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7:48:37

혁거세 거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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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초대 국왕
혁거세 거서간 | 赫居世 居西干
파일:attachment/혁거세거서간/e0.jpg
국학원 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는 박혁거세상[1]
출생
(음력)
기원전 69년 3월 1일[2]
진한 사로국 서라벌 나정
(現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00-1)
즉위
(음력)
기원전 57년 4월 28일[3]
진한 사로국 서라벌
(現 경상북도 경주시)
사망
(음력)
4년 3월 (향년 73세)
사로국 서라벌
(現 경상북도 경주시)
능묘 사릉(蛇陵)
재위 기간
(음력)
신라 초대 국왕
기원전 57년 4월 28일[4][5] ~ 4년 3월
(60년 1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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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반남박 씨]사실 밀양 박씨뿐만 아니라 모든 박씨의 시조이다.]
혁거세(赫居世) / 불구내(弗矩內)[6] / 알지(閼智)(?)
부모 모후 선도성모
왕후 알영부인
자녀 태자[7] 박남해
왕녀 박아로[8]
존호 시조(始祖)[9]
왕호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별호 알지 거서간(閼智 居西干)
불구내왕(弗矩內王)
거슬한(居瑟邯)
호칭 이성(二聖)[10] }}}}}}}}}
다른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은, 인(仁)이 아니로다.
幸人之災, 不仁也.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39년조 #

1. 개요2. 상세3. 호칭4. 건국 신화5. 치세6. 사망7. 기타8. 대중매체에서9. 《 삼국사기》 기록10. 관련 문서11. 관련 서적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11]의 초대 국왕이자 시조.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이었다. 한국이나 기타 재외동포를 포함한 모든 박씨[12]들의 시조 즉 박씨들의 공통조상이다.[13]

2. 상세

신라의 왕위는 훗날 김씨, 석씨 등 다른 성씨에게 전해지기도 하였으나, 혁거세는 단순히 부계 혈연 개념에 입각한 조상이 아니라 건국자로서 성씨에 관계없이 공통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신라에서 전왕이 승하하면 후임자가 일단 왕위를 물려받은 뒤, 즉위 다음해 1~2월에 신라 고유 제사 시설인 시조묘(이후 신궁)에서 제사를 거의 반드시 직접 지냈다. 이는 신라의 일종의 관례적인 즉위식 개념이었다.[14]

현재 통용되는 박혁거세라는 이름은 朴赫居世라는 한자 표기를 현대 한국 한자음으로 음만 따서 읽은 것이나, 신라에서는 한자를 읽고 쓸 때 일본어와 같이 음독과 훈독을 섞어 썼다.[15] 赫居世(혁거세)에서 (붉을 혁)과 (누리 세)는 본래 뜻으로 읽었기 때문에 赫居世의 실제 발음은 '불거누리'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정확히 어떻게 불렀는지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아무도 모른다.

실제로 《 삼국사기》에 "이명으로 弗矩內(불구내)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순우리말 '붉은 누리'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赫居世와 弗矩內는 같은 단어를 한자 표기만 다르게 쓴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혁거세의 성인 박(朴) 역시 원래는 성이 아니라 赫의 발음을 강조하기 위해 앞에 붙인 표기라는 분석도 존재한다.[16] 한편 이름의 뜻이 '누리의 붉은 햇님'인 이진아시와의 연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기이〉에 의하면 스스로를 '알지 거서간'(閼智居西干)[17]이라 일컬었다. 후대의 김알지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부여 고구려의 시조 신화에서 해모수 동명왕이라는 이름이 공통으로 등장하듯이 고대의 시조 신화에서 이런 식의 어휘 공유는 놀랄 일은 아니다. 훗날 신라에서 '태조'로 불린 인물이 김알지의 아들 김성한으로 유력시되는데 이와 연관지어 '알지'가 임금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 중 하나였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의 〈선도성모수희불사〉에 의하면 알영부인과는 남매 관계로 묘사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경우, 일연 중국에서 듣고 기이한 이야기라고 부정한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전설로 적은 것이라 《삼국사기》에 부인으로 나오는 게 더 유력시된다. 이 역시도 신화에서 남매가 부부를 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특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위의 '알지'라는 이름과 연결시킨다면 알영부인과의 연관성이 더욱 강화된다.

