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3 00:34:4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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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장.svg 소련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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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d700> 전쟁 교전국
1924년 에스토니아 쿠데타 시도
,1924,
<colbgcolor=#f5f5f5,#191919>
봉소전쟁
1929
스페인 내전
1936 ~ 1939
에스토니아-소련 국경분쟁
,1938,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에스토니아 공화국
소련-일본 국경분쟁
1938 ~ 1939
<colcolor=#ffd700> 하산 호 전투
1938
할힌골 전투
1939
제2차 세계 대전
1939 ~ 1945
폴란드 침공
1939
겨울전쟁
1939 ~ 1940
베사라비아-북부코비나 침공
1940
발트 3국 점령
1940
대조국전쟁
1941 ~ 1945
계속전쟁
1941 ~ 1944
페르시아 침공
1941
소련-일본 전쟁
1945
이저사변
1944 ~ 1949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그리스 내전
1944 ~ 1948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왕국
6.25 전쟁
1950 ~ 1953
1953년 동독 봉기
1953
라제즈드노이호 사건
1953
헝가리 혁명
1956
U-2 격추 사건
1960
베트남 전쟁
1960 ~ 1975
소모전
,1967 ~ 1970,
프라하의 봄
1968
소련-중국 국경분쟁
1969
앙골라 내전
1975 ~ 1991
파일:앙골라 민족해방전선 당기.svg
FNLA
파일: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기.svg
FLEC
오가덴 전쟁
1977 ~ 1978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 ~ 1989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쟁
1988 ~ 1994
리투아니아 독립 무력 진압 시도
1991
라트비아 독립 무력 진압 시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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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키스탄 국장.svg 파키스탄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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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411C> 전쟁·분쟁 교전국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47 ~ 1949,
<colbgcolor=#fff,#191919>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발루치스탄 분쟁
,1948 ~ 현재,
발루치스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1965,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1971,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방글라데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 ~ 1989,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파일: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87–1992).svg 아프가니스탄
걸프 전쟁
,1990 ~ 1991,
파일:320px-Flag_of_Iraq_(1991-2004)_svg.png 이라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쿠웨이트 공화국
모가디슈 전투
,1993,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국민동맹(SNA)
카길 전쟁
,1999,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테러와의 전쟁
,2001 ~ ,
파일:지하드 깃발.svg 알카에다
예멘 내전
,2015 ~ 현재,
파일:예멘 국기.svg 최고혁명위원회 파일:지하드 깃발.svg 알카에다 파일: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 국기.svg ISIL
2019년 인도-파키스탄 분쟁
,2019,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내전
,2021,
파일: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기.svg 아프가니스탄 국민 저항 전선
2024년 이란-파키스탄 분쟁
,2024,
파일:이란 국기.svg 이란
2024년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분쟁
,2024,
파일:탈레반 기(1996~2021).svg 탈레반 정권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무자헤딘 보병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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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무자헤딘 보병장비
개인화기 소총 볼트 / 폴링 블록
마티니-헨리, 리-엔필드, 모신나강, 르벨 M1886, 한양 88식
반자동소총 SKS, M1 개런드, L1A1 SLR
자동소총 AK-47, AKM, AKMS, 56식, 63식, AK-74, AKS-74, AKS-74U, AKMSU, G3A2, G3A4, M16A1, CQ 5.56
머스킷 제자일
기관단총 스텐 기관단총, PPSh-41, MP5
권총 웨블리 리볼버, TT-33, 54식 권총, PM, 스테츠킨 APS
지원화기 기관총 Vz.26, DP-28, MG34, RPD, DShK, 54식 기관총, SG-43, KPV, PKM, 67식 기관총
대전차화기 RPG-2, RPG-7, 69식 화전통, RPG-18, RPG-22, B-10, 65식, AT4, 56식, 밀란, BGM-71
맨패즈 블로우파이프, FIM-43, FIM-92, 9K310-M,9K38, HY-5, Sakr
박격포 63식 박격포, 82-PM-37, M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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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파일:지구본_white.png 국가별 운용무기 | 파일:gun_icon__.png 냉전기 보병장비 }}}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소련군 보병장비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0px -11px;"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보병장비
개인화기 소총 <colbgcolor=#fefefe,#393b42> M1891/30
SKS, SVD
AKM, AKMS, AK-74, AKS-74, AKS-74U, AKMSU, VSS
권총 TT-33, PM, APS, PSS
지원화기 기관총 RPD, RPK-74, PKM
SGM, DShKM, NSV, KPV, GShG-7.62
유탄발사기 GP-25, GP-30, SSK-1 티쉬나, AGS-17
화염방사기 LPO-50
대전차화기 RKG-3, RPG-7, RPG-16, RPG-18, RPG-22, SPG-9, RPO-A, 9K11, 9K111, 9K111-1
박격포 2B9 바실료크, 2B14 포드노스, 2S12 사니, 2B16 노나-K, 240mm M240 박격포
견인포 D-30, M-30, D-20, 2A36 기아친트-B
맨패즈 9K310-M,9K38, 9K34
대공포 ZU-23, ZPU-4
폭발물 수류탄 F-1, RGD-5
지뢰 PFM-1, MON-50, PMN-1 / PMN-2, POMZ-2M
냉병기 총검 6Kh2, 6Kh3, 6Kh4, 6Kh5 }}}
{{{#!wiki style="margin-top: -30px; margin-bottom: -10px; letter-spacing: -0.9px; font-size: 0.82em"
※둘러보기 : 파일:러시아 국기.svg 파일:소련 국기.svg 러시아·소련군의 운용장비 | 파일:gun_icon__.png 냉전기 보병장비 }}}
}}}}}}



냉전기의 소련군 기갑장비/소련식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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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냉전기
소련군 기갑차량
전차 <colcolor=#fff> 시대별 세대 구분 <colcolor=#fff> 1세대 전차 <colcolor=#fff> 중형전차 <colbgcolor=#fefefe,#393b42> T-2597 «치하»L/R, T-2597 «신호토 치하»L/R, M4A2E8L/R, M4A4L/R, T-34-76R, T-34-85 (D-5T)R, T-34-85MLT, T-44MR, M-50L/R, M-51L/R
중전차 MK-IIL/R, T-VL/R, IS-2M, IS-3M
2세대 전차 중형전차 K-91, T-54, T-55, T-62(A/M), T-64
중전차 IS-4M, IS-7, T-10(M), 오비옉트 257, 오비옉트 277, 오비옉트 278, 오비옉트 279, 오비옉트 752, 오비옉트 777
경(부항)전차 PT-76 «플라분», PT-76B «플라분», PT-85, T-100
미사일 전차 IT-1, 오비옉트 287, 오비옉트 775, 오비옉트 780, 오비옉트 906B
3세대 전차 1세대 주력전차 T-64A
2세대 주력전차 T-72
3세대 주력전차 T-80
MBT 기준 세대 구분 1세대 MBT T-62B, T-64(A/R), T-72A
2세대 MBT T-64B/B1/BV, T-72(B/B1), T-80(B/BV/A/U)
장갑차 장륜장갑차 BRDM-1, BRDM-2, BTR-60, BTR-70, BTR-80
궤도장갑차 BTR-50, MT-LB, GT-T, GT-L, GT-MU, DT-30, BMD-1, BMD-2, BMD-3, BMD-4, BTR-D, BMP-1, BMP-2, BMP-3
차량 소형 UAZ-469, GAZ-64, GAZ-67, GAZ-69, UAZ-452, UAZ-469
트럭 MAZ-7310, ATS-59, GAZ-51, GAZ-63, ZIS-150, ZIL-150, ZIL-164 «자하르», GAZ-66, ZiS-151, ZiS-157, ZiL-131, 우랄-4320, KrAZ-214, KrAZ-255
자주포 자주곡사포 SU-122R, 2A3 콘덴사토르-2P, 2S1 그보즈디카, 2S2 피알카, 2S3 아카치야, 2S5 기아친트-S, 2S7 피온, 2S19 무스타-S
자주박격포 2B1 오카, 2S4 튤판, 2S9 노나-S
자주평사포 SU-57L/R, SU-M10L/R, SU-76IL/R, SU-76M, SU-85R, SU-85MR, SU-100, ISU-122, ISU-152, SU-122-54, ASU-57, ASU-85, SU-100P, SU-152 타란, SU-100M, 2S2
대공 차량 자주대공포 ZSU-57-2, ZSU-37-2 예니세이, ZSU-23-4 쉴카, 2S6 퉁구스카
단거리 대공미사일 2K22 퉁구스카, 9K31 스트렐라-1, 9K33 오사, 9K35 스트렐라-10, 9K330 토르
다연장로켓 BM-13, BM-21, BM-24, BM-27, BM-30, TOS-1 부라티노
경전차 T-26R, T-70 «세미데샤트카»R, M24 채피L/R, T-2595 «하고»L/R, MK-IIIL
구난전차 IMR-2, BTS-4, IMR
기타 GRAU 코드명, GABTU 코드명
※ T-64A(오비옉트 434)부터 주력전차로 분류
취소선: 계획되었으나, 취소된 차량
※ 윗첨자 L: 렌드리스/전시 노획/노획 차량 인수로 치장장비/연구용으로만 사용했다.
※ 윗첨자 LT: 체급이 경전차로 재편성되었다.
※ 윗첨자 R: 냉전 중 퇴역한 차량.
}}}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ه افغانستان کې شوروی جګړه‎‎
جنگ شوروی در افغانستان‎
Афганская война (1979—1989)
Советская война в Афганистане

Soviet-Afghan War
기간
1979년 12월 24일 ~ 1989년 2월 15일
(9년 1개월 3주 1일)
원인
타라키 정권의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
아프간의 부족 세력과 이슬람 세력들의 반발
장소
아프가니스탄
교전 국가 및 세력

[[소련|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파일: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국기(1987–1992).svg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무자헤딘|
파일:지하드 깃발.svg
무자헤딘
]][2]
수니파 무자헤딘
시아파 무자헤딘
마오주의파 무자헤딘
지원 국가 및 세력[3]

[[동독|
파일:동독 국기.svg
동독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체코슬로바키아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

[[인도|
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베트남|
파일:베트남 국기.svg
베트남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팔레스타인|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4]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파키스탄|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키스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이집트|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5]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사우디아라비아|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사우디아라비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서독|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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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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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소련군 115,000명, 연 투입 누적인원 620,000명
아프가니스탄군 65,000명[10]
무자헤딘 연 투입 누적인원 약 250,000명
결과
무자헤딘의 승리, 소련의 철수
영향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정권의 붕괴
제1세계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소련 붕괴
피해
소련군 15,051명 전사[11], 53,753명 부상
아프가니스탄군 18,000명 전사, 77,000명 부상
무자헤딘 15만~18만명 사상[12]
민간인 피해
민간인 사망 560,000 ~ 2,000,000명
1. 개요2. 배경
2.1.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 쿠데타2.2. 1978년, 좌익 반군의 쿠데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2.3. 내전: 공산정권 vs. 반공 게릴라 무자헤딘2.4. 소련의 특수작전: 아민 대통령 제거2.5. 친소 대통령 ' 바브라크 카르말'의 공산정권 수립2.6. 이슬람 세력의 반란2.7. 소련의 병력 증원2.8.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 (Operation Cyclone)
2.8.1. 미국의 유도설(Bear Trap)과 그 반론
3. 간추린 역사
3.1. 시작3.2. 전개3.3. 절정3.4. 각국의 개입과 지원3.5. 종말
4. 영향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의 비교6. 관련 대중 매체
6.1. 영화6.2. 소설6.3. 논픽션6.4. 라이트노벨&만화&애니매이션6.5. 게임6.6. 노래

[clearfix]

1. 개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 24일부터 1989년 2월 15일까지 소련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소련 붕괴 냉전 체제의 붕괴에도 영향을 주었다.[13][14] 때문에 소련이라는 ''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으로 잡았다는 의미에서 ' 곰덫'(The Bear Trap)이라고도 표현된다. 베트남 전쟁, 키프로스 전쟁 당시 소련과 중국이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무기 및 특수부대 등을 지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서는 미국 무자헤딘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2. 배경

과거부터 아프가니스탄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세력들이 성장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던 지역이었다. 19세기 이후 해양 진출을 위해서 남하하던 러시아 제국 인도양으로 나가는 통로인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는데 이에 맞서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 역시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무력 간섭을 자주 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19세기 무렵 3차에 걸쳐서 계속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차: 1839 ~ 1842, 2차: 1878 ~ 1880, 3차: 1919)의 배경이 그러했다.

전후 아프가니스탄 왕국 1960년대에 공식적으로 비동맹 노선을 표방했지만 서방식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부동항을 얻기 위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노골적으로 노리던 이웃 소련과도 적절한 친교를 맺었다. 이러한 실리적인 정책으로 6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평화로운 근대화를 차근차근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과 군사적으로 교류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에서 소련으로 연수를 보낸 군인들이 돌아와 공산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반면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아프가니스탄 향촌에서는 서구화와 소비에트화에 모두 반발하면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세력을 더욱 확장하고 있었다.

2.1.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 쿠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Zahir_Shah_of_Afghanistan_in_1963.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ohammed-Daoud-Khan.jpg
모하마드 자히르 샤 모하마드 다우드 칸

1973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محمد ظاهر شاه‎) 국왕 치하의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محمد داود خان)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던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은 다우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우드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지방과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주의/반이슬람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슬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2.2. 1978년, 좌익 반군의 쿠데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

결국 1978년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되면서[15]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하피줄라 아민 등이 이끌던 아프간 내 최대 좌익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로 원리주의적으로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할크파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2.3. 내전: 공산정권 vs. 반공 게릴라 무자헤딘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역적인 반란은 시대를 막론하고 간헐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1979년 이전까지는 반소 이슬람 반군의 활동은 짫은 시간 안에 불 보듯 뻔하게 중앙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소련은 이 이슬람 세력이 아프간 공산화에 큰 걸림돌이자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많은 KGB 요원을 아프가니스탄에 잠입시켰다. 시설 경비와 인민민주당 정부군의 무기, 차량 사용법 훈련을 위해 파견된 소련군 병력도 점차 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집권한 친소 세력과 정권에 포함되지 못한 인민민주당내 온건파인 파르참파,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과 왕당파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소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아프간 거주 소련인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여 소련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2.4. 소련의 특수작전: 아민 대통령 제거

더구나 집권한 인민민주당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친소 성향을 띄던 아민 대통령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CIA에게 포섭되었다고 아민 반대파가 흘린 거짓 정보가 KGB를 낚았고[16] 결과적으로 소련 지도부마저 낚아 버렸다. 이로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친소지만 실제로는 미국 등 서방 열강들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아민을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17] 이 특수작전은 소련 정치국 내에서도 격론이 있었고 가까스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아민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14명 전사)으로 성공적으로 보이긴 했다.[18][19]

아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쿠데타와 정부 수장 사살 직후에는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략 8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제40군 휘하 전력으로 아프간에 입국해 주요 도시를 빠르게 장악했다. 이렇게 브레즈네프의 아프간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다.

