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봉한(張鳳漢) |
이명 | 장봉한(張鳳翰), 장봉한(張鳳韓) |
생몰 | 1879년 ~ 1920년 5월 |
출생지 |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면 주산리 |
사망지 | 중국 지린성 왕청현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봉한은 1879년경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면 주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무렵 연해주에서 이범윤과 최재형 휘하에 들어갔고 추풍 달자동에서 8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했다. 이후 1919년 8월 홍범도의 부대와 합세한 그는 5백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9월 중순경 하마탕으로 전진, 백초구를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정이단(正義團)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자 대감자(大坎子)로 철수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왕청현 춘방사 대동에서 군자금 1800원을 모금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 시기 정의단을 이끌며 대감자에 함께 거주하던 서일과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1919년 4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이범윤, 이동휘, 진학신(秦學新) 등이 혼춘현(琿春縣) 탑도구(塔道溝)로 이동하여 국민의회(國民議會)의 지부를 설치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장봉한은 여기에 참가했고, 1920년 1월 초에는 회보(會報)를 발행하기 위해 등사판 2벌을 매입하여 동 지부의 서기 김덕한(金德漢)과 함께 잡지 발행 책임자로 선임되기도 했다. 또한 북간도 일대에서 가장 큰 무장항일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핵심인물로 서일, 구춘선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책사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는 대왕청, 합마당, 서대포 등지에 분산되어 있는 소규모 독립군 단체들을 한데 통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1920년 5월경에 왕청현에서 갑작스런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장봉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