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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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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이형.jpg
본명 정원흠(鄭元欽)
이명 정쌍형(鄭雙衡), 이용현(李用賢)
쌍공(雙空)[1]
본관 하동 정씨
출생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2]
사망 1956년 12월 10일
서울특별시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62)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독립운동 활동2.3. 대한통의부2.4. 정의부2.5. 고려혁명당2.6.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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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정이형은 1897년 음력 9월 16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부친 정효기(鄭孝基)와 모친 수원 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7살 때 부친을 여의고 9살 때인 1905년에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화하리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부친 정효기는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대문이 12개인 큰 집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참깨를 1,000석 정도 수확했으며, 집 주변에 소작인 집이 20여 채나 되었다고 한다.

정효기는 12살 때 그 지역의 지주인 광산 김씨 집안의 처자와 혼인하여 아들 정원익(鄭元翊)과 딸 하나를 두었고, 부인이 21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딸 4명을 두었다. 이후 38살 때 풍양 조씨가 사망하자, 수원 백씨와 재혼하여 딸 2명과 정이형을 두었다. 정이형은 자신의 이복형인 정원익과 나이 차이가 30세나 났으며, 정효기는 막둥이인 그를 특별히 귀여워했다고 한다.

정이형은 일찍부터 학문 공부에 전념했고, 부친이 사망한 뒤 이복형 정원익의 도움으로 8세부터 15세까지 서당에서 외가의 어른인 김평식(金平植)에게 한문을 배웠다. 김평식은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대동향약을 운영하다가 3.1 운동 이후에는 대한독립단과 의군부 등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단체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정이형은 김평식으로부터 항일의식을 전수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이형은 1911년 15살의 나이로 계삼사립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에는 이복형 정원익을 따라서 서북학회의 회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원익은 서북학회 회원으로서 1910년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고 광목으로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제공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여러번 잡혀가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장독(杖毒)으로 사망했다. 그는 이런 이복형의 항일 의식을 전수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2.2. 독립운동 활동

정이형은 형 정원익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금강산에 들어가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심신수련과 차력, 불로장생을 연구했다. 그는 금강산에서 이학수(李學洙) 스님[3]을 만났다. 이학수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남형우, 김동삼, 배천택, 신백우, 박중화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11년 5월에 윤세복, 이원식, 이윤재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가르친 인물이다. 정이형은 그와 교류하며 여러 독립 운동가들과 안면을 쌓았다. 특히 전남 장성 사람인 김계순과 서상연과 의기투합했다.

정이형은 1918년 가을에 어머니와 아내 울산 김씨, 그리고 두 자녀를 데리고 정읍으로 이사했다. 그가 정읍으로 이사간 목적은 그곳의 이름난 도인으로부터 차력을 배우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읍으로 간 지 석달만에 아내 울산 김씨가 풍토병으로 죽자, 그는 낙담해 있다가 김계순, 서상연의 초대를 받아들여 1919년 1월 전남 장성으로 이사갔다. 그러던 중 장성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정이형은 김계순, 서상연과 함께 3.1운동에 가담했다.

1920년 5월 진주 강씨 강탄탄과 결혼한 정이형은 장성에서 손룡사립보통학교 교장을 맡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낮에는 산 속에 있는 김계순의 별장에 숨고, 밤에는 내려와서 먹을 것과 옷 등을 가지고 올라갔다. 그러던 1921년 1월, 형사 2명이 정이형을 산장에서 체포했다. 정이형은 1922년 음력 3월 2일에 풀려났지만 장성에서 더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마침 형 정원익이 의주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형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했다.

장례를 마친 정이형은 만주 망명을 결심하고 고향 선배이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의주군감으로 활동하고 있던 김경하(金景河)에게 망명 의사를 전했다. 김경하는 그에게 만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대한통의부 학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언갑(申彦甲)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주었다. 정이형은 1922년 11월에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후 안동현을 거쳐 대한통의부가 있는 관전현에 도착해 조병준의 집에서 신언갑을 만났다.

당시 신언갑은 통의부가 지역감정과 권력 쟁탈 등으로 갈등을 겪자 환멸을 느껴 학무부장을 사직하고 산서성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이형의 회고록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신언갑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참 잘 왔다. 이 썩은 판에 새 사람이 들어서니 반갑기 짝이 없다. 새 사람이 새 정신을 가져야 이 판국을 바로잡지, 우리 같은 썩은 사람은 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내일 산서성으로 떠난다. 독립도 되기 전에 세력 다툼이 무엇인고. 나는 그런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 오늘 저녁 조 선생님 댁을 찾아왔는데 참 잘 와서 만났다.

