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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총기 발전사 ||
장전 방식 | 전장식 | 후장식 | |||
격발 방식 | 매치락 | 휠락 | 플린트락 | 퍼커션 캡 | 탄피 |
강선 유무 | 머스킷 | 소총(라이플) |
1. 개요
플린트록 라이플 |
수발식(燧發式), 수석식(燧石式)이라고도 하며, 이 방식을 사용한 총기를 수발총(燧發銃), 수석총(燧石銃)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火打ち からくり[1], ゲベール銃[2]라고 불렀다.
2. 특징
부싯돌의 마찰을 통해 점화약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방식이며 장치의 기본 방식 자체는 16세기 말엽에 발명되었다.[3] 그러나 부싯돌과 강력한 스프링이 사용된 탓에 가격과 생산에 한계가 있어 점진적으로 보급되었고 매치락과 휠락을 완전히 대체한 것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이르러서이다.[4] 그런 탓에 서양에서는 해적, 사략선, 상인 등이 군대보다 먼저 선진적으로 플린트락 권총을 도입한 바가 있다.<nopad> |
매치락에 비해 화승이 필요 없어 화승 취급의 번거로움이 크게 사라졌고, 화약접시 뚜껑이 자동으로 열리는 구조이므로(매치락은 보통 수동으로 연다) 운용이 편하고 그만큼 연사 속도도 더 빨라졌다. 연사속도로 따지면 사실 후세대인 퍼커션 캡보다도 조금 더 빠르다. 격발시 화약의 반응속도도 다소 향상되었다. 플린트락은 점화용 불똥의 양이 적은 문제가 있어, 입자가 고운 점화용 화약을 점화약으로 적극 이용했고 이것이 격발 속도에도 좋은 영향을 줬다.
하지만 매치락보다는 낫다고 해도 플린트락 역시 화약접시에서 터치홀을 통해 약실에 불이 옮겨붙는 것은 똑같아 머스킷 특유의 약간 느린 지발이 발생하기 십상이며, 우천시나 습기가 있는 환경에서는 불발탄이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화승을 갖다대면 점화되는 신뢰성 자체는 매치락이 더 높았다. 플린트락은 아무 문제 없이 격발했어도 재수없게 불똥이 팬 안에 제대로 튀지 않아서 미격발되는 경우가 은근히 있다. 부싯돌의 질과 수명에도 쉽게 영향받는다. 프릿즌 면이 닳아서 불똥이 잘 안튀게 됐을 수도 있다.[5] 플린트가 확실하게 프릿즌을 때려 여는 동시에 불똥을 만들어내게 하기 위해, 10파운드 이상의 강한 스프링 압력이 걸려야 했다. 온갖 다양한 이유로 불발이 날 수 있기에, 당시 군에서는 경험상 10명이 플린트락을 쏘면 7~8명이 격발한다고 계산했다. 불발률이 20~30%나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먼지가 많거나 습기찬 환경을 가진 조선, 청나라, 일본, 인도 등의 나라에서는 유럽으로부터 플린트락이 전래된 후에도 신뢰성 문제 때문에 매치락을 고집했던 사례가 있었을 정도. 이 문제는 퍼커션 캡의 등장 이후에나 해결된다. 뇌홍을 사용한 퍼커션 캡의 불발률은 1% 미만으로 떨어지며, 염화칼륨을 조합한 덜 민감한 화합물을 사용해도 불발률 5~10%로 플린트락보다는 월등히 나았다.
그러나 서구 제국들은 습기로썬 최악의 환경인 정글과 해상에서도 무리없이 플린트락을 운용했으며, 해상전함들에 실린 화포들의 격발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6][7] 마찬가지로 동남아 국가들 또한 플린트락을 서구의 상관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입했고, 비록 실패했지만[8] 복제 및 자체 생산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구 제국들도 열대습윤기후가 아닌 온난 습윤 기후에서는 뇌홍이 발명되기 전까진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실제사례로 제1차 아편전쟁때 삼원리 사건에서 영국군이 플린트락을 들고 갔다가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냉병기를 든 농민들한테 박살날 뻔했고, 뇌홍[9]이 도입되면서 동아시아권의 개인화기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다.
흔히 대체역사 소설 등에서 비오는 날에도 쏠 수 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데, 플린트락은 화승만 사용하지 않을 뿐 화약 접시가 밖으로 노출된 형태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우천시에 사격이 불가능하다. 화약접시 부분에 비가 직접적으로 들이치지 않도록 하는 작은 덮개를 달거나, 습기가 쉽게 고이지 않도록 팬의 형태를 바꾸는 식으로 어느 정도 임시조치는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했다. 다만 거추장스러운 불붙은 화승을 신경쓸 필요는 덜어서, 코트를 머리 위로 둘러써 비가 들어오지 않게 해 발사를 한다거나 하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불이 꺼지지 않게 신경써야 하는 화승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화약뿐만 아니라 부싯돌도 현대에 쓰이는 파이어스틸이 아닌 이상 물에 젖으면 불꽃이 나오지 않는다. 우천시에도 사격이 가능해진 것은 퍼커션 캡(뇌관)의 등장 이후였으며, 그나마도 장전시 장약이 젖는 문제 때문에 우천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금속 탄피가 등장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매치락에서 플린트락으로의 발전은 물보다는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사용 방식
- 요즘 총에서 해머(공이치기)라고 부르는 부분을 콕(cock), 계두라고 칭하는데, 여기에 부싯돌이 단단히 물려있다. 콕을 뒤로 당겨서 장전하는 것을 풀콕이라고 하며 현대 화기의 해머 코킹도 이 용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 코킹 후 방아쇠를 당기면 콕이 앞의 프리즌(frizzen)을 때리는데, 프리즌은 화약접시의 뚜껑 겸 부싯돌과 부딪혀 불똥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 프리즌이 얻어맞은 충격으로 튕겨서 열리면서 - 거기서 생긴 불똥이 화약접시 상의 점화 화약에 불이 붙고 - 그 폭발이 화약접시 옆의 약실로 통하는 작은 구멍(touch hole)으로 전달되어 약실을 점화한다.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하여 영국군 일부 연대를 주축으로 보급된 탭 로딩은 분당 3발, 최대 4발 사격을 가능케 하여 발사속도를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힘들게 꼬질대로 꾹꾹 쑤셔넣는 것이 아니라 총 자체를 바닥에 툭툭 쳐서 중력에 의해 화약과 총알이 가지런히 정렬되도록 하는 방식.
