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1:34:47

아프가니스탄 왕국

아프가니스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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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왕국
د افغانستان واکمنان
پادشاهی افغانستان
Kingdom of Afghanistan
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1931-1973).svg 파일:Emblem_of_Afghanistan_(1931–1973).svg.png
국기 국장
상징
국가 우리의 위대하고 고귀하신 국왕
ای شاهِ غیور و مهربانِ ما
위치
파일:아프가니스탄 위치.svg
1926 ~ 1973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colbgcolor=#009900><colcolor=#ffffff> 수도 <colbgcolor=#fff,#000> 카불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1926~1964)
입헌군주제(1964~1973)
국가원수
주요 국왕 아마눌라 칸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
언어 파슈토어, 다리어
인구 12,108,963명 (1973년)
종교 이슬람 ( 국교)[1]
통화 아프가니
면적 652,864km2
주요 사건 1926년 왕국 선포
1928~1929년 아프가니스탄 내전
1973년 왕정 폐지
현재 국가
[[아프가니스탄|]][[틀:국기|]][[틀:국기|]]

1. 개요2. 역대 국왕3. 상징4. 역사
4.1. 건국 이전4.2. 아마눌라 칸과 왕국 선포4.3. 아프간 내전4.4. 급격한 근대화4.5. 쿠데타와 공화국 전환
5. 그래도 그나마 평화로웠던 시대6. 왕정복고?

[clearfix]

1. 개요

1926년부터 1973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존재했던 왕국.

아마눌라 칸이 1926년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에서 왕정으로 변환하며 건국되었다. 이후 아프간 내전을 버텨내고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전쟁의 화마를 피해갈 수 있었으며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근대화를 거치며 발전했던 왕국이다. 다만 자히르 샤가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 왕족 출신이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세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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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참칭
아마눌라 칸 이나야툴라 칸 하비불라 칼라카니
제3대 제4대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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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징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
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_(1926–1928).svg.png 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_(1928–1929).svg.png 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_(1929–1931).svg.png 파일: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1931-1973).svg
1926 ~ 1928 1928 ~ 1929 1929 ~ 1931 1931 ~ 1973
아프가니스탄 왕국만큼 국기를 여러 차례 갈아치운 나라도 드물다. 맨 왼쪽의 깃발은 아마눌라 칸이 1926년 제정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첫 번째 깃발이다. 기존의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깃발 모티브에 국장을 간략화해서 팔각별 대신에 교체한 모습이다. 깃발 한가운데에는 이슬람 최고 성지 메카를 향해 바라보는 모스크의 모습이 상징화되어 있는데 이 상징은 훗날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정권 깃발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번째 국기는 아마눌라 칸이 고안한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세 번째 깃발이다. '세 번째'인 이유는 중간에 흑적녹 삼색 바탕에 국장을 넣은 두 번째 깃발이 하나 더 존재하기 때문. 아프가니스탄 역사에 처음으로 흑적녹 삼색 바탕 깃발이 탄생한 순간으로 흑색과 적색과 녹색이 각각 어두웠던 과거, 독립을 위해 흘린 피, 희망찬 미래를 상징한다. 아마 아마눌라 칸이 유럽을 순방할 당시 들른 바이마르 공화국의 흑적금 삼색기에서 착안한 걸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국기는 겨우 1년도 쓰이지 못하다가 저 오른쪽에서 2번째 국기로 교체된다. 마치 소련 인민공화국 국장처럼 밀알이 감싸고 있는게 특징인데, 사실 이건 오히려 인민공화국들이 밀알이 쓰기 이전에 고안된 깃발이라 그쪽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긴 힘들다.[2] 국장 위에는 나라의 새 시작을 알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세 번째 깃발은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사용했던 깃발로, 모하마드 나디르 샤의 재위기에 사용됐다. 아프간 내전을 막 끝내고 다시 바라크자이 왕조를 세운 시기였던 혼란기였던 탓에, 이전 왕조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흑적녹 깃발을 다시 사용했다. 다만 기존에 아마눌라 칸이 쓰던 떠오르던 태양과 밀알은 그 모습을 감췄고 옛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의 팔각별이 중앙 모스크 주위를 감싸는 형태로 다시 돌아갔다. 마지막 깃발이 1931년부터 1973년부터 가장 오랫동안 쓰인 깃발이다. 독보적으로 오래 쓰였기에 사실상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상징하는 깃발이라고 봐도 좋은 깃발인데, 나디르 샤가 2번째로 쓰던 깃발이었지만 훗날 모하마드 자히르 샤도 물려받아 쭉 썼다. 특이한 점이라면 모스크와 국장 사이에 작게 '٣٤٨'라고 적혀있는데, 이건 나디르 샤가 즉위한 1929년을 의미한다. 아마눌라 칸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한 나디르 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4. 역사