3. 호칭

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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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임금 |
고조선 진국 · 삼한 백제 고구려· 신라
단군 한왕, 신지, 읍차 태왕
신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신라· 가야 탐라 발해 고려
간지, 한기 성주, 왕자 가독부 대왕, 황제
조선 대한제국
, 대군주 황제, 대황제 }}}}}}}}}

居西干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

고유어를 음차한 것으로, '거슬한'(居瑟邯)이라고도 한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니...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 거서간 전용으로 쓰이며, 《삼국유사》에서는 박혁거세뿐만 아니라 제2대 남해 차차웅 남해 거서간이라고 했다. 초기에 잠깐 쓰였고 이후 중국의 영향을 받아 (王) 칭호를 쓰기 전까지 이사금, 마립간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게 된다.

의미는 진한 말로 ' 임금', 혹은 '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간'(干) 자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호칭 ' 가한'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 1대 혁거세 거서간
  • 2대 남해 거서간 - 《삼국유사》 한정.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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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건국 신화

처럼 생긴 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을 박씨로 정한 것도 그 이유다.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다.[18]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19]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20]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삼국사기
전한 지절(地節) 원년 임자(壬子)(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자줏빛) 알 한 개[21]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22]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23]이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24]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군(女君)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 세계적으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일반 인간과 다른 특별한 탄생이라는 장치로 신비감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드물게 양막이 터지지 않은 채 태어나는 아기가 존재하며, 삼국유사에서 자줏빛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를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묘사한 것이라면 완전한 허구는 아닐 가능성도 있다. #

《삼국사기》뿐 아니라 《삼국유사》에서도 나정 옆에 흰 말(백마)가 꿇어앉아 울고 있었고, 그곳에 가보니 알이 있어 깨뜨리자 그 안에서 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서술하고 있다.《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6부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한편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은 공통된 기술이다.

《삼국사기》에 쓰인 위의 설화에 의하면 성씨의 '박'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의 문헌 기록인 《삼국사기》뿐 아니라 법흥왕(제23대) 때의 당대 기록인 울주 천전리 각석에도 가운데에서 약간 오른쪽에 혁거세 난생 설화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에는 '박'이라는 성씨에 관한 정보가 등장하지 않기에 혁거세가 당시에 '박'이라는 성씨를 가지지 않았고, 후손들이 소급해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계에서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는 않다.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경주의 나정은 이후 신라 왕실의 성지가 되었고, 그 자리에 신궁 등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기록으로 선도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 혁거세와 알영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 서남쪽 훗날의 창림사[25] 자리에 궁실을 짓고 길렀다고 하는데 현재 나정과 직선 거리로 1㎞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위치다. 그러다 기원전 57년 경주 일대의 6촌 촌장[26]들의 추대로 13세에 왕으로 즉위해 재위 5년에는 비슷하게 설화적인 탄생으로 태어나 2명의 성인(二聖)으로 꼽히던 알영부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알영 탄생 설화에 대해서는 알영부인 문서 참조.

단군신화도 그렇듯 설화를 현실적인 역사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해석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혁거세로 대표되는 북방 기마 세력[27]이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 있던 경주 분지로 들어와, 기마술 철기[28]를 바탕으로 토착 6부족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세웠다.
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화 해석이 있는데 혁거세는 하늘에서 왔고, 알영은 땅( 우물 알영정)에서 나왔으니 혁거세는 외부 출신이고, 알영은 좀 더 먼저 경주에 정착해 있던 집단 출신이라거나,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알영부인 신화에서도 나오는 점을 보아 알영이 이후 박씨와 혼맥으로 맺어질 김씨 집단[29]의 상징 여성일 거라는 추정도 있다.

그리고 건국 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라도, 그 이야기의 뼈대는 늦어도 이사금 시대에는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성 집단 대표자들의 회의와 합의로 왕이 추대된다'는 건국 신화의 기본 구조를 보면 김씨 왕계가 확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마립간기보다는 이사금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

5. 치세

기원전 69년 출생, 기원전 57년 즉위라는 건국 연도 기년은 여러 모로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사로국 문서 참조.

