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9:40:55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마리아 아말리아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프랑스 왕국 루이필리프 1세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스페인 카롤르스 3세의 왕비에 대한 내용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FFD7C3><colcolor=#000000> 파르마 공작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malia von Österreich
파일:Maria Amalia.Duchess of Parma.jpg
이름 독일어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하나 안토니아
(Maria Amalia Josefa Johanna Antonia)
이탈리아어 마리아 아말리아 주세파 조반나 안토니아
(Maria Amalia Giuseppa Giovanna Antonia)
출생 1746년 2월 26일
합스부르크 제국 호프부르크
사망 1804년 6월 18일 (향년 58세)
합스부르크 제국 프라하 프라하 성
배우자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 1세[1]
(1769년 결혼 / 1802년 사망)
자녀 카롤리나, 루도비코 1세,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카를로타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형제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차별받은 어린 시절2.2.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2.3. 실질적인 파르마의 통치자2.4. 결혼 생활과 자녀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6녀. 이탈리아반도 파르마 공국의 공작부인으로 스페인 카를로스주의의 수장인 현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직계조상이다. 어렸을 적엔 지나친 편애의 희생양으로 비뚤어져 반항적인 성격이었으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이후에는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2. 생애

2.1. 차별받은 어린 시절

아말리아는 예쁜 외모에 후술할 통치력에서 보듯이 뛰어난 자질을 갖췄지만 당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셋째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유독 편애했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말리아를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으로 단정짓고 첫째 마리아 안나와 더불어 유독히 차별[2]했다.

이러다 보니 아말리아는 자신을 봐주지 않는 어머니보다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아버지 프란츠 1세와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다른 자매들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아래 여동생들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안토니아와 친했으며 정략결혼으로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도 서신을 주고 받곤 했다.

2.2. 원하지 않은 정략결혼

당시 아말리아는 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가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와 연인 사이였다. 그러나 남자 쪽 신분이 낮다는 이유[3]로 어쩔수 없이 연인과 헤어져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파르마 공국 페르디난도와 정략결혼을 했다.

물론 왕실의 혼인은 국가 간의 중요 정책에 특히 결혼 동맹으로 큰 세력을 쌓아온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선 어쩔수 없던 일이라고 하나 어처구니가 없게도 강제로 연인과 헤어진 아말리아가 정략결혼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편애를 유독 받아온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알베르트 카지미어와 연애결혼을 한 것도 모자라 엄청난 지참금까지 받는 등 온갖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소 정략결혼 상대도 자신같은 황족이나 여동생들의 남편처럼 일국의 국왕 또는 후계자였으면 모를까 자신보다 낮은 파르마 공작[4]이었기에 더 분노했다고 한다.

2.3. 실질적인 파르마의 통치자

파일:Maria_Amalia_of_Austria_by_Roslin.jpg
파르마에 도착한 마리아 아말리아가 처음 한 일은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와의 연을 끊는 것이었으며 그녀는 평생동안 어머니의 서신을 무시하고 편지 한통도 보내지 않았다.

또한 아말리아는 첫딸에게 자신의 이름[5]을 붙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장녀의 이름을 카롤리나로 지었으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전부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녀는 관종 기질을 마음껏 발휘해 파르마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등 친정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동시에 아예 오스트리아의 이익과 반대되는 길로 나아갔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심기를 거슬러 아예 친정으로 입국을 영구 금지 당했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정략 결혼한 자매들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6]

게다가 여동생 마리아 카롤리나 못지 않게 아말리아는 야심이 컸고 총명했던 지라 단순한 군주의 아내로서 비선실세 격 통치로 만족하지 않았고,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을 파르마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게 해 실질적으로 파르마 공국을 통치했다. 다만 마리아 아말리아는 타국, 특히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소국인 파르마의 독립과 번영, 그리고 국민들의 복지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나중에는 남편의 정계 복귀를 격려하는 현명한 모습을 보였던 지라 반항기와 사생활과는 별개로 형제들 중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평가되었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공작부인이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으로 파르마 공국이 프랑스 제1공화국에 점령당하자 파르마의 합병을 막기 위해 남편과 함께 고군분투하나 강대한 프랑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1802년에 페르디난도가 의심스럽게 병사(프랑스에 의한 독살로 추정된다.)한 이후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당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피신했다. 조카 프란츠 2세는 그녀의 오스트리아 입국을 불허했지만 배려로 작은 영지를 주었고, 그곳에 틀어박힌 그녀는 1804년에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아말리아의 유해는 프라하성의 성 비타 대성당[7]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합스부르크 가문 황실 묘당에 안장되었다.