4.1. 건국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건국되기 한참 이전, 아프가니스탄 지방은 무굴 제국을 이어 두라니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라니 왕조의 국력이 쇠퇴하자 1823년 파슈툰계 두라니족 바라크자이 씨족 출신의 도스트 모하마드 칸(دوست محمد خان بارکزی)이 두라니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미르를 자칭하며 바라크자이 왕조를 세웠고, 이를 곧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이라고 부른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이 세워질 당시 국제적 정세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영국 러시아 제국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며 중앙아시아에서 서로 격돌하고 있었던 것. 영국은 러시아를 막고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하기 위해 1839년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켜 샤 슈자 두라니를 새 아프간 군주로 옹립하려 시도했으나 아프간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결국 패배하고 쫒겨났다.[3] 결국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다시 아프간 군주로 복귀했고, 아프가니스탄은 1878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1878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독립도 끝장난다. 도스트 모하마드 칸의 후계자 셰르 알리 칸은 처음부터 영국에 대단히 적대적이라 영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1878년 영국이 5만 대군을 동원해 카불을 점령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당시 아프간은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외교권을 영국에 양도하면서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1879년 9월에 아유브 칸의 주도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다시 독립을 찾고자 했지만 영국에게 쓸려나가며 허무하게 끝난다.

아프간 전역을 확고히 장악한 영국은 아유브 칸을 쫒아내고 압둘 라흐만 칸을 새 아미르로 앉혔다. 압둘 라흐만 칸은 그동안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던 하자라족에게 세금을 징수하는가 하면 누리스탄인들을 굴복시켰고, 아프가니스탄 정규군과 관료제를 창설해 왕조의 기반을 단단히 했다. 압둘 라흐만 칸이 죽고 즉위한 아들 하비불라 칸은 최초의 근대적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인 근대화에 나섰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면서 나름 현명한 정책을 폈다. 하비불라 칸이 죽고 나서 즉위한 나스룰라 칸을 쫒아낸 아마눌라 칸은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영국에 반기를 들고 인도 제국을 침공했다. 이로써 1919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아프간 군대가 당연히 영국에게 상대가 될 리 없었고, 아프간은 인도에서 당장 쫒겨났지만 어쨌든 독립을 되찾는 데에는 성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력이 빠져버린 영국이 더이상 아프가니스탄에 관여할 여력이 없었던 탓이 컸다.

4.2. 아마눌라 칸과 왕국 선포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다. 여전히 아프가니스탄은 척박한 산골짜기 지대에 불과했고 딱히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산업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인구도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눌라 칸은 이에 대한 처방책으로 매우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제시했다. 그는 1922년 4월 11일 872명의 부족 장로들의 재가를 받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헌법을 제정했고, 샤리아법에 기초해 모든 국민들에게 동일한 권리와 자유권을 부여했다. 비록 형식적인 법령 제정에 불과했다지만 여전히 부족 체제를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의 아프가니스탄으로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특히 여성의 권리도 일부 보호했다는 점을 보면 현대 탈레반보다도 나은 점이 있었다.

