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과거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서 사용되던 통화.ISO 4217 코드는 SUR, 보조 단위는 코페이카로 100 코페이카는 1 루블에 해당. 기호는 그냥 단순하게 앞글자만 따서 루블은 руб, 코페이카는 к.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환율은 제2세계의 법정 환율( 프랑스와 미국에서 소련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과 제1세계의 시장 환율(소련에서 프랑스와 미국으로 여행할 때에 쓰이는 환율)이 있었다. 소련에서 영업하는 소련 국가은행에 따르면 1980년대에 모스크바의 특수은행에서 거래하는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법정 환율을 2달러=1루블로 유지했지만, NAFTA와 EFTA에서 영업하는 상업은행들에 따르면 1980년대의 후반기에 뉴욕과 런던 및 파리와 로마의 외환시장에서 재평가한 소련 루블과 미국 달러의 시장 환율이 1달러=10루블에 이르렀다. 소련 장관회의가 결정한 법정 환율로 거래하는 계획경제의 특성을 고려하면, 소비에트 연방에서 식량과 소비재의 가격은 저렴한데, 사치품(주로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수입한 재화들)의 가격이 매우 비쌌던 이유가 바로 제1세계의 시장 환율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정권 시절에 이런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경제개혁을 실행했지만, 변변치 못한 성과를 거두었고 공식 환율과 상업 환율, 여행자 환율간의 격차가 커지자 이 격차를 메우려고 1991년에 50 루블과 100 루블권 지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개혁을 시행했으나 성과는 변변치 않았고 이 당시에 국영상점에서 값싸게 신선제품이나 공산품 하나 살려면 가게 운영 시작전에 몇시간씩 다리 아프게 서야했던 반면에 상대적으로 물량이 넘쳤던 수입품과 시장물품의 가격은 나날이 상승하여 소련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8월 쿠데타와 그 여파로 고르바초프는 통치력을 상실하며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고 보리스 옐친이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등극했는데 옐친은 소련을 해체하면서 전면적인 가격자유화를 시행했지만 가격 자유화, 환율 자유화가 물가의 폭등을 유발하여 화폐가치가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결국 옛소련을 구성한 공화국들 모두가 새로운 화폐로 바꾸고 말았다. 원래는 소비에트 루블을 지속적으로 쓸 예정이었고 소련의 완전 해체 이전에 소련에서 이탈한 발트 3국도 당초에는 소비에트 루블을 그대로 썼지만 루블화의 가치가 급속히 떨어지자 새 화폐로 바꾸었다.[1]
2. 언어별 명칭
소련 당시 널리 통용된 명칭은 러시아어에서 따온 루블(рубль)이었지만, 루블은 엄밀히 소비에트 연방의 법정통화였던 만큼 각 공화국마다 통화를 부르는 별도의 이름이 있었다.2.1. 인도유럽어족
- 러시아어: Рубль(루블), Копейка(코페이카)
- 우크라이나어: Карбованець(카르보바네츠), Копійка(코피이카)
- 벨라루스어: Рубель(루벨), Капейка(카페이카)
- 리투아니아어: Rublis(루블리스), Kapeika(카페이카)
- 라트비아어: Rublis(루블리스), Kapeika(카페이카)
- 아르메니아어: Ռուբլի(루블리), Կոպեկ(코펙)
- 타지크어: Сӯм(숨), Тин(틴)
- 몰도바어: Рублэ[2](루블러), Копейкэ[3](코페이커)
2.2. 튀르크어족
- 아제르바이잔어: Манат[4](마나트), Гəпик[5](개픽)
- 투르크멘어: Манат[6](마나트), Көпүк[7](쾨퓌크)
- 카자흐어: Сом[8](솜), Тиын[9](티인)
- 키르기스어: Сом(솜), Тыйын(티인)
- 우즈베크어: Сўм[10](숨), Тийин[11](티인)
2.3. 카르트벨리어족
- 조지아어: მანეთი(마네티), კაპიკი(카피키)
2.4. 우랄어족
- 에스토니아어: Rubla(루블라), Kopikas(코피카스)
3. 소련 국가은행과 1920년대의 화폐개혁
