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8:22:29

스탈린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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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선 배치도 출처

1. 개요2. 명칭3. 배경4. 건설5. 규모6. 약화7. 실전8. 말로

1. 개요

스탈린 선은 소련이 1928년부터 1939년까지 서부 국경선에 설치한 대규모 요새화 방어선이다.

2. 명칭

러시아어 Линия Сталина
영어 Stalin Line
독일어 Stalin-Linie
폴란드어 Linia Stalina

스탈린 선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었으며 보편적인 별명도 아니었다.

스탈린 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라트비아에서 발행된 러시아어 신문인 Segodnya가 1936년 12월에 올린 기사에서 시작되었으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영국 신문인 데일리 익스프레스 (Daily Express)에서 해당 기사를 인용하면서 스탈린 선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독소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스탈린 선이라는 이름은 서방 연합국이나 나치 독일에서나 주로 사용되는 이름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한참이 지난 후에나 러시아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3. 배경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국방에 고심하던 시기였고, 참호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나라들이 단일 요새나 기지보다는 방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방어선의 필요성이 늘어난 이유는 1차대전의 개전 원인에서 보듯이 총동원령을 선포하는 것 자체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로 간주된다는 이유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동원령을 가동해서 대량의 병력을 미리 준비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기동전의 개념이 정립 및 배포되지 않은 상황인지라 국경 지대에 튼튼한 방어선을 깔아놓고 상비군으로 수비하도록 해서 기습적인 개전에 대비하면서 동시에 방어선이 버티고 있을 때 동원령을 선포하여 충분한 예비군을 소집하여 전쟁에 대응한다는 방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동원령을 선제적으로 선포해서 불필요한 전쟁상황을 만들지 않고 전쟁이 터진 후에도 충분한 대비가 가능하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제3공화국 마지노선, 나치 독일 지크프리트 선, 핀란드 만네르헤임선, 그리스 왕국 메탁사스선 등이 만들어졌다. 소련은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겪은 후, 서쪽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1928년부터 스탈린 선의 건축을 시작한다.

4. 건설

스탈린 선의 건설은 크게 1928년부터 1938년까지의 1차 건설과 1938년부터 1939년까지의 2차 건설로 나누어진다.

1차 건설은 13개의 요새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건설되었다. 요새선의 전체 길이는 1850km 였으며 포위 공격에 대비하는 내부 구간도 존재하므로 요새선이 실제로 방호하는 구간은 1200km 수준이다. 13개의 요새 지역은 공식적으로는 숫자 명칭이 붙고 비공식적으로는 요새 지역이 건설된 지명을 따라서 카렐리안 (Karelian) , 킨기세프 (Kingisepp), 프스코프 (Pskov), 폴로츠크 (Polotsk), 민스크 (Minsk), 모지르 (Mozyr), 코로스텐 (Korosten), 키예프 (Kiev), 노보그라드-볼린스키 (Novograd-Volynsky), 레티체프스키 (Letichevsky), 모겔레프-포돌스키 (Mogilev-Podolsky), 리브리차 (Rybnitsa), 티라스폴 (Tiraspol) 요새 지역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요새 지역들은 국경선에서 50km ~ 150km 후방에 위치했고 요새 지역 자체는 각종 참호와 장애물로 구성된 최대 12km 종심을 가지는 전방 방어선과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토치카와 벙커등으로 구성된 요새 주요 건축물로 구성된 최대 4km 종심을 가지는 최종 방어선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요새 지역들은 비공식적 명칭이 붙은 주요 도시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건설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포위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키예프처럼 상당히 후방에 있는 도시에도 중요도를 감안해서 건설되었다. 그래서 다른 요새 방어선처럼 일직선으로 만들어져서 적군을 방파제처럼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적의 공격으로부터 국경선의 주요 지점과 약간 후방의 주요 도시를 보호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요새 지역간의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 많고 중간에 요새 지역이 없는 구간이 매우 길었기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가 1937년 6월에 대숙청으로 사형당하기 전에 제출한 최후의 보고서에서 요새 지역을 추가해서 기존의 요새 지역 사이의 공간을 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을 고안해낸 군인이므로 기존의 스탈린 선이 가진 약점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깨달은 것이다.