2.5. 친소 대통령 ' 바브라크 카르말'의 공산정권 수립

아민을 제거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된 파르참파의 바브라크 카르말을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아프가니스탄에 원래 있었던 친소 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소련은 거짓 정보에 낚여 친소적인 아민을 살해할 만큼 정보에 혼선을 겪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아프간 군부는 할크파의 대숙청 이후 할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2.6. 이슬람 세력의 반란

그리고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은 소련의 침공을 기회로 여기고 카르말 정권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공산 아프간군도 결국은 아프간인인지라 소련이라는 외세가 자국을 침공하자 크게 동요했다.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 당시 공산 아프간군에는 10만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5개월만에 3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물론 그냥 집에 돌아가거나 목적 없이 방랑하는 인원도 있었겠지만 상당수는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고 이슬람주의 반군에 가담했다. 그리하여 침공 3개월만에 아프간 국토의 80%가 전에 없이 강력해진 이슬람 반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소련군은 몇몇 도시와 간선 도로만을 간신히 점과 선으로 통제할 뿐이었다. 당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완전히 장악하려면 백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그에 따른 보급을 실시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열악한 소련 경제에서는 무리였기 때문에 실행되지 못하였다.

2.7. 소련의 병력 증원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 중앙아시아의 소련인들은 아프간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 달라."며 소련군에게 요청했는데 소련은 이미 정권교체를 위해 8만명의 병력을 배치했으니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아프간 전국의 대규모 반란으로 아프간의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결국은 친소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2만명을 추가로 증파하고 전투에도 전면 개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20]

당시 집권 세력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덕에 자국에서도 욕을 먹고 있었다.

대내적으론 수천년 역사 동안 수많은 세력들이 거쳐가면서 이 지역은 철저하게 각 부족별로 움직이고 있을 뿐 바라크자이 왕조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강 통일국가로서의 아프가니스탄을 이룩한 것은 1930년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아프가니스탄 국민'이란 인식이 희박하였다. 아니, 애초부터 이 지역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국가란 인식은 없었다고 봐도 된다. 물론 명목상으로 아프간 전역을 통치한 나라들은 많이 있지만, 국토의 80%가 돌무더기뿐인 가파른 산악의 연속이고[21] 나머지는 사막과 황무지가 대부분인데 어떻게 사람이 사나 싶은 동네였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는 어림도 없었고, 지역토호들에게 일정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게 했는데, 이러한 체제가 20세기에도 지속되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이 안정적인 시대에도 대도시와 그 근교 지역에서나 현대문물이 퍼졌을분, 나머지 산골지역은 대다수가 전근대적인 생활을 하며 살고있었다. 선진 문물 도입을 시도한 것은 좋았지만 무지하고 먹고 살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없는 산골 사람들에게 갑자기 기계화된 공장과 대도시를 이야기하는 격이었다.[22]

그래도 소련이 바보는 아니고 타지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연방내 공화국들을 통치해본 오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아프간의 물라와 이맘들을 소련에 초청하기도 하고 소련을 따르는 것 = 이슬람도 믿으면서 현대화할 수도 있는 신묘한 지름길이라는 식으로 많은 선전을 했는데 이에 아프간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 아프간의 친소련 정권도 나지불라가 집권하기 이전까지[23] 이슬람 교도(무슬림)들은 잘해야 코란과 알라에 매몰된 무지몽매한 촌놈 떨거지들, 심하게는 말살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프로파간다에 그리 투자를 하지도 않았고, 일부 보수적 이맘과 물라들은 중앙아시아 소련 지방의 무슬림들은 무신론 빨갱이 공산당들의 총칼에 굴복한 비겁한 놈인데 어딜 우리 진짜 무슬림들에게 와서 말같지도 않은 설교질을 하느냐고 반발하였고 외려 소련군과 아프간 친소 정권의 정부군과 대결하던 무자헤딘들에게 남몰래 사비를 털어가며 돈을 보내주며 돕기도 했다.

2.8. 미국의 사이클론 작전 (Operation Cyc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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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전사들'로써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된 무자헤딘.

소련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서방은 소련에 저항할 수 있는 반군을 지원했다. 이는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이루어졌으다. 이 작전은 CIA 작전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으며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작전으로 불린다. 지원비용은 60~12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CIA, 영국 MI6 SAS, 프랑스 DGSE, 이스라엘 모사드, 파키스탄 ISI가 주축이 되었으며 서방을 포함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중국 등이 자금과 각종 무기를 지원하였다. 이 작전으로 10만명 규모의 무자헤딘을 육성하였고 작전 초기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것이 발각될까 우려하여 이집트, 이스라엘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나 쓰이던 구식 무기나 중고 소련제 무기를 지원하였으나 1985년 전쟁 중반부터 적극적인 소련 견제를 위해 영국제 블로우파이프 지대공미사일, 스팅어, 레드아이 지대공 미사일을 포함한 서방제 무기와 중화기를 지원하게 되었다.[24] 그 외에도 프랑스제 밀란 대전차 미사일, 미국제 BGM-71 TOW대전차미사일, 스위스 오리콘 대공포등도 꽤 많이 지원되었다.

모병은 주로 이집트와 리비아 등의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이루어졌으며 아프간 내 소수민족들을 모집하거나 사우디,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모병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국무부와 CIA는 민간인으로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접경지역을 자주 방문하여 훈련을 지도하는 등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92년까지 지원이 이루어졌고 미국이 걸프 전쟁에서 노획한 무기들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2.8.1. 미국의 유도설(Bear Trap)과 그 반론

소련군의 침공을 알리던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들이 속속 도착하던 워싱턴의 백악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깊은 숙고에 빠졌다. 카터 행정부 내에서 가장 강경한 냉전 전사였던 그의 머리를 사로잡는 문제는 이번 사태가 소련이 도를 넘는 조처였냐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미국의 안보외교팀들은 아프간에 대한 중앙정보국 등 미국의 공작에 대한 소련의 피해의식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소련의 침공을 중동의 걸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아프간 친소정부를 유지하려는 절박한 행동으로 해석했다. 그럼 문제는 소련의 의지가 어느 정도이며, 그 노력이 성공할 것인가였다.
소련, 체제붕괴 대가…미국도 새 적 키워(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10.31) #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1977년 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National Security Advisor)으로 재직하였다. 재임기에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목격하였고, 개전 직후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 지대를 방문하는 등 미국의 아프간 공작의 큰 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전 CIA 국장 로버트 게이츠는 1996년에 쓴 회고록 「음지로부터: 냉전에서 승리한 다섯 대통령의 숨은 이야기」에서 미국 정보기관들이 실제로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가 아닌 이미 그 6개월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 게릴라를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25] 실제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발발일로 간주되는 1979년 12월 27일[26] 이전부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반군을 지원했다. 다만 이런 지원은 액수로 50~70만 달러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의료물자나 무선송수신기를 비롯한 비군사적 물자였기 때문에 이 원조가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단순 반군 지원을 넘어서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한다. 심지어 이 유도설은 단순 음모론이 아니라 상당히 그럴듯한 근거도 갖추고 있는데, 1998년 프랑스 언론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27]가 브레진스키와 인터뷰한 내용에서 브레진스키가 유도설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해당 대화록의 일부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무자헤딘에 대한 CIA의 지원은 1980년, 즉 1979년 12월 24일 소련 군대의 아프간 침공 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비밀이 유지되어 온 실상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실 카터 대통령이 카불의 친소련 정권 반대파들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첫명령을 승인한 것은 1979년 7월 3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러한 지원이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유도하리라고 대통령에게 설명했던 자료를 내가 작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벨 옵세르바튀르」: 지금 당신은 이 점과 관련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가?

브레진스키: 무슨 후회를 할 게 있는가? 그때의 기밀 작전은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라고.

「누벨 옵세르바튀르」: 그러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함으로써 미래의 테러 집단들에게 무기와 군사 참모를 제공한 사실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브레진스키: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브레진스키, 프랑스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튀르」와의 인터뷰 영어 번역본-2, 영어번역본, 영어번역본-1, 프랑스어 원문1, 프랑스어 원문2.
하지만 이 인터뷰를 토대로 미국이 소련의 행동을 유도하거나 또는 소련이 미국의 유도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섣부른 결론을 내놓는 것은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정세, 소련의 침공에 대한 미국 정부(특히 브레진스키)의 인식과 반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20세기 아프가니스탄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현대 제국들의 무한 세력 확장과 이에 기반한 전략전 오판의 결과이자 참사였다. 미국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최고 전략적 자원인 석유가 묻힌 페르시아만까지 영향력을 확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넘어서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내 이슬람계 자치공화국을 묶어서 현대판 오스만터키 제국 결성을 사주한다고 오판했다.
아프가니스탄, 패권의 경연장이자 무덤(한겨레, 기사작성일자 2013.09.12) #
애초에 미국으로 향하는 원유의 주산지인 페르시아만과 아프가니스탄의 거리가 지척이라는 점에서 미국에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었다.[28] 서방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국제안보와 걸프만의 석유 공급 라인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29] 후일 브레진스키는 침공 유도설의 근거로 사용된 1998년 인터뷰의 정확성을 수차례나 부정했으며, 2020년 코너 토빈(Conor Tobin)의 The Myth of the “Afghan Trap”: Zbigniew Brzezinski and Afghanistan, 1978–1979도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를 사학적 근거로 삼기는 신뢰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토빈에 따르면 브레진스키는 해당 인터뷰 기록은 실제 인터뷰 기록이 아니라 발췌문으로 심각하게 편집되었고, 그 편집본을 자신에게 확인도 받지 않고 출판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해당 인터뷰는 원래 영어로 진행된 것이 프랑스어로 번역되고 다시 영어로 재번역되는 과정에서 원래 인터뷰 의도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기록을 참고하면 오히려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침공 직후 소위 곰덪(Bear Trap)에 걸려들었다고 환호작약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남진을 우려한 것으로 드러난다. 앤서니 타이틀러(Anthony Teitler)의 2020년 책이다. 이 책은 1998년 인터뷰 내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진 않지만, 침공 당시 작성한 메모와 상충된다고 지적하였다. 타이틀러에 따르면 1998년 인터뷰는 소련 붕괴 후 브레진스키의 자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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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Carter's declaration on 3 July 1979 that Washington supported covert assistance to the Afghan rebels via Pakistan's ISI was the first clear foray into opposing the Soviet Union's presence in Afghanistan (Gates 1996: 146). This was a small and innocuous beginning as only half a million dollars was deployed to boost psychological and propaganda efforts against the Soviet Union. Furthermore, it was done via intermediaries in order to disguise US involvement so not to directly antagonise Moscow (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However, over time, a small trickle of funding to the Afghan Mujahideen turned into a vast stream and by 1987 had reached $630 million per annum (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1979년 7월 3일자 연설로 카터 대통령이 밝힌, 미 정부가 파키스탄 정보기관 ISI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비밀리에 지원한 일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겨냥한 최초의 명확한 시도였다.(Gates 1996: 146) 이 시도는 처음에는 소련에 대한 심리 및 선전전을 강화할 목적으로 50만 달러만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이 손해볼 것 없었다. 더욱이 이는 모스크바를 직접적으로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미국의 개입을 위장해줄 중개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Coll 2004: 46; Rasanayagam 2005: 105)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가니스탄 무자베틴에 대한 지원은 더욱 커져만 갔고 1987년에 이르면 연간 6억 3천만 달러가 사용되었다(Roy 1991: 35; Rasanayagam 2005: 136). (중략)

Although initial US involvement in Afghanistan carried modest cost, Zbigniew Brzezinski later claimed that the United States had planned to lull the Kremlin into an intervention of that country. Indeed, in a 1998 interview, the former national security advisor made this very point, arguing Washington knew it could inflict on Moscow its own 'Vietnam War'. As Brzezinski pointed out, in the wider scheme of things the United States' support of a few 'stirred up Moslems' to help bring down the Soviet Union was a price worth paying even in the aftermath of the Cold War: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초기 개입은 소소한 비용이 들었지만, 후일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는 소련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유도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이 전직 국가안보보좌관은 실제로 1998년 인터뷰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미 정부가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 전쟁'에 빠져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브레진스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더 넓은 관점에서 소련 붕괴를 위해 소수의 동요하는 무슬림을 지원하는 것은 냉전이 끝난 이후에 봐도 지불할 가치가 있는 댓가였다.

