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20:28:43

암군/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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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실제 사례3. 가상의 암군
3.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

1. 개요

  • 암군/목록 문서의 실존인물 예시 목록 문단에는 나무위키에서 정한 근거 신뢰성 순위 6순위 이상의 자료들에서 명확하게 암군, 혹은 부정평가가 높다고 명시된 군주들만 추가하며 각주로 그 근거 출처를 반드시 밝혀놓는다. 또한 암군이라는 평가의 근거 출처가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 군주들은 목록에서 삭제를 원칙으로 한다.
  •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을 경우나,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태국, 모로코,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완전한 입헌군주제하의 군주는 제외한다.
  • 공화정 체제의 지도자도 기입하지 않는다.
    • 독재자 역시 기입하지 않는다. 단, 군주에게 실권이 없는 국가의 실권자들(예: 막부 정권의 쇼군 등 전근대 일본의 실권자[1])이나 군주 없는 군주국의 섭정으로서 독재를 저지른 인물은 예외로 간주한다.

  • ★: 폭군으로도 평가를 받는 경우
  • ◆: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경우[A]
  • ◇: 육체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A]
  • ▲: 시해 또는 전사당한 경우
  • △: 폐위되거나 강제로 양위당한 경우
  • ◎: 역사 왜곡, 관점 차이 등의 논란이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갈려 암군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경우. 논란이 있는 경우 관점에 따라 충분히 명군이라고 볼 수 있다.

2. 실제 사례

2.1. 동아시아

2.1.1. 한국

2.1.1.1. 고려
  • 의종(1146 ~ 1170)▲△: 무신정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암군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임금이다.[4] 그러나 의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더더욱 막장이었는지라, 의종 복위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었다는 게 아이러니다.[5]
  • 충혜왕(1330 ~ 1332)(1339 ~ 1343)★▲△◎: 고려판 해릉양왕으로 온갖 난행을 펼치다가 원나라에 끌려가 죽었다. 사실 도덕적 측면에선 영락없는 사이코패스 왕이었지만, 21세기 들어선 정치 운영과 정책적 측면에선 또 일부 개혁적 요소도 있었다는 식의 약간의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6]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7]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8]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9]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10]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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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 조선
  • 연산군(1494 ~ 1506)★△: 무오사화 이전까지만 해도 폭군은커녕 암군과도 동떨어진 군주였고, 무오사화 때 잠시 흔들리다가도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나름 진정되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 2년간 저지른 패악이 그 원인과 그 이전 10년의 행적으로도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11] 갑자사화가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쉴드가 있지만, 이게 뭔가 말이 안 되는 것이 성종의 두 후궁은 윤씨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도 전혀 없으며[12], 조선시대의 율법으로는 부친의 후궁 역시 모친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야 하므로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명백한 패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록상으로도 이미 연산군은 즉위 혹은 그 이전부터 모친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갑자사화는 윤씨의 죽음을 빌미로 양신을 숙청하고 전제권력을 얻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제권력을 거머줬기는 했지만, 권력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놀아재끼면서 권력남용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 및 시스템을 망가뜨렸고,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연산군 시대가 조선 시절 전체 중에 가장 왕권이 강한 시기였던 만큼, 이후에는 군약신강 기조가 이어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은 폐비의 소생인데다가 이후 중전이 된 정현왕후 아들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즉위할 때도 모자란 데 없이 즉위하였다.
  • 중종(1506~1544)◎: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왕권 강화만을 위해 조광조, 김안로 등의 공신들을 꼭대기에서 고꾸라뜨리는 권력 암투에만 골몰하였다. 조광조와 김안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한순간에 고꾸라트리는 식의 권력 암투로 인해 중종 재위 내내 수많은 사화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중종은 폭군의 대명사인 이복형 연산군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 복성군까지 죽이기까지 했다.[13] 중종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으로는 몰랐겠지만, 연산군 대에 개발된 연은분리법을 폐지한 것은 일본의 경제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나비효과가 되어서 돌아왔다.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을 본받겠다고 《 동문선(東文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14]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 선조(1567 ~ 1608)◆[15]◎: 임진왜란의 존재감으로 인해 조선 제일의 암군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인재를 보는 능력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다. 전란 중에 《 동의보감(東醫寶鑑)》[16]의 편찬을 명하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17] 전후 토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신축년(선조 34년)부터[18] 갑진년(선조 37년)까지 계묘양전(癸卯量田)을 실시하여 전결 확보를 시도했으며[19][20][21][22] 납속책을 확대해서 세수증대를 꾀하는 등의 전후 정비를 하였다. 일단 통치(내정) 면에서 보면 노비 인구 증가, 토지 잠식, 군역과 요역의 문란 같은 중종 대에 제기되고 이어진 민생문제에 대한 개혁담론들이 선조 대에 활발히 논의되었다.[23] 물론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선조 시기의 긍정적 면모를 말한다면 조선은 건국 이후로 체제의 모순이 쌓여 와서 다양한 병폐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는데 선조 시기에 이에 대한 공론화가 점차 시작되었다. 특히 공납제도와 관련해서는 대동법 프로토타입인 수미법(收米法)을 율곡 이이 같은 신하들이 제시하자 선조 또한 농업국의 한계에서는 적절한 정책이라며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본인의 한심한 추진력과 무원칙하고[24] 보신적인 행태로[25]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도 못했으며[26][27] 문제는 논의가 점차 진행되면 될수록 당대에는 지주들의 반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만 보이며 그 어떠한 진전도 없이 제자리걸음만 걸었다는 것이다.[28][29] 물론 전란 전에 논의되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전란 중에 처음으로 공포하고[30] 했으나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또한 전란 전에도 정치혼란의 포문을 연 기축옥사를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이 컸으며 이점은 암군 그 자체이자 의심병 말기 환자의 행보라고 봐도 무방하다.[31] 충무공을 내리고 원균을 앉히는 결단은 어떤 의미로 봐도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들이랑 이순신이 잘 나가는 게 두려워서 끊임없이 견제를 놓은 찌질이이자 소인배였다. 어차피 자기 아들이자 후사를 이을 사람과[32]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인의 손으로 직접 등용해서 활약을 보인 사람을 견제하는 것은 제 살 까먹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짓이었다. 한 마디로 편협하고 옹졸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고[33] 기축옥사 임란 7년의 추태 때문에 교육적으로 본받아선 안 될 암군, 리더십이 부족한 지도자 병폐라는 정도의 평이 어울리는 인물이다.
  • 광해군(1608 ~ 1623)★△◎: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연산군과 더불어 폭군으로 여겨져 왔고, 근현대에 와서는 재평가의 기류도 많았으나, 결국엔 연산군 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평이 다수다.[34] 세자 시절 광해군은 임진왜란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명군의 재목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는데,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35] 열심히 국가를 말아먹었고 결국은 폐출됐다. 따라서 광해군이 무익한 암군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긍정적인 총평을 내리기엔 대단한 무리가 있다. 특히 내정에서 가혹한 궁궐 공사로 재정파탄을 초래했으며, 세자였을때와 달리 민간 사회의 복구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고, 대동법 같은 산업 혹은 구휼 정책 확대에 대체로 반대를 해왔으며,[36][37] 많은 신하들과 왕족을 죽이는 옥사를 벌이고 국가를 망가뜨렸다. 특히 영창대군을 무리하게 죽이는 등 패륜을 일삼았고 간신배들을 끼고 살며 그 똥물에 본인도 자멸했다.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국민 영웅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왕위에 올라 존호가 전체 조선 국왕 중 가장 긴 48자나 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적이었음에도 방계이자 별다른 능력도 없는 인조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것은 광해군의 폭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최근 일각에선 임진왜란을 비롯해 이순신 등을 주제로 한 영화 드라마가 성행, 전술한 선조의 의심병 말기 환자짓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되었고, 마치 사도세자의 비극과 같은 류로 광해군도 저것에 악영향을 받은 바람에 미쳤을 것이라는 동정 여론도 많이 생겨났으나, 후대나 선대에 비해서도 더 나쁜 암군 / 폭군이라는 평을 피하기 어렵다.
