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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파일:김복한.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원오(元五) / 지산(志山)
본관 장동 김씨[1]
출생 1860년( 철종 11) 7월 24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면 조휘곡
(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조실골마을)[2]
사망 1924년 5월 4일[3][4] (향년 63세)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
묘소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5]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6]
나는 대대로 녹을 받은 신하의 후손[7]으로 임금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평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갑오년(1894년) 6월 이후에는 시골에 칩거하여 평생 자정(自靖[8])하고자 하였더니, 지난해(1895년) 8월의 대변(大變)에 이르러서는 원통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조금도 살 마음이 없던 중, 다시 11월 15일의 사변(事變)이 일어났다. 이 역시 흉악한 역신들의 소행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신민(臣民[9]) 된 자의 박절(인정이 없고 쌀쌀하다)한 정이 격동하여 시세와 역량도 헤아리지 못하고 복수하고 설치(雪恥-치욕을 갚음)할 계획을 세우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을 도모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가볍게 일으켰다고 죄를 준다면 달게 받겠다.
- 1896년 2월 25일 김복한의 법정 진술.( 출처)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 ~ 관직 생활2.2. 항일 투쟁2.3. 경술국치 이후2.4. 사후
3. 가족 관계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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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비슷한 시기 살아 같은 생각을 가졌던 복암 이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학문적으로는 당대 기호학파, 그리고 신 안동 김씨로서는 특이하게 권상하와 한원진의 노론 호론을 계승했다. 동시대의 호론계 독립운동가 송병선이 송시열의 가학을 계승한 형태였다면, 그는 순조조 벽파 숙청에 엮여 사망한 한원진의 제자 김한록[10]의 도통을 이었다고 자부했다

2. 생애

2.1. 초년기 ~ 관직 생활

김복한은 1860년(철종 11) 7월 24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면 조휘곡(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운곡리 조실골마을)에서 아버지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과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 李氏, 1824 ~ 1866. 11. 18.) 이규(李圭)의 딸[11]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12]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자호란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으로 강화도에서 농성하다가 순절한 김상용의 후손[13]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현감(縣監:종6품)으로부터 군수(종4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직에 출사한[14]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러나 6살 되던 1865년 아버지를 여의고 연이어 7살 되던 1866년 어머니 연안 이씨와 조부 김정균까지 세상을 떠나 천애고아가 되었지만, 다행히 18촌 지간의 고조부뻘인 김민근(金敏根, 1845 ~ ?. 6. 28)[15]의 손에 자라면서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1890년( 고종 27) 음서 선릉 참봉(종9품)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세자익위사 우시직(世子翊衛司右侍直:정8품)을 지냈다. 1892년( 고종 19) 세자익위사 좌시직(世子翊衛司左侍直:정8품)을 지내다가 그해 시행된 별시 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종5품)에 제수되어 고종을 가르치는 경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그해 사간원 정언(正言:정6품), 부사직(副司直:종5품),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부사과(副司果:종6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종6품), 경연청 검토관(經筵廳檢討官:정6품), 친군통위영군사마(親軍統衛營軍司馬), 서학 교수(西學敎授:종6품)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정5품), 부호군(副護軍:종4품),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 등을 지내다가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아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정6품)에 제수되어,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16]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을 맡기도 했다. 그 뒤 응교(應敎:정4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종3품) 등을 지내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정3품)에 제수되면서 당상관의 반열에 올랐으며, 형조 참의(刑曹參議:정3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등을 역임했다.

1894년 우부승지(右副承旨:정3품) 등을 지내다가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2.2. 항일 투쟁

2.2.1. 1차 홍주의병

뒤이어 1895년에 을미사변 단발령이 연이어 터지자, 홍주부 관내의 유림 세력들을 모아 의병 운동을 전개해 관아가 있던 홍주읍성에 들어가 창의소를 세우고 총수에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총수에 추대된 다음 날에 당시 홍주부 관찰사(이전의 홍주 목사)인 이승우(李勝宇, 1841 ~ 1914)[17]가 끝내 배신하고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 지도부를 체포하면서 의병 운동은 허무하게 실패하였다.

체포된 그는 구금된 뒤 한성부에 소환되어 재판[18] 끝에[19] 10년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을미의병 해산 조칙을 내리기 전의 일이고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 및 친일파 처단이 취지였으므로 특별히 용서해주라는 고종의 특지[20]를 받고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구금 과정에서 얻은 각기병으로 이후 보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해 성균관장(成均館長)에 제수되었으나 2달 만에 사직했고, 이어 1898년 중추원 2등 의관(二等 議官)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역시 사직했다.

