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83년부터 1887년까지 모교인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술학 교수로 재직했다. 1887년
소령, 1890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892년에는
대령이 되어 제33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895년부터는 제71보병연대장을 지냈고, 1898년
소장 진급과 함께 제56보병여단장이 되었다. 1903년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08년에는
보병대장이 되어
테메시바르의 제7군단장을 역임했다. 1910년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감찰관으로 복무했다.
1914년 전쟁 발발과 함께
보병대장으로서 세르비아 전선의 제5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보병대장의 제6군과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8월 11일 밤 드리나 강을 건너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며, 자다르 강을 따라 전진하여 세르비아 제2군을 포위하려 했다. 당초
뵘에르몰리의 제2군이 모라바 방면으로 진격하여 3면 공격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의 위협으로 인해 제2군이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산악 지형에서의 통신 및 기반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세르비아군의 저항에 직면했다. 8월 16일 제13군단이 크루파니를 점령했으나, 체르 능선 전투에서 세르비아 제2군의 반격을 받아 8월 23일까지 드리나 강 너머로 후퇴했다. 11월 재공격에서는 초기에 성공을 거두어 12월 1일
베오그라드를 점령했으나, 곧이어 콜루바라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과정에서 8,000명 전사, 30,000명 이상 부상, 4,000명 포로 등 총 50,000명의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고 전력이 약 40%까지 감소했다. 이 패배로 인해 프랑크는
포티오레크와 함께 해임되었으며, 1915년 1월 1일부로 정식 퇴역했다.
리보리우스 폰 프랑크는 전형적인 참모형 장교였다. 전술 교관과 참모로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나, 실전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세르비아 전선에서의 작전은 불충분한 병참 지원과 열악한 지형 조건, 그리고 제2군의 갈리치아 이동으로 인한 좌익 지원 부재 등 여러 불리한 여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더욱이 진격 과정에서 약탈이 처벌되지 않았고, 후퇴 시에는 마을 방화가 의무화되는 등 민간인들에 대한 만행이 자행되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프랑크'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