그러면서 정이형에게 국내사정 좀 설명해달라고 했지만, 정이형은 자료도 없고 조리있게 말할 줄도 몰라서 수차 사양했다. 그러자 신언갑은 버럭 화를 냈다.
사양도 할 일이 있지. 동지는 나보다도 일찍 깨어서 3.1 운동 전부터 집을 떠나 활동하여 신상에 관해 별별 얘기가 많이 떠돌았습니다. 나는 다 짐작합니다. 망명을 해도 이렇게 늦게 나온 분이 모를 리가 있소. 사양이 무엇이오. 전일에 우리가 흉금을 털어놓고 말해본 적이 없었소만 오늘 이 자리에서야 사양이 무엇이고 거리낄 것이 무엇이겠소. 조리고 계통이고 할 것 없이 마구 주워섬겨도 되니 되는 대로 말씀해 주시오. 민족성이 이래서야 독립은 하여 무엇하오. 싸움질하는 독립군들을 근본부터 가르쳐서 사람노릇하게 만들겠소.

조병준도 동의를 표했다.
민족성이 왜 어때서. 지도자 없는 민족이 다 그렇지. 민족성이 좋았으면 망국노 노릇을 처음부터 아니했지. 왜 남산(신언갑의 호)은 산서로 가서 한국사람 노릇을 아니할 것 같소. 명철보신하려는 계획이지. 옛말에 '급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살지 말라'고 하였으니 만주를 떠나는 것이지요. 독립을 지도하시는 선생들이 다 저러하시니 참 걱정이오.

결국 정이형은 국내 정황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했고, 이어서 3.1 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 대해 "국내 청년들이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고, 지방 민심은 아직도 미개하고 몽매한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다행히도 학교 교육이 흥기하고 있어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일반 국민들은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고 일본의 착취가 심하다고 밝혔다. 그 후 정이형은 신언갑에게 만주 사정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이형의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신언갑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국내정세가 이렇듯 급박한데 이곳의 독립운동 지도자란 사람들이 싸움만 하고 있으니 걱정이 아닌가. 와우각상 급하경상(달팽이 뿔 위에서 내려가고 오르기를 다투는 것처럼 하찮은 일에 다투는 것)도 분수가 있지, 남의 나라에서 숨어다니면서 하는 운동에 세력다툼이 무엇이며 지반 싸움이 무엇이요. 남의 말을 하자니 싸움에 가담하는 것이 되고 이야기 않자니 속이 아파서 못살겠소이다. 동지는 식견이 탁월하고 정신이 남과는 다르니 이 판국을 맡아서 정리하고 새 정신으로 바꾸어 주시오. 나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산서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거기 가야 별 도리가 있겠소만은 뜻이 맞는 동지에게 가서 다른 판을 찾아보렵니다.

한편 신언갑은 정이형을 이웅해(李雄海)에게 소개시켜줬다. 정이형은 대한통의부 민사부장 겸 총장 대리인 이웅해와 만난 뒤 이웅해의 소개로 민사부 부원 김동현과 대면했고, 다시 김동현의 소개로 오동진과 만났다. 정이형의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오동진은 그의 손을 꽉 쥐면서 부탁했다고 한다.
같이 일해봅시다. 이곳 청년들은 늙은 선생네들을 따라 썩고 곪아서 하나도 쓸 놈이 없어요.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될 놈은커녕 달걀껍질 속에서 곪은 놈들밖에 없고 사람 같은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후 김동현과 함께 의용군 사령부로 가서 사령관 김창환(金昌煥)을 만난 정이형은 그로부터 군대가 조직적으로 개편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즉, 1중대는 서로군정서의 백광운(白狂雲) 부대, 2중대는 독립단의 이웅해파, 3중대는 천마대파, 4중대는 전덕원파가 각각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각기 자신의 군대를 가지고 지도 이론도 없이 독립운동을 지휘했고, 청년들을 자기네 파로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정이형이 왜 시정하지 않느냐고 묻자, 김창헌이 답했다.
나의 생각이야 소용이 있습니까. 각파에서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을 대장으로 삼지 않으면, 부하들이 자기 명령을 들을 이유가 있겠소. 군인이 사령부 명령이면 그만이지, 정실관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덕원 씨가 왜 반동을 하였습니까. 자기 상관이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군사 행동을 취하다가 반동이 있게 된 것이지요. 우리 군인이 정비될 날은 멀고 멀었습니다. 현재 있는 소중대장들을 모두 도태시켜야 하는데 누가 이것을 실현해내겠소.
내 자신을 보아도 알지 않겠소. 소위 사령부 부관이 병을 지휘할 임무가 있을 텐데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알 것이 아닙니까. 이름이 부관이요, 이름이 사령관이지 실제 사령장은 각파 선생님들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남의 말이 아닙니다. 참 한심한 일입니다. 여러 해 통일이니 무엇이니 하여 각 단체를 해체하고 군인을 합체하려고 애쓴 운강 선생님( 양기탁)을 왜 총독에게 돈을 받고 와서 이렇게 만들지 않았나하고 비난하고 때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만주 독립군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이형은 이 이야기를 듣고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착수했다.