2.4. 결혼 생활과 자녀

결혼 초 정략 결혼한 남편 페르디난도와는 서로 정부를 거느리면서 악마와 창부로 부르며 늘상 싸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결혼 9년 차인 1778년 5세의 장남 루도비코가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 사고로 사경에 이르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비록 사이는 나빴어도 자식 바보라는 점에서 똑같았던 이 부부는 아들의 부상 때 극적으로 화해하고 금슬 좋은 부부이자 모범적인 부모가 되었다.

아말리아는 페르디난도 1세와의 사이에서 3남 6녀로 총 9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여동생 카롤리나처럼 딸들에게는 가장 사이가 좋았던 여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안토니아의 이름을 붙였다. 이중 4명이 성인으로 성장했고 아말리아의 자손들은 매우 번성하여 현재 부르봉-파르마 가문 구성원들은 물론 현재 합스부르크 본가와 룩셈부르크 대공가 사람들은 아말리아의 후손들이다.[8]

아말리아 자신부터가 부모의 편애로 소외당했고 이로 인해 연인과 헤어졌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정략 결혼에 적극적이지 않아서 최대한 자녀들의 의사를 고려한 혼처를 마련했다. 그래서인지 장녀 카롤리나 공녀와 장남 루도비코 1세만이 정략 결혼했고 장남 루도비코는 비록 어느 정도는 정략 결혼에 가까웠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던 스페인 마리아 루이사와 혼인하고, 장녀인 마리아 카롤리나도 작센 선제후의 막내아들과 연애 결혼을 했다.

차녀와 삼녀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카를로타 마리아는 혼기가 찼을 때 프랑스 혁명 전쟁의 혼란 와중이었던 것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9]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남았으며 나중에 마리아 안토니아는 우르술라 수녀회, 카를로타 마리아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수녀가 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malia of Austria)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Francis I)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카를 6세
(Charles VI)
레오폴트 1세
(Leopold I)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작센의 왕자비 카롤리네 마리아
(Carolina Maria, Princess of Saxony)
1770년 11월 22일 1804년 3월 1일 작센의 막시밀리안 왕자
슬하 3남 4녀[10]
1남 루도비코 1세
(Louis I)
1773년 7월 5일 1803년 5월 27일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
슬하 1남 1녀[11]
2녀 마리아 안토니아 공녀
(Princess Maria Antonia)
1774년 11월 28일 1841년 2월 20일
3녀 마리아 카를로타 공녀
(Princess Maria Carlotta)
1777년 9월 1일 1813년 4월 6일


[1] 페르디난도의 누나 이사벨라는 아말리아의 오빠인 요제프 2세와 결혼하였으므로 겹사돈이다 [2] 사실 아말리아 뿐만 아니라 크리스티나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자매들은 차별을 받았고 이런 편애는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형제자매들의 사이가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셋째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미녀에, 똑같이 편애받은 크리스티나와 세트로 어울렸었던 지라 덜했다. [3] 아이러니하게도 신분이 낮다며 이별당한 아말리아의 연인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를 아우구스트는 바이에른 팔츠 친척들의 연이은 남계 후손 단절로 인해 팔츠-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의 계승자가 되었고, 자식 없이 일찍 죽은 카를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동생 막시밀리안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4] 물론 파르마 공작도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서 스페인 프랑스 양쪽에서 왕족이긴 했으나, 각각 나폴리- 시칠리아와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교하면 자매들 중 가장 서열 낮은 남성과 결혼했다. 묘하게도 세 자매 모두 불행한 인생을 보냈는데, 마리아 카롤리나는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잠깐 동안 휘두르고 나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쫓겨나 망명, 결국 친정에 돌아와 나름 잘 살다 생을 마감했고 자기가 다스렸던 나폴리 왕국은 유럽판 항우가 다스리게 되었다. 게다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숫제 시집간 지 23년 만에 시민혁명이 발발해서 채 불혹이 되기 전에 참수형을 당해 혼자만 30대에 사망했다. 아말리아 역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남편도 잃고 쫒겨나, 조카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고 대신 프라하에 있는 영지를 던져줬다. 셋 중 유일하게 영지 보유는 했지만 못 볼 꼴을 다 겪고 크게 고생한 셈. [5]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식들에게 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지으라고 했기때문에 아말리아의 남매들인 요제프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들도 언어상 발음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이름이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6] 실제로 프랑스 혁명으로 친정인 합스부르크 가문도 외면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변을 걱정하고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쥬리에 감옥에 갇혔을 때도 마리아 카롤리나와 더불어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 받았다. [7] 합스부르크 가문의 조상인 오스트리아 공작 겸 보헤미아 국왕 루돌프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가 이 성당에 안장되었다. [8] 카를 1세의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지타 공녀는 그녀의 내손(5대)이며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의 남편이자 현재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의 조부인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는 지타 공녀의 남동생이다. [9] 당시 마리아 아말리아와 딸들은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다. [10]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요한,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호세파 아말리아 등 [11] 파르마 공작 카를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