다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서양에서 흑색화약은 가루상태가 아니라 '코닝'이라는 공정을 거쳐 알갱이 형태로 유통됐기 때문이며 이 방식에서 쓰는 머스킷탄은 딱 맞는 탄이 아니라 약간 헐렁하다(딱 맞는 탄을 쓰면 정확도는 오르지만 최악의 경우 망치로 꼬질대를 때려가면서 장전해야 한다). 아래 동영상(2:35)을 보면 샤프 소령과 리인액터들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bite, pour, spit, tap, aim의 5단계가 있다고 한다.
- Bite: 탄환과 화약이 함께 든 종이 봉투를 입으로 뜯는다. 이 때 탄환이 입속으로 들어간다.[11]
- Pour: 종이 봉투 안의 화약을 약접과 총구에 주입한다. 약접에 화약을 넣고 약접 뚜껑을 닫는 것이 먼저다.
- Spit: 입속의 탄환을 총구에 뱉어 넣는다.
- Tap: 총구를 위로 향하게 하여 개머리판을 땅에 두어 번 두들긴다. 이 절차가 꼬질대로 쑤시는 절차를 갈음한다.
- Aim: 조준한다.
다만 해당 동영상의 댓글을 보면 이 과정에서 spit은 불필요하며 안전상의 문제를 일으키므로[12]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다음의 영상에서는 해당 과정을 생략하고 사격한다.
아예 통째로 탄포를 집어넣는 방법도 있는데, 사실 위의 5단계 방식보다 우수한 방법이다.[13] bite 단계에서 탄환 쪽이 아니라 반대쪽을 이로 물어 찢는다. 화약을 부어넣으면 종이 탄포에 감싸인 탄환이 남아 있게 된다. 몸에 좋을 리가 없는 납탄이 입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도 탄이 종이 탄포와 함께 총구로 들어가기 때문에 총신에 더 밀착하게 된다. 원래 탄환의 구경이 총신의 구경보다 작으므로 헐거워서 명중률 저하의 원인이 되지만 이 경우 탄포가 그 빈틈을 메워 명중률을 높여주는 것이다. 보통 이렇게 하면 탭 로딩이 불가능할 정도로 뻑뻑해져서 꼬질대로 쑤셔줘야 하지만 마침 탄포는 기름종이라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므로[14] 탭 로딩도 여전히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스핏 동작을 위해 총구를 입가로 가져다 대는 잔동작도 하나 생략함으로써 장전 시간을 소소하게 단축할 수 있다. 즉, 연사속도와 명중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셈이다. 동영상의 사수는 그리 빠르지 않은 동작으로도 대략 14초에 한 발을 쏘는데 1분당 4발이라는 놀라운 연사속도로 35야드(32m) 거리의 작은 표적을 모두 맞혔다.
다만 당대 플린트락 머스킷을 쓰던 군인들이 바보라서 탭 로딩을 애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최초로 쏠 때야 총열에 탄매가 끼지 않아 탭 로딩을 쓰더라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전투 중에 탭 로딩을 하면 탄이 총열 중간에 걸려 약실까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온전히 화약 폭발의 힘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다.[15] 이러면 탄의 속도가 떨어져 사거리는 물론 살상력도 급감한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군대에서는 이러한 탭 로딩을 꼼수로 봐서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장 상인, 해적 등의 민간 쪽에서는 금지하는 규정이 없어서 숙련자의 기술로 취급해 열심히 써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4. 플린트락의 종류
플린트락에도 세부적인 분류가 있는데, 19세기 영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브라운 베스나 샤를르빌 등 일반적인 서유럽 머스킷의 작동 메커니즘 전체를 말할 때는 통칭 파이어락(firelock)이라 부른다.후대에 플린트락으로 알려지는 완성형이 나오기 까지 그 사이에 스냅락(snaplock), 스냅핸스(snaphance, snaphaunce)나 미퀼렛(Miquelet) 등 약간 다른 종류의 작동 방식이 존재했으나, 이 과도기적 형태들은 복잡하고 고장이 잦았다.
