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1872년부터 1876년까지
빈에 위치한 오스트리아 군사학교 공병대(Genietruppe) 과정을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여러 공병대 장교직을 역임했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점령 과정에서 도로 건설과 교량 건설에 관여했다. 페테르바라딘(Peterwaradein) 요새와 코모른(Komorn ) 요새 지휘관을 역임한 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크라쿠프 요새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17년 4월 23일 점령지에서 충분한 규모의
폴란드인 병력을 모집하는 데 실패했고, 제국의회의 폴란드 의원단이
폴란드계 총독 임명을 요구했으며,
독일 제국군 사령부와 갈등을 빚었다는 이유로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전쟁이 종전된 후 연금 생활을 하며 군사 관련 서적을 집필했고, 오스트리아 군인 미망인 및 고아 기금 재단 총재와
오이겐 대공 기술 사관학교 동문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빈 히칭 묘지에 명예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카를 쿠크는 오스트리아 군 내 여러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은 능력 있는 군인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크라쿠프 요새 방어전에서의 활약상이 두드러져
포병대장 계급까지 올랐다. 또한 점령지 폴란드에서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대변하며 독일 제국군 사령부와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과 견제를 병행했다. 다만
폴란드인 징집에 실패하고
독일 군부와 마찰을 빚은 것이 화근이 되어
총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전쟁 후에는 군 관련 연금 재단과 학교 운영에 관여하며 은퇴 후의 삶을 의미 있게 보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