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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역사/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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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차대전 전후 타이완 섬3.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현실4. 중화민족주의 대만민족주의5. 타이완(중화민국)의 현대 정치사
5.1. 국민당의 3당 훈정 체제5.2. 민주화, 그리고 그 이후
6. 둘러보기7. 관련 문서

1. 개요

이 문서에서는 1945년에 타이완 섬 중화민국 영토가 된 시점부터 타이완 섬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2. 2차대전 전후 타이완 섬

1943년 카이로 선언을 통해 중화민국은 승전하면 1895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타이완 섬을 반환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국민정부는 이에 따라 행정원에 대만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당시 중화민국 육군대학(현 중화민국 국방대학) 교장이었던 천이(陳儀)를 주임위원으로 두어 일제 치하 대만의 상황에 대해 조사했다. 그가 이 임무를 맡은 것은 그가 일본 유학 경험이 있고, 1935년에 그가 푸젠성 주석으로 있을 당시에 일제가 대만 통치를 홍보하기 위해 대만에서 개최한 박람회인 '시정 40주년 기념 대만박람회'에 파견된 것을 계기로 일제의 대만 통치를 푸젠성 통치의 모범으로 삼으며 나름대로 연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정부는 일제 패망 직후 정부 인사 중에서 대만을 가장 잘 아는 천이를 대만으로 파견했다. 본래는 대만이 중화민국 영토가 된 시점부터 대만에 따로 타이완성(省)을 설치했지만, 중일전쟁으로 전 국토가 개판이 된 중국에서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에 일반적인 성정부를 세워 행정력을 발휘하기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기에, 대신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臺灣省行政長官公署)를 타이완 섬에 설치하고,[1] 8월 29일에 천이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및 경비총사령으로 임명했다. 그는 10월 24일에 타이베이에 도착해 이튿날 대만 총독 안도 리키치의 항복을 받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바탕으로 타이완 섬에서 사실상의 군정을 행했다. 대만 총독의 항복과 동시에 대만총독부가 해체되고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가 행정권을 인계받아 업무를 개시했지만, 하부 기관과 행정조직의 접수까지 온전히 완료된 것은 아니었기에 이들 기관에 대한 접수는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되어 1946년 2월에 완료되었다.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 미 국무부, 중국백서
대만일치시기 시절 일제의 대만 통치는 조선에 비하면 온건했다. 하지만 본질은 식민지였기에 대만인들은 2등 국민 취급을 당했고, 더군다나 전쟁이 터지면서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 등은 대만 민중의 삶을 더 고달프게 했다. 그렇기에 일본이 물러가고 중국국민당 국부군이 대만에 진주했을 때, 꽤 많은 대만인들은 자신과 같은 한족인 국민당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정부 국공내전으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 데다가, 저렇게 조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대륙의 역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대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국민당원은 대만인( 본성인, 1945년 이전부터 대만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들을 일제의 중국 침략에 협조한 잠재적인 조력자 정도로 간주하고 있을 정도였다.

타이완 섬 정부의 요직은 말도 안 통하는 외성인(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와 정착한 사람들)[2]들이 차지하였고, 그나마 차지한 소수 본성인들의 임용도 본토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더불어 일제가 대만에서 물러가면서 많은 공장 및 기업들을 남기고 갔는데 이를 국민정부가 접수하면서 죄다 자신들과 연줄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불하했기 때문에(물론 외성인이다.) 본성인들은 다시 2등 국민으로 전락하며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대만이 국공내전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에 국민당이 갈등을 조정할 유능한 인재를 대만에 파견할 수 없어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수도 없었다.

본성인들은 국민정부의 대만 통치에 배신감을 느꼈고, 실망감 역시 매우 커졌다. 당시 돌았던 "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라는 말이 당시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데, 일본인은 개 같이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 같이 대만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7년 2월에 한 여성의 담배 판매를 강압적으로 단속하자[3]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2월 28일 경찰이 이들에게 발포하면서 타이완 섬 전역에서 국민정부의 막장 통치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이것이 2.28 사건이다.

2.28 사건은 결국 국민정부의 유혈 진압으로 종료되었다. 2.28 사건으로 인해 타이완 섬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통치가 필요함을 느낀 국민당은 타이완성 행정장관공서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타이완성 정부를 설치하여 웨이다오밍(魏道明)을 첫 성 주석(성의 최고책임자)으로 임명했다. 그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구 대만 달러를 신 대만 달러 디노미네이션하는 등 타이완 섬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다.

