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01년 |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서내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하서동 15번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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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8월 29일 (향년 65~66세) |
일본 도쿄도 | |
본관 | 달성 서씨[2] |
학력 |
대구고등보통학교 (중퇴) 메이지대학 전문부 ( 경제과 / 졸업)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
가족 | 아들 서웅형[3]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62호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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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독립유공자 서상일은 이복 형이다.[4]
2. 생애
1901년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서내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하서동 15번지)에서 아버지 서봉기(徐鳳綺, 1847 ~ ?)[5]의 6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경주 이씨 이순득(李順得)[6]은 아버지 서봉기의 둘째 부인이었다.1914년 대구고등보통학교[7]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이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 조달이 어려워서 신문 배달부, 직공, 집배원, 인삼 장사 등으로 일하면서 고학했다.
1920년 1월, 앞선 1917년 1월 23일 홍승로(洪承魯) 등이 조직한 '도쿄노동동지회(東京勞動同志會)'가 도쿄조선고학생동우회로 전환되자, 다시 홍승로·이기동(李起東)·한윤동(韓潤東)·류진걸(柳震杰)·김낙준 등과 함께 별개의 도쿄노동동지회를 재조직하여 재일 한국-조선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20년 4월 28일에 영친왕과 이방자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8], 이 결혼이 장래 조선의 독립에 큰 장애가 될 거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폭탄을 투척해 결혼식을 막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및 이완용 등을 암살함과 동시에 일본 제국 내무성· 외무성· 경시청 등을 폭파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1920년 2월부터 동지 양주영(梁柱瑛), 일본인 학생 이마이 이쿠로(今井生郞), 우에무라 킨사쿠(上村欣作) 등과 함께 생선을 잡는다는 핑계로 폭탄을 제조한 뒤 왕자원(王子原)[9]에서 실험했다. 이후 주오대학 학생 신모(申某)와 의논해 집배원으로 가장하기로 결정하고 집배원 옷 한 벌을 구했다. 그러나 신모는 사실 일본의 밀정이었고, 그의 밀고로 모든 계획이 드러나 버렸다. 결국 1920년 4월 11일에 도쿄도 칸다구(神田區) 니시칸다(西神田) 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0년 4월 14일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10] 1920년 9월 22일 도쿄공소원에서 금고 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11] 이후 1924년 5월 26일 오전 10시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12]
이후 류진걸 등과 함께 형설회(螢雪會)를 조직해 재일 한국-조선인의 노동운동에 진력했고, 한편으로는 아나키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및 조선동흥노동동맹회(朝鮮東興勞動同盟會)[13]와 제휴하며 친일 단체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해 투쟁하였다. 또한 최낙종(崔洛鍾)·이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 잡지 「노동(勞動)」을 발행하여 일본과 조선 국내에 배포하였다. 1936년에는 자신의 자택을 조선동흥노동동맹회 사무실로 이용하도록 배려해주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에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일본 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했다.
1967년 8월 29일에 일본 도쿄도에서 사망했다. 이에 재일교포 사회는 사회장에 준하는 단체장의 예로써 장례식을 거행했다. 유해는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이복 형 서상락(徐相洛, 1879.9.20 ~ 1930.1.19)은 독립유공자 서상락과는 동명이인으로[14], 아버지 서봉기의 정실 부인인 김해 김씨 김기선(金基善)[15]의 소생이다. 1907년( 순종 1) 11월 28일 재무서 주사(財務署主事)에 임명되어[16], 1909년(순종 3) 2월 6일 퇴임하였고[17] 1923년 9월 30일부터 1930년 1월 19일까지 초대 칠곡군 동명면 면장을 지낸[18] 대한제국 관료 출신의 일제 관료였다.
[1]
일본 외무성 기록 - 1920년 3월 3일 재경성 조선학생 독립만세와 관련된 건
[2]
학유공파(學諭公派) 24세 상(相)○ 항렬.
족보
[3]
徐雄炯
[4]
서상일은
은진 송씨 송규범(宋圭範)의 딸 송경산(宋慶山)의 소생이다.
[5]
족보명 서봉년(徐鳳年), 자는 응경(鷹卿). 徐鳳基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
[6]
이인수(李寅壽)의 딸
[7]
현
경북고등학교
[8]
1920년 4월 28일 동아일보 기사
[9]
왕자주(王子州)라고도 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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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20년 9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12]
1924년 5월 30일 동아일보 기사
[13]
1926년 9월 11일
양일동·김석영 등이 창립하였고, 1927년 9월에는 이병엽(李炳燁)이 산하 다카다부(高田部)를 창립하였다. 조선동흥노동동맹회는 1938년 1월 27일 자진 해체되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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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명국(金明國)의 딸이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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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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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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