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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손백견(孫伯見), 손양이(孫亮伊)
본관 일직 손씨[1] #
출생 1878년 2월 4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하면 서변동
(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
사망 1940년 12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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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손양윤은 1878년 2월 4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하면 서변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일병합에 분노하여 조국을 광복시키겠다는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했다. 1916년, 그는 채기중, 박상진, 노백린, 김좌진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다가 1917년 체포되어 1918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4년 8년형으로 감형되어 출옥했다. 출옥 후 만주 지린성으로 넘어간 그는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 6월 13일 오후 10시 30분, 손양윤은 신현규와 함께 조선식 칼을 들고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평동에 거주하는 일본인 이쿠타 세이이치(幾田精一)의 집에 침입하여 칼로 세이이치를 여러 차례 구타하여 왼쪽 팔 상박부에 길이 5푼, 넓이 약 2푼, 깊이 약 6푼 및 길이 약 3푼, 넓이 약 5리, 깊이 약 3리의 전치 약 1주를 요하는 2개의 상해를 입히고 그를 허리띠 삼끈으로 묶고 세이이치의 처 춘지(春枝)를 여자용 허리끈으로 결박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여 돈 105원, 엽총 2정, 명주실 약 100문, 호사사 약 30문, 신모사 소건 약 7척, 비스킷 약 100문 등을 확보했다.

1926년 음력 5월 7일 밤, 손양윤은 신현규와 함께 식도와 권총 모양의 물건을 휴대하고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에 거주하는 이이창(李以昌)의 집에 침입, 가져간 흉기로 이이창의 앞가슴을 구타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228원 23전과 안경 1개 등 여러 가지를 강탈했다. 이후 8월 30일 밤에 신현규, 이병묵과 함께 이이창의 집에 다시 침입하여 2명은 안뜰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이이창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여 40원을 강탈했다.

1928년 1월 19일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호와 공모하여 오후 10시 30분경 곤봉, 총기 모양의 물건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에 거주하는 이상기(李相琦)의 집에 가서 2명은 집 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 안으로 침입하여 권총 모양의 물건을 이상기의 앞가슴에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그의 왼손 엄지손가락과 둘째 손가락 사이에 전치 2주를 요하는 길이 약 1촌, 넓이 약 2푼의 열상을 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118원을 강탈했고, 이어서 이상기의 부친 이지연(李志淵)도 협박하여 30원 20전을 강탈했다.

1928년 2월 29일 오후 9시경, 손양윤은 신현규, 이병묵과 함께 식도, 곤봉 등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에 거주하는 이수연(李秀延)의 집에 가서 2명은 대문 밖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집 안에 침입하여 이수연의 어머니 장장곡(張長谷)에게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며 협박했지만 이수연이 돈이 없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3월 25일 오후 11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공모하여 식도와 총기 모양의 물건들을 가지고 칠곡군 약수면 관호동에 거주하는 장일환(張日煥)에게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여 370원 20전을 강탈했다. 그리고 4월 15일 오후 10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호와 함께 각자 흉기를 가지고 경산군 남산면 경동에 거주하는 김두남(金斗南)의 집에 가서 2명은 문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에 침입하여 끈으로 김두남을 결박한 후 마침 집에 있던 공기총으로 김두남을 구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800원을 강탈했다.

이런 식으로 부호들을 습격해 5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은 그는 이 돈을 신민부에 송금했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 김보연(金甫淵)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徐)모씨의 밀고로 체포되면서 그들의 위치가 발각되고 말았고, 결국 그는 1928년 7월 30일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에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동지 신현규, 신양춘(申陽春)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옥사했고, 손양윤은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손양윤은 옥중에서 10여 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12월 초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지만 12월 12일에 자택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양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22세 양(亮)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