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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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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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F85BB,#4A4F5A><colcolor=#F9F9F9,#FFD9E5> 시기 | 1740년 12월 16일 ~ 1748년 10월 18일 | |
장소 | 유럽, 북미, 남미 | |
원인 | 슐레지엔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의 통제권 확보 | |
교전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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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
프로이센-
프랑스 연합의 승리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드레스덴 조약 체결 - 엑스라샤펠 조약(아헨 조약) 체결 |
|
영향 | 7년 전쟁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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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40년대 중부 유럽 일대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이후 줄여서 '오스트리아'라고도 표기함)의 차기 계승권을 두고[2] 오스트리아, 프랑스 왕국, 영국, 프로이센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왕국, 사르데냐 왕국, 스웨덴 왕국, 러시아 제국 등의 유럽 주요 국가들이 참전한 대규모 왕위 계승 전쟁. 전쟁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대한 영토를 모두 물려받는 것에 대해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반발하여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였으며, 이를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지원하면서 발발하였다.전쟁 기간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영국- 하노버 선제후국- 네덜란드- 작센(1743년 이후)- 사르데냐 왕국(1742년 이후)- 러시아 연합, 바이에른- 프랑스- 프로이센-스페인-작센(1742년까지)-사르데냐 왕국(1742년까지)- 제노바 공화국- 모데나 공국-스웨덴 연합으로 나뉘어 싸웠다.
전쟁의 결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계승이 인정되었고,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게 되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또한 세계로 식민지를 뻗아나가던 영국과 프랑스까지 참전하면서, 이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남아시아, 아메리카 등지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사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 문제도 걸려 있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후술된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결정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라서, 그냥 왕위 계승 전쟁으로 불린다.
2. 배경
1740년 10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였다. 카를 6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로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3], 그리고 밀라노 공국 등 이탈리아 반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의 외아들 레오폴트 요한은 1716년에 사망했으나 카를 6세는 형 요제프 1세의 딸, 즉 조카딸 마리아 요제파와 마리아 아말리아[4] 대신 자신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했다.또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과도 관련이 있었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9명의 선제후[5]가 투표하는 황제선거에 의해 선출된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계속 합스부르크 왕가가 황제 자리를 독차지 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위 자체가 1명의 선제후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자는 거의 차기 황제가 되는 것과 같았다. 또한 직접적으로 제위를 노리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선제후들이 황제선거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하는 대신에 과도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차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역을 요구한 것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일단 급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하는게 되는가였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도 오스트리아 대공국은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해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 시절 확대해석된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여성 및 모계 상속은 불가능했지만[6], 카를 6세는 즉위 초 일찍부터 계승 문제를 염려해서 살리카법의 여성 왕위 승계 금지 조항을 무력화 시키는 국사조칙을 내놓았다. 이는 자신이 아들을 얻지 못 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으며, 만약에 직계 자손으로 여성만 남게 되어도 분란 없이 가문의 영속성을 이어 나가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7]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비록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수장인 카를 6세의 장녀이기는 했지만, 카를 6세에게는 선대 황제이자 수장이었던 형 요제프 1세와 장성한 그의 딸들이 있었기에 살리카법과는 별개로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이 원래대로라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높았다.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발표할 때 관련된 부분을 수정하면서[8]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이 조카딸들의 계승권보다 우위에 서기는 했으나 이는 염려스러운 사안으로 남았다. 이를 신경 쓴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내놓는 동시에 이런저런 정치적 수완과 합의를 동원하여 왕위를 요구할 만한 조카딸들의 남편들로부터 자신의 사후에도 국사조칙을 지킬 것을 맹세받았다. 형 요제프 1세의 사위들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그 대상이었다.
