 Qing Shilu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13] , , 월남의 경우 황제 대신이 임의로 실록을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관의 논평이나 황제에게 불리한 내용을 실을 수 없었다. [14]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 조보(朝報)》, 《 비변사등록》, 《 일성록》등이 이에 해당하며,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보는 현대의 관보에 상응한다. [15] 태조가 사초를 바치도록 요구했던 당시 상황. 태조 7년 6월 12일 기사 [16] 태조, 정종처럼 퇴위만 하면 그 인물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실록 제작을 시작하지 않는다. 다만 연산군, 광해군 등 폐위되는 경우는 살아 있든 말든 실록을 썼다. 심지어 광해군일기는 광해군이 죽기 전에 완성됐다. [17] 연산군이 사초를 열람하게 된 것은 김일손의 사초가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면이 있어 대신들이 반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산군도 모든 사초를 열람할 수는 없었고, 대신들이 문제가 된 부분만 추려서 국왕에게 보여 주었다. [18] 이담명 승정원사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단 3년만 작성한 것임에도 실록의 1/5에 달한다. 더군다나 이런 자료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 자료들이 다 사라졌다고 하면 역사학자 입장에서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19] 사실 이 말이 맞는 게, 당태종같은 경우 워낙 윤색을 많이 했다보니 기록에 신빙성이 많이 떨어져서 오히려 좋은 내용조차 의심받을 정도다. 그래서 당태종은 업적 면에서 말이 많고 현재도 아들 고종이 더 낫다는 말도 듣는다. [20] 특히 필사본의 주기적인 최신화와 물리적인 분산 보존 등은 현대의 데이터 보존 전략과 놀라울정도로 닮아 있다. [21] 2024년 유적이 발굴됐다. [22] 충주·전주·성주가 위치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도를 의미한다. 아래 하(下)자가 붙은 이유는 남부 지방이기 때문. [23] 이때 경복궁 춘추관에 있던 고려실록 외사고본도 유실되어 고려실록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고려실록이 불타기 이전인 문종 때에 고려사를 편찬하였기에 고려의 역사가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지만…사실 고려사도 전주 사고에 있었기에 완전히 소실되는 사태를 면했다. [24] 선조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려 했으나 본인들이 사양했다. 이후 안의는 전쟁 도중에 병사했다. [25] 이 분들이 없었으면 조선왕조실록은 소멸되었을을 가능성도 있다. [26] 인조실록에 보면 후금과의 전란으로 정세가 위태로운 판에 관리들도 도망가 버려, 정묘호란(1627년) 이듬해인 인조 6년(1628년) 7월 동부승지 강석기는 "묘향산 사고가 병란 이후 승려 한 사람 만이 수직(守直)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적상산으로 옮긴 뒤 적상산 안국사의 승려로 승군장을 맡고 있던 상훈(尙訓)이 안국사 뒤편의 안렴대에 실록을 숨겨두어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7] 지금도 전등사에 가 보면 복원된 사고 건물이 남아 있다. [28] 안국사는 그 전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호국사와 더불어 이 사각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적상산 양수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이 사찰은 호국사지의 위치로 옮겨져 복원됐다. [29] 태백산 각화사는 1913년 의병 소탕을 명목으로 일제가 불태워 버려 1926년에야 재건이 시작되었고, 1960년에는 북한의 남파 무장공비에게 약탈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조선일보 1985년 5월 15일자에는 태백산 사고의 참봉이었던 김진호-김상락 부자의 후손을 현지에서 확인하였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는데, 각 사고의 왕조실록이며 전적들을 규장각으로 옮기라는 통감부의 지시에 당시 태백산 사고의 참봉 및 수호군이 항의하여 더러는 실록을 숨겼다가 발각, 관헌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고 한다. 