2.2.2. 2차 홍주의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이자 친척인 이설과 함께 그 해 12월 2일 서울로 올라가[21] 을사오적의 처벌과 의병 세력들을 모아서 일본을 몰아내고,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지만, 이틀 뒤에 일본군과 친일파가 장악한 조정에서 체포해 효과가 없었다.

그 후에 풀려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빠지게 되면서 재차 의병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안병찬 등 옛 동지들에게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해 이들은 민종식을 중심으로 의병의 기치를 내걸고 홍주읍성을 점령했지만,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의해 와해되었고 지도부들은 죽거나 체포되었다. 김복한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공모한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순사들이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면서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위협까지 가했는데, 다행히 같이 있던 조선인 순검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1907년 12월에 결성군 산수동(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연이은 체포와 구금 등으로 인해 중풍에 걸려 남의 도움 없이는 생활을 하기 어려워졌다.

2.3. 경술국치 이후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죄인을 자처해 은거하였다.

그 뒤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고 3.1 운동이 일어나자 안병찬, 곽종석 등 충청도 영남의 유림 137명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 데 참여했는데,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2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대구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그해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공주감옥에서 수 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병으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한 그는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을 양성하고 지역 내 민족운동의 기반이 되는 '인도공의소(人道公議所)'에 참여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다가 1924년 5월 4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4. 사후

그의 묘는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수동마을에 있으며, 전처인 연안 이씨(이의익(李毅翼)의 딸, 1855. 7. 2. ~ 1893. 6. 29.)과 후처 청주 이씨(이주찬(李周讚)의 딸, 1882 ~ 1905. 2. 6.[22])과 같이 합장되었고, 해당 묘역은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1984년 5월 17일 지정)되어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털 홈페이지 - 김복한 묘(金福漢 墓)

한편, 2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좌진이 1930년 암살을 당하고 나서 중화민국 길림성 해림현에 임시로 암매장되었다가 부인 오숙근 여사가 1940년 9월 해림현으로 가서 밀감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담아 와서 김복한의 묘소 인근에 가명을 써서 암매장했다고 한다.[23]

8.15 광복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후에 지역 유림들과 홍성군에서 묘소 아래에 '추양사(秋陽祠)'를 세워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 문집으로는 사후 후손들과 제자들이 편집한 『지산집(志山集)』이 있다.

3. 가족 관계[24]

  •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 = 연안 이씨(이규(李圭)의 딸, 1824 ~ 1866. 11. 18) → 김상용의 3남 김광현(金光炫, 호는 수북(水北), 1584. 9. 22 ~ 1647. 7. 23)의 직계 11대 종손.
    • 김복한 = 연안 이씨(이의익(李毅翼)의 딸, 1855. 7. 2 ~ 1893. 6. 29) = 청주 이씨(이주찬(李周讚)의 딸, 1882 ~ 1905. 2. 6)
      • 김은동(金殷東, 1888. 6. 20 ~ 1945. 6. 24)
      • 김노동(金魯東, 1899. 1 .16 ~ 1958. 12. 20) → 상술한 각주의 내용처럼 23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승진(金承鎭, 1841. 7. 22 ~ 1920. 3. 8)에게 양자로 들어간 김복한의 친동생 김교한의 양자로 들어갔다.
      • 김명동(金明東, 1903. 11. 25 ~ 1951. 12. 2)

두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는데, 그 중 세 아들은 부친을 간병하면서 지역 내 민족 항일운동인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 신간회 등에 참여했으며, 3남 김명동은 해방 이후 공주군에서 제헌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사망하였다.[25]

4.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21~222p
  • '안동김씨 대종중' 홈페이지


