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왕립 사찰 |
일제강점기의 불교 31본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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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傳燈寺 | Jeondeung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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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설립일 | 381년( 소수림왕 11년)[1] |
소속국가 | 대한민국 |
주지 스님 | 여암 |
위치 |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온수리 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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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 | |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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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전경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에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뒤로는 인천 소속 사찰이 되었다.
전라도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불교의 세력이 약한 지역인 인천 내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사찰이기도 하다.
2. 상세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 고려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프랑스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3.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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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8호 강화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 강화 전등사 철종(鐵鍾)
보물 제1785호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보물 제1786호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
보물 제1908호 묘법연화경 목판(2016)(妙法蓮華經 木板)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藥師殿 現王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4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후불탱(藥師殿 後佛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강화 전등사 청동수조(靑銅水槽)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7호 강화 전등사 업경대(業鏡臺)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8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수미단(大雄寶殿 須彌壇)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7호 강화 전등사 약사전 석불좌상(藥師殿 石佛坐像)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1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신중도(大雄寶殿 神衆圖)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2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후불탱(大雄寶殿 後佛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강화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講說堂 阿彌陀佛幀) -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7호 강화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보물에 지정된 철제 범종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종들 중에서는 유일한 중국 종이다. 원래는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2]의 종이었고[3]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배를 통해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후 낙오되어 인천에 남지 않았는가 추측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말 당시 전등사의 원래 범종이 공출당했고, 해방이 되자 주지스님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항구를 뒤지고 다녔는데 누군가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종이 하나 있더라.' 하고 알려주었다. 물론 원래의 범종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주인 없는 채로 군기창[4]에 버려졌다면 곧 녹여져 무기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가져왔고 현재까지 전등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178호 대웅전에는 보물 1785호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 있고 좌상의 위에 극락조와 용등을 장식한 닫집이 화려하다. 건물바깥 추녀의 네 귀퉁이의 나부상(裸婦像)이 유명한데, 광해군 시절 화재로 소실된 대웅전을 재건축하던 목수가 절 아래의 주막 주모와 눈이 맞아 돈을 맡겨두었으나 주모가 돈을 들고 튀었고, 이에 목수가 " 주모는 영원히 무거운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면서 속죄하라,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여색을 경계하라"는 뜻에서 만들어 넣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관련 기사 또는 정화궁주를 질투하고 핍박한 제국대장공주를 비판하기 위해, 제국대장공주를 나체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네귀퉁이에 각각 처마를 떠받드는데, 웃는 표정과 우는 표정이 있고 그중 하나는 두 손이 아닌 한 손만 들고 있으면서 눈이 파랗게 칠했음이 특이하다. 파란눈은 불교미술에서 나찰의 특징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야차상으로 다른 절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보이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4. 은행나무 설화
때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 때문에 매년 조정의 은행알셔틀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마저도 싹 다 털어 진상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것 또한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관가에서 '조정에 진상할 전등사 은행알의 양을 크게 늘리겠다.'며 20가마니를 요구했다. 안 그래도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해서 전등사는 난리가 났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씨도 안 먹힐 게 뻔하고, 그렇다고 탁발해서 모자란 양을 보충하자니 '좋은 은행은 승려들이 다 먹고 탁발한 은행들만 진상했다.'고 트집잡힐 게 뻔하니, 이래저래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신통력이 있는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불러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도착하자,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3일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전등사 안은 소문을 듣고 구경을 하러 온 강화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관속 몇 명이 소문을 듣고 나타나서 구경꾼들의 틈에 끼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설마 공물 셔틀 하기 싫다고 저주 퍼붓는 거 아니냐"고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어허,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상감께 진상할 은행이 곱절로 열리게 기도하는 것이오." 하고 답했다. 그 관속이 비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ㅋㅋ 그런다고 은행이 더 열릴 것 같은가? 참 웃기는군." 하자마자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그는 한쪽 눈이 팅팅 뿔어 실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이 더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사흘째, 기도가 거의 끝나자 목탁과 바라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염불 소리도 멎어 전등사에 적막이 흘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추송선사가 은행나무를 향해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2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끝맺었다. 이를 듣고 있던 승려들과 구경꾼들은 "어 이거 뭥미? 은행을 곱절로 열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 은행나무 2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하긴 진상으로 바칠 은행알이 아예 한 알도 안 열리게 되었으니...[5] 그리고 오늘날도 은행을 맺지 않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5. 기타
유튜브 채널이 있다. # 홍진경[6]이 여기서 본인의 유튜브 채널인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구독자 50만 공약으로 <스터디 위드 미>를 촬영했는데, 여기서 지불 스님[7]에게 "전등사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가 5천 명이 넘으면 반야심경 독송 좀 부탁드린다"고 요청했고 스님이 수락, 이후 전등사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가 실제로 5천 명을 넘으면서 공약을 지켰다. # 현재 전등사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5만 명이다.6. 사진
일제강점기 전등사 전경 - 출처:국립중앙박물관[8]]
일제강점기 전등사 대웅보전 - 출처:국립중앙박물관[9]]
일제강점기 전등사 약사전 - 출처:국립중앙박물관[10]]
[1]
1621년(
광해군 13년) 재건.
[2]
해당 사찰은 남북조시대때 지어져 청나라때 버려졌다가 일제 점령기때 완전히 철거되었었다. 이후 1990년대에 복구되었다.
[3]
종 몸체에 명문이 있는데,
북송 철종 소성 4년(1097, 고려
숙종 2년)에 주조되었다고 하였다.
[4]
대한제국 당시 군의 물자를 보관하고 맡아보던 기관
[5]
다만 현실이라면 그런 거 없다. 일반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공물마저도 해당 지역의 특산물이 아닌 생판 엉뚱한 것으로 책정되는 와중에, 대놓고 탄압당하는 불교에게 은행나무가 없다고 은행을 그만 바치게 할 리가 없다. 물론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들어야 하지만...
[6]
홍진경은 원래
불자였다가, 결혼 직후 남편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7]
전등사 총무 담당 스님이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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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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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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