아마눌라 칸은 이 외에도 수출 증대, 산업 다각화를 위해 애썼다.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남녀 모두를 위한 국제학교를 처음 지었으며 여성에게만 가해지던 엄격한 복장 규정을 폐지했다. 전국에 320여 개에 달하는 학교가 세워졌고, 초등교육을 의무화하는 한편 종교와 현대 과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아마눌라 칸의 아내였던 소라야 타르즈 왕비는 여성 인권 진보에 관심이 많은 근대주의자였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유럽식 사회질서와 문화를 이식하려 시도했다. 당연히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이슬람계에서는 극렬히 반발했고 이 것이 결국 훗날 아마눌라 칸이 반란으로 쫒겨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지만... 근대화적 유화책만 시도한 건 아니라서, 절도를 저지른 범죄자는 새장에 가두어 공중에 죽을 때까지 매달아놓는 극약처방을 내리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범죄율을 크게 낮추는 성과를 내기도 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던 아마눌라 칸은 마침내 1926년 칭왕하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아프간의 정치체제가 기존의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에서 왕국으로 전환된 것이다. 아프간 국왕으로 즉위한 아마눌라 칸은 바로 그 다음해에 유럽 순방을 떠났다. 카라치에서 출발해 카이로를 경유해 푸아드 1세를 만났으며, 1928년에 이탈리아에 도착해 비오 11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만났다. 이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영국, 폴란드, 러시아까지 갈 수 있는 웬만한 국가들은 죄다 돌아다녔는데, 왕이 이렇게 호화로운 순방을 즐기고 있던 동안 아프간 내부에서는 반란이 터졌다. 안그래도 아마눌라 칸의 급진 정책에 불만이 많았던 무슬림 국민들이 왕이 없는 틈을 타 대규모 봉기를 기획했던 것. 군대마저도 왕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아마눌라 칸은 1929년 1월 퇴위하고 형제 이나야툴라 칸에게 양위했다.

4.3. 아프간 내전

파일:Animation_of_the_Afghan_Civil_War_of_1928-1929.gif
아프간 내전의 경과. ● 푸른색 바라크자이 왕조의 반-사카우파 정부군이고, ● 붉은색이 하비불라 칼라카니의 사카우파 반란군이다. 서쪽에 맨 끝까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있다가 1931년에서야 진압되는 곳이 바로 대도시 헤라트다.

내전의 시작은 1928년 신와리 부족이 잘랄라바드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일어났다. 신와리 부족의 봉기 자체는 알리 아흐마드 칸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문제는 그 혼란기를 틈탄 타지크인 무장반군단체 사카우파(Saqqawists)로, 그 지도자는 물장수라는 뜻의 '바차이 사카오'라는 별명을 가진 산적 출신 하비불라 칼라카니였다. 사카우파는 1928년 12월에 카불에 인접한 도시 자발 알 시라즈를 포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자발 알 시라즈 함락에 고무된 칼라카니는 2,0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수도 카불마저 공격했지만, 공성 도중 칼라카니가 어깨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실패했다. 칼라카니가 후퇴하자 아마눌라 칸은 12월 말에 무라드 베그 요새를 포격하고 재집결을 노렸지만 허무한 실패로 돌아갔다. 크게 낙담한 왕은 결국 유럽 순방 도중인 1월 14일에 왕위를 이나야툴라 칸에게 양위하고야 만다.[4]

일단 왕위에 오른 이나야툴라 칸은 바로 칼라카니에게 협상 사절을 보내 넌지시 항복의 뜻을 알렸다. 당연히 신이 난 칼라카니는 머리 위로 총을 쏘아대면서 수도 카불로 바로 진격했고, 이에 겁먹은 이나야툴라 칸은 재위 첫날부터 카불의 왕궁 안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틀어박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린다. 아프간 고위 관료들 대다수가 바로 칼라카니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미 전세가 넘어갔음을 깨달은 이나야툴라 칸은 1월 17일, 즉위한 지 일주일도 못되어서 칼라카니에게 왕위를 양보하고야 말았다.[5]