[1] 문충공 상용(尙容)파 27세 한(漢) 항렬. 백야 김좌진에게는 21촌 지간의 족질(族姪)이 되며, 김두한과는 같은 항렬이다. [2] # [3] 음력 4월 1일. [4] 1924년 5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 '……홍성군 자택에서 신음 중이더니 지난 4일에 홀연히 장서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다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24년 3월 29일로 적혀있고, 신 안동김씨 족보에는 1924년 3월 28일로 적혀있다. 파일:김복한(신 안동 김씨) 족보 (안동김씨 대종중 홈페이지 참조).jpg [5] # [6] 1963년 3월 1일에 추서. 추서 당시에는 '건국공로훈장 단장(建國功勞勳章 單章)'이었으며, 1967년에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건국훈장 국민장(建國勳章 國民章)'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다시 1990년에 법이 개정되면서 현재의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부르고 있다. 다 같은 명칭이니 오해하지 말 것. 여담으로 독립장은 건국훈장 중에서 제3등급에 속한다. [7]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후손인 점을 강조. 실제로 신 안동 김씨는 김상용, 김상헌 형제 이후로 명문 가문으로 자리잡아 대대로 고위직에 올랐던 인물들이 많았다. [8] 직역하면 스스로 평안해지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쓰는 단어가 아니며 혼자서 조용히 살겠다는 의미인 듯. [9] 신하와 백성으로 군주국에서 임금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람들을 이르는 말. 당연하지만, 황국 신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10] 김관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1] 이설의 고모라고 한다. [12] 남동생 김교한(金喬漢, 1862. 11. 19. ~ 1940. 12. 15.)이 있었는데, 23촌 지간의 족숙(族叔)인 김승진(金承鎭, 1841. 7. 22. ~ 1920. 3. 8.)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후 김교한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생가 친형 김복한의 차남인 김노동(金魯東, 1899. 1. 16. ~ 1958. 12. 20.)을 양자로 들였다. [13] 김상용의 셋째 아들인 김광현(金光炫, 호는 수북(水北), 1584. 9. 22. ~ 1647. 7. 23.)은 부친이 순절한 이후, 홍주목 고남면 오두촌(현재의 홍성군 갈산면 오두리)으로 내려가 살았으며,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복한은 김광현의 직계 11대 종손이다. [14] 11대조 김광현(金光炫, 1584. 9. 22. ~ 1647. 7. 23.) : 1612년( 광해군 4) 증광시 생원시 진사시에 각각 1등 5위, 3등 46위로 입격 → 찰방(察訪:종6품)을 지내다가 1623년( 인조 1) 정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 홍문관 수찬(修撰:정6품)을 지내다가 1626년(인조 4) 중시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 →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
10대조 김수인(金壽仁, 1608. 7. 13 ~ 1660. 6. 19) : 음서로 익산군수(益山郡守:종4품)
9대조 김성우(金盛遇, 1630. 10. 16 ~ 1717. 12. 8) : 1652년( 효종 3) 증광시 진사시에 3등 19위로 입격
8대조 김시걸(金時傑, 1653. 12. 5 ~ 1701. 6. 28) : 1681년( 숙종 7) 식년시 진사시에 1등 5위로 입격 →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에 을과 3위로 급제 전라도 관찰사(종2품)
7대조 김영행(金令行, 1673. 9. 3 ~ 1745. 12. 23) : 음서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6대조 김이건(金履健, 1697. 6. 10 ~ 1771. 7. 15) : 1721년( 경종 1)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4위로 입격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5대조 김양순(金養淳, 1722. 3. 3 ~ 1798. 12. 1)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고조부 김회근(金晦根, 1745. 5. 26 ~ 1773. 10. 20)·증조부 김병정(金炳鼎, 1770. 3. 16 ~ 1815. 4. 7) : 출사 x
조부 김정균(金正均, 1797. 4. 21 ~ 1866. 11. 24) : 음서로 고령현감(高靈縣監:종6품)
아버지 김봉진(金鳳鎭, 1826. 12. 25 ~ 1865. 1. 11)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15] 고조부 김회근(金晦根, 1745. 5. 26 ~ 1773. 10. 20)과는 같은 항렬이지만 100살 차이가 난다. [16] 1874년(고종 11) 태어나 이듬해인 1875년 2월 바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7]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1894년에 홍주목사 겸 초토사가 되어 당시 지역 내에 크게 일어났던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했고, 이후 을미개혁으로 지방관제가 바뀔 때 홍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어 있던 도중에 이 사건을 맞았다. 당시 본인은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을 주도한 지역 유림들이 의병에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을 핍박해 내쫓고 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을 구타하며 이승우를 비난하자 마지못해 응했는데, 지도부 몰래 중앙의 관리들과 내통하고 지도부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후에는 관찰사와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 [18] 승정원일기』 - 원문, 번역문. [19] 본 문서 위에 나온 진술 내용이 이 때 재판에서 김복한이 밝힌 것이다. [20] 조선왕조실록』 - 내용 /『 승정원일기』 - 원문, 번역문. [21] 본래는 지역 유림들을 모아 상소를 하려고 했지만, 이설은 유림의 뜻을 모아 상소를 지을 여가가 없다면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자며 오히려 재촉하였다고 전한다. [22] 신 안동김씨 족보에는 '1965년 을사(乙巳)'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1905년'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23] 다만, 대부분 관련 자료들에서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로만 적혀있을 뿐, 당시 묻혔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때 암매장되었던 김좌진의 유해는 1958년 장남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안장되었다. [24] '안동김씨 대종중' 홈페이지내 족보 내용을 참고하였다. [25] 여담으로 묘소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차남 김노동을 제외하고 장남 김은동의 묘는 공주시 금성동에, 3남 김명동의 묘는 세종시 장군면 금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