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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2호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 | Tripitaka Koreana |
|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목판각류 / 판목류 |
수량/면적 | 81,352매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1236∼1251년간)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
영어 | Printing woodblocks of the Tripitaka Koreana and miscellaneous Buddhist scriptures | |
프랑스어 | Les tablettes de bois du Tripitaka Koreana et d’autres textes sacrés du bouddhisme | |
국가·위치 |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 |
소장·관리 | 해인사 | |
등재유형 | 기록유산 | |
등재연도 | 2007년 | |
제작시기 | 1236~1251년 |
[clearfix]
1. 개요
|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대장경이라는 단어는 " 석가모니가 일생 동안 설법한 경전(經)과 계율(律) 및 그 내용들에 대해 후대의 사람들이 첨부한 논서(論) 등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叢書)를 가리키는 말"[1] 이라고 한다. 대장경판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이므로, 말하자면 국립도서관 불교 섹션을 인쇄판형과 종이 인쇄본 통째로 넣어놨다고 보면 된다.
정식 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 또는 '고려대장경'이지만,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팔만대장경은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국가에서 경전 정리 사업으로 진행해 국가별로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데, 한반도의 판본은 고려 시대에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여러 번 인쇄되었다. 대표적으로 해인사의 수다라장 다락방과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월정사 및 부산의 동아대학교에는 해인사 대장경판을 인경하여 만들어진 대장경 인경본 책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조선 전기 일본의 요청으로 하사한 판본도 꽤 많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대장경판과 인쇄본이 모두 남아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 고려판 팔만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처음 8만 1258판으로 집계되었다. 그 뒤로 대한민국 정부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 별도의 확인 작업 없이 이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서 그동안 정확한 수량과 훼손 여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에서는 2000년부터 실시한 '해인사 고려대장경 디지털 영상화 및 기초자료 데이터베이스 사업', 2014년에 수립한 '해인사 대장경판 중장기 종합 보존관리계획'에 따른 조사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경판의 숫자가 8만 1352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1937년에 제작, 추가된 경판 서른여섯 개가 포함된 수치이다. 목적이 불교 경전 아카이브인 만큼, 후대에 집필된 경전이 추가된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일본판 다이쇼 신수대장경에도 후대에 추가된 경판들이 존재한다. 후대에 추가된 경판들의 문화재적 가치를 두고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 학문적,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은 오늘날 북한땅인 묘향산에 있는 보현사에 소장되었는데 여기에도 장경판각이 있다.
2024년부터 디지털화 작업을 시작하여 추후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게 될 예정이다. 관련 기사
2. 역사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인 1236년( 고종 23년)부터 1251년(고종 38년)까지 15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한번 만들었던 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라고도 부른다.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인간의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도 말한다. 해인사에서 장경판전을 안내를 맡은 승려가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그리스도교에서 7이라는 숫자에 상징적 의미가 있듯이, 불교에서 '8만 4천'은 매우 많다는 뜻으로 쓰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가령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인도 곳곳에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부처들이 설한 온갖 법문들을 모두 가리켜 '8만 4천 법문'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이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 함은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모았다는 자신감에 찬 표현이다.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동기는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은 대반야경 600권, 화엄경, 금광명경, 묘법연화경 등 6천여 권을 포함했다. 초조대장경은 원래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후에 부인사와 대구 그리고 팔공산으로 옮겼다.
이후 초조대장경은 1232년( 고종 19년) 몽골군이 부인사를 침략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일부분인 1,715권 인경본만이 전한다. 쓰시마 섬의 한 신사에 있던 500권은 모두 도난당했다. 이 밖에도 국내 수집가나 국가기관에서 인출본을 역수입하여 현재는 국내에도 초조대장경이 상당히 많이 남았고,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 경판들을 본래 강화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선원사로 옮겼다.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398년( 태조 7년) 5월 합천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에 이른다. 이때 뱃길로 옮겼는지 육로로 옮겼는지 학자들마다 설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바다나 강을 주로 사용하고 간간이 육로를 사용하지 않았겠느냐고 보고 있다. 팔만대장경 즉 8만 1352장 경판을 땅에서부터 쌓으면 3200m로 한라산(1950m)· 백두산(2744m)보다 높고, 이를 옮기려면 적어도 2.5톤 트럭 100여 대, 4톤 트럭 70여 대가 필요하기에, 이런 경우 굳이 옮기자면 물길을 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2] 지금도 고령군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어귀에는 개경포(開經浦)[3]라는 이름이 남아 있으므로, 개경포에서부터 낙동강 물길을 따라 해인사로 장경판들을 옮겼으리라 여긴다.
2001년에 개경포 근처에 개경포 기념공원을 조성했고, 성주군, 고령군, 경남 합천군과 해인사, 가야산 국립공원사무소가 합동으로 개경포-해인사 사이를 잇는 '팔만대장경 이운 순례길'을 조성했다.
한편 경판이 완성되고 곧바로 팔만대장경이 인쇄되었다. 인쇄본 전질 역시 경판과 함께 강화도 선원사에서 보관하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 전질은 한양의 지천사로 옮겼다가 춘추관에서 보관했다. 이후의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팔만대장경 전질이 한양에서 반출되어 현재의 북한 지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8년에 '보현사에서 팔만대장경 인쇄본 전질을 보관하고 일본 현지 전시를 추진하지만, 보현사 주지가 완강히 반대한다'는 취지의 기록이 있다. 당시 보현사 주지가 정말 완강히 버텼는지, 인쇄본 전질의 전시는커녕 아예 보현사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현재도 팔만대장경 인쇄본 전질은 북한의 보현사에 보관 중이다.