1917년 11월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러시아 제국 국가은행을 접수하여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을 개업했다. 1917년 12월에 국민경제최고회의와 전러시아 반혁명 태업단속 비상위원회를 설립하면서 은행, 증권, 보험을 국유화하고, 도시와 시골에서 동산과 부동산을 매매하는 거래를 중단했다. 1918년에 외국채의 상환을 거부하면서 내국채를 모두 탕감하고, 주식회사를 구성하는 모든 주식을 무효라고 선포하면서 자연인과 법인의 동산과 부동산을 국유화하고, 사유 재산의 상속권을 폐지하면서 산업과 자원 및 수송과 통신을 국유화했다.곧이어 1918년 그 해에 100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하고, 1919년에는 10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중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하고, 1920년에는 10명을 초과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소기업의 국유화를 완료했다. 1919년에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을 제외한 금융업종 회사들을 모두 폐업하고, 본점과 지점의 다양한 금고를 모두 열어 금은동괴, 금은동화, 사금, 보석, 장식품, 귀금속, 복권, 지폐, 동전, 외환, 수표, 어음, 주식, 국고채, 회사채, 영구채, 승차권, 상품권, 태환권, 우표, 인지, 엽서를 몰수해 관공서의 유지비로 할당했다.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무너뜨린 초인플레이션은 공산주의 혁명의 주역들이 일부러 실현한 것이다. 모스크바의 정치인들은 화폐 제도를 빨리 폐지할 필요성을 느껴 돈다발을 무제한으로 찍어내는 술책으로 화폐의 가치를 땅바닥으로 추락시켰다. 1920년에 국민경제최고회의가 러시아 소비에트 인민은행과 국고출납국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재무인민위원회를 통제하면서 돈을 마구 찍어내기 시작했다. 국유기업들은 총지출의 전액을 국고에서 대출하면서 총수입의 전액을 국고에서 대납했는데,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및 자치정부와 인민군이 명령하는 문서에 따라 특정한 고객들에게 상품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균등한 기본급(박사연봉=석사연봉×2=학사연봉×2×2)을 주었다.
1918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회의가 이른바 '전시 공산주의'를 내세워 세금을 폐지하면서 강제노동과 현물징발과 지폐인쇄를 독려했는데, 온나라의 인민들에게 식량과 소비재를 매일 배급하면서 무현금유통(장부상의 거래)을 장려한 덕택에 상하수도와 도시가스와 대중교통 및 전기설비와 우편택배와 전신전화는 공짜가 되었지만, 도시와 시골에서 다양한 사람들은 물물교환과 밀수 및 집단농장과 텃밭으로 먹고 살았다. 이러니 거지조차 고액권 지폐를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인플레이션 상황은 너무 이상주의에 입각했던 데다가 내전이 벌어지던 상황 속에서 초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것이 손해였기 대문에 나중에 포기를 하게 되었다.
1921년에 신경제정책의 실행에 대하여 어렵게 합의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회의가 현물세의 방식으로 징수하는 식량세를 도입하면서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은행을 개업했다. 레닌은 ' 국가자본주의'를 '국가의 통제에 바탕한 사영 자본의 이용'으로 정의하면서 임대와 협동조합 및 무역과 이권협정을 장려했는데, 외국자본의 투자와 산업기술의 연수를 바탕으로 경영하는 민영 임대공장과 민영 협동조합 및 국영 트러스트와 국영 이권기업이 사업소를 재건하면서 국민경제를 부흥했다. 민영 사업소와 국영 사업소는 노동의 품질과 생산의 수량을 테일러 체계와 포드 체계로 꼼꼼하게 평가하면서 노동자들에게 화폐로 기본급과 성과급을 지불했다.
1922년에 농산물과 임산물 및 축산물과 수산물의 자유로운 거래를 허용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회의가 식량과 소비재의 배급을 폐지했다. 토산물[12]에 대하여 화폐세를 징수한 재무인민위원회는 화폐개혁의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으로서 1922년 12월 1일부터 1923년 1월 31일까지 상환을 약속한 당일에 맞추어 호밀의 완전한 시장가격에 따르는 현금으로 지불하거나 호밀의 특정한 수량을 현물로 지불하는 무이자 곡물 국채를 발행하면서 연이율 6% 1억 금루블(러시아 제국의 금루블 기준)을 발행했다.
