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23:04:43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

1. 개요2. 상세3. 공식 채택4. 상황

1. 개요

종심돌파이론(Теория глубокой операции/Deep Battle Theory / Deep operation)은 소련군의 교리 중 하나다.

소련 붉은 군대의 종심(縱深)돌파 교리는 러시아 제국군이 겪은 좌절과 군사력 쇠퇴 등으로 인하여 탄생했다. 러시아 제국군은 크림 전쟁에서의 패전과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한 패전,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 연전연패 그리고 정전 협정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의 몇몇 머리가 좋은 고위 지휘관들은 러시아의 군사력이 쇠퇴하는 것을 막고 제도와 전술을 새롭게 정립 하려고 시도하였다.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는 당시 혁신적 교리를 고안해낸 붉은 군대의 장교들로, 투하쳅스키는 스탈린 대숙청, 트리안다필로프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마르크스주의 군사학으로 분류된다. 흔하지 않은 분야라서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도 군사학에 관심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드물다.

2. 상세

소련군 장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의 경험을 통해 '1회의 전략적 승리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선군(Front) 수준의 긴밀하게 조직된 연속적 작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파악했다. 그리하여 트리안다필로프의 충격군 개념과 투하쳅스키의 동시성[1] 개념을 합쳐 종심돌파이론을 만들어냈다.

소련의 1936년판 야전요무령(野戰要務令, Ustav)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적 방어 종심에 대한 항공 및 포병의 타격과, 전차 전력의 광범위한 사용과 결합된 공격부대의 적의 전술적 방어 지대 돌파를 통해 적 방어를 동시에 강습하며, 적에 대한 완전한 포위와 격멸을 목적으로 전술적 성공을 작전술 성공으로 맹렬하게 발전시킨다. 이는 보병과 모든 병과의 상호 지원 및 협동을 통해 달성된다."

종심돌파이론은 전술- 작전술- 전략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론으로 여러 상황을 제시한다.

첫 번째 단기 상황으로 적의 중대한 예비대가 없는 전선에서 공군, 공수부대, 포병, 보병과 보병지원전차(NPP,Neposredstvennoi Podderzhki Pekhoty)의 개념으로 BT-7같은 중전차등을 투여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다.

두 번째, 종심 상황에서 침투 제파를 투입시켜 적의 보급기지와 사령부를 타격한다. 이러한 돌파를 통해 전 정면에서 적과 충돌하는 횡적 동시성과 종심상의 적과 접촉하는 돌파 부대, 따라들어오는 제파 부대들을 통해 종적 동시성을 확보한다. 이 상황에서 차량화 부대와 같이 기동력을 가진을 부대를 이용해 적의 후방 예비대를 묶어둔다.

마지막 종합 상황에서 침투 제파가 다른 이웃 제파와 공조하여 다양한 방향에서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적의 대규모 집단을 파괴시킨다.

참고 블로그

3. 공식 채택

1933년 붉은 군대는 종심돌파이론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종심 돌파 공세를 시작하기 위한 계획 단계는 주요 전략적 목표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되며 그것으로부터 전술이 정의된다.

종심 돌파가 공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방어 준비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를 정해 전술 구역들을 요새화하고 포병 보병을 배치해둔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야 한다. 일선 방어선 너머에는 광범위 하게 지뢰를 매설 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적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추진력을 잃어 결국에는 아군에게 반격을 당하고 패하게 될 것이다.

4. 상황

종심돌파이론은 1930년대의 소련군에게 적합한 것처럼 보였는데 당시 붉은 군대는 거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병사의 대부분은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들은 훈련이 부족한 대규모 병력과 러시아의 넓은 국토를 이용해서 길게 뻗은 전선을 따라 종심돌파이론을 실험,계획 그리고 작전을 실행했을 것이다. 여러 지점을 동시에 돌파할 경우 적이 후방으로 진격하려는 소련군에게 격파당하였기 때문에 종심이론은 더욱 쓸모가 있었다.