1947년에는 다른 중국 내 지역들처럼 국민대회 입법원 및 감찰원 선거가 실시되어 타이완성 대표가 선출되었고[4] 1948년부터는 정식으로 헌정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 시점부터 국민정부 홍군에 밀려 중국 대륙을 잃어가고 있었고, 이에 따라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이 시행되어 헌정은 중단되었다. 1949년 5월 15일에는 타이완성에 대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2월에는 결국 전세를 뒤집지 못한 국민정부가 타이베이로 피난하는 국부천대가 이루어졌다.

3. 국부천대 이후 중화민국의 현실

대만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중국 국민당의 생존은 암담해보였다.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준비했으며, 이전부터 국민당 정권을 엄청나게 부정적으로 봤던 미국은 공산당 쓸어버리라고 국민당에 지원을 해주기는 했는데 국민당이 대책 없이 중국 대륙에서 밀려나는 것을 보고 미련 없이 끊었고, 트루먼 대통령이 공공연히 타이완 섬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다. 자료 이 때 CIA도 얼마 못 가 대만 섬도 공산당에 점령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공화당 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의 무관심이 중국 대륙을 공산화했다며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트루먼은 미군 파병을 결정함과 동시에 대만 해협에 항공모함을 띄워 공산당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대만 침공을 위한 중공군 부대는 6.25 전쟁에 투입되어 소모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대만 침공을 포기해야 했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은 이런 역사 때문에 서로를 불법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서로의 헌법에는 " 쟤들 땅도 내 땅"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중화민국과 중화 인민 공화국의 영토 수복 기도는 1950년대에도 이어졌으며, 특히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금문도 포격사건이 발발하여 44일간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다.

국공 내전 직후 중화 인민 공화국은 주로 공산권과 제3세계 비동맹권에서만[5] 인정을 받았다.[6] 대외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중화민국이 중국의 대표로서 UN 상임 이사국 자리도 차지하고 세계 각국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등 외교적으로 인정 받는 국가였지만…

1971년 중공이 죽의 장막을 걷어 치우고 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 대만 인정 안 하고 중국하고 무역하기 vs 중국 인정 안 하고 대만하고 무역하기"를 들이밀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데탕트로 중국과의 핑퐁 외교에 나섰고, 이를 위시로 전 세계의 나라들이 다 같이 "대만 인정 안하고 중국하고 무역하기"를 선택하면서 전 세계에서 외교 관계가 뚝뚝 끊겨져 나가 고립 당하기 시작하였다. 중공이 UN에 가입하면서, 중화민국은 중국 정통 정부의 자격, 상임 이사국 자격을 모두 박탈 당하고 중공에게 그 권리가 이전되면서 UN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갔고, 그 이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돈의 힘으로 후진국에 경제 원조를 해줘서 몇몇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지금은 바티칸 시국을 포함하여 총 13개국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 중화민국/외교 문서 참고) 물론 거기에 가장 경제력이 좋은 나라는 남미의 파라과이 뿐. 게다가 지금 유지하는 나라들도 중공과 수교하면 다시 또 단교하는 상황이 계속 늘고 있다. 라이베리아나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우 3번이나 단교했을 정도.

그 이후 중화민국은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교국 늘리기 경쟁을 계속하다가, 2008년 취임한 국민당의 마잉주 총통은 더 이상의 수교국 확대를 늘리기 위한 외교 투자를 중단하겠다고 하였으며, 본토도 이에 동의하여 이후 마잉주가 퇴임할 때까지 수교국의 수가 변화하는 일은 없었다.[7] 대륙의 수교국 쟁탈 시도는 마잉주가 퇴임하고 국민당이 정권 연장에 실패하면서 재시작되어 대만은 차이잉원 취임 이후 수교국 2개를 뺏겼다.[8]

어찌되었든 간에 현재 중화민국은 이런 식의 수교국 감소는 물론, 올림픽에서도 중공의 압박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와야 하며 자국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쓰지 못하고 국가도 못 부른다.[9]

