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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건축)

성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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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골루바츠 성채 인도 붉은 요새 시리아 알레포 성채

1. 개요2. 기능
2.1. 공성전2.2. 우회할 수 없는 이유
3. 어형
3.1. 한국어 어휘와 어원3.2. 유럽 제어의 어휘
3.2.1. castle3.2.2. keep3.2.3. fortress3.2.4. rampart3.2.5. wall3.2.6. burgh3.2.7. citadel3.2.8. 어원과 기타 외국어 단어
4. 분류
4.1. 위치
4.1.1. 산성4.1.2. 평지성4.1.3. 평산성4.1.4. 지하
4.2. 재료4.3. 역할
5. 구성 요소6. 역사
6.1. 방어 시설로서6.2. 방어 목적 이외의 발전
6.2.1. 행정 및 권력의 상징6.2.2. 도시로의 발전6.2.3. 개인 거주지로서6.2.4. 현대의 부동산 거래
6.3. 지역별 양상
6.3.1. 한국
7. 목록8. 창작물에서9. 관련 문서

1. 개요

(城)은 '적을 막기 위하여 이나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 또는 그런 담으로 둘러싼 구역'이다. 시대와 지역, 용도에 따라 축성 양식은 매우 다양하다.

2. 기능

성의 역할은 주로 높고 튼튼한 성벽을 통해 적이 도시로 진입할 수 있는 경로를 최소화시킴으로써 적들의 공격 루트를 한정시키는 억제 효과가 있었고, 또 방어하는 측 병사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전투 중 안정적인 엄폐물을 확보하게 해 줄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었다.

성 중에서 궁전의 용도를 겸하는 성이 있는데 이를 궁성(宮城)이라 한다. 궁성에는 무장병력과 각종 군사장비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2.1. 공성전

공성전은 성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하는 전술적인 작전으로, 성벽을 넘어오는 공격부대와 성벽을 방어하는 수비부대 간의 전투로 이루진다. 공성전은 성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수성전은 공격군의 성벽 침투를 막고 성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성, 즉 같은 전장에서 서로 반대되는 전략적 목적을 가진 것이 공성전과 수성전인데, 공격 측 입장에서는 공성전이고 수비 측 입장에서는 수성전인 것이다.

공격군은 수비군의 성벽을 둘러싸고 수비군의 식량과 물품 공급을 차단하여 수비군이 기아와 목마름에 시달리게 만드는 전략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성문, 성벽, 요새 등을 파괴하거나 수비군을 압도하여 성을 점령해야 하는데, 공성전은 성을 지키기 위해 수비군들이 사용하는 방어 대책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며 제거하기 힘든 함정같은 것도 많아서 막대한 희생자까지 발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격군이 수비군보다 수가 훨씬 많아야 공성전이 가능하다.

냉병기 시절 성의 위력은 엄청난 것이어서, 제대로 축조한 성에 식량이 충분하다면 성 내부에 전염병이라도 돌거나 공격 측이 정말 압도적인 양과 질의 병력으로 밀어버리지 않는 이상 공격해 온 적군이 먹을 게 없어져서 물러갈 때까지 방어해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을 전투에서 섬멸하기 위해 요구되는 공격 측과 방어 측의 병력 비율을 3:1이라고 할 때, 성이 있는 경우 이 비율이 5:1에서 10:1까지도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다 방어 측이 성 내부에 일정 규모의 기동성 좋은 부대를 갖추고 있는 경우, 공격자 측이 공격할 성을 완전히 둘러싸고 포위하지 않으면 난전 중 어느 구석에서 기어 나온 적군에게 뒤통수를 맞기가 십상이고, 포위했던 공격자가 물자가 다 떨어져 물러갈 때 모랄만땅 배만땅 채운 방어 측 기병에게 뒤통수 맞으며 갉아먹히는 것도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방어 측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방어 측 입장에서 특히 고난인 것은 식량 + 식수 조달 문제였는데, 아무리 많은 자원을 쟁여놓는다고 해도 일단 공성전이 시작되거든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다 성으로 몰리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해서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속도보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식수의 경우 해자 역할을 하는 큰 강같은 자연적인 지형이 없는 한, 해자 주변에 있는 건 오염된 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공성전이 장기화하면서 방어 측이 버티기 힘들어질 때 나타나는 문제인 방어측의 내분, 첩자 문제, 방어 측의 비효율적인 병력 분산 등의 위험이 있었다.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병기를 제작하는 수법도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런 방법은 병기 제작을 위해 상당한 노력과 자원이 들어가게 되며, 공성 과정에서 병력이 손실되게 마련이다. 손자병법에서도 이런 식으로 적의 성을 공격하는 것을 가장 하책으로 보았을 정도.[1] 애초에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게 가능했던 건 공략에 만 단위의 보병과 우수한 공병을 투입 가능했던 로마군이나 중동 제국, 중국군 정도였다. 대포가 나온 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같은 우수한 설계로 지어진 초대형 성곽은 한 줌의 병력만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공략하는데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정도. 자세한 내용은 공성전 문서 참조.

공성전 시 대형 공성포를 운반할 수 있는 참호를 수성 측 사거리 바깥부터 길게 뻗어 들어가며 만들고 거점에 공성포가 설치되는 시점에서 수성 측이 명예로운 항복을 할 수 있었다. 참호 못 파게 하는 유격부대와 이 유격부대를 처리하려는 유격부대 간의 전투가 주요한 공성전이 될 정도였으며, 이러한 내용의 예는 삼총사의 라 로셸 공방전 장면에서 나온다.

2.2. 우회할 수 없는 이유

이렇게 보면 공격군이 그냥 성을 지나친 뒤 수도를 공격해 적의 수뇌부를 빨리 사로잡는 게 더 쉽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성을 지나친다는 건 그 성을 지키는 병력들을 후방에 온전히 남겨둔다는 것인데, 이러면 성 안의 적이 빠져나와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이게 작은 성 한 두개면 모를까, 수천에서 수만 병력이 지키는 성이라면 그냥 지나치기엔 후방에 생길 위협이 너무 컸다. 여기에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도 이 적들 때문에 위태로질 게 뻔했는데, 전쟁에서 보급의 의미를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후한 말의 전술가로, 조조의 책사였던 정욱은 이를 역발상으로 활용해서 성을 지킨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겨우 700명의 병력으로 원소의 군대로부터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그의 안위를 염려한 조조가 2000명의 병력을 증원해주려 했으나, 정욱 본인으로부터 성 안에 수천의 군사가 있는 걸 알면 의심많은 원소의 성격 상 반드시 견성을 칠 것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실제로 원소군은 정말로 성에 병력이 많지 않음을 알고는,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으려고 정욱이 있는 견성을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들은 대개 전략적 요충지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건 지형상 불가능하거나, 크나큰 시간과 인명, 보급이 손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후자라 쳐도 통과해봐야 손실이 심하니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성을 점령하는 건 전쟁에서 사실상 필수적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차 진주성 전투에 패배하여 진주성 공략에 실패했고, 이순신의 활약으로 남해안 해전에서도 밀리는 바람에 결국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성 하나 함락 못했다고 진격로가 막히는 이유는 육상 도로망이 불편한 당시 시대상 수만명으로 구성된 병력을 진군시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병력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그와 동시에 식량과 물 등 필수 자원을 안정적으로 보급받으려면 아무 길로 갈 수 없었다. 가장 핵심 사안은 물 보급이었다. 소규모 인원이 오갈 경우엔 등짐에다 물을 보관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대규모 병력이 이동할 경우엔 이러기 힘들었다. 물은 부피에 비해 꽤 무거운 물질이고 식량과 달리 건조 등으로 부피를 줄일수도 없다.[2] 설상가상으로 식량은 그나마 적게 먹고 좀 더 버틴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물은 조금만 공급이 늦어져도 인간에게 치명타였다. 여기에 더해서 식수로 사용할만큼 신선하고 맑은 물이 대량으로 필요했는데 이렇게 맑은 물도 항아리나 나무통에 보관해놓으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식수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금방 썩어버리므로 수시로 신선하고 맑은 물을 빠르게 공급할만한 풍부한 수자원이 근처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전근대시기 군대 이동은 반드시 강을 따라 정해진 길로 행군해야만 했다.

당시 한반도의 경우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려면 진주를 지나 남해안을 따라 넘어가거나 지리산이 속한 소백산맥을 넘어야했다. 그리고 소백산맥은 경상도를 다른 지역으로 구분짓는 산맥이며 삼국시대에는 국경선으로 쓰일 수준의 험난함을 자랑한다. 그 유명한 문경새재도 소백산맥에 속해있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물 보급 문제 등을 생각하면 자멸이나 다름 없었고 또다른 루트인 바닷길은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틀어 막고 있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라도에 진입하려면 반드시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그 루트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관문격인 진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기에 한양이 점령된 이후에도 전라도로 진입할 수 없었다. 한양을 넘어 평양까지 진출한 일본군을 가장 고생시켰던 것은 보급 문제였고, 여기에는 전라도 곡창 지대를 획득하지 못한게 컸으니 성 하나가 판도를 바꾼 것이다.

다만 삼국시대 당시에 요새를 공략하기보다 험난한 절벽을 넘어 촉한을 점령한 등애처럼, 반대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촉한멸망전으로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 당시에도 너무 무모한 방법이라서 등애로부터 절벽을 넘으라는 명령을 받은 제갈서가 이를 거부하고 이탈했을 정도로 난이도가 수직으로 급상승할 정도였다. 제갈서가 적전이탈이라는 중죄를 저지를 사유도 충분했는데 등애가 넘어갔던 절벽이 깎아지른 수준으로 가파른 데다 원래 길이 없는 곳이라서 잔도조차 당연히 없으므로 4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의 군사들이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심지어 아예 길을 만들 수조차 없는 곳이면, 모포로 몸을 감고서 낭떠러지에서 구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험준한 지형을 돌파해서 촉한의 심장부에 도달하더라도 보급로도 끊어진 상황에서 병력들은 매우 지쳤으며 휴대한 보급품도 다 떨어지고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실제적인 전투력은 제로가 된다. 당시에 위나라군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온 것에 지레 겁먹은 마막이 빠르게 투항하지 않았다면, 등애는 산을 타느라고 누렇게 뜬 상태였던 위나라 군대와 함께 촉한 영토 한복판에서 불귀의 객이 됐을 판이다.

또한, 국토가 작아 이동 거리가 짧고, 적들이 반응할 틈도 없이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있다면 꼭 모든 성을 점령하지 않기도 했다. 이는 수 년에서 수십 년간 지리하게 이어지는 전쟁의 완전히 반대인 단기결전 사례인데, 대표적인 예로 청나라 인조를 순식간에 사로잡아 굴복시킨 병자호란이 있다. 이때 청나라는 날랜 기병을 몰아 순식간에 한양과 남한산성까지 들이닥쳤는데, 만약 이때 인조가 선조처럼 파천에 성공했다면, 후방에 적들을 고스란히 남기고 들어온 청나라로선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전방의 성을 점령하고 보급선을 확보하며 전진하는 대신 그냥 진격해 들어간 것은 엄청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자칫 적에게 뒤를 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전략임은 맞다. 인조가 주변 정세가 험악해짐에도 불구하고 청야 전술도차 제대로 사용할 준비도 하지 않았고 원칙대로라면 남한산성 내부에 긴급상황에 대비해서 식량 창고가 반드시 성 안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붕괴시킨 미친 짓을 한 것이다. 식량창고가 성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식량같은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품목을 유사시에 험준한 지형을 통과해서 성 안으로 제대로 들여놓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남한산성도 처음 축성될 때 성 안에 식량 창고가 있었다. 이렇게 남한산성 내부에 잘 있던 식량 창고를 광주 목사 한명욱이 "험준한 산에 창고가 있으면 운반하는 백성들에게 민폐"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면서 성 밖으로 끌어냈는데, 이것이 큰 실책이었다. 게다가 이것도 사실 운송을 담당한 상인과 야합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인조는 이런 걸 다시 재수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청군은 20일만 버틸 식량만 있었으나 한강변에 방치된 남한산성의 식량창고를 손실없이 입수해서 45일간의 남한산성 포위중에도 식량 문제가 별로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남한산성 내부가 식량난을 겪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다. 인조가 기본적인 조치인 남한산성 내부에 식량창고를 유지하고 식량만 쌓아놓았어도 청나라의 전략은 실패할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청나라군이 잘 한게 아니라 인조와 조선군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 더 크다.

실제로도 방어측에 정상적인 국왕이 있다면 보급선을 무시하고 적국 영토 깊숙한 곳으로 돌격하는 것은 대부분 실패한다. 제2차 여요전쟁 당시에 요나라 황제인 성종은 곽주성 하나만 함락시키고 재빨리 개경으로 진격했으나, 현종이 재빨리 나주로 몽진하는데 성공하면서 허탕만 치다가 양규에게 후방이 노출되어 패한 바 있다.

3. 어형

3.1. 한국어 어휘와 어원

현대 한국어에서 성은 포괄적으로 각종 야생동물이나 적의 침입에서 보호받기 위해 지어둔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일컫는다.

과거에는 '잣'이라고 하였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성'보다는 '잣'이 더 범용적으로 쓰였는지, ' 석보상절'에서는 "성()은 '잣'이라고 하는 말이다."라는 식으로 주석을 달았다. 그 외의 순우리말로는 재, 작( 신라어), 홀, 구루, 책구루(忽, 溝漊 고구려어), 기, 긔(只, 己 백제어)가 있다. 그래서 한국 각지의 옛 고유어 지명을 보면 '재(또는 자, 고자 등)', '홀( 미추홀, 매홀 등)', '기(또는 지, 노사지, 두잉지' 등)' 등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이 모두 삼국 시대에 성이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참조링크 1 참조링크 2
일본서기에 나오는 한국 성(城)의 명칭들
촌(村 ; 스키)[3]: 의류촌(意流村 ; 오루스키), 주류수기(州流須祇 ; 츠루스키). 두 촌은 백제의 주류성(周留城)이다. 일본서기엔 주모성(州柔城 ; 츠누사시) 도도기류산(都都岐留山 ; 츠츠키루노무레)이라고도 적혀있다.

모라(牟羅 ; 무라):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 쿠레무라노사시). 구례산(久禮山 ; 쿠레무레[4])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인 근강모야신의 어그로로 애꿎게 구지파다지(久知波多枳 ; 쿠치하타키)등의 성이 함락되고 탁순국의 영토에 백제의 구례모라성이 세워진다. 신라에선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 불렀다고 한다.

지(枳 ; 키):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 ; 이시키무라노사시)

성(城 ; 사시): 대성(大城)의 훈이 코니사시로 백제에서 대성을 부른 말인듯 하다. 코니는 건길지의 건과 같은 말로 크다는 뜻이다. 신라의 향가 혜성가에서 성(城)을 城叱이라 적고있다. 질(叱)은 말음의 으로 성의 순우리말 '잣'을 적은 거라 보고 있다.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 이시부레치칸키)처럼 질은 'ㅅ'라고 읽는다.

