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서종채(徐鍾採) |
이명 | 서응오(徐應五), 서종주(徐鍾珠) |
자 / 호 | 응호(應鎬) / 채열(彩烈) |
본관 | 이천 서씨 |
생몰 | 1881년 10월 15일 ~ 1916년 4월 22일 |
출생지 |
전라도 무장현 이동면 (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1] |
사망지 | 대구형무소 |
매장지 |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
추서 | 건국훈장 독립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병장.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서종채는 1881년 10월 15일 전라도 무장현 이동면(현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에서 부친 서상필(徐相苾)과 모친 경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7월 40명의 의병을 모집해 기삼연의 의병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광주 서탑등에서 일본 토벌대에게 피살당하자, 그는 이대국(李大局) 의병장과 합세한 뒤 부하 25명을 거느리고 전라북도 무장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이후 이대국이 전사하자, 그는 의병대를 규합해 의병장이 되어 14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전라도의 함평, 영광, 무장, 부안, 고창 등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다. 함평군 성문, 담양군 추월산, 무장면 고산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으며, 부안군 청일리에서는 의병을 일본군에게 밀고하던 최용태(崔容台)를 체포해 총살했다. 한편 그는 의술에 뛰어나서 교전 중에 부상을 입은 부하들을 직접 치료했고, 희생당한 부하의 가족을 보살펴주기도 했다고 한다.
1909년 10월, 서종채는 부안군 산내면의 지지포에서 일본인 상인으로 조선인들에게 악랄하게 굴던 마에다 쿠마키치(前田熊吉)를 체포해 격포 해안에서 처형했고, 다량의 화약과 총기를 확보해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911년경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의병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만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3년 7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살인, 강도, 총포 및 화약류 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그해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14년에 20년, 1915년에 15년으로 감형되었지만 1916년 4월 22일 대구형무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그의 유해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서종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