4. 중화민족주의 대만민족주의

원칙적으로 타이완 섬을 비롯한 여러 섬을 영토로 삼고 있는 이 국가의 공식적인 명칭은 '중화민국'이며 '타이완 섬'은 중화민국의 일개 지방이고 '타이완 성'도 일개 행정 구역인 성(省)에 불과하다. 그리고 중화민국은 국부천대 이후부터 중국 대륙과 하나임을 주장하며 궁극적으로는 양안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기서 통일은 중화민국 위주의 통일이거나 중화민국과 대륙의 대등한 관계로서의 통일, 그리고 민주국가로서의 통일이다. 타이완 사람들의 주류 민족인 본성인도 결국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오랫동안 타이완에서는 중국 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타이완은 중국사로 편입된지 400여 년밖에 안 되었고, 무엇보다 내셔널리즘이 고취되기 시작한 근대를 일제 식민지로 지냈다. 그리고 중화민국는 아직 명분으로는 전 중국을 대표하는 정통 중국을 자처하여 대만은 공식적으로 중화민국의 한 지방에 불과하지만, 현실은 그곳이 본토나 다름 없다. 보통 한국이나 해외에서 이 나라를 언급할 때는 통칭인 '타이완', '대만'을 쓰지, 굳이 정식 명칭인 중화민국이라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만 사람들도 자국을 공식적으로 이르는 때를 제외하면 굳이 자국을 중화민국이라 칭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따라서 타이완 섬에서는 중화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자국을 중국의 정통 국가로서의 중화민국이 아닌, 명분으로도 대만을 위주로 하는 '대만국(臺灣國)' 혹은 '대만공화국(臺灣共和國, Republic of Taiwan)'으로서의 국가를 갖기를 원한다. 대만이 실질적으로 독립국인데도 대만 독립운동이 주장되는 이유는 '중화 인민 공화국과의 동질성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대륙 정부였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의미도 내포된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강한 건 동아시아 공통이지만 타이완에서는 현대에 들어선 이후 중국 민족주의와 대만 민족주의라는, 서로 다른 내셔널리즘이 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대립해 왔다는 특징이 있다. 중국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국민당의 독재 시절에는 대만 민족주의를 거론하는 사람을 그냥 잡아 가두면 되었지만, 민주화된 지금은 그럴 수 없고, 대만 민족주의 역시 정치적으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다. 최근에는 하도 중국(대륙)과 오래 떨어져 살다보니 대만 내에서의 중국인 정체성 및 중국 민족주의는 급격히 퇴조하고 있다.[10]

5. 타이완(중화민국)의 현대 정치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점, 이후 장기간의 독재, 직선제 후 여당 후보 당선,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한 야당의 정권 획득 2회, 이후 다시 이루어진 과거 여당으로의 정권 교체란 점에서 대만의 정치가 한국과 비슷한 점이 있다.( 중국국민당 참조.) 물론 정당의 수명이나 국회의원 선거 득표율을 보면 다른 점도 많긴 하지만.

5.1. 국민당의 3당 훈정 체제

중화민국은 형식상 민주정과 공화정을 추구하는 국가였지만 건국 직후부터 대륙의 군벌은 소영주처럼 군림하여 중앙 정부 말도 잘 안 듣고 깽판을 벌였고, 나중에는 일제까지 대륙을 다 차지하겠다고 쳐들어와 깽판을 부렸다. 이 혼란기 속에서 중국국민당과 이를 이끄는 장제스 헌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혼란이 종식될 때까지 강한 권위를 가진 국가 정당(국민당)이 국가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에 일당 독재에 기반한 공포 통치를 했다.

2차 대전이 끝나 어느 정도 혼란을 수습한 1946년에 장제스는 3당 훈정의 막후 공작을 추진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을 차례로 초청하여 최고위급 관직 등용을 약속했다. 여기서 3당 훈정은 강력한 총통제와 3개 정당의 연립 내각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형식적인 헌정(憲政)과 실질적인 훈정(訓政)을 동시에 추구하는 1946년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이어 3당 훈정의 여당으로 변신한 중국 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의 정치인들은 연립 내각의 여당으로서 중앙 정부의 장차관으로 출세했다.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은 사실상 중국 국민당의 우당(友黨)이나 다름없어 이미 이 시기에도 일당 우위적 정치 체제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밀린 국민당 정부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해 다시 헌정을 중단했고, 나중에는 전국에 계엄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민 해방군은 각지에서 국민당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전세를 뒤집지 못한 국민당 정부와 장제스는 1949년 12월에 국부천대를 통해 대만으로 피난가게 된다.