기부리(己富利 ; 코호리)[5]: 능비기부리(能備己富利) 배평(背評)이라고도 한다.[6] 기부리는 순우리말 고을의 옛말로 추정된다. 일본에서도 율령제 체제에서는 평(評), 군(郡)을 코호리(こほり)라하여 행정구역명으로 사용했다. 큰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금물현(今勿縣) → 기문현(己汶) 금물현은 큰물이라고 불렸고 건길지를 코키시 라고도 하니 큰벌 큰마을이라는 뜻이 맞겠다.[7]

축족류성(筑足流城 ; 츠쿠소쿠로노사시) /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 ; 츠쿠시키노사시): 축족류성과 도구사기성은 같은 성의 명칭으로 고구려와 신라가 싸운 기록에서 나오는 성의 이름이다. 시키, 소쿠로가 성, 촌(村)을 뜻하는걸로 추정된다. 수탉을 죽여라

'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발달하여 용례가 비교적 다양하다. '성'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근대 이전 시대까지의 방어 시설을 의미하며, 아래의 성형 요새까지도 성에 포함시키곤 한다. 한편 콘크리트를 쓰기 시작한 근대식 요새( 마지노선, 대공포탑 등)나 벙커, 토치카 등은 요새 정도로만 부르지, 성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한편 ' 요새'(要塞)라는 말은 군사적 시설에 한정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영어 'fortress'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쓰는 경우가 많다. 방어 시설 중 어느 단계부터를 '요새'로 부르는지는 확실히 정해져있지는 않은 듯하다. 대개 근대 이후에 거주지의 기능과 분리된 방어 시설을 '요새'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3.2. 유럽 제어의 어휘

한국어의 '성'으로 번역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개념이 유럽에서는 크게 5가지로 구별될 수 있다. 중세사를 잘 아는 역자가 번역한 경우라면 이 다섯 개념을 비록 나무위키에 서술된 아래의 역어들과는 다르더라도 나름의 기준대로 제각각 구별되는 번역어를 채택하여 독자의 혼란을 방지하나, 이런 데에 무지한 자가 번역을 했을 경우 이들 중 몇 개 이상을 동의어로 제멋대로 여기고는 '성'이나 '성채'로 통일해서 번역하는 바람에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사태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성벽(wall)이 함락되어 성채(citadel)로 퇴각했다가 전황이 더 악화되어 성채마저 버리고 아성(keep)으로 들어갔다"라는 문장을 "성벽이 함락되어 성채로 퇴각했다가 전황이 더 악화되자 다른 성채로 다시 퇴각했다"라고 오역하는 식. '분명히 그림에 나온 지도상으로는 성채가 하나였는데 무슨 소리지?' 같이 독자들은 어리둥절해진다.

따라서 다음의 일곱 개념은 동의어가 아니고, 문학적 수사를 위해 바꿔쓸 수 있는 어휘들이 원칙적으로는 아니다. 간혹 노래의 경우 운율을 맞추기 위해 다른 단어를 고른 경우가 종종 있지만 말 그대로 문학적 허용에 가깝다.

대중매체에서 이렇게 다양한 성 구조를 잘 표현한 예로는 레젠다리움 곤돌린이 있는데, 곤돌린의 몰락에서 확인할수 있다.

3.2.1. castle

파일:Chateau_de_Saumur_1.jpg
성관 (영어: Castle, 독일어: Schloss, 불어: Château)

군주가 거주하는 요새화된 저택을 의미한다.

군주(또는 영주)가 거주하면서 주변의 장원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어시설 겸 군주의 주거시설이다. 보통은 성 내부의 안뜰에 어느 정도까지는 성에서 거주하며 노동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민간인의 거주구역을 갖추지만, 도시마냥 대규모의 인구 거주 능력을 갖추지는 않았다. 농노들은 성 주변의 들판에 갖추어진 장원에 거주했으며, 유사시에는 성에 주둔하는 영주의 가신들이 출격하여 외적을 요격하거나, 농노들을 성 안에 불러들이고 성문을 닫아 농성했다.

봉건 영주들은 문자 그대로 지역 군벌이므로, 성관은 문자 그대로 군벌 소굴이다. 처음에는 유력한 전사가 개인의 안전을 위해 대충 지어둔 요새화 시설이, 해당 전사가 군벌화 되면서 좀더 요란한 거점으로 성장하고, 겸사겸사 방어력도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전사가 지주화 되면서 거주 기능과 통치 기능도 강화되어 장원의 중심 건물이자 영주의 거처이자 동시에 자체적인 요새 노릇을 하는 복합 시설이 되었고 이게 바로 캐슬이다. 보통 성으로 퉁쳐서 번역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성관(城館)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봉건 영주들의 군벌로서의 권력이 쇠퇴하고 단순 지주화 되면서, 즉, 왕권 신장에 따른 왕토 확장과 중앙 집권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요새로써의 기능이 필요 없어졌고, 왕들 또한 귀족들이 군벌로 기능하는 것을 억제할 목적으로 일부러 벽을 허물게 하는 등, 요새로써의 기능이 상실되어가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봉건 귀족의 성이 되었다.

근세 이후로 넘어가면서 중세시대의 요새화에서 탈피하여 지금 전형적인 유럽식 궁전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데, 주로 기존의 성을 개축하거나 완전히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주거용 건물들은 기존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캐슬이나 슐로스, 샤토라고 불리는 경우가 잦다. 전혀 관계 없는 지역에 새로 지은 경우에도 왕족이 살거나 소유한 주거용 건물이라는 이유로 해당 명칭을 갖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중세 이전에 사용되던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요새화된 귀족의 저택을 의미하던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프랑스의 경우 왕실에서 귀족들의 성관에서 "성"으로써의 기능을 강제로 철거하도록 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성"관"이 되었는데, 따라서 이렇게 요새 기능이 상실된 영주의 거처를 성관의 프랑스어 표현인 "샤토"로 퉁쳐 부르기도 한다.

3.2.2. k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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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ochester_zamek_fc11.jpg
아성 (영어: keep, 독일어: Bergfried, 불어: Donjon)

킵(keep)이란 성(castle)이나 성채(citadel), 혹은 요새(fortress) 내에서 성주의 지휘소 겸 최후의 방어 거점이다. 보통 아성(牙城)이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3.2.3. fortress

파일:e205b40a4516b0479121e7b387dc692e-forte-da-graca-elvas.jpg
요새 (영어: Fortress/ Stronghold, 독일어: Festung, 불어: Place forte)

단독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오로지 군사 목적으로 요충지에 세워진 독립적인 방어 시설을 의미한다.

성(castle)과 달리 군주의 주거 시설이나 민간인의 주거구역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며, 보통은 기사단등의 군사집단이나 상비군이 주둔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거주시설을 제외하면 무기고 마구간 등의 군사시설로 가득 차 있었다. 'fort, fortress'의 'fort-'는 [강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fortis'에서 온 말로 음악에서 쓰는 포르테(forte)와 어원을 같이 한다. 요새를 일컫는 다른 말로 'stronghold'( 스트롱홀드)가 있다. 이는 라틴어 어근에서 기원된 'fortress'와 달리 순수 게르만 제어를 어원으로 한다. 영어에는 이런 식으로 같은 의미이면서 한 쪽은 라틴어 기원, 다른 쪽은 게르만어(즉, 영어 입장에서의 고유어) 기원인 단어들이 꽤 있다.

포트리스는 "단순히 내용물을 지키는" 용도가 아니라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방해물로써 기능한다. 16세기 이후로 서구권 요새의 대세가 된 성형 요새는 내부에 도시나 마을이 입주해있는 시타델로 기능한 사례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포트리스로 쓰인 경우가 더 많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나르당처럼 시타델로 쓰이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식민지에서는 성형 요새를 주로 포트리스로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와 같이 순수히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축성물들을 진보(鎭堡)나 보루(堡壘)라고 불렀다. 보루는 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시설을 가리키는 단어로 영어단어 ' Bastion'을 번역할 때도 자주 쓰인다.
  • 산성과의 비교점
    얼핏 보기에는 산성이 포트리스와 비슷할 수 있으나, 산성은 기대되는 방어력은 포트리스인데 전술적 가치는 시타델에 가깝다. 이 시설은 원래 도시의 근원지가 있던 위치였던 경우가 많아 버로우의 특징까지 가지고 있다.

    물론 산성의 방어 능력 자체는 탁월해도 전략/전술적 기능면에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당장 요새와는 달리 산성의 성벽이 길기 때문에 수비군이 많이 필요하며 출성공격을 하려고 해도 진입로와 진출로가 뻔해서 적에게 잘 포착되는 등의 한계점이 많았다. 실제로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이 별 활약을 못했고 인조가 남한산성의 식량고를 성 밖으로 옮긴 신하의 잘못된 행동을 수정하지 않는 등의 뻘짓이 겹치면서 패전의 핵심 원인이 되어버린 것에서 그 한계가 입증되었다.

3.2.4. ram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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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영어 : Rampart, 독일어 : Mauer, 불어: Mur)

도성이나 성곽(城郭) 등 단독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다른 핵심 건축물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싸는 벽이다. 핵심이 되는 건축물은 램파트 안쪽 언덕 위에 있거나, 아예 램파트로 360도 보호된다. 램파트 사이에는 관문(Gateway)이 있어서 램파트를 부수지 못하는 적군은 이 관문으로 향하게 된다.

3.2.5.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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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벽 (영어 : Wall, 독일어 : Wall, 불어: Mur)

어떤 구역을 둘러싸는 형태가 아니라 형태로 세워진 성벽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경우도 성이라고 불렀으나 유럽에서는 ''(영어 : Wall, 독일어 : Wall, 불어: Mur)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여러 지역을 통과하며 길게 늘어선 방어용 구조물로써, 아주 간단하게 이다. 가장 원초적인 축성물 유형으로 자체적인 거점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문자 그대로 그냥 지나가지 말라고 지은 벽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장성(長城)이라고 부르며 기능도 완벽히 일치한다. 만리장성, 천리장성 등.

다만, 장성이 아니더라도 램퍼트라고 부르기엔 너무 거대한 규모의 벽을 두고 월이라고 하기도 한다. 도시를 둘러싼 방벽은 city wall(성곽, 성벽)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읍성과 같은 동아시아의 도시성도 이렇게 번역한다. Seoul City Wall(한양도성), City Wall of Nanjing(난징성)등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대규모의 방벽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도시는 walled city(성새도시, 성시)가 된다. 동아시아에서 "양양성을 함락시켰다", "평양성을 탈환했다" 식으로 도시 이름을 붙여서 '성'이라고 부를 때는 이 walled city에 해당한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여러모로 요새라기 보다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치한 산맥(?) 같은 노릇을 하며, 아예 산맥에 지어서 산맥의 기동 방해 효과를 극대화할 목적으로 짓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만리장성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월이다. 현대에도 마지노선이나 대서양 방벽, 지크프리트 선, 스탈린 선, 몰로토프 선, 메탁사스선, 만네르헤임선 같은 현대화된 월이 지어진 바가 있다.

이런 시설은 보통 방어가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적이 지나가게 두면 심히 곤란한 영 좋지 않은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새라는 것은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짓는게 아니라 좋던 싫던 강제로 점령을 시도하게 만들어서 적의 기동을 차단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데, 벽은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약점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시설이 아니므로, 궁극적으로는 적의 기동을 차단하지 못한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결국 그냥 뚫고 지나가거나, 돌아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효과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적이 지나가는 속도가 느려지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이점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는 그 무지막지한 비효율성을 감안해도 요긴해진다. 실제로 만리장성은 완전히 벽으로 세워지는 것이 명나라에 와서야 성사되었고, 사실상 국경 표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구간도 덕지덕지 붙어있던 장성임에도, "그 국경 표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약탈꾼들의 침입을 지연시켜, 지역 방어군을 소집할 시간을 벌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그런 효과에 비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순수히 군사적 목적을 두고 장성 규모의 거대 방벽이 설치된 경우는 전세계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다.

    장성은 어디까지나 적군에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용도 정도로 생각해야지, 적의 기동을 완전하게 차단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렇게 엄청난 거액을 삽질에 날려먹은 것이 그 악명 높은 마지노선이었다. 물론, 독일군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으나 전쟁 수행에는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발상은 이유가 있었으나 프랑스와 독일간 국경만 막아놓는 식의 발상은 1차대전에서 이미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공하여 슐리펜 계획을 실행한 독일이라는 존재를 생각했을 때 무의미한 것이었고 그렇다고 마지노선을 도버 해협까지 연장할 돈도 시간도 자재도 인력도 지형조건도 없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차라리 마지노선을 강화된 참호선 정도로 적절한 수준 정도로만 강화시키고 남은 돈으로 야전군을 강화시켜서 유사시 예비병력을 더 확보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따라서, 장성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적이 지나가는 속도를 늦춰 동원을 지연시키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국경 표시"라는 경제적/행정적 기능이 같이 존재해야 한다. 실제로 장성 형태의 월은 대부분 국경에 설치되어, 단순히 국경 밖의 외적이 국경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평시에는 통행세/무역세 등의 세금을 걷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적 목적으로 만든 거대 방벽의 대표격인 만리장성조차도 유목민 약탈꾼을 지연시키는 것 이상으로 불법 출입국자(...) 방지 같은 실용적인 기능이 있었다.

3.2.6. bur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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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새도시 (영어: Burgh/Burh/Borough, 독일어: Burg, 불어: Bourg)

성벽 따위로 보호를 받는 주거지역를 칭하는 단어.

유럽은 전란이 잦아서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던 곳은 필연적으로 일정 수준의 요새화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성새도시다. 일례를 들자면 앵글로색슨 7왕국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노르드 바이킹의 대규모 침공에 맞서고자 방어거점으로서 많은 수의 'burh'를 조성하였다.

그래서 행정구역의 명칭에도 많이 포함되어있는데, 유럽에서는 에딘버러(Edinburgh), 함부르크(Hamburg), 부르캉브레스(Bourg-en-Bresse) 등이 있으며, 영국에서는 오늘날에도 광역지자체의 하부로서 일부 존재한다. 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던 도시계급의 특권층들이 이후 이 단어에서 파생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자본가 계급이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성(城)이라는 단어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 성이라는 단어는 본래 정착지를 의미하는데, 주요 정착지가 자연히 요새화되면서 어영부영 요새라는 뜻으로 혼용되게 된 것이다.( 평양성, 국내성 등) 현대에는 위의 성관(Castle)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런 경우를 성새도시(城塞都市), 성시(城市)라고 칭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잔뜩 모인 정착지들은 당연히 "도시"로 발전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주의 성관이 발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요새화가 진행된다. 이런 "도시"들은 부유한 요충지에 생성되기 때문에 당연히 특권층으로 승급된 자유민, 곧 시민 세력의 거점으로 변모하며, 아무나 살 수 없는 유사 성관화 된다. 이렇게 버로우의 성벽 내부 주거지에 사는 특권 시민층을 프랑스어로 '성 안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 부르주아(bourgeois)'다.

그리고 버로우란 단어 자체는 중세 중반만 가도 단독으로 쓰이는 일이 거의 사라진다. 버로우들이 빠르게 부유한 도시로 확장되면서 도시가 아닌데 버로우인 경우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도시인데 버로우가 아닌 경우는 존재하며, 도시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애초에 성벽으로 방어하는 게 불가능한 경우이다.
  • 읍성과 비교
    조선의 읍성은 버로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도시 발달에 따라 방어 시설로의 기능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초장에 도시의 부속물인 버로우와 달리 읍성은 본래 요새로써 고안되었으나 버로우같이 도시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경우다. 이는 조선 시대의 읍들이 생긴 원인이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이고 시장이 들어서서가 아니라 행정거점에 가까웠고, 방어체계도 피난처 겸 지역방어로서 산성에 의지하였던 탓이다.