다만 팔만대장경의 장경판각이 전통 건축물을 형태를 유지하는 데 반해, 보현사의 전질 보존고는 현대에 건축된 건물이다. 원래는 묘향산 중턱의 천연 암반동굴에 암자를 짓고 그 내부에 보관해왔는데, 김일성이 이를 보고 이런 중요한 기록물은 허술한 건물에 함부로 보관하면 안 된다며[4]' 북한 정부이 묘향산에 국제친선전람관을 건설할 때, 비슷한 설계로 보현사의 팔만대장경 인쇄본 보존고를 건설했다. 팔만대장경 전질은 1970년대 후반 시작된 북한 정부의 고서 번역 사업 대상에 포함되면서 1980년대 말 영인본과 해제, 1990년대 중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5]
3. 구성
그야말로 불경대백과사전이라 칭할 만하다. 대반야경부터 화엄경탐현기까지 불경 총 1514종, 6569권 분량을 수록하였다.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방에서 전래된 경(經: 붓다의 말씀)ㆍ율(律: 불교의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 )ㆍ논(論: 후대 제자들의 해설서)의 삼장(三藏)을 비롯하여 대승과 소승의 서적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 한국 등에서 만들어진 경전 까지도 모두 포함된다.구성 및 분류는 연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수록된 불경들의 목록과 대략적인 내용은 위키백과 참고.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운영하는 한글대장경 홈페이지에서 팔만대장경 국역버전을 읽어볼 수 있다!
불경검색과 E북도 지원한다. 한글 팔만대장경
4.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대한민국 국보 제5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원활한 통풍을 위해 건물 앞뒤와 위아래에 위치한 창의 크기를 달리하였다. 이러한 장경판전은 1995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장경판고는 세계의 도서관 건축을 다룬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건축사 교수 제임스 W.P 캠벨의 저서 《세계의 도서관》 첫머리에 언급된다. 팔만대장경에 가려졌지만 팔만대장경을 안치한 장경판전 역시 엄연한 도서관이다. 비유하면 국립도서관 종교 서가의 불교 섹터라고 할 수 있다.
이어 2007년 6월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5. 세 번의 소실 위기
팔만대장경은 제작 이후 사라질 뻔한 위기를 세 차례 겪었다.첫 번째는 바로 조선의 태종과 세종 대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은 본인들이 불교 신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일본 사회의 주요 권력의 축이기도 했던 불교와의 관계를 위해 팔만대장경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승려들도 송(宋), 요(遼)의 대장경을 계승한 것으로[6] 고려대장경이 불경으로써의 정밀도가 굉장히 높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세기에 처음 목판본이 등장했던 북송이나 거란, 고려와 달리 일본에서는 700년 동안 대장경의 목판을 제작하지 못했다. 팔만대장경의 인경판을 얻지 못한 절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인경판을 구해서 일일이 필사하기도 했다.
이미 태조 때에 원료(源了俊), 즉 무로마치 막부의 규슈 단다이였던 이마가와 사다요(료슌)나 간레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 심지어 무로마치 쇼군 원도의(源道義)나 도전(道詮), 원의정(源義政), 원의고(源義高)도 고려대장경을 탐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대장경 인쇄본을 요청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주로 왜구 진압 및 고려(조선) 측 납치자 송환의 대가로 대장경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태종 때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선물로 받은 코끼리를 바치면서 팔만대장경 경판의 인쇄본을 요청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주고쿠 지방인 스오의 슈고 다이묘인 오우치씨의 경우 스스로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인 도래인 가문으로서 친조선 정책을 취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오우치씨를 백제의 후손으로 인정해서 조선 초기에 상당히 교류가 많았다.[7] 그러던 와중 조선에 왜구 진압의 공적 및 옛 한반도 국가인 백제와의 연고를 들어 조선에 꾸준히 팔만대장경판을 요청했다.
당시 불교가 여전히 중요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를 파악한 조선 조정에서는 '대장경은 나라에서도 귀한 것'이라는 연유로 거절하였다. 이렇듯 공식적으로 수 차례 거절해도 일본은 끊임없이 대장경을 요청했고 심지어 쇼군이 나서서 팔만대장경을 받아 오라고 명하기도 했다.
세종 5년(1423년)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사신으로서 조선에 온 승려 케이추(圭籌) · 본레이(梵齡)는 세종에게 팔만대장경 경판을 요청했는데 이때 세종은 "쟤네들 자꾸 와서 팔만대장경 달라고 하는데 그냥 줘 버릴까."라고 신하들과 논의했지만 대신들은 '대장경판은 아깝지 않지만 계속 주다보면 달라는게 많아질 것'이라고 이를 반대했다.
임금이 대장경판은 무용지물인데 이웃나라에서 청구한다 하여, 처음에는 이를 주려고 하매 대신들이 논의하여 말하기를,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왜가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왜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5년( 1423년) 12월 25일 기사
"경판은 비록 아낄 물건이 아니오나, 왜가 계속 청구하는 것을 지금 만약에 일일이 좇다가 뒤에 줄 수 없는 물건을 청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이는 먼 앞날을 염려하는 것이 되지 못하옵니다.''
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임금이 왜의 청구에 응할 수 없다고 답한 것이다.