그렇게 국사조칙은 통과되었으나 정작 카를 6세의 말년이 신통치 않았다. 173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사실상 패하면서 나폴리, 시칠리아 등 스페인에게 빼앗겼고 외부 세력이 오스트리아를 얕보기 시작했다.[9] 그리고 같은 시기에 치러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참패하여 벨그라드 조약으로 동부 지역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야 했다.[10]
두 차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모두 크게 패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내부 결속력이 약해지는 모습이 보이자, 그리고 카를 6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주변국들은 카를 6세와 합의한 국사조칙을 지킬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특히나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의 딸들과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국사조칙 승인을 거부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숙적인 프랑스는 이때다 싶어서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원하며 끼어들었다. 이렇게 살얼음을 위를 걷는 듯이 불안한 상황에서 1740년 10월 카를 6세가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였다. 그리고 뜬금없이 프로이센의 젊은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진군해 들어가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2.1. 프로이센측 배경, 그리고 슐레지엔
기존 통설은, 카를 6세의 사망과 오스트리아의 대내외적 혼란을 이용하여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카를 알브레히트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라면 이를 가는 데다 독일에 영향력을 확대하길 희망했던 프랑스가 거의 동시에 국사조칙을 무시하고 영토 및 영향력 확대를 위해 일으킨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바이에른과 프랑스의 경우 어느 정도 이걸로 설명이 되며, 프로이센의 경우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수 중에 20%나 차지하는 꿀땅 슐레지엔을 확보하는 경제적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는 자신의 저서 <강철왕국 프로이센>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기도 한 프로이센과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경제적 이득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고 주장한다.가장 중요한 것은,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적 특징이었다. 프로이센 공국 항목에도 있지만, 프로이센 공국의 호엔촐레른안스바흐 분가가 단절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했고, 나중에 프로이센 왕국으로 업그레이드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실질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통합된 상태였지만 법률적으로 존속하고 있었고[11], 빈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는 이를 이용하여 꾸준히 프로이센을 통제하려 시도했다. 애당초 프로이센 왕을 칭할 수 있던 것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대가였던지라,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 일을 계속 후회하고 있었고, 사사건건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정작 프로이센에게 떨어진 떡고물이 없었다는 것. 특히 신성 로마 제국 서부 라인강 동안에 위치한 베르크 공국[12]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매우 희망하던 떡고물이었다. 17세기 초 요한 지기스문트 시절에 이 지역을 통치한 라마르크 가문의 대가 끊기자 인척관계를 통해 획득을 시도했으나 비텔스바흐 가문 팔츠노이부르크 분가에 밀려 실패한 곳인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사조칙을 승인하는 대가로 베르크 공국의 프로이센 영유를 오스트리아가 지원한다는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으나 국사조칙 승인과 달리 이 부분은 문서화가 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는 나중에 이를 모른 체 하며 베르크 공국의 영유권 분쟁에서 팔츠 선제후국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웬수같은 아버지의 유언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를 매우 싫어했다. 모친인 조피 도르테아가 영국의 공주인지라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모친의 주선하에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공주 빌헬미나 조피와의 결혼이 성사되기 직전 역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무산되고, 오스트리아의 강권으로 마음에도 없는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와의 결혼을 해야 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은 벨프 가문으로 영국 하노버 왕조의 방계이기도 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과도 가까워서 장인은 오스트리아군 지휘관이었고, 장모의 여동생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였다. 이처럼 자신의 결혼조차 모친과 본인의 뜻을 꺾고 오스트리아 마음대로 진행되었으니, 오스트리아에 이를 가는 게 당연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프로이센에 있어 풍족한 땅 슐레지엔의 획득이라는 영토 확장 목적보다는 프로이센 왕국의 성장을 계속 방해하고 내정을 간섭하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타도하고 독립된 국가 프로이센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더 컸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볼 때 슐레지엔이 공격대상이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당시 프로이센 왕국이 유일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바로 슐레지엔이었다. 슐레지엔이 꿀땅이라 노린게 아니라, 오스트리아랑 전쟁을 하려보니 붙어있는 땅이 슐레지엔이었던 것. 실제로도 슐레지엔 아니더라도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절부터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 실시하여 국내산업 육성에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즉, 프리드리히 입장에선 요약하자면
- 사사건건 간섭해대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불만이 한가득한데,
- 프로이센이 국사조칙을 승인한 조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에 오스트리아가 태클을 걸었고,
- 프로이센은 이 시점에서 국사조칙 승인은 오스트리아가 먼저 파기했다고 판단했으며,
- 애초에 국사조칙 자체가 확대해석된 살리카법을 위반하는 동시에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였고,
- 안그래도 열 받는데 마침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패해 상태도 메롱하고,
- 그 시점에서 카를 6세가 죽고 군주로서의 능력도 입증되지 않은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작위를 물려받아 나라는 혼란스럽고 그 틈을 타 바이에른과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랑 싸우려드는 찰나에,
- 200년 전 이야기긴 하지만 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에서 영유권을 주장할 명분도 있고, 오스트리아 수비대가 고작 8천 명에 불과한 슐레지엔을 기습,
-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바이에른에 전력투구하는 틈을 타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로부터 정치적 독립 달성. 꿀땅인 슐레지엔 획득은 덤.