    공납을 비롯한 제도들을 바탕으로 유사 계획경제를 굴린 속칭 유교 원시 공산주의식 통치 하에서는 자유롭게 경영을 하는 시민 세력의 등장이 극단적으로 억압되었으므로, 당연히 읍의 도시화율도 높지 않았고, 사는 사람이 좀 있다 해도 목숨을 위협 받는 것을 각오해서라도 그곳에 남을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토지와 노동력의 가치가 높으므로 향촌에서 토지를 경영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결국 남아있을 이유가 마땅치 않으니 읍성의 기능 상실은 필연이었다. 게다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하도 오랫 동안 전란이 있다보니 주요 인구 밀집지가 아닌 나머지 지역들은 인구가 좀 많다 싶어도 죄다 산에 틀어박혀 중세 성관에 옹기종기 주민들이 모여 사는 것 같이 살고 있었다.

3.2.7. cita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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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 (영어: Citadel, 독일어: Zitadelle, 불어: Citadelle)

성곽(rampart)으로 둘러싸인 성새도시(Burgh/Burh/Borough) 내부에 있으면서 별도의 성곽과 방어시설을 갖춘 요새화된 주거지역을 의미한다. 어원은 이탈리아어 도시를 가리키는 città이다.[8] 고대, 중세 대도시의 지배자들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도시 안에 이런 시타델을 지어 놓고 직속 병력과 함께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도시의 방벽( wall) 내에서 방어 거점으로서 따로 요새화된 구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버러우의 방어 효과가 저하될 뿐만 아니라 시가지 규모에 맞추어 무한정 증축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자연히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방어에만 집중한 부속 시설을 따로 설치해야만 했다. 이렇게 생겨난 부속 시설이 시타델이다.

또한, 원래 요새로 지었고 요새로써 기능하는 시설들도 나중에는 추가적인 요새화가 필요해지면서 도시의 시타델과 비슷한 시설을 추가로 마련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특정 시설에 특별히 부속 방어 시설로 덧붙는 요새화 시설을 시타델로 다 퉁쳐서 부르게 된다.

공성전이 벌어졌을 경우 당연히 최후의 저항 거점이 되며, 실제로 공성전 중 도시 성곽은 함락시켰는데 시타델을 함락시키지 못해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구원이 도착하여 공성에 실패한 사례도 여럿 있다. 예컨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 야파 전투에서 수비대가 시타델에서 버틴 끝에 극적으로 수성해낸 바 있다. 그래서 시타델 자체를 저항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해당 도시가 자유도시가 아니라 군주가 거주하면서 통치하는 도시일 경우, 대부분은 군주의 거주 시설과 집무실을 성채 안에 (후술하듯 성채 안의 아성에) 마련했다. 그리고 이 시타델은 포격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유용성과 지위가 공고해졌고, 별 모양 형태의 시타델이 이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시타델들은 근현대에 도시 내 방어 시설이 효용을 잃으면서, 또한 도시 규모 팽창에 따라 교통량이 급증하면서 도시 성벽과 함께 대체로 철거되었다. 다만 별 모양의 특이한 형상만은 철거된 자리의 도로로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을 때가 많다. 혹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처럼 공원으로 구성한 곳도 있다. 몇몇 시타델들은 이런 시대의 풍파를 견디고 여전히 남아있다.
  • 번역어
    어학사전들에서는 " 성채"(城砦)라고 번역하는데,[9] 시타델이 도시, 즉 시티의 부속시설이라는 뉘앙스를 못 살리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오히려 성채 자체는 "요새"나 "영채" 등과 서로 바꾸어 쓰이는 말이어서 독자라면 "Fort"나 "Castle" 쪽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시설물 내에 추가로 설치된 부속 방어 시설이란 점에서는 차라리 내성(內城)이 시타델과 비슷하다.
  • 동아시아의 유사 개념
    "방어기능 상실"로 인해 추가된 시설이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기준으로는 "산성"들이 시타델과 동일한 역할을 하지만, 도시 내부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타델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쪽의 경우는 오히려 아크로폴리스와 같은 피난용 요새들과 동일한 기원 및 기능을 지니고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국내성- 환도산성처럼 이와 유사한 체계가 있었다. 이는 주거에 유리한 위치와 방어에 유리한 위치가 서로 달라서 나타나는 구조이다.

    한국에서 시타델과 비슷한 것을 굳이 찾자면 평양성의 사례가 있다. 평양성은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구획이 나뉘어 있는데 외성 너머에 중성, 중성 너머에 내성이 있는 식이다. 이 때 중성 + 내성이 외성에 대하여 시타델이고, 내성이 외성 + 중성에 대하여 시타델이다. 한양도성 북한산성의 관계도 시티와 시타델의 관계와 유사하다. 북한산성 자체는 한양도성과 별개의 성곽이지만 탕춘대성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원래 계획안대로 탕춘대성의 동벽까지 건설되었으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완전히 하나의 성곽이 되어서 북한산성이 한양도성의 진짜 시타델이 되었을 것이다.

3.2.8. 어원과 기타 외국어 단어

영어 ' castle'은 라틴어 'castrum'의 지소형(指小形, diminutive) 'castellum'이[10] 고대 북부 프랑스어 'castel'를 거쳐 후기 고대 영어 'castel'로 들어온 것이다. 'castrum'의 복수형 'castra'는 조금 더 일찍 들어와서 'ceaster'로 유입되고 영국 지명에 '-caster', '-chester' 등의 흔적을 남겼다. 이러한 기원은 스페인어 'alcazar', 'castillo',[11] 프랑스어 'château'와 마찬가지이다. 한편 영어에서는 어중의 'st'에서 [t]가 묵음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12] [ˈkæsl]이라고 읽게 되었다. 재미난 점은 프랑스어에서는 'château'도 그렇고 같은 상황에서 [s]를 묵음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13]

좀더 포괄적인 방어 시설들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Bulwark가 있다.

독일어로 성을 의미하는 '-burg'(부르크)는 중유럽의 여러 지명에도 남아있다. 예를 들어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 성이라는 뜻.[14] 이는 영어의 ' borough'와도 동원어 관계에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edinburgh'의 '-burgh' 역시 기원이 같다.[15] 독일어에서 'castle'을 의미하는 단어는 'die Burg'(부르크), 'palace'(궁전)은 'Pfalz'( 팔츠),[16] 'Schloss'(슐로스)로[17] 구분한다.

스페인어로는 alcazar라고 한다. 다른 성이나 요새를 뜻하는 alcazaba,[18] castillo란 단어에 비하면 세밀하게 순수한 군사용 목적 뿐만 아니라 왕들이 거주하는 왕궁이란 뜻을 내포하기도 하며, 실제로 꼭 어느 한쪽 용도로 굳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4. 분류

성이 지어지는 위치와 형태, 규모, 용도에 따라 크게는 산성, 평지성, 평산성으로 나뉘고,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진성, 장성, 보성, 행성, 폐성, 수영성, 병영성, 관문성, 포성, 고성으로 구분한다.

4.1. 위치

4.1.1.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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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말 그대로 에 지은 성을 말하며, 드물게 평지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지은 성도 산성이라고 부른다. 산성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벽을 빙 둘러 지어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뫼식(머리띠식)과 성 안에 넓은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능성이를 따라 성벽을 지은 포곡식[19]이 있다.

산이나 구릉에 짓는다는 특성상 성의 규모는 대부분 그렇게 크지 않으며, 삼국시대 국경선 지역에 설치된 산성들은 산성이라기보다는 거의 돈대 수준에 가까운 작은 산성도 보인다.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감시와 방어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어 복잡한 방호시설을 하지 않아도 엄청난 방어성능을 보였다. 하지만 험준한 산 내부에 성벽같은 방어시설과 산성 내부의 보급시설을 포함한 각종 시설을 유지하고 물자를 적재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고 포위당하면 도망칠 길이 마땅치 않으며 평지에 도로와 운하가 발달하면서 교통로가 평지 위주로 변경됨과 동시에 산이 침공루트 그 자체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로 변경되면서 시대가 갈수록 이런 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참고로 충청북도에는 여러 유명한 산성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을 《 중부내륙 산성군》이란 명칭으로 묶여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 중이다.

4.1.2. 평지성

파일:Vernon_-_Les_Tourelles01.jpg
프랑스의 Tourelles 성

평지성은 평야 지역에 건설되는 성을 말한다. 평야지역의 특성상 지형적으로 방어하기가 산성보다 불리해 높은 성벽과 복잡한 방어시설들을 만들어 성의 방어력을 극대화시키고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에는 산성이나 산성과의 공존이 일반적이었으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건축 기술력의 향상으로 수성기술이 점차 발전하게 되면서 산성보다 일반화된다.

그러나 방어력 증강을 위한 투자에 비해서는 방어력이 크게 늘지 않으며, 적의 대형 공성병기가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이 완전히 평야인 경우를 제외하면 가급적 평야 중에서도 고지대를 취하거나, 적어도 성벽 내부에 약간이라도 고지대를 포함시켜서 내성을 만들어놓는 일이 흔하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성벽이 뚫리더라도 일부 지역은 살아남아서 농성전을 계속할 수 있다.

한국의 평지성들은 대체로 읍성이며, 방어적인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사시에 피란하여 농성할 별도의 산성을 갖춘 경우도 많았다. 한반도의 특성상 어딜 가든지 산은 꼭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사시 피란이 전제된 읍성들은 대체로 성벽의 높이도 그리 높지 않고 방어에 썩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4.1.3. 평산성

파일:서울한양도성낙산일원.jpg
서울 한양도성의 산성 부분

평산성은 산지와 평지를 아울러 성벽으로 이어지는 성을 말한다.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과거 고려/조선 시대의 개성/ 서울의 성곽이나 고구려 평양성, 백제 사비성, 동래읍성, 수원화성이 이런 평산성에 속한다.

다만 이러려면 지형의 조건이 평지 옆에 험준한 산이 붙어있는 등 여러가지 조건이 딱 맞아야 하므로 평산성은 짓고 싶을때 마음대로 지을 수 없어 그 수가 적다. 그리고 제대로 짓지 않으면 평지성도 아니고 산성도 아닌 것이 양자의 약점을 고루 가진 망작이 되기 딱 좋다. 더구나 성 안에 살고 있는 인구수에 비해 성벽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평산성이었던 읍성들이나 한양과 개성에서 성벽이 있는 송악산, 용수산, 북한산, 남산 등의 산기슭을 본다면 민가가 하나도 없어 성벽 둘레에 비해 사람이 거주할 구역이 평지성보다 제한적이다. 당연히 성벽을 따라 배치해야할 병사들의 수도 외부의 지원군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자체적으로 방어하기 힘든, 불리한 구조다.

4.1.4.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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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선 내부 구조도

마지노선처럼 국경선 전체가 요새화된 방벽+지하 네트워크로 된 물건이나 지면 밖에 나온 시설물은 거의 없는 데 반해 지하에 100km가 넘는 지하통로로 거미줄같이 연결돼 있는 구조인 지하요새도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베트민 베트콩들이 건설한 구찌 땅굴이 이런 개념으로 지어졌는데, 비록 사람이 들어가기엔 대단히 비좁긴 하나, 내부에 작전회의실, 식량창고, 병사들용 침실에 사기 진작을 위한 간이 극장도 있는 등, 웬만한 것을 다 갖추고 있다.

현대의 일부 군사기지도 종종 이런 식으로 건설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상기한 마지노선이나, 스위스 방공호 등인데, 입구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구찌 땅굴과는 달리, 못해도 수천 명에서 많게는 천만 명도 넘는 인구를 수용해야 하므로 내부가 훨씬 넓고 쾌적하게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방공호를 다른 용도로 많이 써먹는데 주로 서민들의 피서, 피한지로도 애용된다.

이런 요새는 주로 건축공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 건설되지만, 데린쿠유같이 고대에 지어진 지하도시도 좀 있다. 이 경우는 화산암같이 파내기에 용이한 지형에 주로 건설되었으므로 건설 난이도는 다소 낮지만,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당대의 첨단 기술이 대거 동원되었다.

4.2. 재료

성의 재료에 따른 분류는 다음과 같다.[20]
  • 목책성(木柵城): 목책, 책성, 성책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 형태의 성이다.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쉽고 빠르게 세울 수 있지만 내구성은 낮으며, 특히 재질의 특성상 불에 약하다. 중세 시절의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는 대공국들이 몽골군의 침략에 탈탈 털린 이유가 이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도시들은 주변에 목책을 쳐서 방어용 시설로 사용했는데, 이를 안 몽골군들이 목책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대응한 것이다. 몽골 제국을 포함한 아시아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이골이 나도록 중국 왕조들이 세운 만리장성같은 성을 공략하다 보니, 다들 공성전에 있어서는 도사가 따로 없었다. 이를 모르던 러시아인들이 성벽 건설을 소홀히 하다가 멸망한 것이다.

    상위 호환형으로 목책도니성(木柵途泥城)이 있는데, 이것은 한옥의 벽을 만드는 것처럼 나무로 골조를 만든 뒤, 흙을 덧씌워 토벽을 만드는 것으로 일반 목책보다는 품이 더 들지만 다른 성에 비해 훨씬 싼 값으로 빠르게 지을 수 있으면서도 일반 목책보다 튼튼하다. 목책도니성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보루 건설에 많이 사용했으며, 이외에 여말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전라도 해안지대에 많이 건설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역시 많이 사용했고, 이에 유성룡은 <설책지법>에서 여말선초기의 목책도니성과 왜군의 임시진지를 기초로 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목책도니성을 제시한 바 있다. 전축성, 석성이 일반화된 뒤에도 싸고 빠르게 짓는 게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많이 사용되었다.
  • 목성(木城): 느릅나무, 버드나무, 탱자나무 등 빨리 자라거나 가시가 있는 나무들을 최대한 일렬로 빽빽하게 심어 서로 엉켜 자라게 해 천연 방어벽으로 삼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북방의 , 의 압력 때문에 자유로운 성곽 건설이 힘들었던 남송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 토성(土城): 흙을 쌓아 만든 성. 토루(土壘)라고도 한다. 고대 중국 황하 유역에서는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지형 자체가 널리고 널린 게 고운 진흙인 데다 흙에 칼슘성분이 풍부해 토성임에도 매우 단단했기 때문이다. 목책과 같이 설치하여 방어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대에는 흙을 정교하고 일정한 두께로 깐 뒤 다지기를 반복해 만드는 판축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이 방법은 튼튼하지만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 적당히 쌓아올려 만드는 성토법, 완만한 형태의 지형을 급경사로 깎아서 토성의 효과를 내는 삭토법, 돌로 일부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토성을 쌓거나 아예 처음부터 흙과 돌을 섞어서 쌓는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21]이 있다.
  • 석성(石城): 석축성(石築城)이라고도 한다. 이름 그대로 돌을 쌓아 만든 성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한 한국에서 특히 발달한 성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쌓은 편축성(片築城)과 성의 내외벽면만 돌로 쌓고 사이에 흙을 채워넣은 협축성도 석성에 들어간다.
  • 전축성(塼築城): 전돌( 벽돌)을 사용해 쌓은 성. 벽돌을 만들기 좋은 고운 흙이 풍부한 중국,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나 캅카스,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의 경우 벽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엄밀히 말해 순수한 전축성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돌과 흙을 벽돌과 같이 사용한 혼축성(混築城)이 대부분이다. 물론 벽돌성은 규격이 일정하여 보기도 좋고 섬세한 구조물의 건설이 가능하며, 접착력이 강해 포를 맞아도 피탄된 부분만 부서지는 장점이 있어 여러 차례 도입이 시도되었다. 국내에서도 드물지만 순수한 전축성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토질적인 이유로 좋은 벽돌 만들기가 어려웠으며 기후적으로도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과 잘 붙지 못해 내구성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좋은 석재가 풍부하고 가공기술이 잘 발달해 있어 한국에서는 전축성이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한국 건축 문서도 참조.