이나야툴라 칸을 쫒아내고 카불을 장악한 칼라카니도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마눌라 칸과 바라크자이 왕조에 대한 충성파들이 상당수 잔존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제일 먼저 신와리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던 알리 아흐마드 칸이 카불의 소식을 듣고 스스로 아미르를 자칭하며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쿠그야니 부족이 알리 아흐마드 칸을 배신하고 그를 생포해 칼라카니에게 넘기면서 알리 아흐마드 칸은 허무하게 몰락했다. 칼라카니의 행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3월 초 샤이카바드 전투에서 약간 비틀거리긴 했지만 반-사카우파 부족들을 싸그리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며, 짧은 포위공격 끝에 6월에는 칸다하르 지방까지 손에 넣었다. 물론 카불과 일부 대도시들을 빼면 지방에 대한 통제권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나름 아프간 국왕을 자처할 만한 세력은 형성한 것이었다.[6]

하지만 칼라카니의 불행은 모하마드 나디르 샤의 존재였다. 바라크자이 왕족 출신이던 나디르 샤는 3월에 아마눌라 칸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온 인물이었다. 비록 아마눌라 칸은 칼라카니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칸다하르까지 내주며 2달 만에 다시 유럽으로 되돌아갔지만, 나디르 샤는 끝가지 남아 칼라카니에 팽팽히 맞서며 바라크자이 충성파들을 불러모았다. 그는 로가르 계곡에서 승리를 거두어 한 달간 팽팽한 교착 상태를 유지했고 1929년 10월에는 역으로 사카우파 군대를 다시 카불로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칼라카니의 세력이 주춤해지는 듯 보이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반-사카우파 부족들이 죄다 반란을 일으켜 다시 바라크자이 왕조에게 재충성을 맹세했으며, 칼라카니는 왕궁 내부로 쫒겨들어갔다. 결국 그해 10월 23일에 왕궁마저도 나디르 샤에게 함락당했고, 칼라카니가 11월 1일에 처형당하며 내전도 종결된다. 물론 사카우파 잔존세력은 헤라트로 도망쳐 1931년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4.4. 급격한 근대화

모하마드 나디르 샤가 칼라카니를 쫒아내고 바라크자이 왕조를 복구했지만 순순히 아마눌라 칸에게 왕위를 돌려줄 생각까진 없었다. 애초에 아마눌라 칸이 칼라카니를 이기지 못해 2달 만에 도망치는 꼴을 보고도 왕위를 넘겨줄 생각을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겠지만...[7] 어쨌든 모하마드 나디르 샤는 아마눌라 칸의 개혁안 대부분을 폐기하고 보수적인 스탠스로 회귀했고, 그대신 군대를 강화해 내정을 안정화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마눌라 칸을 국외로 몰아낸 것에 대한 부작용으로 신와리 반란,[8] 길자이 반란, 다레 켈 반란 등 수많은 봉기가 일어났고, 심지어 소련군이 우즈벡 반군 지도자 이브라힘 벡을 찾으러 아프간에 무력진입을 시도하며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1년 즈음에는 어찌어찌 대부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나디르 샤는 주로 자기 가족들로만 구성된 10명의 내각을 임명했고, 1931년에는 개헌을 해서 입헌군주정으로 나라 체제를 전환했다. 물론 입헌군주정은 허상일 뿐이었고 아프간은 사실상 왕과 그 측근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과두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지 국민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헌법이라는 가림막을 동원했을 뿐이었다. 다만 이렇게 나디르 샤가 아마눌라 칸의 정책 대부분을 뒤엎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 시도를 아예 안한 건 아니었다. 아마눌라 칸에 비해 훨씬 덜하긴 했으나 1931년 아프가니스탄 최초로 카불 대학교를 설립했고, 힌두쿠시 산맥을 뚫는 거대한 도로 건설에 착수했으며 은행 시스템 구축과 장기 경제 계획을 꾸렸다. 그가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썼던 군사 개혁은 비록 그 속도는 느렸지만 그가 죽을 1933년 즈음에는 무려 4만 명에 달하는 현대식 군대를 육성하기까지 했다.