비록 미하일 투하쳅스키 원수는 숙청당했으나 스탈린 선이 방호하지 못하는 구역이 많다는 것 자체는 받아들여졌기에 2차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오스트로프스키 (Ostrovsky), 세베시 (Sebezhsky), 슬루츠크 (Slutsk), 세페토프스키 (Shepetovsky), 이자슬라프스키 (Izyaslavsky), 스타로-콘스탄티노프스키 (Staro-Konstantinovsky), 오스트로폴스키 (Ostropolsky), 카메네츠-포돌스키 (Kamenets-Podolsky) 지역에 8개의 요새 지역이 추가되었다. 해당 요새 지역도 1차 건설때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는 숫자 명칭이 붙고 비공식적으로 요새 지역이 건설된 지명의 명칭을 붙였다.

2차 건설은 1차 건설시에 만들어진 요새 지역 사이의 틈을 메꾸고 1차 건설시에 만들어진 요새 지역과 협동해서 방어를 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독소 불가침조약 폴란드 침공 발트 3국 점령으로 소련의 서쪽 국경이 서쪽 방면으로 크게 전진하게 되자 스탈린 선의 건설은 중단되었으며 2차 건설 지역도 상당수가 미완성된 채 남겨졌고 몰로토프 선 공사에 무기, 장비, 시설을 빼앗기게 되었기에 반쯤 방치상태로 폐허화되기 시작했다.

5. 규모

스탈린 선의 주요 경유지는 핀란드와의 국경인 카렐리아 지협부터 발트 3국을 경유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 국경선에서 가장 중점적인 방어를 한 후 루마니아 왕국 국경선에서 조밀한 방어선을 만들면서 종료된다. 현재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몰도바 지역을 관통한다.

위의 지도에서 나오듯이 발트해에서 시작해서 흑해에서 종료되는 초장거리 방어선이며 방어선의 길이만 따져봐도 1850km의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한다. 이게 얼마나 긴 거리인가 하면 서울에서 부산이 350km 정도며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직선거리가 1600km를 조금 넘으니 매우 긴 방어선이다.

1차 건설은 완료되었으나 2차 건설은 미완성된 상태였으나 약 7000여개의 콘크리트 방어물에 병력, 기관총, 화포 등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방어선 자체가 길기 때문에 마지노선이 1km 당 벙커와 포곽을 합쳐서 7.7개의 구조물을 배치할 수 있는데 반해 스탈린 선은 1km 당 벙커와 포곽을 합쳐서 0.7개에서 1.4개의 구조물만 배치 가능해서 요새 방어선 치고는 상당히 약함을 알 수 있다. 구조물의 방어력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건설된 구조물의 경우에는 나치 독일군의 15 cm sFH 18같은 15cm 구경의 중포 포격을 버틸 수 없을 수준으로 약했다.

무장도 신통치가 않았다. 야포의 주력은 76mm 구경의 1940년형 포곽설치식 L-17이 주력인데 해당 화포는 T-34-76의 1940년형이 사용하는 주포인 L-11 주포를 포곽에 설치한 것으로 포신 길이가 30.5구경장으로 짧고 철갑탄을 사용해도 500m 거리에서 90도 각도로 정타를 때려도 관통력이 55mm로 낮기 때문에 이미 76mm F-34로 교체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고 있던 실정이었다.

대전차포도 45mm 구경이라서 개전 당시에는 종류를 막론하고 관통력이 만족스럽지 않은 수준이고 구경이 작아서 보병포로 쓰기에도 곤란했으며 53-K같은 구식 기종만 운영가능해서 문제가 더 커졌다.

여기에 몰로토프 선 공사로 인해 기존에 설치된 시설들을 몰로토프 선이 사용하기 위해 뜯겨나가는 바람에 실제로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스탈린 선을 점령한 독일 국방군의 보고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에 붙어 있어서 점령하지 못한 카렐리안 (Karelian) 요새 지역을 제외하면 76mm 구경의 야포 포대와 벙커 142개소, 45mm 구경의 대전차포 포대와 벙커 248개소, 기관총용 포대와 벙커 2572개소가 존재한다고 보고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이 중에서 민스크 (Minsk) 요새 지역이 가장 잘 만들어져서 76mm 구경의 야포 포대와 벙커 33개소, 45mm 구경의 대전차포 포대와 벙커 114개소, 기관총용 포대와 벙커 401개소를 보유했고 키예프 (Kiev) 요새 지역도 만만치 않았지만 폴로츠크 (Polotsk) 요새 지역처럼 76mm 야포가 전혀 배치되지 않거나 모지르 (Mozyr), 코로스텐 (Korosten), 레티체프스키 (Letichevsky), 리브리차 (Rybnitsa) 요새 지역처럼 45mm 대전차포가 전혀 배치되지 않은 요새 지역이 존재하는 등 전반적으로 스탈린 선은 반쯤 망가진 방어선이 되고 말았다.

