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8 08:00:10

권종해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선명(宣命) / 성파(惺坡)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869년 6월 16일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사망 1922년 6월 9일
함흥형무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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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권종해는 1869년 6월 16일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에서 독립유공자인 부친 권인규와 모친 경주 김씨 김복희(金復熙)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강릉 유림대표로 선정되어 성균관에 진정하고, 대동문우회(大同文友會) 및 법부 평의회(法部評議會)에 고소하여서 친일군수 이재화(李載和)와 친일 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조익환(曺翊煥) 등에게 추방지시를 내리게 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원주 병영에 가서 특무(特務) 민긍호와 의무도통(義務都統) 이재희(李在熙) 및 지휘관 김도제(金道濟) 등과 함께 구국의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이곳에서 무기 1,800 자루를 얻어 의병 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관동일대에서 소모활동을 전개하고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8년 2월 모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와 합세하여 백담사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뒀으며, 그해 5월에는 정선군 북면 단림에서 적과 교전했다. 그해 6월 6일, 일본군은 그의 집에 침입하여 어머니 경주 김씨를 타살하고 둘째 아들 권증수(權曾洙)를 총검으로 복부를 찔렀으며, 가옥을 전소시켰다.

1909년 4월, 권종해는 양양으로 의병대 본진을 옮겼다. 그러나 밀정인 김성서(金聖瑞)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야습당해 크게 패했다. 이후 의병대를 해산하고 각저를 전전하던 그는 1913년 서울에서 김종익(金鍾翊)과 함께 의군부(義軍部)를 조직하고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주면(沙州面)의 장재호(張在鎬)의 집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지 6년만에 출옥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다시 강원도, 충청북도 일대를 잠행하면서 무력 항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함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4년만인 1922년 6월 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권종해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9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7065


[1] 추밀공파 시창(始昌)계 3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