2.3. 대한통의부

정이형은 대한통의부에 합류한 뒤 산서성으로 가버린 신언갑을 대신해 학무부장 대리를 맡았다. 그가 부임한 이래 처음으로 직면한 과제는 전덕원 일파가 저지른 사건이었다. 그가 통의부에 합류하기 한달 전인 1922년 10월 14일, 전덕원을 따르는 군인 20여 명이 이종성의 집을 습격해 유숙하던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사살하고 청년 김성국에게 총상을 입혔으며, 독립운동계의 원로인 양기탁, 법무부장 현정경, 검무감 김관성, 교통국장 황동호, 비서과장 고활산 등을 결박하고 난타했다.

정이형의 회고록 <나의 망명추억기>에 따르면, 사건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통의부 지도부는 전덕원이 이끄는 독립단 간부였던 김시영 소대장이 유부녀와 불륜을 저지르자 그를 제대시키고 그 여자와 다시 관계하지 못하게 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이후 김시영은 부대를 떠난 뒤 더이상 제재를 받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독립단 군인이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소문이 돌자, 검무감 김관성이 검무원을 시켜서 김시영을 체포해 매를 난타하고 김시영을 따랐던 독립단 간부들을 모두 부대에서 내쫓게 했다.

이에 전덕원은 자신의 부하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다가 독립단 군인을 소집하여 이종성의 집에 머물고 있던 양기탁, 현정경, 김관성, 황동호 등 10여 명을 포박하고 조선총독부의 정탐으로 만주 독립군의 파괴공작을 한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살해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 주요한 목표인 고활신을 체포하지 못하자 달아났던 것이다. 전덕원이 양기탁 등을 핍박한 것은 당초 그가 대한통의부에서 검무감에 임명되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오동진이 교통국장에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양기탁이 그를 비호했다고 여겨 양기탁 등 지도부에게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전덕원 일파는 1923년 봄에 의군부를 조직해 대한통의부에서 이탈했고, 대한통의부는 해결방안을 놓고 고심했다. 각부 부장들은 회의 끝에 이 사건을 책임지는 의미로 전원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지방대표자대회를 3일간 개최하여 논의한 끝에 전덕원의 행동을 용납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도움이 없이는 군사적 역량이 떨어지는 점을 감안해 전덕원과 제일 친한 이천민을 베이징에서 불러 대한통의부의 군사책임을 맡기고 전덕원과 타협하기로 했다.

1923년 12월, 정이형은 김창헌과 함께 사령관 신팔균의 부관으로 일했다. 1924년 7월경에는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을 맡아 부하 10여 명과 함께 중국 봉천선 환인현 홍묘자 부근에 살고 있는 조모(趙某)를 반 통의부 혐의로 환인현 육도하자에서 처형했다. 또한 1924년 말에는 제6중대 제2소대장으로서 흥경현 왕청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이끌고 있는 소대의 병력은 무장단원 12명, 소총 5정, 탄약 400발, 권총 6정, 탄약 600발 등이었다.

한편, 정이형은 흥경현에서 평안도 출신을 중심으로 다물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자 여기에 가담했다. 다물청년당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시점에 있어서는 자수, 자양, 자작, 자급해야 하며 계급상잔의 구태의연한 생활을 변혁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며, 전 세계 약소민족과의 연대 투쟁을 주장했다. 정이형은 이러한 다물청년당에서 활동하며 길림 지역을 중심으로 이성근, 김이영, 김상범 등과 함께 활동하며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2.4. 정의부

1924년 11월 25일, 대한통의부 중진들은 의군부와 참의부를 제외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라고 명명했다. 정의부는 중앙 본부를 유하현 삼원보에 두고 참의부의 세력권인 관전현, 집안현, 환인현, 통화현 등 4개 현을 제외한 지역에 10개의 지방총관소를 설치했다. 또한 중앙행정위원으로 이탁, 오동진, 현정경, 김이대, 윤덕보, 김용대, 이진산, 김형식, 지청천 등을 선임했다. 또한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에 중대와 소대를 두었다.