  • 순조(1800 ~ 1834)◆◇: 세도정치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여 삼정의 문란을 방치한 왕으로 평가된다. 사실 순조는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었고, 정치적으로도 어지러운 시국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였던 영조와 아버지 정조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왕권에만 의존된 정국을 어린 순조는 잘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지쳐버려 이후 정치적 식물인간이 되어 수십년간 정무에 손을 놓아버렸다.[38] 애초에 순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문제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홍경래의 난 이후 순조는 정신 건강을 해치게 되어 국가운영에 일관성을 잃게 되었고, 11년경에는 결국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후 12년 3월에 회복은 되었으나 정치력의 복구는 이루지 못하여 이전까지의 그의 노력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39] 자연재해, 홍경래의 난, 안동 김씨의 발호, 건강 악화 등을 겪은 순조는 1814년(순조14) 이후 국정에서 한 발 물러섰다. 신료들이 순조에게 적극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순조는 이후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19년(순조 19) 임선(任㸁)은 상소에서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 이해와 공사(公私)의 분별이 권력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결재가 밑에서 처리된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순조는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임선은 조정 신하들을 없애려 한다는 반격을 받아 유배당했다.[40] 계속 건강이 나빠지면서, 순조도 본인의 문제를 자각은 하고 있어 나중에는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원래 대리청정을 맡기면 신하들이 형식적으로라도 반대를 하겠으나 이 때는 신료들 모두가 이 대리청정을 환영할 정도로 당시 조선은 왕권의 권위 공백의 문제가 심각하였다. 왕권에 의해 돌아가는 나라에서 왕이 정무를 이런식으로 아예 던져버리자 외척이 거대한 왕권을 손에 넣고 나라를 뒤흔드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은 본격적으로 몰락한다. 물론 고조할아버지 숙종 이래로 직계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운영체제에서, 험난한 정치적 풍파와 여러 암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영조,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즉위하여 초기부터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과 시절만 잘 만났더라면 암군 정도까지 평가받을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동정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정치의 씨앗을 남긴 부왕 정조도 최근 들어서는 평가가 나빠지고 있다.[41] 어쨌든 결과적으로 순조는 유능한 지도자가 아니었으며, 조선 몰락의 시초를 제공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기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23세에 요절한 것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

2.2. 유럽

  • 표트르 3세(1762)▲△◎: 7년 전쟁의 결과를 완전히 엎어버린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만으로도 암군의 자격이 충분하다. 다만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 따르면,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했을 경우엔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 역시 비대해진 유럽 영토를 노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 세력과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데다, 비록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지만, 당시엔 그것을 몰랐을테니 오스만 제국의 참전도 경계할 필요성이 높았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너무 호구처럼 다 내줘서 그렇지(...) 어느 정도는 아예 납득 불가능한 결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표트르 3세는 어느 정도는 비운의 개혁군주로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황태자 시절부터 종교의 자유를 법으로 보장하는 것을 비롯해 서유럽식 자유화를 추진하고 싶어 했던 그는 짧은 재위 기간에 220개가 넘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비밀 경찰제 폐지, 왕실지 내 농민 대우 개선, 농노 대우 개선, 귀족들의 해외 여행 자율화, 귀족들의 의무교육제 도입 등, 불과 재위 6개월 동안 220개 가까이 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수구적인 러시아 귀족들의 반발을 받아 폐위되었다는 시각도 있다.[42] 그를 폐위하고 즉위한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계몽군주를 표방하여 개혁정책을 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정책에서 반동적인 면모를 보인 것도 그녀가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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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상의 암군

3.1. 전략 게임에서의 암군

군주제의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보통 군주 각각이 몇 가지 능력치를 가지며 이것이 게임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군주라는 것이 그냥 약간의 버프, 디버프 정도만 주는 경우라면 별 상관이 없지만 군주의 능력치가 게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 플레이중인 국가에 암군이 들어선다면 게임 진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기도 한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시리즈 - 게임 내 대부분의 국가가 군주제이기에 랜덤한 확률로 랜덤한 능력치의 후계자가 등장하여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런데 군주 능력치에 따라 받는 포인트가 게임 내 거의 모든 행동에 대량으로 소모되어 사실상 돈보다도 중요한 메인 자원이기에 암군이 등장하면 참 골치아프다. 보통 능력치 총합이 6(가령 2/2/2) 미만일 경우에는 심각한 암군으로 취급한다. 다른 변수를 제외하고 비교한다면 능력치 최하의 군주(0/0/0)와 최고의 군주(6/6/6)를 둔 나라는 기술개발만 할 경우 속도가 3배나 차이난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 국가를 플레이한다기보다는 중세 영주 개개인을 플레이하는 것에 가까운 게임 특성상 캐릭터 능력치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며 능력치가 쓰레기인 캐릭터가 계승받는다면 난이도가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상속법과 각종 음모를 통해 능력치 구린 자식을 죽이거나 투옥하거나 하는 등 플레이어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암군의 등장을 막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하다보면 이것이 게임의 메인 컨텐츠 중 하나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 토탈 워 시리즈 - 전반적으로 군주 능력치가 영향을 미치기는 하나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특히 시기상 현대에 가까운 배경을 가진 작품일수록 군주보다는 개별 장군들의 영향이 크며 원하지 않는 군주를 갈아치우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영향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꽤 큰 패널티를 가진 왕도 가끔 나온다. 작게는 자신이 관리하는 지역의 수입 및 민심 감소부터, 크게는 모든 영토에 디버프를 걸어버리거나 외교에 페널티를 주는 경우가 있다.