《 세종실록》 세종 5년( 1423년) 12월 25일 기사
세종이 불교에 귀의한 것은 말년의 일이고 당시에는 대장경이 많은 불교 유물 가운데 하나일 뿐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가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만큼 조정에는 불교 유물을 하사하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대신들이 대장경을 왜에 하사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왜인들의 성질상 요구를 받아들여 주면 나중에 더 큰 것을 요구하리라는 정무적 판단 때문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팔만대장경 경판은 우리도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내주기 어렵다"면서 대신 금자(金字)로 쓴 80권 《 화엄경》과 산스크리트어 문자로 된 밀교경판(密敎經板)과 장경(藏經) 1부 및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8]을 주겠다고 했다. 당시에 불경의 희소성, 가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큰 자비를 베푼 것. 하지만 케이추와 본레이는 "우린 처음 올 때에 고쇼(御所)께 '만일 경판(經板)을 받들고 올 수 없을 때에는 우리들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제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반드시 말대로 실천하지 못한 죄를 받을 것이니 차라리 먹지 않고 죽을 수 밖에 없다"며 세종 6년(1424) 1월 4일부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1월 6일, 조선 조정에서는 예조좌랑 김진(金塡)과 직제학(直提學) 박희중(朴熙中), 호군(護軍) 이예(李藝) · 윤인보(尹仁甫)[9] 등을 차례로 왜관에 보내서 이들에게 식사를 권했지만 이들은 거부했는데 이에 박희중이나 이예, 윤인보가 "경판을 얻고 못얻고가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에 달린 거냐? 외국에 사신으로 왔는데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이렇게 나오면 너희 나라의 체면은 어떻게 되겠느냐?" 가르치자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틀 뒤인 1월 8일에 세종은 호군 윤인보를 보내어 케이추 등을 달래주고 처음 자신이 약속한 밀교 대장경판과 주화엄경판 및 대장경 인쇄본 1부를 내려 주고, 겸하여 일본으로 회례사(回禮使)까지 보낸다는 뜻을 밝혔으며 케이추 등도 이에 사은했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보내 온 객인(客人) 케이추 등이 그 반인(伴人) 카가(加賀)를 결박하여 방안에 가두었다. 그것은 카가가 케이추 등이 고쇼(御所)에 보고할 장초(狀草)를 누설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1월 18일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1월 18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케이추와 본레이는 처음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올 때에 카가라는 승려를 반인(수행원)으로 데리고 왔는데 이 카가라는 승려가 케이추, 본레이가 일본에 보내려 한 장초(보고서)를 유출했다. 그 내용이란 게 "지금 조선에 와서 힘써 대장경판을 청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으니, 병선(兵船) 수천 척을 보내어 약탈하여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고쇼 즉 무로마치 쇼군에게 조선 침략을 제의하는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10] 카가는 케이추의 이 장초를 훔쳐서 조선의 왜통사 이춘발(李春發)에게 바쳤고 이춘발은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또한 화승(畫僧) 슈분(周文)이란 자가 "호군 윤인보가 우리나라 조정과 요약(要約)이 있어서 열일곱 척의 배를 이끌고 일본에 갔다 오려고 한다."고 한 말을 케이추에게 전했던 적이 있는데 이를 왜통사 이춘발이 조정에 함께 고했다.
"전번에 피로(被虜)되었던 사람의 말과 이제 카가가 내어놓은 글이 다름이 없이 같고 또 일본 국왕의 서간에는 역시 말하기를 ‘만일 청구에 따라 준다면 길이 사이 좋게 지내겠다. ’는 말이 있으니, 이 세 가지 말을 견주어 보면, 그들이 말할 수 없는 악한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저들은 오직 대장경판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고, 우리가 화엄경판(華嚴經板)과 밀교 대장경판(密敎大藏經板)과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 등을 보내어 주는 것은 모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니 저들이 비록 말 못할 악한 짓을 하려 한다 해도 우리는 관후(寬厚)하게 대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1월 20일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1424) 1월 20일
세종은 처음에는 "저들이 침략 운운한 말은 괘씸하지만 그것도 대장경을 안 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한 거고 우리가 이렇게 불경을 따로 보내 주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며 최대한 사건을 자비롭게 처리하자고 했지만 마침 왜관의 녹사가 "지금 케이추가 선주와 지 부하 시켜서 그 카가라는 승려를 결박해서 죽이려고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의정부나 육조 당상들은 모두 "이거 윤인보가 누설한 거 같은데 윤인보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겠느냐"며 앞의 화승 슈분의 건을 들어서 윤인보를 구금, 심문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1월 20일, 일본어 통역관 윤인보, 윤인시(尹仁始) 형제 밑 그가 부리던 일본인 노비 세 명이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었다.
한편 케이추나 본레이는 카가를 심문한 뒤에 그가 자신들이 쓴 장초를 조선측 왜통사에 유출한 것을 조선에서 문제삼을 것이 두려워서 자신들을 변론하는 서장을 써서 감호관(監護官) 이승(李升)에게 "금상(세종)의 성덕이 융성하시어 두 나라의 화호가 더욱 두터운데 뜻밖에 저 소승(小僧) 카가가 이딴 뜬소리를 지어내어 화호를 끊으려 드니 감호관께서 이 서장을 예조에 바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변명했지만, 이승도 바보가 아닌지라 "처음에 카가를 잡아갈 때는 뭐 도둑질로 잡아간다고 했는데 이제는 뜬소리를 지어낸다고 하느냐, 그리고 그 뜬소리는 아주 근거도 없는 소리아니냐”라고 반박했다. 케이추 등은 안색을 바꾸고 즉시 휘하 반인(수행원) 10여 명을 거느리고 도보로 예조의 조방(朝房)에 가서 서장을 제출했다. 서장의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일이고 장초 건은 카가 그놈이 지어낸 겁니다. 믿어 주세요."이다. #
서장을 예조에 제출하고 사흘 뒤인 1월 25일에 조선측에서는 최종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케이추 등에게 책임 안 묻기로 결론 났다. 장초를 유출한 카가는 자신은 이춘발에게 속아서 그런 내용으로 장초를 지어내서 유출했다고 항변했고 조정에서는 카가와 이춘발 두 사람 대질심문 시켜 보자고 하는 의론이 나왔다. 의금부 심문에서 카가는 처음 주장대로 "춘발이 나를 꾀어서 글을 지어내서 예조에 바치게 한 것이지, 케이추 등은 모르는 일이다."라고 항변했지만 이춘발 역시 카가의 주장을 반박했고, 카가의 말에 논리가 안 맞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들어 의금부는 이춘발 손을 들어주면서도 카가에 대해서 "외국 사신이니까 특별히 봐 주는 줄 알아라"라며 카가를 자비롭게 석방했다. 앞서 체포되었던 윤인보 형제나 그의 일본인 노비들도 풀려났다.[11] 심지어 이 날 조선의 예조에서는 케이추 등에게 전별연(餞別宴)을 열어 주고 또 산수도(山水圖) 및 도호(道號)의 찬(讚)과 시(詩)를 요청하자 조선측 예관이 써주는 등, 삼족을 멸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을 관후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2월 4일 케이추 등은 서울을 떠났다.