재무인민위원회는 1922년의 총예산을 구성하는 재정수입에 대하여 화폐세의 징수와 현물세의 징수와 은행권의 발행을 통해서 각각 1/3만큼 충당했다. 재무인민위원회가 금은보석과 외국화폐와 국채증권을 자유로운 가격으로 매매하는 증권거래소들을 설립하면서 조세개혁을 실행했는데, 1923년 1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러시아 소비에트 국가은행을 접수하여 소비에트 연방 국가은행을 개업했다. 1924년에 다양한 현물세의 폐지와 함께 화폐세의 방식으로 징수하는 농업세를 도입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회의가 거둔 재정수입의 대부분은 국유기업들의 순이익에서 공제하여 국고로 송금한 것이다.
1922년의 화폐개혁(舊10000루블=新1루블)과 1923년의 화폐개혁(舊100루블=新1루블)과 1924년의 화폐개혁(舊50000루블=新1루블)을 차례로 완료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인민위원회의가 외환과 환전이 가능한 금본위제 태환권(체르보네츠)을 지폐로 인쇄하거나 금화로 주조하면서 1체르보네츠=10루블로 규정했다.
- 1921년의 5조 루블=1922년의 5억 루블=1923년의 500만 루블=1924년의 100루블=1925년의 10체르보네츠
- 1924년부터 1933년까지 환율: 10달러=20루블=2체르보네츠
- 1937년부터 1950년까지 환율: 10달러=50루블=5체르보네츠
1937 | 앞면 | |
1체르보네츠(руб10) | 블라디미르 레닌 | |
3체르보네츠(руб30) | ||
5체르보네츠(руб50) | ||
10체르보네츠(руб100) |
1938 | 앞면 | |
руб1 | 광부 | |
руб3 | 육군 | |
руб5 | 공군 |
4. 1947년의 화폐개혁
1947년 12월에 소련 장관회의가 화폐개혁(舊10루블=新1루블)을 단행하면서 '체르보네츠'를 폐지했는데, 자연인의 현금은 그냥 舊10루블=新1루블로 교환했지만, 소비에트 연방 저축은행에 예금 통장을 미리 개설해 돈을 저축한 사람들에게 3000루블까지는 등가교환하고, 3000~10000루블까지는 舊3루블=新2루블로 교환하고, 10000루블 이상은 舊2루블=新1루블로 교환하는 특혜를 베풀었으며, 예전에 발행한 모든 국채들은 매년 2% 이자율로 지급하는 통일 국채와 舊5루블=新1루블로 교환했다.곧이어 소련 장관회의가 식량과 소비재를 배급하는 조례를 하루아침에 폐지하면서 임금과 임대의 금액 및 퇴직금과 연금의 금액에 대하여 등가교환을 규정했지만, 식량과 소비재의 가격에 대하여 미리 2배만큼 인상한 다음에 舊10루블=新1루블로 변경하라고 규정했으며, 당사자가 사업소에서 받은 월급을 기준으로 2월만큼의 임금을 할당해 국채의 매입에 바쳐야 했으니, 1948년 12월에 ' 소비에트 연방 저축은행'을 방문한 사람은 자연인 1명당 새로운 화폐를 100루블만큼 저축할 수가 있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전역에서 1억 명이 100억 루블만큼 저축할 수가 있었다.
- 1950년부터 1960년까지 법정 환율: 1달러=4루블
-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여행자용 환율: 1달러=10루블
1947 | 앞면 | |
руб1 | 소련 국장 | |
руб3 | ||
руб5 | ||
руб10 | 블라디미르 레닌 | |
руб25 | ||
руб50 | ||
руб100 |
- 뒷면은 그닥 도안이라 할 것은 없으나, 100루블은 유일한 뒷면 도안으로 크렘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5. 1961년, 1991년, 1993년의 화폐개혁
1960년 5월에 소련 장관회의에서 화폐개혁의 실행을 예고했고, 1961년 1월 1일부터 화폐개혁(舊10루블=新1루블)을 단행하였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법정 환율: 2달러=1루블
-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암시장 환율: 1달러=5루블
-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여행자용 환율: 1달러=5루블
-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암시장 환율: 1달러=10루블
1991년 1월에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은 198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물가상승 문제와 위폐문제등을 해결하려고 화폐개혁( 등가교환)을 단행하면서 1961년의 화폐개혁으로 발행되었던 50루블과 100루블 지폐를 무효화 시키고,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1000루블(1달러=1루블)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는데, 이 사업은 독립을 선언한 발트3국의 경제력을 마비시켰다는 점 이외에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가상승은 이어져내려오며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8월 쿠데타 이후로 고르바초프를 제치고 러시아를 통치하기 시작한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면서 동시에 전면적인 가격자유화를 시행했으나 물가가 수십배 이상 폭등하며 가파르게 치솟은데다가 예금동결 조치로 인해 국민들의 구매력이 폭락하고 산업생산이 마비되며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1991년 12월에 해체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대신하여 1992년 3월에 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굴라크에서 석방해 복권한 사람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반환하는 특별법을 입법했는데, 매월 180루블(당시의 법률에 바탕한 매월 최저임금의 75%)을 수감한 기간만큼 곱해 지불하면서 최다 액수를 25000루블 이하로 규정하고 있으며, 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가 복권한 사람들의 의식주에 대하여 아파트와 버스표와 무상 의료 혜택을 제공했다.