We didn't push for the Russians to intervene, but we knowingly increased the possibility they would.... It had the effect of drawing the Russians into the Afghan trap and you want me to regret it? The day that the Soviets officially crossed the border, I wrote to President Carter. We now have the opportunity of giving to the USSR its Vietnam War. Indeed, for almost 10 years, Moscow had to carry on a war unsupportable by the government, a conflict that brought about the demoralization and finally the breakup of the Soviet empire.... What is most important to the history of the world? The Taliban or the collapse of the Soviet empire? Some stirred-up Moslems or the liberation of Central Europe and the end of the cold war?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개입할 가능성은 높였다. (중략) 그 작전은 러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함정에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소련이 아프간 국경을 넘었던 그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을 베트남 전쟁으로 몰아세우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실제로 소련 정부는 근 10년간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계속했고, 이 분쟁은 결국 소련 제국의 사기를 저하하고 종국에는 제국의 붕괴를 일으켰다. (중략) 세계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무슬림 일부를 약간 동요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중부 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인가? (Interview with Zbigniew Brzezinski 1998)

Written memos at the time however directly contradict Brzezinski's bravado language (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The Carter administration's supposed certainty about giving the Soviet Union a 'bloody nose' was post hoc rationale. As was the case, Brzezinski wrote to President Carter explaining the potential dangers and pitfalls that encompassed a Soviet intervention and the challenges for Washington. Indeed, the national security advisor was certainly not so sanguine about the Soviet Union being lulled into its own 'Vietnam' as the circumstances were very different. Brzezinski was clearly cautious. In this aforementioned memo of 26 December, Carter's national security advisor expressed pessimism about the Afghan resistance to the Soviet Union, in large part because they did not have the support and capability on both a domestic and an international level that the Vietcong clearly had. As Brzezinski stated,
그러나 (침공) 당시 브레진스키가 작성한 메모는 훗날 브레진스키의 허세 가득한 언사와 직접적으로 모순된다.(Brzezinski 26 December 1979; Coll 2004: 581; Riedel 2014: 102) 소련에 '한 방' 먹일 수 있게(bloody nose) 되었다는 카터 행정부의 확신은 사후적으로 지어낸(post hoc) 근거였다. 마찬가지로 브레진스키는 카터 대통령에게 메모를 보내어 소련의 개입과 미국 정부에 대한 도전을 포함하는 잠재적 위협과 함정에 대해 설명했다. 실제로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과)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소련이 자신의 '베트남'에 빠져들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었다. 브레진스키는 분명히 조심스러웠다. 앞서 언급한 12월 26일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반소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의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 이유는 (아프가니스탄 저항군이) 베트콩만큼 국내 및 국제사회에서 확고히 보유했던 지원과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가 말했듯이,

[t]he Soviet intervention in Afghanistan poses for us an extremely grave challenge, both internationally and domestically. While it could become a Soviet Vietnam, the initial effects of the intervention are likely to be adverse for us.... However, we should not be too sanguine about Afghanistan becoming a Soviet Vietnam: A. The guerrillas are badly organised and poorly led; B. They have no sanctuary, no organized army, and no central government - all of which North Vietnam had; C. They have limited foreign support, in contrast to the enormous amount of arms that flowed to the Vietnamese from both the Soviet Union and China.... As a consequence, the Soviets might be able to assert themselves effectively, and nothing in world politics succeeds like success, whatever the moral aspects. (Brzezinski 26 December 1979)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우리에게 극도로 심각한 도전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수는 있지만 처음에 그 개입의 효과는 우리에게 부정적일 가능성이 높다. (중략)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고 너무 낙관해서는 안 된다. 첫째, 아프가니스탄 게릴라의 조직력이 나쁘고 지도력도 부족하다. 둘째, 그들은 북베트남이 가지고 있던 성역(sanctuary)[역자주1], 조직화된 군대, 중앙 정부 중 그 어느 것도 없다. 셋째,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무기를 지원받은 북베트남과 달리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제한적인 원조만 받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소련은 자신의 목적을 확고히 달성할 것이다. 도덕적 측면과 관계없이 국제정치에서 성공은 또다른 성공을 부른다. (Brzezinski 26 December 1979)

In this memo, Brzezinski provided context for the United States' response to the Afghan invasion. It was, however, not entirely clear-cut as to how and in what way the Carter and (subsequent) Reagan administrations would implement its Afghanistan policy, especially if the Soviet occupation became a long-term one. Over time, a clear approach emerged, but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Soviet invasion, there was major concern about what needed to take place, as the NSC's 'Summary of Conclusions' of the same day was also cautious about the Soviet advance into the country. Moscow seemed on the verge of "pacifying Afghanistan", and this would have had serious implications for Washington's image and strength in the region (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After the Iranian Revolution and concomitant hostage crisis, this only appeared to add fuel to the fire. The importance of acting swiftly and involving the UN showed the alarm and genuine uncertainty that key decision makers in the NSC felt at the time.
이 메모에서 브레진스키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할 미국 정책의 맥락을 제공했다. 그러나 메모는 특히 소련의 점령이 장기화했을 경우 카터와 (후속) 레이건 행정부가 대아프가니스탄 정책으로 명확히 무엇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제시하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접근 방식이 명확해졌지만, 소련 침공 직후에는 무엇을 해야할지에 관해 큰 우려가 제기되었다. 같은 날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론 요약'에서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진출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 나왔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평정하기" 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이미지와 영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Special Coordination Committee Meeting 26 December 1979) 이란 혁명과 그에 따른 인질 위기[역자주2]는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속히 행동하는 것과 UN을 관련시키는 것의 중요성은 당시 NSC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이 느꼈던 경각심과 진정한 불확실성을 보여주었다.
Anthony Teitler. (2020). US Policy Towards Afghanistan, 1979-2014: 'A Force for Good', Routledge; 1st Edition

스티브 콜(Steve Coll)의 2004년 책도 브레진스키가 처음 며칠간 작성한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으로 당대 카터 행정부가 처한 곤경을 근거로 들며 유도설을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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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mporary memos—particularly those written in the first days after the Soviet invasion—make clear that while Brzezinski was determined to confront the Soviets in Afghanistan through covert action, he was also very worried the Soviets would prevail. Those early memos show no hint of satisfaction that the Soviets had taken some sort of Afghan bait. Given this evidence and the enormous political and security costs that the invasion imposed on the Carter administration, any claim that Brzezinski lured the Soviets into Afghanistan warrants deep skepticism.
(브레진스키가) 당시 작성한 메모들,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직후 처음 며칠간 작성된 메모들은 브레진스키가 비밀작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을 상대하기로 결정했지만 동시에 소련이 승리할 것이라고 매우 우려하고 있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 메모들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만족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메모들과 소련의 침공이 카터 행정부에 부과한 막대한 정치적, 안보적 비용들을 고려하면, 브레진스키가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으로 유인했다는 주장은 깊은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Steve Coll. (2004).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Penguin Press, p.593.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기 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반공 이슬람주의 반군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련의 개입을 촉발한 원인은 아니었다. 소련이 개입한 근본적인 원인은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한 인민민주당 내 할크파와 파르참파 사이의 지난한 권력투쟁과 그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총체적인 분열상, 공산정권의 무지성 소련식 공산주의 개혁과 이에 뒤따른 무자헤딘의 봉기, 집권 3개월만에 전임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를 포함해 최소 7천명을 처형한 아민의 잔혹성[32], 타라키의 실각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 내 소련 영향력의 축소, 마지막엔 타라키 살해 후 아민이 사실은 CIA의 끄나풀이라고 KGB가 유포한 역정보에 소련 자신이 낚여버린 것이었다.

아민이 미국과 접촉을 하고 있다고 여긴 정치국은 강하게 분노하며, 유리 안드로포프,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중심으로 해서 미국에 포섭되었다고 여겨지는 아민을 제거하고 아프가니스탄을 구하겠다는 입장이 큰 지지를 받았고, 결국 정치국이 우스티노프-안드로포프 계획을 승인했다. 만약 자신들이 믿는 대로 아프간이 친미 국가가 되고, 아프간에 미국 핵무기가 배치된다면, 사실상 소련 전역이 미국 핵미사일의 공격권 안에 들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련이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을 외면, 방관한다면 공산권의 수장으로써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인데다[33] 반소 공산국가였던 중화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의 기세가 등등해질 것은 뻔했고, 심지어 소련의 카리스마 하나로 돌아가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까지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일이 이 지경까지 가자 결국 브레즈네프도 정치국원들의 의견에 동의하고 개입 결정에 서명을 하면서 소련군이 아프간으로 파견되어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다.

이 기나긴 문단을 인내심 있게 읽었다면 느끼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소련의 자충수이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으므로 미국의 유도니 뭐니 탓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3. 간추린 역사

3.1. 시작

파일:attachment/troops_detail1.jpg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mem.jpg
세간에는 마치 소련이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침공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당초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소련군 개입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을 서방에 넘겨줄 수 없다는 KGB의 강력한 주장으로 1978년까지는 아직 구체적인 군사개입은 여러 옵션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1979년 3월 15일 발발한 헤라트 반란으로 소련인 2~4명이 살해되었을때도 직접 개입하여 반군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인민민주당 정권에 지원을 배가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개입했다. 실제로 헤라트 봉기가 진압된 직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우리는 군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당신 나라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반대로 더 악화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력뿐만 아니라 당신 나라 사람들 대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국민들은 절대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장관회의 의장이 1979년 3월 29일 회담에서 타라키 당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파병 요청에 대해 한 답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트 봉기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지도력에 소련이 의구심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와 교관단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타라키와 그의 후임 아민은 반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pestnaz.jpg
공수군 스페츠나츠
여기서 소련은 결정적인 오판을 내렸는데 아민 정권을 제거하고 카르말 정권을 세우는 한편 적극 개입하여 아프간 전역을 확실하게 갈아엎는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민 정권이 제대로 통치를 못하니까 갈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소련 주도하에 이루어진 동유럽 정권교체가 적어도 초기에는 현지 공산세력의 도움과 나치 독일과 무능한 기존 정부에 학을 뗀 나머지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여긴 현지 국민들의 암묵적 동의로 가능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프간 또한 무난하게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오판한것.

어쨌건 197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소련군 제40군은 아프간 접경 테르메즈 인근의 아무다리야 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본격적인 침공 시작 전인 12월 7일에 이미 민간인으로 위장한 KGB 예하 스페츠나츠 대원 700명과 친소 인사인 바브라크 카르말을 전부 입국시켜 놓았다. 초기에는 이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이용하여 아민 대통령 관저의 식사에 독을 타는 방법으로 아프간 지도부를 혼란시키려고 했으나 미리 식사를 먹어 보는 시식자들 때문에 실패했고 저격도 오발로 실패하였다. 결국 소련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맞춰 관저를 전면공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당일 아프간군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모아두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두고 1979년 12월 27일 작전개시와 동시에 아프간군 지휘관은 모조리 체포되었으며 대통령궁은 스페츠나츠들이 습격했다. 당시 대통령궁을 지키고 있던 아프간 대통령 호위대 200여 명은 모조리 사살당했고 아민 대통령도 스페츠나츠에 의해 과거 인민민주당이 다우드 칸 일가를 몰살한 것처럼 가족들과 함께 사살당했다.[34]

뒤이어 소련-아프간 국경에서 전차와 장갑차들이 국경을 넘어오고 예정대로 지상으로 달려온 기갑부대와 보병들은 몇 개 안되는 아프간 도시들을 점령한 뒤 카르말 정부를 세우고 아민을 미국의 앞잡이로 격하시키면서 전쟁은 순식간에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 침공 당시 편제 #====
  • 제5근위차량화소총사단 / 5th Guards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01차량화소총연대 / 101st Motorised Rifle Regiment
    제371근위차량화소총연대 / 371st Guards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4전차연대 / 24th Tank Regiment
    제46분리의무대대 / 46th Separate Medical Battalion
    제68분리근위공병-전투공병대대 / 68th Separate Guards EngIneer-Sapper Battalion
    제388분리통신대대 / 388th Separate Communications Battalion
    제650분리근위정찰대대 / 650th Separate Guards Reconnaissance Battalion
    제1060포병연대 / 1060th Artillery Regiment
    제1122대공포병연대 / 1122nd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제1377분리대전차포병대대 / 1377th Separate Anti-Tank Artillery Battalion
  • 제103근위공수사단 / 103rd Guards Airborne Division
    제317근위낙하산연대 / 31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제350근위낙하산연대 / 350th Guards Parachute Regiment
    제357근위낙하산연대 / 357th Guards Parachute Regiment
  • 제108차량화소총사단 / 108th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77차량화소총연대 / 177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80차량화소총연대 / 180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81차량화소총연대 / 181st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71분리공병-전투공병대대 / 271st Separate EngIneer-Sapper Battalion
    제285전차연대 / 285th Tank Regiment
    제333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333rd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제479포병연대 / 479th Artillery Regiment
    제738분리대전차포병대대 / 738th Separate Anti-Tank Artillery Battalion
    제781분리정찰대대 / 781st Separate Reconnaissance Battalion
    제1003분리대대 (스페츠나츠) / 1003rd Separate Battalion (Possible Spestnaz)
    제1049대공포병연대 / 1049th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 제201차량화소총사단 / 201st Motorised Rifle Division
    제122차량화소총연대 / 122nd Motorised Rifle Regiment
    제149근위차량화소총연대 / 149th Guards Motorised Rifle Regiment
    제395차량화소총연대 / 395th Motorised Rifle Regiment
    제252분리통신대대 / 252nd Separate Communications Battalion
    제340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340th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제541분리공병-전투공병대대 / 541st Separate EngIneer-Sapper Battalion
    제783분리정찰대대 / 783rd Separate Reconnaissance Battalion
    제990대공포병연대 / 990th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제998포병연대 / 998th Artillery Regiment
    전차연대 / Unidentified Tank Regiment
  • 제45공병연대 / 45th EngIneer Regiment
  • 제66분리차량화소총여단 / 66th Separate Motorised Rifle Brigade
  • 제70분리근위차량화소총여단 / 70th Separate Guards Motorised Rifle Brigade
  • 제103분리신호여단 / 103rd Separate Signals Brigade
  • 제191분리차량화소총연대 / 191st Separate Motorised Rifle Regiment
  • 제247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247th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 제258분리장비정비복구대대 / 258th Separate Equipment MaIntenance and Recovery Battalion
  • 제345근위낙하산연대 / 345th Guards Parachute Regiment
  • 제860분리차량화소총연대 / 860th Separate Motorised Rifle Regiment
  • 제1074포병연대 / 1074th Artillery Regiment
  • 제1839분리대공포병연대 / 1839th Separate Anti-Aircraft Artillery Regiment
  • 공병도로건설여단 / EngIneer Road Construction Brigade
  • 제50분리혼성항공연대 / 50th Separate Composite Aviation Regiment
  • 제115근위전투항공연대 / 115th Guards Fighter Aviation Regiment
  • 제136전투폭격항공연대 / 136th Fighter-Bomber Aviation Regiment
  • 제146분리헬리콥터연대 / 146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181분리헬리콥터연대 / 181st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203분리전술정찰대대 / 203th Separate Tactical Reconnaissance Squadron
  • 제254분리헬리콥터대대 / 254th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262분리헬리콥터대대 / 262nd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280분리헬리콥터연대 / 280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292분리헬리콥터연대 / 292nd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 제302분리헬리콥터대대 / 302nd Separate Helicopter Battalion
  • 제335분리헬리콥터연대 4대대 / 4th Squadron, 335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3.2. 전개

파일:attachment/345_soviet_afghanistan_war_1.jpg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총기 박람회.[35]

파일:attachment/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mj.jpg

노획한 무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소련군.[36] 오른쪽 총구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는 소총은 리-엔필드 소총이고 들고 있는 DP-28도 노획한 것이다. 소련제 무기이긴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DP와 RPD 등 바실리 덱탸료프가 개발한 기관총 총기들을 모두 퇴역시켜 냉전 시절에 여타 친소 성향의 제2, 3세계 국가들 및 반군 단체들에게 모조리 공여, 매각시키고 PKM RPK로 교체한 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리-엔필드의 바로 이전 세대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과 20세기 무기도 아닌 제자일도 현역으로 징발되어 쓰였다.

