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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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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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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결된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외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건 내용) |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 청주 처제 살인사건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
1. 개요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 중 8차 살인 사건에 대해서 서술한다. 언론에선 일반적으로 줄여서 '화성 8차 사건'이라 칭한다.대통령의 특별 관심 사안으로 특진이 걸렸던 이 사건의 범인으로 윤성여라는 사람이 지목되어 사형을 구형받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20년 복역 후 출소하였으나 31년 후 진범이 드러나 억울한 사람이었음이 밝혀졌고 진범 이춘재의 자백과 다시 수사한 결과에 의해 재심을 거쳐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88년 9월 16일 태안읍 진안리의 가정집에서 일어났으며 피해자는 1975년생(당시 13세, 중학교 1학년) 박 양이다. 9월 15일 피해자는 가족들과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밤 11시 20분경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다음 날인 9월 16일 오전 6시 50분경 피해자의 어머니는 피해자의 방으로 들어온 뒤 사망한 딸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목에는 강하게 압박당한 자국이 있었으며,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였으나 옷은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또 문고리 부분의 창호지가 찢겨 있었다. 경찰은 범인이 담을 넘어 집에 침입한 다음 창호지를 찢은 뒤 문고리를 따서 방에 들어왔으며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한 다음 다시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두고는 도주한 것으로 보았다. 사망 추정 시각은 9월 16일 새벽 2시경이었다.
피해자 박 양의 집. 당시 피해자는 중학교 1학년(13세) 였으며 세는나이로 14살이었다. 출처
당시 현장에서 피해자가 깔고 자던 요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가 채취되었는데 경찰은 이 체모를 일본에 분석을 맡겼고 그 결과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 원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찰은 이 분석결과에 따라 수리공들을 조사했고 당시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22세 윤성여[1]의 체모라는 사실을 확인 후 체포했다. 하지만 이전의 범행과는 수법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경찰은 모방범죄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당시 윤씨를 검거한 공로로 수사팀 5명이 1계급 특진하였다. 훗날 진범이 밝혀진 후 이 5명의 특진은 모조리 취소되었다.[2]
윤씨는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다. 유죄의 근거로는 경찰 조사에서 본인이 자백을 한 점, 체모 성분 분석에서 나온 중금속 함유량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3] 체모 혈액형 분석도 B형으로 윤씨와 동일했다. 윤씨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었지만 20년 후 2009년에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였다.
2. 논란 - 진범은 누구인가?
검거된 후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윤성여가 정말 진범인지에 대한 논란은 이전부터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잡았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이 당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마구잡이식 수사를 했고 고문을 통해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던 이근안이 투입됐다는 것 자체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성 사건 수사 과정에서도 억울하게 용의자로 몰린 사람이 자살하는 사례가 3번이나 나왔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2019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드러난 이춘재가 8차 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다시 폭발하였다.2.1. 이춘재의 주장
2019년 10월 4일 진범 이춘재가 8차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다름 아니라 이 사건은 이미 몇십 년 전에 범인이 잡혀 모방범죄로 결론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윤 씨는 검거 당시부터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으며 윤 씨가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 누명을 쓴 것은 물론, 경찰 측이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하고 이춘재에 대한 성토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 #만약 이 범죄가 이춘재의 행위라면 1차, 2차는 물론 후술하는 수원 오목천 여고생 피살 사건의 범인이 이춘재일 확률도 높아진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이상 경찰을 놀려먹기라도 해 보겠다는 심보일 수도 있지만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엉뚱한 시민을 처벌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 윤 씨는 지난 2003년 옥중에서도 자신은 무죄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윤 씨는 재판 과정에서도 고문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으며 1심에서 기각당해 항소하였지만 2심과 3심에서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걸로 드러났다. # #
당시 이춘재의 신혼집은 피해자의 한두 집 건너 이웃집이었으며 이 때문에 용의선상에도 올랐으나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과수 조사관의 말에 따르면 혈액형이 B형이 아닌 사람은 음모를 제출했어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거된 음모가 너무 많고 국과수 업무가 과중해서 혈액형이 B형인 사람의 음모만 검사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말 당시에 이춘재의 체모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 #
또 8차 사건 이후 한동안 범행이 없다가 윤 씨가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구속된 후에 이춘재가 9차 범행을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 있다. 8차 사건을 이춘재가 했다고 가정하면 경찰을 피해 몸조심을 하다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쓴 것을 보고 안심하고 추가 범행을 시작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0월 10일, 경찰의 정례 브리핑에 의하면 이춘재의 8차 사건 진술 중에 유의미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피해자의 집 위치, 침대, 책상 위치 등 범행 현장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렸으며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침입 방법 등에 대해서도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
8차 사건 당시 증거물은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현장에서 수거된 토끼풀과 인근에서 8차와 비슷한 수법으로 일어난 미제 강도사건의 증거물인 창호지와 벽지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하는 한편 당시 담당 형사들을 조사하기로 했다. 아쉽게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들 중 경찰에 남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 명은 교통사고로 고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퇴직했다. #
한편 굳이 8차 사건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이후에 말을 바꿨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경찰의 잘못 탓이다. 이춘재가 말을 바꾼 게 아니라 이춘재는 처음부터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했다고 말했지만 경찰이 언론에 필사적으로 은폐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 외부에 유출된 정황이 포착되고 더 이상 숨기려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자 10월 4일 경찰이 8차도 이춘재가 한 것으로 자백했다고 시인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외부에 유출되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는 말을 바꾸지 않았으며 경찰이 정보를 은폐해서 오해를 유발했다. 경찰이 처음에 8차 사건을 제외하고 발표한 정확한 이유는 공식적으로 불명이긴 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충분한 조사와 사실여부 확인은 당연히 필요하다. 이전에도 유영철이 정남규가 저질렀던 이문동 살인 사건을 자기가 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의 필사적인 은폐에도 불구하고 시인한 이상 이제 검찰과 법원의 시인만 남은 셈이다.
재조사 결과가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제2의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약촌 오거리 사건에서 재심 변론을 받아 무죄를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윤 씨의 변호를 맡을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
윤 씨 역시 법적 대응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30년 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며 "신분이 노출되면 직장에서도 잘릴 수 있어서 당분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심 준비가 끝날 때까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결국 재심 청구를 하기로 하였으며 박준영 및 김칠준 변호사가 맡아 진행했다. # #
이춘재는 윤 씨가 재심에 자신을 증인으로 요청을 했다는 얘기를 담당경찰에게 듣고 증인출석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
위는 이춘재가 직접 그린 8차 사건의 현장. 실제 사건이 일어난 집의 구조와 일치한다.
2.2. 누명 쓴 피해자, 윤성여 씨
윤성여 씨 :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제작진 : 강간은요?
윤성여 씨 : 강간도 안 했어요.
제작진 : 그런데 왜 자백하셨어요?
윤성여 씨 : 그때 자백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4]
제작진 : 억울하세요?
윤성여 씨 : 억울하죠. 억울한 건 말로 다 못 하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8차 살인을 다룬 MBC 실화극장 죄와 벌(2003)에서 제작진과 범인으로 잡혔던 윤 씨의 인터뷰 중 #[5]
제작진 : 강간은요?
윤성여 씨 : 강간도 안 했어요.
제작진 : 그런데 왜 자백하셨어요?
윤성여 씨 : 그때 자백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4]
제작진 : 억울하세요?