이런데도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케이추가 경판을 갖고 오지 못한 것에 심통이 났는지 조선측 회례사로써 이예와 함께 케이추 등을 일본까지 전송했던 박안신(朴安臣)의 보고에 따르면 아카마세키[12]에서 조선 사신들은 55일 동안을 교토로 들어가지 못하고 회답도 받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고, 중간에 오우치도노(大內殿)[13]가 중재해서 조선 사신단이 겨우 교토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왜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19년( 1437년) 4월 28일 기사
"왜국에서 매양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 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開慶寺)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에 논의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으로 하여금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세종 19년( 1437년) 4월 28일 기사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에서 지속적으로 요청하는 팔만대장경을 합천에 둘 게 아니라 서울로 옮기는 게 어떨지 검토도 했다. 지방에 있으니까 별로 안 중요한 유물처럼 보여서 일본이 계속 요구하는 것이라고 판단, 수도로 옮긴 뒤에 수도로 옮길 정도로 중요한 유물임을 알려서 일본의 요구를 뿌리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용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결국 취소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팔만대장경에게 좋은 일이 되었다. 조선 당시의 승유억불 기조를 비롯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 전쟁 같은 여러 재난을 감안하면 서울로 옮겼다면 현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대장경의 이전 장소로 거론된 양주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자주 거처했고 무학대사가 머물던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유림들이 방화하는 등 훼손하여 이미 16세기에 소실된 이래 흔적만 남았다. 개경사 역시 1408년( 태종 8년) 지금의 구리시 검암산에 태조 이성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세워져 유생들의 출입을 왕명으로 막았던 절이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았다.
이후에도 일본은 지속적으로 사신들을 보내 심지어 이천도국(夷千島國), 구변국(久邊國) 같은 존재하지 않는 가상국가로 위장하면서까지 팔만대장경을 요청하지만 실패했다. 실록 기사 1, 실록 기사 2 일본뿐만 아니라 류큐 왕국도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고 팔만대장경판의 저본인 인경본을 받아갔으며 나중에는 원본까지 요청했지만 당연히 조선에서 거부하였다. 류큐 조정은 인경본을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 보관했지만 1609년 사츠마번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부경대 사학과 이근우 교수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는 15곳의 사찰에 고려대장경의 인쇄본이 전해지고 있고, 그 가운데 9곳이 조선 전기에 일본으로 간 것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 우왕 7년( 1381년) 재상이었던 염흥방 · 염제신 등 16명이 공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시주해 인출한 것으로 고려 말 문인 이색의 발문이 붙어 있으며[14] 태종 14년(1414년) 조선 조정에서 일본에 선물로 보냈다. 그 뒤로 스오(야마구치)의 보광왕사(普光王寺)에서 아키(히로시마)의 이쓰쿠시마 신사, 교토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를 거쳐 최종적으로 1962년 오타니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
대장경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조선 중기 초유의 국난도 버텨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27일에 성주를 점령했는데, 여기는 해인사 코앞이다. 성주에서 합천 해인사로 들어와 팔만대장경판을 약탈하는 데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한 가까운 거리였다. 다이묘가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지만 다이묘중 한명인 가토 기요마사가 불국사를 불태워 버린 전적이 있었다. 이때 의령에서 창의한 곽재우를 비롯하여 거창에서는 김면이, 합천에서는 정인홍이 각각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맞섰으며, 해인사에서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승려 소암(昭巖)이 승병들을 모아 해인사로 접근하는 왜구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결국 왜군은 8월부터 9월, 12월의 의병들의 공격에 해인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듬해 1월 선산 방면으로 철수해 해인사는 무사했다. 이때 소암이 승병들을 이끌고 왜군이 절로 들어오는 앞의 큰 산고개를 막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했다는 고개가 현재도 왜구치(倭寇峙)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건재하였다. 당시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삼고 후대의 판본과 연구 등을 담은 다이쇼 신수 대장경을 제작했다.
두 번째는 해인사에 벌어진 화재들로 해인사는 일곱 번에 걸쳐 불이 나며 꽤 큰 피해를 입었으나, 그때마다 다행히도 대장경은 무사했다.
숙종 21년(1695):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숙종 22년(1696):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 39년(1763): 화재 정조 4년(1780):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법성요 화재 |
사실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고, 이를 보관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이 화재를 방지하는 과학적 설계와 배치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으로 나무로 만든 목조건물이므로 화재에 굉장히 취약한데 이를 모두 버텨냈다.
세 번째로 경판들이 소실될 뻔한 일은 6.25 전쟁 때로,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으로 발생한 북한군 빨치산들로 인한 것이었다. 산속에 숨어 유격전을 벌이던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을 동원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되자, 당시 군경은 첩첩산중에서 빨치산들이 은거지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불교 사찰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는데 합천 해인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대령이던 김영환 장군은 합천 해인사에 보관 중이던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해인사를 폭격하는 대신 주변 상공을 선회하며 해인사 주변에 기총 소사를 하는 선에서 무력 시위를 하였다. 그 결과 부담감을 느낀 빨치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사에서 철수했고 덕분에 대장경은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이리저리 미쳐 날뛰는 빨치산들도 대장경에는 손대지 않고 그냥 떠났으니 이 또한 행운이라 할 만하다. 물론 당장 살아서 빠져나가기 급급한 빨치산들 입장에서 군사 자원도 아닌 대장경은 손 댈 이유가 별로 없긴 했다. 하다못해 조그만 귀중품이면 슬쩍할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고 말이다.
이 공로로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영환 장군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웹상에서는 김영환 장군이 미군 군사고문단의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했고, 나중에 이 소식에 분노한 이승만 대통령의 손에 죽을 뻔했다가 그의 형인 김정렬 장군의 설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정치적인 갈등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갈등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감리교 신자에 극단적인 반불교 주의자였기에 그랬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고려원에서 나온 만화 불교에서도 이승만이 전쟁을 기회로 이런 짓을 벌였다고 강력하게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공군 9대 참모총장 장지량 예비역 중장이 김영환 장군의 공적을 가로채기 위해 한 거짓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회고록은 물론이고 각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해인사 폭격을 저지한 것은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하였다. 김정렬 장군의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한 행각이 굉장히 오래되었다고 한다. 2002년 해인사에서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 공적비'를 세우려 하자 장지량 장군이 해인사에 전화를 걸어 '해인사 폭격을 저지한 것은 자신의 공로'이니 자신의 이름도 새겨넣으라고 요구했다. 해인사는 진실 여부를 재조사하기로 하고 재조사 및 해당 주장을 한 장지량 장군에게 증거제출을 요구했으나, 장지량 장군은 증거제출을 거부하고 잠적했다. 결국 재조사에서도 해인사 폭격 거부는 김영환 장군의 공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김영환 장군 공적비는 계획대로 건립되었다.
