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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선언 • 황옥 경부 폭탄사건 | }}}}}}}}} |
황옥[1] 黃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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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eaea,#191919> 출생 | 1887년[2] 5월 3일 |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윗한두리 (現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59)[3] # |
|
사망 | 1950년 7월~ 12월 이후 (향년 63세 이상)[4] |
사망지 불명 | |
본관 | 장수 황씨[5] |
자 | 거부(去夫) |
부모 | 아버지 황의만, 어머니 성산 이씨 |
형제자매 | 남동생 황직연[6] |
친인척 | 손자 황정하 |
[clearfix]
1. 개요
1923년에 있었던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 계획 실행 요원. 일제 기관 파괴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 지령을 받고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는 일을 돕다가 체포됐다. 황옥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설이 다수설이지만 친일파로 단정짓진 못하고 있다.[7]2. 생애
2.1. 사건 이전
1887년( 고종 24) 5월 3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윗한두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59번지)의 양반가에서 방촌 황희의 18대손인 아버지 황의만(黃義晩, 1850 ~ 1905. 3. 16)과 어머니 성산 이씨 이원준(李源準)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9년 통감부의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취직한다. 그해 8월 16일 재판소 번역관보(판임관4등 8급봉)로 서임, 이어 11월 29일 평안북도 선천구재판소, 평양구재판소 서기(書記) 겸 통역생(通譯生)으로 근무한다.
1910년부터 1911년까지는 평양지방재판소 산하 진남포구재판소 서기과에서 서기 겸 통역생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해주지방법원 재령지청 판사(判事)와 서기과 서기로 근무하였다. 이후 1917년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서기과에서 통역생으로 근무, 1918년 해주지방법원 수안출장소와 신계출장소 서기, 1919년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서기과 통역생과 신천출장소 서기, 1920년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 등 11년간 여러 지방의 법원에서 서기 또는 통역생, 판사 등으로 재직했다.
그러던 1920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직속 도경부(道警部)에 특채되었으며 1922년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警部)로 재직하게 된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자료
2.2. 황옥 경부 폭탄사건
같은 해 경기도 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하던 중 의열단의 단원인 김시현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으며[8] 김상옥 의사가 국내 활동 중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서 상하이로 망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 톈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 항일 독립 운동에 가담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기관 파괴와 일제의 요인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 등의 지령을 받았다. 이어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받아 권동산·김시현·김재진 등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나 김재진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밀고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황옥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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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이후 재판 당시 모습 |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황옥이 고려 공산당의 내정과 극동 인민 대표 대회의 내용을 정탐하기 위한 일제의 주구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이 거사가 실패로 끝난 것은 황옥의 간계 때문으로, 황옥이 공을 가로채기위해 의열단에 접근해 무기의 국내 반입을 돕는 척하며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일제가 의열단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대표적인 공작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위 주장에 대한 반박도 가능하다. 황옥이 정말 밀정이었으면 의열단원들이 체포된 후 황옥은 포상을 받고 경찰직도 유지 또는 승진을 했을 것인데, 오히려 경찰직을 박탈당하고 의열단원들과 함께 징역형을 받았다는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수사한 친일 경찰 김덕기가 받은 포상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그리고 황옥은 출소 후 같이 투옥되었던 김시현이나 의열단원 우승규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 독립 운동사 편찬 발기인 대회에 김시현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한 반민특위에서 친일 경찰들의 행위 증명을 위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하였다. 밀정으로서 감쪽같이 속인 것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반민 특위에서 황옥의 밀정 행위에 대한 처벌, 정 아니라면 반민 특위에 회부된 친일 경찰들이 자신들의 처벌을 위해 증인으로 나서는 황옥을 밀정이라 말했어야 하나 그러지도 않았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그를 "경기도 경찰부 고등부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자로서 불쌍한 자"라 발언하기도 해서 그의 행적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9]
2.3. 광복 후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에서 제2경무총감부의 경무총감으로 근무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경기도 파주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이동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그러다가 그해 발발한 6.25 전쟁으로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기타
- 1983년 11월 8일, 민주화 시위 도중 서울대학교의 도서관에서 추락해 숨진, 황정하( 서울대학교 도시공학과 4학년 재학 중에 사망, 1960년 ~ 1983년) 씨가 황옥의 친손자라고 한다. 암울한 시대 속 청년의 고뇌 황정하 열사를 기억하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파주[10] |
|
2,395표 (6.37%) | 낙선 (9위) |
5. 외부 링크
영화 '밀정' 실존 인물 황옥의 정체는 뭐였나
[1]
이명은 황만동(黃晩東).
[2]
장수황씨세보 권8 406쪽에는 1886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인근의 대상리와 함께
장수 황씨 집성촌이다.
[4]
6.25 전쟁때
납북된 터라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다.
[5]
소윤공파(少尹公派)-지례공계(知禮公系)-사정공파(司正公派) 23세 ◯연(淵) 항렬. 족보명은 황철연(黃喆淵)이다.
황옥(황철연) 계보
[6]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7]
동생인
황직연은 형의 부탁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형무소에서 순국했으며 의열단장인 김원봉도 황옥은 의열단원이며 불쌍한 인물이라며 보증하는 말을 했기 때문에 확정짓기 힘들다.
[8]
다른 의열단 사람들은 처음에 황옥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경찰이기 때문.
[9]
1934년 의열단원으로서 국내 공작 활동을 하던
홍가륵의 신문조서에서 나온 증언이다.
신문조서(제9회)
[10]
제24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