4.3. 역할

5. 구성 요소


아래부터는 주로 현대의 요새에만 존재하는 구성 요소이다.

6. 역사

6.1. 방어 시설로서

6.1.1. 기원

성이 언제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석기 혁명 이후 가족 단위의 원시 집단이 대형화 되면서 하나의 부락을 이루었을 때, 부락의 외곽에 설치했던 시설이 성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초의 요새는 사람이 넘어오지 못하는 수준으로 담을 높게 쌓은 형태였겠지만, 넘어오려는 사람을 공격할 수 있도록 담 위에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되어 발굴이 끝나 보고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성곽도시(城郭都市)는 팔레스타인 예리코 BC 80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밖에도 문명의 4대 발상지에서 모두 성의 구조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스라엘의 예리코 성이 축조된 시기 이전에 성이라는 방어 시설의 개념이 존재했고,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서서히 전파되어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으로 전파된 것으로 파악된다.

6.1.2. 고대

춘추전국시대 삼국시대 시기 중국의 경우, 성을 쌓는데 벽돌을 이용하지 않았다.[22] 당대의 성벽을 쌓는 공법은 일단 맨 땅에 흙반죽을 쌓고 그 위에 건초와 흙을 섞은 건초 반죽을 쌓은 뒤 다시 흙반죽을 쌓는 방식을 반복했다. 중간중간에 건초 반죽을 넣는 이유는 건초가 흙을 붙잡아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현대로 치면 철근 콘크리트 공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압축강도가 강한 콘크리트/흙과 인장강도가 강한 철근/건초를 섞어 구조물의 강도를 높이는 것. 물론 철근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초의 소재적 특성상 구조물 자체의 강도를 비약적으로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 흙반죽이 자기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정도로 효과가 한정되기는 하지만. 그리고 한 번 쌓을 때마다 최대한 다져서(넓은 판자를 이용해 다졌기 때문에 판축공법이라고 한다) 성벽의 내구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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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이 시작된 부분의 유적

해당 유적은 전술한 방법으로 성벽을 쌓았다. 만리장성에서 벽돌로 만들어진 부분은 명나라 이후 시기에 지은 것이고 삼국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부분은 이 공법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중국 이외의 동북아시아 국가들 중에는 부여, 고구려 등의 한국 왕조들이 이런 식으로 성을 쌓았다.

또한 중국의 토성 벽은 모래와 자갈을 섞어 올린 토벽에 벽돌을 쌓아 포격에 대비하기도 했다. 탄도체가 벽돌을 때려도 충격이 흡수되고 설사 벽돌이 무너져도 토벽이 계속 성벽의 역할을 하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열받는 구조. 거기에 공성시작과 함께 성위의 병력을 보호할 임시 요새가 건설되어버리기도 한다.

백제 마한 등의 한반도 남부 지역의 왕조의 경우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흙을 높다랗게 쌓아서 언덕을 쌓은 다음에 그 위에 목책을 두르는 방식으로 성벽을 조성했다. 이런 방식은 냉병기를 이용한 전쟁 방식밖에 없던 고대에는 상당히 유용한 축성기술이었다. 다만 모두가 흙과 목책만 쓴 것은 아니었고, 신라 삼년산성 같은 예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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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 성벽과 이슈타르의 문

고대 중동권 지역에서는 주로 벽돌로 성벽을 쌓았다. 예로부터 건축물 건축에 벽돌이나 적당한 크기로 깎은 돌을 이용하는 방식이 발달했기 때문이며 이미 이런 기술은 피라미드 건설에도 응용되기도 했으므로 보편성도 가졌다. 따라서 성벽같은 군사 시설도 이런 방식으로 자주 짓곤 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문명은 상당히 인상적인 성벽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의 성벽 자체는 벽돌을 쌓아서 지은 전형적인 중동 스타일 성벽이지만, 겉을 파란색으로 칠한 도자기 타일로 마감처리하여 미관상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다만 기원전이던 이 시기에는 아직 조적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조적은 벽돌에 벽돌과 같은 재질의 찰흙을 발라서 벽을 만드는 벽돌벽 제작 방식인데 거대한 벽돌은 그 벽돌 자체의 무게로 눌러주면 되기 때문에 조적 기술이 필요 없으므로 무식하게 바위를 잘라서 벽돌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피라미드에 사용된 벽돌은 그 크기가 사람보다 클 정도로 어마어마한데 산이나 바위를 잘라서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크기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아직 방어용 요새와 통치자의 관저 역할을 겸하는 성관은 등장하지 않았던 때다. 그런 건물의 개념은 중세 중기 이후에나 등장했고, 당시에는 유력자가 사는 곳은 경비 인력을 더 늘리는 정도에서 끝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보다는 평시 거주지로부터 위난시 대피할 피신용 요새 개념으로 시작된 곳이 많았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나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 고구려 환도산성 등으로 사례도 많다. 이러한 피난처를 좀 더 발달시켜서 거주지 자체를 둘러싼 성읍을 구축하였다.

6.1.3. 중세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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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성벽 형태인 모트 & 베일리

유럽의 경우 5세기 - 11세기까지는 야만족의 침입이 일상적이고 인구도 부족하고 중앙에서 갖춘 방비 체제도 빈약해서 각 지역에서 각기 알아서 침략을 막아야 했던 특성 상 상당히 급조된 형태의 성이 발달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기의 성은 성터 주위에 해자를 파고 그 파낸 흙을 쌓아올려 원추형의 언덕을 구축한 후 그 정상에 목조로 탑상의 건물인 이라고 불리는 아성 (牙城)을 세우거나 아니면 대지에 접속시켜 목책이나 해자를 둘러치는 식의 간단한 것이었다.

이 형식을 모트 앤드 베일리(Motte and Bailey) 형식이라고 하는데, 모트는 해자와 언덕을 포함한 영역이고 베일리는 위 그림에서 보이는 언덕 아래 방벽 안쪽의 공간이다. 확정된 번역어는 없으나 비주얼 박물관 구판의 '중세의 성' 번역본에는 '안뜰과 동산'이라는 우리말로 나온다.

이러한 구조가 성립한 이유는 언덕 위의 킵 아래에 대장간이나 기타 부속시설들을 유치함으로써 전투 지속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만족이라도 단기간의 습격 뿐 아니라 마을 근처 어딘가에 거점을 잡아놓고 비주기적으로 습격질을 하기에 장기전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노르만족의 축성방식으로 노르망디 앙주에서부터 시작해서 브리튼 섬과 프랑스 전 지역, 신성로마제국 등지로 퍼져나갔다. 윈저 성도 원래 이 양식의 성이었으며, 성 중앙의 원기둥형 구조물이 이 형식이었던 시절의 잔재다.

이 형식은 11세기 무렵까지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1세기에는 킵을 석조로 만든 예도 나타났고, 동시에 견고한 성벽을 둘러쌓는 형식도 발달하였다.

서유럽에서 보이는 초기의 킵은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평면의 건물이며, 거기에는 우물, 그레이트 홀과 영주의 가족들과 하인들이 거주하는 방, 창고 기타 장기간 농성에 필요한 모든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심지어 예배당도 있었다. 벽은 매우 두껍고 모서리에는 커다란 우탑이 붙어, 높이는 2층 내지 4층으로 되어 있다. 입구는 통상 2층에 설치되어 걸쳤다 떼었다 하는 사다리로 출입한다.

이런 사각형 킵은 여러 방을 배치하기에는 편리하나 반면 공성추의 공격에는 약했다. 한쪽 벽면에서 오는 공격을 막기 위해 다른 벽에서 측면 반격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점을 제거하기 위하여 킵의 평면을 원형이나 다각형으로 하게 된 것은 제3차 십자군 원정 이후의 일이다. 서유럽에 동방이 영향을 준 것들 중 하나이다.

6.1.4. 중세 성기 및 후기

서유럽 축성의 발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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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의 전형적인 성 건축 양식인 카디프 성 14세기의 양식인 보디암 성

수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의 축성술을 알게 된 서유럽의 기사들의 체험은 12세기 말엽부터 본국의 축성술에 반영되었다.

12세기까지는 기존의 모트 앤 베일리에서 구조적으로 큰 발전은 없었다. 해자(Moat) 바로 안쪽의 장벽(Curtain wall)과 킵이 돌로 축조된 수준. 하지만 야만족의 침입이 잦아들어 상대적으로 평화로워지고, 인구가 늘고 법이 발전해 행정 역량이 증대되어 더 크고 정교한 건축이 가능해졌다. 대신 영주들 간의 내전이 상시화되어 공성 위주의 전투가 잦아지자, 단순히 구조물이 아닌 구조면에서도 12 - 14세기를 걸치며 급격한 발전을 한다.

성벽은 요소요소가 탑으로 강화되고, 그들 정상부에는 오목하면서 불록한 흉벽 또는 성가퀴가 설치되었다. 침입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회랑식 주랑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마시쿨리라고 불리는 투석구가 마련되었다. 그러한 성벽에 싸인 성곽 속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건물은 킵이며 그것은 공방전에서 최후의 거점이 되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원형과 다각형 킵의 예로는 프랑스의 세자르, 에탐프, 프로방, 영국의 코니스보로 등이 있다. 한편 지중해 동쪽에는 11 - 12세기를 통하여 비잔틴의 전통이 계속되어 1099년 예루살렘 함락 후는 십자군에 의하여 그러한 동방의 축성술을 살려 안티오키아에서 아카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견고한 성이 여러 개 구축되었다. 12세기의 사오누, 마르가트, 그리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등의 성채가 그 예다.

북프랑스의 가야르 성은 장대한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후 이러한 형의 성채건축은 13세기를 통하여 더욱더 개량되었다. 프랑스의 경우 1917년에 파괴된 쿠시 성도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대지에 세운 걸작이며 그 킵은 지름 31.5m의 원통형으로 벽의 두께가 기부에서 약 7.5m나 되었다. 독일에는 바위산 위에 세운 팔켄베르크성이 있으며, 영국의 예로는 런던 탑, 윈저 성, 에든버러 성 등을 들 수 있다.

13 ~ 14세기를 걸치며 베일리와 킵으로 나눠져 있던 구조가 해체되고, 해자 바로 안쪽에 기존의 킵의 역할을 한 탑들이 세워지고, 베일리는 오히려 그 킵들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구조로 변한다. 베일리에 오두막을 세워 분담했던 주방, 마구간 등의 건물들도 킵 안의 건물로 재구성된다. 이런 13 ~ 14세기 축성술의 대표 건물로는 보디암 성 등이 있으며, 프랑스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지어지고 있는 중세성으로 유명한 귀델롱 성도 13세기의 양식을 따른다. 실질적으로 '중세 성' 하면 제일 전형적으로 연상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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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중국 핑야오 고대도시

위진남북조시대 몽골 제국 왜구의 침입 등을 거치면서, 동북아시아에서도 성의 건축 방식에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삼국시대(중국)까지만 해도 토성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후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투석기같이 성을 직접 무너뜨릴 수 있는 공성무기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토성에 돌이나 벽돌로 보강하거나, 처음부터 석성을 짓는 건축 기술이 등장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대포를 주요 무기로 사용한 지역인만큼, 튼튼한 성을 지을 필요성이 매우 컸는데, 그래서 서양에서는 근대 시기에 가서야 성형 요새를 짓는데 사용된 경사진 벽을 이용하는 방식이,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15세기부터 조금씩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서 주로 돌로 성벽을 쌓았지만, 중국은 건축자재로 쓸 석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주로 흙을 빚어서 구워만든 벽돌이 주로 애용되었다. 동북아시아 일대는 흙에 칼슘 성분이 많아서 이것으로 무언가를 만들면 굉장히 튼튼해지는 데다, 특히 중국은 이런 벽돌을 만드는 기술이 동북아시아 최고 수준이어서, 성 뿐만 아니라 웬만한 건축물을 모두 이것으로 지었다.

동북아시아는 오랜 옛날부터 중압집권화가 철저하게 진행됐고, 그런만큼 군주를 제외한 유력자의 거처를 방어할 필요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국경 지대를 포함해 군사적 요충지의 방어에 신경을 쓸 여유가 유럽에 비해 많았다. 그래서 동아시아는 예로부터 도시나 마을, 군사거점을 방어하기 위한 성벽(wall)이 더 중시되었고, 자금성을 제외하면 군주의 거처가 될 성관(castle)이나 시타델(citadel)의 발전은 다소 미미했다. 내부의 반란만 조심하고 외적의 침입만 막는다면 딱히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가 없는지라, 굳이 군주의 궁궐을 요새화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경복궁 자체는 조선이 중국 못지않은 강대국임을 과시하고자 자금성에 버금가는 거대한 크기로 지었지만, 막상 그 담벼락을 보면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간신히 도둑의 침입만 막을 수 있을 뿐, 외적의 침입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 한양까지 임박하자, 선조가 경복궁을 그냥 포기하고 달아나야만 했다.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자금성이나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 내성조차도 역할자체는 성관 역할이지만 내부에서 장기간 농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 아니다. 그나마 자금성은 그냥 그 내부에서 죽치고 농성해도 될 정도로 굉장히 튼튼하게 지은 성관이라서, 청나라 멸망 후에 구 황실에 대한 우대차원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황족들의 자금성 거주를 허락하자,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중심으로 그 안에서 황제놀이하는(...) 청나라 소조정이 설립되기도 했다. 다만, 자금성은 중국 특유의 대륙의 기상으로 인해, 성관이 베이징 시내의 미니 도시 수준으로 거대하게 지어졌을 뿐이다. 그래서 수도의 외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으면 반란군을 상대하는게 아닌 이상, 그 안에서 농성한 게 아니라 그냥 수도를 버리고 영내의 다른 지역으로 달아나버렸다. 남송이나 남명이 이런 사례에 속한다. 청나라도 제2차 아편전쟁이나 의화단 운동에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자금성을 버리고 몽진을 실시했다.

물론, 삼국시대(중국)의 군벌이었던 공손찬 역경루 동탁 미오성처럼 서양의 성관과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는 거처를 지은 경우가 없지는 않다.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역경루는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 ~ 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만 수십 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본인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고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했다. 당대의 건축기술과 공사 기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월적인 규모의 요새였다. 미오성도 성벽의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크고 아름다운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고 전해진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에 웅거하고, 일이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事成, 雄據天下; 不成, 守此足以畢老)"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성은 나라가 공중분해된 전란기에나 잠시 등장했을 뿐이고,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하고 버려졌다. 방금 설명한 역경루 우주방어가 가능했지만, 공손찬이 패망한 뒤로는 파괴된 채 그냥 버려졌다. 미오성도 동탁이 죽은 후에는 파괴되었고 자금성 역시 청나라 소조정이 해체된 후에는 군벌들의 거점이 된 게 아니라, 그냥 박물관이 되었다. 아무리 나라 전체가 뿔뿔이 갈라진 난세에도 각 세력이 내부적으로는 중앙집권체제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굳이 군주의 거처를 요새화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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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의 일부인 거용관

그런 관계로 등장한 것이 관문(關門)인데, 그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축성술의 발달과 함께 성문 자체의 방어력을 높이는 연구에 신경을 쓰다보니, 성문이 요새화되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관문 내에서 직접 농성이 가능할 정도로, 그 자체가 서양의 포트리스(fortress) 역할을 한 것인데, 지역 전체의 방어보다는 군주나 공화정부의 수반, 기사단의 단장같은 수뇌부의 생존에 더 중점을 두어서 성관(castle)의 요새화에 집중하고 성벽은 시간끌기용으로만 썼던 서양과의 차이가 이것이다.