이렇게 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바로 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기를 바로 수습할 만큼 뛰어난 명군이었다는 것, 그리고 전 유럽을 불바다로 만들어서라도 프로이센에 복수하길 원한 집념의 여자였다는 것이다.
3. 발발
- 프로이센의 참전
그러던 차에 국사조칙을 별 조건 없이 승인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카를 6세보다 약간 이른 1740년 5월 31일에 죽고, 프리드리히 2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야심과 명예욕에 가득찬 젊은 프리드리히는 국사조칙 승인 조건으로 수백 년 전 문서를 들고오면서[13] 오스트리아 세수의 22%가량을 차지하는 꿀땅 슐레지엔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고[14] 당연히 오스트리아에선 거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교섭을 시도했지만 요구 자체가 너무 가혹한데다 그나마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막후에서 간섭하면서 협상 자체가 결렬되었다.
- 바이에른의 참전
- 부르봉 왕조(프랑스, 스페인, 나폴리)의 참전
- 스웨덴의 참전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의 문제도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물론 후대에 보여준 업적을 알 수 있듯이 명민하였지만, 아버지 카를 6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하느라 마리아에게 후계자 수업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16] 이 때문에 군주로서 필요한 경험이 매우 부족한데다 이제 막 여자의 몸으로 즉위한 터라 당장 오스트리아 내부를 안정시키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적국들이 이를 얕잡아 본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다행히 오스트리아에겐 러시아 외에 전통적인 동맹국 영국이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했다는 소식에 프랑스가 참전했다고? 엿먹이러 가자!(...)라는
게다가 영국은 이미 1739년에 카리브해 지역에서 스페인과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으며, 이를 젠킨스의 귀 전쟁이라고 한다. 1731년 카리브해에서 밀무역을 하던 영국인 선장 로버트 젠킨스(Robert Jenkins, 1700 ~ 1745)가 스페인 해군에게 나포되어서 한쪽 귀를 잘린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젠킨스는 밀무역자였으니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는데, 이때 스페인 해군이 젠킨스의 귀를 자르면서 한 말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쪽에서는 여러 버전이 있는 반면, 스페인에는 교차확인이 되지 않아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밀수하다 걸린 놈들은 다 이렇게 귀를 잘릴 것이라고 너희(영국) 왕한테 전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젠킨스는
4. 전개
1740년 12월 선전포고도 없이 마치 200년 후의 후손들마냥 기습 공격을 감행한 프로이센은 불과 개전 한 달여 만에 슐레지엔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프로이센이 상비군 체제여서 국왕의 의지에 따른 병력동원이 신속했고, 오스트리아는 애초에 전쟁 준비가 미처 안되어 있어서 병력 동원에 시간이 걸려 슐레지엔 방어를 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다. 특히 예술을 사랑하는 연약한 문학소년 이미지로 알려져있던 프리드리히 2세가 전광석화같은 군사 행동을, 그것도 당시 유럽에서 전쟁을 잘 하지 않던 계절인 겨울에 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래 대부분 개신교 지역이였기에, 가톨릭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별 미련이 없어서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군을 환영하며 호감을 보였다.실질적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모아 반격에 나선 1741년부터 시작되었고, 모두들 유럽의 전통적 강자인 오스트리아가 신흥국 프로이센을 쳐바를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1600만에 달했던 반면에 프로이센의 인구는 220만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국력의 차이가 현격했다. 군대의 수만 보아도 오스트리아가 당장 소집할 수 있는 군대가 16만명이나 되었던 반면에, 프로이센의 상비군은 총 8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같은 또 다른 외부의 적도 상대하는 동시에 내부의 분란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총전력을 슐레지엔에 투입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가 걱정했던 것처럼 프로이센은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1739년에 비밀리에 프랑스와 같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는 동맹을 맺어 두었다.
1741년 4월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은 몰비츠 전투에서 맞붙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번이 자신이 지휘한 첫 번째 전투였는데, 온갖 뻘짓과 삽질을 거듭했다. 돌격 타이밍에 대열을 재편시킨다든지, 거리를 잘못 잡아서 부대 일부를 강 뒤에 배치해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든지. 심지어 거리를 잘못 잡았다는 건 휘하의 슈베린 장군이 지적했지만 무시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의 졸렬한 지휘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자, 슈베린은 프리드리히에게 퇴각할 것을 조언했고, 프리드리히는 이걸 받아들여 전장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 때 오스트리아의 양익 사령관이 전사하여 오스트리아군이 혼란에 휩싸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보고받은 슈베린의 그 유명한 '우리는 적의 본대를 넘어서 퇴각한다'라는 말과 함께 프로이센군이 반격에 나서서 승리를 차지하였다.
