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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 3층 석탑(국보 112호)과 감은사지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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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 慶州 感恩寺址 Gameunsa Temple Site, G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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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1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면적 | 28,846㎡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신라 | |
위치 |
대한민국 국보 제112호 | |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 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 |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
분류 | 유적건조물 |
수량/면적 | 2기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시대 7세기 |
[clearfix]
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55-1번지에 소재한 통일신라 시대의 신문왕때 지어진 사찰. 현재는 건물 터와 감은사지 3층 석탑( 국보 제112호) 둘 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터만 남아있기에 현재는 감은사지라고 불린다.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무대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만큼 문무왕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는 절이다.2.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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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장엄구가 출토된 감은사 동탑, 서탑. | 감은사의 복원 모형. |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가람배치인 2탑식(2탑 1금당식)을 따랐기에 지금도 절 터에 석탑 두 기가 남이 있다. 강당도 있지만 절 자체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사진으로는 남은 탑들이 작아 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가서 보면 생각보다 꽤나 크다. 특히 주변이 허허벌판과 논밭뿐이라 상대적으로 탑 2기, 그리고 탑 정중앙에 꽂힌 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생김새는 불국사 석가탑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훨씬 크다. 원래 목탑을 주로 세우고 석탑 문화가 빈곤했던 신라가 백제 미륵사의 거대한 석탑을 받아들이는 도중에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고 추측한다. 그 때문에 통일 신라 시기의 석탑 중에는 가장 크다. 1959년 서탑을, 1996년 동탑을 해체수리했고 탑에서 나온 두 정교한 금동 사리갖춤은 현재 각각 국립경주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누어 전시 중이다.
해당 사리갖춤에 관한 내용은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문서 참조. 그 정교함 덕분에 천상의 컬렉션에서도 소개되었다. KBS 천상의 컬렉션 :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
3. 역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부처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격퇴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 2년(682)에 완공되었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다와 물길이 이어지게 만든 구조 등을 보아서 문무대왕릉과 함께 세트로 계획,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발굴 조사 결과 삼국유사에 언급된 내용이 실제 절터의 독특한 구조에 부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제31대
신문왕(神文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김씨이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681)
7월 7일에 왕위에 오르자, 거룩하신 선대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절에 있는 기록은 이러하다. “문무왕께서 왜군을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하셨지만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어 바다의 용이 되셨다. 그 아드님이신 신문왕께서 왕위에 오른 해인 개요 2년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돌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하나 뚫어두었으니, 곧 용이 절로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에 따라 뼈를 보관한 곳이므로,
대왕암(大王岩)이라고 불렀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고 하였다. 뒤에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를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절을 완공하면서 금당 아래에 동해 바다가 있는 동쪽으로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 가까운 곳에는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작은 바위섬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덕왕 18년(759)에 '감은사성전(感恩寺成典)'을 '수영감은사사원(修營感恩寺使院)'으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4. 발굴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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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절터 발굴 결과 용이 된 문무왕이 물길을 따라 감은사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절의 금당 밑에 공간을 만들었음을 확인했다. 한국 사찰 중에서도 참으로 특이한 구조이다.
그런데 감은사 근처에는 바다가 없어서[1] 물길이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대종천이라는 강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2007년 대구문화방송에서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감은사 앞을 파서 토양 분석을 의뢰한 결과 창건 당시에는 감은사 바로 앞까지 바다가 있었던 증거가 발견되었다. 천년 넘게 흙이 쌓이면서 바다가 감은사에서 점점 멀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고증 결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682년을 정설로 채택해 문제를 내고 있다.
나주 복암리 고분군 출토 백제목간의 태극 | 경주 감은사지 초석 태극 |
감은사 금당 근처에서 발굴된 초석 가운데에는 기하학적 삼각 무늬와 함께 태극 문양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는 중국 북송의 태극도보다 약 300년 이른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목간의 태극 문양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이 유물은 태극 무늬가 한반도에서도 오래 전부터 쓰여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김원길 국가상징기념물연구소 소장은 이에 대해 "감은사지의 태극 무늬의 상징성을 위해 감은사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2]
그 밖에는 동탑과 서탑에 '팔'이라든지 세모 같은 긁어서 생긴 낙서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게 특징. 어두울 때 가면 간접조명이 비쳐서 매우 눈에 띈다. 낙서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근현대 생긴 것도 있겠지만 감은사가 지금처럼 폐허로 바뀐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낙서 등도 상당히 오랜세월에 걸쳐 누적되어 왔을 가능성도 적지않다. 아무튼 문화재청에서도 당연히 누구보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다만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훼손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해 현장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문화재청 입장.
