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6:29:11

장도빈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파일:external/img.nate.com/241643001.jpg
출생 1888년 10월 22일
평안도 상원군 읍내방 동부리
(현 평양시 상원군 상원읍)
사망 1963년 9월 12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863호
본관 결성 장씨[1]
아호 산운(汕耘)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역사학자, 교육가, 언론인.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8년 10월 22일 평안도 상원군 읍내방 동부리(현 평양시 상원군 상원읍)에서 자작농인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 고향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 평양 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1907년에 안창호의 주도로 국내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8세 연상인 신채호 등과 함께 양기탁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은사 박은식의 소개로 약관의 나이에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가 되었다. 당시 와병 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

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친일 내각과 친일 단체를 비판한 글인 '금일 대한제국의 목적지', '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1910년에는 정식 논설 위원이 되었고, 그 후 논설 주필로 활동했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다니면서 법학 공부를 병행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진 후인 1911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경성부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인 이른바 ' 105인 사건'으로 검거 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1913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곳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 홍범도· 이동휘· 이상설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쓰기도 했다.

1916년부터 1918년 사이에 병고의 몸으로 귀국,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국사'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 조만식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19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 도서 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사이에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자영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숱한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년부터 1945년 사이에는 연해주의 발해 고적 답사를 통한 역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하여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에는 조선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 언론에 대항하였다. 같은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하여 대표가 되었다.

1947년에는 6촌 동생 장형[2]과 함께 단국대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단국대학교의 교가를 작사했고, 초대 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당하여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 편찬위원· 고등고시 위원 등을 지냈다.

1963년 9월 12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으며,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사후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가족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었다가, 2000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

슬하에 장치혁(張致赫) 고합그룹 창업주와 중앙대학교 무역학과 교수를 지낸 장치순(張致順)이 있다.


[1] # [2] 원래 신익희가 주도하던 국민대학교의 이사장이었으나, 신익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을 떠나 이승만측과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자, 이를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배신'이라 여겼다. 그래서 장형은 신익희와 결별하고, 임시 정부와 김구의 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으로서, 1947년 11월 1일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