6.1.5. 화포의 등장과 성형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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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화약병기가 보편화된 시점부터 성은 그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하는 듯했다. 그 전에도 투석기로 성을 좀 두드려보긴 했었지만 제대로 축조한 성은 외벽의 높이가 외벽의 두께보다 높고 제법 튼튼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는데, 화약의 힘으로 보다 무거운 돌이나 쇳덩이를 날려대기 시작하면서 외벽이 쉽게 무너져버리는 구시대의 성은 힘을 못쓰게 된다. 1453년에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성벽으로 꼽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3중 성벽이 오스만 제국의 거대 대포의 포격으로 함락된 사건을 패러다임 전환 시점으로 꼽는다.

물론 성이 직접적으로 함락된 원인은 오스만 군이 대포와 무관하게 성문 하나를 여는데 성공한 탓이었다. 이 당시 포탄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돌덩어리였기에 성벽에 구멍을 좀 내는 수준 이상의 손상은 입히기 힘들었기 때문. 하지만 지진이라도 나지 않는 한 물리적으로는 파괴할 수 없다 일컬어지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손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의의와, 포격으로 망가진 성벽을 복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있었던 비잔티움 측의 인원 소모와 누적된 피로감이 전황에 영향을 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화포가 점점 발전하면서 위력이 강화되고 사정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당대의 군사 전문가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자 이탈리아 축성 기술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이런 이탈리아식 성형요새가 등장해 성곽건축의 획을 그었다. 사실 성형 요새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온것으로 프랑스의 보방은 그것을 개량한것이다.

프랑스의 천재 공학자 보방( Vauban)이 설계한 공격 거점으로써의 성곽으로 발전하면서 공격자들의 머리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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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 요새 맥헨리 요새[23]

보방은 여러 개의 요새화 된 시설을 건설하면서, 방어지역에 포병을 상시적으로 배치하고 적의 접근 경로를 아군의 방어 방향 쪽으로 강제하면서 축차적으로 적을 소모시킬 수 있는 별 모양의 요새인 성형 요새를 설계한다. 요새 벽면도 약 60도 정도의 경사를 주어 포탄의 직격을 경사로 튕겨내면서 보병이 간단히 뛰어오를 수 없도록 구축함으로써 당시 요새의 최정점을 만들어냈다 포병이 눈으로 보면서 사격하던 시절까지의 끝판왕. 이 때문에 유럽과 북남미 등 열강의 손길이 닿던 모든 지역에서 해당 형태의 요새가 많이 지어져 있다. 대다수는 현재까지도 남아있으며, 유럽의 경우는 아예 요새 안에 마을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있는 경우도 많다.

수직에 가깝게 쌓아 단순히 공격자들이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던 구식 성벽 대신 약 60도 정도의 경사를 통해 공성포의 직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설계와, 계산된 각도의 성가퀴를 이용해 성 내부의 대형 요새 포로 적의 공격이나 참호를 분쇄할 수 있음은 물론 내부에 주둔한 병력을 활용해 적의 병참선을 공격할 수 있는 형태의 거점으로 변신한다. 이러한 형태의 거점으로서의 성은, 제1차 세계 대전까지도 유효한 방어 거점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형 요새도 결국 곡사포 고폭탄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대포의 발전에 대비한 이러한 형태의 축성술은 유럽에서 주로 나타났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화약 무기의 발달이 다소 정체되어 이러한 특징적인 모습의 성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이후 열강 시대에는 이미 근대로 온전히 넘어갔기에 이전까지 쓰이던 성과는 전혀 다른 콘크리트 요새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특정 양식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을 뿐이지 대포에 대한 대비는 이것저것 많이 나타났고, 조선 수원 화성은 그러한 것들의 도입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고 평가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바 있다. 예외로, 예로부터 유럽이나 중동과의 교류가 잦았던 동남아시아에서는 일찌감치 성형 요새의 건축 방식이 도입되었는데, 19세기에 오늘날의 호치민 시인 사이공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베트남의 사이공 성이 이 방식으로 지어졌다.

근세 열강이 팽창함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고 그 지역에서 군사력 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요새들이 세계 각지에 건설되었다. 도시를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 전투병만을 가득 집어넣은 형태의 성이다.

6.1.6. 벨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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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사포 고폭탄의 발전과 대량 배치는 성형 요새를 무력화시켰다. 기본적으로 성형 요새는 공성측이 진격하면서 해자를 돌파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농성측 성벽 위에서 각종 화기를 동원해서 적을 격멸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게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선적으로 포탄이 성형 요새 머리 위로 날아오는 수량이 늘어나면서 성벽 위에서 안전한 구간이 사라졌다. 가장 방어력이 높게 설계된 요새포의 경우에도 포탄이 집중되면서 장갑 덮개가 없다면 요새포가 뒤틀어진 고철덩이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기본적으로 엄폐물이 부족하고 머리 위쪽 방향에 장갑 지붕이 없는 성벽 위의 구간에서 농성측이 포탄 세례를 맞으며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고폭탄이 작렬하기 시작하면서 사각지대를 없애려고 섬세하게 만든 구조물들이 파괴되거나 뭉그러지면서 공성측에 은엄폐할 공간을 많이 만들어놓았으며 교두보처럼 돌출된 방어물과 성형 요새의 본거지를 연결하는 교량같은 구조물이 파괴되면서 농성측의 수비군중 일부가 고립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세번째로 농성측의 최후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시타델(citadel)를 포함한 요새 내부 시설도 포탄 세례를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개전 초반부터 전투력을 상실한 폐허로 전락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구조물의 방어를 강화하더라도 일단 포탄을 얻어맞기 시작하면 붕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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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셰미실 요새의 배치도

여기에 대응하여 성형 요새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뒤집어 엎게 된다. 그리고 요새 1개로 버티는 시대가 지나갔음을 깨닫고 요새들을 연계하여 건설하는 요새 지대 및 요새 방어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우선적으로 요새 구조물의 높이를 크게 줄이고 반쯤 지하로 매립하며 요새의 중요 구조물은 적색 벽돌로 불리는 현대식 벽돌로 건축한다. 이렇게 하여 일단 포탄에 피탄당할 확률을 줄이고 명중탄이 나더라도 벽돌 구조물 특성상 명중 부위만 파괴되므로 쉽게 수리가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적색 벽돌 구조물은 철근 콘크리트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방어력이 높은 건축 자재였다.

다음으로 해자의 폭을 약간 줄이고 매우 깊게 판다. 이렇게 하면 공성측이 해자를 건너가기도 곤란해지고 일단 해자에 들어오면 빠져나오기 힘들어진다. 곡사포로 고폭탄을 날린다고 해도 정확하게 명중시키기가 매우 힘든데다가 명중해봤자 타격이 별로 없다. 성형 요새라면 성벽 위에서 농성측이 공성측을 사격해야 하지만 이젠 공성측의 집중포격으로 인해 불가능해졌으니 굳이 사격각도 유지를 위해서 해자를 넓고 얇게 팔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세번째로 해자 내부에 장갑화된 돌출형 구조물을 만들고 총안구과 포곽을 설치하며 돌출물 주변에도 총안구와 포곽을 설치한다. 해자 내부로 들어온 적을 때려잡기 위한 시설이며 서로 사각지대가 없도록 배치하기 때문에 일단 해자 안에 들어오면 엄폐물 없이 십자포화를 두들겨 맞게 된다. 해당 시설이 나중에 벙커로 발전하는 시초가 된다.

네번째로 성채 내부에 시타델(citadel)같은 거대하고 높은 구조물은 없애거나 감시탑 정도로 활용하고 중요 시설은 분산해서 지하화를 실시한다. 그리고 대피호를 많이 건설하고 통행을 위한 교통호도 많이 만들어서 적의 포격시에도 최소한의 이동경로를 확보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채 내부에 포탄이 쏟아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다섯번째로 공성포의 포격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성형 요새의 본거지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 보조형 요새를 만들고 해당 요새들로 본거지를 원형으로 둘러싸는 형태를 만든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 공성측이 공성전을 진행하려면 일단 외곽 방어선에 있는 보조형 요새부터 하나씩 제거해야 하며 외곽 방어선을 무력화해야 성형 요새의 본거지를 포격할 수 있도록 해서 최대한 오래 버티도록 한다.

이런 식으로 개조된 요새들은 남북 전쟁 러일전쟁에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남북 전쟁에서는 북군이 빅스버그 전역으로 요충지인 빅스버그 (Vicksburg)를 원거리에서 포위한 후 빅스버그 포위전으로 결국 빅스버그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빅스버그는 미시시피강 방면의 미 해군 포함 + 도시를 포위하는 북군의 참호 방어진지 + 엄청난 포격으로 인해 도시 내부의 건물이 모조리 박살났지만 거주민들과 남군은 언덕과 방어진지에 대피호를 파고 숨어서 저항을 지속했으며 도시가 항복을 한 이유도 식량부족이 중요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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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해안에 건설된 해안포용 콘크리트 진지

러일전쟁에서는 뤼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의 희생이 막대하였다. 원래 뤼순은 러시아의 재정 부족등의 이유로 인해 미완성된 요새였으나 러시아군 제7사단 사령관이었던 로만 이시도로비치 콘드라첸코(Roman Isidorovich Kondratenko) 소장이 필사적으로 요새를 강화하고 대고산, 소고산, 수사영, 이령산( 203고지) 등에 전방 진지를 건설하여 방어선을 제대로 만들어놓았다. 여기에 더해서 전방 진지 후방의 주진지에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방어력을 증강시켜놓기까지 했다.

따라서 해안선과 동부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 당시 상황으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일본군은 철조망, 기관총, 지뢰로 강화된 전방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결국 203고지가 함락당하면서 일본군이 뤼순항 내부를 관측 및 사격이 가능해지면서 뤼순 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나온 교훈은 대구경 화포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주진지를 203고지같은 전방 진지 지역까지 크게 앞으로 전진시켜서 건설해야 하는 것과 각각의 요새들은 환기시설과 소음방지시설을 갖추고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할 부대시설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요새와 벙커와 참호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쫒아내기 위해 해당 시설 코앞에 가죽끈과 각종 독초등을 함께 태워서 초보적인 유독가스를 생성시키는 방식으로 화학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6.1.7. 제1차 세계 대전

성형 요새로부터 변화한 현대화된 요새들이 본격적으로 시험에 든 것은 1차대전이었다.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 침공을 단행하면서 벨기에가 만들어놓은 요새 구조물과 정면충돌하게 된 것이다.

벨기에의 방어전략은 크게 국립 요새지대(Réduit national)로 대표되는 거점을 요새로 둘러싸서 방어하고 운하와 하천 방어선을 활용하고 대전차호를 파며 최악의 경우에는 해안지대로 물러나서 최후의 방어를 하는 일련의 방어대책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중요 거점이자 교통의 요지인 안트베르펜, 리에주, 나뮈르에는 도시를 둘러싸는 요새지대를 만들어놓았으며 각각 안트베르펜 요새지대, 리에주 요새지대, 나뮈르 요새지대라고 불렀으며 모두 도시 중심가를 둘러싸는 형식으로 요새를 원형으로 배치해놓았고 요새들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서 당대 기준으로 방어력이 높았다.

하지만 벨기에라는 국가 자체가 성립 당시부터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영토 침공 야욕에 시달렸기 때문에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 방면 침공, 리에주는 독일 방면 침공, 나뮈르는 프랑스 방면 침공에 대응하는 형태로 요새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특성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면서 이젠 독일의 침공에 대한 방어특화로 성격을 고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관성처럼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로 인해 요새지대는 각각 포위공격을 당해도 버티기를 할 생각으로 만들어진 바람에 서로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벨기에 영토 내부에 한 줄로 이어진 방어선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군이 쉽게 각각의 요새들을 포위해버리고 주력이 우회해서 통과하는 한편 포위군은 공성포같은 중화기를 동원해서 요새를 하나씩 무력화해버리면서 들어간 비용과 노력에 비해서는 전략적인 쓸모가 적었다.

그나마 리에주 요새지대가 독일군 방어용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리에주 전투에서 1914년 8월 5일부처 8월 16일까지 버틸 수는 있었지만 뫼즈강을 방어선으로 삼지 못하고 도시만 원형으로 둘러싸서 방어하는 요새지대가 쉽게 포위당한 후 요새 자체의 구식화된 부분으로 인해 침투공격을 당해서 쉽게 중앙부 요새가 무력화당하고 일선의 개별요새가 각개격파당하는 비극으로 전투가 패배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나온 교훈은 화포들이 더 발달하고 유효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나면서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요새들로 만들어지는 방어선을 더 앞으로 전진시켜서 거대한 원형의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사실상 비용과 자재 및 설치 지역의 여건상 불가능하므로 이제는 국경선을 따라서 강력한 요새들이 일렬로 연결되는 방식의 장성 (長城)과 같은 요새 방어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새 사이의 공간으로 침투를 시도하여 후방 지휘소등을 공격하는 일이 너무 많았던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새 방어선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새들이 전투기간동안 스스로 버틸 수 있도록 각종 지원시설을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리에주 전투의 경우에는 도시를 둘러싸는 요새들이 전투를 시작한지 얼마도 지나지 않아서 환기시설 부족으로 내부에 화약연기가 가득해지고 소음저감시설이 없어서 사격시마다 강력한 소음이 요새 내부를 꽉 채우며 의식주가 해결이 안되고 위생시설도 부족해서 요새 수비병들이 제대로 전투하기 힘들어지고 요새 내부에서 오래 버틸 수 없던 것도 한 몫 단단히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과거와는 달리 요새가 완전포위당할 경우에는 보급의 문제로 인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상당히 짧아졌으며 특히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해서 방어하는 대규모 요새일수록 보급 문제로 인해 포위당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요새는 반드시 아군 전선과 튼튼하게 연결되고 안전한 보급로가 확보되어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속하는 갈리치아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서 교통의 요지인 프셰미실 프셰미실 요새를 36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건설했는데 외곽방어선만 따져봐도 45km에 육박하는 3중 방어선으로 프셰미실 시가지를 완전히 둘러싸는 요새의 집합체였다.

그러나 131,000명의 군인과 21,000마리의 군마가 주둔해야 할 정도로 요새의 규모가 너무 큰 나머지 프셰미실 공방전에서 2차례나 러시아군에게 포위된 결과 합계 173일간의 농성전 끝에 보급부족으로 요새는 항복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총계 144,000명 이상의 병력을 상실했다. 여기에 더해서 2,500명이 넘는 장교들이 포로로 잡혀 숙련된 지휘관들을 잃었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더 이상 독자적인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13만명 수준으로 거대해진 요새 방어군을 장기간 먹여살릴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마련하고 프셰미실 요새까지 운반한 후 저장하는 보급의 모든 과정이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력 및 프셰미실의 교통로 사정과 당시의 전황 때문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프셰미실 요새에 저장된 보급품의 숫자가 모자랐고 1차 포위전과 2차 포위전 사이에 보급 열차 편성이 213대 도착했으나 소모한 보급품 보충에도 모자랐고 이 와중에 요새 내부에 남아있던 보급품의 일부를 근처에 주둔한 야전군에게도 배급했다. 덕분에 2차 포위전에 돌입하자 프셰미실 요새의 보급상황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나락으로 치닫고 특히 식량부족으로 인해 21,000마리의 군마 중에 13,000마리를 도살해 식량으로 사용했으며 요새 내부에 전염병까지 퍼지는 고난을 겪게 된다.