대만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1949년 5월이었다. 더불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으로 헌정은 중단되었고, 중화민국의 국가 기관 요직은 모두 국민당, 청년당, 민주 사회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륙에 기반을 둔 청년당과 민주 사회당은 국부천대 이후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는 대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와 국민당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 독재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전국에 선거를 치를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선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퇴각한 직후부터 줄곧 무력을 통한 본토 수복을 포기하지 않았는데[11], 이는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권이 대만 본성인들의 민주화 요구를 계엄령과 권위주의 지배로 억누르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미국과 군사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12],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 정부가 1950년대의 대약진 운동 실패, 1960년대의 문화 대혁명 등으로 인한 정치 - 사회적인 불안정, 소련과의 대립 등 내우외환을 겪고 있었던 점에서 나름 승산이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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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는 이른바 '국광'(國光)이라는 이름의 보다 구체화된 본토 수복 계획을 세우고, 중국 동남부 해상에서 다수의 비밀 군사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키피디아의 관련 항목 그러나 이들 작전의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1970년대 미중 관계 개선과 1971년 중화민국 정부의 UN 축출로 인한 외교적 고립이 가중되면서 더 이상 실행되지 못했다.

덧붙여 이 시기에 타이완의 경제가 눈에 띄게 성장했는데,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릴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자세한 내용(네이버 지식 백과)

1971년 중화민국 정부가 UN에서 축출된 이후 중화민국은 점차 타이완에 토착화되어 갔는데, 1975년 장제스 사망 이후 ( 장제스/생애 문서 참고) 옌자간이 1975년에서 1978년까지 총통 대리직을 맡은 뒤 장징궈가 1978년에 중화민국 총통이 된 이후 그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 장징궈 문서 참고.) 세계적으로 고립되어 가던 중화민국 정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본성인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87년에 대만 계엄령이 해제되었는데, 이것도 이런 유화책 중 하나로 진행된 것. 다만 장징궈도 국민당의 독재 체제에 기반을 둔 인물이라 이때의 중화민국의 대만화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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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민주화, 그리고 그 이후

5.2.1. 리덩후이 시기

리덩후이 1988년에 죽은 장징궈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면서, 중화민국은 완전히 민주화된다. 1991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이 폐지되면서 주권재민이 확립되었고, 1994년에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고 총통 선출을 직선제로 바꾸었다. 1996년에는 첫 총통 직선제가 시행되어 다시 리덩후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탄압은 어느 정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리덩후이 문서 참고.

5.2.2. 천수이볜 시기

2000년에 두번째 총통 선거에서 반세기 동안의 국민당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 진보당의 천수이볜이 당선되었다. 이 시기에 중화민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부하며, 대만 자체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려 했다. 다만 이 시기에 아시아의 4룡이라 불리던 수준의 경제를 말아먹고 당선 직후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내내 레임덕에 시달렸다. 다만 대만 독립 추진에 반발해서 중국이 각종 군사 훈련으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갖은 경제적 압박을 가해서 주변 환경이 어려운 측면도 있었으며, 또한 수십년간 국민당과 밀착돼 있던 기업인과 부호들이 민진당의 경제 개혁 정책에 반발하면서 고의적인 막장 상황을 유도, 방치한 측면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에 따라 2008년 총통 선거에선 마잉주 총통이 당선되었다. 아마 대선 직전의 암살 미수 사건만 없었다면 정권 교체는 4년 일찍 왔으리라...

자세한 내용은 천수이볜 문서 참고.

5.2.3. 마잉주 시기

2008년 총통 선거에서 당선된 중국 국민당 소속 마잉주 총통은, 중화민국을 다시 1949년까지 대륙을 지배했던 경력이 있는 명목상의 중국으로 바꾸어 갔다. 중화 인민 공화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중국이 바라는 일국양제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바가 있다.[13] 하지만 실제로는 3無(무통無統, 무독無獨, 무무無武) 정책을 내세우며 현상 유지를 표방 중. 사실 이건 대다수의 대만인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마잉주 문서 참고.

이 시기에, 지나친 친중국적 정책을 편 국민당 마잉주 정권은 2009년 말에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참패했다. 14 : 3에서 12 : 4로 수치 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득표율에서는 47.88% : 45.32%로 민진당은 1986년 창당 이래 최고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럼에도 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고 중국과의 ECFA(The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 경제협력기본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차이완(Chiwan - China + Taiwan) 시대 개막"이라며 주목을 받았지만 대내적으로는 민진당과 국민 다수의 반발을 받고 있다. 참고로, ECFA는 한마디로 중국-대만 FTA라고 생각하면 된다.

덕분에 2010년 11월경에 이루어질 5대 시장 선거[14]에서도 역시 대패를 할지 모른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태권도에서 양수쥔 사건을 우려 먹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민진당이나 국민당이나 모두 다. 선거 결과는 국민당의 상처 뿐인 승리. 선거 막판에 국민당 중앙 위원이 총에 맞아 다치는 사고로 국민당 표가 집결하면서 다섯 곳 중에 세 곳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에서는 민진당이 49.9%(377만2000여표)를 차지해 국민당의 44.5%(337만9000여표)를 5.4% 포인트 앞섰다. 이건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니여.