정이형은 문학빈, 양세봉과 함께 중대장 및 소대장의 직책을 맡아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집, 독립선전공작, 부역배 암살, 일본 관리 사살, 일제 기관 방화 공작 등을 수행했다. 1925년 3월 18일, 그는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 등과 함께 관전현 하루하 약수동에 모여 초산경찰서를 공격하기로 했다. 김석하는 초산경찰서 추목 경찰과 출장소를, 김정호는 동, 서, 외연 경찰관 주재소를, 정이형은 벽동경찰서 여해경찰관 출장서를 각각 습격하기로 했다.

3월 19일 정오, 정이형은 권총 2정을 휴대하고 부하 6명과 함께 결빙된 압록강을 건너 동일 오전 5~6시경에 여해경찰관 주재소에 도착해 5명의 순사 중 니시카와 류키치, 임무, 신현택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야도마루 테츠로에게는 좌대퇴부에 관통상을 입혔다. 또한 출장소와 그 부근에 있는 부역배 김정일의 집을 방화하여 전소시켰으며, 니시카와 순사가 소지한 38식 기총 1정과 방한외투 한 벌을 노획했다.

1925년 7월경에 정의부 제6중대 제1소대장으로서 제 6중대장 문학빈, 소대장 이성근, 김창호 등과 함께 군사활동을 전개하고 국내진공작전 외 군자금 모금활동도 전개했다. 또한 1926년 3월 하순에는 제1중대장으로서 소대장 김형명을 비롯해 약 20명의 부하를 인솔하여 길림산성에 잠입하여 현지 조선인으로부터 의무금을 징수했으며, 친일 밀정들을 체포하는 즉시 사형에 처했다. 또한 당시 길림에 거주하던 김기풍, 남재수, 이덕화, 안규원, 김영호 등이 도박을 하자 이들에게 각각 벌금 100원씩 징수하고 이를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정이형은 1926년 4월 상순에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장춘에 거주하는 조선인 유두승, 황도우 외 수명에게 청구서를 발송했고, 길장선 고유수에 있는 부하 수 명을 파견해 모금하고자 했다. 이에 길림에 있는 중국 경찰이 그의 행적을 수색하자, 김이형은 김형명과 함께 피하여 길림성에 계속 은거했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그의 활동을 1926년 5월 23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경무당국에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평안북도 대안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정의부 제1중대 제1소대장 정이형 이하 여러 부하들은 다수 귀갑형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4월 상순 이래 길림성성 소동문 밖에 있는 oo단원 최만영의 경영인 삼품공사 및 기독교 목사 손정도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서 군자금을 모금 중이라더라. 그들은 길림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 순사 홍건표, 채영묵 및 길림 거류민회장 김정원, 부회장 김병전, 촉탁 채규옥, 홍순걸 등에게 각각 사형선고를 한 후 불원간 폭살하고자 계획중임으로 경찰 관헌은 엄중경계 중이라 하며 (후략)

1926년 1월,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문제로 인해 정의부 자체에 심한 내분이 발생하자, 정의부 행정위원 간부들은 정의부를 이탈했다. 이후 유일하게 남은 전 중앙의회 상임위원장 이해룡은 비상의회격인 군민대표회를 개최했다. 이때 정이형 등 군부 세력은 정의부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정의형은 의용군 제1중대 대표 자격을 맡아 군민대표회에 참여했다. 군민대표회는 정의부의 명칭을 그대로 두고 중앙의회가 성립될 때까지 대임위원 및 중앙행정위원을 뽑았다. 이들은 행정당국을 감시하고 당국의 필요한 요구를 승인하고 행정위원회를 개최할 수 없을 때는 그 사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장이형은 1926년 1월 26일에 발표된 정의부 헌장에도 대표로 참여했고, 그동안 정의부 행정위원들이 추진한 방침은 극히 미온적이라고 판단하고 군사 행동을 강조했으며, 정의부를 항일독립운동 전선의 자치정부로서 민주적인 근대 헌법의 체제를 갖춰서 3권 분립체제,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 등을 엄격히 시행하고자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의부보다 상위의 조직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했다.