[1]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쇼군이 아니었다. [A] 당연하지만 이런 군주는 어쩔 수가 없다. 장애에 의한 실수 또는 무능을 일방적으로 탓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A] [4]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2. 귀족사회의 전개와 동요 4) 의종대의 정치혼란 [5] 그 예가 김보당의 난. 주도자인 김보당의 경우 평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인 인물이라서 무신정변 당시에는 무사했었던 것이다. [6]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 [7]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 [8]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 [9]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 [10]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11]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4) 갑자사화 [12] 게다가 애초에 성리학 군주 끝판왕인 성종이 엄연히 왕위에 앉아 있는 마당에 후궁 주제에 중전인 윤씨한테 감히 대들었다가는 그 즉시 끔살 당했을 것이다. 당장 후궁은 자신의 친자한테도 무조건 존칭을 써야 했다. [13] 패륜의 대명사인 증조부 세조와 이복형 연산마저도 자신의 친자식들은 끔찍히 아꼈다. 애초에 왕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와 중종 단 둘밖에 없다. 그나마 자식을 굉장히 미워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인조까지 셋이다. 소현세자는 청이 소현과 원손들을 볼모로 인조의 왕권을 위협했고, 사도세자는 아예 정신병자가 되어 도저히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상태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도 인조, 영조의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복성군은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아 죽은 셈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적장자 인종이 18세로 성년이었기에 혈통 면에서 밀리는 복성군을 죽여야만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14] 중종대(中宗代) 속찬증보(續撰增補) 사업과 그 정치적 함의 [15] 임진왜란 이전부터 심질(心疾) 즉 조현병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했고,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 [16] 참고로 선조 대에 그나마 꼽을 수 있는 문화사업인 《 동의보감(東醫寶鑑)》의 편찬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중단되고 대부분이[113] 광해군 초에 허준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 받아서[114][115] 작성되고 완성되어[116] 간행되었기에[117] 일반적으로 허준의 개인저작이거나 광해군의 전후복구 내역 중 하나로 간주된다. [17]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18]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19]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 [18] 사간원에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양전(量田)하는 일이다. 】 (선조 34년 2월 28일) [19] 언급된 정황이 불분명하고 이후[120][121] 십 년 이상[122] 관측되는 세수 증가분이 없기에 결수 증가분에 논란이 있다. [20] 12) 오인택은 임란 직전 결총을 300,000만결로, 癸卯量田(1603)의 결총을 광해군 3년(1611)에 집계된 삼남의 結總數 542,000여결로 파악하였다.(오인택, 1995, 朝鮮後期 癸卯·甲戌量田의 推移와 性格 역사와 세계 19, 345쪽 참조) 이는 광해군대 호조판서 황신이 추계한 결총수로 판단되며 이것이 증보문헌비고에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增補文獻備考 권148, 田賦攷 八) 다만 이 결총수는 삼도가 아닌 8도에 걸친 전결수이다. 또한 황신은 계묘양전 당시 田品이 낮게 책정되어 결수 산정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당대의 전결수를 자신이 직접 산출하였다. 따라서 이 542,000여결을 계묘양전의 결총수로 직결시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황신이 산출한 결총수에 대해서는 아래 각주[123]를 참고하라.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6-7) [21] 평소에 전라도는 44만 결(結)이었는데, 난리 후에는 절반쯤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보고한 바는 6만 결 뿐이니, 나라에서 손실보는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다른 도 역시 이런 식이라면 국용(國用)이 어찌 넉넉하겠습니까....인구수는 평시에 비해 겨우 10분의 1입니다. 그런데 평시에는 사족(士族)만 전장(田庄)을 소유하고 백성들은 모두 없어 다 함께 아울러 갈아 먹었는데, 난리 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경작하기 때문에 개간(開墾)한 것은 평시에 비해 크게 감소되지 않았으나, 전제(田制)가 이와 같으므로 잔약한 백성들만 유독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결(田結)의 숫자는, 전라도가 40여 만 결, 경상도가 30여 만 결, 충청도가 27만 결인데, 근세 이래로 잇따라 하지하(下之下)로 세를 받아들여 비록 평시라 해도 세입이 겨우 20만 석이어서 국초에 비하면 절반이 줄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난후에 팔도의 전결이 겨우 30여 만 결로, 평시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모양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양전(量田)하는 한 가지 일은 반드시 큰 어려움을 물리치고 실행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폐단 또한 많을 것이나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선조 34년 8월 13일) [22] 호조가 아뢰기를, "경상 좌우도의 전결이 임진 왜란 전에는 40여만 결이었는데, 계묘년046)(註 046)(계묘년 : 1603 선조 36년.) 에 양전해 보니 단지 4만 3천 4백 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조에는 평상시의 전적(田籍)을 증빙할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이번에 양전할 때 본도로 하여금 따로 차사원(差使員)을 정하여 평상시 시행한 장부에 ‘어느 지방은 원전(元田) 몇 결에 측량한 결수는 얼마이다.’라는 내용을 명백하게 치계하도록 하여 증빙하고 상고하여 처치하는 자료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1년 8월 4일) [23] 전라 감사가 치계(馳啓)하였다. "영암(靈巖)·강진(康津)·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가 곧장 갈 수 있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많습니다. 특히 을묘 왜변(乙卯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제반 일이 매우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녹설(鹿舌)·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장록(獐鹿)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에 옮겨 정하게 하소서.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는 정공 도감(正供都監)018)[124] 으로 하여금 일이 덜한 내륙 지방으로 옮겨 마련하게 하소서." (선조 4년 9월 12일) [24] 반면에 선조는 때로는 동인을, 때로는 서인을 지지하며 대립을 이용했다. 국왕이 개혁의지가 부족하고 명확한 국정목표나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지 않는 상태에서,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자 할 때, 신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깊어지고 고착화되어갔다. 선조는 성종처럼 교화라는 정치비전을 목표로 내걸고 서로 대립하는 세력을 중재하지 않았다. 또한 조광조 일파의 희생을 바탕으로 훈구세력과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던 중종처럼 어느 한쪽 세력에 힘을 실어주지도 않았다. 