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 천도교 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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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조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 |
교령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이종린 | 정광조 | 이종린 | 공탁 | |
5대 | 6-10대 | 11-15대 | 16대 | |
공진항 | 신용구 | 최덕신 | 김명진 | |
17대 | 17-19대 | 20-21대 | 22대 | |
이우영 | 이영복 | 고정훈 | 정운채 | |
23-24대 | 25-26대 | 27대 | 28대 | |
오익제 | 김재중 | 김광욱 | 김철 | |
29대 | 30대 | 31대 | 32대 | |
이철기 | 한광도 | 김동환 | 임운길 | |
33대 | 34대 | 35대 | 36대 | |
박남수 | 이정희 | 송범두 | 박상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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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55년 2월 1일 |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 (현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막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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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4월 3일 (향년 85세) |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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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명 | 박용호(朴龍浩) |
이명 | 박남수(朴南壽) |
자 | 도일(道一) |
도호 | 춘암(春菴) |
존호 | 상사(上師) |
종교 | 천도교 |
본관 | 밀양 박씨 |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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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교주.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초년기
1855년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 장촌면 막동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막골)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박명구(朴明九)와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상민 집안으로[1] 매우 가난했다. 그는 11살 때 비로소 한학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5세가 되던 해에는 지가서(地家書)와 의서(醫書) 등을 공부했다.1883년 동학에 입도한 박인호는 이듬해 공주의 가섭사 사은암에서 49일간 기도와 수련을 했고, 10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어육주초(魚肉酒草)를 금지하며 교리를 공부하고 심성을 연마했다. 심지어 낫자루를 베고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동학의 포교에도 심혈을 기울여 여러 인재들을 데려왔고, 그 결과 교인 수천 명에 포 십여 개를 관할하는 대접주로 성장했다.
2.2. 동학 농민 혁명
박인호는 동학을 창시한 창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1893년 2월 소두(疏頭)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봉소(奉疏) 손병희, 김연국, 박덕칠 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최제우를 신원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93년 보은집회 때는 '덕의대접주'에 임명되어 덕의포의 관할 교인들을 이끌고 참가했다.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박인호는 제2차 봉기 때 덕산의 대접주로서 그해 10월 1일에 참가했다. 그는 예포 대접주 박덕칠 등과 연합해 해미, 덕산, 예산, 온양, 당진, 홍성 등지에서 관군, 일본군, 그리고 양반들이 동학군 진압을 위해 일으킨 민보군과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월 27일 당진군 면쳔면 승전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400명, 관군 500명, 민보군 수천 명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말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후, 박인호는 적의 추적을 피해 각지를 유랑해야 했다. 그는 오리정 주막의 교인 김월화의 도움으로 주변 금오산에 토굴을 파고 생활하다가 칠갑산 느티정에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했다. 3년이 지나 1897년, 그는 김명배, 김의형, 김주동과 함께 최시형을 찾아갔고 이듬해엔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손병희를 차기 교주로 받들었다. 1898년 4월 최시형이 체포되자 그는 최시형을 구하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최시형은 그해 음력 6월 2일(양력 7월 20일) 처형되었다. 박인호는 최시형의 유해를 수습해 안장했다.
2.3. 갑진혁신운동
최시형 사후 교단에서 차기 교주 자리를 놓고 분란이 벌어졌을 때, 박인호는 생전의 최시형이 지시한 것을 따르기로 하고 손병희를 지지했다. 그는 1900년 7월 풍기에서 개최된 설법식에 참석해 손병희의 도통 승계를 인정했고, 손병희가 문명개화운동으로 동학의 노선을 전환할 때 이를 지지했다.1901년 손병희가 일본으로 망명한 뒤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자, 박인호는 손병희의 심복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그해 10월 손병희의 명령에 따라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문명개화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리고 각지에서 청년 24명을 선발하여 교토 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시켰다.
1904년 초, 동학의 지도자들과 함께 도쿄로 간 박인호는 손병희로부터 민회 설립에 대한 지시를 받고 돌아와 1904년 4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민회의 명칭을 중립회(中立會)로 하였다가, 10월 초에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갑진혁신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먼저 전 신도들을 대회에 참가케 한 뒤 일제히 두발을 자르고 검은 옷을 입게 했다. 천도교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루에 머리를 깎은 진보회원이 16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1905년 12월 1일 이용구가 진보회원들을 대거 이끌고 일진회와 통합된 뒤 노골적으로 친일 행각을 하자 동학은 친일집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손병희는 이용구 등을 교단에서 추방한 뒤 동학이란 교명을 '천도교'로 바꾸었다. 당시 도쿄에 있었던 박인호는 12월 5일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대헌을 제정하여 국내에 보냈고, 이후 천도교의 조직을 본격적으로 개편했다.