2.5. 고려혁명당

이 무렵, 정이형은 독립운동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방략과 이념을 추구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는 최동희와 연락하여 국내와 만주 지역을 통괄하는 조직체를 만들어 항일운동의 역량을 보다 강화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햔 그는 지금까지 추구했던 공화주의에서 벗어나 색다른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방도라고 인식하고 공산주의와 일정부분 타협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계급혁명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 대안으로 '진보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정이형은 공산주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만주에 산재해 있는 정의부원, 다물청년당원, 조선에 거주하는 천도교도와 형평사원을 규합하여 1926년 2월 16일 양기탁, 주진수, 이일심, 최동희, 고활신, 현정경 등 6명과 함께 고려혁명당 발기회를 갖고 고려 혁명당의 조직 방법, 선언, 강령규칙의 제정, 국내외에 특파원 특파, 창립대회소집건 등을 협의하여 결정했다.

이후 1926년 3월 26일에 양기탁, 이동구, 최동희, 김봉국, 이동락, 고활신, 이일심, 주진수, 김광희, 이규풍, 현정경, 현익철, 이성계 등과 함께 양기탁의 집에 모여 재차 결사조직을 준비했으며, 29일에 단체 조직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고려혁명당이라고 명명하고 고려혁명당 결당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양기탁을 의장, 고활신을 서기로 선출했고, 제3국제공산당과 중국국민당과의 연계 등을 결저앴고 조직부, 선전부, 경리부, 검사부 등 혁명운동의 집행기관을 조직했다. 또한 그들은 <고려혁명당 선언>을 발표했다.
복수가 피압박 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임이 판명됨과 동시에 계급만능주의의 사생아인 과거 인류의 역사는 이미 우리들의 면전에서 그 참패의 종국을 자인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안중에는 우리들의 존엄과 권위로써 창조전의 인간 사회의 그 모습은 남기지 못하였다. 고려 혁명은 즉, 고려와 같은 새로운 인간사회를 창조하여야 할 존엄과 권위를 지니는 각 피압박 군중과 피압박 군중을 약동하는 위대한 신생명의 소유자를 새로운 인간사회가 창조해야 할 결승적 최후의 전투의 일원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단결해서 우리들의 혁명의 적인 군벌과 재벌의 근거를 박멸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단결해야 한다. 모두가 함께 단결하여 진검을 뽑아 세계적 흑막의 참극에서 충일한 죄악적 암조의 대혈해를 횡단하고, 인류의 성공의 절정에서 고무되는 역사적 긍요의 신광탑에 진지하게 혁명 제단에 성결한 희생이 되어야 한다.
고려혁명당 선언

1926년 4월 5일, 길림성 영남반점에서 고려혁명당 본부가 설치되었다. 이때 참석한 인물은 정이형, 주진수, 고활신, 양기탁, 최동희, 이규풍, 이동락, 김광희, 오동진, 현정경, 곽종육 등이었다. 고려혁명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았다.
1. 우리들의 인간 실생활의 당면한 적인 모든 계급적 기성제도와 현재 조직을 일체 파괴하고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서 자유평등의 이성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2.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그 근본적인 반항, 우리들에게 공명하는 각 피압박 민족과 결합해서 동일 전선에서 일치된 보조를 취하자.

고려혁명당의 당략은 다음과 같았다.
1. 대국의 성세에 향응하고 지리의 관계를 이용해서 만주를 최선의 전지로 삼는다.
2. 최고 간부는 상해에 두고, 동양의 피압박 민족과 연락을 취하고, 만주 책전상 필요관계가 있는 때는 임시로 적당한 지대로 전치한다.
3. 동양운동의 필요상 제3국제공산당과 합치하는 책략을 취한다.