윤성여 씨 : 억울하죠. 억울한 건 말로 다 못 하죠.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8차 살인을 다룬 MBC 실화극장 죄와 벌(2003)에서 제작진과 범인으로 잡혔던 윤 씨의 인터뷰 중 #[5]
당시 윤 씨와 10년 이상을 지낸 교도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윤 씨는 교도소에 들어온 후부터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때리는 등 엄청난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이야기해 수형자들과 교도관들 사이에서는 '억울하게 들어온 애'로 통했다고 했다. #
윤 씨는 살인의 추억이 개봉한 2003년에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 8차 사건이라는 것도 내가 한 일이 아니다."면서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
그리고 언론은 윤 씨가 복역 중에 친하게 지내며 출소 후 직장도 알선해 준 교도관 A씨와 인터뷰했으며 재심 준비도 대신 해 주고 있었다. 기사에 따르면 2003년에도 재심 신청을 하려고 알아봤지만 진범이 특정되지 않으면 재심 신청해도 뒤집기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좌절하여 그만뒀다. #
이후 10월 9일 채널A에서 윤 씨를 취재했다. 20년 옥살이 윤 씨 “이춘재에 확실한 답 듣고 싶다”, ‘8차 사건’ 윤 씨 심경 토로…“죽어도 상관없다며 고문” 인터뷰에 따르면 3일간 수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자신에게 쪼그려 뛰기를 시키고 못 하면 구타를 했다. 현장 검증 때는 형사가 뒤에서 잡아 주었음에도 담을 넘어간 기억이 없다고 해 하단 문단에 서술된 형사의 담을 훌쩍 넘어갔다는 발언과 대치된다. “이춘재 자백…” 화성 8차사건 진범 지목된 윤씨가 한 말
당시 이 프로그램에서 나레이션 진행자가 윤성여가 20년으로 감형되었다고 밝힌 바 있어 최소 2003년 이전에 무기징역에서 유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2.1. 경찰의 부당한 고문으로 인한 거짓 자백
윤 씨는 경찰들의 부당한 강압에 의해서 거짓 자백을 했다고 증언했다. 화성 연쇄 살인 누명 쓴 사람들… 강압수사에 극단적 선택까지 참고로 윤 씨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 중퇴에 소아마비 장애인이며 가난했다. 누명 쓰기 딱 좋은 사회적 약자였다. 그알 1109회에 이런 사회적 약자들을 대공형사들이 임의 감금하고 고문해서 간첩 조작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최 형사가 원래 대공방첩 형사에 고문형사로 유명한 사람인데 8차 사건 해결하면 특진이란 얘길 듣고 8차 사건 수사에 들어와서 수사를 주도했다고 한다. 특진을 노리고 날조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드는 부분이다.이에 대해 당시 8차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측은 “증거가 뚜렷했기에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 라고 말했다. 기사의 기자와의 통화에서 “특정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은 있는데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을 때 하는 게 고문이지 증거가 있는 경우는 다르다”라고 말했는데 이 발언은 역으로 생각하면 증거가 없을 땐 고문을 한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1980년대 대한민국 경찰들이 용의자를 고문했다는 건 수없이 미디어에 나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말을 한 건 또 다른 문제인데 인터뷰한 경찰의 발언이 부주의했던 것인지 기자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한 건지는 지켜볼 일이다. 화성 8차 사건 수사경찰 "증거 뚜렷… 고문할 필요 없었다."
한편 당시 "거짓말탐지기 실험과 휴식에 소요된 시간을 제외하고 실제로 조사받은 지 4시간 40분 만인 다음날 05:40부터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하였다." 라며 경찰 조사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다. 하지만 윤 씨가 경찰에 검거된 날을 7월 25일로 보면 실제 조사 기간은 더 길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27일 오후에 윤 씨가 자백을 했다고 나와 있어 법정에 제출된 수사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윤 씨는 당시 형사들이 거짓 자백을 강요하며 사흘간 잠도 안 재웠다고 한다. 지목했던 최 형사, 장 형사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의 주장도 나왔다. 또 등장한 ‘장 형사’·‘최 형사’…“화성 8차 사건 허위자백 강요”
경찰마저도 이춘재의 범행이라 인정해서 '논란'의 여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검찰은 직접 수사에 나서 당시 경찰과 국과수의 조작 정황을 포착하여 재심 법원에 무죄 취지의 증거를 제출하였으며 법원 역시 재심 과정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공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변호인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무죄를 선고할 수도 있다'며 윤 씨에게 사과하였다. #
이후 윤씨는 이러한 가혹행위 및 허위진술 강요, 이로 입은 피해와 고통 등에 국가로부터 총 43억가량의 보상금을 받았다. 2020년 12월 재심에서 윤 씨의 무죄가 확정된 이후, 국가는 윤 씨가 경찰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여 윤 씨에게 형사보상금[6]으로 25억원 가량을 지급했다. 윤 씨는 추가적인 배상이 있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2021년 3월, 재판부는 경찰의 불법 체포·구금과 가혹행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과정과 결과의 위법성을 인정하며 윤 씨가 옥살이한 20년동안 일하면서 벌 수 있었던 돈을 1억 3천여만 원으로 계산하고[7] 위자료[8] 40억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다만 국가가 이미 지급한 형사보상금 25억 1000여만원을 공제해 고유 위자료를 약 18억 2000만원으로 봤다. 윤 씨는 여기에다 아버지의 위자료 상속분 5천만 원을 더해 모두 18억6900여만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았고, 그의 형제자매들은 위자료 5천만 원과 윤 씨 아버지 위자료 상속분 5천만 원을 더해 한 사람당 1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받았다.
3. 쟁점
3.1. 혈액형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형사들은 이춘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혈액형이 B형인데 이춘재는 O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8차 사건만이 아니라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전체에서 B형 혈액형이라 다르다는 주장은 이춘재가 범인으로 지목된 직후에도 나온 주장이다. 이런 경우 DNA 감식이 우선되기 때문에 그동안 수사를 잘못 해 왔다는 결론이 된다. 8차 사건도 비슷한 연장선상일 가능성이 있다. #
기사를 요약하면 8차만이 아니라 DNA가 일치한 5, 7, 9차도 범인을 B형으로 특정하여 수사해 왔다는 것이며 30년만에 O형으로 정정한 것이다. 당시 혈액형 검사 난맥상에 관해서는 문서 참조.
위에 대한 경찰측의 반론은 다른 사건들은 현장에 남겨진 유류품에서 남겨진 혈액형이었고 8차 사건은 정액에서 채취한 샘플이 B형이었기 때문에 다른 케이스라는 주장이다.
