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상급대장 카를 크르지테크 Karl Křite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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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Karl Křitek 카를 크르지테크[1] |
출생 | 1861년 10월 24일 |
오스트리아 제국 달마티아 왕국 스플리트 | |
사망 | 1928년 9월 3일 (향년 66세) |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1879년 ~ 1918년)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상급대장 (k.u.k. Generaloberst)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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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자 제국상급대장. 체코계 장교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2. 생애
1861년 10월 24일,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였던 스플리트에서 군사 감독관인 요한 빅토어 크르지테크(Johann Victor Křitek, 1830–1904)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에서 김나지움을 다닌 후 장크트푈텐의 군사학교와 메렌의 바이스키르헨(Weißkirchen)[2]에 있는 명문 고등군사학교를 졸업했다. 1876년부터 1879년까지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1879년 8월 18일 제52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졸업 후 중위 계급으로 일반참모에 배속되었다. 이후 제40보병여단과 반야루카의 제13보병사단에서 참모 임무를 수행했다. 1888년 5월 1일 대위로 진급했으며, 1891년까지 헤르만슈타트의 제12군단 참모부에서 근무했다. 1891년 4월부터 1893년 5월까지는 일반참모부 지형기술국에서 근무했고, 이 기간 중 제49보병연대에서 단기 복무도 했다. 1894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인스브루크의 제8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897년 5월 1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는 제85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900년 11월 1일 대령 진급과 함께 일반참모단 지형기술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11월 1일 소장 진급 후 쾨니히그래츠의 제20보병여단장이 되었고, 1910년 1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하여 비엔나의 제49보병사단장을 맡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때까지 지휘했다.2.1. 제1차 세계 대전
크르지테크는 전쟁 초기에 제26보병사단을 이끌고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1914년 8월 말 자모시치 방면 공세 중 코마루프 전투에 참전하여 러시아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크르지테크는 9월 초 카를 후인 기병대장의 후임으로 제17군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라바-루스카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1914년 10월 17일 크르지테크는 보병대장으로 진급했고, 제4군 예하에서 1914년 12월 초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 시 북측방을 담당하여 러시아군의 반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3군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카르파티아산맥에서의 동계전투에 참전했으며, 두클라 고개 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1915년 5월 고를리체-타르누프 전투에서의 돌파 이후 다시 제4군 예하에서 크라시니크와 루블린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르 강에서의 1915년 가을 전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6년에는 남티롤로 이동하여 쾨베시의 제3군 예하에서 트렌티노 공세에 참가했다. 일부 성공을 거두었으나 평야 지대로의 돌파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같은 해 가을 다시 보로예비치의 지휘 하에서 제6차, 제9차 이손초 전투에 참전했다. 이 시기에 보로예비치는 크르지테크에 대한 평가를 바꾸어[3] 상급 지휘관직 적격이라고 판단했고, 콘라트 장군도 이에 동의했다. 1917년 5월 1일 크르지테크는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며, 7월 12일 테르스찬스키의 후임으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빈클러 군단의 즈보루프 돌파 작전 성공 이후 독일 제국군 남부군과 함께 러시아군을 동쪽으로 격퇴하여 8월 초까지 부코비나를 수복했다. 1918년 1월 제7군 사령관이 되어 우크라이나 진격작전을 지휘했으나, 4월 15일 해임되어 예비역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황제의 군대에서의 그의 군사 경력은 끝이 났다.
2.2. 말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후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예비역 육군 대장 계급을 수여했다. 1928년 10월 3일 빈에서 사망했으며, 오버 장크트 파이터 묘지(Ober Sankt Veiter Friedhof, 구역 RG, 번호 80)의 가족 묘역[4]에 안장되었다.3. 평가
크르지테크는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반참모에서 오랜 기간 복무하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장교의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관료적이고 완고한 성격은 전쟁 중 지휘관으로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상관과 부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보로예비치는 그런 크르지테크를 두고 상급 지휘관직에 부적합하다고 평가했지만, 1916년 크르지테크가 거둔 이손초 전선에서의 활약을 통해 보로예비치의 평가는 180도 바뀌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참모총장 콘라트 역시 크르지테크의 지휘 능력을 인정했다. 이는 그가 이후 제3군, 제7군 사령관으로 임명되는 발판이 되었다.다만 전쟁 중 그의 지휘 결과는 성공과 실패가 교차했다. 리마노바-와파누프 전투에서의 방어전과 1917년 부코비나 수복 작전 등에서는 성공적인 지휘력을 보여주었지만, 1914년 라바-루스카 전투에서는 심각한 패배를 겪기도 하였다. 그렇긴 해도, 제국 붕괴 이후 탄생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가 그에게 예비역 육군 대장 계급을 수여한 것은 체코계 장교로서 그의 군사적 공적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