안녕하십니까. 우선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 청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지적하여 주신 동서 삼층석탑의 낙서는 동,서탑 보수정비 및 2008년도 국고보조사업으로 시행한 보존처리 시에 이미 확인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낙서는 석탑 자체를 파서 생긴 훼손으로 다른 재료로 처리 등을 시행할 경우 또다른 원형 훼손의 우려가 있으므로 당시 관계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종합 검토하여 현재 상황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지적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문화재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2021년 현재에도 낙서들이 남아있다.귀하께서 지적하여 주신 동서 삼층석탑의 낙서는 동,서탑 보수정비 및 2008년도 국고보조사업으로 시행한 보존처리 시에 이미 확인 되었던 것입니다. 이 낙서는 석탑 자체를 파서 생긴 훼손으로 다른 재료로 처리 등을 시행할 경우 또다른 원형 훼손의 우려가 있으므로 당시 관계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종합 검토하여 현재 상황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귀하의 지적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문화재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5. 만파식적
삼국유사에는 감은사와 문무왕에 얽힌 만파식적이란 악기에 대해 자세히 나온다. 신문왕이 즉위 직후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지었는데, 그 뒤 신문왕 2년에 신문왕이 동해에서 해룡이 된 문무왕에게 만파식적이란 피리를 받아와서 불어봤더니 외적이 두려워하고 나라가 평안해지더란 이야기. 결국 잃어버린 것으로 이야기는 끝맺는다. 한편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김부식은 철저한 '유교적 실증주의'에 입각한 사람답게 대금의 원류로 이 만파식적을 소개하면서 괴이해서 못 믿겠다고 평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6. 교통
경주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울산광역시에서 가는 게 오히려 더 편할 정도. 경주시내에서 자가용으로 간다면 동해고속도로를 통해 남경주IC - 동경주IC를 타고 와서 문무대왕로, 감은로를 타고 쭉 가면 된다.감은사지를 통과하는 경주시 버스 노선은 총 3개 노선이다.
- 경주시내~감은사지: 150번
- 보문단지~감은사지: 150-1번
그 외 160번이 문무대왕릉 쪽을 지나는데, 문무대왕릉에서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가면 된다.
울산에서 가려면 701번을 타고 양남에 내려 150번, 160번을 이용하면 된다.
7. 관광
물론 돌탑 두 개만이 덩그러이 놓여있는 시골의 사찰 터라지만, 돌탑 두개가 자못 웅장하다. 3층 석탑이니 석가탑 정도를 생각하고 간다면 석가탑보다 훨씬 큰 크기에 놀랄 것. 또한 밤이 되면(오후 7시 반 정도부터) 석탑 밑에 간접조명시설을 해놓아서 조명이 켜지게 되는데, 이를 직접 보면 꽤나 정취있고 웅장한 모습에 놀랄 것이다. 왜 유홍준 교수가 감은사탑을 저리 칭찬했는지 알 수 있다. 여타 조명이 있는 시설들처럼 절전을 위해 23시~자정 사이에 조명이 꺼지므로 참고. 단 위에 적혀있듯 탑 두기만 덜렁 있는 곳이므로 관점에 따라 실망할 염려가 있다는 건 알아두고 가는 게 좋다.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는 보러오기가 많이 불편하다. 바닷바람도 마시고 근처에 있는 문무대왕릉과 이견대까지 같이 볼 생각이라면 모를까, 감은사만 보러 가는 것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경주 동부 동해안 지역이 경주 시내와 거리가 상당히 멀고 이 근처로 오는 130번과 150번이 매우 뜸하게 오는 데다가, 지도로 보면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문무대왕릉, 이견대, 읍천 주상절리 모두 은근히 떨어져 있다. 감은사 ↔ 이견대 ↔ 문무대왕릉은 몇십 분 동안 걷는다 생각하고 오면 걸을 만 한 정도. 단 주상절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대중교통으로는 아주 여유로운 일정을 짜거나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 감은사에 미련이 없다면, 차라라 오고가고 하는 시간에 경주 시내에 가까운 남산이나 둘러보는 것이 가성비가 훨씬 낫다.
그러나 자차나 렌터카로 다닌다면, 어차피 감은사지 하나만 보러올 리는 없을 것이고 문무대왕릉과 월성원전 견학, 동해안 드라이브까지 한번에 할 수 있는 좋은 코스가 나온다. 원래는 도로가 매우 불편했지만 2014년에 4번 국도 선형개량공사가 완공되고, 2016년에는 울산포항고속도로까지 개통되면서 가기가 편해졌다. 꼬불꼬불하고 열악했던 2차선 도로에서 쭉쭉 뻗은 4차선 도로로 완전히 탈바꿈해서 운전하기가 매우 편하다. 게다가 이 동네가 워낙 시골이다 보니 어딜 가도 차도 사람도 없어서 인근 감포읍 해변까지 가면 정말 조용하고 운치 있는 바닷가 여행을 할 수 있다.
나는 솔로 10기의 오프닝 촬영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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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은사에서 해안가까지 그리 멀지는 않지만, 5~1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2]
다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고증문제와 예산문제는 둘째 치고 감은사만 지니고 있는 특이한 금당의 기단과 바닥구조는 위에 건물을 세우게 되면 다른 곳에 옮기지 않는한 훼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