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22:40

미오성


1. 개요2. 삼국지연의3. 관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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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동한) 말기 동탁이 강제로 장안으로 천도한 뒤 장안 서쪽 250리 밖에 지었다는 요새. 현 산시성 메이현 동북쪽에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정식 이름은 만세오(萬歲塢)인데, 미(郿) 땅에 지은 오(塢)라 사람들이 미오(郿塢)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대에는 미오성(郿塢城)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오'와 '성'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중복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오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거점 요새를 의미한다.' 청해진성'에 가까운 중복어 형태가 되기 때문인데, 진과 달리 오는 현대 한국인한테 영 익숙하지 않은 용어란 원인이 큰 듯.

명칭에 대해서 부가 설명을 하자면, 원래 郿縣이었는데 1964년에 眉縣( 간화자: 眉县)으로 변경했다. 단 郿라는 글자를 간화자에서 폐지하여 다른 글자에 병합한 건 아니라서[1] 옛 지명을 표기할 때에는 간화자에서도 郿 자를 쓴다. 메이 현의 경우 자주 안 쓰고 획이 많은 郿 자를 자주 쓰는 획이 적은 眉 자를 써서 지명을 바꾼 케이스다. 현대 중국의 지명들 중에서는 간화자 제정 당시 글자를 병합하면서 자동으로 한자가 바뀐 예도 있지만(예: 선양), 메이 현처럼 지명 개정을 통해 사실상 한자 수 제한에 가까운 효과를 노린 케이스들도 여럿 있다. 현대 중국의 지명들 중에 이런 경우들이 꽤 있다.[2]

이곳이 동탁이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큰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3]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고 전해진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 웅거하고, 일이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事成, 雄據天下; 不成, 守此足以畢老)"[4]고 말했다. 이 시기 동한의 원래 수도였던 낙양이 완전히 쑥대밭이 됐다고 한다. 동탁이 망한 뒤에는 이 미오가 파괴됐다고 한다.

단, 이 미오 관련 정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 건설공사가 대략 2~3년이 소요되며, 조선시대 후기 정약용 거중기 등 최신 장비를 동원하여 쌓은 수원 화성의 경우 2년 8개월의 공정 끝에 완공되었는데,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피폐한 장안 일대의 여력으로는 2, 3년에 불과한 동탁의 치세 동안 그런 대규모 역사를 일으키거나,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탁이 실제로 미오를 지었어도 당시 사람들이 동탁을 너무도 미워한 나머지 그의 죄를 부풀렸던 과장이거나 이미 존재한 요새를 추가적으로 증축 보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동탁과 비슷한 히키코모리 짓을 했던 공손찬 역경루를 고려하면, 가능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공손찬의 역경루는 10중 참호에, 5-6장의 성벽, 그리고 10장이나 되는 본인 거주용을 포함해서 수십개의 망루를 세우고, 300만 석을 쌓았다는데 동탁의 위세를 고려하면 이게 불가능하다고 하기 어렵다.

2. 삼국지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25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지은거라고 묘사된다.

3. 관련글


[1] 간화자에서는 글자들을 한데 합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穀을 谷으로 병합한다든지. [2] 심지어 한국에도 이런 경우가 있다. 2014년 파주시 문산(汶山)읍이 문산(文山)읍으로 바뀐 사례 등이다. [3] 연의에서는 판본마다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10년 ~ 20년 사이 정도. [4] 후한서(後漢書)》 〈동탁전(董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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