나름 근대화를 할만큼 하고 있던 나디르 샤는 1933년 11월 8일 고등학교 졸업식 참관 도중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9] 나디르 샤가 예상치 못하게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다만 자히르 샤가 즉위 당시 고작 19살 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바로 친정을 시작하진 않았다. 대신 삼촌 모하마드 하심 칸 총리가 섭정을 맡아 일을 처리했는데, 국제연맹에 이때 가입했으며 특히 미국의 인정을 받는 외교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아프간을 둘러싸고 있는 전통적인 적대국 소련 영국 대신 추축국 세력과 관계를 진전시키려 시도했다.[10]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립을 유지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망하지 않게 해준 현명한 선택이었다.
파일:156334955_1451001426.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Zahir_Shah_of_Afghanistan_in_1963.jpg 파일:E8aqIkSWYBAFlKq.webp
모하마드 나디르 샤 모하마드 자히르 샤 소풍을 나온 카불여학생들[11]
1944년 동남부 지역에서 다시 자드란과 사피, 망갈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47년 진압되었다. 한편 내부의 반란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온세계가 쑥대밭이 되는 꼴을 지켜보던 자히르 샤는 본격적인 현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46년 왕의 다른 삼촌인 샤 마흐무드 칸이 새 총리로 임명되어 수많은 외국 고문들이 아프간 국내로 유입되었고, 1949년엔 비교적 자유로운 총선거가 치러졌다. 1947년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자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 서북부의 파슈툰인 다수 지역 역시 어디에 귀속될지 선택권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파키스탄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당시 친미 성향이었던 파키스탄과 대조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점차 친소 성향으로 기울어졌고, 특히 1953년 총리가 된 왕의 사촌 모하마드 다우드 칸은 적극적으로 친소 성향의 정책을 폈다. 다만 미국과의 관계를 끊은 건 아니었다. 지금과는 달리 아프간은 중간에서 중립 정책을 폈고,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에게서 동시에 지원을 받은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였다.[12]

다우드 칸은 남서부 헬만드강 유역에서 관개 사업을 진행하고,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등 개혁 정책을 폈다. 동시에 파키스탄과는 적대 관계가 심해져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파키스탄뿐만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내 소수민족도 파키스탄 서북부가 아프가니스탄령이 되면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족의 지배 구도가 더욱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국교 단절로까지 치달으면서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은 경제 위기에 빠져들었고, 자히르 샤는 1963년 다우드 칸 총리를 해임했다.

이후 1964년 의회제와 보통선거를 명시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아프가니스탄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으며, 선거에서 당적 표명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공산주의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처럼 정당들이 결성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은 1965년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되어 있었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등 아프간 국내 좌익 인사들에 의해 세워져 농민, 노동자, 극빈층 등의 지지를 받으며 강세를 키워나가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좌익 정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내 PDPA는 내분으로 할크파와 파르참파로 분열되었고, 이후 분열된 상태가 지속되게 된다.

여러모로 자히르 샤는 자비로운 군주에 속했다. 그 오랜 재위 기간 내내 누구에게 공식적으로 사형을 언도한 적도 없으며, 일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형량을 줄이거나 사면하는 데에만 국왕 특권을 사용했고 정치력과 성품 역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쫓겨나기 전 사바크 등 비밀경찰들을 동원해서 반대자들을 일방적으로 탄압하며 말년에 혁명으로 몰락을 자초한 이웃국가 이란의 마지막 군주인 팔라비 2세와는 다르게 무척 온건했다. 게다가 특히 1964년 도입된 헌법에는 자유 선거, 시민의 손으로 뽑히는 민주적인 의회, 시민권과 정치권, 여성들의 권리, 보통 참정권처럼 심지어 현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개혁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때야 아프간인들도 나름 왕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자히르 샤의 오랜 평화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헬게이트가 열리자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회상하는 아프간인들이 많을 지경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는 격이다.