9차 사건도 정액에서 혈액형을 검출했다. 극히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정액에서 분석되는 혈액형과 실제 혈액형이 다른 특이체질도 있긴 하다. 이 같은 사례는 안드레이 치카틸로 항목 참조. 물론 극히 드문 사례기 때문에 진범이 이춘재로 밝혀지는 경우는 그런 희귀 케이스보단 단순히 채취 과정의 실수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것이 알고싶다 1189회에 따르면 이춘재 역시 1차 검사 때는 B형으로 나왔다고 한다. 당시에는 관리연속성이란 개념이 없어 증거품을 마구 다뤘기 때문에 과학수사라고 해도 진짜 과학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3.2. 범행 수법
실내에서 벌어졌다거나 이춘재 특유의 포박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춘재의 평소 패턴과 다르니까 모방범죄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있다. 이춘재의 범행으로 확실히 밝혀진 1989년 9월 26일 강도예비사건 당시에도 평소 그의 야외범행 패턴과 다르게 주택에 침입하려 했던 전력이 있는 데다 마침 이 가택침입 시도 사건은 8차 사건 이후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만약 8차 사건도 이춘재의 범행이라면 이 8차 사건으로 한 번 가정집 침입 범행을 성공한 후 약 1년이 지나 한 번 더 시도하려다가 집주인에게 발각당해 붙잡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춘재의 마지막 범행인 청주 처제 살인사건도 자택에서 행했으므로 그가 반드시 야외범행을 고집했던 것은 분명히 아니다.일각에서는 7차 사건 이후 몽타주가 나오자 경비가 강화된 상황에서 야외에서 범행을 저지르기엔 무리라고 판단해서 실내로 범행장소를 튼 게 아닌가라는 주장도 있다. 5차 사건 때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수사본부가 설치되자 6차 사건 때는 피해자를 결박하지 않는 쪽으로 범행수법을 바꿨지만 주민신고를 받고 조사받아 겁을 먹어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과 7차 사건은 평소 선택하던 범행장소(태안읍 일대)에서 거리가 떨어진 곳(여고생 살인:수원 화서역, 7차 사건:팔탄면 가재리)으로 피해 벌였던 것처럼 이춘재는 6~7차 즈음부터 자신의 범행 패턴을 조금씩 바꿔서 수사를 혼란시키려는 시도를 한 정황이 보인다.
그렇기에 8차 사건이 이춘재의 범행이 맞다면 첫번째 주택 침입 방식인 이 8차 사건은 성공하였지만 2번째(1989년 강도예비사건 체포)만에 실패하면서 남의 집에 숨어드는 게 더 위험한 것 같으니 9차 사건부터는 원래대로 야외범행 방식으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8차 사건과 9차 사건의 시차가 2년이 넘기에 이춘재 역시 사건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잊혀졌을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범행 장소가 피해자 가족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이춘재의 고교 친구가 살던 집으로, 이춘재가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집의 구조는 바뀌었지만 건물 자체의 방 배치 등은 바뀌었을 리가 없으니 실내라도 이춘재에게 익숙한 곳이라 범행 결심을 할 만하다. 더욱이 범행 장소는 이춘재 집과 사이에 작은 언덕을 둔 거의 옆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알 1189회에 따르면 피해자의 목에서 2차 사건 때 피해자와 비슷한 상처가 났는데, 맨손으로 했다고 보긴 어렵고 장갑을 끼고 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윤씨의 진술에는 팬티를 소각했다, 다른 옷도 소각했다 등 의복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장갑은 언급이 없다. 오히려 강도예비사건 당시 과도와 면장갑을 소지한 이춘재와 들어맞는 부분이다. 실제로 이춘재는 구두를 벗고 양말을 손에 끼고 범행했다고 진술해 헝겊에 의한 상처라는 국과수 결론과 부합한다.
훗날 재판에서 피해자를 옷으로 매듭지어 결박하는 것은 시그니처 같은 게 아니고 단순히 피해자가 반항하지 못하게 제압하여 결박하고 소리 지르지 못하게 재갈을 물린 것뿐이라고 진술했다. # 다만 이는 이춘재가 시그니처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의식적으로 비슷비슷한 재료를 써서 똑같은 방법으로 결박한다면 그게 시그니처다.
3.3. 이춘재의 법정 진술
박성제 주심판사는 이춘재의 증언 채택 여부를 끝까지 확정하지 않아 기자들을 안달나게 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시간이 오래 지난 음모 감정이 어렵다고 통보하자, 결국 이춘재를 증인으로 세웠다. 이춘재는 2020년 11월 2일 드디어 법정에 나와 처음으로 얼굴을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그는 자신이 진범이라며 실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증언했다.이 사건이 유일하게 실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밤에 방에 들어가야 되니까 깨면 안 되니까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초저녁은 아니었고, 볼 일이 있어서 수원에 나간 후 밤에 진안리에 내렸는데, 진안리 정류장 근처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서 구멍가게 앞 파라솔에 앉아서 술을 먹었다. 술을 간단히 먹은 후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술을 먹은 장소에서 집까지 약 10분 정도 거리인데 걸어서 도착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고 피해자집 쪽으로 가게 되었다. 피해자 집 쪽에 난 길을 따라가다가 피해자 집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피해자 집에 들어갔다. 저희 집에서 피해자 집까지는 100m도 안 되는 거리다. 저의 집에서 한 집 건너 바로 옆집이다. 피해자 집은 옛날 집이었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 살던 사람은 제 후배와 선배가 있었고, 그 집에 자주 놀러갔었기 때문에집의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제가 알던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이사를 가서 그 집에 본토박이나 또래들이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가 사는지는 잘 몰랐다.
피해자 집 마당에 들어갔더니 정면에서 보이는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장실과 집 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공간에 들어가보니 예전에 없던 벽돌로 급조한 식으로 방으로 쓸려고 만든 것 같은 집과 연결된 부분이 있었다. 그 방에 옛날 전통식으로 창호지를 붙이는 문이 보여 구멍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제가 뚫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구멍으로 안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봤다. 그 방에 불이 꺼져 있어서 처음부터 보이진 않아 계속 보았는데 눈이 서서히 적응이 돼서 방안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어른인지 아이인지는 구분이 안 되었고, 한 명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는데 머리 형태가 길어서 '여자구나' 생각하고 강간을 목적으로 그 방에 들어가게 됐다. 여자 혼자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 있길래 문이 잠겨져 있는 고리 부분의 살 부분 창호지를 찢고 손을 넣어 고리를 해제시킨 후 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양말을 한쪽씩 벙어리장갑처럼 손에 끼고 들어갔다. 제가 들어갈 때 밟았던 발판이 광이 나는 재질이었는데, 제가 발판을 밟자 발자국이 서리 비슷하듯이 허옇게 찍혔다가 없어진 것이 명확히 기억난다. 양말을 손에 끼고 들어간 이유는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기는 집 안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안쪽에서 자는 소리도 들렸고, 안쪽과 제가 들어간 방이 문 하나 사이였다. 자다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수준이라서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들어갈 때 받침대 같은 것이 있어서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그 받침대에 한 다리를 올리고 나머지 다리를 그 받침대에 다시 올린 후 받침대에 다 올라서면 방바닥에 다시 한 다리씩 내려서 들어갔는데 받침대와 방바닥이 어느 정도 높이가 있어서 밖에서 한 번에 들어갈 수 없는 높이였다. 방 크기는 직사각형이었던 것 같은데 어두웠기 때문에 방 구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피해자 배에 올라가서 강간할 때 안쪽에서 사람이 자고 있는 방과 연결된 문이 제 얼굴 앞에 있었다.
피해자를 보고 이불을 덮은 상태에서 누워있는 피해자의 목을 바로 양손으로 조르고 피해자 위에 올라타 목을 더욱 더 세게 졸랐다. 양손으로 목을 잡고 엄지손가락 두 개를 이용하여 더욱 힘을 주어 목을 졸랐다. 제가 이불 위에 올라가서 피해자를 올라타 목을 졸랐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확한 반응은 기억 못하는데 목을 조르면 일반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거나 켁켁거리는 반응이 오고 계속 목을 조르면 힘이 빠지면서 축 늘어지는 게 느껴진다. 어설프게 하면 실내에서 제압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세게 눌렀던 것 같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게 목적이니깐 피해자 몸이 늘어질 때까지 목을 졸랐다. 목을 조르면 몸이 늘어지는데 이때 조절을 잘해야 한다.
