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23:17:23

박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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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5파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④ 각 경찰서
⑤ 기타 왜적 중요기관
7가살
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 군부 수뇌
대만총독
④ 매국노
⑤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⑦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조선혁명선언 황옥 경부 폭탄사건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
파일:L20150619.0103608183400010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1년 2월 15일
경상북도 선산군 상고면 봉곡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2]
사망 1970년 1월 22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본관 밀양 박씨[3]
부모 아버지 박윤하(朴胤夏)
배우자 유문기
자녀 장남 박근용, 차남 박정용
박정희, 박선용, 박수용
종교 무종교 장로교
천주교 ( 세례명 : 시메온)
서훈 건국공로훈장 단장[4] 수훈

1. 개요2. 업적3. 생애
3.1. 일제강점기 시절(1910~1945) 군자금 300엔의 가치3.2. 뤼순 감옥 수감생활3.3. 생애 후기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남만주 무순, 봉천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되어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하였으며, 이후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남만주 일대에서 3인조 암살단(만철연선일대의 친일파 토벌대)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2. 업적

박희광은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통의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암살,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다코)·이용구· 최정규 암살 임무 등 남만주 일대에서 조선인을 학살과 약탈을 일삼던 친일파 척결과 항일 독립운동 단체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 하였다.

3. 생애

1901년 경북 선산군 상고면 봉곡리[5]에서 박윤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4년 보민회 이용구와 대표적인 친일파인 일진회 최정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뤼순(여순)지역 언론에 보도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으며, 친일파들에게는 두려움의 사건이었다.

박희광은 1924년 6월 7일 상해임시정부(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날 저녁 대서관(大西關)에서 군자금을 탈취하고, 금정관(金井館)에서 다시 군자금 300엔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 경찰과 총격전끝에 현장에서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3.1. 일제강점기 시절(1910~1945) 군자금 300엔의 가치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완전무장한 반면 한국인들은 식민지에 저항할수 없도록 완전무장해제를 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구군대의 해산에 이어 9월3일 [총포급 화약률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이 총기류나 화약류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군자금 300엔의 가치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여러 자료를 근거로 추정한다면 다음과 같다.

당시 독립군은 1차 사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체코쿤으로부터 최신 무기였던 모신나강 5연발 소총과 탄환 100발을 15원(엔)에 구입할수 있었다. 즉, 300원은 무기조달이 힘들었던 독립활동단 단체에 20자루를 전달할수 있는 금액이었다.

군자금은 독립운동세력 거점으로 활용된 부산의 백산상회(白山商會)나 연해주, 만주와 국내 동포들의 혈세로서 군자금을 충당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에 가장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일제 기관이나 일본계 은행과 호텔 등을 탈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어렵사리 군자금이 확보 되어도 무기 구입처인 시베리아에서 서, 북간도의 독립군영까지 운반하는데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3.2. 뤼순 감옥 수감생활

뤼순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 뤼순지방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1924년부터 1943년까지 뤼순형무소에서 신채호, 이회영, 우덕순, 김병현 등과 함께 수감 생활을 했었다. 선생은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출옥 후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뤼순형무소 수감 독립운동가로서는 최장기 복역수였으며, 복역 중 일본천황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2016년 8월 1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뤼순감옥 박물관과 다롄외국어대 김월배 교수의 도움으로 안중근, 신채호, 박희광, 백여범, 채세윤 등 이 분들의 수감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는 행사도 진행되었다.

3.3. 생애 후기

박희광의 업적은 증명할 방법이 없어 귀향하여 은거 생활을 하던 중, 1924년 9월 1일 동아일보 등에 사건과 선고공판 등의 행적이 증명되면서 1968년 3월 1일자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해방 후 김구의 경호원으로 활동하였으나 백범 김구 암살사건 이후 대구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김구로 부터 2천원[6]을 받았으나 6.25 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와서 찾아온 지인들에게 나눠주었고, 당시 운영하던 양복 수선점이 화재로 불에 타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2년 후인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별세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사후 박정희 대통령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박희광선생지상(愛國志士朴喜光先生之像)"이라는 친필휘호를 내렸으며, 1983년 구미문화원, 구미시, 각계 인사들의 힘으로 경북 구미시 금오산 도립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대구광역시 두류공원 내 조각 공원에 흉상이 세워졌다.


[1] 이명은 박상만(朴相萬)을 썼다. [2] 인근의 상모동·송정동·형곡동·공단동·신평동·지산동·원평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3] # [4] 지금의 건국훈장 독립장. [5] 지금의 구미시 봉곡동. [6] 당시 집 한채 값이 100원 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