종심돌파이론의 장점은 대규모 병력이 넓은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하면서 여러 곳에 집중적으로 공격하거나 한 곳에 집중을 하면서도 다른 전선에서도 지체없이 공세를 지속하여 전선의 적군의 발목을 묶어 적이 아군의 돌파 지역에 제대로 된 지원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돌파가 성공하면 연쇄적으로 다른 전선의 아군에 힘을 가세하여 돌출부 없이 안정적인 연쇄 돌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종심 돌파 이론의 단점은 적 병력보다 아군 병력이 우월해야 한다는 점이다.[2] 회전문의 효과를 따르듯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게 되면 다른 전선의 아군의 전력이 그만큼 약화되는데 적군이 이 약화된 전선을 공격하게 되면서 회전문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교란과 적군 발목 묶기, 순식간에 적 후방을 향해 치고들어가는 전격전으로 회전문 효과가 일어나기 전 신속하게 전쟁을 끝냈지만[3]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전격전의 이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소련군의 병력이 독일군보다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적 병력보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종심 돌파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면 돌파는 어찌저찌 성공했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적군이 우세한 병력을 전선에 밀어붙여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돌파를 담당했던 아군은 그대로 포위될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종심돌파작전과 비슷하게 전선에서 소련군의 발목을 묶고 목표 지역을 향해 진격했지만 전술한 대로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1941년 정작 독일과 개전하자마자 대숙청 등으로 인해 기량이 떨어질 대로 떨어질 소련군들은 이 이론을 통한 제파 전술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결국 전초에 공식추산 250만, 비공식 추산 400만이라는 역대급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기계화보병, 정예병력 중심의 1파를 구성하지 못하고 알보병을 축차투입하게 된 것이 컸다.

그나마 1944년부터 소련의 생산력이 독일의 역량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소련군들이 4년간의 실전으로 독일군 못지않은 정예군으로 거듭나자 종심돌파이론은 부활했는데 이는 쿠르스크 전투 이후 수차례의 소련의 대규모 공세로 나타난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는 유례없는 진격 속도를 보였으며 당시 일본군의 마지막 육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관동군을 일주일 만에 제압해 버린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2022년-2023년 우크라이나 역공세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전선에서 펼친 대규모 제파 전술이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을 활용했다는 평이 있다. 다만 이쪽은 방어선을 돌파한 게 아니라 너무 넓은 전선에서 병력이 너무 적은 상황에 돌려막기(...)까지 한 악조건이 합쳐져 몇몇 지역에서는 방어선이 아예 없었고 그 곳을 프랑스 침공처럼 넘어간 것이다.[4] 그나마 방어선이 있는 지역도 빈틈을 노려 측후면에서 경차량과 장갑차들을 이용해 빠르게 파고들어오자 결국 철수할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우크라이나군은 상당한 성과를 보았다. 이렇듯 우크라이나군은 하르키우와 도네츠크 전선에서 성공을 거두지만 그나마 종심돌파가 제대로 실현된 것이 리만 전투로, 후방을 찔러서 보급선을 잘라버린 후 리만을 먹었다.[5]


[1] 최대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지역에서의 적과의 접촉을 필요로 한다는 뜻 [2] 여기서 병력의 우세는 단지 전력의 차이 뿐만이 아닌 용병술, 장비 등을 말한다. [3] 전격전을 처음 겪었을 프랑스군도 후방이 약할 것을 파악하고 돌파 병력의 측면을 공격해 중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돌파를 지체시키려고 했었다. 실제로 후방의 방어 부대를 뚫어내기도 했으나 지원 병력에 바로 막혀 아무 타격도 입히지 못 했다. [4] 하지만 공세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후방의 보급을 차단하며 진격을 했기 때문에 종심돌파와 같은 선상에 있다. [5] 다만 이 과정에서 돈바스 민병대가 주측인 소수 수비대가 완강한 저항을 하면서 상당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군의 발목을 잡았고 그동안 재정비된 러시아 방어선에 의해 더 이상 전과확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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