파일:폐허가 된 마을을 바라보는 소련군 탱크.jpg
공산 정권 수립 후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에 항거하던 무자헤딘들은 소련군이 침공해오자 소련군을 공격하면서 게릴라전에 나섰다.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리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소련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소련군뿐만 아니라 소련이 세운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물론 소련군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으나 무자헤딘쪽 병력규모도 상당한 데다 애초에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입장이라 소련군이 기본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소련이라는 외세의 점령에 카르말의 공산 아프간 정부군 구성원들도 크게 동요하면서 무더기로 탈영해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에는 100,000명이던 아프간 공산정부군이 6월에는 고작 30,000명만 남게 된다. 탈영한 병력들은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고 반군에 가담, 반정부 진영의 화력과 전투력, 머릿수를 폭발적으로 늘려 줬다.[37][38]

그리고 이때 아흐마드 샤 마수드나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압둘 라술 사아프 등과 같이 아프간내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휘한 여러 지도자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약지가 소련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소 카르말 정권과 소련군을 속을 끓이게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북동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마수드의 무자헤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 병사들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1982년에 행해진 5차(12,000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소련 측에서 3,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군 1,0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소련군과 공산 아프간 정부군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히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소 항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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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 21,000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000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군 5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아프간 정부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소련 측은 결국 1986년에 공세를 중단하고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문제는 북부 판지시르 계곡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전선 상황들도 소련군과 공산 아프간 정부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헤라트 등 북서부 아프간 지역에서는 이스마일 칸이 지휘하던 무자헤딘 반군들[39]이 헤라트 지역 공항에 주둔했던 소련 공군을 습격하여 공항에 배치된 소련군 전투기와 헬기 20여대를 폭파시키기도 했고 1985년 후반기에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 놓고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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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카르말 아프간 정부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게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2,000여 명의 소련-공산 아프간 동맹군(이 중 2,200여 명이 소련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 버렸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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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는 파키스탄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나지불라 아프간 정부군[41]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에 대패하여 1,7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이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소련이다 보니 모든 전투에서 소련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소련군은 15,000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6배에 달하는 90,000명이었다. 소련군과 무자헤딘이 정면대결한 전투에서는 무자헤딘의 전사자가 20배 이상이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소련군 20,000명, 아프간 공산군 8,000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0,000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해 아프가니스탄 북동부[42]에서 아프간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소련-공산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소련 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로 소련군은 620,000명 정도의 대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0,000~100,000명 정도의 소련군만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였고 내무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0,0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한 건 이 1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일의 미군과 전쟁 수행방식부터 패배까지 완벽하게 똑같이 돌아갔다. 미군도 연인원 기준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 775,000명이 동원되었으나 최대 유지병력은 120,000명에 실제 전투병력은 10,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43] 더구나 광활한 아프가니스탄의 각 주요 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소련군의 상황과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간은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현지에 나간 소련군 장군들도 모스크바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00만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하여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 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모스크바 군 장성들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했으나 소련의 경제적, 외교적 부담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44][45][46]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자헤딘과 소련군, 아프간 정부군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이렇게 끝날 기약 없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자헤딘의 화력과 역량, 보유 장비도 일취월장했다. 무자헤딘에 귀순한 아프간 친소 정부군의 탈영병이 노획한 소련제 전차를 몰고 정부군 병영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에서는 보기 드문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3.3.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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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가 만단위로 올라가자 소련군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온갖 대응 방법을 내놓았다. 산악지대인 아프간의 특성에 대처하기 위해/공군 소속의 Mi-24 공격헬기 부대를 투입해 CAS를 하는 전법으로 성과를 올렸다.[47] 그뿐만 아니라 소련 해군 항공대[48] 공군을 동원해 공습과 폭격, 미사일 공격을 했으며 독가스 화학무기를 살포하고 무자비한 대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아프간 국민들의 반감만 강해졌다.[49] 유명한 특수부대 스페츠나츠도 투입되어 게릴라전에 게릴라전으로 반격을 펼쳐 보았다. 쿠란에 폭탄을 설치해서 무자헤딘이 쿠란을 펼치는 순간 터지도록 만드는가 하면 위장폭탄으로 무자헤딘의 집이나 기지 속에서 터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등 꽤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결국 승리하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이 '쿠란 폭탄'은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놈들이 절찬리에 사용했다.

3.4. 각국의 개입과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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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특수부대가 아프간 무자헤딘에게서 노획한 독일제 H&K MP5 기관단총. 현재는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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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획한 G3A3 M16A1[50]을 들고 무자헤딘 코스프레를 한 소련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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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헤딘이 미국이 준 스팅어 지대공미사일을 들고 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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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헤딘에게서 노획한 스팅어를 들고 있는 소련군.

한편 이 전쟁은 세계 각국이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버금가는 대규모 국제 대리전(Proxy War)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서독 등 서방세계 국가들은 소련군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여 소총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들을 지원하였으며 정보기관 요원들도 직접 파견해서 정보 지원도 하였다. 당시 CIA가 무자헤딘에 제공한 무기의 총 가치는 약 30억 달러였고 곡물, 기술 수출 금지 등 소련에 경제재제를 부과하고 전략무기제한협정의 미국 의회 비준을 연기하는 등 보복 조치를 행하기도 했으며 UN에서 각종 대소·대아프간 결의안을 채택하며 소련을 계속해서 압박했다.

한편 냉전 시절에 공산권의 맹주 자리를 두고 소련과 대립하던 중국도 미국과 수교하고 한참 개혁개방에 나서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과 손잡고 무자헤딘을 지원하였다. 소련제 무기를 무단복제해서 사방에 뿌리는 게 특기였던 중국인지라 이때도 역시 AK-47소총부터 온갖 무기를 생산했고 CIA가 소련 설계에 기반해 출처 은폐가 쉽다는 이유로 이 중국산 무기를 사들여서 파키스탄을 경유해서 무자헤딘에 넘겼다. 중국과 미국 양쪽과 동맹관계였던 파키스탄은 소련의 침공 이전부터 아프간 내 반공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침공 이후에도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배후 근거지 역할을 하였다.[52]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이란[53], 인도네시아, 이집트,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도 무자헤딘을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경로로 지지하거나 자금 및 무기 등을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열렬한 지원을 했던 곳이 이집트였는데 당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그의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1970년대 후반에 이스라엘과 맺은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으로 인해 중동 아랍국가들의 지역기구인 아랍연맹에서도 회원국 자격을 잃고 추방당하는 등 당시 이슬람 아랍권 국가들 사이에서 시오니즘 세력과 손잡은 변절자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1980년대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게 저항하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지원하여 이슬람 아랍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이슬람권에서의 외교적 고립을 극복하려고 했다.[54]

반면 이 전쟁에서 소련을 지원하였던 나라들은 별로 없었다. 중국-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은 대놓고 보복 차원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했고[55] 북한, 쿠바는 소련에 대해 극한 유감과 실망을 나타내었으며 베트남[56] 라오스, 캄보디아도 마찬가지였고 유고슬라비아[57], 소련의 위성국 중 하나였던 루마니아 등 일부 공산권 국가들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대통령을 사살하고 괴뢰정권을 세우면서 점령군 행세를 하자 아프가니스탄을 무단 침공한 소련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유감을 표시했으며 심지어 소련의 확고한 통제 아래에 있었던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도 부패한 폴란드 인민군 장교들이 무기를 빼돌려 CIA에 넘기는 일이 있었다. 그나마 위성국 불가리아, 동독, 헝가리, 소련과 친했던 인도가 소련을 지지했으나[58] 그 외 소련을 지지했던 나라들은 극히 드물었다. 당시 소련의 외교력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드물게 소련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쳤던 남예멘, 팔레스타인은 소련을 지지하기는 했다.

미국이 내놓은 무기들, 이집트가 가지고 있었던 구소련제 무기들, 이스라엘이 중동전쟁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노획한 소련제 무기, 폴란드 등지의 부패한 인민군 장교들이 비밀리에 판매한 무기들, 터키와 파키스탄이 내놓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기들, 미국 CIA가 중공에서 구매한 무기들, 설원 장화, 스키 텐트 등의 비전투 물자 등은 파키스탄 카라치 항구에 하역되어 도요타 픽업 트럭으로 파키스탄 서부의 산악지대로 이송되어 전달됐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이기 위해 낙타나 조랑말 등의 안장에 실어서 나르기도 했는데 이를 캐러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공 동북부 산악지대에서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 발발 2년 후인 1981년부터 무자헤딘이 중공제 83mm와 70mm 무반동포, 나치 독일제 무반동포, 중공제 63식 60mm 박격포와 소련과 영국제 81mm 박격포, 중공제 58식 2연장 KPV를 소량 사용하는 사례가 보고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대전차화기와 중화기의 제공은 1985년부터였다.

3.5.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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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막바지인 1989년의 상황[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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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으로 철군하는 군인들(1988년 8월)
이래저래 제대로 되는 건 없이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싸울래야 싸울 적도 잘 안 보이는데 어디선가 뭔가가 날아오거나 터지면서 사상자만 늘어가는 애매한 나날이 계속되다가 외교적으로도 욕을 먹기 시작하고 소련에서도 예상 외로 길어진 장기전에 염증을 느껴 철수하자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1987년까지는 어떻게든 뭘 해 봤지만 결국 무자헤딘 섬멸이 불가능하다는 게 명백해지자 이후의 미군처럼 아프간의 문제는 아프간인들이 해결하라는 핑계로 1988년 6월 소련-무자헤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후에도 아프간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에 혈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소련군은 그냥 물자지원만 약속하고 1년여에 걸쳐 군대를 천천히 뺐다. 소련군은 1989년 1월 23일에 마지막으로 대규모 공격을 게시했다. 태풍작전은 소련군에게 판지시르 계곡의 마수드 세력을 마지막으로 한 번 궤멸시켜 달라고 요청한 나지불라에게 주는 작별 선물이었는데, 이 작전에서 마수드와 그의 전사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한 소련 장군은 훗날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고 한다.
사흘밤낮은 마치 거울처럼 거의 10년간의 전쟁을 비췄다. 정치적 냉소와 군사적 잔혹함, 일부의 절대적인 무방비 상태, 다른 편을 죽이고 파괴해야 할 병적인 필요. 10년 동안의 살육이 끔찍한 사흘 속으로 전부 흡수되었다.
폴 토머스 체임벌린, 김남섭 옮김,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아시아 1945-1990, 이데아, 2023, 851쪽.
3주 후 마지막으로 소련의 장갑차가 아무다리야 다리를 건넜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결국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89년 2월 마지막 부대가 우즈베키스탄으로 철수하면서 마침내 공식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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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아프간 파병군[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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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탄피로 글을 만들었다. '잘 있어라, 아프간'[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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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왔어요!'[62]

4. 영향

우리는 대조국전쟁의 참전자들과 자주 비교되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는 동안 우린 무얼 했을까요? 어느 한 청년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독일군의 역할을 맡았던 겁니다. (어느 군인의 회상 중)
뭘 써도 좋은데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 간의 형제애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만은 빼주세요. 그런 건 없어요. 그따위는 믿지도 않고요. 전쟁터에서 우리는 하나였어요. 우린 똑같이 속았고, 똑같이 살아남기를 바랐고, 똑같이 집에 가고 싶어 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온 뒤 여기서는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또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요. 이 나라에서 좋은 건 다 연줄이나 특권을 가진 사람들 차지예요. 우리한테 피를 빚지고 있으면서 말이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수집한 아프가니스탄 참전 용사들 및 유가족 수기 < 아연 소년들(Цинковые мальчики)> 중에서
우리가 시작한 전쟁은 고귀한 이상을 위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민중을 적으로 삼은 전쟁이 되어버렸다.[63]
- 알렉산드르 레베드 중장[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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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경제의 악화와 붕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과장되었다는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CIA 추정에 따르면 1987년 지출 비용은 소련 군사지출에 2.5%밖에 되지 않았고 소련 태생의 영국 역사가 세르게이 라드첸코에 따르면 1984년에서 1987년간 지출이 75억 달러인데 소련의 연간 군사예산이 1280억 달러인 것에 비하면 미미한 수치다. 단지 붉은 군대의 위상이 실추되고 시기상 2년 후 8월 쿠데타로 소련이 해체되고 미국 및 서방이 무자헤딘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있다. 소련이 철수한 후에도 아프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있었고 계속 원조해 왔지만 소련 해체 이후 물주를 잃은 정권은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소련-아프간 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전쟁에 찬동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65] 전쟁이 지리하게 이어지면서 소련군 복무자들의 희생이 이어지자 소련 젊은이들에게 반전주의와 염세적 허무주의를 널리 퍼트렸다고 한다.[66]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공포와 허무함, 참혹함에 빠진 군인들은 귀국 후에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련의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아프간 참전 군인들의 상당수는 술, 마약, 매춘에 쩔어 살았고 그 중 일부가 에이즈에 감염되기도 했으며 마약 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크로코딜에 중독된 참전자들이 꽤 있다. 특히 이들을 통해서 소련 전역에 마약이 광범위하게 퍼졌다.[67] 사병 참전자는 거진 대부분 하층민이 되었고 심지어 장교 참전자도 위관급 정도는 사병 참전자와 별다를 게 없었다. 이렇다 보니 소련의 청년들은 전장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한 갖은 방법으로 병역기피를 시도했는데 초기에 소련군은 병역기피가 적발되면 가차없이 수용소에 보내 버리는 방식으로 강력히 대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병역기피 방법이 교묘해지고 조직적으로 변하면서 결국 소련군 당국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의 10년 간의 전쟁에 투입된 소련군은 62만 대군인데 이들 중 8만-10만 정도가 평상시 유지 숫자였다. 전쟁으로 인한 소련 측의 전사자는 15,000여 명, 부상자 54,000여 명이며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힌 숫자도 수백여 명에 달한다.[68]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귀환한 소련군 장병들 중 포탄 쇼크나 정신 이상 증세, 부상, 질병으로 고통받게 된 사람들은 40만이나 되었으며 친소 아프간 정부군은 1만 8천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198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 보면 소련군이 입은 피해는 많은 것은 아니다. 전쟁 10년 동안 소련군 1만 5천 명이 전사했는데 미군도 이라크 전쟁 첫 5년 동안 4,000명 이상 전사하였고 아프간 전쟁에서 ISAF는 11년 동안 3,300명이(이 중 미군은 2,200명 정도) 전사했다. 2010년 6월에는 103명이 전사하였다(2010년 7월 미군 65명 전사).[69][70] ISAF가 80년대에 비해 발전된 보급/의료 지원체계[71]를 갖췄으며 ISAF의 적 탈레반은 무자헤딘보다 대체로 규모와 조직력이 떨어진다는 점[72]을 감안할 때 소련군이 아프간과 이라크의 미군에 비해 열세한 전과를 올린 건 아니다. 시대 보정을 한다면 우세한 전과를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이나 미군의 아프간, 이라크 전쟁은 걸프 전쟁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 아니었다. 소련군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만 붕괴시키고 빠졌으면 전사자가 14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간 전쟁은 무엇보다도 소련 군부의 위신을 실추시켰다는 점에서 단지 소련군이 잘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아프간 전쟁은 소련군에게 있어 단지 전략적 실패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소련군, 특히 소련군 장성 출신 인사들은 아프간 전쟁 전까지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리라는 막대한 정치적 명분으로 소련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73] 아프간 전쟁 역시 뒷배경에는 소련군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었고 이런 소련군에 있어 아프간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군 차원에서 전략적 실패가 아닌 정치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실패였다. 게다가 아프간 전쟁을 치르면서 발생한 대규모 부상, 사상자와 소련군이 저지른 전쟁범죄[74] 소련 국민들이 소련군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현재의 러시아 연방이 아닌 발트 3국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의 소련 산하 공화국들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해당 공화국 국민들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침략 전쟁에 개입한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키웠고 이는 조국의 수호자라는 소련군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75] 비단 정치적인 차원뿐만이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소련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소련군은 1989년까지 지속된 아프간 전쟁으로 군사적 역량을 소진한 후 각 공화국들에서 벌어진 분쟁들에 대규모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어려웠고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 소련의 지도자들이 군사력 사용에 소극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데도프시나로 불리는 소련군의 극심한 병영부조리가 아프간 전쟁을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전까지 소련 정부의 검열로 공론화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되었던 데도프시나는 아프간 파병 소련군에서도 계속된 부조리로 인한 탈영과 자살자가 수천 명 단위로 발생하고 소대, 중대 단위의 전투에서 미운 선임이 부상을 당했을 때 후임병들이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려 하면서 사망률이 천정부지로 높아지는 현상이 발견됨에 따라 결국 소련 공산당의 주목을 받는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고르바초프는 이 문제를 시정할 것을 군부에 요구하였고 전역자들을 중심으로 끔찍한 병영생활의 폭로, 병영문화의 개선 요구가 폭발하였지만 이것이 조직화된 것은 1990년의 일이었고 결국 제대로 개혁이 이뤄지기 전에 소련이 붕괴되는 바람에 러시아군으로 계승되었으며 푸틴이 집권하고 나서야 조금 안정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몇 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단 무자헤딘 병력은 20만 ~ 25만 정도로 추산되는데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76] 무자헤딘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60만-20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500만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피난간 난민만 500만명에 근접할 정도로 수백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어떤 도시는 전쟁 전 인구가 20만이었는데 전후 계산해 보니 단 2만 5천 명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소련군은 전쟁 기간 동안 민가를 상대로 사린 가스 등의 살상용 독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 당시 인구 1300만명이었던 아프가니스탄으로서는 전쟁 때문에 무려 인구의 1/3 이상이 죽고 다친 셈이다. 4명 중의 1명의 여성이 남편과 사별해야 했고 2명 중 1명의 아이가 다섯살이 되기 전에 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8명 중 1명이 전투와 지뢰 등으로 불구가 되었다. 국토와 산업은 소련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 초토화 작전에 의해 완벽히 파괴되었다. 이런 고통을 전부 초래한 소련군은 1989년에 철수했지만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원조는 남겨놓고 갔는지라 90년대 초반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나지불라 정권 붕괴 이후에도 내전이 이어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을 피와 공포로 물들인 무자헤딘 분파들의 내분과 탈레반의 부상에도 중앙정부와 공권력을 붕괴시키고 점령을 자행해 대혼란을 초래한 소련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걸 생각하면 소련은 아프간에 끝나지 않는 악몽과 헤아릴 수 없는 비극만을 안겨준 셈이다.