정이형은 고려혁명당 위원을 맡아 1926년 4월 8일에 오동진, 현정경, 양기탁 등과 함께 '책임 분담의 건', '정당원 승인의 건' 등을 결의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각지에 청년단을 창설할 것과 당의 방침에 위반되는 기성 청년당의 해방, 당 학교의 설립, 교과저 편찬에 대해 결의하기도 했다. 4월 12일에는 경비의 분담, 세포의 조직을 정하고, 양기탁, 오동진, 이동락, 주진수, 이규풍을 중앙심사위원으로 정했다. 그리고 7월 1일에 열리는 중국국민당 최고회의에 최동희를 당 대표로 파견했으며, 당의 발전을 위해 유동열에 이어 청년장교단 대표로 중국국민당에 가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혁명당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0명 정도의 당원을 확보했고, 1926년 8월에는 길림성과 봉천성 등 각 지역에 세포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동락이 1926년 12월 28일 체포된 이래 당의 주요 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자, 정이형은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피신하여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하얼빈에서 조선인 박경종이 경영하는 농업공사에 은신했다가 하얼빈 총영사관 경찰에게 이동구, 방찬문,이한봉, 이원주, 유공삼, 박기돈 등 동지 6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하얼빈총영사관에서 신의주서로 압송되었다가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정이형은 신의주에서 열린 제1회 공판에서 경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고 고려혁명당에 대한 신문에는 완전히 침묵했으며, 말을 못하게 하는 재판에는 대답하지 않겠다며 공술을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재판 내내 지속했고, 제3회 공판에서는 "나는 절대로 공술하지 않을 터이오. 당신네 임의로 처리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그리고 다른 피고들은 속히 판결을 지으시오."라 말하기까지 했다. 이에 재판장이 변호사 최창조에게 의뢰해 정이형에게 공술을 하도록 권유했지만, 정이형은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같은 약한 사람은 불온하다고 삭제로 하라지요. 최선생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은.

그 후 정이형은 제4회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조선일보> 1928년 3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정이형은 검사가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을 뿐 조금도 공포의 기색이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언도 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다가 복심의 개최가 지연되자 동지 이동락, 방찬문, 이원주, 유공삼 등과 함께 공소를 취하하고 평양형무소에서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정이형은 8.15 해방이 도래할 때까지 19년간 평양 형무소와 대전 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면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모범 생활을 해서 타 죄수들로부터 '15번 어른' 혹은 '15번 양반'[4]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처남 강영채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그의 집을 침입한 강도가 그의 정체를 알고 난 뒤 "15번 양반이군요. 안들어올 곳을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돌아갔다고 한다.

정이형은 옥중 생활에서 많은 독서를 했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아들을 통해 많은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특히 <25사>라는 중국역사책은 감방에 항상 비치해 놓고 읽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며, 해방이 되면 좌, 우가 틀림없이 싸울 테니 이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여기고 공산주의자와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특히 간도 공산당 폭동사건의 지도자였던 김근과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해방이 되면 서로 담합하여 좌우의 대립과 분열을 막자고 약속했다고 한다.

정이형은 또 부인 강탄탄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고, 1932년 7월에 그녀와 면회했다. 그는 오랜 세월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않은 것에 죄책감을 품었고, 강탄탄에게 자신을 잊고 출가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탄탄이 듣지 않고 끝까지 옥바라지할 뜻을 밝히자, 정이형은 편지에 "내가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거나, 강탄탄 여사와 인연이 없었으면 좋았을 터인데"라고 적었고, 이를 본 오송리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정이형은 부인, 딸, 조카, 동지들과 옥중에서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그 편지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편지들 중 내용이 불온하다고 하여 발송 허가를 받지 못한 편지들이 일부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정이형이 출옥 때 가지고 온 것을 딸 정문경이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41~1942년 10월 7일, 정이형은 딸 정문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정의 은택을 맛보지 못하는 문경에게
가장 유효한 시기에 품행에 대한 조언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는 장소의 불길과 편지의 부자유도 모다 불구하고 이 편지를 써서 보내오니 부디 잘 이해하고 깊이 명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옥엽(정이형의 이복형인 정원익의 셋째 아들 정문연의 딸)에게도 보여주고 잘 지도하여 주기를 부탁하노라.
우리 조선사회가 부패한 제일의 요한 원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정조관념이 박약한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를 물론하고 교양이 높은 극소수의 인사를 제한 외에는 남성의 정조관념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에 태어난 조선여성들은 참말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에 대한 주의는 언제든지 극히 삼가고 깊이 조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장래에 지도적 입장이 되려거든 상류사회의 행복을 누리려거든 먼저 자기 자신이 단정한 품행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임이라. 현대 소위 신여성이라는 그네들이 구사회에 갇혀 있는 규문을 열고 나와서 하여 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데 남성의 방탕한 악습에 물이 들어서 전반사회를 부패하게 하고 있는 현상이야 참으로 한심하지만 절대로 그런 사람들에게 물들지 말도록 공부하기를 바라노라.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퐁속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성의 태도는 모직물 같이 유화하고 여성의 의지는 강제품같이 강인하여야 함이라. 아모리 꺾어도 꺾이지 않고, 아무리 밟아도 밟혀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함이다. 언제든지 남녀 동등의 인격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여학시대의 품행은 자기 일생을 두고 중대한 영향을 가지는 것이니 문경의 장래를 위하여 명예상 주의할 것이며, 불행한 아버지의 명예를 생각하여서라도 부디 주의하시기를 천만번 부탁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상급학교로 들어갈수록 교제는 넓어지고 신분은 높아지는 것이니 장래가 원대한 청년의 남성 한 사람이라도 못쓰게 만들지 말며 장래가 무한한 자기의 인격상 소호라도 오점이 없도록 근신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같이 순결하고 그 품행을 더욱 더욱 고상하게 하는 것이 공부니까 부디 아버지의 편지를 헛되이 보지 말아주기를 부탁한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 원흠 서, 10월 7일