6. 약화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독일 폴란드 침공에 따라 국경선이 서쪽으로 옮겨가자 스탈린은 일부 장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탈린 선을 버리고 더 서쪽에 새로운 몰로토프 선을 짓도록 한다.

이렇게 일이 진행된 가장 큰 이유는 기존의 소련 국경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 내전 및 그 이후의 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 스탈린을 포함해서 소련의 국민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기회만 되면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국경선으로 돌아가려고 했고 그렇게 일이 돌아갈 경우에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반드시 지켜야 하므로 이제는 후방의 예비 방어선이 될 스탈린 선을 굳이 신경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당시의 소련군 독트린과 전략전술상 2개의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나 스탈린 선이 지형지물적인 방어요소가 부족하고 너무 길다는 것도 있었지만 대외공개용이나 면피용 수준의 사소한 이유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국력이 부족하고 시간이 없으며 전차등 다른 무기와 장비도 생산해야 하는 상황 때문에 스탈린 선에서 시설과 장비를 분리해서 몰로토프 선을 건설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데다가 시간의 제약까지 겹쳤다.

결국 몰로토프 선은 완성이 덜 되고, 스탈린 선은 여기저기 뜯기고 버려져 방치 된 채로 소련은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의 침공을 맞게되어 서부지역의 방어에 실패하고 길고 참혹했던 독소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7. 실전

독소전쟁 초반에 소련군이 붕괴 수준으로 무너졌지만 스탈린 선중 일부 구간은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핀란드의 만네르헤임선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한 카렐리안 요새지역은 1941년 6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어하며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한 축을 담당하고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다.

민스크 요새 지역은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를 통해 1941년 6월 26일부터 6월 29일까지 짧은 기간동안 전투를 했지만 가장 요새화가 잘 된 요새 지역답게 나치 독일군의 전차 210대를 격파하여 상당한 수준의 전차 손실을 입혔다. 이런 성과가 나온 이유는 벙커가 잘 위장되어 있고 통로를 제대로 제압 가능한 곳에 건설된 데다가 벙커에 포곽이 3개나 달려 있고 종종 포곽들이 내부 격벽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모든 포곽을 박살내야 하는 상황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전까지 나치 독일군의 전차가 쓰는 벙커 공격방식인 포곽의 포방패 직격탄을 먹여서 포방패와 벙커 구조물간의 연결을 파괴한 후 추가타를 날려서 벙커를 박살내는 것이 어려워지고 시간이 걸리며 벙커의 반격까지 당하게 되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키예프 요새 지역은 1941년 7월 초반부터 1941년 9월 19일까지 키예프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병력도 밀집했기에 정면돌파는 손실이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은 중부집단군의 전차 전력을 동원해서 남부집단군과 함께 제1차 키예프 전투로 후방을 돌파해서 키예프 돌출부를 포위해서 섬멸하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 외에도 몰도바 획득이 너무 늦어서 방어선 이동이나 건설을 할 여유가 없었던 루마니아 지역의 남부 방어선은 그럭저럭 능력을 발휘하였고 나치 독일군이 스탈린 선에 근접할 때 소련군의 1차 반격을 시도하는 거점이 되는 등의 소소한 성과도 존재했다.

소련군의 끈질긴 저항도 스탈린 선의 공적에 한 몫을 했다. 말 그대로 최후의 1인까지 싸우는 경우도 많았고 전투방식도 파괴된 부위를 봉쇄하고 다른 벙커로 이동하거나 벙커 내부의 인원이 전멸한 것처럼 위장했다가 나치 독일군이 근접하면 갑자기 영거리 사격을 날려서 치명타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치 독일군은 벙커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 전투공병을 동원해서 폭발물 화염방사기를 동원하고 화학수류탄까지 벙커 내부에 집어넣는 수고를 해야 했다.

8. 말로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한 후 후방지역이 된 스탈린 선은 그냥 방치되었고 폐허로 전락했다. 쓸만한 장비와 시설은 뜯겨져나갔고 콘크리트 덩어리만 남았으며 지하시설은 침수되거나 매몰되었다.

그래도 키예프 요새 지역같은 경우에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반에 벌어진 키이우 전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수도인 키이우를 러시아 연방군에게서 방어할 때 부서진 요새 폐허가 일종의 은엄폐를 제공하는 등 약간의 도움을 주기도 했다.

러시아와 벨로루시에 남아 있는 스탈린 선의 구간 중 일부는 전투 기념비가 만들어지고 박물관으로 개조 및 수리되어 관광객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