만약 그가 동서분당 초기에 명확한 정치비전과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신하들 간의 대립을 조정하였다면, 심의겸과 김효원 사이의 개인적 원한이 당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서분당과 선조의 리더십: 당쟁의 기원에 관한 재해석> [25]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준경(李逡慶) 등이 건의하여 국(局)을 개설하고 상밀하게 의논함으로써 대납(代納)의 간람(奸濫)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청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삼공(三公)이 주관하고 식견 있는 조사(朝士)를 선임하여 낭속(郞屬)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폐단을 없애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치했던 것인데, 상의 뜻이 전례를 따르기에만 힘쓰고 대신들 역시 경장(更張)을 싫어해서 단지 문서로 필삭(筆削)하며 감정(勘定)만 하였으므로,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 (선조수정 3년 11월 1일) [26] 조칙(詔勅)을 맞이하는 습의(習儀)를 1차는 8일에, 2차는 13일에 할 것으로 개정하여 부표(付標)해서 아뢰었다. 상이 우성전(禹性傳)이 아뢴 바에 따라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하였다. (선조 5년 9월 30일) [27] 며칠 전에 수찬 우성전(禹性傳)이 정공 도감(正供都監)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상이 따랐는데, 오늘 대간이 혁파하지 말고 시의(時宜)에 합당한 것을 가려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 5년 10월 6일) [28]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125]는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 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 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126]을 참고하라 [29] 하는 짓은 딱 중종 같은 암군인데 막상 중종보다 제대로 한 것이[127] 많은가 하면 중종이 명군으로 보일 지경이니 그렇지도 않은 것이 문제다. [30] 결국 군량도 뜯고 공물도 또 뜯는 식으로[128]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애초에 군량 자체도 못 모았다.[129] 사기를 치려다 제대로 치지도 못한 셈이다. [31] 실제로 조현병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피해망상이 더욱 심했다. [32] 어차피 즉위할 왕자인데 왜 굳이 견제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으로 신하들이 선조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야 한다는 상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33] 실록에 보면 선조는 류성룡, 신잡, 윤두수 등의 대신과 삼사 대간들에게서 필부[130]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131] [34] 재위 4년까지는 괜찮았다고는 하지만 문제는 광해군의 재위기간이 15년이 되는데 거의 재위기간 약 3분의2, 즉 11년 동안 막장 암군/폭군 짓을 한 것 [35] 선조의 찌질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광해군의 흑화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있다. [36] 다만 경기선혜법(京畿宣惠法) 같은 업적[132]은 이후 백년간 개혁의 효시[133]가 되었다. [37] 광해군 시기는 경기도 외에도 최초로 임시적인 공물작미(貢物作米)들이 광역단위로 시행되기도 했는데 선조 40년 정미년에 이루어진 공물작미(貢物作米)의 근거라고 알려진 기사[134]는 광해 9년 정사년의 오기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광해 9년 정사년에 충청 전라 해읍에서 공물작미(貢物作米)가 실시된 것이다. 이충(李沖)은 선조 대에 호조판서가 아닌 광해 대에 호조판서이고 병진년은 정사년 바로 전해이다. 병진년 이후 납입할 충청 전라 해읍의 공물을 정사년에 작미(作米)해서 납입할 것을 광해군이 결재했다는 기사이다. 광해군 의문의 1승 이충(李沖)이 호조판서로 있을때 실제로 했었던 다음의 발언[135]을 참고하라 [38] 순조대 전반기 정국 변동과 의리론의 추이 참고. [39] 출처 [40] 출처 [41] 정조가 비상한 두뇌를 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똑똑하다고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법이다. [42] Reform and Regicide: The Reign of Peter III of Russia 참고. [43] 아버지가 저지른 추악한 만행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암군이 되었다. [44] 5부에서는 전형적인 악당인 이미지이지만 6부에서 밝혀진 사실은 나름 사정이 있어서 차악을 선택했던 것이다. 해당 문서로. [45] 34화 요술램프 편에서 등장. [46] 예언자의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 광룡 히스마로부터 펠 로스 제국을 넘어 아라드 전체를 구해낸 제국의 두 영웅인 카잔 오즈마 악마화시키고 추방하였고 이에 원한을 품은 오즈마로 인해 사후 위장자들이 판치며 제국 전역이 혼란에 빠지며 100년간 검은 성전이라는 전쟁에 휘말린다. [47] 검은 성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지만 나라는 약해질대로 약해진 뒤였고 이를 어찌저찌 막아보기 위해 검은 성전 때 제국을 도와준 수쥬국을 배신하고 전쟁을 벌였지만 대패하여(이후 수쥬국은 이를 경험삼아 국력과 군사력을 꾸준히 키운다.) 그의 치세 이후 펠 로스 제국은 후속 국가인 데 로스 제국에 의해 붕괴된다. 즉 이쪽은 암군이라기엔 선대 팔메리어가 싸놓은 똥이 너무 거대했다는 불운이 컸다. [48] 딸과 사위, 외손자에게 저지른 악행 때문에 본인은 물론 백성들이 몰살되고 왕국까지 파멸했다. 또한 그동안 인간을 수호하는것을 사명으로 여긴 사위 바란이 이로 인해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제대로 타락하여 마왕군에 들어가게 되어 다른 인간 국가들까지 피해를 입게 된다. [49] 자신의 형인 무파사를 죽인 건 물론 심바에게 가스라이팅을 함으로 인해 그토록 집착하던 프라이드 랜드의 왕위를 찬탈한 건 좋았으나, 문제는 자신을 따라 줬던 하이에나에게 약속도 안 지킨 거, 마지막에는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토사구팽한 점으로 인해 자신을 따라 줬던 부하들이 적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그렇게 원하던 왕위 자리에 올랐음에도 정작 통치는 개판으로 한 건으로 인해, 그토록 지배하고 싶었던 프라이드 랜드가 멸망 태그를 탄 것도 모자라 대책도 전혀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심바를 죽이는 데 성공했어도 앙심을 품거나 복수에 이를 가는 다른 사자들이나 하이에나들의 복수의 칼날들에 직면했을 것이다. 또 꼬라지를 보면 그토록 원하던 나라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는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 없었고, 사실상 이러한 만행이 자신의 명까지 재촉한 셈이니 암군이라고 불려고 할 말이 없다. [50] 단, 암군 짓을 저질렀던 레플리로이드 한정이지만 어느 흑막과는 다르게 인간들에게 한해서는 성군이다. [51] 비록 자신이 원해서 왕이 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연애에 빠져 업무를 지나치게 소홀히 했고, 연인이 죽자 그녀를 부활시키겠다는 그릇된 욕망으로 타락하여 평화롭게 지내던 섬과 자신의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52] 황제국 은행가의 입발림에 넘어가 자국 경제를 황제국에게 의존시키게 되었고 국가의 모든 통상권이나 외교권 제공권 각종 이권을 팔아 사치를 부렸다. 이로인해 왕족 귀족을 제외한 바그다드의 국민들은 굶주리게 되고 더 이상 팔아먹을 국가의 권리가 없어지자 국민을 노예로 수출한다는 미친 짓거리를(한 국가의 수장으로서 미친 짓거리 맞다. 전쟁포로나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민을 노예로 파는것이니)하려다가 친동생 사부마드와 이복동생 알리바바의 혁명으로 폐위된다.(이 둘이 아니었으면 반란으로 피의 축제가 벌어질 뻔했다.) 그후 추방되어 트란 섬에서 트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이놈이 한 짓 중 국민 노예수출이 라는 건 독자들 입장에선 꽤 비판받는 일이라 후일담이라도 존재하길 바랬지만 완결이 날 때까지 후일담은 없었다. 만화 마기가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 [53] 이래저래 평가가 갈리는 편이긴 하나, 결국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를 통치하고 자식들을 사랑하려는 의도, 딱 그것 하나만 진심이었을 뿐, 그 수단은 여러가지로 잘못되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54] 마음이 없는 자로 절대악 그 자체이다. [55] 사람은 좋은데 능력이 부족해 대마왕에게 쩔쩔맨다. [56] 원래부터 막장이던 브륀 왕국을 분열시킨 경이로운 암군이다. 특히 후계자 문제를 아주 막장으로 해두었는데 지딴에는 왕비랑 딸을 지킨답시고(단 브륀 왕국에서는 딸 밖에 못낳는 왕비는 경시되고 왕녀는 계승권이 아예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공주로 태어난 자식을 남장시켰다. 