4.5. 쿠데타와 공화국 전환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총리직에서 쫒겨난 이유는 그 자신이 지닌 지나친 범파슈툰 민족주의 성향도 있었다. 다우드 칸이 전 파슈툰인들의 통합을 외치며 파키스탄 내부의 파슈툰족들을 선동했고 그 결과 양국 간의 외교간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총리직에서 해임된 다우드 칸은 끊임없이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며, 그 일환으로 자히르 샤의 근대화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세력들과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한편 자히르 샤는 정당법, 지방의회법, 시의회법과 같은 여러 개혁 방안들을 도입하려다가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철회하면서 국민들의 인기를 잃어갔다. 그 와중에 1971년 북부 지방에서 가뭄으로 심각한 기근이 일어나 수천명이 사망하자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땅으로 떨어졌다. 자히르 총리는 사임했지만 파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다우드 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습을 가했다. 국왕이 눈을 다쳐 치료를 위해 런던으로 요양을 떠난 틈을 타 수백여명의 군인들과 함께 1973년 7월 17일 아침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몇 시간만에 아무 저항없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이 다우드 칸의 손 아래에 떨어졌고, 아침 7시에는 라디오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되고야 만다. 몇 백여년에 걸친 바라크자이 왕조의 통치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어찌나 쿠데타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던지 유혈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다우드 칸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이탈리아에서 머물던 왕을 국외로 추방했다. 그 후 스스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기본적으로 외교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밝혔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은 사회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경제 역시 아프간 왕정 시절과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훗날 다우드 칸은 독재자가 되어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몰아주는 개헌을 해버리기에 이르렀고, 소련과의 관계도 점차 악화된다. 결국 1978년에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또 일어나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무너져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이 민주 공화국마저 소련 붕괴와 함께 무너지고 탈레반이 득세하기 시작하며 아프간은 우리가 잘 아는 그 헬게이트에 진입하게 된다.

한편 구 아프간 왕족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잡은 다우드 칸과 그의 일가들을 제외하면 다우드 칸 정권 수립 이후에 입국금지를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망명 중인 구 왕가들은 1978년 다우드 칸 정권이 붕괴되고, 그 이후에 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공산정권과 무자헤딘 정권, 탈레반 정권 치하에서도 귀국이 허용되지 않았다가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나서야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참고로 옛 국왕 자히르 샤는 워낙 장수해서 아프간이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꼴을 보며 2007년까지 살았는데, 유언으로 난 저 세상에 가면 알라에게 천벌을 받을 것이오! 아름답던 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라는 안타까운 말을 남겼다고 한다.

5. 그래도 그나마 평화로웠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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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진들: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EzkKtBRPpP9GGify.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eoPmsWqTOFJl44y9.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NjWMG3DXSVQKOP0P.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ffPoAT3Smnt0guXZ.jpg 파일:external/static.munpia.com/GspDNV9ihPxcI3n2.jpg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의 사진들. 다만 이런 모습은 카불 등 주요 대도시에 국한된 것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지금과 비교해도 다른 게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예나 지금이나 힌두쿠시 산맥 탓에 지역을 직접 통치하거나 개발하는 게 어려워서, 중앙집권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지방분권 하에 운영되어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머지 지역을 서구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에 가깝다.

오늘날 탈레반의 막장 행각 때문에 지나치게 미화된 감도 있긴 하지만[13],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에는 적어도 수도 카불과 칸다하르, 헤라트, 마자르이샤리프 등 여러 주요 대도시들에서 총격전과 테러, 학살극과 인권 탄압이 밥먹듯이 이루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마지막 국왕인 모하마드 자히르 샤는 꽤나 자비로운 왕으로 알려졌는데, 몇 십여년에 걸친 재위 기간 내내 사형을 직접 언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여성 인권, 경제 활성화, 근대화에도 관심이 많아 아프간의 현대화와 서구화라는 업적을 남겼다.