아프간이 소련의 침공으로 입은 피해는 인명 피해만 소련과 러시아가 잊지 않겠다고 이를 벅벅 가는 독소전쟁 당시 소련 인구 1억 8879만명이 입은 피해인 2700만명조차 전체 사망자 숫자는 몰라도 비율로 따지면 근접하거나 추월할 지경이라는 점에서[77] 아프간에서 소련군은 조국의 수호자들이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았다고 자조하는 상단의 소련 청년의 절규는 더욱 의미심장한 셈. 독일뿐만 아니라 추축국 출신 위성국들에게도 전쟁범죄에 대한 피해보상과 사과, 전쟁 배상금을 톡톡히 받아낸 소련과는 대조적으로 소련은 물론이고 후계국인 러시아는 침공에 대해 아프간에 일말의 사과나 조금의 배상금 지불 노력조차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제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게 되자 침공을 수행한 소련군 참전자들이 우리는 아프간인의 자유를 위해 탈레반과 같은 중세적 야만인들인 무자헤딘과 싸웠다며 자부심을 가지는 등 당대를 겪은 아프간인 입장에서 분통이 터지는 퇴행적인 모습마저 보여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미국 이상으로 악랄한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에 체첸에게 두들겨 맞을 때조차도 러시아에서 앙케트로 러시아의 주적을 무작위 선정했더니 1위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올 정도였다. 참고로 2위가 미국, 3위가 중국, 4위가 체첸이었다. 당시 체첸 전쟁 와중이었음에도...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최대 굴욕을 안겨준 몽골-타타르의 멍에[78] 못지않은 멍에라고 부를 정도다. 결론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에 끼친 영향은 베트남전이 미국에 끼친 영향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한편 이 시기에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흘러들어간 수많은 무기들은 상당수 미국이 거액(예를 들어 스팅어 한 발에 10만 불)을 주고 되샀지만 남은 무기들이 미군을 노리게 되었다.

소련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공산 정권(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만 남았지만 희한하게도 소련군이 철수한 뒤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나지불라는 정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는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90년 나지불라 대통령이 정권을 겨냥한 쿠데타 모의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샤나와츠 타나이 당시 국방장관과 정부군의 주요 장성들을 숙군하면서[79] 이로 인해 정부군의 군사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형세가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졌고 1991년 12월에는 소련이 붕괴되어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가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무자헤딘 반군들의 공세와 공산정권이 신임하던 장군 압둘 라시드 도스툼의 배신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

미국은 철수하는 소련군을 보며 "아프간이 괜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 아닌데 멋도 모르고 쳐들어간 소련 놈들 보소." 하고 배를 잡고 비웃었지만[80] 20년 정도 후에는 사돈 남 말 할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항의한다는 의미로 다음 해에 열린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대부분의 서방권 국가들도 이에 동참한다.[81] 이에 열받은 동구권은 4년 뒤에 열린 1984 LA 올림픽에서 똑같이 갚아줬고[82] 이 반쪽짜리 올림픽은 1988 서울 올림픽에야 냉전과 함께 끝났다.

당시의 소련군의 사기는 그리 좋지 않았는데 당시 아프간에서 간염 걸린 병사가 11만 5천 명, 장티푸스 걸린 병사가 3만 1천 명. 도합 42만여 명의 병사가 앓아눕는데도 의무대는 턱없이 부족했고 전방의 병사들은 무자헤딘 때문에 하루 종일 힘들 정도로 바빴다. 이는 당연히 전방 병사들과 후방 병사들의 갈등을 부추겼고 단합도 되지 않았다.[83] 전투를 기피하기 위해 간염 환자의 오줌을 마시는 등의 꼼수도 횡행했다. 반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도 상당수가 좋은 꼴은 못 봤는데 죽지는 않더라도 팔다리는 물론이고 성기까지 절단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그 꼴 나고도 목숨은 붙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반군들이 소련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절단 부위에 최소한의 지혈 정도는 해주고 소련군이 회수하게 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장교들도 병사들처럼 개판이긴 마찬가지였다. 전쟁통의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려고 마약 매춘에 찌든 자들이 많았다.[84] 고위 장교들은 휘하 여군들을 회유해 마치 현지처처럼 두기도 했다.

즉 당시 소련군이 전투에서는 늘상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전쟁에서는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전 군인들은 지금도 영웅으로 대접받는 것에 비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대부분 참전 사실을 숨기거나 참전 사실을 밝히더라도 자랑은 하지 않을 정도로 대우를 못 받고 있었다. 다만 이건 언제까지나 옐친 시절까지의 이야기. 푸틴 체제 하에서는 소련 시절에 대한 무조건적 부정을 지양하고 합리적 비판을 추구하게 되면서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 군인들에 대한 대우 자체는 다른 전쟁 참전군인들과 동등하게 적용받고 있으며 민간인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면 국가유공자로 다른 전쟁 참전 군인들만큼 인정받고 있다.[85]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발트 3국, 중앙아시아, 캅카스의 구 소련권 국가에서도 아프간전 참전 군인들이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였다고 하며 경제가 막장이었던 1990년대에는 많은 참전용사들이 구걸을 하던가 납품팔이 등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평범한 사람들도 하루벌어 하루살기 급급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참전 군인에 대한 지원이 미비한것은 특기할 일은 아니었기는 했다. 그렇지만 구소련권 아프간전 참전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전쟁에 다시 뛰어든 경우는 흔했다. 소련 붕괴 후 소련 각지에서 전쟁이 터졌기때문이다. 우선 캅카스 3국에서 남오세티아 전쟁, 압하스 전쟁,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터졌고 타지키스탄에서도 내전이 터졌으며 몰도바에서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이 터졌고 러시아도 체첸 전쟁이 터졌기 때문에 베테랑이었던 아프간 참전용사들이 전쟁에 참전했다. 2014년 돈바스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의 아프간전 참전용사들 중에도 나이가 든 이상 주력은 아닐지라도 전쟁에 참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후 혼란이 지속되어서 공산정부군 참전자건 무자헤딘 참전자건 내전과 분쟁이 이어졌기 때문에 혼란은 여전했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총을 쥐어야 했으며 가족들과 함께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얻어맞고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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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ILL NOT GAS LADAS UNTIL... SOVIETS WITHDRAW
우리는 소련이 철수할 때까지 라다 손님은 받지 않습니다.
1986년 토론토의 한 주유소
이 밖에도 전쟁의 악영향은 황당하게도 캐나다에서도 발생했는데 다름아닌 라다 차량들을 몰고 다니던 차주들에게 불똥이 튀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대로 된 차량 서비스를 못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 러시아는 소련 붕괴까지 겪고 자신들의 영향권이었던 옛 공산국가들을 NATO에 가입시킨 서방에 대한 원한이 훨씬 더 커져서 미국이 아프간에 쳐들어갔다가 탈탈 털리자 역사는 반복된다고 조롱했으며, 탈레반이 국제테러집단이라 대놓고 지원은 못 했지만 인접국들의 지원을 묵인하거나 이들이 러시아에서 제공받은 무기를 탈레반에 보내는 걸 모른척 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이들 국가에 압력을 가하고 원조를 끊을 때도 대신 나서서 지원해 주는 등 자신들이 당한 것을 미국에 그대로 갚아 주었다.

4.1. 알카에다 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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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문사에 '평화의 길로 가는 반소련 전사들의 수장'으로 묘사된 오사마 빈 라덴

소련의 철수로 전쟁이 끝난 후 알카에다, 무자헤딘에서 활동하던 아랍인들은 본국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이들의 모국이었던 아랍권 국가들의 정부는 세속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근본주의자였던 이들은 그저 골칫거리였다. 더욱이 제조업이 일천하여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던 아랍권 경제가 원자재 가격 추락으로 경기가 매우 나빠져서 무자헤딘의 귀환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설령 귀국하더라도 정부의 감시와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서 철수 직전에 소련이 남기고 간 나지불라 정권의 정부군과 싸우기도 하였고[86] 이후 제1차 체첸 전쟁이나 보스니아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오사마 빈 라덴 걸프 전쟁 때 사우디를 돕기 위해 무자헤딘을 제공하려고 했으나 사우디 측은 거절하고 대신 다국적군이 사우디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에 빈 라덴은 크게 실망하여 사우디 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사우디에서 추방당해 수단 공화국으로 갔다.

미국을 위해 싸웠던 자신들이 하루아침에 토사구팽당한 것에 실망한 알카에다 지도자들은 반미 노선을 취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상대로 테러를 하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당시 아프간의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던 중국도 된서리를 맞았다. 훗날 튀르키스탄 이슬람당을 비롯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활동하는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소련-아프간 전쟁에서 영감을 받고 아프간에 싸우러 갔던 이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항해 테러와 항쟁을 벌이게 되었다.

5.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의 비교

미국은 소련이 빈손으로 철수하자 명분없이 아프간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왔다고 조롱했으나, 미국도 소련이 철수한 지 약 13년만인 2001년 9.11 테러의 복수를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가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였고 소련보다 2배 더 길게 20년이나 전쟁을 벌였지만 끝내 오사마 빈 라덴 한 명 잡은 것 외엔 거의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철수했다. 오히려 소련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그나마 소련군 철군 후에도 4년이나 버티기라도 한 데다 승자가 반공주의, 이슬람주의 반군/군벌 세력들인 무자헤딘이었지 2001년 미국이 탈레반을 끌어내리고 수립한 친미 정부는 철수 결정을 내린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무너져버렸고 승자가 다시 재집권한 악랄한 이슬람 극단주의 광신 학살자 집단인 탈레반이었기 때문에 결과는 더 좋지 못했다. 당연히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구소련권 국가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미국이나 미국을 따라 아프간전에 참전한 국가들도 결국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갔다가 수렁에 빠지고 뛰쳐나온 자기들과 다를 게 없었다며 조롱했다.

20년의 시간차를 감안해도 전쟁양상 자체는 소련이나 미국이나 비슷했다. 소련군도 이동에 헬기를 동원했고 기동부대 위주로 치고 빠지기 전술을 주로 구사했으며 부족한 병력으로 사상자를 최소화하며 무자헤딘과 맞서기 위해 화력 의존도가 높았다. 사상자도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 못지않게 IED와 같은 각종 함정에 걸려 입은 피해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도 미군과 같다. 전쟁 10년 동안 소련군 1만 5천 명이 전사했는데 미군도 아프간 전쟁에서 11년 동안 2,200명이 전사했으며[87] 2010년 6월에는 103명이 전사하였다(2010년 7월 미군 65명 전사). 이라크 전쟁에서는 2003년부터 5년 동안 4000명 이상 전사하였다.[88] ISAF가 80년대에 비해 발전된 보급/의료 지원체계[89]를 갖췄다. 시대보정을 한다면 우세한 전과를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이나 미군의 아프간 전쟁은 걸프 전쟁처럼 명확한 목표가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미국이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는 것에 만족한 것처럼 소련군도 하피줄라 아민 정권만 붕괴시키고 빠졌으면 전사자가 14명이었을 것이다.