비록 프로이센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는 슈베린과 밀덕이었던 부왕이 국가 예산의 8할씩을 쏟아부어 육성한 정예화된 보병대 덕분이였고, 프리드리히는 X맨 짓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두고 전장을 이탈하기까지 했었다. 후일 프리드리히는 다시는 군대를 남겨두고 혼자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를 충실히 지켰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첫 전투의 실책들에서 제대로 된 교훈과 경험을 배워서 당대 최고의 장군 중에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엄청난 먼치킨 지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이 전투를 두고 '몰비츠는 나의 학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크게 고무된 프랑스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지원을 약속하며 대규모 파병을 개시하여 보헤미아 왕국을 침공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카를 알브레히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큰 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두고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던 헝가리[18]를 방문하는 승부수를 띄웠는데, 갓난아기인 아들 요제프 2세를 안고 당시 헝가리의 수도였던 포조니로 달려가 헝가리 의회에서 한 연설을 통해 헝가리, 크로아티아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받아낸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여왕으로 즉위, 반격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비밀리에 휴전을 하여 슐레지엔을 일시 포기한 다음,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에 맞서 보헤미아 방어에 주력했다.
비밀조약에 의거, 프로이센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일시적으로 승기를 잡고 1742년 1월에 열린 황제선거에서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로 선출되어 즉위했으나[19] 오스트리아가 역으로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수도 뮌헨을 점령하자, 보헤미아의 동맹군도 패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1742년, 프랑스군이 도나우강 일대에 공세를 강화하고, 프로이센이 다시 비밀조약을 깨고 공세로 나서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내 위기에 처했다. 결국 코투지츠 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오스트리아 주력군이 참패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브레슬라우 조약[20]으로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하기로 서명하여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끝냈다.
슐레지엔을 포기했음에도 오스트리아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로서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성 로마 제국 관할의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완전하게 확보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가져야 했다. 이 때문에 이 전쟁은 실질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위 계승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단기간의 평화는 1743년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에 상륙하여 대륙 전선에 참전하며 독일 데팅겐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자 깨졌다.[21]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전쟁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에 위기를 느껴,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동맹을 맺고 1744년부터 다시 전면 공세로 나섰다. 1744년에는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1745년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라는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했다.
한편 1743~45년 전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바이에른-프랑스 동맹군을 연파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도 제노바까지 점령하며 승기를 굳혔다. 때마침 카를 7세가 죽고 신성 로마 제국 제위가 다시 공석이 되어 황제선거가 열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7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와 남편을 차기 황제로 선출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고 7표[22]를 얻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출시켰다.
프란츠 1세의 선출 이후 프로이센은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여 슐레지엔의 확실한 점유를 인정받고 전쟁에서 이탈했고, 네덜란드와 독일 일대에서 전개되던 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군의 전쟁도 교착상태에 빠지자 결국 양측은 1748년 10월에 아헨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한편 카리브해 일대에서 진행된 '젠킨스의 귀 전쟁'에서는 영국의 파나마, 콜롬비아, 쿠바, 플로리다 공격을 스페인이 격퇴하고, 반대로 스페인의 자메이카, 조지아 공격을 영국이 격퇴하는 등 일진일퇴가 진행되다가 1748년 아헨 조약을 맺을 때 함께 종전조약이 맺어져 끝났다.
5. 결과
신흥국 프로이센은 경제적으로 발달한 산업지역인 슐레지엔을 획득함으로써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2세의 천재적 용병술이 부각되면서 그의 전략, 전술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오스트리아는 비록 슐레지엔을 상실했으나,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세습령 계승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을 안전하게 지켰으며 그녀의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전쟁의 본질적 목적인 계승을 이뤄내고 주변국들로부터 국사조칙을 인정받았으며, 해체 위기에 놓였던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재통합시켰다[23].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동시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나라들을 발전시키면서도 본인을 배신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에 대한 뒤끝이 남았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기점으로 보헤미아는 헝가리에 비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되기까지 제국 내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점점 잃었다.[24]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그로기 상태에서 전쟁을 끝냈으나 유럽의 대표적인 강국답게 아직 체력이 남아 있었다. 특히 유럽의 전쟁과는 별개로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나라는 새로운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파르마 공국을 되찾아 카를로스 3세의 동생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작으로 즉위하면서 남부의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넘어 중부 이탈리아에서까지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비록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가 목표로 삼았던 밀라노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토르토나와 노바라를 얻으면서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동맹의 역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상황을 유럽에 만들어 놓는다.