미퀼렛의 격발장치 구조 |
스냅핸스의 격발장치 구조 |
미퀼렛은 주로 스페인과 오스만이 사용했는데, 메인 스프링이 어느 위치를 미느냐에 따라 스페인식(또는 파틸라), 로마식(또는 이탈리아식)으로 나뉜다. 사실 명칭과 실제 사용자의 관계는 없다. 미퀄렛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시어가 수평 방향으로 움직이는 점, 그리고 스페인식에서는 프릿즌 표면을 세로 홈을 여럿 파놔서 불똥이 잘 튀게 가공했다는 점이 있다.
영국식 파이어락(일명 "도그락")은 하프콕 걸쇠("도그")가 외부에 노출된 특징이 있다. 도그에 별도의 스프링이 있어 반쯤 당겼을 때 자동으로 걸리거나, 별도 스프링이 없거나 약할 경우 엄지로 직접 도그를 밀어서 걸어줘야 한다.
프랑스식 파이어락은 하프콕 기구가 내장식인 더 선진적인 구조. 해머를 반쯤 당겼을때 자동적으로 하프콕이 걸리는 진정한 완성형 "플린트락(true flintlock)"은 프랑스식의 후계로 보는 편이다. 영국도 나중에 프랑스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5. 화포용 플린트락
전장식 대포용 플린트락(속칭 gunlock)은 보통 랜야드 끈을 달아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끈을 당겨 격발했다. 건락이 도입되기 전에는 매치락조차 아니고 그저 긴 막대 또는 창에 화승을 꽂은 점화 막대(linstock)를 이용해 화포에서 조금 떨어져서 점화구에 갖다댔다. 당시 화포는 반동으로 뒤로 크게 밀려나기에, 화포 뒤에 붙어 서서 점화하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니 린스톡의 사용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다만 린스톡 길이에 한계가 있으니 화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긴 어렵고, 또한 사람이 직접 갖다대야 해서 비좁고 흔들리는 선상에서는 점화 격발이 나름 어려웠다고 한다. 반면 건락은 랜야드 끈을 길게 할 수 있고, 사수가 기둥이나 엄폐물 뒤에 숨어서 원할 때에 손쉽게 당길 수도 있다.함상용 화포의 격발에 건락을 선진적으로 운용한 것은 영국(1745년 도입)이고, 타국의 도입은 좀 늦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트라팔가르 해전(1805년) 당시 영국 해군은 건락을 썼으나 프랑스-스페인은 쓰지 않았다. 당시 함포는 일제 격발을 하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비좁은 배 안에서 사수가 안전하게 타이밍 맞춰 순서대로 노려쏘기에는 건락이 더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건락은 불발률이 여전히 좀 있는 것이 문제. 그 탓인지 프랑스 등 타국에서는 도입이 늦었고, 영국 역시도 예비 점화용으로 여전히 린스톡을 가지고 다녔다.
사실 퍼커션 캡 시절의 포병일지라도 예비용으로 린스톡을 여전히 갖고 다녔다고 한다. 가끔 당시의 배에서 굉장히 희한한 형태의 플린트락/퍼커션캡 권총 또는 격발기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장전 상태에서 터치홀로 물이 들어가 주 장약이 젖는 등 대포 불발이 극심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서 탄두를 넣지 않은 권총을 점화구에 대고 쏴서 대량의 불꽃과 압력으로 어떻게든 점화하려는 용도로 포술장이 만든 물건이라고 한다.
6. 플린트(부싯돌)
서구에서 건 플린트로 주로 사용하던 부싯돌은 석영이 풍부한 규질암 계열의 암석으로, 여러 국가가 나름의 부싯돌을 캐서 썼으나 건플린트로서는 노르딕제, 네덜란드제, 프랑스제, 영국제가 유명하며, 플린트락 전성기에는 영국제와 프랑스제가 제일 성능이 좋다고 평가 받고 대량 유통, 수출되었다.노르딕제는 주로 발틱 지역에서 온 부싯돌을 가공해서 판 것으로 보이며 16세기 후반~17세기 사이에 주로 유통됐다.
네덜란드제는 17~18세기에 많이 유통됐고 프랑스제가 유행할 때도 나름 건플린트 시장에서 선방했다.
프랑스제는 원석이 꿀색~갈색 계통이며 북프랑스에서 벨기에에 걸친 지역에 부싯돌 광산이 많았다. 프랑스제는 18세기 즈음에 부싯돌 시장의 메이저 중 하나였는데 건플린트만이 아닌 불을 피우기 위한 일반용으로도 널리 수출됐다. (건플린트는 콕에 물리기 위해 일반용 부싯돌에 비해 크기가 작고 일정한 것으로 구분 가능하다.)
영국에서는 노폭에서 서폭 지역에 걸친 지역에 석기시대부터 유명한 그림스 그레이브라는 부싯돌 광산이 있는데, 벨기에 슈피엔스, 폴란드 크셰미온키와 함께 유럽 3대 부싯돌 광산으로 꼽힐 정도의 규모다. 건플린트 시대에 이를 브랜든 시로 가져가 부싯돌 가공 공장을 돌린 걸로 유명하다. 영국제는 원석이 회색~흑색에 가까운 짙은 회색 계열인 것이 특징이고, 건플린트는 양날을 낸 것도 만들어서 한쪽 날이 닳으면 뒤집어 끼워 쓰기도 했다.
프러시아는 건플린트 산출이 시원찮아 마노(agate)를 캐다 썼으나 성능은 떨어지는 편.