소련이 철수한 지 10여년 후 같은 곳에 들어온 미군 및 ISAF가 온갖 첨단 무기로 도배하고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반군을 진압하지 못했음을 상기하면 소련군은 적어도 전술적으로는 미군만큼 전과를 올린 편이다. 아프간에서 소련군은 잘 싸웠다. 게다가 아프간에 투입된 장비도 한 세대 이전 장비였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진짜 최선을 다한 셈이다. 특히 소련군이 정보전이나 첨단장비 등이 하나도 없는 군대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소련군도 정밀 유도병기 조기경보기 등 최신 자산을 다수 갖추고 있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가성비가 안좋은 전쟁이었는데 한 미국의 언론지는 10달러도 안되는 반군 텐트를 부수기 위해 100만불짜리 토마호크 미사일을 써댄 한심한 전쟁이라고 가열차게 비난하였다. 여기에 소련은 육로로 아프가니스탄에 접하고 있어서 물류비용이 비교적 싸게 발생했지만 미국은 대부분의 물자를 바그람 공군기지로 공수했기 때문에 엄청난 물류비용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생수 한병은 미국 본토에서 25센트 수준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 조달 비용은 2달러가 되었을 정도였다. 미군과 탈레반의 전사자의 교환비는 약 10~20대 1이지만, 어차피 아프가니스탄은 잉여 인구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나라이고, 탈레반 전사자와 미군 전사자에 각각 들어가는 보훈비용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물론 소련군도 보훈비용은 들어갔지만 징병제라서 국가가 정해준 만큼의 합당한 보상만 하면 되는 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잠재적 모병대상자를 의식해서 보훈해야 하는 데다 오바마케어 이전까지 국민들을 위한 국가 차원의 의료보험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돈이 더 들었다. 미군이 첨단 전투 장비를 개량하고 개선하는 만큼 테러리스트들의 전략전술 역시 발전을 거듭하는 법인데[90] 미국은 이를 돈으로만 메꾸려다가 전쟁에서 실패하였다.

게다가 아프간 이슬람 공화국은 대부분의 재정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는데 중간에 새서 고위층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도 천문학적이다. 이는 20년간 약 2조 2,600억 달러(한화 2,600조원, BBC 추정), 매년 130조원, 하루에 3000억원의 전비를 쓴 셈이다. 소련은 전쟁 개입 7년간 50억달러 미만을 사용했으므로 1987년의 CIA보고서 철수가 1988년 이뤄진 것을 보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0억달러 미만을 사용했을 것이며 맥시멈으로 추정해도 소련의 전비는 물가상승률(1980년대의 1달러는 2010년대 약 3달러) 을 감안하면 2010년대 비율로 약 300억달러(34조원) 밖에 안 된다. 이렇게 보면 소련의 전비는 매년 5조원(매일 130억원 정도) 정도밖에 안 썼으니 미국이 얼마나 비싼 전쟁을 치렀는지를 알 수 있다.[91]

민간인 피해 문제만 놓고 보면 소련-아프간전 당시 민간인 피해는 56만2,000~200만명까지 다양하게 추산되며 상당수는 소련군 측에 의한 사망자라고 추정된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47,245명으로 약 30-40%가 미군측에 의한 사망자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프가니스탄의 친소련 정부는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지원국가였던 소련이 1991년 해체되고 이듬해인 1992년 정권이 전복될 때까지 약 4년간 수도 카불과 헤라트, 칸다하르 등 주요 대도시들을 쥐어잡으며 무자헤딘과의 내전(1989~1992)을 치르면서 버텼다.[92] 그래도 아프간 친소 정부의 집권 세력들과 군 장성(사회주의자, 세속주의자, 무신론자)들은 나라를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수호해야 한다는 나름의 신념과 철학이라도 가지고 무자헤딘들에게 대항했지만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간의 친미 세력은 어떻게 하면 외국의 원조금으로 자기 가문을 부흥시킬까 하는 권력욕, 금전욕만 가지고 원조금을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지에 있는 친지와 그 수하들에게 빼돌리는데만 급급했다. 이들은 부정부패와 전횡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자신의 친척들이 이미 다 외국에서 호의호식하는 상황에서 굳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 걸고 싸울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미군이 모두 떠나기도 전인 8월 15일, 즉 2021년 9월 11일까지였던 철수 기한도 지나기 전에 급속도로 붕괴하였다. 탈레반조차도 정부군이 너무 빨리 무너져서 상황 전개에 충격을 받았을 정도였다.[93]

거기다 철수 과정조차도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소련보다 훨씬 엉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철수 작전이란 (인질이 될 수 있는) 자국 민간인부터 대피시키고 나서 군대가 철수를 해야 하는 법인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좀 더 버텨줄 거라 착각했는지 군대부터 먼저 철수시켰다. 바이든 행정부는 카타르에서 탈레반과 회담을 진행한 뒤 탈레반 측이 요구한 대로 바그람 공군기지의 미군부터 철수시켜 버렸다. 미군의 예상보다 아프간 정부군이 훨씬 더 빨리 무너지면서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아비규환을 만들었다. 결국 미국 민간인들이 공항까지 제대로 접근하지 못해 오히려 5,000명의 미군이 증파되는 한편, 아슈라프 가니는 차 4대에 현금을 가득 싣고 도망치는 와중에 헬기에 돈을 다 집어넣지 못해서 활주로에 현금 뭉탱이를 버려두고 도망가는 심각한 추태를 부리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탈레반은 어차피 떠날 자들을 공격해서 서방권의 원한을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철수를 방조했고 미군은 적대 세력인 탈레반의 묵인 하에 철군하는 굴욕을 겪었다. #

일각에서는 2011년에 폭발한 시리아 내전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피줄라 아민 정권에 반발해 봉기한 무자헤딘 반군이 기세를 올리자 소련이 참전하고 국제 대리전으로 비화된 것처럼 시리아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에 대항해 터키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등의 지원을 받는 자유 시리아군 알 누스라 전선 등이 봉기해 내전 상태에 빠지고 러시아와 이란, 이라크, 이집트, 헤즈볼라 등이 참전하고 지원하면서 미니 세계대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격화된 시리아의 정세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과 유사하지 않냐는 분석이다. 그러나 사실상 소련 혼자 싸워야 했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의 상황과 달리 이란과 이라크, 이집트, 레바논 헤즈볼라 등의 지원 세력들이 있었기에 아사드 정권은 소련의 후계국인 러시아의 개입 이전에도 아민이나 카르말, 나지불라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지에서 싸울 수 있었다는 중대한 차이는 있다.[94]

6. 관련 대중 매체

6.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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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스트 배틀(Братство Leaving Afghanistan) - 2019년 9월 6일에 개봉한 러시아 전쟁영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기 일보 직전에 임무를 수행하다가 스팅어에 의해 격추당하여 무자헤딘의 포로로 잡힌 전투기 조종사를 구하러 투입된 스페츠나츠 대원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 맥가이버의 한 에피소드인 "To be a man"이 아프가니스탄에 잠입해 활약하는 맥가이버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맥가이버는 무살상 신념에 따라 부상당한 소련군 병사를 보내주고 이 소련군 병사는 마지막에 파키스탄으로 귀환하는 맥가이버를 무사 통과시키는 것으로 보답하여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 비스트 - 당시 소련군 전차 승무원들과 무자헤딘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전쟁영화.
  • 에어 포스 원 - 교전 중 사망한 항공기 납치 테러범 측 동료를 두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같이 싸웠다"면서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 와치맨 - 미국 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소련이 침략전쟁을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보며 핵전쟁까지 불러올 절대 절명의 위기로 인식하고 있다.
  • 제9중대 - 위에서 언급된 3234 고지전을 소재로 한 러시아 전쟁영화.
  • 찰리 윌슨의 전쟁 - 소련의 발목을 잡기 위해 무자헤딘을 지원한 미국의 꼼수를 다룬 미국 정치영화. 단 미국 영화이기 때문에 전후 지원에 무심한 모습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 파이어버드 - 에스토니아의 1970년대 소련 배경 영화. 비행사인 주인공 로만은 법적으로 동성애를 금지하는 당시 소련의 사회 분위기에서 세르게이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최후에는 탈린의 공군기지에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어지는 전선으로 전출을 신청하고 전투에서 전사한다.

6.2. 소설

  • 헛된 기다림 - 나딤 아슬람의 소설. 작품 속에 나오는 러시아인 주인공 리라의 남동생인 베네딕트가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6.3. 논픽션

  • 아연 소년들 -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대표작. 소련-아프간전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유품이 아연으로 만든 박스에 넣어져 본가로 보내지는 것에서 제목을 지었다. 당시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징병되어 아프간에서 지옥을 겪고 돌아온 소년들과 그 가족들이 겪은 PTSD에 대해 다룬 책이다. 벨라루스 현지에서는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곡해해 안 그래도 따가운 시선을 받고 살던 아프간 참전용사들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며 줄소송을 받기도 했다.

6.4. 라이트노벨&만화&애니매이션

  • 블랙 라군 - 러시아 레드 마피아 조직 호텔 모스크바의 로아나프라 지부의 조직원 대부분이 이 전쟁의 귀환병 출신이다. 지부의 보스를 맡고있는 여보스는 이 전쟁에서 대위로 임관, 공수군 스페츠나츠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화려한 전공을 올렸고 뛰어난 저격 실력을 보였다.
  • 풀 메탈 패닉! - 작품 내 스토리는 이 전쟁을 기점으로 현실 역사와 달라진다. 소련이 진땀을 흘린 것까지는 실제역사와 같으나, 타임 패러독스로 인해 개발된 신무기의 등장으로 전략적인 우세를 잡은 소련이 승리하게 되었다.[95] 참고로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가 어렸을 적에는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이었다.[96] 애니메이션 상영 당시에는 아프가니스탄의 명칭만 헤르마디스탄으로 바뀌어 나온다.[97]
  • Cat Shit One - 1980년대를 다루는 2부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나온다.

6.5. 게임

  •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 작중 초반부 배경이 1984년 한창 전쟁 중이던 아프가니스탄[98]이다. 여기서 다이아몬드 독스는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해달라는 CIA의 의뢰를 받기도 하고 게다가 다른 PMC 세력들은 소련을 직접적으로 적대하기에 꺼리는 것을 카즈히라 밀러는 다이아몬드 독스를 더욱 강하게 만들 기회라 여기고 개입한다. 메인미션 중에 꿀벌은 어디에 잠들어 있는가라는 미션이 있는데 CIA가 무자헤딘에게 지원해 준 허니비가 소련군에게 넘어가 버리고 그걸 다시 회수해서 와야만 한다.
  • 월드 인 컨플릭트 - 확장팩 '소비에트 어설트'로 추가된 소련 측 싱글 캠페인 등장인물인 블라디미르 올로프스키가 이 전쟁에 참전했던 적이 있는 노련한 사령관이라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 지옥도와 같았던 80년대 말 전쟁기의 아프간에 직접 있었던 인물인 만큼 전쟁의 참상과 공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99]
  • 황혼의 투쟁 - 중기 냉전. 미국의 3Ops 카드다. 위에 나온 'bear trap'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며 소련은 매 턴마다 2Ops 이상의 카드를 버리고 주사위를 굴려 1~4가 나올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버릴 카드가 없는 경우 점수 카드를 쓸 수는 있다.
  • 크레믈린의 위기 - 1985년 시나리오 기준으로 현재진행형이다. 혐전 사상으로 국민들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자유주의 선호가 증가해서 사실상 디버프 상태. 역사대로 병력을 물려 손을 뗄수 있다. 아니면 몇 가지 방법으로 전쟁을 소련의 승리로 이끌 수 있다.[100]

6.6. 노래

전쟁 당시 소련은 록 커뮤니티인 투소프카[101]를 중심으로 록 음악이 융성하던 시절인데, 이 시절 뮤지션들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대며 빠졌다고 한다.[102] 레닌그라드 출신 음악가인 빅토르 초이와 마이크 나우멘코를 주인공으로 삼은 레토에서도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103] 당연히 이미지는 매우 나쁘며, 다뤘다 하면 전쟁을 까는 반전 노래다. 또 이 시기 소련군에서는 사가가 융성했는데 아프간 현지의 소련군들이 전쟁의 애환을 담은 사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가를 부르는 그룹이 아프간 현지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그룹이 밑에 후술되는 푸른 베레(Голубый береты)다.

  • 아프간전 당시 아프간 현지에서 활동하던 소련군 사가 그룹 '카스카트'(Каскад)의 앨범 '기억하라 동료들이여'(Вспомним, Ребята)
  •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 말이 필요없는 레전드급 반전가요. 다만 가사를 쓴 빅토르 초이의 발언을 고려해 보았을 때 반전가요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해당 문서 참고.

* 헤라트 왈츠(Гератский вальс) - 러시아의 가수 스타스 유르코(Стас Юрко)가 부른 소련-아프간 전쟁을 다룬 노래.


* Hill 3234 - 역사적인 전쟁을 주로 다루는 스웨덴의 헤비메탈 밴드 사바톤이 2016년 내놓은 제9집 The Last Stand의 8번째 수록곡. 제9중대로 유명해진 3234고지 전투를 다루고 있다.


* Who Will Save The World - 독일의 2인조 유로팝 밴드 모던 토킹이 1987년 11월 30일 발표한 앨범 'In The Garden of Venus'의 3번곡으로, 소련 병사들이 해당 곡을 사제 라디오로 들으면서 BTR-80을 타고 아프가니스탄을 달리는 모습이 미국 다큐[104]에 잡히면서 서방 측에서는 이 노래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상징하게 되었다. 해당 곡의 가사도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병사들이 편지를 보냈다느니, 그 병사들이 '여기'로 자신들의 청춘을 불태우러 곧 올것이라느니, 하다가 결국 아버지에게 '나는 아직 죽기에 어려요' 라는 후렴구로 끝나서 많은 소련 병사들이 이 곡에 대해 공감했다고 한다.[105]


* ДДТ - Не стреляй(쏘지 마라!) - 소련 및 러시아의 유명 락밴드인 ДДТ가 1980년 부른 노래로, 밴드의 리더이자 작사/작곡을 담당했던 유리 셰프추크가 자신의 절친이자 아프간 전쟁의 첫날부터 참전했던 빅토르 탸핀(Виктор Тяпин)과 대화를 나누다 영감을 얻어 작곡한 곡이다.

  • 이런 훈장은 파는 게 아니다(Ордена не продаются) - 푸른 베레
    지옥을 겪고도 나라에서 던져준 건 훈장 하나인데 그거나마 달고 다녔더니 모르는 노파한테서 '아버지 돈으로 놀고먹는 젊은이 주제에[107] 어디서 훈장 하나 사서 으스대고 다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타박을 받은 한 참전자의 노래. 그렇다고 가사 내용처럼 아프간전 참전 사실을 밝힐 수도 없었던 게 2000년대 초반까지는 러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전자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나빠 참전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욕을 얻어먹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당시 러시아인의 증언). 다행히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이들도 높으신 분들의 희생양이라는 등 시선이 그나마 호전되었다고 한다.

* 당신들이 우릴 여기에 보냈다(Вы нас туда послали) - 위의 곡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의 노래라면 이 노래는 당시 VDV를 전역한 군인들이 모여서 만든 밴드인 '푸른 베레'의 곡이다. 해당 곡은 소련 민중의 지지를 얻어 군 수뇌부가 전쟁을 일으켰는데 정작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에 민중들은 아프간 전쟁을 멈추라고 하고 군 수뇌부는 침묵하며 오히려 전쟁에 끌려간 장병들이 온갖 쌍욕들과 부조리에 대면하는 것을 가사를 통해서 풍자하는 것이 일품.

