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7e2f22><colcolor=#ffd400> 문숙공(文肅公)
변계량 卞季良 |
|
출생 | 1369년 |
사망 | 1430년 |
본관 | 밀양 변씨 |
자 | 거경(巨卿) |
호 | 춘정(春亭) |
시호 | 문숙(文肅) |
[clearfix]
1. 개요
고려 후기,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자는 거경(巨卿)이고, 호는 춘정(春亭)이며, 시호는 문숙(文肅). 변중량의 동생이기도 하다.2. 생애
어릴 적부터 매우 명민하여 4세의 나이에 고시(古詩)를 외고, 6세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1] 1382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하였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비순위정용랑장겸진덕박사가 되었다.조선 초기 기틀을 마련한 경세가이다. 예조판서를 거쳐 집현전 대제학[2]을 약 20년 간 역임하였으며,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한 명문장가로 유명하였다. 당시 실용주의자로서 기여를 많이 하였는데, 태조실록, 국조보감, 고려사 등 역사서 편찬에도 많이 참여하였다. 한 마디로 천재..
다만 흠이 한 가지 있었다면 굉장한 구두쇠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평소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빌려준 적이 없고, 오이 한 개를 먹어도 자신이 먹은 부분에 표시를 해 놓아 다른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했고, 친구가 찾아와서 술을 대접할 때도 친구가 술을 몇 잔 마시는지 일일이 세다가 술이 다 떨어지겠다 싶으면 그대로 술병 마개를 덮어버렸다. 이런 짓을 상대가 뻔히 보는 앞에서 대놓고 벌이니 친구 중에는 한 자리에 있다가 빈정이 상해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청주 흥덕사에서 국조보감 편찬 작업을 주관할 때 세종이나 다른 재상들이 수고 많다고 격려조로 자주 귀한 음식들을 먹으라고 보내줬지만 변계량은 그걸 먹지 않고 곱게 싸서 차곡차곡 벽장에 쌓아두기만 했다고 한다. 그 쌓인 음식들이 다 썩어서 구더기를 까고 내버릴 지경이 되어도 그냥 골짜기 같은 데에 버리고 말지 휘하에 부리는 아랫사람들한테 결코 주지 않았다.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그의 부친인 변옥란, 형 변중량의 업적을 기린 밀양 변계량 비각이 있다.
우리에게 전해진 여말선초의 정식 기록이라 할 태종 시기의 《 태조실록》, 세종 시기의 《 정종실록》, 《 태종실록》, 《 고려사》 편찬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위의 기록들은 고려를 말기에 이르러 혼란하고 망해 마땅한 나라로 묘사하고, 난세의 영웅인 이성계가 몰라본 아들 태종이 탁월한 후계자로 그려지도록 묘사한 기록들이다. 특히 ' 위화도 회군, 왕자의 난에서의 왜곡이 의심되는 묘사'[3]와 '실록의 신뢰성의 근거가 되는 태종의 인간적인 기록들'을 절묘히 배합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태종과 세종이 모두 그에게 위의 사서 편찬을 맡겼다. 그런데 이숙번과 신덕왕후 적첩논쟁을 할 때에는 약을 먹었는지 태종이 후궁이라고 거의 지정한 신덕왕후를 적(嫡)-정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번외로 양녕대군이 말썽을 피웠을 때 그를 위해 반성문을 대신 작성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