조절을 잘못하면 바로 죽는 경우도 있다. 목을 조를 때도 양말을 계속 손에 끼고 있었다. 피해자 몸이 늘어진 것을 확인하고 이불을 제끼고 제가 위에서 봤는데, 키도 되게 작게 느껴졌고 체형도 작아서 초등학생 쯤으로 생각하였다. 이후 이불을 젖히자 피해자가 삼각팬티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팬티를 다 벗기고 상의는 그대로 두고 강간하였다. (중략) 소리가 나게 되면 바로 문 앞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게 되니까 다른 사건과는 달리 초긴장상태였다. 성기 삽입시에도 급박했던 상황이라 거의 쑤셔 넣는 식으로 해서 다른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맨손으로 했으면 촉감이라도 있었을텐데 양말을 끼고 있어서 뭘 느끼면서 할 겨를이 없었다. 피해자의 질 안에 사정을 한 다음 피해자가 처음 입고 있던 벗겨놓은 팬티로 제 성기를 닦고 피해자도 쓱 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가 옷을 입고 피해자 방에 새 팬티가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 팬티를 피해자에게 입히고 나서 이불을 그대로 원상태로 덮어주고, 피해자가 입고 있었고 제가 뒤처리를 했던 피해자의 팬티를 들고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왔다.
목을 조르고 강간하고 사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짧았고, 제가 옷을 입고 피해자에게 팬티를 새로 입히고 정리하는 과정이 더 길었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피해자가 움직이거나 전혀 반응이 없어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들어왔던 문을 통해 나와서 그대로 대문으로 다시 나와 집으로 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소로길이 있는데 소로길로 올라가서 피해자 집 담벼락 밖 풀이 우거진 곳에 피해자의 팬티를 던지고 산을 삥 돌아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잤다.
피해자 집 마당에 들어갔더니 정면에서 보이는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장실과 집 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었는데 그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공간에 들어가보니 예전에 없던 벽돌로 급조한 식으로 방으로 쓸려고 만든 것 같은 집과 연결된 부분이 있었다. 그 방에 옛날 전통식으로 창호지를 붙이는 문이 보여 구멍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제가 뚫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구멍으로 안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들여다봤다. 그 방에 불이 꺼져 있어서 처음부터 보이진 않아 계속 보았는데 눈이 서서히 적응이 돼서 방안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자고 있는데 어른인지 아이인지는 구분이 안 되었고, 한 명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는데 머리 형태가 길어서 '여자구나' 생각하고 강간을 목적으로 그 방에 들어가게 됐다. 여자 혼자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 있길래 문이 잠겨져 있는 고리 부분의 살 부분 창호지를 찢고 손을 넣어 고리를 해제시킨 후 문을 열고 신발을 벗고 양말을 한쪽씩 벙어리장갑처럼 손에 끼고 들어갔다. 제가 들어갈 때 밟았던 발판이 광이 나는 재질이었는데, 제가 발판을 밟자 발자국이 서리 비슷하듯이 허옇게 찍혔다가 없어진 것이 명확히 기억난다. 양말을 손에 끼고 들어간 이유는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기는 집 안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안쪽에서 자는 소리도 들렸고, 안쪽과 제가 들어간 방이 문 하나 사이였다. 자다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수준이라서 조심했던 기억이 있다.
들어갈 때 받침대 같은 것이 있어서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그 받침대에 한 다리를 올리고 나머지 다리를 그 받침대에 다시 올린 후 받침대에 다 올라서면 방바닥에 다시 한 다리씩 내려서 들어갔는데 받침대와 방바닥이 어느 정도 높이가 있어서 밖에서 한 번에 들어갈 수 없는 높이였다. 방 크기는 직사각형이었던 것 같은데 어두웠기 때문에 방 구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피해자 배에 올라가서 강간할 때 안쪽에서 사람이 자고 있는 방과 연결된 문이 제 얼굴 앞에 있었다.
피해자를 보고 이불을 덮은 상태에서 누워있는 피해자의 목을 바로 양손으로 조르고 피해자 위에 올라타 목을 더욱 더 세게 졸랐다. 양손으로 목을 잡고 엄지손가락 두 개를 이용하여 더욱 힘을 주어 목을 졸랐다. 제가 이불 위에 올라가서 피해자를 올라타 목을 졸랐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확한 반응은 기억 못하는데 목을 조르면 일반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거나 켁켁거리는 반응이 오고 계속 목을 조르면 힘이 빠지면서 축 늘어지는 게 느껴진다. 어설프게 하면 실내에서 제압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세게 눌렀던 것 같고 숨을 못 쉬게 하는 게 목적이니깐 피해자 몸이 늘어질 때까지 목을 졸랐다. 목을 조르면 몸이 늘어지는데 이때 조절을 잘해야 한다.
조절을 잘못하면 바로 죽는 경우도 있다. 목을 조를 때도 양말을 계속 손에 끼고 있었다. 피해자 몸이 늘어진 것을 확인하고 이불을 제끼고 제가 위에서 봤는데, 키도 되게 작게 느껴졌고 체형도 작아서 초등학생 쯤으로 생각하였다. 이후 이불을 젖히자 피해자가 삼각팬티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팬티를 다 벗기고 상의는 그대로 두고 강간하였다. (중략) 소리가 나게 되면 바로 문 앞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키게 되니까 다른 사건과는 달리 초긴장상태였다. 성기 삽입시에도 급박했던 상황이라 거의 쑤셔 넣는 식으로 해서 다른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맨손으로 했으면 촉감이라도 있었을텐데 양말을 끼고 있어서 뭘 느끼면서 할 겨를이 없었다. 피해자의 질 안에 사정을 한 다음 피해자가 처음 입고 있던 벗겨놓은 팬티로 제 성기를 닦고 피해자도 쓱 닦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가 옷을 입고 피해자 방에 새 팬티가 바닥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새 팬티를 피해자에게 입히고 나서 이불을 그대로 원상태로 덮어주고, 피해자가 입고 있었고 제가 뒤처리를 했던 피해자의 팬티를 들고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왔다.
목을 조르고 강간하고 사정하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짧았고, 제가 옷을 입고 피해자에게 팬티를 새로 입히고 정리하는 과정이 더 길었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피해자가 움직이거나 전혀 반응이 없어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후 들어왔던 문을 통해 나와서 그대로 대문으로 다시 나와 집으로 가는 반대방향으로 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소로길이 있는데 소로길로 올라가서 피해자 집 담벼락 밖 풀이 우거진 곳에 피해자의 팬티를 던지고 산을 삥 돌아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잤다.
이춘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던 윤씨는 이춘재의 증언 덕분에 무죄임이 밝혀지는 묘한 상황에 혐오와 감사가 섞인 반응을 보였다. 종종 그는 “그래도 이춘재에게 고맙다”라고 말했다.