결국 2008년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에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것이 김영환 장군이 아닌 장지량 장군으로 소개되었고, 2009년 7월 해당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발족된 공군 역사자료발굴위원회를 통해 재조사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는 당연하게도 해인사 폭격을 저지하고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사람은 김영환 장군이었음을 재확인하였다.
다만 "만약 당시 참모였던 장지량 중령이 제10전투비행전대장이었던 김영환 대령에게 해인사 폭격의 부적절성을 설명하고 폭격임무 유보를 건의했다면 그것은 참모로서 현명한 판단이었다."라는 사족을 달아놓기는 했다. 이는 장지량 장군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거짓 주장이 탄로나는 바람에 망신당할 것이 뻔했던 장지량 장군을 배려한 것에 불과하다. 혹여나 실제로 그러한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일종의 안전장치 성격으로서 삽입한 대목이기도 하다.
장지량 장군은 해인사 사건 뒤에 시작된 ORI가 "해인사 폭격 거부로 인해 앙심을 품었던 해롤드 윌슨 소령의 보복"이라고 증언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신뢰성은 부족한 편이다. 애초에 공비토벌작전은 미군 군사고문단의 명령이 아니라 공비 토벌에 투입되었던 전투경찰의 요청으로 시작된 것이었고, 미 공군의 양해를 구해 실시한 한국 공군의 단독 작전이었기 때문에 장지량 말마따나 미군 고문관이 쫓아와서 죽이네 마네 할 일은 없었다.
참고로 한국 공군은 공비토벌작전만큼은 단독적으로 수행하기를 원해서 이에 대한 허가를 구하고자 제 5공군사령관이었던 얼 E. 패트리지 장군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을 전해준 사람은 다름아닌 김영환 장군과 장지량 장군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던 해롤드 윌슨 소령이었다. 장지량의 회고록에서 안하무인한 인간 말종으로 묘사된 해롤드 윌슨 소령은 6146부대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으로, 딘 헤스 소령의 후임으로 1951년부터 6146부대의 지휘관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해롤드 윌슨은 상술한 한국 공군 단독 작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대신 전달해주거나, 1951년 강릉기지에서 단독 출격을 시작한 한국 공군을 따라 사천에서 주둔 중이던 6146부대를 강릉기지로 재배치시키고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지휘를 받게끔 했을 정도로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해롤드 윌슨 소령이 6146부대의 창설 멤버였던 만큼 딘 헤스 소령과 마주할 일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딘 헤스 소령에 대한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인식은 배려심이 많고 친절한 분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장지량의 주장처럼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동맹국 군인을 죽인다고 협박하거나 뜻대로 안 되자 보복을 할 정도의 인물을 과연 자신의 후임으로 임명시켰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이 밖에도 장지량 장군의 주장과 비슷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대신 김영환 장군의 설명을 들은 미 공군 소령, 정황상 6146부대의 지휘관 해롤드 윌슨 소령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공군 소령이 감탄을 하며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는 버전도 있다.이 일화는 서상순 예비역 중령의 수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피엔딩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때문에 국방부와 국군의 정훈교육 자료 및 홍보물에서 김영환 장군의 해인사 출격을 소개할때는 서상순 중령의 수기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김두만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이 주장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해인사 출격 당시 서상순 예비역 중령은 이제 막 훈련비행 과정을 마치고 F-51로 기종 전환 훈련 중이었기 때문에 공비토벌작전에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5.1. 보관의 어려움
대장경판의 일부가 세월의 흔적에 훼손되기도 했다. 개중에는 벌레가 파먹은 듯한 흔적도 있어서, 흰개미 같은 나무에 해충이 되는 벌레가 노릴까 염려한 해인사 측에서 흰개미가 둥지를 지을 만한 근처 나무를 미리 자른 적도 있다. 하지만 곤충학자들에 따르면 흰개미는 오래된 경판을 먹지 않으니 큰 걱정이 없다고 한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대장경판의 보관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어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가 차지 않는 목판 보존에 최적화된 건물이다. 위에 나온 일부 대장경판의 훼손은 제3공화국 때 석굴암처럼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지어 옮기려는 시도를 하려다 갑작스럽게 외부 습기에 닿으면서 생긴 일이다. 그래서 대장경판 이전은 취소되고 현재 해인사를 유지하는 형식으로 보존 중이다. #먼지가 오래 쌓여도 경판에 해가 된다. 예전에는 승려나 불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나하나 붓으로 천천히 먼지를 털었지만, 이제는 일반인이 장경판전 안에 들어갈 수 없게 줄을 쳤다. 무속인이나 기독교 광신도가 불을 지르려 한 적이 있어서 막은 것이다. 또 관광객이 많아져서 먼지가 더더욱 많이 쌓이고 저렇게 털 틈도 없다. 진공청소기를 쓰자면 경판에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한 청소기 업체에서 여섯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바람을 최소화하고 나무에 해가 안 가도록 연구하여 특별히 만든 청소기를 사용하지만, 역시 사람 손으로 터는 게 낫다고 하여 주기를 두고 관리하며 손수 털기도 한다.