박인호는 1906년 한 해 동안 교장, 고문과원(顧問課員), 교서편찬원, 중앙총부 금융관장, 중앙총부 고문을 거쳐 경도사의 직책을 맡았다. 또한 교단의 정비를 위해 1년 동안 자신이 맡은 충청도에 내려가 포교 활동을 펼치면서 교당 건축기금 모금을 지휘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박인호는 1907년 12월 10일 차도주가 되었고, 이듬해 대도주 김연국이 시천교로 떠나자 1908년 1월 18일 대도주가 되었다.
대도주 박인호는 천도교의 대표자로서 포교를 확대하고, 교제를 정비하였다. 박인호의 지도에 따른 포교활동의 결과, 1914년에 경기도의 경성, 수원, 이천, 충청남도의 서산, 충청북도의 청주, 평안남도의 평양, 강동, 성천, 안주, 중화, 덕천, 평안북도의 의주, 초산, 삭주, 정주, 선천, 영변, 구성, 강계, 함경남도의 함흥, 영흥, 북청, 함경북도의 경성, 전라남도의 장성, 순천, 강진, 전라북도의 전주, 익산, 황해도의 서흥, 안악, 경상남도의 진주, 경상북도의 대구, 강원도의 춘천, 평강, 횡성 등지에 대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 대교구 산하에 총 200개 남짓 교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총인원(叢仁院)이란 의회(議會)를 설립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박인호는 강습소와 학교를 설립·운영하여 교인들에게 근대적인 지식을 교육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교리강습소규칙을 제정한 후 전국에 교리강습소 700여 곳을 설치하여 교인들에게 천도교의 신교리와 서양의 신지식을 교수하였다. 이를 통해 교인들에게 문명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박인호는 1909년 동덕여학교, 1910년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보성소학교, 이외 용산 문창학교, 마포 보창학교, 대구 교남학교, 일신여학교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여 운영함으로써 남녀 불문하고 인재를 양성했다. 이렇듯 그가 설립한 학교들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훗날 3.1 운동과 6.10 만세 운동, 신간회 같은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2.4. 3.1 운동 지원
박인호는 천도교의 대도주로서 3.1운동 봉기를 위한 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1919년 2월 10일에 당시 금융관장이었던 노헌용(盧憲容)에게 명해 3.1 운동 계획을 주도하던 김상규(金相奎)에게 3만 원을 지급하게 했고, 2월 21일에도 운동비용 5천 원을 제공했다. 또한 박인호는 손병희로부터 5천 원을 기독교 측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아 노헌용에게 건넸고, 노헌용이 다시 최린에게 제공했다. 그 외에도 박인호는 몇 차례에 걸쳐 3.1운동 자금을 지원해 총금액이 6만 5천 원에 달했다.또한 박인호는 2월 25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지도급 교인 30여 명을 서울로 불러 3.1운동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다. 그는 독립선언서 서명 예정자로 거론되었지만 3.1 운동 후 감옥에 갇힐 게 분명한 손병희 대신 천도교를 이끌어야 했기에 마지막에 제외되었다. 손병희는 3월 1일 전날에 박인호에게 훈유서를 내려 교단의 일을 전부 맡기겠다고 알렸다.
그대는 천도교를 주관하고 있는 사람으로 우리 교의 일은 모두 그대에게 맡겨져 있어 안심하고 있는데 조상은 4천 년 이래로 이 조선을 분묘의 땅으로 하고 있으니 이제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어서 나라를 위하여 진력하기로 하는 바 그대는 어디까지나 종교를 위하여 진력해달라. 또 다수의 사람이 자기를 따라 소동을 일으켜서는 안 되니 그때에는 교도를 감독하여 단속해 달라.
또한 박인호는 1919년 2월 28일 천도교월보의 편집원 이종린, 사립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장 윤익선과 함께 독립선언의 전말을 기술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선독립신문>의 원고를 작성하고 이를 이종린에게 전달해 천도교가 경영하고 있는 인쇄소 보성사에서 약 1만 매를 인쇄하게 했다. 이후 인쇄물 전부를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임준식을 시켜 서울 파고다공원에 모여 있던 민중들에게 배포했다.
