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6:31:20

변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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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文肅公)
변계량
卞季良
출생 1369년
사망 1430년
본관 밀양 변씨
거경(巨卿)
춘정(春亭)
시호 문숙(文肅)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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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자는 거경(巨卿)이고, 호는 춘정(春亭)이며, 시호는 문숙(文肅). 변중량의 동생이기도 하다.

2. 생애

어릴 적부터 매우 명민하여 4세의 나이에 고시(古詩)를 외고, 6세에 글을 지었다고 한다.[1] 1382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하였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 비순위정용랑장겸진덕박사가 되었다.

조선 초기 기틀을 마련한 경세가이다. 예조판서를 거쳐 집현전 대제학[2]을 약 20년 간 역임하였으며,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한 명문장가로 유명하였다. 당시 실용주의자로서 기여를 많이 하였는데, 태조실록, 국조보감, 고려사 등 역사서 편찬에도 많이 참여하였다. 한 마디로 천재..

다만 흠이 한 가지 있었다면 굉장한 구두쇠였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평소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빌려준 적이 없고, 오이 한 개를 먹어도 자신이 먹은 부분에 표시를 해 놓아 다른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했고, 친구가 찾아와서 술을 대접할 때도 친구가 술을 몇 잔 마시는지 일일이 세다가 술이 다 떨어지겠다 싶으면 그대로 술병 마개를 덮어버렸다. 이런 짓을 상대가 뻔히 보는 앞에서 대놓고 벌이니 친구 중에는 한 자리에 있다가 빈정이 상해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돌아가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청주 흥덕사에서 국조보감 편찬 작업을 주관할 때 세종이나 다른 재상들이 수고 많다고 격려조로 자주 귀한 음식들을 먹으라고 보내줬지만 변계량은 그걸 먹지 않고 곱게 싸서 차곡차곡 벽장에 쌓아두기만 했다고 한다. 그 쌓인 음식들이 다 썩어서 구더기를 까고 내버릴 지경이 되어도 그냥 골짜기 같은 데에 버리고 말지 휘하에 부리는 아랫사람들한테 결코 주지 않았다.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에 그의 부친인 변옥란, 형 변중량의 업적을 기린 밀양 변계량 비각이 있다.

우리에게 전해진 여말선초의 정식 기록이라 할 태종 시기의 《 태조실록》, 세종 시기의 《 정종실록》, 《 태종실록》, 《 고려사》 편찬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위의 기록들은 고려를 말기에 이르러 혼란하고 망해 마땅한 나라로 묘사하고, 난세의 영웅인 이성계가 몰라본 아들 태종이 탁월한 후계자로 그려지도록 묘사한 기록들이다. 특히 ' 위화도 회군, 왕자의 난에서의 왜곡이 의심되는 묘사'[3]와 '실록의 신뢰성의 근거가 되는 태종의 인간적인 기록들'을 절묘히 배합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태종 세종이 모두 그에게 위의 사서 편찬을 맡겼다. 그런데 이숙번과 신덕왕후 적첩논쟁을 할 때에는 약을 먹었는지 태종이 후궁이라고 거의 지정한 신덕왕후를 적(嫡)-정실이라고 주장하였다.

번외로 양녕대군이 말썽을 피웠을 때 그를 위해 반성문을 대신 작성해주기도 했다.

3. 대중매체


[1] 그의 스승이 바로 고려 말 대표적인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 이색이었다고. [2] 관등은 정 2품이나, 정승보다도 융숭한 대접을 받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명예직이자 사대부들의 로망. 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의 자리라고 보면 된다. [3] 그외에 이방석과 고려 우왕이 민가의 가축을 사냥했다는 기록이 겹치는 등..물론 사실일 수도 있으나 사실일 경우 이성계는 자신이 몰아낸 폭군과 동일한 짓을 한 철부지를 세자로 세우고 감싸고 돌았던 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