경판의 마모 문제 또한 중요한 관건이다. 반야심경 등 대중에게 인기가 많아 인경(印經)할 일이 많은 경판에서는 글자가 깨진 부분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나마 1960년대 이후로는 인쇄를 안 하므로 글자가 마모될 염려는 없다고 한다. #
화재에 대비하여 해인사 측은 자체적으로 소방차를 구비했다. 해인사의 승려들은 '해인사'라는 글씨가 적힌 소방차를 직접 몰고 화재 대비 훈련을 자주 시행한다. 극성 종교 광신도들의 테러를 염려하는 의견도 존재하며, 해인사 측에서도 숭례문에 불을 지른 채종기 같은 정신이상자를 우려하여 만일을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른 사찰에서도 화재 위험에 대비해서 소방차를 구비 중이라 해인사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일부 사찰에서는 사진에 나온 것보다 더 큰 소방차도 보유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장경판전 안으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고 있는데, 해인사 관리인에 따르면 무당 등이 부적에 불을 붙여 장경판전 창살 사이를 통해 안쪽으로 던져 넣는 일이 많아 이제는 주변도 출입을 통제한다고 한다. 2017년과 2019년 대장경 세계문화축전 때에는 이례적으로 장경판전 내부 마당까지 개방했고, 2021년 6월 19일부터 장경판전의 4개 동 중에서 법보전을 주말, 휴일에 개방해 국민들에게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법보전 관람 신청은 해인사 홈페이지에서만 가능하며, 초등학생 이상 10인~20인 이내로만 하루 두 차례 운영된다고 한다. 사진 촬영도 금지. 상당기간 예약이 꽉 찬 상태다.
6. 의의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보통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데,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팔만대장경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 1514종 6569권이다. 이들을 책으로 엮으면 자그만치 680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 되는데 날마다 한 권씩 읽는다고 가정해도 18년이 넘도록 읽어야 끝을 볼 수 있으니, 그 규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고려대장경은 당시 어느 한역장경보다도 수록범위의 규모가 가장 큰 불전이므로, 그 내용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또한 팔만대장경은 역대의 모든 대장경 중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당시 개태사의 승통 수기(守其)를 비롯하여 여러 교정승이 동원되어 교정작업을 실행했는데, 초조본, 북송본, 거란본과의 대조는 물론 각종 문서들을 섭렵하여 본문의 오자, 탈자를 바로잡고 누락된 부분을 논증하여 보수하였으며, 이런 대장경 전반에 걸쳐 교정한 내용과 이유를 소상하게 기록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서른 권을 엮어 새로 추가하였다.
대반열반경 남본(南本)처럼 당대 대장경 목록에서 보이지 않고, 팔만대장경에만 수록된 불경도 있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은 수천만 개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와 탈자가 거의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등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해인사가 '법보사찰'로 불리는 까닭도 팔만대장경 때문이다.
6.1. 단순한 미신이란 오해
현행 한국사 교육에서는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식민사관을 아직도 그대로 가르친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외적의 침공이라는 국난 앞에서 종교에만 의지하던 고려 조정의 나약함과 무능한 모습만을 주목하는 꼴이 된다. 이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 宏)는 1924년에 발표한 논문 〈고려의 대장경〉에서 팔만대장경이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국방능력이 없었던 고려 군신들의 종교상 미신의 결과물"이라고 비난한 것이다.[15] 12~13세기 문신 이규보도 "전에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거란이 알아서 물러갔으므로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오해를 사기 쉬웠던 면도 있다.[16]이에 대해 서여 민영규(閔泳珪) 박사는 1996년에 발표한 〈고려대장경 신탐 - 바로 잡아야 할 그리고 새로운 몇 가지 사실들〉이라는 논문에서 대장경 조판이 가지는 의의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여기서 민 박사는 고려 최씨 무신정권이 불교계를 회유하기 위한 결과물이 바로 재조대장경 조판이었다고 주장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선종 불교와 가까웠기에 기존 왕실 및 귀족들과 가까운 교종 불교계와는 상대적으로 사이가 소원했다. 몽골군 침공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으로 부인사(符仁寺)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는 지경에 이르자,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인 교종 불교계를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렇게 최씨 정권을 중심으로 국가 결속을 강화하고자 '대장경'이라는 16년에 걸친 불교 사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 #
일제가 만들어낸 이 식민사관이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닌데, 일본에서는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 때문.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13세기 말에 몽골이 쳐들어오자 가메야마 덴노와 싯켄 호조 도키무네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를 믿는다며 많은 동물들을 죽여 그 피로 불경을 필사하고 일본 각지 사찰에 봉폐를 보내며 몽골 침공이라는 국난을 자신들이 해결하는 대신 신불이 나서서 물리치길 기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가 팔만대장경을 비난했을 당시 한국인 사학자들은 "너희 천황이야말로 그랬는데 왜 그건 언급하지 않냐?"라며 일갈했고, 이케우치는 이에 대해 입 다물고 내로남불을 시전했다.