3.4. 중금속 원소
또 윤 씨를 잡았다는 과학수사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DNA나 지문 같은 것이 아닌 체모의 중금속 원소만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전직 국과수 관계자는 "방사성동위원소 분석은 범인을 좁혀가는 중요한 수단일 수 있지만, DNA 분석처럼 용의자를 꼭 집어 특정하는 기법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당시 윤 씨의 변호인은 체모의 중금속 원소를 증거로 채택한 적이 없었다고 맞섰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춘재 역시 전기부품공장을 다녔기에 충분히 티타늄이 나올 수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체모 검사의 신뢰도는 60% 정도로, 같은 환경에 놓인 사람이면 성분이 비슷하게 검출될 수 있기 때문에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라고 한다. #2003년 방영된 MBC '실화극장-죄와 벌'을 보면 중금속 분석 전문가가 법정에 출석해 윤 씨가 범인이 아닐 확률은 3,600만 분의 1이라고 증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 하지만 확률이 3,600만 분의 1이라는 주장은 중금속의 체내 분포가 무작위로 분포한다는 무리한 가정을 깔고 있다. 예를 들어 비슷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비슷한 업종에서 일한 사람, 같은 지역에서 사는 사람 등은 당연히 중금속의 체내 분포는 닮을 수밖에 없다. 실제론 3,600만 분의 1인지 1천 분의 1인지 확률을 알 길이 없다.
또 희귀 물질 브롬의 함량으로 봤을 때 윤 씨 같은 용접공보다는 이춘재 같은 전기부품공장에 가깝다. 게다가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는 어느 게 범인이고 피해자고 피해자 가족 것인지도 확인이 안 된 상태였고, 심지어 B형으로 검출된 체모와 타이타늄이 검출된 체모는 서로 달랐다. 거기다 현대에는 40수는 검사해 봐야 유의미한 결과로 보는데 당시 검사한 체모는 2건으로 사실상 증거능력이 없는 수준이었다.
네덜란드 중성자 방사화 전문가 피터 보드는 원자로에서 중성자를 15회나 노출시켜 증거가 훼손되었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3.5. 이춘재 자백의 신빙성
과거 유영철이 정남규의 범행을 자기가 했다고 한 것처럼 연쇄살인범들이 영웅심리나 허세를 이유로 허위 자백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9] 일부에서는 의심하는 시선을 보냈다.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이춘재의 자백이 터무니없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 우선 남의 범행을 자기가 했다는 이유 중 하나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인데 이춘재는 이미 공소시효가 다 지났단 것을 알기에 그럴 까닭이 없다. 또 영웅심리라고 보기에는 영웅심리는 언론을 통해 얻는 건데 언론과 차단된 상태다. 프로파일러들과 신뢰 형성이 잘 되어 내일모레 환갑이었던 이춘재가 비밀을 유지하는 심적 부담을 털어내자는 심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후 앞서 서술했듯 이춘재가 사건 현장을 그림까지 그려 가며 아주 자세하게 설명했으며 그중 진범만이 알 수 있는 진술도 있었다는 경찰 발표가 나오면서 허세로 인한 자백일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다. #
사건 현장은 피해자 가족이 이사 오기 전까지는 이춘재의 고교 친구가 살던 집으로 이춘재가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사 후 완전히 바뀐 집 구조까지 그림으로 그리면서 진술했다고 한다. #
이춘재의 자백에서 결정적인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피해자의 속옷과 관련된 사실이다. 윤씨의 진술서에는 속옷를 무릎 정도까지만 벗겼다고 나와있는데 피해자의 속옷은 앞뒤가 뒤집혀 입혀져 있었다. 완전히 벗겼다가 다시 입히는 과정에서 거꾸로 된 것으로 보이는데 반만 벗겼다면 그럴 일이 없다. 그에 반해 이춘재는 속옷을 벗겨 혈흔 등을 지우는 데 쓰고 새 속옷을 입혔다고 사실과 부합하는 진술을 했다. #
경찰까지 항복을 한 마당에 이춘재 자백의 신빙성을 논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단계에 이르렀다.
3.6. 현장검증
기사에 따르면 윤 씨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윤 씨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기 때문에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상황에서 경찰이 주장하던 담을 넘어서 범행을 했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8차 사건으로 ‘20년 옥살이’ 윤 씨, 주민들 “이상한 수사였다” 뉴스 영상에서는 윤 씨가 검거된 당시의 영상을 보여주는데 1분 10초경부터 윤 씨가 경찰서 안을 절뚝거리며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 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자들은 그의 왼쪽 다리가 팔뚝처럼 가늘다고 묘사했다. # 반면 경찰 측은 팔힘만으로 충분히 담을 넘을 수 있었다고 하며 당시 변호사가 입회한 현장검증에서 윤 씨가 담을 훌쩍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윤 씨는 최근 인터뷰에서 경찰의 부축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담을 넘은 기억이 없다고도 했다. 또 윤 씨 지인들은 경찰이 윤 씨를 체포한 뒤에도 윤 씨에 대한 재판이 마무리될 때까지 윤 씨의 지인들도 주기적으로 감시했다고 한다.
mbc의 보도에 따르면 부축을 받아 담을 넘어가진 않고 넘는 시늉만 했을 뿐이며 넘어가진 않았다. 콘크리트를 치지 않은 담장이 비가 오면 흔들리기 때문에 자신이 담을 넘었다면 담벼락도 같이 넘어갈 거 같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 것을 보면 본인도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진 않는 듯 #
재심 공판에서 담당 수사관이 현장검증에서 담을 넘은 적이 없음을 인정했다. "넘지는 않고 매달려 있었다", "시늉만 했다"고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관이 증언했다.
이춘재는 담을 넘은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길을 가다 대문이 열려 있어 대문으로 들어가 여자가 있음을 확인하고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애초에 대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왜 굳이 담을 넘어가야 할까? 이춘재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애초에 경찰은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단 결론이 된다. 즉, 경찰이 집을 살펴보고서도 '몰래 침입했으니 담 넘어왔을 거다.'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단 이야기다. 현장검증은 8차 사건 수사의 신뢰도에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재심 변론을 맡게 된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때도 억울하게 옥살이한 3명은 담을 넘어갔다고 하고 그들이 만기출소 후 양심선언한 진범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재심을 맡은 변호사 역시 박 변호사였으며 "'범행을 저지를 때 담을 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나.'라는 게 당시 수사관들의 생각인 것 같다."면서 "최근 경찰 조사에서 이춘재가 8차 사건과 관련, 유의미한 진술을 했다는데 그것이 과연 '피해자 자택 침입' 경로와 관련이 있을지 확인해야 할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
3.7. 지문
당시 수사관들은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지문도 검출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 때는 지문이 증거로 쓰이지 않았다. 정말 윤 씨의 지문이 나왔다면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나중에 나온 반기수 수사본부장의 브리핑에 따르면 8차 사건에서 지문은 확인된 바 없다고 답했다.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인지 오래된 사건이라 과거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인지는 애매하다. 이춘재, 화성 8차 사건 ‘진범’만 아는 내용 진술했다.
당시 범행을 장갑을 끼고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윤 씨의 경우 장갑에 대한 언급도 없고 경운기 오일에 절어 기름때 범벅으로 살았기 때문에 지문은 없더라도 기름때는 발견되었어야 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또 당시 피해자 방 책상의 족적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그알에 나온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형사에 따르면 족적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다만 후술할 족적을 고려하면 형사의 착각일 수도 있다.