국가마다 플린트 가공 기술도 달랐는데, 프랑스제는 원석에서부터 굉장히 깔끔하고 일관적인 크기로 떼어내고 건플린트로서 쓰기 좋게 사다리꼴 단면으로 만드는 등 가공 기술이 우수했다. (흔한 삼각형 단면 부싯돌은 콕에 물릴때 흔들리기 쉬워 사다리꼴에 비해 수준이 낮은 걸로 친다.)
영국식 가공 기술은 원석의 특성 탓도 있어서 프랑스식에 비하자면 좀 가공 효율이나 기술이 떨어진 걸로 보이는데, 18세기 중에 영국 플린트내퍼들도 프랑스식 제조법을 도입한 것을 보면 어떻게든 염탐질을 해서 프랑스의 고급 기술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제 부싯돌이 멀리 신대륙에서도 유통될 정도로 부싯돌 가공 산업은 상당히 큰 일감이었는데, 그만큼 플린트내퍼들이 미세 파편을 뒤집어쓰며 대량의 노동에 시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덕분에 당시 플린트내퍼들의 평균 수명은 일반인에 비해 20여년은 짧을 정도였다고 한다.
좋은 부싯돌은 가격이 제법 나갔기 때문에 병사들 중에 이걸 빼서 팔아먹는 놈들도 있었다. 어차피 혼란한 전투 중에 누가 불발돼도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저질러진 행위. 물론 들키면 징벌을 받았고, 당대 하사관들은 지금 못지 않게 총기 검열을 빡세게 했다.
부싯돌의 소모율은, 현대 사수들의 체험으로는 재가공하며 잘 아껴쓰면 백여발까지도 쓸 수 있으나, 야전에서는 20여발 내외로 보는 편이다. 브라운 베스 시절에는 탄포 20발 당 하나씩 보급했다. 나름 비싸고 소모성이라지만, 격발했을 때만 소모되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서 항상 불 붙여둬야 하는 화승에 비하자면 오히려 소모량 관리가 더 쉬웠다고 한다.
7. 램로드(장전봉)
플린트락 시대의 또다른 은근히 중요한 혁신으로는 램로드(장전봉)가 있다. 전장식인 이상 램로드는 재장전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장비이다.원래 매치락 시기에는 나무봉을 주로 썼는데, 플린트락 시기에 나무봉에서 강철봉으로 서서히 전환이 이뤄졌다. 브라운 베스가 나무봉과 강철봉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강철봉이 낫다는 걸 인정하고 강철봉으로 자리잡은 사례. 나무봉이 일단 만들고 보급하기 쉬우며 사냥꾼 등이 자작도 가능한 관계로 민수용 플린트락/퍼커션 캡에서는 여전히 애용되긴 했다. 하지만 재장전하다가 너무 험하게 다루는 바람에 부러질 가능성이 있다. 강철봉은 무겁고 값이 나가지만 튼튼해서 부러질 걱정이 없어 전투 중에 콱콱 램로드를 박아넣어도 되고, 덕분에 장전 속도도 조금 더 빨라졌다.
램로드를 뺐다가 쑤시고 도로 넣는 과정이 장전 시간을 상당히 잡아먹기 때문에 이 부분을 개선하려는 시도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자면 총의 것과는 별도의 램로드를 끈을 달아서 검처럼 차고 다니다가 장전 후 손에서 놔 버리면 도로 허리에 늘어지게 하는 식. 이 것은 걸리적거리는 것이 문제였다.
램로드의 머리 부분은 보통 장착시 총구 방향을 보게 집어넣기 때문에, 빼고 쑤시고 넣을 때마다 램로드를 뒤집어 드는 동작 낭비가 생긴다. 그래서 램로드 머리를 총구 반대 방향으로 납입하고 총구 부품에 경첩이 포함된 부품을 달아서, 램로드를 빼내고 살짝 옆으로 움직여서 바로 쑤셔넣는 captive ramrod 형태도 등장한다. 장전 시간 개선에 약간이나마 도움은 되지만 그냥 옛날식이 덜 불편하고 별도의 부품도 필요 없다는 이유로 소총에서는 대세를 차지하지 못했고, 램로드를 떨굴 염려가 없다는 점 때문에 주로 짧고 램로드 떨구기 쉽고 마상에서 장전해야 하는 권총, 카빈류에서는 꽤 인기 있는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권총은 총구가 아래를 향하게 휴대하는 일이 많고, 마상에서는 말이 달리는 충격으로 떨어지기 쉬운데다 떨어트린 걸 도로 주으려면 말에서 내려야 하니 캡티브 램로드가 인기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전장식 캡앤볼 리볼버에 내장된 실린더 장전 도구도 캡티브 래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전장식 총기의 발사속도는 훈련도에 달려 있기에, 구관이 명관이라고 평범한 램로드가 끝까지 주류였다.
구형 탄환이 아닌 고깔형 탄두를 사용하는 시대가 되면 램로드의 머리 부분도 탄두 모양을 찌그러트리지 않도록 깊숙히 패여 있는 형상(countersunk ramrod)으로 바뀐다.
