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捕盜廳謄錄. 조선 영조 51년인 1775년부터 고종 27년인 1890년까지 약 115년간 포도청에서 있었던 모든 업무 상황과 직무 처리 내용 등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매일 기록하여 남긴 일일 업무 일지. 총 50책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2. 내용
포도청은 한국사 최초의 도심 치안 전담 기구로, 1829년 만들어진 런던 경찰청, 1881년 만들어진 파리 경찰청보다 약 300여 년 앞서 설치된 기관이다.포도청등록은 이러한 포도청의 제반 사무와 일상 업무 내용 등을 모두 일기의 형식으로 담아낸 책으로, 원래는 중종 때부터 시작하여 수백여 년간 많은 양의 책을 저술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지금은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1775년부터 1890년까지 약 115년간의 내용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좌포청등록 18책, 우포청등록 30책, 좌우포청등록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청일기, 친국일기, 추국일기, 정국일기, 추안급국안 등과 함께 조선 시대 죄인들의 법적 처리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는다. 특히 공초 중심인 추안급국안과 공초 이외에 다른 각종 문서가 수록된 포도청등록은 서로 상호 보완적인 형태를 띄는 연구 자료로서 조선 법제사 연구에 중요하게 사용된다.
3. 번역
2001년에 포도청등록에 나와 있는 내용 일부를 번역하여 책으로 나왔다. 네이버 책 : 너희가 포도청을 어찌 아느냐. 조선 시대의 경찰과 범죄
머리말 출처
포도청을 통하여 조선 시대 사회상을 본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다. 포도청은 도둑을 잡는 기관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폭넓은 기관이기 때문에 포도청의 역할만 봐도 그 시대상을 거의 다 살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포도청은 백성들과 가장 밀접하게 접해 있으면서, 한편 임금을 비롯한 권력기구와도 직접 연관되어 있는 기구였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포도청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의 고문이나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포졸은 백성들의 원성만을 사는 원악(元惡) 향리로 인식되어 있다. 이는 일제 식민 시대의 잔재를 거쳐 내려온 잘못된 인식으로서, 오늘날 경찰에 대한 부정적 요소가 거의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우리 포도청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전문 포도 기관은 없다. 1828년에야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근대식 경찰인 파리 경찰청과 런던 경찰청이 생겼는 데 비해 포도청은 그보다 300년 이전인 1500년대에 이미 설치되었다.
물론 <경국대전>에는 포도청 규정이 없었으나, 성종 때 도적의 발호를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포도장을 운영하다가 중종 때 항구적으로 만든 포도기관이 포도청이다. 이러한 포도청도 양란을 겪고 난 뒤 사회가 안정되자 왕권을 수호하는 기관의 역할도 하게 된다.
그것은 무관이 포도청을 운영하고 지방의 토포영도 군사조적이 겸하면서 경찰권과 군관이 하나로 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특히 대궐에서도 포도대장이 왕을 호위하고 왕의 명령을 직접 전달받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범죄도 다양해지고 그만큼 포도청의 역할도 커진다. 지방에서 검거되는 모든 중요한 범죄는 서울의 포도청으로 오게 되고, 포도청은 형조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법기관에 죄인을 송치한다.
그 범죄 수사 기록이 방대한 <포도청 등록>으로 남아 있다. 이 <포도청 등록>은 영조 때부터 고종 때 임오군란 직후까지의 기록인데 절도, 강도는 물론이고 사전 주조, 인삼 밀래, 국경의 잠상 행위, 밀도살 등 모든 사회상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천주교 박해 때의 신문 기록을 보면 ‘죽으면 바로 천당에 가니 죽여 달라’는 애절한 소원도 보인다.
이러한 포도청은 1984년 갑오개혁 때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크게 변한다. 그러나 포도청만은 서울의 5부 조직을 그대로 두고 이름만 경무청으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다만 신경찰 제도를 도입하여 점차 서구식으로 제복과 명칭을 바꿔나갔다.