이춘재는 구두를 벗고 양말을 손에 끼우고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족적 역시 윤씨의 것이라고 보긴 어렵고, 흙이 발견된 점 역시 맨발로 들어왔다는 이춘재의 진술과 부합한다.
4. 재심 수원지방법원
- 사건번호: 수원지방법원 2019재고합17
- 재판부: 수원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 부장판사)
형이 확정된 재판의 경우 일사부재리로 재심이 불가하지만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경우 재심이 진행될 수 있다는 근거에 따라 8차 사건으로 20년 징역을 산 윤씨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다. 변호는 박준영 변호사가 맡았다.
그동안 나온 이춘재의 증언과 증거들을 봤을 때 윤씨가 누명을 쓴 것이 거의 확실시되어 재판을 담당한 재판장은 "억울하게 잘못된 재판을 받아 장기간 구금이 됐다"며 "판사로서 굉장히 죄송한 마음을 느낀다"며 직접 사법부의 잘못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씨는 "판사님이 사과하시는 것에 대해서 공감은 해요. 공감은 하는데 그 당시 판사님들, 그분들은 저는 얼굴도 못 봤어요"라며 억울했던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수원지방법원 2020. 12. 17. 선고 2019재고합17 판결문 전문, 법률신문
2020년 12월 17일 윤씨에 대해 원심이었던 수원지방법원 1989. 10. 20. 선고 89고합535 판결이 파기되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로써 30여년 만에 누명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윤 씨는 사건 당시 이춘재 대신 누명을 쓰고 진범으로 몰려 온갖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거짓 자백을 하고 피고인이 되었으며, 그 후 재판에서조차 가혹행위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다는 것과 실제 어떠한 증거도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모두 법적 효력이 없는 것을 대법원에서까지 오판한 사법부가 낳은 피해자임이 확정되었다. 2021년 그는 국가에 형사보상금을 청구하였으며 ‘억울한 옥살이’ 윤성여씨, 형사보상금 청구··· 2021년 3월 10일 수원지법은 윤씨에게 지급될 형사보상금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의 액수인 약 25억 원으로 확정하였다. #
2022년 11월 16일, 형사보상금과는 별개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도 윤성여 씨가 승소하였다. 법원은 35억원 상당의 손해배상금 중 18억 6천 911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으며 윤성여 씨의 부친에게 2억, 형제자매인 2명에게 각각 5천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 이렇게 윤씨에게는 총 43억 6,911만 원이, 가족들을 포함하면 46억 6,911만 원이 지급되었다.
이후 법무부는 항소를 포기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법무부 보도자료, 문서뷰어, 문서뷰어2
5. 공식 발표
2020년 7월 2일, 경찰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종결하면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본 발표에서 경찰은 이춘재가 저지른 23건의 범행을 확인했으며 아울러 8차 사건도 이춘재의 단독 범행으로 최종 결론지었고 이에 따라 잘못된 수사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 씨에게 사죄의사를 밝혔다. # 경찰의 발표 직후 윤 씨는 취재진과 만나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6. 관련 일지
- 1988년
- 1989년
- 7월 25일 - 체모 성분 분석 증거를 근거로 윤 씨 검거
- 7월 27일 오후 - 윤 씨, 범행 자백
- 7월 27일 - 경찰, 윤 씨의 구속영장 신청
- 7월 28일 - 윤 씨, 구속
- 9월 26일 - 이춘재, 수원에서 가택 칩입 강도 예비 범행
- 10월 21일 - 수원지방법원, 윤 씨에게 사형 선고[11]
- 1990년
7. 진행 경과
결국 경찰은 8차 사건도 이춘재가 저지른 범행으로 잠정 결론지었다. 이춘재, 8차 사건 포함 화성 연쇄살인 모두 저질러 '잠정 결론' 조직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경찰마저도 어쩔 수 없는 결정적 증거가 제시되고 언론 취재에까지 드러나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음이 확실하다.8차와 10차 사건의 증거물에선 이춘재의 DNA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8차 사건의 증거물이라고 제출한 게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토끼풀과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기는 했으나 이 사건과 유사한 수법의 미제 절도사건에서 용의자 흔적이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창호지였기 때문에 유의미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범인이 검거되어 해결된 사건이라고 생각해 일정 기간 동안 보관 이후 대부분의 증거품들을 처리해 버렸기 때문이다. 경찰 "화성 8차 · 10차 사건서 이춘재 DNA 미검출"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들은 잠적하거나 언론 접촉을 꺼린 것으로 전해졌다. 화성 8차 추적기..이춘재 자백 뒤 사라진 '장 형사'
경찰이 윤씨가 아닌 이춘재가 범인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린 이유를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는 1989년 8월 당시 현장검증 컬러사진의 세세한 모습까지 이춘재가 상세히 묘사한게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윤씨는 이달 중순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었다. #
당시 체모가 이춘재에 부합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 # 11월 2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이 건을 다루었다.
재심을 담당한 박준영 변호사는 "검찰의 현장검증에 대한 자료를 검토했는데 당시 검사도 '윤씨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검사도 당시 윤씨가 충분히 범행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당시 국과수 기록과 윤씨의 자백 등의 이유로 그대로 윤씨를 범인으로 몰고 가 어쩌면 검찰도 이번 수사에서 마땅히 비난받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당시 재판부 역시 재판기록에 사진첨부가 분명히 돼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윤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것은 분명 졸속재판이기 때문에 역시 비난받을 문제"라고 검찰이나 법원측에도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박준영 "화성 8차 현장검증, 자연스럽지 않아 검사도 인지했을 것"
박 변호사는 "당시 피해자 박모양(13)의 방 안의 문 앞에는 좌식책상과 그 책상 위에 책을 꽂아둔 책꽂이가 있었다"며 "만약 윤 씨처럼 소아마비 등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면 방문을 열고 그 책상과 책꽂이를 타고 넘었을 때 흐트러짐 없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가 책꽂이를 넘었다면 책상을 짚고 넘을 수 밖에 없어 분명 증거가 남았을 것이다. 박 변호사는 박양의 책꽂이와 책상이 거의 흐트러짐 없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주로 슬리퍼만 신고 다녔다는 윤씨의 말과 다르게 사건현장에는 운동화 자국이 남아있어 윤씨를 범인으로 몰고 간 당시 수사관들의 교묘한 술책이 보였다고 강조했다. 현장검증 사진을 봤다면 검사나 판사도 충분히 눈치 챘을거라는 주장이다.
2019년 11월 15일 윤 씨의 재검 신청 이틀만에 경찰은 [[https://news.v.daum.net/v/20191115114042853|화성 8차사건 진범 이춘재로 잠정 결론.]]이라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자의 속옷을 거꾸로 입혔다는 이춘재의 자백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12월 12일,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이 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됐던 국과수의 DNA 검사 결과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검찰을 통해 밝혀졌다.