물론 좋기만 한 시대였다는 것은 아니다. 아프간 특유의 부족 중심 문화 때문에 반란 소요는 이곳저곳에서 일어났고 냉전 시대라 남북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도 압박이 거셌다. 또 근본적으로는 왕정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과 그를 지지하던 군사 세력의 쿠데타로 1973년 왕국은 멸망했지만, 아이러니한건 그 모하마드 다우드 칸도 대통령 되고 반이슬람/반공을 모토로 혼자 권력을 독차지하려다 갈등을 빚던 군부와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후 좌익 군부가 집권해 공화정 세속주의적인 부분은 이어갔지만 당연히 지방에 남아있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은 무신론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자며 성전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다급해진 공산주의 세력은 여차저차해서 소련에 SOS를 치게 되는데 이게 이른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었고, 이땐 오히려 냉전의 부작용으로 탈레반이 미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기도 했다.(...)[14] 허나 소련 붕괴 이후 90년대 아프간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빠르게 쇠퇴하였고, 이후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다 쫓겨났다 다시 장악했다를 반복하면서 오늘날까지 시끌시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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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 나온 파그만 정원의 전쟁 이후 황폐해진 모습. #

여러모로 같은 냉전 시기 동유럽 발칸반도에 존재했던 국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나라다. 비록 정치체제는 공산당 1당 체제와 군주제로 두 나라 모두 달랐지만 생전에 특정 지도자 한 사람(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대통령,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무함마드 자히르샤 전 국왕)의 통치에 의해서 안정과 평화를 유지했고, 각각 1970년대 초와 1980년대 초에 자국 내부의 불안정성을 억제해오던 티토와 자히르샤 모두 재임 중 사망하거나 쿠데타로 축출되면서 그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던 내부 민족 및 종교, 이념 갈등이 폭발하면서 냉전 말기와 탈냉전 이후에 전쟁과 내전이 벌어져 국가 자체가 공중분해되어버거나 최악의 파탄국가로 전락한 점도 비슷하다. 다만 유고 내전으로 연방 해체로 각기 별개 국가로 분리 독립한 이후에 EU와 나토의 감시하에 불안정하게나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동유럽의 남슬라브계 국가들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은 단일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과 비 파슈툰계 소수민족 간의 대립과 정치적 주도권 다툼으로 분쟁이 진행형이다.

6. 왕정복고?

군주제 붕괴 이후 모하마드 다우드 칸 아프가니스탄 공화국(1973 ~ 1978),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하피줄라 아민, 바브라크 카르말, 모하마드 나지불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1978 ~ 1992), 무자헤딘 주도의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1992 ~ 1996), 탈레반 정권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1996 ~ 2001), 탈레반 축출 후 들어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2001 ~ 2021) 등 이후 세워진 아프간의 역대 정권들이 장기간의 전쟁과 이슬람 율법에 의한 폭정( 샤리아), 부정부패로 모두 평이 나빠진데다 2021년 8월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잡은 이후 서방세력과 반 탈레반 성향 아프가니스탄인들 사이에선 그나마 평이 나았던 바라크자이 왕조와 아프가니스탄 (입헌)군주제 복권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 특히나 자히르 샤의 치세 시절(1960년대)과 그 이후 수많은 정권들을 거치고 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시절(2007년) 같은 장소의 상반된 모습을 비교한 짤방이 서양에서도 크게 돌면서 서양 언론 및 인터넷에서는 대체로 바라크자이 왕조의 복고에 찬성하는 여론이다.

그러나 현재 2차 탈레반 정권에 맞서 싸우며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암룰라 살레 아흐마드 마수드는 입헌군주제 복권보다 연방제를 근거로 한 다민족 공화국 수립을 주장하고 있기에 입헌군주제로의 복귀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아보인다. 다만 암룰라 살레는 기존 정부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부통령이었던데다 현재 대통령 권한대행이기에 그런 것이고 아흐마드 마수드는 지향하는 정부 체제가 입헌군주제냐 공화제냐보다 탈레반 세력의 궤멸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에 만약 탈레반 정권이 재차 붕괴된다면 크게 대항하지 않고 바라크자이 왕조 복귀를 인정할 수 있다. 당장 아흐마드의 아버지이자 암룰라의 상관이었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도 자신과 적대적 세력이었던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정권 붕괴로 몰락했음에도 그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했던 점과 그 이후 부르하누딘 라바니 정권과 큰 마찰을 빚긴 했어도 부르하누딘의 체제를 인정했다는 점으로 보아 바라크자이 왕조를 인정할 수도 있으며, 왕정 복고 이후의 캄보디아의 훈 센 현 총리와 헹 삼린 현 국회의장처럼 입헌군주제의 형식으로 마수드나 살레가 왕정이 복고된 신생 아프가니스탄 제2왕국의 총리나 국방부 장관, 국회의장 등 정치적 직책을 맡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15]