자기 대에서 일어난 내란은 변경귀족의 활약으로 종식되었으나 결국 그 문제로 인해 사후에는 여왕의 정통성 가지고 내란이 일어나게 된다. 사실 냉정히 보면 왕국을 위해서 딸이 찬밥 먹는다 해도 왕비 이외의 측실을 두어서 후계자 문제를 제대로 해두었어야 했는데 딸 핑계를 대면서 넘어가 버렸다. 사후에는 그 딸이 여왕이 되어서 팔롱이 싼 X을 치우는 데 고생하게 된다. 간혹 독자들 중에서는 그 딸 레긴도 암군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레긴은 암군이 아니라 전대 왕 팔롱이 왕국을 막장으로 만들어서 지지하는 세력이 아주 약했다. [57] 왕은 아니지만 왕 다음 권력을 가진 공녀로 일단은 독립되어 자치권을 행사할수 있는 공국의 수장이다. 무력은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 식견이나 외교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0에 가깝다. 참고로 전쟁에서 한번 졌다고 무책임하게 자살해버린다. [58] 팔롱이나 피그넬리아에 비하면 양반이고 자신의 공국의 통치는 그럭저럭 한 공녀이나 최종목표가 지스터스 7국 지배와 같은 음모를 꾸며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린다. 이 때문에 소피야 오베르타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빠지고 만다. [59] 이쪽은 바다의 여신으로, 7개 바다를 통치하는 능력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실책으로 사라의 만행과 루치아를 포함한 머메이드 프린세스들이 가쿠토(해신) 일당에게 공격당하거나 나라를 잃는 상황을 방치했다. [60] 이쪽은 주인공으로 aqua 편 한정이다. 선대 아쿠아 레지나에게 악영향을 물려 받았는지 외동딸 루키아에게 세이라의 문제를 떠넘기고, 루키아 일행이 로란에게 공격당하는 상황을 방치했다. [61] 무한도전 춘향전 특집 때 설정 상 이몽룡 포지션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시한 멤버들에게 문제를 출제하는데, 문제는 시험장에서 과거 응시자들을 앞에 두고 먹방을 찍는다거나, 용안이 뭔지를 몰라서 무식쟁이 인증을 제대로 하는 등, 왕으로서 영 아니올시다스런 모습만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답을 틀린 멤버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대는 심술을 부렸다. 결국 시험의 말미에 전원 정답을 맞춘 멤버들에게 역관광당하여 온 얼굴에 먹으로 낙서칠당하는 보복을 당했다. [62] 원작이 아닌 영화판에서만 등장하는 오리지널 캐릭터다. 묵가 측에서 이끌고 온 구원군이 조나라 군대의 기습에 당해서 총사령관인 혁리( 유덕화 분) 본인만 살아서 양나라 군에 합류하자 멘붕해서 다짜고짜 조나라에 투항할 생각만 하거나, 주전론을 펼치면서 상세한 전략을 짜고있는 왕세자( 최시원 분)와 혁리의 말에 무작정 토만 달면서 훼방을 놓더니, 세자가 조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자 엉뚱하게도 그 휘하의 여장군을 아들을 죽게한 책임을 묻겠다며 거열형에 처하라고 했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게다가 원시적인 열기구를 이용한 항엄중( 안성기 분)의 기습공격에 양나라 수도가 끝내 함락당하자,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인채로 본인만 살려달라고 질질 짜는 등, 그야말로 찌질한 암군으로 묘사된다. 정작 왕세자는 항엄중의 냉혹한 성격을 잘 알아서 백성들을 지키고자 혁리와 함께 필사적으로 항전하며, 전투 때마다 용감하게 앞장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거나, 이러다가 분전 끝에 전사하는 등으로 자격미달인 부왕보다도 오히려 성군으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 [63] 엄밀하게 말하면 왕이 아니라 섭정이지만, 곤도르의 섭정직은 세습직으로 사실상 군주나 마찬가지이므로 여기에 등재했다. 원작에서는 찌질이가 아니었는데, 영화판에서는 실질적으로 국교가 단절되었다고해도 명목상으로는 우방국이었던 로한에게 지원군을 요청하자는 간달프의 간언을 개무시하거나, 모르도르의 대규모 군대가 나즈굴들을 대동한 채로 몰려오는 것에 멘붕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 모두 도망쳐서 목숨을 지켜라!"라는 명령을 내리다가 간달프에게 두들겨맞고 기절해서 군통수권을 빼앗기기도 하고, 전사한 줄 알았던 아들 파라미르가 실제로는 살아있다는 툭 집안 페레그린의 애원도 무시한 채 아들과 함께 분신자살하려다가 본인만 타죽는 등, 완전히 암군 of 암군이 되었다. [64] 이 둘이 내분을 일으키면서 작중 디저트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는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 [65] 백성들이 지제국 버그나라크에게 습격당하고 있는데도 도와주지 못할 망정 자신은 이를 이용해 나머지 4개국인 은코소파, 이샤바나, 곳칸, 토후를 합병할 계획을 하고 있다. 이는 기라가 반역자가 되어 라클레스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기로 한 계기가 된다. [66] 15년 전, 신의 분노 사건 당시, 토후의 모든 식량을 독점하여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진실은... [67] 지략과 정치술, 전투력, 지휘력, 행정력 등의 능력 하나는 세계관에서 손에 꼽는 탑클래스이다. 기술력, 경제력에서 훨씬 떨어지는 켈모리안 연합 하나 제대로 제압 못하는 테란 연합의 무능한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냉혹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적을 너무나 많이 만들었고, 덕분에 폭압적이고 가혹한 정치를 펼치는 것은 기본에, 심지어 황태자(후계자)인 아들마저 정적으로 몰아 죽이려 든 것은 크디큰 패착. 결국, 아들을 포함한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 때문에 자치령은 끊임없는 외부 침공에 시달렸고, 그 중 최악의 적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게다가 최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멩스크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치령과 신민들을 자신을 위한 소모품으로 생각했고, 후계자인 아들까지 죽이려 하는 등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라를 팔아먹었을 위인이었다. [68] 능력도, 무력도 출중하지만 자신이 섬기는 이 탈다림을 장기말로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섬기는 광신도였고, 백성들을 파멸로 이끌려고 했다. 결국 보다못한 알라라크 댈람을 끌어들여 라크쉬르 대결을 벌여 폐위와 동시에 살해당한다. [69] 성격 자체는 상냥하고 선량하며 아직은 13세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소년이지만 1기 19화까지는 뱀파이어 왕으로써의 책무를 버리고 방랑하고, 왕가의 보물인 루비 반지도 멋대로 훔쳐 인간인 가은이에게 선물로 주는 등 완벽한 암군이었다. 거기에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의 왕인데도 흡혈하기 싫다고 왕의 책무를 버린 걸로 추정되어서 뱀파이어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답이 없는 왕이다. 다행히 현재는 정신을 차리고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존을 위해 왕으로써 노력하고 있고 성과도 꽤 거두었지만 6년 뒤인 고스트 시그널에서는 자신을 해치려 하는 카뮬라와 브리지트의 계략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옆에 붙여 놓는 등 다시 암군끼가 도진다. [70] 5기 한정. 자기 나라가 거의 멸망하기 직전인데도 망명지에서 놀고 먹는 중이다. [71] 문마리아 여왕은 혼수상태라서 정황을 파악할수 없었다. [72] 흑화 이후 한정. [73] 애초에 모친이 이원을 앉힌 것이지 이원 본인이 원한 자리는 아니였다. 왕자 시절 세자를 부러워하긴 했지만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함이었지 왕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동정하는 독자들과는 달리 작중의 백관들과 백성들에게는 그저 정사를 돌보지 않고 폭정을 일삼는 암군일 뿐이었다. [74] 이 사람이 황제로서 한 일은 간신인 박중헌에게 놀아나면서 충신이자 명장군이던 김신을 자기보다 인기가 많단 이유로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역자로 몰아 자결하게 하고, 그의 누이이자 자신의 황후였던 김선을 비롯한 김신의 일가친척들을 몰살시킨 후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 밖에 없다. [75] 이 사람은 그야말로 세계관 최악의 암군이다. 무능한 주제에 괜히 툭하면 끼어들기만 해 잘 될일 다 망쳐 동생 기스카르한테 걸림돌만 되었다. 특히 악당 보댕이 이 사람의 멍청함을 이용해 각종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나라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는지 그가 죽은 뒤 나라는 개 막장이 된다. [76] 다만 맨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고 나라를 발전시킨 최고의 명군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혈통이 끊길것이라는 예언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편집증이 생겨 미신을 신봉하고 며느리를 겁탈하는 패륜을 저지르며 이를 만류하는 신하들을 파면하면서 암군이 되었다. [77] 다만 끝에는 후계자 결정을 잘한 편이었다. 