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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81대 황제
이리니 Εἰρήν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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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니 이 아시네아 Ειρήνη η Αθηναία[1] Irene Atheniensis[2] |
출생 | 750년~756년 사이 |
동로마 제국 아테네 | |
사망 | 803년 8월 9일 |
동로마 제국 레스보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797년 8월 19일 ~ 802년 10월 31일 (5년) | |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 | |
792년 ~ 797년, 780년 ~ 790년 (15년) | |
레온 4세의 황후 | |
775년 ~ 780년 (5년) | |
전임자 | 콘스탄티노스 6세 |
후임자 | 니키포로스 1세 |
배우자 | 레온 4세 |
자녀 | 콘스탄티노스 6세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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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81대 황제이자 로마 제국 최초의 여제로 이사브리아 왕조의 마지막 황제다. 레온 4세의 황후이자 콘스탄티노스 6세의 모후. 아들의 섭정을 거쳐 황제까지 된다.이름의 뜻은 평화 그리고 평화의 여신.
이레네라고도 한다. 영어로는 아이린. 아테네 출신이라서 동명이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아테네의 이리니'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2. 생애
769년에 황자였던 레온 4세와 결혼했고, 775년에 남편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780년에 남편이 일찍 죽자 어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의 섭정으로서 제국의 통치를 시작하였다.이전 황제들과는 달리 그녀는 성상 옹호파였다.[3] 이리니는 섭정으로서 성상옹호자인 측근 타라시오스를 기용하는 등 성상옹호 정책을 주창했으나, 근위대가 반발하는 등 역풍을 맞았다. 이에 이리니는 근위대를 소아시아 전선에 보내버리고 트라키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불러들였다. 이리니는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고 754년 시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5세 때 성상파괴를 주장했던 히에레이아 공의회를 배격하였다. 이에 반발하는 세력은 자연히 젊은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에게 집결했고, 섭정인 이리니와 대립하였다.
790년에 이리니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을 몰아내려 했으나,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던 성상 파괴주의자들 등의 역공을 받고 유폐되어 콘스탄티노스 6세가 2년 동안 단독 황제로 제국을 통치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의 숙부이자 부제(Caesar)인 니키포로스가 쿠데타를 시도하고 이슬람과 불가리아의 침략까지 겹치자 콘스탄티노스는 792년에 모후를 다시 공동 통치자로 복귀시켰지만 이미 모자지간의 관계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잔혹한 형벌을 내리고 정실부인을 내치면서 민심을 잃었고, 797년, 이리니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의 제위를 찬탈했으며 아들의 눈을 뽑고 유폐했다.[4]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오르는 것은 매우 불안한 정치적 위치일 수밖에 없었다.[5] 로마의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임페라토르, 즉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으며, 게르만족은 아예 로마를 공위 상태로 간주하였다. 프랑크족의 살리카법에 의하면 여자는 군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니는 성상옹호정책을 펼쳤는데, 독특하게도 성상 공경을 옹호했지만 성상파괴주의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6] 하지만 당대에는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지지세력에게 불만을 가져다 주었고, 반대세력 역시 이와 같은 관용에 만족하지 않았다.[7] 이리니는 종교정책 외에도 테마를 몇 개 더 확립하고, 슬라브인에게 포교를 하는 등 대외적으로도 안정된 정책을 이어나갔다. 이리니는 군사적으로 실책은 없었으나, 콘스탄티노스 6세의 군사적 실책으로 불가리아에 많은 조공을 헌납하고 있었고, 이는 사라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포교자체는 성공적이었어서 이 때 상당한 수의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성상 공경이 합법화되자 자연히 예술도 부흥하였다. 성상파괴로 단절되었던 비잔틴 예술이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니의 통치가 안정을 찾을 무렵 위기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찾아왔다. 프랑크 국왕 카를은 교황과 동로마 제국이 성상 옹호로 일치해 단결할 위험이 보이자, 프랑크푸르트 시노드를 개최해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는 몇 가지 교리( 필리오케 논쟁)를 들먹이며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황을 압박하였다. 교황은 이에 프랑크 왕국의 손을 들면서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대립 끝에 결국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카를의 서로마 황제 대관으로 이어진다. 카를은 이리니와의 결혼으로 동서 제국의 합일까지 바라보았으나, 이에 분노한 귀족들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 의해 이리니가 폐위되면서 무산되었다. 폐위된 이리니는 레즈보스 섬으로 유배되어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고 폐위된지 1년만에 사망한다.
3. 창작물에서
크루세이더 킹즈 2의 사를마뉴 시나리오(769년)에서 남편인 레온 4세와 막 결혼한 상태로 등장하며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는 771년생이라 등장하지 않는다. 그 후 867년 시나리오에서부터는 동로마 제국위의 과거 소유자 이력에서만 볼 수 있고 친족 살해자(Kinslayer)가 붙어 있다.문명 6에서 중세에 고용할 수 있는 위대한 상인으로 등장하는데 게임 내 백과사전에 의하면 비단 산업을 육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
그리스어
[2]
라틴어
[3]
그녀가 기존 황제들과는 달리 그리스 본토 출신이었던 것이 이와 관련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5세부터 극단적인 성상파괴주의는 잦아들고 있었고 이리니 대에 와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4]
이렇게 황제의 어머니로서 어린 황제를 대신해 통치한 것, 성상을 옹호한 행보는 이후 등장하는
테오도라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그 끝은 판이한데, 성년이 된 아들과 권력 다툼을 벌인 것은 같으나
테오도라는 결국 아들에게 밀려난 반면, 이리니는 아들의 안구를 적출하며 권력을 유지하였던 것이다. 실명한 황제는 곧 죽었고, 이러한 잔인한 행위로 이리니는 비판받았다.
[5]
이리니는 이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나쁘지 않은 통치를 이어갔으나, 결국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외세와 접촉해야 했고, 이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6]
성상파괴주의 세력을 함부로 건들 수 없던 탓도 있겠지만, 이는 동로마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종교의 통합을 시도한 것으로 상당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을 공경하지(venerate) 숭배하지는(worship)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한 것도 현명한 종교-정치적인 수사였다.
[7]
성상파괴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부터 왕조의 운명을 걸고 싸운 군부세력이었고, 그리스와 소아시아 출신의 갈등의 골은 생각보다 깊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