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 Hermann Kusmanek von Burgneustäd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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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ermann Kusmanek 헤르만 쿠스마네크 ↓ Hermann Kusmanek von Burgneustädten 헤르만 쿠스마네크 폰 부르크노이슈테텐[1] 백작[2] |
출생 |
1860년
9월 16일 오스트리아 제국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헤르만슈타트 |
사망 |
1934년
8월 7일(향년 73세) 오스트리아 연방국 빈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86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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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프셰미실 요새의 사령관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셰미실 공방전으로 유명하며, "프셰미실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2. 생애
헤르만 쿠스마네크는 현재 루마니아 헤르만슈타트에서 경찰관 요제프 쿠스마네크(Josef Kusmanek)와 율리아나 비너(Juliana Wiehner)의 아들로 태어났다. 메렌의 바이스키르헨(Weißkirchen)[3]의 군사학교를 거쳐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882년부터 2년동안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다.1888년부터 그라츠의 제3군단 참모대위로 근무했으며, 1889년부터 1893년까지 빈 전쟁성(Kriegsministerium)에서 복무했다. 이후 에를라우의 알브레히트 폰 뷔르템베르크 제73보병연대(K.u.k. Infanterieregiment „Albrecht von Württemberg" Nr. 73)에서 중대장으로 2년간 복무했다. 1894년부터 소령, 중령으로 차례대로 진급, 1897년까지는 참모본부 국토기술국과 군사기록보관소 군사역사과에서 근무했다. 1895년에는 비스트리차(Bistritz)의 제63보병연대로 복귀했다가, 1899년 다시 전쟁성으로 돌아와 1903년부터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의전실장을 역임했다. 1908년 10월 라브(Raab)의 제65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10년 4월에는 인스브루크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11년 1월에는 라이바흐의 제28보병사단장이 되었다. 1913년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작위를 받아 "폰 부르크노이슈테텐"이라는 귀족 칭호를 얻었다.
2.1. 제1차 세계 대전과 프셰미실 공방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쿠스마네크는 프셰미실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요새에는 아르파드 터마시 폰 포거러시(Árpád Tamásy von Fogaras) 사단장이 지휘하는 제23국토방위보병사단과 4개의 후비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요새에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38개의 요새 중 12개만이 현대화되어 있었고, 988문의 포 중 28문만이 당시 기술 수준에 부합했다. 쿠스마네크는 요새의 방어구역 간격이 너무 넓고, 특히 제8방어구역의 요새화가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했다.이후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프셰미실은 두 차례의 포위를 겪었다. 첫 번째 포위(1914년 9월 16일-10월 9일)는 오스트리아군의 구원으로 해제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포위(1914년 11월 5일-1915년 3월 22일)는 더욱 힘겨웠다. 콘라트는 프셰미실 요새 구원을 위해 카르파티아 전투를 계획했으나, 원하던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고, 그동안에 보급품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에서 쿠스마네크가 1915년 3월 19일에 마지막 돌파 시도를 감행했으나 큰 손실만 입고 실패했다. 결국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쿠스마네크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허가를 받아 명예로운 항복을 결정했다. 모든 무기와 요새 시설, 전쟁 물자를 파괴한 후 3월 22일 러시아군의 입성을 허용했고, 2,500명의 장교와 117,0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러시아 포로가 되었다. 포로 기간 동안 그는 니즈니노브고로드와 키예프에서 생활했다.
1917년 3월 1일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포로 기간 중의 공적을 인정받아 이 진급의 효력이 1917년 5월 15일로 소급되었고, 포로 석방 후 귀환하여 카를 1세로부터 철관왕관(Orden der Eisernen Krone) 1등급을 수여받았다. 1934년 8월 7일 빈에서 사망했으며, 빈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에 안장되었다. 현재 빈 군사역사박물관에는 그의 상급대장 계급 군복, 장교모, 출입용 단검,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십자장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