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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셰미실 요새

파일:Salissoglio1915.jpg

러시아어: Перемышльская крепость (페레미슐스카야 크레포스트)
독일어: Festung Przemyśl (페스퉁 프셰미실)
폴란드어: Twierdza Przemyśl (트비에르자 프셰미실)

1. 개요2. 역사3. 문화적 유산4. 여담

1. 개요

프셰미실 요새는 현재 폴란드 포트카르파츠키에 주 프셰미실에 위치한 대규모 요새 단지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건설을 진행했으며, 당시 유럽에서 앤트워프, 베르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졌다. 이 요새는 전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중 세 차례의 포위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특히 본국 전선과 단절된 상태에서 173일간의 포위를 견뎌내며 긴 저항을 보여주었다. 이는 프랑스의 베르됭 요새와 러시아 제국의 오소비에츠 요새(203일)에 이어 가장 긴 포위 기간이었으나, 다른 두 요새와 달리 프셰미실 요새는 완전 포위 상태에서 이를 견뎌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2. 역사

18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제국의 동부 국경, 특히 갈리치아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요새 건설 위원회를 설립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물색했고, 프셰미실이 최적의 장소로 선정되었다. 이 지역이 선택된 주된 이유는 전략적 가치를 가진 부분에서 비롯되었다. 북쪽의 갈리치아에서 남쪽의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개들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또한 에서 크라쿠프를 거져 렘베르크로 이어지는 갈리치아 카를 루트비치 철도와, 프셰미실에서 부다페스트로 연결되는 제1헝가리-갈리치아 철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다. 이러한 철도망의 통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특히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적군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프셰미실을 둘러싼 구릉지대는 천연의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건설 계획은 1818년에 완성되었으나, 실제 건설은 한참 뒤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2등급 요새로 계획되었으나,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계획이 수정되었다. 프셰미실 크라쿠프의 요새들은 1등급으로 승격되었고, 건설 작업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셰미실 요새의 건설은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수천 명의 숙련공과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군대의 주둔 규모도 대폭 확대되었다. 고위급 장교들과 행정 관료들이 이주해왔고, 1910년에 이르러서는 군인만 8,524명에 달했다. 이러한 대규모 건설 사업과 군사 시설의 확장은 프셰미실의 인구 구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1860년 10,140명에 불과하던 도시 인구는 1910년까지 54,692명으로 급증했다. 종교별로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교도가 25,455명으로 가장 많았고, 유대인이 16,034명, 우크라이나계 그리스 가톨릭교도가 12,300명을 차지했다. 이는 프셰미실이 단순한 군사 요새를 넘어 다문화, 다종교 도시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1914년 완성된 프셰미실 요새는 정교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외곽 방어선은 총 둘레 45킬로미터에 달했으며, 15개의 주요 포병 요새(I번부터 XV번까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주요 요새를 보완하기 위해 27개의 보병용 소형 요새와 25개의 독립 중화기 진지가 배치되었다. 방어 체계는 6개의 독립적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구역은 자체 지휘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보급소와 병원을 운영했다. 이러한 분권화된 체계는 어느 한 구역이 적의 공격을 받더라도 다른 구역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내부 방어선은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구시가지 방벽을 따라 현대식 콘크리트 요새들로 보강되었다. 특히 즈네시니아 언덕에 건설된 대규모 성채는 내부 방어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던 무선 통신 시설을 갖추었고, 모든 요새는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어 빠른 병력 이동과 보급이 가능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1914년 5월, 헤르만 쿠스마네크 장군이 요새의 군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 프셰미실 요새에는 25,000명의 장교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포병 부대는 1,05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776명이 요새 진지에 고정 배치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4문의 305mm 박격포로, 각각 630kg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전쟁이 임박했을 때는 프셰미실 요새의 전투 준비 태세가 계획된 수준의 75% 정도에 그쳤었다. 총 41개의 요새 중 단 12개만이 "모든 종류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되었고, 나머지는 개별 포탄의 직접 타격만을 견딜 수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 19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약 27,000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긴급 보강 공사를 실시했다.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요새의 방어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714문의 야포, 52문의 곡사포, 95문의 박격포, 72정의 기관총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병력도 증강되어 최종적으로는 131,000명의 군인과 21,000마리의 말이 요새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선이 점차 프셰미실에 가까워지자, 사령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요새 주변 15km 반경 내의 모든 민간 건물과 과수원, 숲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이는 포병대가 주변 지역을 완벽하게 관측하고 사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프셰미실 요새는 제1차 세계 대전 세 차례의 대규모 포위전을 겪었다. 각각의 포위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투였다. 첫 번째 포위전(1914년 9월 17일-10월 10일)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승리했고, 두 번째 포위전(1914년 11월 5일-1915년 3월 22일)에서는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마지막 세 번째 포위전(1915년 5월 18일-6월 3일)에서는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요새를 탈환했다.

2.2. 이후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중 프셰미실 요새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구사틴 부대에 소속된 18명의 우크라이나 갈리치아 군(UHA) 병사들이 전사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포위를 받았다. 1940년에는 소련이 몰로토프 선의 일부로 현대식 벙커들을 건설했으나, 이는 원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요새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1968년 폴란드 정부는 파괴되고 황폐화된 요새들을 보호 군사건축물로 지정했다. 1997년에는 폴란드 군사건축물 보호·보존 국가 프로그램에 포함되었으며, 2018년 12월 10일에는 폴란드 역사기념물로 정식 지정되었다. 현재 요새 단지를 따라 검은색으로 표시된 도보 관광로와 녹색으로 표시된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자전거 도로는 북부와 남부 순환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길이는 87킬로미터에 달한다.

3. 문화적 유산

프셰미실 요새는 여러 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군가 "갈리치아의 들판"이 요새 포위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2014년에는 X D.O.K 프셰미실 역사재현협회가 "프셰미실 요새 탈환" 행사를 개최했다. 영국 역사가 알렉산더 왓슨의 저서 "요새: 프셰미실 포위전과 유럽 피로 물든 땅의 기원"은 더 타임스지로부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에는 XIII 요새에 얽힌 전설을 소재로 한 영화 "Fort 13"이 제작되었다. 프셰미실 요새는 현재도 제1차 세계 대전의 중요한 유적지이자 폴란드의 군사 건축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4. 여담

프셰미실 슈바이크 친구회는 정기적으로 "요새 수비대" 메달을 수여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이 메달은 도보나 자전거로 여러 요새를 답사한 이들에게 주어진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는 우크라이나 포포비치 마을 근처의 요새에서 Fort.Missia라는 예술 축제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