혁거세 시대의 사로국은 한반도에서는 살만한 동네였던 모양으로 당시 한반도 남서부를 지배하던 마한이나 낙랑군 등이 공격했지만 방어했다. 바다 건너 에서 왔다는 사람도 있다. 왜국에서 온 대표적인 사람이 호공.

기원전 50년(즉위 8년), 왜구들이 쳐들어온다. 그러나 혁거세의 인덕을 듣고서 싸우지 않고 되돌아갔다고 되어있다. 시조인 만큼 설화적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보인다.

기원전 41년(즉위 17년), 초기 왕답게 전국 6부를 돌며 민정을 살폈고 농업 누에치기를 장려한다. 그런데 당시는 전국이라고 해도 작아서 신라 영토는 경주 지역 정도였다. 한국 고대사에는 우산국처럼 4세기~ 5세기까지도 일개 도시가 나라를 칭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9년(즉위 1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변한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는데 백제 온조왕 마한을 흡수했다는 기록과 더불어 믿기 힘든 초기 기록으로 꼽히고 있다. 변한은 이후 가야로 변화하는데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것은 수백년이나 뒤인 6세기다. 대체로 삼한이 이런저런 소국들을 정리하고 완전히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삼국으로 대체된 것은 뒤의 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변한은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거의 다 걸쳐져 있었다. 이런 큰 세력이 조그만 국가에 스스로 항복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설령 항복을 했더라도 그 자리에 멀쩡히 가야가 들어선 것 자체가 이상하다. 하지만 가야도 수많은 국가를 통칭해 가리키는 것이고 이후 포상팔국의 난 같은 예를 보면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이 당시 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에서는 도시국가 규모의 수많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싸잡아서 삼한이라고 불렀고, 그 소국들은 마한 54개, 진한 12개, 변한 12개라고 나와있으며, 건마국 목지국이 한반도 남반부 전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는 하지만, 실상 종주국도 주나라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일부지역만 직할통치하는데 그쳤고, 나머지는 수많은 소국들이 자체적인 통치력을 행사하는 구조였던것이었다. 동예와 옥저도 수십여개 소국들이 위치한 지역을 싸잡아 부른 명칭이었다. 워낙 소국들이 많고 여기저기 뒤섞여 있는 게 한사군 동남부 한반도의 당대 현실이었고, 여기서 변한이라고 한 건 사로국 주변에 위치한 변한쪽 군소 세력을 병합한 것으로 해석하면 맞아 떨어진다.

기원전 37년(즉위 21년), 수도 금성 도성을 지었으며, 기원전 32년에 금성에 왕궁 건물을 지었다.

기원전 28년(즉위 30년), 낙랑이 쳐들어왔지만 성 밖에 쌓여있는 노적가리[30]를 보고 '이곳 사람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가히 도의가 있는 나라'라는 평을 내리고 스스로 물러갔다는 기록이 있다. 앞서 왜인들이 변경에 쳐들어왔다가 혁거세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가 버렸다는 기록과 비슷한 일화인데 일단 낙랑은 계림에서 매우 먼 곳이니 아는 것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기껏 굽이굽이 백두대간을 넘어 왔는데 성이 버티고 있으며 쌓인 노적가리를 보니 식량도 제법 축적되어 있다는 결론을 냈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내부 단속도 잘되는 것 같으니 패배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공격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공성전에 들일 비용을 생각하면 이겨도 남는 장사라는 보장이 없고 못 이기면 돌아갈 길이 또 막막하니까 말이다.

기원전 26년(즉위 32년), 마한 왕과 신라 호공의 말다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러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마한왕: 신라는 마한에 조공을 보내오던 국가인데 근년은 공물을 보내지 아니하니 이게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인가?