2.6. 해방 이후

8.15 해방 후인 1945년 8월 17일, 정이형은 대전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는 출옥 후 서울로 올라와 '8.15출옥 혁명 동지회'를 결성했다. 이 동지회는 그가 공산주의자 김근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자우합작을 추구하는 단체였다. 이 단체에 가입한 이는 20~30명이었으며, 국내, 만주, 러시아, 중국 관내 등지에서 활동하다 투옥되었떤 인사들이 회원으로 활동했다. 정이형은 단체의 기관지로 <혁명>을 간행했다. 그는 창간호에 <민족조직화 운동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그의 지향점인 좌우합작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좌익은 좌익으로서 좌익적 역할을 하고, 우익은 우익으로서 우익적 역할을 하면 수레의 양륜같이 정치상에 서로 감시하고 서로 연구하여 우리 민족의 번영 발전만을 위해 나간다면 그 얼마나 행복스럽고경하할 일일 것이랴!

그러나 8.15출옥 혁명 동지회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간의 의견 차이로 결국 해체되었다. 이후 정이형은 1945년 11월 1일에 결성된 대한국군준비위원회가 조직한 대한국군준비총사령부에 가담해 부관부장을 맡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연락관을 보내 좌우통일의 축으로 삼기로 하고 1945년 12월 무렵에 김형민을 제1차 연락관으로 삼아 임시정부에 파견했다. 김형민은 상하이에서 지청천을 만나 임시정부 14개조 공약과 함께 "10만 대군을 가지고 입국할 테니 국내에서는 광복군 국내 지대를 만들라"는 지청천의 서신을 가지고 돌아왔다.

정이형은 지청천의 편지에 근거해 광복군 국내지대 설립을 추진했다. 그는 구한국군, 광복군,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고, 미군정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입국하면 광복군 국내지대에서 보호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임정 광복군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따라서 월급과 무기를 줄 테니 군정 경찰로 들어오라."고 제의했다. 정이형은 한동안 고민한 끝에 이를 받아들여 광복군을 군정 경찰에 편입시키고 돈암장에 33명, 경교장에 33명, 한미호텔에 33명을 배치해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또한 정이형은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임시정부의 권위 밑에 좌우를 통일시키기 위해 비상조치를 강구했다. 그는 좌우의 정치지도자들을 임시정부의 권위를 빌려 한 군데에 모여들게 한 뒤 100명의 광복군 국내지대를 시켜서 그들을 감금시키고 그들이 단일조직체를 만들고 공동선언을 발표할 때까지 못 나오게 하려는 계획을 수립해 김구에게 제안했다. 김구는 이 제안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국무위원과 상의해봐야 하니 기다리라고 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신탁통치 문제가 발생하면서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해 흐지부지되었다.