머스킷 장전이 잘 됐는지 여부도 램로드로 알아볼 수 있다. 평소에 장전해뒀을때 램로드를 넣으면 얼마나 총구에서 튀어나오는가를 기억해두면 약실 장전 여부를 알 수 있다. 또한 흑색화약 총은 약실 내에 빈 공간이 없게 탄두와 화약을 꽉꽉 밀어넣는 것이 관습인데, 탄두 크기나 패치나 탄매 등의 이유로 뻑뻑할 경우 잘 안들어갔음에도 제대로 장전된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이때 램로드를 다트 꽂듯이 손목 스냅으로 가볍게 던져넣거나 자유 중력으로 떨어지게 해 보면, 탄이 완전히 안 들어간 상태에서는 램로드가 별로 튀지 않고, 탄이 다 들어간 상태면 램로드가 벽에 부딪힌 반동으로 튀어오른다.
8. 쇠퇴
플린트락은 19세기 초~중엽까지도 사용되다가 뇌홍을 활용하는 퍼커션 캡의 등장 이후 군대에서 퇴출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원시적인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플린트락은 발명된 후 거의 100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절찬리에 사용되어 온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 워낙 오랫동안 널리 쓰이며 기본적으로 깔린 양이 많다보니, 퍼커션 캡 총기는 퍼커션 캡에 어울리는 구조(중절식, 인라인식)로 만들어지기보다는 플린트락을 개조해서 측면에 캡을 씌울 니플을 붙이는 형태로 만드는 것이 보편화 될 정도의 기나긴 영향력을 발휘했다. 엄밀히 말해 극초창기 퍼커션 캡은 중절식 인라인식이었으나, 새 총을 사는 것보다는 구형 플린트락을 퍼커션 캡으로 개조하는 것이 훨씬 싸기에 생긴 일이다.아프가니스탄의 소총인 제자일도 주로 플린트락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일 자체가 영국군이 버린 망가진 소총 부품을 베이스로 이런저런 부품을 끼워넣으며 급조한 총들이라 딱히 정해진 제원이 없었고, 그러다보니 더 원시적인 매치락 방식 제자일도 존재했다. 플린트락 방식 제자일 중 가장 흔한 것은 영국제 브라운 베스의 격발 부품을 유용한 것이고, 미퀄렛식도 꽤 있던 듯하다.
9. 조선에선?
조선은 여러 번 플린트락이 군에 도입,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이고 나선정벌 당시 신유장군이 들여오는 등, 여러 루트로 수입하고 간간히 사용되었으나 결국은 완벽히 제식화되지는 못하였다. 명확한 이유가 언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부싯돌 격발 장치는 이후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서구 세력에 대한 강구책에서 다시 보이는데 일종의 기뢰인 수뢰포의 격발장치에서 동화모( 뇌홍)가 없을 경우 사용하는 부수적 격발 장치로서 '화석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 뇌홍은 그 퍼커션 캡으로서 청나라로부터 수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개인화기에 대한 적용의 흔적은 없으며 서구는 금속제 탄피를 이용한 후장식 소총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기술적 진보의 의의는 시대상을 반영할 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9.1. 부정된 가설
플린트락이 도입되지 않은 원인으로 보다 복잡한 기계 장치에서부터 오는 기술적 어려움 및 가격상승이나 앞서 말한 불발률 의혹, 흑요석이나 황철석 같이 부싯돌로 쓰기 좋은 광석 부족, 그리고 전쟁과 교전이 없었기에 수요가 없었던 점 등이 자주 언급되나 그 중 대부분은 그것을 부정할만한 다른 증거가 존재한다.9.1.1. 불발률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플린트락(머스킷 소총) 방식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데[16] 이는 불발 문제만이 원인은 아니었다. 매치락을 고집할만큼 플린트락의 불발률이 큰 문제가 되었다면 모든 유럽 군대가 전부 플린트락으로 갈아타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이상으로 습한 영국은 그럼 어떻게 플린트락을 대규모로 운용했냐는 점 역시 큰 걸림돌이다. 열강들은 습도로는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정글 지대에서도 큰 무리 없이 머스킷을 운용했으며 심지어 태국의 시암왕국이나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등 동남아 제국들도 적극적으로 플린트락 머스킷을 수입해 전열보병의 주무장으로 운용했고 서양은 그 습한 해상함선들의 대포의 격발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9.1.2. 명중률
또한 플린트락 도입을 안 하는 이유로 거론되는 격발시 충격량이 플린트락이 더 커 명중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 역시 의문인 게 유럽 측은 18세기부터 민간에서 사냥용으로 라이플을 쓰기 시작했는데 머스킷과 동일한 격발방식인데도 명중율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영국 라이플 경보병 연대가 반도전쟁 당시 700여미터 떨어진 프랑스 장군을 저격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경보병 연대는 기동성이 중요했기에 민간보다 훨씬 짧은 1미터짜리 베이커 라이플을 사용했음에도 이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니 진동문제는 무시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9.1.3. 부싯돌의 부재
동아시아엔 질 좋은 부싯돌이 없었다는 것도 자주 거론되는 이유인데, 가령 한국에 널린 차돌로는 불꽃이 잘 일지 않으며, 황철석이나 마노 정도가 대등한 성능을 내지만 준 보석급이라 조선 땅에선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 원인이라는 가설이다.그러나 부싯돌의 주요성분 그 자체인 석영은 한반도에 꽤나 흔했는데, 대표적으론 삼국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채굴해온 자수정이 있다. 광복 이후 수요가 늘어나 본격적인 채굴을 했다고는 하나, 삼국시대 유물이나 조선시대 장신구 등에서도 꾸준히 등장할 정도로 광산 개발이 되어있었고, 심지어 조선시대의 안경인 애체는 유리를 가공하기 난감하여 석영을 넣었다는 기록과 함께 석영을 사용한 유물이 나올 정도로 흔했다. 이러한 석영 채굴지역 인근에서 질 좋은 부싯돌 또한 자주 발견되며 상품성 떨어지는 석영도 부싯돌로 쓸 수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게다가 중국까지 포함시키면 하남/강소성에 주요 부싯돌 매장지역에 포함될 정도로 거대한 부싯돌 채굴지가 존재하며 해당 부싯돌을 사용한 석기시대 유적지까지 나올 정도다. 이쯤되면 사실상 질 좋은 부싯돌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총에 부싯돌을 물려서 사용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거나, 부싯돌이 있음에도 총기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게 타당해 보인다.