이러한 위기감 속에 펼쳐진 2012년 총통 선거와 입법 위원 선거에서는 치열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반중국 노선의 민진당의 집권을 원치 않은 중국의 지지와 대만 해협의 대립 상황을 원치 않은 미국의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국민당이 손쉽게 재집권에 성공하였다(총통 선거에서 과반 이상(51.6%) 득표, 지역구 선거에서 48 : 27의 대승). 하지만 이후엔 마잉주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서 10% ~ 20%대로 나오고 있고 국민당 지지율도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 그의 지지율이 낮은 이유

결국 2016년 제14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소속 후보인 차이잉원이 당선되면서 대만의 정권은 다시 민진당으로 넘어갔다.

5.2.4. 차이잉원 시기

2016년 민주진보당 소속의 차이잉원이 총통에 당선된 이후 중화민국은 남중국해 문제에서 발을 빼는 등 타이완 내정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만, 애시당초 민진당 정권이라, 중화 인민 공화국의 견제를 심하게 받아서 현재 경제 성장률도 낮고 리더십이 흔들리는 등 위기가 찾아오다가 2018년 중화민국 지방선거에서 가오슝조차 참패하는 것까지 겪어야만 했다가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위의 영향으로 재선할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이잉원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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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 성정부와 달리 본토 법률의 대만에서의 적용 여부를 결정하거나 자체적인 법률을 제정하는 등 일반 성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 [2] 대만인(본성인)들이 주로 썼던 대만어는 지금도 (국민당 관료들인 외성인들이 주로 썼던) 표준 중국어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3] 당시 대만에서 담배는 정부의 전매품이었다. 하지만 힘 없는 여성을 상대로 도를 넘는 폭력을 쓴 것이 문제였다. [4] 국민대회 대표는 타이완성의 9개 시와 8개 현에서 기본적으로 1명을 선출하되 인구가 50만을 넘는 타이중현과 타이난현은 2명을 선출하여 19명을 선출하였고, 입법위원은 타이완성이 총 8명의 선출 인원을 배정받아 타이완성 전체를 단일 선거구로 하여 8명을 중선거구제로 선출했다. [5] 세계를 양분한 미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은 인도와 손잡고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6] 노동당 내각의 영국 1950년 이래 중공을 국가로 인정했다. 좌, 우파를 막론하고 영국 정치권은 중공군이 홍콩까지 집어 삼킬까 봐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걷던 프랑스도 중공을 인정하였다. [7] 유일하게 감비아가 대륙과의 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했다. 그러나 대륙이 마잉주와 국민당을 배려해 수교를 일단 거부하면서 그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8] 국민당 정권 때는 일단 보류했다가 정권 교체 직후 수교한 감비아를 포함한다면 3개. [9]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의 대회에서 대만 국가대표팀 선수가 금메달을 따게 되면 중화민국 국가 대신 차이니즈 타이페이 올림픽 위원회가가 연주되는데, 그 위원회가의 멜로디가 중화민국 국기가의 멜로디와 동일하다. 그리고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의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위원회가의 가사가 아닌 국기가의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르는 모습이 종종 방송에 잡혔다. [10] 대만인들이 더 이상 이전 세대처럼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지는 않더라도, 일단 대만은 중화민국이라는 형태로나마 독립해 있고, 경제적 이익이나 양안전쟁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대만독립에 반대하고 양안교류에 찬성하는 경우가 절반 정도는 된다. [11] 대만에서는 주로 '반공대륙'(反攻大陸), '반공복국'(反共復國), '대륙광복'(大陸光復) 등의 용어로 쓰였다. [12] 다만 미국은 6.25 전쟁 당시 중국과의 대결을 경험하면서 중국과의 직접 대결로 악화될 수 있는 대만의 본토 선제 침공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대만과의 동맹에 따른 방위공약 대상도 대만과 인근 도서 지역으로 한정했다. 왠지 비슷한 시기 이승만 정부의 북진 통일 노선에 신경 쓰였던 것과 비슷 미국은 줄곧 진먼, 마쭈도 포기하라고 했을 정도였는데 장제스가 고집을 부려서 지금도 중화민국 영토로 남아 있다. [13]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중화인민공화국과 그나마 관계가 좋은 대만의 세력이 중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범람연맹이다. 이들은 그래도 "중국"이라고는 하니까. [14] 한국으로 따지면 특별시와 광역시 선거로, 대만 전체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