1992년 10월에 러시아 소비에트의 공화국 연방정부가 1억 명의 국민들에게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평등하게 지급했는데, 러시아 연방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연인 1명당 민영화기업 주식상환권을 1만 루블(1달러=100루블)만큼 지급했다.
1993년 7월에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화폐개혁( 등가교환)을 단행하면서 자연인 1명당 교환이 가능한 액수를 10만 루블(1달러=1000루블)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으며, 1996년 6월에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1991년 6월 20일까지 러시아 연방 저축은행에 예금 통장을 미리 개설해 돈을 저축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리 늦어도 1916년 12월 31일까지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출생한 만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저축한 금액의 1000배만큼 환불하면서 자연인 1명당 환불이 가능한 액수를 100만 루블(1달러=5000루블) 이하로 제한하는 대통령령을 발효했다.
다만 소련 루블 자체는 타지키스탄에서 1995년까지 쓰였기 때문에 일단 1995년까지는 통용이 가능했다. 타지키스탄이라고 해서 좋아서 루블화를 쓴것은 아니었고, 타지키스탄 내전으로 인해 러시아를 제끼고 자체화폐를 발행할 여력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 이후 루블의 고정환율제도를 포기한 관계로 이 시기엔 시기별 변동이 극심했다.
5.1. 지폐
앞면 | 뒷면 | ||
руб1 | 소련 국장 | 액면 단위 | |
руб3 | 크렘린 성벽 | ||
руб5 | 스파스카야 탑 | ||
руб10 | 블라디미르 레닌 | ||
руб25 | |||
руб50 | 크렘린 | ||
руб100 | 바다브즈보드내야 탑 | ||
руб200 | 국립 크렘린 궁전, 삼위일체 탑 | ||
руб500 | 대통령 관저 | ||
руб1,000 | 성 바실리 성당 |
5.2. 동전
1, 2, 3, 5, 10, 15, 20, 50코페이카와 1루블의 9종.
6. 소련 해체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새로 독립한 공화국들은 독립된 화폐를 제정했다.국가 | 대체 화폐 | 도입 시기 | 현재 화폐 | 도입 시기 |
러시아 | 루블 | 1993년 | 루블 | 1998년 |
몰도바 | 쿠폰 | 1992년 | 레우 | 1993년 |
카자흐스탄 | 텡게 | 1993년 | 텡게 | 옆과 동일 |
아르메니아 | 드람 | 1993년 | 드람 | 옆과 동일 |
키르기스스탄 | 솜 | 1993년 | 솜 | 옆과 동일 |
우즈베키스탄 | 숨 | 1993년 | 숨 | 1994년 |
조지아 | 쿠폰 라리 | 1993년 | 라리 | 1995년 |
우크라이나 | 카르보바네츠 | 1991년 | 흐리우냐 | 1996년 |
타지키스탄 | 루블 | 1995년 | 소모니 | 2000년 |
아제르바이잔 | 마나트 | 1992년 | 마나트 | 2006년 |
투르크메니스탄 | 마나트 | 1993년 | 마나트 | 2009년 |
에스토니아 | 크론 | 1992년 | 유로 | 2011년 |
라트비아 | 루블[13] | 1992년 | 유로 | 2014년 |
리투아니아 | 탈로나[14] | 1992년 | 유로 | 2015년 |
벨라루스 | 루블 | 1993년 | 루블 |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