6. 이야깃거리
예전의 유럽 전쟁과는 달리 각자 자신의 무기를 지참하고 와서 싸우는 용병보다는 국가가 지급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정규군이 전장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창과 같은 냉병기보다는 플린트락 머스킷과 총검이 주요 보병무기였다. 기병은 다소 간략화된 퀴레이스 아머를 입고 기병용 카빈총과 세이버 검을 들고 싸우는 중기병이 주력이었으며, 경기병은 정찰과 적 교란 임무 등의 부차적인 역할을 맡았다. 포병은 여전히 현대 포병에 비해서 위력이 많이 미약했지만, 화력의 중심이었고, 특히 공성전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이 시기부터 병사들이 민가를 약탈하여 보급을 해결하는 것이 줄어들었으며, 약탈 대신에 점령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전투 물자의 대부분은 본국으로부터 이송되었기 때문에, 병참이 예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폴란드에서 유래한 울란이 퍼지게되면서 위그노 전쟁 이후 서유럽에서 사라졌던 창기병이 다시금 서유럽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7. 주요 전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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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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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세력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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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비츠 전투 ,1741년 4월 1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코투지츠 전투 ,1742년 5월 17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데팅겐 전투 ,1743년 6월 27일, |
영국- 하노버- 오스트리아 | 프랑스 | ||||
퐁트누아 전투 ,1745년 5월 11일, |
프랑스 | 영국 | ||||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 ,1745년 6월 4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작센 | ||||
수어 전투 ,1745년 9월 30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헨넬스도르프 전투 ,1745년 11월 23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케셀스도르프 전투 ,1745년 12월 15일, |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
로쿠스 전투 ,1746년 10월 11일, |
프랑스 | 오스트리아- 영국-하노버- 네덜란드 | ||||
라우펠트 전투 ,1747년 7월 2일, |
프랑스 | 오스트리아- 영국-하노버- 네덜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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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미에서는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이라고 불린다.
[2]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를 열었던
카를 5세는
1555년 퇴위하면서 아들
펠리페 2세에게는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자신의 고향이었던
부르고뉴 저지대를 물려주었고 이미
독일왕으로 선출되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결혼으로 상속받은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을 통치하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를 차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중동부 유럽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을 물려받은
카를 5세의 후손들이 다스린
스페인 합스브루크 왕가로 갈라졌다.
[3]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4]
각각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내
[5]
1356년
카를 4세의
금인칙서로 공인된 선제후는 7명이지만 시간이 흘러
바이에른과
하노버가 추가되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9명이었다.
[6]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군연합인
합스부르크 제국에는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하지 않았기에
살리카법과는 인연이 없는 국가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에서는 이미 여왕으로
마리어 1세가 즉위한 바가 있었다.
[7]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요절한 장남 레오폴트 요한이 태어나기 이전에 만들어졌다. 레오폴트 요한은 7개월만에 요절했고, 그 뒤로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포함해 딸만 셋이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난 뒤에도 카를 6세는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8]
원래 카를 6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 아버지
레오폴트 1세가 만든 합스부르크 가문의 비공개 내부 규약에 따르면 요제프 1세의 후손이 우위를 점하게 되어있었으나, 카를 6세는 이를 공포할 때 통치자의 딸이 계승하도록 스리슬쩍 바꿨다.
[9]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지원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아우구스트 3세로 즉위하며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3세에게 밀려 왕위를 빼앗긴 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에게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프란츠 1세의 영지인
로렌 공국이 주어졌다. 프란츠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인을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자기 나라 앞마당에 오스트리아 영토가 세워질까 경계한 프랑스가 혼인 승인을 조건으로 영지인
로렌 공국을 내놓으라 요구했고 프란츠는
울며 겨자 먹기로 로렌을 프랑스에게 내놓고
메디치 가문이 단절되어 주인이 사라질 예정인
토스카나 대공국을 보상이랍시고 얻었으며 프랑스가 얻은 로렌은
루이 15세가(스타니스와프의 사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빼앗긴 스타니스와프에게 보상으로 주었다가 후사가 없던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한 뒤 프랑스가 그대로 합병했다.