6.1.8. 전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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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최종 형태중 하나인 드럼 요새
특유의 생김새와 설치된 함포 때문에 콘크리트 전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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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최종 형태 중 하나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동물원 대공포탑
베를린 공방전 중에도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고
항복권고로 함락되었기에 무적의 요새라고도 불린다.[24]

1차대전의 교훈을 살리고 총동원령 선전포고로 간주되면서 전쟁이 임박했거나 위기상황에서 일단 전쟁할 생각은 없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목적으로 총동원령을 내려서 병력을 늘리다가 갑자기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요새 방어선을 건설해서 상비군을 주둔시킴으로서 기습적으로 전쟁이 터지더라도 요새 방어선이 적을 막는 동안 총동원령을 내려서 증원군을 편성한다는 계획을 각국이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철근 콘크리트라는 튼튼한 자재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높은 수준의 방어력을 추구하는 거점을 건설하게 된다. 공성포같은 공성 병기를 제외하더라도 일반적인 화포의 화력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기존의 방어시설로는 사실상 방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마지노선, 지크프리트 선, 메탁사스선, 만네르헤임선, 스탈린 선, 몰로토프 선 같은 국경 방어선이 요새 방어선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해당 방어선에 설치된 요새들은 서로 연합해서 전투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노선처럼 프랑스라는 강대국이 엄청난 돈과 시간과 자재와 인원과 노력을 투입할 경우 내부 요새들끼리 서로 전기철도로 연결되고 내부에 의식주 및 병원과 소음저감 시설과 화생방 시설이 갖추어지며 요새와 벙커와 소형 포곽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 지원이 가능한 거대한 지하요새급 구조물의 연결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서 특정 목적에 맞추어서 독자적으로 장기간 버티는 것이 가능한 난공불락이나 철옹성급의 강력한 요새가 전략적 요충지에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에반-에마엘 요새, 드럼 요새, 동물원 대공포탑 등 극단적인 방어용 시설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런 요새들은 공격력과 방어력이 탁월해서 드럼 요새는 콘크리트 전함이라고 불렸고 동물원 대공포탑은 무적의 요새라고도 불리게 된다.

요새에 부속된 시설물들도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각종 아이디어를 채택했는데 드럼 요새의 주포탑은 전함의 주포탑 구조를 채용했으며 마지노선의 포탑들은 지붕에 엄청난 장갑을 두른 후 엘리베이터 방식을 사용해서 포격시에만 살짝 올라가서 포격 후에 다시 내려가면 적의 반격타는 지붕으로 막는다는 개념을 채용했다. 드럼 요새와 함께 전투한 프랭크 요새(Fort Frank) 같은 경우에는 14인치 (356mm) 요새포가 엘리베이터 방식을 채용해서 지상에 올라온 후 포격을 한 다음 다시 내려가면 장갑 덮개가 그 위를 덮어주는 구조까지 채택하였다.

방어력도 마지노선에 엄청나게 깔린 기본적인 보병용 포곽인 아머드 클로치(Armoures cloches)가 강철장갑 200mm에서 300mm를 가지는 것은 기본이고 동물원 대공포탑은 벽/천장 두께만 3.5m/1.5m에 도달했으며 드럼 요새는 벽체의 두께는 10 ~ 13m에 천정의 두께도 약 7m로 대응방어는 물론이요, 당시의 전함 주포의 일제사격을 견딜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취약부위라고 판정된 곳은 3인치(76mm) ~ 4인치(101mm) 두께의 강철제 장갑판을 추가로 붙였다.

이런 거점들을 정상적으로 해치우는 데는 엄청난 희생이 필요해졌고, 이걸 때려부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도 동원된다. 전략 개념에서야 우회해서 뒤통수쳐버리면 되지만, 당장 박살내야 하는 전술 수준에서는 피를 얼마나 흘려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6.1.9. 제2차 세계 대전

전간기 시절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서 크게 강화한 요새들은 2차대전에서 실전을 제대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대서양 방벽처럼 전쟁 기간중에 새롭게 요새와 요새선이 만들어지기 했다.

여기서 대부분의 요새들이 함락당하거나 돌파당하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동력의 혁신적인 증가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말이나 차량같이 병사의 기동력을 올려주는 수단이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도보가 기본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에 요새 같은 시설을 건설하면 공세를 펼치는 측에서는 우회에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낭비되므로 피를 흘려가면서라도 점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량의 대량 보급과 선박, 항공기의 발전 등으로 공세 측의 기동력이 늘어나면서 '씁... 점령 못하면 돌아가면 되지'라는 식으로 요새를 우회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방어측도 이런 상황을 예측은 했고 우회를 막으려고 마지노선의 경우 160억 프랑을 들여서 750㎞를 커버했고, 대서양 방벽은 프랑스 남부 지방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부까지 커버하는 무려 3,860km 길이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마지노선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고, 대서양 방벽은 연합군을 노르망디에 2달이나 묶어두는 등 어느정도 역할을 하긴 했지만 길이가 너무 긴 탓에 중간중간에 취약지점이 너무 많아 결국 돌파당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독자적으로 버틸 수 있는 요새라도 맞춤형으로 기습공격을 당하거나 동료 요새들이 함락되는 바람에 고립당하면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반-에마엘 요새는 독일 공군 공수부대인 팔시름예거(Fallschirmjäger)가 맞춤형 성형작약탄까지 휴대하고 공수강하하여 요새의 머리 위를 점거하고 노출된 포탑과 포좌를 성형작약탄으로 파괴함으로서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드럼 요새의 경우 마닐라 만 입구를 끝까지 방어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일본군이 주변 육지를 점령한 후 언덕 너머의 후사면에 포병 진지를 만들고 곡사포격으로 요새들을 공격하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마닐라 만 요새들의 대장인 코레이도르 섬이 함락당하면서 최후의 명령에 따라 항복하였다.

동물원 대공포탑 같은 요새는 식량도 많고 자체적인 우물을 이용한 수도 시설도 있어서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기 직전까지 함락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피난민들이 몰려있는 상황인데다가 오폭시 소련군에게 피해가 너무 커질 위험성이 높아서 서방 연합군이 지진폭탄을 사용하지 못했다. 물론 해당 시설이 12,8cm FlaK같은 강력한 대공화기로 무장하고 있으나 그 정도는 압도 가능한 서방 연합군의 공군력이 동물원 대공포탑을 내버려둔 이유는 전쟁이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 항공기 손실의 위험성을 감수하며 오폭과 민간인 학살같은 욕까지 들어먹기에는 가격 대비 성능이 안좋았기 때문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은 203mm 구경의 B-4가 당시에 현지에 동원가능한 최대한의 화력이라 동물원 대공포탑에 타격을 줄 수 없었다는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도 결국 마지막에는 포위당한 상태에서 항복하였고 전황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세번째로 제공권을 잃으면 요새의 함락은 시간문제이며 단지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남방작전에서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면서 빠르게 제공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마닐라 만의 요새들은 지속적인 공습을 얻어맞으며 대공포같은 대공화기의 손실이 심해졌다. 그 후에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포병진지를 만든 육상포병의 포격을 정찰기로 탄착관측하면서 정밀한 포격이 이어지고 공습이 추가타를 넣게 되자 매에 장사가 없다고 코레이도르 섬에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탄약고가 집중공격을 받고 결국 관통당하면서 폭발하는 바람에 요새포에 달린 10톤이 넘는 포신이 하늘로 날아가서 땅에 처박히면서 완파되는 등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네번째로 요새의 사각지대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수부대 같은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방향과 각도에 제한이 없는 요새포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화포가 있어야 사각지대의 적에게 직격탄을 날릴 수 있고 머리 위에 들러붙은 적에게도 공중에 포탄을 날려서 작렬시킴으로서 치명적인 파편세례를 적의 머리 위에 날릴 수 있다. 에반-에마엘 요새의 경우에도 그런 무기가 없었기에 요새 천정에 달라붙은 독일 공수부대를 처리하지 못했으며 드럼 요새의 14인치 주포도 저각도만 가능한 평사포라서 포구 각도 및 포탄 탄도의 문제로 인해 언덕 너머의 후사면에 있는 일본군 포병진지를 타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군이 우선적인 파괴목표로 삼은 것이 미군의 305mm 후미장전식 박격포이며 해당 박격포를 모조리 박살내거나 무력화한 후에나 코레이도르 섬 상륙 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다섯번째로 유사시에는 지원병력과 지원화기가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기준으로 잡고 요새 내부에 많은 무기와 장비와 시설과 보급품과 병력을 미리 갖추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에반-에마엘 요새도 정원이 1200명이지만 실전에서는 긴급하게 주변 진지에서 인원을 끌어모아도 650명이라 인원부족 사태였고 일본 제국 만주국과 소련의 국경지대에 만든 요새 방어선 중 하나인 후터우(虎頭) 요새도 막상 실전인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벌어지자 410mm 열차포식 요새포 1문을 제외한 요새포는 분해해서 후방으로 후송한 상태고 80문의 대공포와 10문의 대공기관포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공방어 장비는 신형 편제된 제122사단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공격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그래서 1문만 남은 요새포와 함께 150mm 야포를 중심으로 한 59문의 야포로 방어전을 진행해야 했다. 대공화기가 없다시피해서 소련군 항공기의 탄착관측과 폭격을 막을 수가 없으므로 410mm 요새포는 1번 사격하고 장갑 포대를 바꾸는 방식으로 버텼으나 결국 74번의 사격 끝에 직사를 얻어맞고 박살났다.

여섯번째로 충분한 시간과 자금, 자재와 인력, 기술력과 노동력과 의지가 없다면 미완성되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생겨서 제 성능을 절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탈린 선의 경우에는 당시 소련의 낙후된 기술력과 재정 때문에 1928년부터 1939년이라는 장기간의 건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많았으며 몰로토프 선은 1940년에서 1941년이라는 초단기간에 건설하는 통에 가라로 점철된 미완성된 방어선으로 남았다. 심지어 몰로토프 선을 빠르게 완성하려고 스탈린 선의 무기, 장비, 자재를 뜯어오는 바람에 스탈린 선까지 반쯤 방치된 폐허로 전락하여 바르바로사 작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일곱번째로 일단 건설완료한 요새라도 지속적으로 근대화를 하지 않으면 제 성능을 낼 수 없으므로 적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노선도 대전차포의 주력이 이미 시대에 뒤쳐진 25mm와 37mm 수준이었고 기관총 포곽에 25mm 대전차포를 박아넣는 개조를 하느라고 개고생했다. 마닐라 만 입구에 있는 미국의 요새인 코레이도르 섬도 구식 방어체제인 흉벽과 포좌와 대피호 등으로 구성된 해안포들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등으로 인해 제대로 근대화하지 못한 탓에 일본군의 포격이 집중되자 하나씩 시설물이 개박살나면서 무력화되었다.

한편 일반적인 야전에서도 기관총과 포병 화력의 확대로 방어 진지를 구축할 필요가 생겼지만 땅 위로 뭘 세워서는 단기간에 유의미한 방호력을 제공하기 어려워져 땅 밑으로 파는 방법을 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참호의 등장이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인 것을 '성/요새'로 부르기 때문에 참호와 같은 간이 방어시설은 '성/요새'에 포함시키지 않으나, 참호전과 같이 특수한 전장에서는 힌덴부르크 선처럼 수십 km에 달하는 거대한 구조물이 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요새 방어선도 본질적으로는 요새들과 영구적인 참호로 강화된 초강화판 참호선이라는 특성도 가졌다.

6.1.10. 현대

핵무기의 등장으로 강대국 사이의 전면전이 어려워진 현대에는 전투의 양상이 정치, 외교에 긴밀하게 엮여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자연스럽게 다양한 유형의 요새가 등장했다.

우선 더욱 강력해진 공군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에 견고하게 갱도와 격납고, 지하기지 등이 등장했다. 무기, 장비, 병력, 보급품, 기타 물자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공호의 기능이 더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U보트 수납용 콘크리트 장갑 기지도 톨보이 그랜드 슬램의 집중폭격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서 위치를 충분히 은엄폐할 지형을 고르고 지하 깊숙하게 만들어놓은 지하요새로 성격이 변화한다.

특히 북한처럼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보유한 상대를 적으로 상정한 경우엔 이와 같은 시설을 무수히 지어 전국토 요새화를 이루어 놓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자 마자 순식간에 무력화되는 걸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비정규전에도 유리한데 대표적인 사례가 베트남 전쟁시기에 베트콩이 운영하던 구찌 땅굴이다.

강대국들도 나름대로 전국토의 요새화는 아니더라도 핵전쟁시 군과 관의 수뇌부들을 보호하거나 반격용 핵무기를 숨겨놓는 시설을 준비해 놓는다. 이들의 지하기지는 북한 따위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을 자랑한다. 예를 들자면 깊이 2km, 길이 5km에 이르는 중국의 지하만리장성과 200 ~ 300메가톤급 핵무기가 지표면에서 직격탄으로 터져도 버틸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의 DUCC(Deep Underground Command Center)가 있다.

또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지은 건물이 대중화되면서 시가전의 난이도가 무지막지하게 상승했다. 건물이 기동에 방해가 되어 기갑전력은 기동성이 제한되는 데다가, 수층 ~ 십수층 높이에서 기습적으로 십자포화를 날릴 수 있으니 무턱대고 돌진할 수도 없고 항공전력은 건물 때문에 지상공격을 하기가 어렵다. 공격헬기가 투입되면 훨씬 낫지만 깊은 곳까지 타격하려면 접근해야하니 위험한건 매한가지. 건물에 폭탄을 들이부어 통째로 무너뜨리는 것도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한 두개라면 모를까 도시는 수백개의 건물들이 빼곡하게 있는 곳이다. 보병이 직접들어가서 적보병을 하나하나 섬멸하는 것이 최선이다. 대도시에 틀어박힌 적을 핵무기 없이 공군만 가지고 섬멸하는 건 미국에게조차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따로 요새를 준비하지 않아도 전국에 막강한 요새가 즐비한 셈이 되었다. 물론 공군의 화력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건축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초대형 벙커버스터인 GBU-57도 5000 psi 일반 철근 콘크리트는 60m 정도까지 관통하지만, 10000psi 강화 콘크리트는 겨우 8m 남짓 밖에 못 뚫는다. 심지어 21세기엔 20000psi를 훌쩍 넘는 UHPC(초고성능 콘크리트)도 개발을 마쳤다. 참고로 이건 어디까지나 민간용 콘크리트의 이야기이며 군사용으로 쓰이는 콘크리트는 진작 60000psi가 넘는 물건이 나왔다.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수도권 방벽

항공, 포병, 생화학, 벙커버스터, 핵무기 등의 파훼법이 많아져서 전통적인 성곽형 요새들의 위상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상 병력의 기동력을 확실하게 차단할 수있는 물리적인 방어, 방해 건축물인 만큼 이전 시대의 성곽형 요새들도 현대전에 맞춰서 변화해가며 여전히 애용되고 있다. 군대, 특히 기갑전력의 기동력이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빨라졌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대전차방호벽은 분쟁지역에서 요긴하기 쓰인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바레브 라인이며 대한민국 국군도 기계화 전력이 북한보다 열세였던 1970년대말에 서울 북방에 구식 성채처럼 성벽과 성문을 갖춘 '수도권 방벽'이라는 성벽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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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주둔 프랑스군의 토성형 화력투사 진지

테러와의 전쟁에선 현대판 토성이 등장했다. 본래 홍수 대책을 위해 사용하던 거대한 흙주머니를 기지 주위에 둘러쌓은 것인데, 테러리스트의 화기 정도는 충분히 방어하는 데다, 시공도 간단하고 가성비도 뛰어나다. 영국 헤스코 사의 제품이 제일 유명해서 흔히 헤스코 방벽 #1이라고 불린다.