태백산사고 건물은 한국전쟁 때 전소되었다. [30] 다른 사고본과 달리 편찬·교정하는 과정에서 어느 부분을 고쳤는지 명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록 편찬시 오대산본을 모본으로 하여 다른 사고본을 편찬했다고 추정한다. [31] 하지만 효종실록 1책이 살아남아 있었는데 한국인 문화재매매업자가 2018년 일본 경매에서 낙찰받아 오대산본은 75책으로 늘어났다. [32] 남·북 교류 이전까지 남한 측은 공식적으로 '행방불명'으로 처리했다. 이걸 노획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리승기를 월북시키기도 한 산업성 대표 리종옥으로 김일성의 신임을 받아 이후 정무원 총리, 국가 부주석까지 지낸다. [33] 조용헌이 주간조선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무주 적상면에서는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북한 정권은 훔쳐간 적상산 사고본을 반환하라"는 현수막을 내건다고 한다. 좌파 정권(?)에서는 이북 눈치 보기 때문에 이런 시위를 못한다나... # 판단은 각자 알아서. [34] 도쿄대 도서관에서 영구 대출하는 형식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논란이 좀 있었다.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도 굳이 돌려줘도 되지 않아도 되는 걸 한국 소유를 인정하고 덜컥 반환해버리면 일본에서도 논란이 생기는지라 영구 대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고로 사실상 한국에 반환된 것. 비슷한 예시로 병인양요로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문서들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는 자국 내 헌법상 영구 대출이 불가하기에 5년 간 임대, 만기 시 자동 갱신, 갱신 횟수 무제한으로 사실상 영구적으로 대출해 줬다. 말장난으로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간 것. [35] 알게 모르게 불교계에서는 국외에서 떠도는 한국의 문화재 환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실제로 성과를 거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일제 시대에 반출되어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던 북관대첩비의 반환도 초산 스님(한일불교복지협회 이사장)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의 불교 단체가 함께 끈질기게 야스쿠니 신사와 협의하며 환수 운동을 추진한 결과이다. # [36] 양력으로는 10월 13일로, 1604년 10월 17일부터 기록을 남긴 케플러보다 4일 빨랐다. [37] 이 부분은 중국 쪽에서도 대체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말 많은 바이두백과에서도 여진족의 동향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대하여 '在《朝鲜王朝实录》对外国或外族的记录中,最值得一提的是,对女真族的记载最为详细,比起《明实录》或中国其他史书对女真族的记载还要完整。《朝鲜王朝实录》可说是一部研究女真历史文化的重要史料。', "조선왕조실록의 외국이나 외족에 대한 기록 중 특히 여진족에 대한 기록이 가장 상세하고, 명실록이나 중국의 다른 역사서보다 여진족에 대한 기록이 더 완전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여진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대놓고 언급하고 있다. [38] 홀라온(忽剌溫)이라고도 불린다. 내지(內地) 여진의 한 종족으로, 우디커족에 속해 조선에서는 '홀라온 올적합(忽刺溫兀狄哈)' 또는 '혐진 올적합(嫌眞兀狄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갸온멍거터물(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이나 고론두란터물(이지란)과 함께 태조 이성계를 따랐던 여진 추장의 하나로 구쥬(古州, 영고탑 일대)의 골야 키무나(括兒牙乞木那) · 다비나(答比那) · 컬덕거(可兒答哥)가 거론된다. [39] 수분강(綏芬江)이라고도 불렸는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두만강 북쪽에 있고 백두산 아래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 송화강)이 되어 공험진, 선춘령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40] 영고탑(寧古塔)으로 불렸던,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무단장시 녕안(寧安). 발해 상경용천부가 이곳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41] 여진의 부족으로 '숲(Weji)에 사는 종족'이란 뜻에서 부르던 우디케(udike)를 음역한 것이다. [42] 여진 부락의 하나로 통칭 오랑콰이(Orangkhai)로 부르는데, 영락제(永樂帝) 때 건주 본위(建州本衛)를 이 땅에 개설하였다. 