특히 장남이 워낙 막장이어서 정식 후계자로 임명하지 않아 그가 병이 들어도 장남이 함부로 권좌를 차지하지 못했고 나중엔 정상인 차남을 후계자로 임명하여 나라를 보존할수 있었다. [78] 나이도 10대 초중반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어리고, 심성도 착하지만 어떤 돼지에 의해 암군이 되어버린다. 다행히 사형을 당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79] 비록 초반에는 승승장구 했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과 패전으로 불의 제국을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아들인 주코가 수습을 잘하여 100년이나 세상을 유린한 전범국가임에도 여전히 불의 제국을 강대국으로써 존중받는 국가로써 유지하였다. 즉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성군인샘. 다만 패전 문제는 본인의 능력부족은 아니다. 무리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그 전쟁은 할아버지 대부터 100년간 이어오고 있었고 선대들 업적도 있지만 본인 대에 이르면 승리를 목전에 둘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코믹스에서는 전후문제로 골치썩이는 아들이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즉 암군은 맞는데 무능한 암군은 아니다. 능력을 나쁜데 써먹어서 문제지... [80] 첫 등장했을 때도 멍청하다는 것은 물론,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최악이라는 게 나왔지만 연재가 진행될수록 군주로서의 자질이 매우 의심되는 행동만 보이는 것은 물론 정당한 후계자인 알폰소에게 열폭하여 견제를 하는 멍청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81] 나라는 그럭저럭 잘 다스렸지만 후계자 문제 때문에 암군으로 평가된다. [82] 타르가르옌 왕조 최악의 암군으로 일컬어진다. [83] 세계정복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선대 왕의 각종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카일론과 빌트레드와 손잡아 이제라 자체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라스의 지휘를 받은 이제라 연합군에 패하여 사로잡힌다. 사로잡힐 때도 이 세계를 가지지 못하니 차라리 망해버리라는 저주를 퍼붓는 등 찌질한 모습을 보인 건 덤. [84] 야망에 눈이 멀어 스트라제스와 손잡고 도움을 주려는 라스를 스트라제스 군단에 팔아넘기는 짓을 저질렀으며, 눈엣가시로 여겼던 아킨은 물론 지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위치헤이븐과 멜즈렉까지 공격했다가 라스를 건드려서 리타니아 전체에 광역 어그로를 끈 탓에 리타니아-시도니아 연합군에게 철저하게 털리는 말로를 맞는다. [85] 세계의 변혁을 위하여 파스투스급의 외우주의 재앙인 디무트를 불러오는 만행을 저질렀다. [86] 창조자의 뜻에 따라 폴리티아의 번영을 위하여 각종 극단적인 짓을 벌였으며, 에피소드 3 본편에서 폴리티아의 빈부격차 및 비관리 지구의 치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에 여러 잡음이 새어나왔고, 두 전쟁광들과 손잡고 깔끔하게 망해버리면서 본인의 잘못을 뒤늦게 인지하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다. 폴리티아의 이익을 우선시했다가 그 과정에서 나온 잡음 때문에 모든 걸 망친 케이스. [87] 마검 스톰브링거의 영향도 있지만 황제로서 한 처신을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암군이다. 이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라까지 말아먹었고 본인도 평생 마검 스톰브링거한테 이용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된다. [88] 라이트 노벨로 나오는 여성 군주중에서 암군 오브 암군으로서 선왕 사후 즉위 때는 오르트메아 제국의 계략으로 게르하르트 공작이 사생아 제 2왕녀를 지지하게되어 내전이 일어났는데 불리한 전세에서 주인공 미코시바가 크게 활약하여 역전시키지만 측근인 미하일이 호승심에 닥돌하다 게르하르트 공작파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내전의 주범인 게르하르트 공작은 미하일을 거래로 2왕녀를 인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루피스는 그 거래를 수락한다. 측근 하나 때문에 내전의 원흉을 제거하지도 못하고 즉위 했는데 내전에서 활약한 미코시바는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약속 지켜서 왕국 밖으로 보내버려 타국에 등용되면 잠재적 위협이 되어버린다는 논리로 내전에서 활약한 영웅에게 남작 작위를 주고 미개발 오지에 보내버린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근데 이건 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그냥 그대로 따라한거다..몰랐다 해도 내전의 원흉에게!) 덤으로 내전에서 삽질해서 근신받던 미하일은 측근이라고 2달만에 복직시켜 버린다. 내전에서 미코시바의 활약으로 끌여들인 중립파는 당연히 이같은 여왕의 행보에 제대로 된 충성을 줄수 없었고 더구나 측근이라는 놈들이 죄다 무인출신이라 명령만 내리고 닥달하는 식이라 내란 이후에도 로제리아 왕국은 피폐해져 버렸다. [89] 사정을 알아보고 배상만 했다면 전쟁을 피할수 있었는데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드워프와의 전쟁을 일으키고 말아 패하며 본인의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엘프 왕국도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이 패배로 인해 엘프가 건설한 식민지들도 모두 상실하여 올드 월드에서 엘프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90] 이쪽은 성품이랑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마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무력이 없어서 도망만치다가 결국 백성의 손을 빌려 (사실상의)자살을 선택했다. [91] 마신임무 2장 3막 이전 한정. 마신 임무 2장 이후로는 군주로서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92] 드럼섬편 한정, 이후에는 완전히 갱생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작중에서 저질렀던 폭정과 별개로 능력은 굉장히 유능했던 왕으로 보인다. [93] 정무에 큰 관심이 없고 유흥에 몰두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암군이 맞다. 하지만 이따금 날카로운 뜻이 담긴 발언을 하는 등, 평면적인 암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2차 창작 등에서는 실제로는 유능하지만 제국의 막장 상황에 회의를 가지고 차라리 멸망하길 원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94] 이쪽은 타국의 백성들이 불쌍하답시고 자국민을 버렸다.... 그 자국민들이 거인의 힘으로 타국의 백성들을 노예로 부려먹고 자기들끼리 내전이나 벌이는 등, 쌓은 업보가 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세대까지 저지른 죄악을 묻어 버리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후손들이 외부에서 보낸 무지성 거인들에게 죽어 나가고, 부전의 맹세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식으로 후계자들을 세뇌하면서 시조의 거인의 힘을 못쓰게 해 타국의 보복을 막을 정도의 정당방위도 못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타국의 백성들을 위한 행동들이 결국은 타국의 백성들과 세상의 파멸을 불러왔고 동시에 계속되는 혼란만을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만들고야 말았다. [95] 그냥 꼭두각시. 셰필드가 없을때 트리스테인 게르마니아 연합에 겁을 먹었다. [118] 앙리에타의 할아버지. 전쟁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지만 내정은 엉망이었다. 때문에 본편 시점에서 트리스테인은 패권 국가에서 지역 강국으로 위상이 하락했다. 마자리니가 없었으면 아예 약소국까지 추락했을 것이다. [97] 허무의 마법사라서 왕태자 시절때는 4대계통 마법을 못썼고 이를 모르는 주변은 마력이 없다고 평가해 모친마저 없는 자식 취급하였다. 훗날 비교하던 동생을 암살하게 되고 그 허무함에 무기력하게 지내다가 사망한다. 능력적으로는 암군이 아닌데 결과는 자신의 왕국 갈리아의 초토화 [98] 교황인데 재앙(대륙이 하늘로 떠버리는 현상)을 막겠답시고 세계 이주라고 하여 태평하게 살고있는 주인공측 세계(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다! 공중전 최강이라는 알비온 용부대가 고작 구식유물에 가까웠던 제로센 1기에게 털리고 수많은 군대조차 어쩌지 못하는 요르문간트를 티거 하나로 상대가 되는 수준으로 말이다! 앙리에타가 지구세계와 대화를 할 생각 없냐고 물었을때는 대화로는 평화를 이룩할수 없고 기습공격 운운했다. 앞에 있는 죠세프는 최소 자국 하나만 망쳤는데 이놈은 최소 다섯 국가를 지옥으로 만들 뻔했다. 