6.2. 방어 목적 이외의 발전

6.2.1. 행정 및 권력의 상징

고대로부터 성곽이 둘러쳐진 곳은 어떠한 형태로든 행정체계가 잡힌 곳임을 의미했다. 성이라는 건축물 자체가 보통 노동력을 동원해서는 지을 수 없는 것인 만큼 존재 자체로서 노동력을 체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집단이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행정체계라는 것이 반드시 합법적인 집단이 집행하는 것을 전제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도 후삼국시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각지에서 호족 또는 도적들이 성을 짓고 해당 지역의 우두머리임을 자처했다. 대부분의 호족들과 도적들은 중앙 정부로부터 관직을 인정받지 못한 비인가 집단들이었다. 물론 그 안의 병력들도 모두 개인이 소집한 사병이었다. 다만 이 경우는 동원할 수 있는 자본의 한계 및 기타 애로사항때문에 다소 조잡했던 것이 현실이며, 대도시나 군주의 처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소재한 마을에 세워진 성들은 당연히도 훨씬 튼튼하게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성은 워낙 급조한 성이 많다보니 토성으로 지어진 경우도 꽤 있었지만, 당대의 주요 국가인 태봉, 후백제, 고려에서 지은 군사적 목적의 성은 석성이나 혼축성이라고 하는 토성과 석성의 건축방식이 혼합된 성인 경우가 많았는데, 군소 호족과 주요 국가의 조정이 투사할 수 있는 경제력과 행정력에 넘사벽급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유럽 인도 아대륙의 경우는 영주의 거소로 쓰이면서 해당 지역의 통치 기반이 되었다. 영주의 성에서는 각종 판결이 이루어지곤 했으며, 이러한 면에서는 사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당시 유럽에서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의 절대권력자이기는 했으나, 지역의 행정은 보통 교회가 더 상세하게 담당하는 측면이 있었다. 가령, 누군가 태어나거나 죽는다면 영주는 몰라도 해당 지역의 신부는 거의 반드시 알게 되어 있었다. 출생신고와 사망신고를 신부가 받았던 셈이다. 그러나 성들은 대부분 내부 혹은 인근에 교회도 끼기 마련이어서 결국 영주의 성에서도 행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당연히 이들 지역에서도 상술한 것처럼 영주의 세력의 차이에 따라 성의 규모가 달라졌는데, 공작이나 후작, 백작 등 영역제후나 정도의 대영주라면 성 자체가 매우 으리으리하거나 난공불락으로 불릴 정도로 공략이 어려웠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뱀파이어 전설의 모티브가 됐을 만큼 악명높았던 살인마인 바토리 에르제베트 여백작의 친정으로 유명한 바토리 가문은 트란실바니아의 대영주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유력 귀족가문인 관계로, 여백작이 기거했던 차흐티체 성 역시 난공불락의 요새로 악명을 떨칠 만큼 매우 튼튼하게 지어졌다.[25]

물론 하급귀족이라고 하여도 보유한 성과 그 세력이 절대 무시할 수만은 없었는데, 성주 남작, 자작, (소)백작 따위의 칭호를 자칭하였던 여러 하급 영주들이 도처에 널린 성을 중심으로 영역을 형성하였다. 여기서 (소)백작이 따위같은 취급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인데 놀라운 사실이지만, 백작이 백작의 봉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백작이라도 군주의 봉신인 영역제후 백작과 군주의 봉신이 아니라 영역제후의 봉신인 백작 간에는 큰 격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영역제후로서의 백작 자체가 지닌 공적 권한과 사적 재산 및 권력이 압도적이기도 하거니와 "누구를 섬기는가?"와 "섬기는 자의 지위는 섬기는 대상의 지위와 결부된다."라는 신분제 사회 특유의 관념이 크게 작용하였다. 일례로 긴느 백작과 아르드르 백작은 본래 플란데런 백작의 봉신이었다.

특히 10 - 11세기 동안 프랑스에서는 전역에서 성을 축조하거나 성을 장악한 신흥 영주들이 귀족 집단에 합류하였는데, 사학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성주층"이라 일컫고 그 체제를 "성주령"이라고 부른다. 북프랑스에서는 이들이 금방 영역제후와 군주의 봉신이 되거나 아예 그들이 임명하여 탄생한 반면 남프랑스의 경우 기존 대영주인 툴루즈 백작이나 아키텐 공작 같은 이들의 세력이 크게 퇴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유사하게 독일어권에서도 성백작(Burggraf)이나 자유영주(Freiherr), 영주(Herr) 등 수많은 군소영주들이 성을 중심으로 통치하였다.

또 다른 요새화한 거주지이자 봉건제 사회의 구성원인 " 도시"도 이러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도시는 주교좌 교회의 거소로서 교구 중심지였으므로 고대 말부터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중세 초에도 군주들이 교회에 의지하는 경향이 컸고, 영주들도 후원자나 보호자 노릇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동시에 도움을 받았다.

6.2.2. 도시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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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봉건 성채 도시의 대명사인 프랑스의 카르카손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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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핑야오 고성[26]

고대 문명권 이후로 수많은 민족의 번성과 폐망, 전쟁등으로 성곽도시(城郭都市) 및 성채의 형태로 더욱 견고하게 발전하여 중세 유럽시대에 절정을 맞이한다. 서양에서는 봉건시대에 장원을 구분짓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옛날 성의 이미지로 이미지가 고정된 한국의 성과는 달리,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사람들이 몰려사는 도시라는 의미다. 중국어로 도시를 '城市'라고 한다.[27] 조선시대의 한성(漢城) 성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포함해서 그 안에 있는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원 화성(華城)도 마찬가지. 이런 성들의 성벽은 방어용이면서 동시에 도시의 구획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 공통적으로 17세기까지만 해도 나라를 불문하고 대도시, 권력의 상징이였다. 하나를 지으려고 해도 재료가 많이 들고 인부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자연스레 많아지므로, 성벽의 건축이 웬만한 대형 건물 한두채 짓는 것보다 더 까다롭고, 자연스레 시골 읍내보다는 권력자가 거주하는 지역이나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짓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유럽에서 도시는 특권적 주거지였고, 모름지기 도시라면 성벽으로 보호받는 공간이었다. 당연히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장원 농노와는 달리 법적으로 더 많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민으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은 중세 초에는 명목상 주교를 도시영주로 삼았다가 서약공동체( 코뮌)를 결성하고 실력행사를 하거나 군주와 제휴하여 특허장을 받고 도시법과 시의회를 바탕으로 자치를 하는 자유도시로 변모하였다.

원래는 도시민을 뜻하였다가 자본가 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변한 " 부르주아"(Bourgeois)라는 단어도 그 어원은 "성(Bourg) 내부에 사는 사람"이다. 성도 건축물이니만큼 유지·보수 비용이 들어가는 데다가, 공간도 그리 넓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 내부에서 거주하게 되면 당연히 유지 비용을 세금으로 거두곤 했는데, 이게 일반 서민들이 부담하기에는 큰 데다가 기본적으로 이런데는 땅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 결국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은 성 밖에서 살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 내부에는 상공업 종사자, 귀족 같은 소위 '돈 좀 만지는 사람'만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 = 재력 있는 사람 =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지금은 성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재력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일본의 죠카마치(城下町) 거주자들의 경우도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일본 전근대 사회에서 상인들은 마을 사람이라는 뜻의 쵸닌(町人)이라고 불렸다. 일본 귀족들은 다른 귀족들처럼 도시에 있는 하기성과는 별도로 산 정상에 독립된 산성을 설치하여, 여기에 다시 혼마루와 니노마루 등을 반복하여 외적만이 아니라 내적들로부터도 자신들을 보호하였다. 여기서 내적이 언급된 이유는 일본의 평민들 역시 귀족들이 힘을 잃으면 그들을 살해하거나, 약탈하기도 했다. 가령,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황실이 대부분의 재산을 잃고 왕권마저 바닥을 기던 터라서, 당시 덴노였던 고나라 덴노를 보고 백성들이 우습게 여긴 나머지, 동네 애들이 덴노의 행차에 돌까지 던지면서 놀려댄 일도 있었다. 그러니 내적도 신경써야 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처럼 중앙집권제의 역사가 깊고 지방통제를 위한 행정체계가 제대로 자리 잡힌 경우는 봉건 사회와 달리 도시는 특권적 주거지가 아닌 행정의 하위 단위에 불과했다. 그런 관계로, 유럽과는 다르게 꼭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읍성이라고 하여, 군사적 요충지나 행정 중심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에도 성벽이 둘러쳐진 경우가 많아서, 웬만한 경우에는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 안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이 발생했을 때 유럽의 경우는 병사나 가신들 위주의 전투원들 위주로 성 안에서 농성하게 되지만,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는 비전투원들도 입성해 함께 농성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미 오랜 옛날부터 고도의 행정 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은 조선에서는 의병이라 하여 민간인들이 성 안으로 도망쳐서 무기를 들고 농성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전쟁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에게 극도의 멘붕을 선사하기 일쑤였다. 일본은 권력자들끼리만의 싸움이 대부분이라 웬만하면 백성들에게까지 전쟁의 화마가 미치는 일은 잘 없어서, 유력자가 사는 곳에만 성곽을 둘려쳐서 보호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영주가 어지간히도 성군이거나 특정 종교의 지도자인 등으로 민심을 얻고 있던 경우나 적들이 엄청나게 잔악무도한 경우가 아니면, 백성들까지 함께 농성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이런 관계로, 조선에서는 물자를 약탈할 만한 민가는 죄다 성 안에 있으니 성 자체를 함락시키지 않는 이상 보급로가 끊기는 비상 상황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도 덤이다. 이는 임진왜란에서 일본이 패한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남자들에게'란 에세이에서 이러한 차이를 흥미로운 관점으로 보고 있다.

6.2.3. 개인 거주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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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괄리오르 성채의 궁전 부분
궁전과 닿은 성벽은 상당히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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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샹보르 성
이쯤 되면 궁전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중세 말에서 15 - 16세기에 걸쳐 화기의 사용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자 종래의 방어시설로는 효과가 없게 되어 그때까지 성이 지니고 있던 주거와 요새를 겸했던 두 가지 기능이 분리되어 성은 순전히 군사상의 요새와 거관으로서의 저택으로 나뉘었다. 이 중 전자는 15세기 말엽 이후로 성형 요새로 발전하게 된다. 후자의 경우에는 르네상스 시대 루아르강 유역에 세워진 일군의 성관들은 그러한 중세의 축성술을 배경으로 하는 아름다운 거관이다.

주로 일부 귀족이나 왕족들의 취미나 거주 목적으로서 일종의 저택이나 별장으로 지어졌다. 한 예로 영국의 국왕 조지 4세 브라이튼 로열 파빌리온이라는 별궁을 지었는데 디자인이 그야말로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마법사의 궁전 형상이어서 당대에는 많은 빈축을 샀다. 이런 사례로 유명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당시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성을 재현해보고 싶어서 지었다고 한다. 물론 이게 엄청난 재정낭비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루트비히 2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빡친 의회와 국민들에 의해 폐위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로도 좋지 않았다.

이는 당시에 불어닥친 낭만주의 열풍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부터 성이 부유층의 저택이나 별장으로 애용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성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진 20세기에 지어진 성도 있었는가 하면 성이 발달하지 않은 북아메리카에 지어진 성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허스트 캐슬이 대표적인데, 문제는 이게 영국 웨일스에 있는 800년된 수도원을 부숴서 지은 것이라서 문화재 훼손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살기에는 썩 편한 편은 아니다. 겨울에는 무진장 추운 데다가, 편의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옛날 건축물들인 만큼 단열이나 습기배출이 잘 되지 않아 겨울엔 엄청 춥다. 사실 진짜 석조로 지은 오리지널 중세 성은 여름에도 써늘하다. 그래도 프랑스, 특히 방어용 목적이 아닌 프랑스의 성관 대부분은 주거 기능에도 충실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 프랑스에서 가장 후대에, 그것도 방어같은거 하나도 고려안한 단순 거주전용 궁전으로 만들어진 베르사유 궁전마저도 난방이 잘 안 돼서 겨울엔 누구나 옷을 두껍게 껴입었어야 했다고 하니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애초부터 계절 걱정할 필요 없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이라 저런 문제가 덜하지만, 겨울에 특히 추운 지역에선 시대변화에 따라 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개/보수도 대부분 지역법상 쉽지 않아 내/외장재를 현대식으로 재시공할 수도 없으며 도심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생활스타일에서 주거용으론 사실 부족한 면이 많다.

6.2.4. 현대의 부동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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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수차례 거래가 이루어진 끝에
초콜릿 재벌로 유명한 므니에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쉬농소 성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성은 주거용 저택으로서의 가치가 있어서 거래가 되긴 한다. 하지만 관리인원이 많이 필요해 유지비 폭탄을 맞는 데다 시골에 있어서 교통까지 불편한 경우가 많다. 제러미 아이언스는 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나가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시나리오를 깐깐하게 안 보고 블록버스터형 액션영화에 대거 참여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은 생각만큼 고가에 거래되지는 않는다. 보통 돈 많은 사람들이 별장용으로 하나 구입하는 정도. 대개는 470만 유로 정도에서 시작해 드물게 정말 비싼건 5천만 유로 정도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영국 랭커셔에 있는 해자까지 딸린 써랜드 캐슬은 고작 375000 파운드(약 6억 5천만원)에 매물로 나와있었다. 위 링크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현재는 팔린 상태. 이건 좀 과하게 많이 싼 편이지만, 보통 저 정도 성이라도 수백만 유로를 넘어가지는 않는 편. 레이디 가가 스코틀랜드에 자신의 소유로 된 성이 하나 있다.

그런데도 서구권의 부유층들에게 성이 인기있는 이유는 순전한 재력 과시가 목적이다. 그 자체의 가격은 싸도 유지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점 때문에, 그 스스로의 부를 과시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엘리자베스 2세가 살아생전 거주하던 버킹엄 궁전은 2015년에 수리했는데 수리 비용만 1억 5천만 파운드(약 2600억 원)가 들었다. 그래서 성에서 산다는 것이 출세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상류층들이 성을 선호하는 것을 부추기는 상황이다. 본래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J. K. 롤링 해리 포터 시리즈로 초대박을 터뜨린 후에는 성 한 채를 구매해서 살고 있다.

다만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국보급 성이라면 이런 식으로 쉽게 거래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위 링크에 연결된 성도 겉보기에는 중세식 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파괴된 것을 19세기 후반에 중세시대 서유럽의 건축 양식을 모방한 고딕 리바이벌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다. 잘보면 외벽이 너무 얇고 낮은 데다가, 성탑이 있었을 자리에 정원이 있는 등 요새로써 기능은 제거된 근대 건축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진짜로 중세 당시의 건축물이 온전히 남아서 문화적 가치가 막대한 성인 런던 탑이라든지, 도버 성이라든지, 웨일스에 에드워드 1세가 지은 일련의 성들같은 경우는 국가나 문화재 재단 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한다.