* 철학쟁이(Философ) - 위에서 언급된 '푸른 베레'가 부른 곡이지만 정규 앨범엔 넣어지지 않은 곡이다.[108] 모스크바의 사무실에 앉아 병사들에 무관심한 지휘부와, 수많은 기자들의 물음에 우리는 명령대로 했다고 하자 기자들은 1940년의 독일군과 다를게 없는 살인자들이라며 비난하고 그러한 비난에 보호 하나 없이 노출된 장병들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는 곡이다.

  • 먼지를 삼키며(Пыль глотаю) - 알렉산더 도로셴코(Александр Дорошенко)

  • 캐러밴(Караван) - 알렉산더 로젠바움(Александр Розенбаум)

  • 산 너머 헬리콥터들은 돌고 있다(Над горами кружат вертолёты) - 유리 키르사노브(Юрий Кирсанов)


  • 우리는 떠난다(Мы уходим) - 카스카드 - 콘틴겐트(Каскад - Контингент)

  • 두쉬맨(Душман)[109] - 카스카드(Каскад)

  • 칸다하르(Кандагар) - Спецназ(스페츠나츠)

저 노래들의 가사들을 해석해보면 알겠지만 전부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죽기 싫다거나, 전우들이 죽어서 본인 멘탈이 나갔다거나, 집에 가고 싶다거나 하는 등 부정적이고 슬픈 가사들뿐인데 자국뽕투성이로 도배되었던 다른 소련 군가들과는 상당히 비교된다.