9.1.4. 스프링 제작 기술력 부족
조선의 기술 및 공업력이 유럽보다 뒤떨어져 양산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도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사유로, 조총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황동 스프링으로써 불씨가 살아있는 화승을 갖다대기만 하면 되니 복원력만 있으면 되었지만 플린트락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부싯돌이 장착된 공이치기가 방아쇠를 당기면 화약접시 덮개를 밀어젖히며 충분한 마찰을 줄 만큼 강한 동력을 제공해야 했으므로 강한 탄성력이 요구되었고 따라서 시계태엽과 유사한 재질의 스프링강을 써야했다는 것이 그 이유로 자주 언급된다.여기에 더해 동서양 기술력의 넘을 수 없는 격차를 상징하는 회중시계 태엽문제[17]가 거론되는데, 회중시계가 화두에 올랐던건 19세기의 중후반의 일로 동서양의 기술 격차가 상당해진 시점이며, 그 시기 즈음엔 무기의 주류가 이미 퍼커션캡으로 넘어가 플린트락 도입은 논의조차 되지 못했으며 조선에선 기기국을 설치해 퍼커션 캡 생산시설을 구비하고 타국의 소총들을 복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던 시기다. 그러나, 조선의 플린트락 도입 논의 자체는 나선정벌기에 시작되었고, 그 당시 유물은 이후 브라운 베스등으로 유명한 후기 플린트락에 비해 상당히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단계였다. 후기 플린트락에 도입되었던 안전장치[18]는 언감생심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플린트락이 개발되고도 서양에선 도가니 제강법이 확립되기 전까지 안정적인 성능의 스프링 강을 대량으로 확보하지 못해서 플린트 락에 황동 스프링을 쓰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사냥용과는 달리 대량으로 납품해야하며 성능이 일정해야하는 군대의 경우 이러한 성향이 더 강했고, 습기로 인한 녹의 문제에 더 민감한 해군 또한 그러했다. 하물며 나선정벌 시기 장거리 원정세력의 플린트락이라면 황동 스프링일 가능성이 더더욱 높아진다. 이후 제철기술이 발달하며 황동보다 탄성계수가 약 두배정도 차이나는 스프링 강을 쓰게 되며 설계가 다소 간략해진 것이지, 황동 스프링으론 절대 플린트 락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설계 시 스프링을 겹치거나 큰 스프링을 배치하는 등의 사소한 차이가 나고 스프링 수명에서 차이가 발생할 뿐이며. 비교대상이 나선정벌 시기 노획품임을 감안하면 양자 모두 황동 스프링을 사용했을테니 이 점에선 차이가 없다.[19]
여기에 더해 회중시계에 들어가는 태엽강을 만드는데 실패했던 일본조차 플린트락과 작동 방식이 완전히 같은 수석식 휴대용 라이터 유물이 있다는 점을 보면 플린트락의 기술적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은것으로 보이며, 동북아시아의 기술 수준으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더해 나선정벌기의 노획품에 한정하면 생산 및 양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2. 부정되지 않은 가설
아직 부정되지 않은 가설론 동서양의 교리 및 주적의 차이가 있다. 특히 정주민간의 전쟁이 잦았던 서양은 보병 밀집 대형이나 중장갑 보병등을 상대로 관통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철제 쇠뇌같은 무기를 도입했지만, 상대적으로 중장갑 적대 세력을 마주할 상황이 적었던 동양에선 이와 정 반대로 연사성을 중시한 연노가 발전한 점이나, 대구경 화포가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던 반면 연사가 가능한 미트라예즈는 19세기에나 나온 유럽과 달리, 천자총통도 구경에 비해 화약낭비라며 선호되지 않았던 반면 지연신관을 통해 연사를 구현한 총통기와 화차는 15세기에 튀어나왔던 조선을 생각하면 플린트락 도입도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9.2.1. 교리 차이
아시아가 서양식[20]의 전열보병 대형을 활용하는 빈도 수가 적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일제사격 이라는 개념 까지는 동일하게 존재 했으나 전열 보병 만큼 고밀도로 밀집한 대형에 대한 개념은 희박했다. 플린트락은 타들어가는 화승이 없어 지휘관의 사격 명령을 여유롭게 기다릴 수 있고, 대형의 간격을 좁히기 좋았다. 반면 일제사격, 밀집대형을 그리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화승총 대신 플린트락을 도입할 이유가 크지 않았다. 실제로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의 전열보병 대열에 강한 인상을 받았으나, 고질적인 염초의 부족 등으로 조선군의 화기 운용은 일제사격을 통한 화망의 구성을 추구하는 전열보병보단 적을 맞추는데 중점을 두는 경보병 전술에 가깝게 짜였다. 이는 조선이 산악지형 많고 산성에서 수성전을 치루는 방어적인 교리에 익숙했기 때문도 크다.9.2.2. 필요성의 부재