6.3. 지역별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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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인 바흘라 성채
높은 성벽과 두터운 벽이 둘다 작용한 곳이다.

높은 벽을 쌓아 침입을 방지한다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그 형태와 목적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만리장성이나 천리장성 같이 국경 등에 긴 담을 쌓아 올리는 장성이 있고,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한 도시 외곽을 벽으로 둘러싸는 도시성곽, 유럽에 존재하는 권력자 거주용 성관(城館), 크라크 데 슈발리에 같은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공격을 견제하거나 방어할 용도로 지은 요새형 성 등. 같은 나라, 지역 내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성의 형태는 제각기 다르다.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는 따로 권력자용 거주 공간을 성처럼 쌓아 올리기보다는 대도시 내에 궁궐을 짓고 담으로 구분 짓는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사람이 모이고 교역하기 쉬운 대도시는 전체를 둘러싸는 성곽으로 방어하고, 길목에 전투용 요새성을 따로 두어 거점방어에 이용한 것. 따라서 차단/요격전에 성공하지 못하면, 대도시들은 꽤나 손쉽게 적의 손에 넘어갔다. 농경지 약탈은 어차피 막기 힘들고, 인명 보호에는 도성보다 피난용 요새가 나았다. 주요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진 순수한 요새형 성도 있다. 중국 만리장성이 대표적. 이런 요새형 성이 따로 있는 것이 바로 아시아권에서 성관을 따로 생각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요새형 성엔 거주용 성관을 지어놓지도 않았고, 지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혼란기 중국이나 유럽은 조금 사정이 달라서, 옛 대도시들은 도시 외곽의 방어성이 필수적이었다. 큰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기보다 도시 단위로 공격받는 일이 잦은 경우, 도시성 자체의 방어 능력이 중시되었던 것.

중세의 유럽같이 짧은 전쟁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곳에서는 도시의 방어보다는 권력자 거주구를 중점 보호하는 형태의 성이 나타난다. 이쪽은 직업군인 간 전투로, 일반민 마을을 약탈하기보다는 권력자 목을 따고 구역 일대를 손에 넣는 형식의 전투가 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의 성은 평지성이 방어의 기본이다 보니 성벽을 매우 높게 짓고 다중 문 방식의 성문을 채택해 평지성이지만 높은 방어력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성문이 기본적으로 작은 데다가 한두 개밖에 없고 '산노마루', '니노마루', '혼마루'라고 불리는 3중 성벽 구조를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며 침입해온 적군들을 언제나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내부 구조도 미로같이 만들어놓아 역사상에서도 손꼽히는 매우 높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다만, 그 대가로 교통이나 거주 편의성 등 평시 도시로서의 성의 기능을 많이 포기했다.

아메리카에는 성이 발달하지 않았다. 성의 개념이 아메리카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가 이미 성이 쓸모없어진 시기와 겹쳤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포에 맞아서 무너진 곳을 빨리 복구하기 위해서 목재로 벽을 두른 요새가 대세가 되어서 돌로 지은 성 자체가 쓸모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을 단순히 저택으로 쓴다고 해도 그런 곳에 거주할 귀족이 없었다.

귀족을 굳이 찾는다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콩키스타도르 출신의 지배층들은 신분 상 귀족으로 취급받았지만, 이들은 말이 좋아 귀족이지, 본래 유럽에서 살았을 시에는 사실상 평민이나 다를 바 없는 가난한 하급 귀족이었던지라 콩키스타도르들 중에는 귀족으로서의 체면 유지를 위해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던 사람도 있었고, 생계를 위해 일찌감치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군대에 입대한 사람도 많았다. 이들이 아메리카에 정착했을 시에는 자신들이 거주할 성을 지을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안전를 보장받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조성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이 의외로 틀락스칼텍같은 친스페인 성향인 도시국가나 부족은 백인들과 동등하게 대접하거나, 바야돌리드 논쟁을 통해 원주민들에게 자유민 신분을 부과한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북아메리카에 식민지 보호 목적으로 건설된 대표적인 성으로 캐나다 유일의 성벽 도시인 퀘벡 시티가 있고 해적을 막기 위해 항구에 건설한 소규모의 해안포 요새들을 제외하면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부유층의 거주지 목적으로 지어진 성은 20세기에나 미국 등지에서 생겨나면서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허스트 캐슬이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의 성은 많은 인구 탓에 트럭 2대가 다녀도 될 정도로 넓은 성채를 자랑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경우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유지하다 보니 다수의 병력을 운영하면서 성곽방어도 그에 맞게 변형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편 센고쿠 시대 일본 다이묘들이 오랜 전란으로 인해 산성에 도피용 산성을 따로 만들기도 했고 아예 산성에 주로 거주하는 경우까지 생겼는데, 이런 일본의 산성들은 평지의 성들과 마찬가지로 큰 데다가 복잡한 방호 시설들이 지어져 더더욱 난공불락을 자랑했다. 하지만 교통의 불편은 여전한 문제인지라, 성 방호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점점 평지성, 평산성에 주력 자리를 내주게 된다.

요새형 성곽의 정점을 보고 싶다면 인도로 가보면 된다. 일본은 전국 시대를 겪으면서 긴 내전을 치르면서 성의 구조가 보완을 철저히 하고 성곽 특유의 독특한 구조가 매력인데 인도의 경우, 중국 못지않은 인구 대국인 특성과 다민족국가로 일본 못지않은 내전을 일상적으로 겪으면서 일본과 중국의 장점을 혼합한 듯한 요새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인도는 토양 기반이 사암이라서 일본보다 더 수월하게 성을 지을 수 있어서 일본보다 더 규모 있고 개성 넘치는 성들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어떤 성들은 아예 산 전체를 파서 산 자체를 요새화 시킨 것도 있으며, 또 어떤 것들은 계곡을 깎아서 만든 성도 있다. 그래서 상대하는 입장으로선, 저걸 어떻게 뚫어야 하나 할 정도로 말 안 되는 구조를 가진 성들을 인도에선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독특한 구조 덕택에 수많은 판타지 덕후들이나 작가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 때 반드시 인도의 성들을 참고할 정도라고 한다.

거제시 장목면 일대에 있는 매미성처럼 태풍으로부터 농경지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관광지가 된 사례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땅 주인이 순수한 흥미 차원에서 지은 것이다. 거주 목적을 겸하긴 했으나 흥미용으로 지었다는 점에선 노이슈반슈타인 성도 매미성과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3.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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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삼년산성

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매우 활발해 실제 전시 방어에 중점을 둔 견고한 성곽도시가 전국 요충지에 건설되었다. 역사에 이름을 떨쳤던 난공불락의 성채로 평양성, 대야성이 있으며, 웅진, 서라벌도 직접적인 공성전이 이뤄진 적이 있었다. 한국의 성들은 전국에 최소 수만개 이상이 지어졌으며, 연해주와 만주, 요동 지역의 성들까지 합하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또한 현재 사라진 성들만 해도 수천여개 이상이다.

한국의 산성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입보항쟁, 청야입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사실상 청야전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왕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들이 산이나 구릉 위에 축조되었으며 왕성이라고 할지라도 구릉 위에 형성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즉, 수도에는 왕성(또는 그냥 왕궁)과 피난용 산성의 시스템을 갖췄던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고구려의 환인의 하고성자토성(추정), 오녀산성, 지안 국내성 환도산성, 평양의 평양성 대성산성의 구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백제만 보더라도 한성 도읍시절에도 남성과 북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웅진 도읍기는 아에 왕궁이 공산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비 도읍기에는 부소산 아래에 왕궁이 있었고 부소산성은 왕성 겸 도피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경주 월성 또한 아에 산성의 범주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산성에는 저장, 저수시설이 필수적이며 실제로 발굴조사에서도 특히 저수시설에 대한 관리는 수차례에 걸쳐 보완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예 산성이 지방행정의 치소(治所)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되는 경우도 많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산성 유물 중에는 건축 당시 산성의 성벽 높이가 거의 보루 수준인 곳도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당수가 허물어져서 그때의 모습을 확인할 길이 없다. 전방의 국경지대가 아닌 이상 다른 후방의 성들을 유지하는 것에는 소홀해지기 쉬웠고 도시와의 접근성도 낮기 때문에 필요가 없어지면 관리가 이루어지기 힘든 탓이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도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읍성철거령으로 사라졌다.

조선시대에는 평지성이 읍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지어졌는데 외성만 있고 외부와 이어지는 정문이 많이 나있는 데다 높이도 그리 높지 않아서 방어력이 약했다. 읍성은 정규군을 막아내기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앙 권력의 위엄을 높이고 행정 구역 표시, 도적 및 왜구를 막아내는 것, 즉 치안이 주 목적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적이 처들어오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에서 농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타국의 성들과 비교했을 때 성벽과 성관의 규모가 단촐해보이는 것은 읍성에 그런 구조물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읍성이 있기는 하되 전란이 일어나면 읍성을 비우고 산성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허술했던 읍성은 임진왜란 때 이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성전에 이골이 난 일본군에게 매우 쉽게 함락되었다. 기존에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정규군이 주력 방어선인 산성을 돌파해버리자 왜군의 진로에 놓인 읍성들은 빠른 속도로 점령되었다. 반면 대 여진 전선이었던 함경도는 여진족의 침략이 잦았던지라 경성읍성같이 웅장하고 큰 성들이 존재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읍성도 기존보다 잘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외적으로 읍성임에도 잘 지어져 여러 방어시설과 내성/외성 구분이 잘 되어있던 진주성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2차 진주성 전투에선 함락당했지만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어 진군을 저지함으로써 뛰어난 방어력을 보였다.

조선 시대에도 일부 산성은 조정의 명으로 새로이 축조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쌓았던 산성들을 재활용하거나 새로이 간단하게 쌓음으로써 왜적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산성의 기능이 어떠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어떤 늙은 왜인이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장들은 매양 『조선이 청야(淸野) 작전을 써서 산성으로 들어가고 곡식들을 다른 곳에 옮겨 저장하는 것이 걱정이다. 물길에서 가까운 지역의 산성이라면 10년의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식량 운반이 편리하고 군량을 계속할 수 있으니 기어이 함락시킬 수 있겠지만 만일 아주 궁벽한 지역에서 성곽을 튼튼하게 마련하고 식량을 쌓아 두고 청야 작전으로 막아낸다면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계속되는 군량이 없게 되어 격파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로서는 큰 걱정거리이다. 』 하며 이를 늘 논의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88권, 선조 30년 5월 18일 무신 5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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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



[1] 참고로 손자가 가장 높게 쳤던 게 상대의 계획을 사전에 차단해 아예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그다음이 외교전을 통해 상대를 고립시켜 이기는 것, 그다음이 실제 싸우는 것 순. [2] 여담으로 이는 물의 과학적 성질이므로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군조차도 물 보급이 힘들어 애를 먹었을 정도다. [3] 일본에 촌주(村主, 勝 ; 스구리)라고 하는 카바네가 있다. 주로 한국계 씨족에게 내려졌고 족장을 의미하는 한국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촌(村 ; 스키)+ 주(主 ; 니리무) 혹은 족류(足流 ; 소쿠로)와 연관짓기도 한다. [4] 산은 무레로 훈독되지만 대산성(帶山城 ; 시토로모로노사시)처럼 모로로 훈독되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에서도 산을 모로로 쓴 경우가 보인다. [5] 이형으로 조부리(助富利)가있다.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知干 ; 우루소호리치칸) 석우로의 지위는 서불감(舒弗邯)이었으므로 소부리라 적은듯 하다. [6] 그외에도 배벌(背伐) 비지(費智) 발귀(発鬼) 불지귀(弗知鬼)이라고도 한다. [7] 기부리(己富利) 스가발 → 스가올 → 시골, 가옳 → 고을, 셔블→셔욿→ 서울. [8] 이 단어는 영어로 도시를 뜻하는 시티와도 동원어이다. [9] 스타크래프트의 ' 시타델 오브 아둔'을 ' 아둔의 성채'라고 하는 등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10] 지소형이 비슷한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cerebrum - cerebellum( 소뇌)이 있다. [11] 둘 다 어원은 라틴어로 같으나 'alcazar'는 아랍어 'al-qasr'를 거쳐서 들어왔기에 아랍어 정관사 'al-'이 붙었다. [12] 'listen', 'fasten', 'apostle' 등. # [13] 그런 식으로 's'가 묵음이 되는 경우에만 쓰는 다이어크리틱으로 circumflex(◌̂)가 있을 정도. forest - forêt, apostle - apôtre 등. [14]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 표트르 대제가 일부러 독일식으로 작명한 것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러시아식으로 '페트로그라드'라고 하기도 하였다. [15] 참고로 발음과 표기가 비슷한 '-berg'( 베르크) 역시 'burg'와 동원어인데, 공통조어로부터 파생할 때 'berg'는 원뜻대로 '높은 곳'을 뜻하는 말로 남고 '방어요충지'를 가리키는 표현은 'burg'로 분화한 것이다. [16] 'palace'와 동원어로, 주로 중세 초 프랑크 제국~신성 로마 제국에서 왕의 순행로를 따라 조성된 거점 궁성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좀 더 후대에는 왕이 한 지역에 확실한 근거지를 두면서 팔츠 선제후국처럼 전통으로서나 라인란트팔츠와 같이 지명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17] 뜻이 상당히 멀어졌지만 영어 'slot'( 슬롯)과 동원어이다. [18] 아랍어 '카스바'(kasbah)에서 온 말이다. 카스바는 문명 5 모로코의 특수 시설로 구현되기도 했다. [19] 부산의 금정산성과 경기 광주의 남한산성이 대표적이다. [20] 참조자료 : <한국의 성곽>, 손영식 저, 비류성. [21] 줄여서 혼축성이라고도 부른다 [22] 삼국지의 창작물 대부분이 이런 벽돌 성벽을 등장 시켰는데 명백한 재현 오류이다. 그나마 84부작 삼국지가 의도치않게 흙빛 성벽을 등장시켜 고증한것이 전부. [23] 미국의 국가의 배경이 된 장소이다. [24] 참고로 저런 식의 대공포탑은 동물원 대공포탑 말고도 많았다. 대공포탑 문서 참조. [25] 창작물의 사례를 보자면, 슈렉에 등장하는 도시국가인 둘락의 영주인 파콰드 경이 통치하는 둘락 성이 마천루 수준으로 성벽이 엄청나게 높은 것으로 나오는데, 영주 본인이 왜소증 환자인 것에 대한 콤플렉스와 더불어서 동화 속 등장인물들을 대거 붙잡아서 슈렉의 사유지로 추방하거나, 피오나 공주를 구출하러 갈 챔피언을 선발하는 대회를 성대하게 치르려고 한다든지, 그녀와 결혼해서 칭왕하려고 시도했을 만큼 강력한 위세를 발휘한 영주였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한 성을 지을 수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26] 동아시아에서는 유럽과 반대로 도시가 먼저 생긴 후에 성벽이 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27] 홍콩 독립운동의 지지자들이 홍콩의 새 국가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하는 노래가 홍콩성방가(香港城邦歌, The Hong Kong City-State Song)인데, 여기서 '성방'(城邦)이 도시국가를 뜻하는 말이다. 성(城)같은 건 눈씻고 찾아도 없는 홍콩에서 성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오면, 십중팔구는 자기네 도시 시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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