지구 침공을 제외해도 왕인 타바사를 납치하는 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였다. [99] 사실 아버지 모젤 폴루스 공왕처럼 유능했으나, 게이시르 제국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왕권 강화 및 팽창 정책에, 결정적으로 체사레 보르자가 보낸 첩자 죠세핀에게 홀리면서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비프로스트 공국의 멸망을 부추기고 만다. [100] 이 인물의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아들은 악당의 숙주가 되고, 딸은 사망, 손자는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여러 문제들을 혼자 떠맡는 등 동화나라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 [101] 인품은 선하지만 왕으로써 제대로 한 일들은 별로 없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실종, 고모의 사망 등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앉아 홀로 여러 문제들을 떠맡은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며 그나마 왕으로써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102] 인품은 훌륭하나, 왕도 인섬니아의 시민들과 킹스글레이브 단원들 입장에서는 암군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다. 자신이 어리석은 왕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본인도 인정한 부분. [103] 작중에서는 끊임없이 성군으로 미화되지만 실상은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비는커녕, 후궁도 될 수 없는 미천한 신분의 여자를 정비로 삼아 나라 전체를 내전으로 몰아넣은 명백한 암군이다. [104] 드라마상에서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북벌만 추구하는 암군의 모습이 추가되었다. 현실의 궁예도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드라마상의 모습은 작가의 창작이 꽤 들어갔다. [105] 비록 왕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인 위치에서 블루의 작중 무능함과 뻔뻔해 보일 태도 덕분에 러블리를 포함한 프리큐어들이 아니였다면 자신이 연관된 왕국과 지구는 끝장 났었을 수준이었다. [106] 전작의 블루와 마찬가지로 무책임한 우주 여신들이다. 이매지네이션의 부작용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우주에 뿌렸고, 행성들 일부가 멸망당하거나 무언가를 의존하는 상황을 방치했다. [107] 성국의 성황으로(성국은 투표로 뽑는다.) 성품은 좋은 편이나 타인을 의심할줄 몰라서 개혁으로 나라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상소에 곧이대로 믿어 성국을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신하들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하던 중 현자의 충고에 성국의 상황을 아주 뒤늦게 알게 되고 자진 퇴위하여 투표를 통해 다음 성황은 제대로 된 성황을 뽑을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무산되고 만다. 변호하자면 성국의 부패가 쌓이고 쌓인게 너무 커서 뭉클리아는 커녕 평타치는 군주라고 해도 커버가 불가능했던 상황. [108] 성국의 뭉클리아 다음의 성황이자(허수아비인 제로경은 퇴위되었다.) 최강의 검 성국의 초대 성왕이다. 출신은 상급기사 출신으로 이름 그대로 금수저다. 히어로 메이커 세계관의 이어 후술할 베르미누 3세와 맞먹는 암군이며 결과로 따지면 성국을 아예 아작내 버리고 신이 인류에게서 성법을 거두는 설령 성국이 막장이 아니어도 커버가 불가능한 암군이다. [109] 제국의 황제로 골드수저와 다르게 멀쩡하게 돌아가는 제국을 즉위 2년만에 내란 상태로 만들었던걸 보면 질이 더 나쁘다. 즉위 초기 공물 안바친다고 세날에 쳐들어갔는데 세날은 이길수 없다는 군경험자인 힐리스의 직언에도 쳐들어갔다가 대패해 겨우 살아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폐륜왕의 이간질에 넘어가 자신을 지키는 힐리스를 죽이려고 했다!(힐리스는 원정으로 대패한 베르미누를 지키다가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힐리스 휘하의 기사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들을 학살하였고 지왕의 혼을 풀려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결국 이번에는 제대로 빡친 힐리스가 근위대 100명을 1초컷으로 날려버리고 베르미누에게 마지막 직언을 올린 뒤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봉인된 지왕의 혼을 홀로 지킨다. 이후 힐리스와 인연이 깊었던 이복형제 후안이 제국의 충신 힐리스를 죽였다며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힐리스가 없어 후안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후 외척인 숙부 머튼경에게 의지하다 장식뿐인 자리에 올라 명분으로만 이용당하면서 약을 먹고 폐인이 된다. 덧붙여 베르미누 전대 황제는 평민인 힐리스를 제대로 기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사후 베르미누 3세가 아닌 제국의 미친 황제로 불린다. [110] 약소국인 자국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상 패권을 추구하다가 천랑국을 자극해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패전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포로가 되어 참수된다. [111] 간음이 일상인데다 매우 잔혹하여 점령지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포로를 팽살하는 것을 즐긴다. 본작의 최종 보스이다. [112] 1886년에 바다 하나 건너려고 자원 얻겠답시고 이웃국가인 코르부스 연합을 필요하지도 않은 문명화를 내세워 쳐들어가 남부 지역을 강탈했다. 이는 1908년에 코르부스 연합에게 침공받고 결국 1912년에 코르부스 연합이 끌어들인 안타레스 제국에게 자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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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 되었는데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새 왕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경술년(1610년, 광해군 2)에 비로소 이 사업이 끝나서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의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고 지었으며 모두 25권으로 되어 있다. (『월사선생집』권39, 서, 동의보감서) [114] 죄인 허준(許浚)의 죄악은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라 다시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배된 후에도 기탄없이 방자하여 태연스럽게 출입하기를 평인과 다름없이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잠상인(潛商人)들과 내통하며 꺼리는 일이 없습니다. 본래 흉악 패려한 사람으로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뜻밖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위리 안치를 명하여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허준에 대해서는 그가 어찌 방자하게 원망을 품는 일이 있겠는가.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광해 1년 4월 21일) [115] 전교하였다. "허준(許浚)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일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한 지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광해 1년 11월 22일) [116]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하였다. 