[1] 소련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전쟁 참전자의 회고록에서 발췌된 사진이다. 소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VDV 소속, 제11정찰중대의 니콜라이 야쿠셴코(Николай Якущенко) 준위(정비반장). 뒤는 11정찰중대 소속의 BMD-1 공수장갑차이다. 1983년 아프간 카불에서 찍은 사진. [2] 단일 집단이 아니라 하위 분파가 매우 다양하다. 크게 수니파, 시아파, 마오주의파로 나뉜다. [3] 중국은 수니파와 마오주의파 지원, 이란은 시아파 지원, 그 외의 국가들은 수니파 지원. [4] 팔레스타인이 왜 이쪽에 있냐면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보이다시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서는 파타당은 물론 극좌 테러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조금 더 온건한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DFLP)을 비롯해 좌파 계열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등장한 건 좀 이후다. [5] 본래 친소 국가였던 이집트는 이 시기에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맺고 친서방 국가가 된 상태였다. [6] 소련이 냉전 시절에 이집트는 물론 미국에 대항해서라도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었으나 미국은 티 안 나게 중국에 있던 소련 무기들을 구매하고 파키스탄에 팔아먹기 시작하였다. 즉 말해서 중국이 대놓고 지원한 게 아니라 브로커들이 지원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초토화된 대륙을 바삐 복구하던 덩샤오핑 정권 입장에서 CIA에 중고 소련제 무기를 넘기는 건 나름 짭잘한 외화벌이 장사였는데 1억 달러를 벌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63식 다연장로켓 등의 중국이 독자적으로 설계한 장비들도 무자헤딘 반군에 제공되었다. [7] 반미 감정과는 별개로 이란은 시아파를 믿는 하자라족과 같은 이란계인 타지크족 등이 주축이 된 아프간 무자헤딘들에 한해 지지했다. [8] 이란 혁명 이전인 팔라비 왕정 시절에 이스라엘을 인정했던 이웃나라인 이란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은 인민 민주당의 공산정권 수립과 소련의 침공 이전 바라크자이 가의 왕정과 다우드 칸의 공화국 정권 시절에도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과 싸우던 무자헤딘을 지지했다. [9]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미하일 고르바초프 [10] 친정부 민병대 제외. [11] 소련 육군, KGB, MVD 산하부대 합산. [12] 절반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3] 사실 사상자 규모만 따져 보면 베트남 전쟁이나 6.25 전쟁에도 못 미치고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의 한 파트인 겨울전쟁에도 못 미치며 본토 인프라가 파괴당하지 않았으니 붕괴의 요인으로 작용했을지언정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보급로도 육상이라 수송비도 상대적으로 적게 들었다. [14] 아프간 전쟁에 들어간 비용은 CIA 추정에 따르면 소련의 연간 군사지출의 2.5% 가량이라 소련을 파산시킬 정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15] 대통령이었던 다우드 칸만 살해한 게 아니라 영부인과 자녀들까지 죽였다. [16] 더 웃긴 것은 아민 반대파에게 이런 소문을 내라고 한 것은 KGB였다는 점이다. 아민을 압박하여 아프간 공산화를 독촉할 생각이었는데 지들이 한 백색선전을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사실로 믿어 버린 셈. [17] 사실 아민은 소련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적이 소련군인 줄 모르고 "소련인들이 도와줄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친소파였다. [18] 하지만 여기에는 반론도 있는데 소련이 단순히 낚여서 아민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아민이 아프가니스탄을 개판으로 운영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반소파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아민 정권은 이미 충분히 막장이었다. 아민은 인민민주당내 강경파인 할크파 소속으로 소련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예로 아민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고 집에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하며 한 술 더 떠서 아프간에 거주하던 소련인들에게도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붉은색으로 칠하도록 권고하기까지 했다. 이는 아프간에 있었던 소련인들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소련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아민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소련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즉, 소련은 단순히 아민이 필요없어서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럴 만한 어느 정도의 이유가 있어서 제거한 것이며 달랑 3개월 집권하는 동안 수천명을 불법적으로 사형시키는 등 독재국가인 소련이 보기에도 기가 찰 정도의 패악질을 저질렀다. [19] 그러나 어쨌든 소련이 집권시킨 후임자인 카르말 역시 무능하고 무력했다는 점에서 아민 제거 결정은 소련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의 판단 착오 중 하나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하피줄라 아민 정권은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서 봉기한 반군 세력을 수세에 몰아넣을 정도의 역량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침공 이후 권좌에 앉은 카르말은 외세의 무력 덕분에 집권한 주제에 자기가 속한 세력인 파르참파의 권력을 위해 아민 지지 세력 할크파에 대한 대대적 숙청에 정신팔려서 아프간 공산정부군에서 수만명의 이탈자가 나오든 그들이 반군에 가담하건 말건 안이하게 방관했다. 아민이 정말 무능하고 소련의 아프간 전략에 큰 해가 되는 존재였다고 쳐도 소련이 대안이랍시고 밀어준 카르말은 그 이상의 해악을 끼친 셈이다. [20]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SDI 계획으로 촉발된 미국과의 군비경쟁, 아르메니아 대지진과 함께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4대 요인으로 꼽힌다. # [21] 풀숲이 우거진 한국의 산악지형과는 많이 다르다. [22]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역시 20여년 뒤 비슷한 짓을 더 큰 스케일로 했다. 그러다가 경제를 말아먹은 점도 같다. [23] 나지불라는 타라키와 아민, 카르말 등 그 동안 일방적인 무신론 공산주의 정책을 펼치며 무자헤딘 등 이슬람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군 세력들의 발호와 세력확대를 초래하고 모든 사태를 소련에게 맡긴 채 악화시켰던 역대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 대통령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이슬람에 친화적인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이미 아프가니스탄의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은 나지불라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되려 나지불라와 싸우던 무자헤딘들을 지지했다. [24] 의외로 스팅어의 확실히 확인된 격추 대수 자체는 무자히딘이 이미 사용하고 있던 소련제 SA-7 스트렐라와 크게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전쟁을 위해 아프간으로 향해야 할 스팅어 미사일들을 열심히 빼돌려 비축했고, 전쟁 기간 동안 이 신무기를 소련과 이란에 팔아먹어서 부수입을 올리는 부패한 무자히딘 군벌들도 있었다. 심지어 전후 크로아티아 카타르, 심지어는 북한에까지 흘러들어가 미 정보부가 경계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이 빼돌린 물량은 카길 전쟁 당시 파키스탄군에 의해 인도군에게 사용되기도 했다. [25] 정작 게이츠 자신은 미국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도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26] 소련이 폭풍333 작전을 발동하여 당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대통령인 하피줄라 아민을 살해한 날짜이다. [27] Le Nouvel Observateur. 현 롭스(L'Obs). [28]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소련 몰락에 일조했으니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의 인식에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분명히 미국의 핵심적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이었다. 상대가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처럼 사방천지에 적을 만들어놓고 쿠웨이트 침략으로 선빵까지 친 모지리가 아니라 소련이었기 때문에 직접 충돌까지 가지 않은 것이지. [29] Kepel, Gilles (2006). Jihad: The Trail of Political Islam. I.B. Tauris. pp. 138–139, 142–144. ISBN 978-1-84511-257-8. [역자주1] '공격받지 않는 안전지대'를 가리키는 정치학계의 관용어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라오스 일대에 호치민 루트를 건설하여 '성역'으로 사용했다. 이는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초래했다. [역자주2] 1979~1981년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을 가리킨다. [32] 특히 타라키를 죽여버린 것은 당시 소련의 지도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민을 가리켜 개새끼(bastard)가 따로 없다고 직설적으로 욕했을 정도인데 왜냐하면 타라키는 브레즈네프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공개적으로 확언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KGB 의장이자 후임 서기장이 된 유리 안드로포프도 타라키 암살을 계기로 아민 축출을 결심했다. Rodric Braithwaite. (2012). Afgantsy: The Russians in Afghanistan 1979-89, Profile Books, p.73 [33] 재밌게도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게 된 미국의 결정적인 원인과 똑같다. 베트남 전쟁 개입 직전 남베트남이 막장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이대로 가다간 베트콩 손에 의해 망할 것이라는 걸 이미 미국도 충분히 알았지만, 어쨌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1세계의 리더로써 1세계 진영 국가가 공산주의의 손에 무너져 내리는 동안 개입하지 않으면 체면이 박살나는 것은 물론이요, 리더쉽과 동맹체제가 의심받을 건 당연했기에 진흙탕 싸움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개입했다. [34] 여기서부터 문제가 되었다. 지도해 줄 국가가 없다면 통제가 풀려난 무장단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그래서 훗날 상임이사국인 중국, 영국, 미국, 러시아가 타 국가에 전쟁을 선포하고 승리한 뒤 경제재재만 했으면 했지 광신적인 ISIS를 제외하면 정권까지 박살내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미국이 무아마르 카다피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지만 사실 후세인은 그렇다 쳐도 카다피는 반군과 반군의 후원자 국가들이 처분하는 걸 방조한 것에 더 가깝다. [35]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자국이나 파키스탄에서 들여온 무기들로 싸웠는데 2차대전 때 사용된 영국, 소련, 나치 독일제 무기가 많았다. [36] 후술할 총기 종류도 구식 총기들이며 둘이 입고 있는 속옷이 현재의 러시아 연방군에서도 쓰이는 보급품이다. [37]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소련과 아프간 공산정부가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주거나 빠른 승진을 제안하는 등의 당근을 써서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전쟁 전 기간 동안 반군이 사용한 무기의 80%가 소련군과 아프간 공산정부군에게 노획한 것일 정도로 군대의 이반은 심각한 문제였다. [38] 게다가 소련의 대리인인 카르말의 대응도 매우 한심했는데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비상사태에 자신이 속한 상대적으로 온건 사회주의 분파인 파르참파(깃발파)가 군부에서 열세에 처해있고 장교 다수는 강경 스탈린주의 추종 분파인 할크파(인민파)에 충성한다는걸 뻔히 알고도 권력욕에 미쳐 할크파 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할크파 장교들 다수가 급하게 제거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부군의 사기와 조직력은 크게 저하됐다. 한 술 더 떠서 이에 일부 할크파 장교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무자헤딘에 가담해 보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라 아프간 이슬람교 신앙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던 다수 할크파 장교들의 종교 핍박에 질려 아프간 공산정부군의 수많은 농촌 출신 징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해 전향하는 경우가 많기야 했다. 물론 파르참파의 방식대로 조금 온건하게 나서도 아프간인들이 사회주의에 저항하지 않는게 보장이 안됐다. 사우르 혁명 이후 할크파 장교들은 강압과 폭력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징집된 사병들에게 억지로 주입해서 탈이 나고 하피줄라 아민 정권 당시에 이들이 군부 다수로 올라선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카르말은 이 와중에 통치를 완화하고 유연하게 타협해서 어떻게든 무마해보기는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서 그나마 죽이건 밥이건 장교단 중핵을 형성하기야 하는 할크파 장교들마저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있을 수 있던 선택지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39] 본래 이스마일 칸은 본래 아프간 정부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소련 침공 이전인 헤라트 소요사태 당시 공산 아프간 정부군이 헤라트 시민들을 겨냥해 저지른 시민 학살에 분노하여 군에서 탈영해 아프간 정부군을 적으로 돌리면서 이후 아프간 정부로부터 위험 인물로서 지명수배를 받는 반정부군의 지도자가 된 상황이었다. [40] 여기서 중요한 점이 공세할 때마다 소련군의 병력이 충분히 동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산 아프간 정부군도 물론 나중에 탈레반이 쳐들어올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미국의 아프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에 비해서는 나았지만 근본적으로 외국군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구라는 무자히딘의 선전에 매우 취약했고 카르말의 할크파 대숙청으로 조직력도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결국은 후일의 아프간 정부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주축은 소련군일 수밖에 없었다. [41] 이때 카르말이 대통령직에서 사직하고 나지불라가 아프가니스탄 친소 정권의 대통령이 되면서 나지불라 정부가 출범했다. [42] 카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그만 주(Laghman Province) 지역이다. [43] 그래도 따지고 들면 미군이 소련군보다는 전투병력이 더 많기는 했다. 이쪽은 다국적군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44] 이는 20년후 미국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똑같이 고려하던 방안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45] 게릴라전 특성상 민중과 지속적인 접촉이 필수였기에, 압도적인 머릿수를 바탕으로 면을 장악하고 민사작전을 수행하며 게릴라와 민중의 연결을 차단하는 전략에는 당할 수 밖에 없다. 즉 소련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자 단 하나 밖에 존재치 않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시도조차 못했다는 건 결국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될 전쟁을 벌였다는 전략적 대참사를 직접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다. [46] 철군 이외에는 선택지가 말소된 상황에서도 정치적, 외교적인 이유로 전전긍긍하다가 겨우겨우 발을 빼며 이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것도 미국이 20년 뒤 똑같이 재현한다. [47] 아이디어 자체는 좋았고 성과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무자헤딘은 미국이 스팅어를 제공하기 이전에도 노획하거나 파키스탄을 통해 입수한 스트렐라나 사용이 간편해 사용에 무리가 없었던 12.7mm DShK 중기관총 등으로 반격해 격추 전과를 올림으로서 이 샤이탄의 마차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48] 해군 항공대의 Yak-38 STOVL기라는 특성을 활용해 활주로가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잘 운용해 보려고 했으나 기체 자체의 한계와 아프간의 가혹한 환경 덕에 포기하고 금방 철수했다. [49] 무자헤딘도 공산정부군의 꾸준한 탈주로 인해 계속 보급품과 인력을 보충했고 CIA 사이클론 작전으로 전 세계에서 무기가 쏟아지면서 소련군을 더욱 고전시켰다. 중국제 63식 107mm 다연장 로켓포 등의 포병장비를 원조받은 무자헤딘은 산악지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대도시와 소련군의 기지를 맹포격해 꾸준히 전과를 올렸다. 허접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운반하기 쉽고 순간 화력이 뛰어났기에 소련군은 무자헤딘을 공격할때 반드시 병력을 분산해야 했다. [50] 노리쇠 전진기가 달려 있고 M16A2에서 볼 법한 원통형 총몸 대신 베트남전을 떠올리게 만드는 삼각형 총몸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M16A1으로 보인다. 실제로 80년대에 미국에서는 M16A1에서 M16A2로 대체해서 80년대 중반쯤 되면 많은 양의 M16A1들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무자헤딘에게 지원하기 적당한 무기였을 거다. [51] 종전 후 미국이 아프간에게 돈을 주고 스팅어를 다시 돌려받았으나 받은 양은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남은 스팅어는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었으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선 쓰이지 않았는데 미사일 유도에 필요한 적외선 탐색기가 2001년 즈음에는 수명을 넘어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이나 서독, 중국 등 다른 나라가 준 무기들( M16 소총, H&K G3, 중국제 무기들)은 미군들을 공격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러다 보니 소련은 서방이 문제를 악화시킨다며 반발했다. [52] 19세기 말 영국이 일방적으로 그은 듀랜드 라인 때문에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양쪽에 나뉘어서 살던 파슈툰족이 양쪽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53] 모국과 같은 이슬람 교파를 공유하는 시아파 계열 무자헤딘 세력들에 한해서만 지원했고 당시 이란도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던 상황이었던지라 미국이나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만큼이나 무자헤딘을 크게 지원하지는 못했다. [54] 의외로 결과가 나쁘지 않았는지 수년 뒤인 1989년 아랍연맹에서 이집트의 아랍연맹 정회원국 복귀가 허용되었다. [55] 그 탓에 무자헤딘이 56식 소총은 물론, 심지어 Gew88의 중국 생산형인 한양 88식 소총까지 사용했다. 미국 정보기관을 통해 브로커들이 지원해 준 것이므로 사실상 등소평이 묵인해 준 것이 맞다. 미국이 대놓고 무자헤딘을 지원해 주면 소련과 대판 전쟁이 나므로 브로커로 통해 지원해야 했다. [56] 베트남도 친소 정책을 펼치고 캄보디아에 괴뢰정부를 세웠지만 아프간까지 가서 무슬림들까지 신경 곤두세우게 할 명분이 없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그냥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57] 2차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한 국부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긴 했어도 일방적으로 소련을 추종하는 걸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때문에 코민포름과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미국,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과도 관계가 무난했다. 티토주의라고 불리던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은 1980년 티토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58] 무자헤딘을 지원하였던 파키스탄과 전통적으로 앙숙이다. [59] 카불의 친소 정권은 주요 도로만 간신히 통제할 정도였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미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가 철군했고 아프간군이 딱 저 모양이 된 채 탈레반의 공세에 수세에 몰리다가 결국 2021년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을 탈레반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60] 해당 소련군이 건너는 다리는 테르미즈 주변에 있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우즈베키스탄 우호의 다리다. [61] Прощай. 발음은 쁘라샤이. 강세가 а에 오기 때문에 о는 발음이 약화되어 ㅏ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62] Я Вернулься. Мама! 야 볘르눌쌰, 마마! 라고 발음한다. [63] 소련인들은 아프간 전쟁 초반에는 정말 이 전쟁을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거룩한 성전으로 생각했다.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은 한때 쿠바의 혁명가들과도 같은 사람들로 치켜세워졌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런 분위기는 사라졌다. [64] 레베드는 소련 붕괴 후 정계에 입문하여 1996년 대선에서 옐친을 지지한 공로로 국가안보위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지만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느낀 보리스 옐친에 의해 해임되었다. 2002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지사로 재직하던 중 항공기 사고로 52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65] 미국의 베트남 전쟁도 전쟁 초기에는 공화당, 민주당 가릴거없이 참전여론이 대세였다. 반전여론이 대세가 된것은 최소한 1970년대 와서였다. [66] 실제로 당시 소련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초이도 반전 음악을 발표했다. 후술하겠지만 소련 록의 부흥도 이런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와 함께한다. [67] 이는 베트남 전쟁 전후 미국의 사회상과 비슷하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 말기부터 마약 중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지미 카터 행정부 시기에는 미국인의 최소 10% 이상이 중증의 마약 중독자라는 충격적인 통계가 나오기도 한다. 참전 군인들의 상당수가 귀국 후에 술 중독, PTSD 등으로 인해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빈민층으로 전락한 일부는 각종 흉악 범죄를 일으켜서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68] 탈영하거나 낙오된 이들은 러시아에서 지금도 찾고 있는데 귀환을 희망하면 모두 데려오고 있지만 일부는 아프간인 사회에 동화되어 아직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2013년에 그런 병사들 중 한 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관련 링크(1), 관련 링크(2) [69] 2011년 8월에는 미군 70명이 전사했다. [70] 이라크는 2008년 이후 미군이 철군하면서 전사자가 감소하였지만 아프간은 2009년 이후 전사자가 증가하였다. [71] AC-130, 무인정찰기, 토마호크, 향상된 중방탄복, 피카티니 레일과 광학장비를 장착한 개인화기, 80년대라면 죽었을 병사를 급하게 후방으로 수송해서 팔다리를 절단하는 선에서 살려 놓기 등. [72] 무자헤딘은 서방세계로부터 군사 고문단과 물자를 지원받았고 규모도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면 탈레반과 알 카에다, IS는 테러지원국에 대한 국제적 감시와 제제, 미군과 다국적군의 집요한 공격 때문에 군사 고문단은커녕 물자의 수급조차 원활하지 않고 규모는 5만 명 선으로 추정된다. [73] 니키타 흐루쇼프의 실각, 유리 안드로포프의 집권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출조차 항상 에 대한 얘기가 함께 나온다. [74] 물론 미군도 전쟁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킬 팀과 같이 대부분 개인 혹은 몇몇의 만행에 국한된 것이었고 적어도 탈레반 활동구역에 화학탄은 뿌리지 않았다. [75] 소련 붕괴 후에도 위상 추락의 후유증은 신생 러시아군에 대한 사회적인 냉대와 고급장교를 포함한 인적자원 유출, 그리고 그로즈니의 굴욕으로 정점을 찍으면서 1990년대 내내 이어졌다. [76] 일단 전쟁에서는 승리했어도 소련군이 무자헤딘보다 압도적인 무장을 갖추고 있어서 전투에서는 지기만 했다. 어떤 곳에서는 소련군 공수부대 39명에 무자헤딘 400여 명 중 200여 명이 전사하여 쓸려나가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3234 고지 전투인데 러시아에서 제9중대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단 3234 고지 전투에서 소련 공수부대 6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는 등 소련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77] 독소전쟁 당시 소련 사망자를 2700만, 아프간의 소련 침공 당시 민간인 사상자를 100만명으로 잡으면 독소전쟁 당시 소련 사망자는 전체 인구의 6.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간 사망자는 전체 인구의 13%다. [78] 몽골의 침공으로 240여 년동안 지배받은 역사를 러시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돌프 히틀러도 물리친 러시아가 당한 유일한 굴욕이라며. [79] 이때 쓸려나간 이들이 바로 타라키와 아민이 세워 놓았던 할크파의 장군들이다.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봤자 집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일방적인 무신론 국가 선포하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정책을 하던 시절로 돌아갈께 뻔했는데 오히려 나지불라가 쿠데타를 진압했기 때문에 그나마 더 버틸 수 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80] 당시 미국인 교수들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 결정을 대놓고 비웃는 것이 MBC 뉴스데스크로 중계되기도 했다. [81] 참가한 일부 국가도 있었지만, 국기 대신 올림픽기를 보내 이 대회 참가가 개인적인 것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82]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는 제외.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세력의 맹주이며 루마니아는 탈소련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참가하였다. [83] 단적인 예로 영화 제9중대에서 총열이 휘어진 PKM 기관총이다. 원래는 멀쩡한 것이나 새 것을 지급해야 하는데 행정보급담당관이 몰래 아프간 민간인에게 팔아치우고 나서 땜방으로 이것으로 채운 결과이다. [84] 레스터 그로우의 산맥을 넘은 불곰 中 [85] 다만 이런 점은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군 참전자들에 대한 여론의 비난과 배척이 참전용사들의 빈곤을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미국인들이 받아들여 실패한 전쟁이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정부 및 군 수뇌부와 명령에 따라 끌려간 참전장병을 분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결정이 오판이라 해도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간 참전용사들은 존중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러시아에도 자리잡은 결과다. [86] 그나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한창 경제 성장 중이었기 때문에 이 두 국가 출신 무자헤딘들은 본국에서 제대로 우대받을 수 있었다. [87] ISAF 전체는 3,300명 전사. [88] 그래도 이라크는 2008년 이후 미군이 철군하면서 전사자가 감소하였지만 아프간은 2009년 이후 전사자가 증가하였다 [89] AC-130, 무인정찰기, 토마호크, 향상된 방탄복, 피카티니 레일과 광학장비를 장착한 개인화기, 80년대라면 죽었을 병사를 급하게 후방으로 수송해서 팔다리를 절단하는 선에서 살려 놓기 등. [90] 대표적으로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족 반군에 의해 유행하던 자살폭탄 테러를 헤즈볼라, 알카에다가 차례로 벤치마킹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IS를 제외하면 요즘 테러단체들은 테러를 해도 서방국가들이 끝까지 버티고 무슬림들도 서방만 원망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에게까지 등을 돌리자 중동지역 세속주의 정권들부터 전복시키는 걸로 타겟을 바꿔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자폭테러 희망자들 대신 전투를 할 줄 아는 제3세계 출신의 무슬림 군경력자들을 모집하여 군대를 육성하여 유망한 기업의 주식에 투자하듯이 현지의 근본주의 반군 세력을 도와주고 정권 전복이나 지역 장악 이후 기여분에 따른 지분을 받아먹고는 또 다른 나라에서 같은 짓을 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91] 물론 요즘 가치로 5조원, 1980년대 당시 한화로 약 1조 6천억원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1985년 대한민국 정부 총예산은 12조원에 불과했다. [92] 내전 초기 수도 카불과 정부군 통제하의 주요 도시와 군사 기지들을 겨냥한 무자헤딘 측의 공세를 정부군이 저지시키고,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었다가 무자헤딘 반군들이 함락시킨 동부 지역의 소도시 하나를 아프간 친소 정부군이 총력전을 일으켜서 도시를 점령한 무자헤딘들을 모두 쫓아내고 탈환하는 일까지 있었다. [93] 탈레반의 고위 지도부였던 모하마드 나시르 하카니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누구도 카불을 이렇게 빨리 점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94] 게다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는 소련이 개입하자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반소 무자헤딘을 후원한 반면 시리아 내전 때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리비아 내전 등의 경험으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라 시리아 반군 세력에 대한 지원도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또 거기에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 철수 이후에 일어난 무자헤딘 반군과 나지불라 정권의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오일달러와 무기들을 아프간의 무자헤딘에게 제공해주고 외국인 지하드 전사들에게 여권을 발급하는 등 무자헤딘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예멘에서 내전이 발발하고 앙숙인 시아파가 정권을 잡자 여기에 개입하는 데 바빠서 시리아 내전에는 크게 관여하지 못했고 더군다나 시리아 반군의 최대 후원국이었던 사우디와 카타르가 2017년 사우디 주도의 카타르 보복 사태로 인해 적대관계가 되면서 이에 아사드 정권은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던 두 아랍 국가들의 분열과 대립을 활용해 반군과 IS들을 진압했다. [95] 당시 신중한 강경파였던 알크스니스를 암살할 정도로 우세한 무자헤딘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했지만 이는 소련군 특수부대에 의해 훈련받은 친소 병력에 의한 공격이었으며 당시 정보에 따르면 암슬레이브가 대량생산에 들어갈 정도였다. [96] 때문에 일본산 창작물 주인공 중 드물게도 무슬림이다. [97] 이는 당시 9.11 테러로 인해 바뀐 설정이었다. 참고로 하이잭 사건의 배경으로 나오는 북한도 애니메이션에서는 한카 자치주로 바뀌어 나온다. [98] 하지만 게임 내의 맵은 요르단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코지마 히데오가 라디오 방송 중에 밝혔다. [99] 해당 미션에서 조카이자 휘하 장교였던 니콜라이 말라셴코에게 살해당한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의 항목 참고. [100] 하나는 지속적으로 아프간 정부에 무기를 줘서 안정도를 100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카슈미르 분쟁에서 인도에게 물자를 공급한 다음, 인도가 승리한 뒤 약화된 파키스탄에 있는 무자헤딘 지원 세력에 공습을 하여 무자헤딘을 약화시킨 뒤에 아프간 정부에 물자를 지원하는 방식이 있다. [101] 정확히 말해 투소프카(Tusovka)는 반문화(counterculture)를 의미한다. [102] 그 예를 들자면 빅토르 초이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우겨 약 한 달 정도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원래 2주일 정도만 들어가 있으려고 했는데 여러 사정이 거쳐 한 달로 연장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아시아계는 아프간으로 배치될 확률이 높다"는 진위 불명의 소문까지 돌았다. [103] 중간에 신체 검사 장면이 나오는데 검사받는 아들에게 밖에 있던 어머니가 '아프가니스탄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에도 전쟁에 대한 여론이 개판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104] 자막 버전 [105] 사실 해당 곡의 출시 시기나 가사로 보았을 때 아프간에 파병된 소련 병사들을 대변해 만든 곡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시선대로라면 현장에서의 소련 병사들이 공감할 법하다는 의견이 있다. [106] 'PTSD'를 의미하는 러시아의 숙어. 유래는 당연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07] 노파에게 있어 '전쟁 참전자'란 독소전쟁 참전자를 의미하는데 청년의 나이로 보아하니 절대로 독소전쟁 참전자는 아니기 때문. [108] 이후 연주한 적이 없어, 음원은 사실상 위의 영상이 유일한데 90년대 VHS를 변환한 거라 가사가 뭉개져 들리는 등 질이 좋은 편이 아니다. [109] 소련군들이 무자헤딘을 불렀던 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