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백문기(白文基) |
자 | 용선(溶善) |
호 | 구파(鷗波, 九波) |
본관 | 수원 백씨[1] |
출생 | 1896년 음력 1월 19일[2] |
전주부
부안군 하동면 구운리 (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3] 149번지[4]) |
|
사망 | 1934년 6월 5일 (향년 38세) |
일본 제국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노나카정 나가사키 형무소 | |
가족 |
백남일(아버지), 윤문옥(어머니) 백복순, 백복근, 백진수(동생) 조팔락(부인), 백계현(아들[5])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백정기 의사의 유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
아나키스트 계열로
독립운동을 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백정기 의사의 유언
독립유공자 백진수는 친동생이다.
2. 생애
1896년 1월 19일 전주부 부안군 하동면 구운리(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 149번지)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 1876. 9. 17 ~ 1908. 12. 1)[6]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문옥(尹文玉, 1872. 10. 2 ~ 1963. 6. 15)[7] 부부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한 편에 속했다. 12세 되던 1907년 전라북도 고부군 북부면 갈선리(現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 734번지)[8]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이후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상경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기미독립선언서와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그 후 동지 4명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 경기도 인천부(現 인천광역시) 등지에 잠복해 일본군 군사 시설 파괴 공작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었고, 곧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瀋陽縣)[9]으로 망명했다.
이듬해인 1920년 겨울 다시 경성부에 잠입해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위장해 성명과 본적지,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다. 이후 1922년 중화민국 북경시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한 뒤, 국내 각지와 북경시를 몰래 오가며 국내 및 국외에서 활동하는 동지들과 연락을 긴밀히 유지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면서 앞서 일본군 군사 시설 파괴 공작을 다시 계획했다.
1924년 여름에는 다이쇼 천황을 처단하려고 일본 도쿄도에 잠입했고, 하야카와 수력공사장에 은신하며 파괴 공작을 계획했으나 또 다시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돼 실패하고 북경시로 귀환했다. 그 뒤 같은 해 상하이로 가서 우당(友堂) 이회영, 화암(華岩) 정현섭, 우근(友槿) 유자명(柳子明), 회관(晦觀) 이을규,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10] 등과 함께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조선 대표로 출석해 관여했으며[11], 기관지인 『정의공보』 를 비밀리에 발행했으나, 이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925년 7월 상하이에서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면서 10여 만명의 직공들을 모아 대노동조직을 만드는 한편, 이러한 노동운동을 혁명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스스로 어느 철 공장의 직공으로서 근무하기도 했다.
1927년 가을에는 강소성 남경시와 상하이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및 중국인 동지들을 모아 복건성 천주시(泉州市)에서 민남 25현(閩南二十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해 3,500명의 대오를 편성하고 난창 폭동을 일으킨 중국공농혁명군과 월계군벌 등 지방 군벌에 대한 자기 보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강소성 남경시에서 개최된 조선·중화민국·일본 제국· 필리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이후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 병실에서 요양 생활을 하여 완치될 수 있었다. 1930년에는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해림보(海林堡)[12]로 가서 재북만(在北滿)한국무정부주의연맹의 동지들과 비밀결사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하고 혁명의식 고취 및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1년 오면직, 정현섭, 박기성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재정비해 아나키즘을 연구하였고, 제1차 상하이 사변 기간 중이던 1932년 2월에는 비밀결사 자유혁명자연맹의 명칭을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으로 변경한 뒤 기존의 조직을 강화해 일본 제국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4월 29일 일어난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당시에 백정기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중국인 조력자인 왕야차오가 권총은 전달했으나 약속했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거사 실행에는 실패하였다. 이것이 나름 흥미로운 사건인데, 윤봉길는 당일 오전 11시에 폭탄을 터뜨릴 계획을, 백정기는 오전 10시에 터뜨릴 계획을 하고 똑같이 훙커우 공원으로 향하긴 했지만, 백정기는 입장권이 없었기에 계획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백정기 의사는 애써 준비한 거사가 물거품이 된 것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백정기 의사가 계획대로 폭탄을 던지고 성공했다면 현재 윤봉길 의사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백정기 의사한테 향했을지도 모른다.