[10]
1718년 빼앗은
세르비아 북부와
왈라키아 공국 서부의 올테니아 일대. 여담이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이 독자적으로 유럽 국가에 승리한 마지막 전쟁이었다.
[11]
실제로 프로이센 왕국이 탄생한 후에도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격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에 잘만 참석했으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 연방이 구성된 후에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전까지 의장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차지했다.
[12]
현재의
독일
뒤셀도르프 일대.
[13]
1537년
요아힘 2세 헥토어 시절 체결된 브리크 조약으로 약 200년이 넘는 시간차다.
[14]
브리크 조약은 체결된 당시 독립된 공국이던 슐레지엔의 브리크 공국이 공국의 대가 끊기면 영지(슐레지엔)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물려준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는데, 당시 형
카를 5세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을 국정을 맡고 있던
페르디난트 1세가 조약 승인을 씹어버리는 바람에 효력이 정지되었다. 문제는 브리크 공국이
보헤미아 왕국의 속국이라는 점. 그리고 공국의 종주국인 보헤미아의 왕은 1526년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차지였다. 1675년 브리크 공국의 대가 끊겼지만 보헤미아 왕을 겸한
레오폴트 1세가 속국이라는 이유로 낼름 먹어버렸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조약을 근거로 들어 영유권를 주장했으나 국력 차이 때문에 깨갱할 수밖에 없었다.
[15]
바이에른 공작이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아나와 결혼할 때,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의 대가 끊기면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즉, 바이에른 공작이 상속하기로 한 협약이 있었다.
[16]
카를 6세는 말년에 마리아 테레지아를 제국의회(오스트리아)에 몇 번 참석시키기도 했지만 어릴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다른 국가의 남성 계승자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이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필요한 교육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17]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1731년부터 동맹이었다.
[18]
마리아 테레지아의 할아버지인
레오폴트 1세 대에는
즈린스키 사건으로 부친을 잃은
퇴쾨이 임레가 독립 운동을 일으켜
제2차 빈 공방전을 유발했고, 큰아버지
요제프 1세 대에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에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쿠루츠 봉기를 일으켰을 정도로 동부에서는 반 합스부르크 정서가 강했다. 반면 서북부는 친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했으며, 크로아티아는 1526년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19]
카를 본인이 선제후인 바이에른 공작이고 합스부르크 왕가를 배신한 보헤미아 귀족들이 보헤미아 왕위를 카를에게 갖다바치면서 카를 본인은 2표 행사. 동생인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와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의 지지를 얻고 프리드리히 2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자격)와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작센 선제후 자격) 또한 카를에게 투표. 결국 투표 결과는 안 봐도 뻔할 거라 생각해 영국 국왕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 자격)가 불참하고 원래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기로 한
트리어 선제후와
마인츠 선제후는 투표를 포기하면서 당선되었다. 그와중에 카를은 자기 영지인 바이에른이 오스트리아에게 짓밟히는 동안
황제선거 장소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까지 대군을 끌고와선 선출 후 대관식까지 거행하는 뻘짓을 선보인다.
[20]
이름은 브레슬라우 조약인데 정작 조약은
베를린에서 체결되었다.
[21]
이 때문에 이 전쟁, 특히 북미 전역을 영국과 미국에서는 조지 왕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2]
본인의 보헤미아 여왕 1표,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바이에른 선제후 1표와 숙부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의 1표, 동맹인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하노버 선제후 1표, 전통적인 지지자
마인츠 대주교와
트리어 대주교의 투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1표. 프리드리히 2세는 엿이나 먹으라며
팔츠 선제후
카를 4세 테오도어에게 투표했다.
[23]
황제로 선출된 건 프란츠 1세지만 실권자가 마리아 테레지아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제위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일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했을뿐 황권은 유명무실했기 때문에 황제가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할령은 오스트리아 대공국과 보헤미아 왕국이었고(헝가리-크로아티아는 신성 로마 제국과 관련 없는 별개의 국가) 이곳의 통치자는 누가 봐도 마리아 테레지아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대공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는 각각 계승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자처한 것은 몇 십 년이나 지난 뒤에,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즉위에 위협받아서였다.
[24]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19세기부터
민족주의가 각성해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한 반면 보헤미아 왕국은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등을 중심으로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내세워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호가
보헤미아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헝가리인을 파트너로 선택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타협과 같이 보헤미아인에게 돌아온 것은 푸대접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