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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삼경 개경 (개성부) 開京 (開城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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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행정구역 | 5부 35방 344리[1] |
전신 | 송악군 |
개성군 | |
설치 | 919년 |
폐지 | 1395년 |
후신 | 개성유후사 |
현재 | 개성시 |
KBS1 정도전에서 묘사된 고려말 개성부 일대 모습[2] |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수도였던 도시.철원이 수도였던 건국 극초기 1년과 대몽항쟁 당시 강화도의 강도로 피난간 38년, 그리고 우왕과 공양왕 당시 남경으로 천도한 10개월 가량을 제외하면 434년간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그렇기에 5도 양계 중 어떤 도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경기라는 행정구역에 속했다.[3]
2. 행정구역 변천사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역성혁명으로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 왕씨 가문의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옮겼다.이듬해인 919년, 수도의 이름을 '개경(開京)'이라 하고 송악과 개성을 통폐합하여 '개주(開州)'를 설치했다.[4] 그렇게 '개경 개주'가 탄생했다.
960년, 광종은 개경을 황도(皇都)로 승격시켰다.[5] 그리하여 '황도 개주'가 되었다.
35년 뒤인 995년, 성종이 황도를 '개경(開京)'으로, 개주를 ' 개성부(開城府)'로 고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개경 개성부'가 탄생했다.[6]
1018년, 현종이 개성부를 철폐해 개경만 남겼다.[7]
1062년, 문종이 개성부를 다시 설치해 '개경 개성부'로 돌아갔다.
1308년, 충렬왕은 '개경 개성부'를 '개성부 개성현'으로 격하시켰다.[8]
1390년, 공양왕은 개성현을 경기좌도(京畿左道), 경기우도(京畿右道)로 나누었다.[9]
3. 당시 인구
고려사 유승단 열전에 따르면 강화로 천도하기 직전인 1232년 개경의 인구는 10만 호(戶)였다고 하며, 고려 말 이색과 권근이 지은 시에도 개경의 인구가 10만 가(家)라는 언급이 나온다. 한 가구당 5명으로 추산하더라도 대략 50만명에 달하는 큰 도시로, 후대 조선의 한양은 물론이고 심지어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도 남양주시, 포항시, 김해시 등 전국 20위 안에 드는 상당한 수치다. 심지어 30만 명 안팎인 현재의 개성시보다도 인구가 많다. 물론 통일신라 금성도 인구가 17만호에 육박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이견이 분분하다.당시 전근대 농업국가인 고려에서, 후대 조선 왕조 한성부나 태봉국 철원성터, 신라 경주 월성 등보다도 좁은 입지에 자리잡은 도시가 북송의 카이펑,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슬람 제국의 바그다드 등의 당시 세계도시와 맞먹는 인구를 보유했다는 점은 납득이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 또한 추론일 뿐이다.[10]
연구학자에 따라 당대 개경의 화재 기사 등을 토대로 개경의 인구집적도가 상상 이상이라는 점, 개경의 도성크기가 한성부보다 크다는 점 등을 바탕으로 10만호 설을 인정하는 이도 있다.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10~13만호가 아니라 10~13만명이라도 전세계 10위권에 드는 거대 도시에 가깝다.
4. 당시 건축
[11]주요 건축물인 만월대[12]를 세운 것은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이다.
개경의 당시 모습
제2차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크게 피해를 입은 후 강감찬의 건의로 1029년( 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나성(羅城)을 축성했다. 이 성이 바로 개성성이다. 왕가도가 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였다고 한다.
1011년, 현종은 황성(皇城)을 쌓아 궁성 - 황성 - 나성 체제를 완성시켰다. 황성은 천자만이 지을 수 있는 성이다.[13]
개성 시가지를 지형조건에 맞추어 조성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바둑판식 격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의 금성, 발해의 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의 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은 수도라고 할 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이나 송나라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바로 인접 지역에는 큰 강이 없었던 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여겼던 듯. 일단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큰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 개경도 아쉬운 대로 예성강의 벽란도를 무역항으로 쓰기는 했으나, 한양의 마포나루가 고개 하나만 넘으면 서대문과 남대문 지척인 것과 다르게 벽란도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 전란에도 지금까지 이때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개성 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개성 첨성대 등.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때 개성 남대문을 제외하고 지금은 전부 없어져 터로만 남았고 서소문은 사진으로만 남았으며, 남대문은 6.25 전쟁 당시 문루가 박살나서 1954년에 복원했다.
5. 관련 문서
[1]
현종 당시
[2]
고증에 꽤 공을 들인 이미지로, 실제 풍경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민가의 기와집이 적다는 《
고려도경》의 묘사를 근거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는데,
충선왕 때 대대적으로 개경의 가옥들을 기와집으로 바꾼 기록이 남아있다. 또 개경엔 부유한
귀족과 관료들의 거대한 저택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기와지붕이 많이 보이는 게 당연하다. 《고려도경》에도 선의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묘사가 있다. 더욱이 고려도경은 작성년도가 1123년이고, 드라마 정도전은 여말선초 즉 1390년대를 전후한다. 즉 200년 사이 기와집이 널려있는 도시로 바뀌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3]
당시 서경이었던
평양에게도
서경기가 있어
제2수도로서의 대우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행정제2수도는 현대
대한민국의
세종특별자치시, 그 가운데서도
행정중심복합도시의 포지션, 경제제2수도는
현대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광역시급 포지션으로 보면 된다.
[4]
도읍은 송악인데, 새로운 고을의 이름은 정작 도읍의 옆동네인 개성에서 따온 것.
[5]
동시에 서경은 '
서도(西都)'로 승격되었다.
[6]
'개성'이란 지명이 옛 송악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포괄하는 지명으로 완전히 굳어지면서 지명의 지위가 확장 및 역전되었다.
[7]
철폐된 개성부 지역은
개성현과
장단현 2현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8]
이는
원 간섭기의 영향으로,
제후국의 도읍에
천자의 도읍에만 쓸 수 있는 서울 경(
京)자를 감히(?)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시에
동경은
계림부,
남경은
한양부, 강도는
강화부로 격하당했다.
[9]
즉 '개성부 / 경기도'가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도 영향을 주어 수도와 수도권이 '
한성부 /
경기도'가 된다. 다만 경기'도' 행정구역이 아닌 '경기' 자체는 고려 중기까지 거슬러올라가며, 평양 근교는 서경의 외곽이라 하여 '서경기'가 따로 있었다.
[10]
신라 금성의 17만호, 개경의 10만호 기록을 유독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또한 고려의 농업생산력, 전체 인구 등에 대한 부분도 연구의 소지가 많다.
[11]
가장 바깥의 성이
나성(羅城), 서북쪽에 있는 눌리문 - 광화문이 있는 성이
황성(皇城), 내
제석원이 있는 작은 성이 궁성(宮城)이다. 중부와 북부를 감싼 회색으로 된 성은 우왕 ~ 공양왕 대에 추가로 지은 성이다.
[12]
만월대는 조선시대에 붙은 이름으로, 당시엔 특정 명칭이 없고 단지 본궐, 정궁 등으로 불렸다.
[13]
동시에 서경에도 황성을 세운다.
장락궁 문서 참조.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했기에 황성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