일본의 사례와는 다르지만 티베트,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 등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불교 왕조에서는 외침이 있을 때 불교 사원을 증축하거나 대장경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목탁 두드리면서 외적을 쫓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 인류사에 등장했던 역사 깊은 대형 종교와 마찬가지로 전근대 국가에서는 왕권과 별개로 존재하던 정치세력이었고, 승려들은 한자로 적은 불경을 읽고 설법하고 토론할 수 있는 당대의 지식인이며 사찰을 지키기 위해 승병 위주의 무장도 하고 있었다. 즉 그 시대에는 상당히 교육받은 인재가 많이 있고, 무력을 갖춰 자기 방어까지 가능한데 세속 권력과는 분리된 큰 정치세력으로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 세속권력이 당연히 불교의 도움도 받아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야, 나라 망하게 생겼으니까 나 도와줘." 한 마디로 좌지우지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 이유로 세속권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종교가 존재했고, 그렇기 때문에 왕도 중대 상황에서 불교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교단을 상대로 정치를 하고 이들에게 적절한 당근을 제공하여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는 이미 거대한 사원전과 사원노비, 수공예품 생산 등을 통한 상업활동으로 경제적 이득은 충분한 상황이라 단순한 경제적 보상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원 개축이나 대장경 판각을 비롯한 사원 단독으로 하기 힘든 대사업 위주로 보상을 하였으며, 이를 '불심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포장하여 승려들이 나가 싸우게 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대장경 조판은 웬만큼 불교에 진심이라 국가 권력이 불교 진흥을 위해 힘쓸 수 있는 국력이 되고, 학문적으로도 불교와 관련된 한 국가의 지식역량을 총 집대성하는 국가 사업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불교국가여도 선진국 아니면 자체 대장경을 제작하고 보유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역사에 대장경판이 존재했다고 남아있는 국가도 거란, 송, 고려, 크메르 제국, 꼰바웅 왕조처럼 역사 교과서에서도 언급되는 지역 패권을 쥔 국력의 국가 외에 흔치 않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17] 그렇기에 고려도 진지하게 국책사업으로 대장경 조판을 시작했고 최우는 임시 수도 강화도에 대장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였다. 판각의 지휘는 임시 수도 강화도의 대장도감에서, 실제 판각은 강화도 선원사[18]와 경상남도 남해군 지역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이 맡았다. 이 임시기구는 고려 전국의 여러 승려들이 맡았는데, 말년에 삼국유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일연도 남해군의 분사대장도감에서 1249년부터 3년 동안 일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의 지적에 따르면, 남해분사대장도감 조조의 간기를 구비하는 것은 당시 최씨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의 처남 정안(鄭晏, ?~1251)의 투자를 통해 이루어졌다. 정안은 무신정권 시기 활동했던 정세유의 아들인 참지정사 정숙첨의 아들인데, 정숙첨은 최우의 장인이기도 하다. 최우 자신도 생전에 진양후(晉陽侯)에 봉해졌는데, 진양은 지금의 경남 진주시로 최씨 무신정권의 개인 식읍이기도 했다. 정안 자신도 하동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정씨였으며 남해와 진주, 하동은 서로 그리 먼 거리에 위치한 지역도 아니다. #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하고 오탈자가 거의 없기로 유명하다. 서체가 일정한 것은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고자 거의 1년 가까이 훈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에 새긴 5272만 9천 자 중 오탈자는 단 158자만이 발견되었는데, 이 또한 현대에 와서 겨우 찾아낸 것이다. 오탈자율이 고작 0.000 002 996 5%으로, 200자 원고지 1,645장 분량 중 오탈자가 한 글자밖에 없는 것과 같은 셈이다. 현대로 치면 A4용지에 10포인트 글자로 200쪽 가량 분량을 빼곡하게 채웠는데도 오탈자가 한 글자뿐인 것과 비슷하다.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하므로, 이 작업을 하면서 절을 무려 1억 5천만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팔만대장경을 새겼을 때의 마음가짐을 짐작할 수 있다.
7. 기타
소설가 조정래는 대장경 조판을 소재로 《대장경》을 썼다.오늘날어 전세계 불교학계에서 원전 텍스트로 많이 참조하는 일본의 다이쇼신수대장경은 이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효, 의상, 균여 등 우리나라 승려의 글도 대장경에 일부 수록되었다.
2012년 MBC 주말 드라마 무신이 대장경 천 년 특별기획 드라마이다. 1012년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지 1천 년이 된 기념으로 제작한 것으로, 합천군에서도 제작 지원을 했다. 작품 중반에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아냈으며, 드라마로서 처음으로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에서 촬영을 하기도 하였다.
2019년에 개봉했던 한글 영화 나랏말싸미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 세종 때 왜나라 사신들이 팔만대장경을 요구할때 그냥 주려던 세종이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사신들의 요구를 거절한 역사적 기록을 왜곡하여 숭유억불의 시대에 왜나라 사신들과 조정 신료들이 대화하는 장에서 세종은 무력하게 왜나라 사신들에게 당하다가 갑자기 신미가 끼어들어 유능하게 해결한 것인데, 세종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세종에게 정치적 조언을 준 대신들은 무조건 불교를 배척하는 꼰대로 왜곡했다. 영화상 실존인물 신미라는 인물이 세종과 접촉하는 영화적 장면을 넣는다 해도 사건의 시작 왜나라 사신 요구, 끝내 팔만대장경은 주지 않겠다는 같으나 이에 대한 과정을 주인공 신미의 유능함을 부각하기 위해서 세종과 당시 조정 신하들을 심각하게 깎아내렸다. 감독이 나랏말싸미를 한글 창제에 대한 숨겨진 역사를 그리고 싶었다고 홍보했는데 영화 서장이 팔만대장경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고의적으로' 왜곡시켜 버렸으니 한글 창제의 진실이 신미라는 주장도 대중들은 역사 왜곡이라며 비판했다.[19]
2022년 7월 21일 태국의 방콕 국립박물관에서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의 사진 옆에 "중국이 목판 130,000개에 새겼다"는 잘못된 설명을 표기하였다. 심지어 여몽전쟁 때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972년부터 983년까지 만들었다고 하여 제작년도마저 틀리게 소개하였다. 아무래도 중국 북송에서 한역대장경이 집대성된 시점을 소개하려다가 사진을 잘못 선택한 모양이다. #
이 문화재가 위치한 해인사의 이름을 딴 광주대구고속도로 해인사 요금소의 디자인 모티브이기도 하다.
유명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 모디파이어로 추가되었는데 시대관 수용을 크게 촉진시키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팔만대장경 덕에 AI 조선조차 첨단 시대관을 발빠르게 수용해 한반도를 빡세게 개발, 정복 없이 열강 말석에 들어설 정도이다.
2023년 11월 일본이 팔만대장경의 인쇄본을 포함한 조조지 3대 불경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의 등재를 추진중이라서 논란이 벌어졌다. # 문서 참조.
경남 양산 통도사에는 1992년에 성파 승려가 당시에 통일조국과 세계 평화의 바람을 세워 팔만대장경을 모본으로 제작한 16만 도자대장경이 있다. # 양면을 목판으로 새긴 것이 아니라 도자기 소재로 판을 초벌구이한 뒤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한 면만 새겨 다시 구웠으며, 다 만드는 데만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한 판의 크기는 가로 약 52㎝, 세로 26㎝, 무게는 4㎏ 로 총 16만 3000여 개.
7.1. 시험문제 출제 유형
팔만대장경 문제는 나올 때도 있고 안 나올 때도 있다."팔만대장경 이전에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진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에 의해 불타버렸다"라는 지문을 혼동하여 "초조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을 막고자 만들어졌다"라고 하면 틀린 답안이 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초조대장경의 일부 인경본 1715권이 현재 일본 교토 난젠지(南禅寺)에 남아 있으므로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출제위원들도 이 점을 알고 있기는 할 것이다.