흔히 한국어로 북방 민족을 가리켜 쓰이는 단어 '오랑캐'의 어원이 된 그 부족 맞다. [43] 두만강 유역 지금의 회령 인근에서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살던 여진족 부락의 하나. 오도리(吾都里)로도 쓰는데, 태조 이성계를 따랐던 갸온멍거터물(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이 이곳의 만호(투먼)였으며 명이 이 땅에 건주 좌위(建州左衛)를 두었다. [44] 토착 여진족. [45] 두만강 하류에서 수분강까지의 연해 일원에 살던 수올적합(水兀狄哈)으로 동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주업으로 하였다. [46] 두만강 남쪽 즉 조선령. [47] 왕을 가까이서 모시며 호위하는 것. [48] 누르하치라는 단어를 음차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 [49] 두만강 북쪽(바깥쪽) 즉 지금의 중국 길림성령. [50] 원명은 옴회(Ombo)로 지금의 함경북도 회령. [51] 조선에서 중국 출신으로 여진 사회에서 그 기반을 확보한 사람을 말함. 대개 포로된 노예 출신이 여진 여자와 결혼한 경우가 많았음. [52] 행성밑 [53] 전근대 일본에 있어서 아카이브즈(기록 사료)와 관리-와타나베고이치 # [54] 이성계의 무용이 상당히 과장되었다. 큰 곰 서너너덧 마리를 모두 화살 한 개로 죽인다. 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52 [55] 정도전의 최후 부분에서는 앞에서는 비굴하게 죽었다고 나오는데, 뒤에는 죽기 전 아들 정담과 나눈 대화 및 읊었다는 시의 내용을 보면 같은 사람이 쓴 시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당당하다. [56] 연산군 문서에도 있지만, 연산군일기에 이런 문제가 좀 많은 편이다. [57] 민수란 사관이 대신들의 잘못을 많이 써놓았다가 이 때문에 대신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 사초를 보관한 자기 친구에게 부탁해서 기록을 고쳤다가 들킨 사건이다. [58] 개수실록 등이 당파싸움의 산물이라면 원래의 실록 역시도 당파싸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59] 이후 민인생은 실록에 2번 더 등장하는데, 태종 9년에 기생을 끼고 금성현령 (지금의 평강군)으로 부임을 하다가 파면당했고, 세종 10년엔 한성부 판관으로 사헌부에 개기다가 국문당한다(…) 참고로 사헌부에 개긴 이유가 모란이란 이름의 한 여성을 민인생이 감금했는데, 자세히 보니 감금될만한 죄가 아니어서 더 알아보고자 하려는 것을 민인생이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태종에게 보고했더니, “그자식 디게 선넘네”라며 국문을 허락했던 것. [60] 태종: “ 전에 사관 민인생이가 경연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가족행사에까지 들어왔었댔지. 그렇게 해괴망측한 짓을 한 것도 모자라서 나 매사냥 나갔을 때도 얼굴 숨긴채로 미행하고, 심지어 내전까지 들어와 야단해서 내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늬들마저 그러겠단 얘기냐 지금?? [61] 그러나 이런 기록정신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 약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왕이 '적지 말라'라고 한 것도 적는 중뿔(中뿔)난 사관은 태종 때의 일이고, 영조·정조 때의 사관들은 적지 말라고 말하는 건 적지 않았다. 가장 심해지는 건, 세도정치기로 일성록·승정원일기와 실록이 전혀 다를 지경이다. [62] 참고로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공문서 아카이브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더 높고 분량도 더 방대하다. 해서 승정원일기와 실록의 기록이 다를 경우, 승정원일기 쪽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승정원일기 기반으로 실록을 해석한다. 참고로 승정원일기에는 '적지 말라'라고 적는 정도를 넘어서서 '적지 말라고 하셔서 적지 않았다'라고 적는 눈 가리고 아웅에 가까운 기록까지 빈번하다. [63] 사족으로 이덕일은 역사학자면서 실록도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천해(李天海) 관련 부분이다. 《조선왕 독살사건》 서문에서 경종에 대한 충성심 가득한 이천해의 목숨을 건 흉역 운운하며, 그 말이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데, 좀만 찾아도 이천해가 영조를 상대로 무슨 말을 했는지 잘만 나와 있다. [64] 알쓸신잡에서 김영하가 한 말에 따르면 CD 발매 당시 수십만 원에 달하는 CD를 한국의 모든 작가들이 사려고 안달났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특정 소재 하나만 검색어에 입력하면 관련기록이 바로 나오니 시대배경, 등장인물 대략적인 내용까지 플롯이 그대로 짜여 나와, 이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과 교양서들이 쏟아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65] 다만 이전에도 조선왕조 500년 같은 사극에서 실록의 내용을 반영하기는 했다. 