12월 17일, 경찰이 8차사건 당시 담당 검사·경찰관 등 8명 정식 입건했다. 형사계장 등 경찰관 6명을 직권남용 체포 및 감금과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독직폭행, 가혹행위 혐의로, 수사과장과 담당 검사 등 2명은 직권남용 체포 및 감금 혐의로 입건했다. 기사
12월 19일, 8차 사건을 재수사하던 현직 경찰 A 경위가 모텔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기사 정확한 사망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2020년 1월 14일, 법원에서 8차 사건에서 윤 씨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기에 재심을 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
2월 6일 재심 공판준비기일에 검찰은 피고인의 무죄를 인정하는 기록을 제출한 데다 재판부는 "변호인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무죄 선고 가능성이 높다"고 했고 "피고인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장기간 구금된 것에 대해 법원의 판사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이례적으로 사과하며 윤씨의 무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윤씨의 공동변호인단인 박준영 변호사와 법무법인 다산은 "이번 사건은 통상적인 형사 재판과 달리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고 검찰, 변호인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업하는 것"이라고 밝혀 통상적인 재심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
윤성여씨가 신상을 밝히기로 결정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였다. 기사
8월 11일 전직 형사 심 아무개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애먼 사람 인생을 망쳐놓은 바로 그 가해 경찰이다. 재판에 증언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등,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반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추태를 부리던 그는 구인장 등을 통해 겨우 증언대에 세우고 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잘못한 것이 없다고 발뺌했다. 여전히 자신이 인생을 망쳐놓은 사람에 대한 미안함보다는, 재심 이후에 본인을 향해 피해보상과 징계 절차가 날아올 것만 두려워하며 제 잇속부터 계산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던 그는 변호인의 호소, 간곡, 회유 마침내 호통까지 이어지고 나서야 진술서 조작을 인정했다. 배석판사는 심 전 형사에게 “피고인에게 사흘 동안 잠을 재우지 않고 가혹행위를 하면, 그렇게 해서 얻어진 자백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는가”라고 질문했다. 형사는 “백 프로 (윤씨가) 범인이라고 된 상황이라서…”라고 우물거리고 겨우 윤씨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윤씨는 변호인 증인심문 때 본인이 직접 할 말이 있다며 “(내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사과할 생각이 없냐”라고 물었다. 변호인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10월 26일 박종덕 교도관(현 충주구치소)이 증인으로 나와 윤씨가 수감 시절 내내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다고 증언했다. 이미 형이 확정된 범죄자가 그렇게 일관되고 진지하게 무죄를 주장하는 경우는 27년 교도관 생활 동안 처음 봤다고 말했다. 범죄사실 일부를 부정하거나 오히려 과장하는 경우는 있어도 윤씨처럼 결백을 호소하는 태도는 이례적이었다는 것이다. #
12월 17일, 이 사건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과거 수사기관의 부실 행위로 잘못된 판결이 나왔다"며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무죄 선고 당시 영상 판사는 왼쪽 다리에 장애가 있는 윤씨를 배려해 재판 도중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고 알려줬지만 마지막 선고 직전 윤씨는 끝내 스스로 일어나 곧게 섰다. 판사는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피고인은 무죄. 이상 재심 재판을 마칩니다”라고 판결을 끝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심 담당 검사가 찾아와 그에게 악수를 건넸다.
경찰은 재심 결과가 나오자 "재심 청구인을 비롯한 피해자, 가족 등 관련된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뒤늦게나마 재수사를 통해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검거하고 청구인의 결백을 입증했으나, 무고한 청년에게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어 20년간 옥살이를 겪게 해 큰 상처를 드린 점 깊이 반성한다"는 입장을 냈다.
2022년 11월 16일, 법원은 대한민국 경찰의 불법행위(가혹행위, 국과수 조사과정에서의 조작)를 인정하여 윤성여에게 18여 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
8.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
그것이 알고싶다 1189회(2019.11.2 방송)에서 사건을 상세히 다뤘다.
당시 수사가 얼마나 허술하고 황당했는지 상세하게 다루었다. 현장에서 체모는 8점 발견되었으나 경찰은 이를 모두 범인의 체모로 판단했다. 이 체모가 피해자의 몸에서 나왔다면 범인의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겠지만 보통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은 피해자의 것이나 피해자의 가족의 것일 가능성은 싸그리 무시당했던 것이다. 거기에 국과수에 맡긴 체모조차 국과수는 전부 검사하지도 않았으며 단 2점만 골라서 검사하고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피터 보드 박사는 방사선 동위 원소 감별법도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원자로에서 중성자에 오래 노출된 샘플은 훼손된다는 것이다.
윤성여 씨는 나중에 그알저알에 직접 출연하여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9. 기타
- 8차 사건 무마 및 누명 씌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특진한 최 순경은 10여년간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안히 살다가 199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아직 생존한 당시 동료들은 ' 나는 모른다, 나는 아니다. 다 걔가 지시했고 주도했다'며 이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일방적으로 다 떠넘겼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 재심 재판 과정에서 가해 경찰관들이 증인으로 나온 날, 누명 피해자 윤성여씨는 하얗게 질렸고 점심도 먹지 못했지만 화장실로 들어가 구토를 했다고 한다. 30년이 지나도 트라우마는 나아지지 않는 법. 그래도 증인신문 내내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
- 청주에 사는 윤씨는 공판이 열릴 때마다 일하는 공장에 휴가를 내고 수원의 법정에 출석했다. 공판은 한 달에 한두 차례 열렸다. 2600㎞ 넘는 여정이었다. 그는 아직 자가용도 운전면허도 없다. 재판을 마치고 청주로 돌아오면 다시 공장에 출근해야 했다. 카시트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밤샘 야간근무와 주간근무를 2교대로 반복한다. 연차를 재판에 모두 다 썼다고 한다.
- 피해자의 부모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딸의 사망신고를 차마 제 손으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
- 이춘재가 증인으로 출석해서 진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8차 사건 피해자의 팬티를 끝내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이춘재가 8차 사건 범인이라는 완벽한 증거를 밝히지 못한 꼴이 되었다. 피해자의 팬티에 이춘재의 정액이 묻어 있었는데 이 것을 수사했을 때 발견만 했어도 잠정 결론이 아닌 이춘재의 범행을 공식적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 청주교도소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하던 동료들에 따르면 윤씨는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춘화의 노래 "무죄"를 시도 때도 없이 불렀다고 한다. # 이미 흉악범으로 낙인이 찍힌 터라 같은 재소자들 사이에서도 항상 멸시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자신을 믿어준 사람은 박종덕 교도관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같이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 등 극소수의 사람뿐이었다고. 재심 중이던 2020년 5월23일 윤씨는 문익환 목사 기념관을 방문해 문 목사의 딸인 문영금 관장을 만나고 자신의 옥중 경험과 문 목사 관련 기억을 들려줬다. 나오는 길에 방명록에 “감사합니다. 목사님”이라고 썼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은 “마치 역사의 한 조각을 복원해주신 느낌입니다”라고 감회를 밝혔다.