이듬해인 1933년 3월 17일 주 중화민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일본 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 정객, 일본 제국 육군 소속 군인 등 100여 명을 상하이 홍구(虹口)[13]의 로쿠산테이(六三亭)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릿집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한 뒤, 정현섭,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이들을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역습을 받아 같은 날 원심창·이강훈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이미 사전에 일본 제국 경찰의 세밀한 체포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보면, 아마 의거 계획이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4]
이후 일본 나가사키시로 이송되었고, 1933년 11월 24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원심창과 함께 이른바 살인예비 및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이강훈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폐결핵이 재발해 악화되었고, 결국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에 옥사, 순국하였다.
3. 사후
1946년 박열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3 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 국민장 봉장 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회수하여 7월 6일 국민장을 실시하였고, 현재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안중근 의사를 제외한 삼의사중에선 가장 최연장자다. 그 다음이 이봉창, 윤봉길 순.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928번지에 백정기의사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백정기가 12살 때부터 23살 때까지 살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4. 여담
얼굴이 매우 하얗고 잘생겼다고 한다. 정현섭 선생의 말에 따르면 "남자인 본인이 봐도 정말 잘생겼다."고 했다. 게다가 깨끗한 성품과 곧은 의지, 선비 같은 인자함을 지녔다고. 실제로 위 사진을 보면 꽤 미남이다.[15]폐결핵으로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했던 시절, 역시 폐병으로 입원한 일본 갑부의 딸과 서로 연정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정기 의사는 본인이 독립운동가이며 소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매우 고민했다고 한다. 결국은 소녀가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대 옆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눈물로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1년 뒤, 치료가 끝나자 "사랑하는 여자도 조국 앞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야."라며 뒤도 보지 않고 곧바로 병원을 나갔다.
그러나 후에 가끔씩 우울할 때면 동료 정현섭에게 소녀의 눈망울과 눈물이 생각난다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백정기 의사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갑내기 동지인 정현섭과 함께 우당 이회영 선생의 노년에 그를 극진히 모시며 함께 아나키스트 사상을 공유한 이회영의 가까운 동지이기도 했다.
5. 대중매체
2010년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서 권오중이 연기했다. 여기서는 일본인 여성이 아닌, 같은 조선인 여성으로 독립 운동 후배인 홍정화( 이아이 분)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온다.2023년 작인《 유령》에 첫 장면에서 라디오에 조선 총독을 노린 테러가 육삼정에서 발생했다는 언급이 나온다.[16]
6. 관련 문서
[1]
문경공파(文敬公派)-휴암 종중(休庵宗中) 29세 기(基) 항렬.
[2]
양력
3월 2일.
수형인명부에는
10월 19일생으로 오기돼 있다.
[3]
2009년 6월 30일 부안독립신문 기사. 기사 서두에 첨부된 운기마을 약도를 통해 구운기마을에 "백정기의사생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4]
2021년 10월 20일 부안인터넷신문 기사.
네이버 지도의 위성지도를 통해 생가터의 위치가 신운리 149번지임을 알 수 있다.
[5]
양아들로 생부는 동생인
백진수.
[6]
자는 사순(士純).
[7]
윤자신(尹滋臣)의 딸이다.
[8]
현재 이 지번에
구파백정기의사고택이 남아 있다.
[9]
現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
[10]
이을규의 동생이며 후일
성균관대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11]
이 사실이 《우관문존년보》에 등재돼 있다.
[12]
現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
[13]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훙커우구.
[14]
당시 주소지는
중화민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복리이로(福履理路, J.Frelupt Route, 現 젠궈시로(建國西路)) 정원방(亭元坊) 2호였다.
수형인명부
[15]
저 모습은 일제에 체포된지 얼마안되 찍은 사진이다. 상당히 고초를 겪었을텐데 저 정도 외모면 정말 대단한 미남인거다.
[16]
실제로 백정기 의사가 육삼정에서 일본 요인들을 처단하려 했지만 일제에게 붙잡혀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