3월 2일, 박인호는 교당에 모인 교도들에게 전날 일어난 운동을 설명하면서 동요하지 말고 후에 천도교도가 결속하여 운동에 가담할 시기가 오면 중앙총부에서 취지를 모두 통보할 테니 그 전까지는 안심하라고 당부했다. 이후 일제가 교단의 재산을 압류하자, 박인호는 다시 강계교구 모금운동을 지시했다. 그리고 3월 5일에 대교구장 이정화(李晶和)와 강계천도교의 교훈 김명준(金明俊)을 불러 독립을 위하여 대표자 또는 위원을 프랑스 파리의 강화회의와 상해에 파견하고자 하는 본인의 계획을 설명하고, 일제에 의해 교단의 재산이 압수되었으니 교구로 돌아가 신도들에게 운동자금을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박인호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는 혐의가 적용되어 3월 10일에 체포되었고, 그의 집에 있던 각종 서류와 자금 70만 원이 압수되었다. 박인호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이 적용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다음날 1년 8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한편, 박인호가 옥중 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이정화와 김명준은 박인호의 사전 지시에 따라 3월 13일 밤에 강계, 자성, 후창 3군의 천도교 직원들에게 박인호의 명령을 전달하였고, 각 군별로 모집된 운동자금은 백인옥이 관리했다. 강계교구모금운동은 이미 대교당 건축비로 받아두었던 성금을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모두 되돌려 준 양 영수증을 받아두는 등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모인 대교당 건축비와 3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비밀리에 모집된 금액은 전부 1만 7765원 60전이었다. 모집금액은 천도교중앙총부로 5천 원씩 두 번에 나누어 송부하였으며, 손병희에게 독립운동자금으로 2607원 60전을 송부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곧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되었고, 1919년 5월에 중앙교단의 간부 전원과 각 지방 교단 간부 및 교인 등 총 159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2.5. 독립운동 지원
박인호는 출옥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했다. 그는 상하이와 베이징에 세워진 전교실을 통해 임시정부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상해와 북경의 천도교 전교실에 제공된 자금은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최동오와 신숙을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과 그 개혁을 위하여 활용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1921년 9월 태평양 회의의 개최와 관련해 임시정부로부터 모종의 활동을 하라는 지령을 받았다는 혐의를 적용해 대종사장인 정광조, 현기관장인 오상준, 경성대교구장인 장효근, 천도교청년회장인 정도준과 함께 체포했다가 며칠만에 훈방시켰다.한편 1921년 12월에는 동학의 지원을 받는 학교였던 보성전문을 법인화해 김기태와 박인호 등 58명의 공동명의로 ‘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22년 1월 18일 박인호는 손병희로부터 교주 직임을 물려받았다. 그해 5월 손병희가 사망하고 천도교가 구파, 신파로 분리되자 그는 천도교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박인호는 "자기의 주장과 다르다고 남을 비방하면 되겠는가? 그 시간이 있으면 주문을 더 생각하라." 하며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주장했고, 1925년 중반 천도교가 중앙총리원, 교인대회, 통일기성회로 분열되자 "이러한 큰 도에 적은 일을 힘쓰지 말고 믿음으로 통일하고 규모로 일치하라는 신성의 가르침을 따라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이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하는 윤고문(輪告文)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5년 말 천도교의 중앙총리원을 장악한 최린 등이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와 영합하자, 박인호는 이에 맞서기 위해 1925년 12월 권동진, 오세창 등 통일기성회, 오영창이 이끄는 교인대회와 연합해 천도교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1월 중앙위원회의 명칭을 중앙총리회로 변경했다. 이후 그는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로서 최린 등이 이끄는 신파와 맞섰다.