- 당시 재판은 피고인의 경제적 사정상 사실상 일반 변호사를 고용하기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선변호인을 통해 진행했는데 이 시대의 국선변호인들은 그 질이 매우 불량했고[12]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죄를 주장한 피고인과는 달리 유죄 인정 취지의 형량 감경 쪽으로 변호를 진행하였고 가장 중요한 결심공판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윤 씨는 변호사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바쁜 국선변호인이라도 법정에 나오기는 하는데 상상 초월로 불성실한 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형사소송법 제282조에 의해 변호사는 있어야 하니 재판부에 의해 그날 법정에 나와 있던 다른 사건 변호사가 변호인 역할을 맡아 주긴 했는데 원래 담당 변호사도 아니었던지라 윤씨의 사건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그가 피고인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었을리는 만무했다. 이런 사정으로 항소심이 끝나서 결국 대법원에서까지 패소하여 형량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당시 상고심의 재판장은 김상원 대법관이었으며 주심은 이회창이었다. 관련 기사
- 8차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당시 수사 책임자인 하승균 전 서장(총경)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하승균 전 서장은 이런 세간의 싸늘한 시선이 불편한지 인터뷰를 통해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하승균 전 서장은 "당시 8차 사건은 화성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전담했으며, 자신은 경기청 소속으로 7차 사건의 중요 목격자인 버스 운전수와 7차 사건 수사에 집중해서 8차 사건 수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법이 달라 8차 사건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8차 사건의 범인을 체포했을 당시에 윤 모 씨의 이름은 잠시 듣긴 했지만 잊어버렸다고 말하면서 이춘재와 윤 모 씨의 주장 모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다만 엉뚱하게도 이춘재와 윤 씨가 모두 청주에 있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뜬금없는 소리를 해서 의아함을 자아냈는데 기자가 하승균 씨의 발언을 잘못 내보낸 건지, 혹은 윤 씨가 현재 청주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들은 하승균 씨가 이춘재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니냐고 오해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윤 씨가 청주에 거주하는 이유는 20년 동안 청주교도소에서 살았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청주교도소 교도관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춘재와 윤 씨의 주장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비해 8차 사건은 수법이 다르단 이유로 성급하게 관련이 없는 사건이라 결론지어 버리고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쉽다. 최근에는 외국의 프로파일러 등의 의견으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이전에 연쇄 강간 사건도 재조명되었는데 1차 살인 사건의 데이터를 본 이후 1차 사건 이전엔 살인을 행한 경험이 없다가 1차 때 우발적으로 살인을 범한 후 연쇄살인마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던 사건에도 어떤 연관성이나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유독 8차 사건만 무관한 사건이라 여기고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
- 한편 하승균 전 서장은 이춘재의 자백에서 유의미한 진술이 나왔다는 기사가 뜨기 이전에는 8차 사건 범인은 따로 있으며 이춘재의 자백은 과시일 뿐이라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과는 사뭇 다른 자기방어적 태도이다. "8차 사건은 윤 씨가 범인… 이춘재, 거짓자백으로 과시" 다만 그는 윤씨를 범인으로 내몬 고문 형사들과는 무관하며 그 일을 저지른 형사들은 하승균과 별개의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둬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모든 비난이 화성 사건 총책임자였으며 유명인인 그에게 다 몰리면서 하승균은 어마어마한 비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여러 번 쓰러져서 입원하다가 결국 2020년 11월 12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
사형/존폐 논란에서 대한민국의 사형제 반대 측이 대표적인 예시로 쓰고 있다.
사형 뒤 진범 나왔다면…이춘재 계기 사형제 논란 대한민국은 사형제도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1997년 이후 20년 넘게 집행이 안 되고 있는 준사형폐지 국가다.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윤 씨의 사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사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춘재나 윤 씨 모두 2심에서 사형 →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사형수가 아니었긴 하지만 그들이 처음 선고를 받았을 당시에는 아직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13] 만약 사형이 집행되었을 경우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진범 역시 범행이 드러나기 전에 죽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논란의 여지가 없이 증거가 확실한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인물만 사형시키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이 사건의 윤 씨도 당시에는 '과학수사의 결정체'라며 증거가 확실한 범인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형제 시행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주장 중 하나가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이 누가 봐도 명백하고 본인도 시인한 흉악범들 대상으로 사형제를 시행하자는 것인데, 애초에 법치주의 국가의 법정에서 살인범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증거들이 종합되어서 내려지는 판결이다. 즉, 똑같이 살인을 저질렀지만 한 명은 명백하고 다른 한 명은 애매모호한 면이 있는데 일단 둘 다 유죄를 때리고 전자는 사형을 하자는 식의 판결 따위는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와서야 방사선 동위원소 감별법이 매우 부정확하다고 알려졌지만 90년대에는 최첨단 수사기법이었다. 또 들개가 아이를 물어갔는데 엉뚱하게도 부모가 자식 살해범으로 몰린 호주의 딩고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편견을 가지고 수사할 경우 법의학 분석 결과조차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어마땅할 진범인 이춘재 역시도 사형 당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윤성여씨의 억울함이 풀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윤성여씨가 옥살이를 시작하고 출소한 뒤에 진범이 밝혀지기까지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날 동안 당사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사건의 범인이 윤성여씨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재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춘재가 미궁에 빠져있던 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난 후에 이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기 때문에 빠르게 재심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추후에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이춘재없이도 윤성여씨의 무죄를 입증해줄 수 있는 증거가 나온다고 가정해도, 이미 판결과 형 집행까지 진작에 끝났던 사건이기 때문에 이춘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자백하는 것에 비해 소요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이 사건은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었던 사람과 죽어 마땅한 흉악한 범죄자가 모두 사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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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문서
[1]
1967년생으로 피해자 오빠의 친구라고 알려졌으나 본인이 밝히기로는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안면이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이고 당시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2]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뒤라 당사자들이 모두 은퇴하거나 사망했으므로 큰 의미는 없었다. 이들에 대해 연금과 급여 환수 조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체모의 형태로 범인을 특정하는 방법은 정확하지 않아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4]
실제로 이춘재가 진범인 다른 사건에서 자백을 강요받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
“이춘재 누명 쓰고 숨진 내 동생 사과도 못 받아”
[5]
해당 뉴스의 인터뷰 부분이 죄와 벌의 장면이다. 당시 죄와 벌에서는 우성식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6]
억울하게 구금 또는 형의 집행을 받거나, 재판을 받느라 비용을 지출한 사람에게 국가가 그 손해를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7]
윤씨의 무죄가 확정된 2020년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 최저 일급(8시간 근무)은 6만8천720원이다. 1일 보상금 상한 34만3천600원(6만8천720원×5)에 구금 일수 7천326일(1989년 7월 25일∼2009년 8월 14일)을 곱해 계산했다.
[8]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금을 의미한다.
[9]
대표적인 사례가
헨리 리 루카스로 이쪽은 600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지만 조사 결과 인정된 살인은 11건이었다. 허언이 얼마나 심했는지 인민사원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테드 번디나 영화
암수살인의 모티브
이두홍 등 허위자백을 하는 연쇄살인마의 사례는 상당히 많다.
[10]
한편 다음날 9월 17일부터는
88올림픽이 시작했고, 11월부터는
5공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1990년 11월 9차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전두환의 5공청문회 출석 증언,
3당 합당,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청명계획 및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 선언이 이어졌다. 당시 경찰관들의 수사가 부실하고 국민들의 관심이 낮았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11]
이후 2심에서도 사형이 유지되었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었다.
[12]
사법시험에 합격은 했는데 판사나 검사에서 밀리는 것은 물론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 능력조차 안 되는 법조인들 중에서 능력이 가장 모자란 케이스가 당시의
국선전담변호사였다. 사법시험 합격인원이 대폭 증가하고 로스쿨이 도입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변호사가 넘칠 정도로 늘어나 많이 달라졌다.
[13]
또
1997년
12월 30일에 1992년 혹은 그 이전에 사형이 확정된 모든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이춘재나 윤성여 씨가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을 경우 1997년 12월 30일 혹은 그 전에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99.9%였다고 보면 된다.
문민정부가 퇴임하기 전에
차기 정부를 위해서 사형집행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14]
최근 발생한 유사사건. 화성경찰서의 후계인 화성동탄경찰서에서 관할하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