서양에서 매치락이 플린트락으로 열심히 변화하던 시기는 전쟁이든 식민지 개척이든 무역이든 외부로 뻗어나가며 여러 충돌을 일으키고 무기 개혁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반면 조선 및 동북아시아는 천명교체기를 제외하면 비교적 정치가 안정적이며 전쟁 자체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돈이 많이 드는데다 얼핏 보기엔 별 다를 바 없는 대규모 무기 개혁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는 점도 거론된다. 나선정벌과 같은 약간의 도입 기회도 있었으나 그 당시엔 플린트락도 원시적인 수준에 그쳤고, 염초 및 화약의 차이로 그 전훈이라 볼 수 있는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므로 조선은 이 기회를 놓쳐버렸다.9.2.3. 기술전파의 부재
나선정벌 시기 초기형 플린트락은 충분한 감명을 주지 못했고, 그 이후 조선이 플린트락을 다시 보게 된 시점은 개화기에 가까워져 퍼커션캡이 들어오던 시기였던 점도 문제가 된다. 그 사이기간 동안 조선이 후기형 플린트락을 접할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하는데, 당시 중화 패권국은 청나라로 여진 유목 기병세력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였기에 다수의 보병이 소수의 기병을 쉽게 제압하는 기술의 전파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설령 누군가가 청나라에 플린트락 양산 기술을 강제로 전파하려 들어도 청나라가 이것을 녹영병 등에게 보급해서 조선이 새로운 플린트락 총기에 알게될 가능성이 없는 것. 이러한 사정으로 퍼커션 캡과 후장총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외부 자극이 없었던 조선은 매치락에 안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10. 현황
당연히 현대에서는 수집가나 리인액트먼트에서나 쓸거같지만 의외로 현대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는 곳이 있으니 다름아닌 총기천국 미국이다. 미국 총기법은 전장식 화기를 총기로 분류하지 않아 거래가 매우 자유롭고, 미국의 펜실베니아에서는 다른 주에서 사냥 시즌이 다 끝난 후에 시작되는 흑색화약 한정 사냥 시즌이 있어서 전국의 사냥매니아들과 현지인들이 꾸준히 사용하고있고 수석총과 부품들을 판매중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목조건물이 많고, 스스로 집을 짓던 사람들이 많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목공 수업이 필수과목이었던 적이 있고, 아직도 일부 학교는 목공 수업이 있는데 중, 고등학교 정도되면 목공 수업에서 플린트락을 만들기도 한다.
[1]
수석식 작동방식을 뜻하며 총 뿐만이 아닌 라이터로도 만들었다.
[2]
주로 수입산 제품을 뜻하며 플린트락 뿐만이 아닌 이후의 퍼커션캡 소총도 포함된다. "게베어"가 일본으로 들어오며 발음이 변한 것이다.
[3]
사실 동양에서도 명나라 말엽 자생화총과 격전총등으로 불리는 플린트락을 발명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명나라는 망하였고 뒤를 이은 청나라는 새로운 화기의 도입과 개량에 관심이 없었다.
[4]
다만 조선이나 청, 일본 등은 예외로, 이쪽 국가들은 영국 등의 서양과 교류도 없는 편이고 기후나 자원 문제상 굳이 플린트락을 채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19세기 말엽까지 매치락 방식만 고집했다.
[5]
프릿즌 표면을 표면 경화만 했을 경우 100여발 정도 쏘면 불똥이 안 튀기 시작한다. 당시에도 잘 못만든 건 그랬고, 심지어 현대에도 인도산 저렴한 리프로덕션 플린트락은 프릿즌을 제대로 열처리를 안 해서 같은 증상을 보인다.
[6]
어차피
정글은 인구밀도가 극히 낮았으므로 적군의 수가 적어서 한번 불발되어도 바로 다시 격발하면 그만이었다. 상술된
조선,
청나라,
일본,
인도는 습도도 높으면서 가상적국들의 인구수가 많았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유럽측 역시 시대의 한계상 식민지 개척에 수만킬로 떨어진 본국에서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기는 불가능이었으므로 병력규모가 원주민들과 별반차이 없거나 더 적은 소수였으며 사방이 수목으로 우거져 교전거리가 극히 짧은 전장환경상 철기는커녕 돌창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이라도 현지 지형 및 지리를 잘 안다는 홈어드벤티지를 적극 이용한 초근접전으로 충분한 저항을 할 수 있었기에 초탄발사가 매우 중요했다. 플린트락이 화승총보다 습기에 약했다면 소수의 유럽인들이 거점을 세우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청제국, 일본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국가간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정체되었다고 보는 게 맞고 그 예시로 토호국간 전쟁이 빈발했던 인도 아대륙에선 브라운베스, 샤를르빌 머스킷 같은 유럽산 총기를 다량 수입해 사용했다. 애초에 자국의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비싼 돈 주고 질떨어지는 무기를 사는 나라는 없다.