다만 서방권과 타 이슬람권 국가들의 외교계에서는 이미 왕정 폐지 이후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상실한지 50년이 되어가는 바라크자이 구 왕가들이 재집권하여 왕정으로 복고되어도 종파/민족별로 분열된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통합을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라며 왕정복고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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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니파 90%, 시아파가 9%로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99%를 차지했다. [2] 이 당시 밀알이 국장을 감싸고 있는 형태의 깃발을 쓰던 나라는 소련 밖에 없었다. [3] 참고로 이때 영국군은 몇 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를 겪었다. 수 천명에 달하는 철수단들 중 생존자는 단 1명이었을 정도. 포로로 잡힌 영국인 여성과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등 영국은 이 전쟁으로 자존심에 엄청난 스크래치를 입는다. [4] 참고로 아마눌라 칸은 그해 3월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돌아왔다가 카불 재정복에 실패하자, 일시적으로 인도 제국으로 망명갔다가 이탈리아로 망명해 1960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죽을 때까지 유럽에서 지냈다. [5] 얌전히 왕좌를 넘겨준 덕분에 이나야툴라 칸은 가족과 3,000루피를 가지고 아프간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6] 물론 칼라카니를 적법한 아프간 국왕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거의 하나도 없었다. 모두 유럽에 있던 아마눌라 칸과 바라크자이 왕조를 여전히 아프간 국가원수를 대접했다. [7] 아마눌라 칸은 죽을때까지 왕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추축국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왕위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추축국이 처참하게 패망하면서 아마눌라 칸의 헛꿈도 무위로 돌아갔다. [8] 불과 몇년전 아마눌라 칸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킨 신와리족이 이번엔 반대로 아마눌라 칸을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그냥 반란이 하고싶었던것 [9] 암살범은 압둘 할리크 하자라였다. 이전 하자라족에 대한 징수 조치에 대한 불만을 품고 왕을 죽인 걸로 추정된다. 곧바로 체포되어 손가락을 잘라내고 눈을 도려내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임당했다. [10] 이 일환으로 중화민국과 싸우고 있던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의 압도적인 물량을 견디기엔 무리였고 동튀르키스탄은 결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재편입되고야 만다. [11] 물론 저렇게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여학교를 다니며 소풍까지 나올 수 있는 여인들은 당연히 상류층에 속했다. 지방으로 갈수록 보수적인 풍조가 강해졌다. 하지만 그 답답한 부르카를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낸 채로 마음껏 노다니는 소수의 여인들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현대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자유로움이다. [12] 자히르 샤는 '나는 자본가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사회주의 역시 원하지 않는다.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상황을 원하지도 않는다. 나는 우리가 러시아나 중국의 하인이 되거나 타국의 종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외교관이 어땠는지 잘 알려주는 발언. [13] 이시기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의 1인당 GDP #를 비교해 보면 1965년까지는 한국이 앞서다가저 사진만 보면 자칭 최빈국보다 못사는 수준은 결코 아닌데 1966~67년 아프가니스탄이 한국을 근소하게 추월했다.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것. 그러나 1968년 한국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추월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되었다. [14] 심지어 이때 미국이 탈레반 지원을 위해 거친 중간 통로는 오사마 빈 라덴 알 카에다였다.(...) 지금 와서 보면 표범 새끼 키워준 꼴로 그야말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 [15] 훈 센 현 캄보디아 총리와 헹 삼린 현 국회의장은 본래 공산주의자였으나 동서 냉전 종식 이후에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복위를 통한 캄보디아의 왕정복고를 지지하며 1993년 캄보디아가 왕정복고가 되자 왕당파로 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