하지만 완역되던 시절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부분을 연려실기술에 의존했다. [66] 다만 '용의 눈물'에서는 태조 왕건이 이성계에게 진노했다는 기록이나 함흥차사, 양녕대군 양보설이 같이 실려있기 때문에 실록만 반영하지 않고 연려실기술의 내용도 다소 참고해서 쓴 작품이기는 하다. [67] 다만 씁쓸하게도 서울시스템이라는 회사에서 조선왕조CD롬으로 얻은 수익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CD 자체는 잘 팔렸지만 대부분이 불법복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68] 특히 흔해빠진 궁궐 말고 성균관이나 도화서 같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생소한 배경을 사용하는 경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많이 참고한다고 한다. [69] 당연히 사관의 기록과 이후의 기록 또한 선조가 칠천량 해전의 패배의 책임(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히고 원균이 조선 수군을 거의 말아먹은것.)을 면피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시대상 반응, 그리고 임진왜란때 원균이 거의 이순신 버스에 탄 행위만 잔뜩 있고 정만록에는 원균이 같은 나라의 민간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도 저질으며 이순신의 기록 난중일기에도 이에 대한 사료(원균이 조선 어부들을 일본인으로 위장시켜 수급베기 이를 목격한 이순신이 원균에 대한 일을 상소를 조정에 올려 원한을 받는다.)가 있다. 이런 기록들이 있어도 궤변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이순신이 역사를 고쳤다고 또 다른 궤변을 주장할 뿐이다. [70] 이 점 덕분에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도 상당한 미남으로 추정되는데 일화에 따르면 어릴적(4살)에 아버지를 잃은 헌종은 자기 아버지 얼굴을 몰랐는데 그래서 어느 날 물어봤더니 신하가 (대충)" 전하랑 닮았는데 전하가 더 미남이십니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하자 거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71] 후술하겠지만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치하에서 편찬하여 전통 편찬 과정과 달리 편찬하고 왜곡된 기사가 다수 첨부되었기에 다른 실록들과 다르게 취급하는 경우가 잦다. [72] 수양대군을 전부 '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종 사후가 아닌 세조 사후에 편찬된 것이다. 또한 다른 실록과 일기에는 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었지만, 노산군일기에는 전혀 없다. 때문에 세조 사후에 편찬된 사실만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을 뿐, 정확한 편찬 시점은 불분명하다. [73] 한 달에 한 번씩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 후대의 가필이 들어갈 여지가 적어서, 당파적 논쟁이 심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할 때 중립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 [74] 개인문집은 당연히 주관적 시각이 많이 들어가 있고 객관적 사실에 관한 오류 가능성 또한 있으나, 그런 점은 연구시 당연히 고려된다. 윤치호는 구한말부터 지속적으로 일기를 작성했는데, 윤치호처럼 중요한 인물이 일제강점기 내내 장수하면서 매일 정세를 기록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근대사 연구에 애용되고 있다. [75] 삼국시대로부터 500년, 발해와 통일신라 멸망으로부터 20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게다가 고려는 건국 초기 극심한 혼란으로 인해 기록된 내용이 빈약했다. [76] 조선왕조실록도 같은 과정을 통해 없어질 뻔 했다. 선술한대로 임진왜란 당시 전주의 유생인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 사재를 털어 전주사고의 실록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조선전기 실록은 전부 유실됐을 것이다. 이 전쟁에서 고려실록은 완전히 유실됐다. [77] 세종실록 천문현상 관련 기사, 선조실록 천문현상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