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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규

파일:inde.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권헌규(權獻圭)
경행(景行)
동빈(東濱), 소운(巢雲), 소은(巢隱)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43년 7월 12일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남일리면 초당리
(현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사망 1899년 11월 6일
강원도 강릉군 남일리면 초당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강릉의 유학자2.2. 반 동학 투쟁2.3. 을미의병에 가담하다2.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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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권종해는 그의 아들이며, 권기수는 그의 손자이다.

2. 생애

2.1. 강릉의 유학자

권인규는 1843년( 헌종 9) 7월 12일 강원도 강릉대도호부 남일리면 초당리(현 강릉시 초당동)에서 아버지 권충필(權忠珌)[2]과 어머니 강릉 박씨 박시도(朴始道)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아들 없이 딸만 셋을 둔 숙부 권극(權極)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종9품 동몽교관을 제수받았지만 실제로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강릉에 은거하며 지냈다.

2.2. 반 동학 투쟁

1894년 8월 중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9월 4일 강릉으로 진입했다. 농민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강릉부를 점령한 뒤, 다음날 강릉부 관아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내걸었다. 농민군은 삼정(三政)을 삭감하고 요호(饒戶)와 향리들을 체포하여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으며, 9월 6일에는 강릉부 최대 지주였던 이회원(李會源)[3] 의 집인 강릉선교장을 공격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이회원은 백미 100말과 돈 300꾸러미를 보내 경계를 풀게 한 뒤, 한편으로는 각지에 연락하여 민보군을 조직했다. 이때 권인규는 이회원에 통지를 받고 민보군에 참여하여 주로 문서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집필한 문집 <소은창의록>의 '토동비서(討東匪序)'에 따르면, 이회원은 9월 7일 폭우가 내리는 한밤 중에 민보군을 이끌고 농민군을 급습했다. 경계를 풀고 잠에 들었던 농민군은 대패해 20여 구의 시체를 남기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했다. 이후 이회원은 '영동 9군 대도호사 겸 관동 26읍 소모사'가 되어 이진석을 도총에, 이영찬을 대장에 임명하고 박동의를 종사로 삼아 봉평, 대화, 평창 등 강원도 일대에서 농민군을 진압했다.

2.3. 을미의병에 가담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벌어졌고 뒤이어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권인규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병들었지만 목숨 바쳐 ‘도이(島夷 : 섬나라 오랑캐)’를 토벌하겠다고 맹세했다. 1895년 12월 18일, 그는 강릉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있던 민용호와 합세해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그는 12월 말에 잠시 민용호 의진을 떠나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작성하여 민용호 의진인 '관동9군창의소'가 설치된 사실을 알리며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아! 우리 5백년 대소 신민들아, 저 왜놈의 극악함은 어찌 차마 더 말할 수 있겠는가. 강산에는 아직도 두 능(陵)의 원수가 남아 있고, 천지에는 또 8월의 변고가 일어났으니, 설사 그 놈들의 배를 쪼개고 그 놈들의 간을 씹지 못할망정 또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깎으며 그 놈들의 호령을 따른 단 말이냐. 원통하고 원통하다.
소은창의록, 창의포고문 中

권인규는 1896년 설을 세고 민용호 의진에 다시 가담한 후 관서와 관북 지역의 사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했다. 그는 여기서 강릉 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箕子)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이 난세를 당하여 한번 죽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하였다.
슬프다. 사람이란 죽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것이지만, 그러나 머리 깎고 살면 살아도 욕이요, 의(義)를 안고 죽으면 죽어도 역시 영광이다. 하물며 여러분께서는 모두 공자, 맹자를 외우고 법 받는 처지이니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또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하는 것이 바로 이때에 있으니 부디 힘쓰소서.
소은창의록, 창의통문 中

또한 그는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관동창의사 효유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효유문에서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거나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없이 처단해야 한다”면서 일제와 그에 붙은 부일개화파를 철저히 처단 할 것을 밝혔다. 아울러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했다.
오늘의 의거는 충분히 격동되어 사생을 헤아리지 않고 왜적을 쳐 없애기로 다짐한 거의니 도(道)마다 의병이요, 읍마다 의병이라. 의병이 있는 곳에는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울 것이니 저 극악한 왜놈들은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포로써 왜놈을 끼고 작난하는 몸은 어찌 밝은 이 하늘아래 목숨을 보존할소냐. 너희들의 타고난 양심으로 돌아오고 우리 선왕의 끼친 은택을 생각하여 의병이 가거들랑 총부리를 거꾸로 돌리고 따라 붙어 함께 추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영원히 이 강산을 깨끗이 하자. 아! 5백년 역사를 가진 우리 선왕의 유민들이여.
소은창의록, 관동창의사 호유문 中

한편 권인규는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방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의리로 이루어나갈 것.
2. 사람을 쓰는 데 반드시 심지가 깨끗하고 충의가 돈독한 자를 택하여 소임을 맡길 것.
3. 이욕(利慾)을 영위하는 협잡배는 일체 쓰지 말 것
4. 재정을 마련하는데 공정한 마음으로 경중을 헤아리고 우열을 따지며 사의(私意)로써 후박(厚薄)을 두지 말 것.

민용호 의병대 1,000명은 원산을 칠 준비를 하기 위해 선평장에 주둔했다가 1896년 3월 19일 일본군 150여 명의 기습을 받았다. 이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악천후여서 의병들은 화승총을 쏠 수 없었고, 결국 적의 기습에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30여 명이 전사하고 5명이 포로로 잡히는 피해를 입은 채 패주했다. 이 소식을 접한 권인규는 유진장 이병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북진의 첩보를 밤낮으로 바라고 바랐는데, 마침내 실패했다는 기별을 들으니 하늘이 의사를 돕지 아니하여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사가 잘못되어서 그런 것인가. 책상을 치며 크게 소리치자 피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승패는 병사의 상사니 한 번의 실책으로 기운을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여 덕으로써 인심을 무마하고 의로써 사기를 고동시켜 뒷일을 튼튼히 하면 오늘의 한번 실패가 후일 백전백승의 복선(伏線)이 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2.4. 사망

그 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뒤 전국의 의병대에게 해산을 명령하자, 민용호 의병대는 자진 해산했고 권인규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여생을 조용히 지내다가 1899년 11월 6일에 사망했다. 향년 56세.

그의 아들 권종해는 1907년 강릉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의 의병대와 함께 의병 투쟁을 벌이다가 1913년 의군부를 조직하여 의거를 준비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6년 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감했다. 이후 3.1 운동이 발발하자 다시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를 잠행하며 무력 항일 투쟁을 준비하다 체포되어 무기징역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했다. 또한 손자 권기수는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권인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추밀공파 시창(始昌)계 31세. [2] 초명은 권력(權櫟). [3]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15대손으로, 선교장을 세운 이내번(李乃蕃)의 4대 종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