【책 이름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인데, 대개 중조(中朝)의 고금 방서를 널리 모아서 한 권에 모은 다음 분류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광해 2년 8월 6일) [117] 내의원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하삼도(下三道)에 나누어 보내서 간행하게 할 일을 앞서 이미 계하하여 각도에 공문을 발송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책 수가 매우 많고 공사가 적지 않기 때문에 각처에서 탈보(頉報) 및 장계가 올라온 것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지만, 각도에 재료를 준비해서 해가 바뀌면 즉시 나누어 간행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이 책은 다른 책과 달라서 두 줄로 소주(小註)를 써놓아서 글자가 작아 새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약명(藥名)과 처방은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사람의 목숨에 관계가 되는데 애초에 본책(本冊)이 없어서 필사본으로 한 부를 간행했을 뿐이므로 다시 의거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외방(外方)에 맡겨 두면 시일이 지연되어 일을 마칠 기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착오와 오류가 생겨서 결국 쓸모없는 책이 되어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이 이것을 염려하여 다시 생각해 보니, 본원에 별도로 국(局)을 설치하여 활자로 인쇄하여 과거에 의서(醫書)를 인쇄해 낼 때처럼 의관(醫官)이 감수(監修)하고 교열(校閱)한다면 반드시 일의 성취가 빠르고 착오가 생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해사(該司)의 물력(物力)이 곤란하기는 하나, 한 달에 들어가는 요미(料米)와 가포(價布)를 계산해 보면 미(米)·태(太)가 아울러 18석이고 무명이 20여 필인데 그 공정이 1년의 공사에 불과하므로 통계가 크게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사로 하여금 혼자 마련하게 한다면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삼도가 앞서 재료를 마련해 놓았으니, 들어갈 무명을 헤아려서 각각 수송하여 경국(京局)을 돕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하고 이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이 계획이 제일 낫습니다. 감히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3년 11월 21일) [118]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 [119]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120] 국가의 경비는 오로지 세입(稅入)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국가로서는 이보다 더한 급무(急務)가 없는 것입니다. 근년에는 1년의 세입이 겨우 4만여석에 이르고 있는데 1년의 경비는 7만여석을 믿돌지 않아 부족한 숫자가 거의 반이나 됩니다. (선조 39년 6월 25일) [121] 신들이 삼가 듣건대, 삼 년 동안 농사지어서 일 년 먹을 저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나라꼴을 갖추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국가의 경비는 7만여 석인데 세입은 4만여 석에 불과합니다. (광해 1년 5월 29일) [122] 근래에 조세가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은데 경비는 날로 넓어져서, 1년 동안 들어오는 쌀로 반 년의 비용도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응당 서울로 바치는 수는 겨우 5만여 섬뿐인데 1년에 필요한 쌀은 10만여 섬이며, 불시에 필요한 수는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 [123] 13) 黃愼, 秋浦集권2, 地部獻言啓 六條別單 “且我國六等之分 各以其道有禹貢上下之分 各以其州 是以京畿黃海江原兩界 則五六等多而二三等少 下三道 則一二等多而五六等少 此祖宗朝已定之舊規也 癸卯量田則不然 下三道五六等之多與上五道無異 田結之減縮 專由於此也 至於各道各邑流寓人所耕之地 則量田時雖以時起懸錄 旋卽移徙抛荒者 亦多有之 而收稅差役 每責於本土之人 偏受其弊此亦不可不 亟爲之變通者也 臣試以平時各道田結之數 較之於今日見在田結...(표 참고)八道見在田結 僅過平時全羅道田結之數而已....”(*밑줄은 필자) 황신이 추산한 임란 전과 광해군대 전결규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36] 한편 유형원은 임란 전 8도의 토지규모를 1,515,591결로 산출하였다.(磻溪隨錄 卷6, 田制攷設 下) [124] (註 018) 정공 도감(正供都監) : 각 고을의 공물을 균등하게 징수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직.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선조(宣祖) 3년 11월 조(條)에 "정공 도감을 두었는데 이는 이준경(李浚慶) 등이 민폐를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감을 두어 삼공이 이를 관장하고 조정 선비로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낭관에 충차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 한 것이다." 하였다. [125]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 [126]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 [127] 성종 본받겠답시고 《 동문선(東文選)》,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 대전속록(大典續錄)》 이것들을 각각각 《 속동문선(續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이것들로 이른바 속찬증보(續撰增補)[137] 한 것 정도의 업적은 남겼다. [128] 비변사가 아뢰기를, "해주(海州) 16사(司)에서 납입할 공물을 이미 반감하였는데, 이제 만일 전수를 감해 준다면 경중(京中)에서 쓸 것도 부족할 것이 염려됩니다. 요역마저 감한다면 중국군의 지대(支待) 등에 관한 물자가 다른 데서는 나올 데가 없으니, 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전(內殿)의 공상(供上)까지도 이미 인근의 관아에 나누어 보냈으니, 본주의 공물은 비록 반수만 감한다 하더라도 은휼(恩恤)을 입는 것이 많을 듯합니다." 하니, (선조 27년 11월 16일) [129] 그러나 이 대공수미법은 시행된 지 1년도 못되어 폐지되고 말았다. 징수한 쌀의 수량이 예정과는 달리 매우 적어서 군량 조달에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정부의 소요 물품을 구입하는 일도 여의치 못하여 수시로 원래의 현물로 징수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1. 대동법의 시행 > 1) 공납제의 변통과 대동법의 실시) [130] 신하가 왕에게 필부라 함은 유배나 참형을 면치 못할 발언이고 실제 선조를 제외한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필부라는 소리를 들은 왕은 없다. 근데 그런 발언을 그것도 자주 들었다는것은 임란때 선조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그리고 왕권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31] 무엇보다도 임란이 터지자 바로 파천을 궁리했던 점도 크게 까이는 부분이다. 항전 한번 시도해보려 하지도 않고 일단 도망가려는 자세는 군주로 실격이며, 무엇보다 언제고 요동으로 어가를 옮겨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입조하려 했던 점은 도저히 커버칠 수 없는 부분이다. [132] 당해 5월에 설치된 선혜청은 광해군의 이 비망기로부터 직접적인 설립 배경을 찾을 수 있다....기사의 밑줄 친 부분에서처럼 각 읍의 해묵은 포흠과 긴급하지 않은 공물 등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서 ‘하나의 국’을 별도로 설치하는 방안은 이원익의 차자에서 나온 것이나, 그 논의의 발단이 된 것은 광해군의 비망기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8-9) [133] 선혜청은 공물을 ‘作米’하던 관행을 공식화하여 운영함으로써 외방에서 그때그때 차출해 쓰던 현물과 노동력이 서서히 대동세 안에 수렴되기 시작하였다....이처럼 경기선혜법은 17세기 전반 당면한 재정현안을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으며, 경기선혜법을 시행을 통해 정해진 원칙, 즉 공물을 일관된 기준의 대동세로 거두고, 민역 동원을 給價체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이후 중앙의 재정구조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광해군대 京畿宣惠法의 시행과 선혜청의 운영>, 29) [134] 지난 정미년058)(註 058)(정미년 : 1607 선조 40년.) 에 이충(李沖)이 본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전라도와 공홍도 등의 바닷가 고을의 공물을 병진년059)(註 059)(병진년 : 1616 광해군 8년.) 이후의 것에 대해서 제사에 필요한 공상(供上)을 제외하고는 모두 작미(作米)하도록 하여 경비에 보태자는 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광해 12년 6월 15일) [135]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번에 본 호조에서 각사를 취사 선택해서 작미하거나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체 전의 규정에 의거해서 하였으며, 제향(祭享)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것은, 성상의 분부에 따라서 작미하는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광해 9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