한 시험에서는 팔만대장경의 경판 개수를 묻는 객관식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다고 한다. 팔만대장경판과 팔만대장경전의 건립 왕조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또한 해인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사찰이고,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 문화재이며, 장경판전은 조선 시대 건물이라 시대 문제로 혼란을 주기도 한다.
7.2.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
2011년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45일 동안 대장경 간행 천년을 기려 소재지인 합천에서 열린 행사.원래도 해마다 팔만대장경 이운 행렬 재현 등의 관련 행사가 열렸지만, 이 행사가 특히 유명해진 까닭은 팔만대장경 진본 두 점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해인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경판전 안에 꽂혀 있는 모습을 한 번쯤은 봤겠지만, 실제 판 전면이 일반에 공개된 사례는 이전 두 차례뿐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몰린 까닭은 해인사 측에서 다음 번 진본 공개는 1세기 뒤에나 다시 고려할 것이라 공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 안 보면 죽기 전에 다시는 못 본다는 것. 언론에서는 '100년 마케팅'이라고들 일컫는다. 덕분에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진귀한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6년 뒤인 2017년 10월 20일부터 4년 만에 열리는 축전을 기념하여 열이레 동안 대장경 이운 행렬을 재현하는 행사와 함께 진본 여덟 점을 새로이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9. 국보 제32호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
기독교의
성전 중에
성경을 포함해서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들과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현대에도 해운의 수송량은 육로나 항공로가 따라잡기 어렵다.
[3]
'불교 경전의 길을 연 포구'라는 뜻이다.
[4]
당시에는 한국이든 북한이든 전통 건축물의 기능과 가치에 대해 연구되지 못하였기에 이런 소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박정희 정부 시절
광화문이나
석굴암 복원 및
현충사 건축을
콘크리트로 하는가 하면,
1972년 나무로 된 장경판전을 헐고 콘크리트로 된 장경판전을 지어 그곳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려다 도리어 콘크리트 보존고에 들어간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뒤틀리는 등 문제가 생기면서 다시 나무로 된 기존의 장경판전에 모셨다.
#
# 장경판전도 제1공화국 시절이던
1955년에 기존의 기와가 너무 보잘것없다는 이유로 전부
구리 기와로 바꿨다가 오히려 경판에 이슬이 맺히고 썩는 문제가 발생해 다시 구리 기와를 빼고 기존의 진흙 기와로 되돌려야 했다.
#
[5]
사실 이 영인본과 완역본이 출간되기 전까지, 국내에선 북한의 '팔만대장경 전질 보유'가 '주장'에 불과하다는 학설이 우세했다. 왜냐하면 거의 3백 년 가까이 공식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기록에 등장하였고, 그 사이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영인본이 나오면서 진본이고 완전한 전질임을 확인하였다. 특히 경판 전체가 대중에게 완전히 공개된 바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북한이 온전한 진본의 전질을 소장하지 못했다면 영인본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6]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에 따르면 고려의 대장경은 송(송본), 거란(요본)의 것과 구별하여 향본(鄕本)으로 불렸다고 한다.
[7]
나중에 일본이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면서 오우치씨는
모리 모토나리에게 멸망했다. 참고로 모리 모토나리의 모리씨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으며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력이 되었다.
[8]
화엄경 본문에 주석을 붙여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9]
이 사람은 왜통사 즉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었다.
[10]
세종실록에는 이보다 앞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쓰시마에 있다가 돌아온 조선 사람이, 일본 국왕(무로마치 쇼군)이 "이제 조선에 사신을 보내 대장경판을 구하려고 하는데 쟤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침략할 테니까 너희들도 미리 전함 수리 해 둬라."라고 쓰시마 도주에게 통보했다고 알린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이렇게 케이추가 실제 침략 운운한 보고서까지 유출되고 보니 조선 조정으로서는 식겁할 수밖에.
[11]
다만 윤인보는 국가 기밀 누설 문제로 2등 체감되었다.
[12]
지금의
시모노세키이다.
[13]
당시 오우치 집안의 당주였던 오우치 모리하루(大内盛見, 1377~1431)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오우치 모리하루의 이름이 '다다량덕웅(多多良德雄)'으로 나오는데 다다량은 '다타라'로 오우치의 혼세이고, 덕웅은 모리하루가 오에이 13년(1406년) 무렵에 출카가고 나서 쓴
계명이다.
[14]
참고로 이색은 나옹이 신륵사를 중창하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신륵사에 봉안할 때에도 비용을 보탰다.
[15]
그런데 아래에 나오듯 일본은 고려와 달리 정말로 국난을 맞을 때 불경에 집착하며 하늘에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만 바란 바 있다. 게다가 팔만대장경을 고려때부터 일본 제국까지 끊임 없이 탐내며 오직 팔만대장경때문에 침략전쟁까지 하려 했을 정도이다.
[16]
당시 몽골 제국도 종파는 티베트 불교로 달랐지만 쿠빌라이 때부터 고려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대우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해당 문제와 별 관련이 없다. 몽골 제국은 불교를 믿든 안 믿든 쓸어버릴 때는 쓸어버리는 나라였다.
[17]
일본도 불교국가지만, 정작 일본은 불교를 지원할 세속권력이 취약하거나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대장경 조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대장경 조판은 단순한 문화재 제작이 아니라 불경을 인쇄해 다른 지역에 포교하는 용도로 쓰일 것까지 고하여 시작한다. 그러기에는 일본이 불교를 포교할 곳이 한정적이고, 대장경판까지 만들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 건국 이후 팔만대장경을 탐냈고, 1920년대에 와서야 다이쇼 신수 대장경이라는 형식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
현지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현 충렬사 인근으로 비정된다.
[19]
감독의 본의인지 영화 캐치프라이즈인지는 모르나 영화 개봉 전부터 감독은 팔만대장경과 한글의 연관성이라는 주장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