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필규(孫弼奎) |
호 | 반암(盤菴) |
생몰 | 1870년 7월 20일 ~ 1938년 8월 15일 |
출생지 |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1] |
사망지 | 충청남도 논산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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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필규는 1870년 7월 20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에 능통했다고 하며, 일찍이 동학에 입교한 뒤 1904년 손병희, 권병덕, 권동진, 오세창 등과 제휴하여 각처를 다니면서 동지들을 규합하고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다. 이후 1907년 12월 권병덕과 함께 천도교를 탈퇴한 뒤 시천교에 입교했지만 1915년 4월 권병덕이 시천교에서 출교당하자 그와 함께 중앙시천교본부를 개교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교세가 갈수록 악화되자 결국 1916년 권병덕, 이근상, 박준관, 김기태 등 30여 명의 지도자 및 소속 교인들과 함께 참회식을 거쳐 천도교로 돌아왔다.1918년 손병희 산하에서 교령(敎領)의 책임을 맡아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천도교 은진 교구장에 발탁된 데 이어 지방순회 위원 겸 논산군 교구장이 되어 논산, 대전, 공주, 부여, 임천, 청양, 고산, 진산, 금산, 진안, 용안, 함열, 이리, 옥구, 군산 등지에 관내교인들을 밀파(密派)하여 독립 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12일 논산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우고 김태오(金泰午), 이백순 (李伯純), 이근옥(李根玉) 등과 함께 미리 태극기를 그려 두었다.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 30분경, 손필규는 동지들과 함께 논산읍 주민들과 학생 1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논산읍 주민들이 가세하면서 군중은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포교 화동을 전개하던 그는 1938년 2월 교주 박인호의 지령으로 실시된 멸왜기도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다가 병보석 석방되어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필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