1926년 3월, 박인호는 구파의 원로인 이종린, 권동진과 천도교청년동맹의 간부인 박래홍, 백래원 등과 함께 6.10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사회주의 세력과 제휴하기로 하고 제2차 조선공산당의 당수이지만 천도교 교인이기도 한 강달영과 연계해 민족유일당 결성을 준비했다. 1926년 4월, 박인호가 이끄는 천도교 구파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청년전위단체로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6년 5월 10일 천도교청년동맹원인 박내원은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회장인 권오설과 함께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박내원이 구파의 원로인 권동진과 박인호의 양자 박내홍에게 계획을 설명해 마침내 박인호에게 전달되었다. 박인호는 6·10만세운동 추진을 승인하고, 자신의 양자이자 천도교청년동맹의 대표인 박래홍으로 하여금 천도교청년동맹원들을 참여시키게 했다. 그러나 거사 4일 전 계획이 발각되어 박내원, 손재기, 김덕연, 최덕현 등이 체포되었다. 박인호는 6.10 만세 운동의 추진을 후원했지만 사건 관계자들이 함구한 덕분에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1927년 신간회가 출범했을 때, 천도교 구파의 원로들이 대거 참여했다. 박인호가 이를 지시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신간회 내에 천도교의 비중이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박인호가 별도로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천도교 구파는 신간회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지만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로는 민족운동을 중단하고 종교활동에 임했다.
2.6. 멸왜기도운동
박인호는 1937년 4월 4일 노환을 이유로 교주에서 은퇴했다. 이후 그는 안골의원에 자주 찾아가 주사와 약으로 꾸준히 치료해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단행한 이래로 한민족을 일본인과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박인호는 이에 맞서 멸왜기도운동을 준비했다. 그는 신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식고문(食告文)'을 아침과 저녁을 먹을 때마다 읽으라고 지시했다.생각(生覺)하는 모신 내한울님이 본래 오신 한울님을 받들어서 먹고 굴신동작(屈伸動作)하는 것이 곧 내인줄을 홀연히 깨달은 고로 생각하는 모신내 한울님 은덕을 잊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다먹을 때까지 심고를 마음에서 잊지 아니하면 잘하는 심고니라. 이상 식고문의 이치를 알고 항상 염념불망(念念不忘)하면 도통이 그 중에 있나니라.
그는 이 식고문을 홍순의와 김재계를 통해 황해도 전역으로 보낸 뒤 다시 전국에 발송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1937년 8월 10일, 박인호는 최준모, 김경함(金庚咸), 한순희 등과 상희하여 활동 자금에 충당하기 위한 특별희사금을 모집했다. 그는 전 국토를 4부분으로 나누어 홍순의를 비롯한 교단들의 간부들이 각각 담당하게 했는데, 많은 교도들의 참여로 비밀리에 324원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박인호는 멸외기도문을 특별기도로서 시행하게 했다.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여 속히 조선독립달성하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더러운 오랑캐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하지만 1937년 12월 20일, 박인호는 김재계, 최준모, 한순희 등과 함께 1938년에 특별기도에 대해 협의하다가 종전대로 특별기도를 실시하면 일제에게 탄압을 받게 된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소멸하여"라는 구절을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 빨리 확립되도록 기원하여"라는 구절로 고쳤다. 다만 교도들에게는 이러한 문구의 변형이 일제를 기만하는 수단에 불과하므로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지시했고 특별기도문을 황해도에 유포했다.
그러나 1938년 2월 17일 최택선의 밀고로 멸왜기도운동을 파악한 일제가 대대적으로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홍순희, 최준모를 비롯해 지도자 수십명과 교인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박인호는 병상에 있었으므로 심문만 받았다. 하지만 일제는 멸왜기도운동이 크게 확대될 경우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불리해진다고 판단해 5월 20일에 교인들을 모두 석방시켰다. 그러나 구파의 천도교대헌을 강제 폐지시켰고 중앙의 간부들을 모조리 교체했다. 김재계, 손필규, 이강우, 김정삼 등 4인은 출옥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그 외에도 112명이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몇 년 안에 사망했다.
2.7. 사망
멸왜기도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박인호는 병환에 시달리다가 1940년 4월 3일 오후 3시 35분에 서울 내수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 그의 장례식은 중앙교당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고, 4월 7일 중앙대교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된 뒤 유해를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 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24년이 지난 1964년 3월 28일 그의 유해가 경기도 포천군 무봉리로 이장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인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둘러보기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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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교주(校主)[1] | ||||
초대 이용익 |
2대 이종호 |
3대 손병희 |
<nopad> 1921년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2] |
<nopad> 1932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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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 |||||
초대 김성수 |
1-4대 이활 |
5-8대 김상만 |
9대 김용식 |
10대 채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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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대 김병관 |
13대 현승종 |
14·15대 김정배 |
16-19대 김재호 |
[1]
어머니가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 더 낮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