이 경무청은 1910년 나라를 뺏기기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오늘의 경찰과 같은 기구를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의병을 탄압하고 나라를 잃게 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로부터 또 100년이 흘렀다.
포도청이 맡던 순라 제도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새로운 신종 범죄를 다루는 것도, 범죄 처리를 형조에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포도청이 습격당하고, 포졸이 곤혹을 치르는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방에서 관찰사와 수령의 지시 아래 포도에 나서는 것도 제도상으로는 비슷하다.
이와 같이 포도청을 통해서 조선 시대를 바라보면 그 시대 백성들의 삶과 함께 오늘의 경찰을 다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후략)
포도청을 통하여 조선 시대 사회상을 본다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다. 포도청은 도둑을 잡는 기관일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법을 집행하는 폭넓은 기관이기 때문에 포도청의 역할만 봐도 그 시대상을 거의 다 살필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포도청은 백성들과 가장 밀접하게 접해 있으면서, 한편 임금을 비롯한 권력기구와도 직접 연관되어 있는 기구였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포도청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의 고문이나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포졸은 백성들의 원성만을 사는 원악(元惡) 향리로 인식되어 있다. 이는 일제 식민 시대의 잔재를 거쳐 내려온 잘못된 인식으로서, 오늘날 경찰에 대한 부정적 요소가 거의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우리 포도청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전문 포도 기관은 없다. 1828년에야 제복을 입고 칼을 찬 근대식 경찰인 파리 경찰청과 런던 경찰청이 생겼는 데 비해 포도청은 그보다 300년 이전인 1500년대에 이미 설치되었다.
물론 <경국대전>에는 포도청 규정이 없었으나, 성종 때 도적의 발호를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포도장을 운영하다가 중종 때 항구적으로 만든 포도기관이 포도청이다. 이러한 포도청도 양란을 겪고 난 뒤 사회가 안정되자 왕권을 수호하는 기관의 역할도 하게 된다.
그것은 무관이 포도청을 운영하고 지방의 토포영도 군사조적이 겸하면서 경찰권과 군관이 하나로 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특히 대궐에서도 포도대장이 왕을 호위하고 왕의 명령을 직접 전달받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범죄도 다양해지고 그만큼 포도청의 역할도 커진다. 지방에서 검거되는 모든 중요한 범죄는 서울의 포도청으로 오게 되고, 포도청은 형조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법기관에 죄인을 송치한다.
그 범죄 수사 기록이 방대한 <포도청 등록>으로 남아 있다. 이 <포도청 등록>은 영조 때부터 고종 때 임오군란 직후까지의 기록인데 절도, 강도는 물론이고 사전 주조, 인삼 밀래, 국경의 잠상 행위, 밀도살 등 모든 사회상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천주교 박해 때의 신문 기록을 보면 ‘죽으면 바로 천당에 가니 죽여 달라’는 애절한 소원도 보인다.
이러한 포도청은 1984년 갑오개혁 때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크게 변한다. 그러나 포도청만은 서울의 5부 조직을 그대로 두고 이름만 경무청으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다만 신경찰 제도를 도입하여 점차 서구식으로 제복과 명칭을 바꿔나갔다.
이 경무청은 1910년 나라를 뺏기기까지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오늘의 경찰과 같은 기구를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의병을 탄압하고 나라를 잃게 하는 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그로부터 또 100년이 흘렀다.
포도청이 맡던 순라 제도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새로운 신종 범죄를 다루는 것도, 범죄 처리를 형조에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포도청이 습격당하고, 포졸이 곤혹을 치르는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방에서 관찰사와 수령의 지시 아래 포도에 나서는 것도 제도상으로는 비슷하다.
이와 같이 포도청을 통해서 조선 시대를 바라보면 그 시대 백성들의 삶과 함께 오늘의 경찰을 다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후략)
4. 외부 링크
-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 : 포도청등록
-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 : 우포청등록
-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 : 좌포청등록
- 한국 민족 문화대백과 : 좌우포청등록
- 동아일보 : 조선 시대 서울의 범죄 실태 밝혀져
- 기독교 교구별 성지 일람 - 포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