[7]
당시 유럽 국가들의 식민개척은 지금으로 따지면
화성탐사 및 기지설치와 비슷한 난이도와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 행위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자연히
용병을 무한정 고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종교,문화가 다른 현지인들을 무작정 고용했다간
세포이 항쟁처럼 분쟁이 발생할 위험 역시 높아지기 때문에 본국병력 이상으로 인원을 늘릴 수도 없었다. 플린트락의 보급은 화승의 불을 항상 신경써야 해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매치락의 단점을 극복하고
환경이 고온다습한 편이었던 주요 거점들을 이전처럼 현지세력에게 뺏고 빼앗기고 하는 거 없이 완전 장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8]
실패했다는 점에 주목하자. 다만 동남아도 불발 확률이 높았던게 현실이고, 부싯돌을 구하기가 다른 아시아 지역보다도 더 힘든 지역이었다. 동남아는 불피우는 방법부터
마찰식 점화법이 대세였다.
[9]
뇌홍의 주 원료는 수은이다.
[10]
접시에 화약을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에 총구로 나머지 화약을 총알과 함께 담고서, 꼬질대로 잘 다져넣어서 장전시키는 것까진 동일하다. 여기서 화승을 쓸 필요가 없으니 화승을 격발장치에 물리는 것하고, 화승이 화약에 닿아서 점화가 될 수 있게 사격 직전에 화약 접시를 열어야 되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다.
[11]
세포이 항쟁의 발단으로 꼽히는 사건이 이 종이 봉투에 동물성 기름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힌두교인들은 입으로 소기름이 발라진 종이를, 무슬림들은 돼지기름이 발라진 종이를 뜯어야 했으니 터부를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다만 식물성 기름은 총기 소재에 사용시 오히려 뻑뻑해지는 특성 탓에 동물성 기름을 사용한 이유도 있다.
닭기름,
물소기름,
야크기름,
양기름 등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맞다. (물소고기와 야크고기는 힌두교에서도 소고기와는 다르게 여겨져 금기시되지 않는다.)
[12]
입 안에서 납탄을 굴리다가 실수로 삼켜버릴 위험이 있다. 중금속인 납덩어리를 삼키면 건강에 좋을 리가 없다.
[13]
현대의 기준으로는 소진탄피와 원리가 유사하며, 주로 전차포탄에 활용된다. 물론 이 방법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총열에 종이를 통째로 넣기 때문에 사격 후 총신 내에 연소 잔재물이 spit 과정이 포함된 위의 방법보다 더 많이 남게 되고 이는 불발이나 작동 불량의 주된 원인이 된다. 후대에 종이 단피를 쓰던 드라이제나 샤스포 소총, 소진탄피 기술이 초기 단계였던
M551 셰리든의 건런처가 지녔던 단점과 일맥 상통하는 문제점.
[14]
위 영상에선 아예 집어넣으니 쑥하고 들어가선 꼬질대로 쑤실 필요 없이 가볍게 탁탁하고 털어주더니 바로 쏜다.
[15]
위에서도 언급하듯 탄이 총열 지름보다 작게 만들어진 것도 이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는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화약의 품질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5~6발만 쏴도 총열의 청소가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탄매 문제는 나중에
무연화약이 등장하고 나서야 다소 해결된다.
[16]
다만 성호사설이나 국조보감에서는 이런 수석식을 발사속도가 더 빠르다고 좋게 평가했다.
[17]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권 수공업자들은 무게추를 이용한 자명종은 어찌어찌 만들어냈지만 스프링강과 태엽이 필요한
회중시계는 끝끝내 못 만들었고 결국 스프링을 고래수염으로 대체해야했다. 이는 1860년대 조선의 과학력이 기록된 의기집설에 태엽을 만들줄 모른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개항으로부터 거의 30여년 전의 시기임에도 이정도 재료공학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보다 과거에 이런 기구를 대량양산할 기술이 있기 힘들다.
[18]
공이치기가 함부로 움직여 사고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 등
[19]
플린트락에 당시 기술로 황동 스프링 사용가능 여부에 관한 추가 서술 필요. 초기의 플린트락 머스킷
스냅락,
스냅헌스도, 심지어 플린트락과 기계적으로 유사점이 있는
휠락 작동방식도 그 제질이, 특히 못해도 내부 부품만은 철제였지 황동제가 아니었다.
황동제 몸체의 휠락조차도 내부의 부품은 철제였으며
더 나중에 나온 총열과 몸체가 황동인 플린트락조차 주요 작동 부품은 철제다.
심지어 18세기에 나온 해군용 플린트락 권총도 외부의 몸체는 황동이어도 내부의 부품만큼은 철제다. 플린트락에 황동스프링을 써본건 조선, 혹은 다른 동양 국가들은 모르지만 최소한 이걸 만든 서양에서는 실험만 해 보았거나 아예 처음부터 고려조차 안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비록 강철의 대량 생산은 힘들어 플린트락의 외부 철제 부품(특히 총신)이 연철이었지만 그럼에도
석궁의 역사에서 나오는 강철제 쇠뇌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최소한)당시 서양의 장인들은 강철 부품(특히 스프링)만드는 법은 과거부터 내려온 경험과 실험기록 등의 방법으로 알고 있었다.
[20]
서양은
고대부터
팔랑크스,
레기온 등의 밀집대형을 선호했으며 밀집하기 힘든
화승총을 가지고도
테르시오 밀집 대형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