정이형은 이밖에도 국내 기반이 없는 이승만을 위해 많은 도움을 베풀었고, 프란체스카 도너의 귀국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김구의 반탁 운동을 지원했으며,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정책에 비판을 가했다.
미군이 한국에 진주했을 때, 전 한국인은 열렬한 마음으로 미군을 환영했습니다. 전 국민은 미군을 한국인의 구세주라고 믿었던 천사로서 마음 속으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우리의 뜻밖의 일에 우리는 지금 남한의 국민은 군정에 대해 실망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불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미국의 정책이 남한에서의 지난 2년 동안 실패 외에는 어떤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 정책을 수행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북한을 지옥이라 부른다면, 남한은 전쟁터라 불릴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남한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그런 혼란과 무질서를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정책은 대부분 잘못되었지만 매국노 처단만은 잘하고 있다면서 친일 경찰과 공무원을 그대로 기용하는 것에 대해 시정해 줄것을 호소했다.
우리는 북괴가 하는 모든 정책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모든 한국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국노와 일제의 앞잡이에 대한 숙청과 제거입니다. 반대로 남한 과도 정부는 왜놈의 앞잡이와 매국노의 편을 드는 듯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미국인들은 매국노와 애국적인 한국 사람들을 거의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인들은 매국노와 애국자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일본과의 전쟁 동안 일본의 군국주의에 협력한 매국노들을 아직도 미국 정부가 지지하려는 데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철저하게 숙청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 중장은 이에 대해 1947년 9월 2일자로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정이형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가담하여 1946년 12월 30일에 개최된 제6차 본회의 원법 초안 제2회 독회에 참여하여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간상배 조사위원회'를 특별 위원회의 하나로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의 제안은 재석 59인 중 찬성 40인으로 가결되면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7년 1월 9일 입법의원 제8차 회의에서, 정이형은 김용모, 최종섭, 윤기섭, 고창일, 허간룡, 허규, 하상훈, 박건웅 등과 함께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 기초위원회의 소집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1월 11일에는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 특례기초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특별법기초위원회는 활동에 들어간 지 한 달여 만인 2월 중순경에 <특별조례> 초안을 기초해 과도입법의원에 제출하였고 3월 13일에 상정시켰다. 초안의 구성은 부일협력자, 민족 반역자, 전범, 간상배를 구분하여 이에 대한 범주와 처벌 내용, 이들을 처벌하기 윟나 과정과 절차를 규정한 시행법령 등 전문 5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자 당시 경찰청 제1경찰청 수사과장이었던 이해진은 <자유신문>의 광고를 통해 비난을 퍼부었다.
평소 부랑생활하는 소위 인테리 기생충 등이 하등 실지 비판력도 무한도 없는 이기주의의 두각이 차몰한 자등이요. 요행의 해방지세에 승하여 세상을 맞난 듯이 횡행하며, 자기네가 해방을 전취한 것 같이 몰염치하게 애국자연하고 주책없이 넘나들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규정하다니 망칙모탁하여 인정을 일족 현혹케 혼란에 빠뜨리니 (중략) 친일파 민족반역자 규정을 구실로 사리사욕 획책에 발호하는 중악한 기생충을 단호삼제하여 건국치안의 만무 유감을 기하며 (후략)

이 일로 경찰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쏟아지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사과 표명을 발표해 가까스로 여론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친일파 처벌법은 법의 통과를 반대하는 세력의 방해 공작 때문에 지지부진했고 결국 처벌 규정이 크게 낮춰지고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에 대한 전체적 정의와 구체적 열거가 추상적 규정으로 대체되는 등 대폭 완화된 채로 1947년 7월 2일에 입법의원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을 4개월 동안 인준해주지 않다가 1947년 11월 27일 입법의원에 인분 보류를 통지했고, 결국 친일파 특별법은 묻혀졌다.

정이형은 이후에도 입법의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 통합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소간 냉전과 좌우 진영간의 대립으로 총선거가 어려워지자, 서상일 외 관민의원 43명은 우선 유엔조사위원회에게 소련의 조선독립 천연공작을 배제하고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감시해 달라고 요청하자는 내용의 긴급동의안을 입법위원 205차 본회의에 상정했다. 그러자 정이형은 김규식, 김돈, 박건웅, 원세훈, 여운홍 등 일부 관선의원들과 함께 반대했다.

그러나 긴급동의안 통과를 막을 수 없게 되자, 그는 김규식, 여운홍, 김붕준, 강순, 박건웅, 고창일, 문무술, 허규, 허간룡, 김돈, 황진남, 정주교 등 23명의 관선의원과 함께 총퇴진을 결의했고, 1948년 3월 18일에 개최된 입법의원 제211차 회의는 입법의원에서 이탈한 정이형 등을 제명 처리했다. 정이형은 남북협상을 통해 남북의 통일을 시도하고자 1948년 4월 19일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북협상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정이형은 1950년 5.30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다가 무소속 이종현 후보에 밀려 낙선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에서 어렵게 살다가 1950년 12월에 부산으로 피난 가서 1953년 봄까지 지냈고,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56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등졌다. 향년 5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이형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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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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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제 신재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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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이형 본인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2] 모친 수원 백씨가 입암 친정집에 가서 정이형을 낳았기 때문에 용천군 양하면 입암이 실제 출생지라는 설도 있다. [3] 법명은 운허(耘虛) [4] 정이형의 죄수 번호가 1515번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