호공: 우리나라는 두 성인( 박혁거세· 알영부인)이 나라를 세운 후, 인재가 넘치고 천시가 고르며, 창고가 가득 찼고, 백성이 어지니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들까지 우리를 두려워하는데 우리 임금은 겸손하여 신하를 보내 이렇게 인사를 하니 이는 예에 지나친다고 할 수 없거늘, 도리어 대왕이 협박하시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에 마한 왕이 참하려 하자, 곁에 있던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은 살아서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새로이 부상함과 더불어 삼한 전체의 수장 노릇을 하던 마한도 더 이상 신라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기원전 19년(즉위 39년), 마한 왕이 죽었다. 신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혁거세에게 마한 왕이 지난번에 우리 사신을 욕보였으니 지금 마한을 치자고 했지만 혁거세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까지 했다고 한다.

기원전 5년(즉위 53년), 동옥저에서 남쪽에서 성인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20필을 선물로 바쳤다고 한다.

6. 사망

이렇듯 60년 넘게 신라를 통치하다가 기원후 4년 73세로 승하했다고 한다. 1년 전이었던 기원후 3년 경주에 2마리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죽을 때도 기이한 이야기가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8일 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 지내려 했으나, 큰 이 나타나 방해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혹은 뱀이 무덤을 지키기에 사릉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셨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냈는데,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토막난 데다 그걸 수습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고 하니, 위의 설화를 유추해 관련 학계에서 무수히 현실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너무 기이한 기록이라 정설은 없으며 반란군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요소들이 몇 개 있는데 자세한 것은 남해 차차웅 문서 참고.

한편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박혁거세의 농경 신화를 뜻한다고 한다. 건국의 신화적 인물은 승천하거나 신으로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이 이를 막고, 시체가 5조각이 나서 땅에 묻힌다. 신화적으로 시체가 묻히는 것, 무언가를 조각내는 것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며 뱀은 신화적으로 남근을 상징해 다산과 생산 등을 상징한다. 시체가 다섯 토막인 것은 어머니가 얻은 오곡과 연관되는데 죽은 뒤에는 농경신으로 모셔졌지만 차마 건국 신화에 곡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넣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바로 다음 < 남해 차차웅 본기> 처음에서는 혁거세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또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고 하는데 혁거세의 승하 기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박혁거세와 얽힌 전설로 금척 이야기가 있다.

여담으로,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사람이 하늘로 끌려올라갔다가 토막나서 땅에 떨어졌다는 공포 영화 클리셰의 기원이나 마찬가지이다. 2022년 영화 치악산도 바로 이 클리셰를 그대로 갖다 쓴 경우.

7. 기타

  • 초기의 신라 땅은 기록상 자연재해가 꽤 많은 편인데 이 시기에는 기록상 자연재해도 딱히 없다. 바로 다음 대인 남해 차차웅 때만 해도 자연재해 기록이 제법 많다. 사로국이 위치한 경주 평야는 현재도 영남 지방의 전체 생산량 중 7%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넓고 비옥한 곳이며 영남권에서 경주 평야보다 더 넓고 비옥하다 볼 수 있는 김해시, 부산 강서구, 밀양시 하남읍, 창원시 대산면, 울산광역시 등은 아직 바다였기 때문에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독보적으로 풍부한 물산은 사로국이 패권을 쥐는 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 박특(朴忒)은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인데,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신라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고 되어 있다. 박혁거세의 둘째 아들 박특이 정말로 공이 있어서 공신에 책봉되었다면, 삼국사기 기년상으론 개국 시점에 최소 10대 초반에서 20대는 되어 있어야 하지만 삼국사기상 신라의 초기 기년은 믿을 수 없음이 현재 정설이므로, 그 기년에 따른 이런저런 꿰어맞추기는 자체로 의미는 없다. 족보를 신뢰한다면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그냥 믿으면 되겠다.
  • 박혁거세가 세운 사로국과 서열 정리를 다시 확실히 하려 했던 마한왕은, 삼국사기 기년을 그대로 믿는다면 기원전 1세기경 마한의 수장국인 건마국의 우두머리가 되겠으나 상술했듯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 당시 사로국은 지금의 경주시 내에서도 고만고만한 조선계 집단끼리에서조차 통합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삼국사기상 일화에서처럼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원후 2세기 중반에 경주에 등장한 낙랑인 집단이 경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여러 조선계 집단을 아울러 진한 내에서는 가장 앞서가는 강력한 국읍을 이룬 기원후 2세기 후반 정도면 이 일화와 아귀가 맞다. 우연찮게도 지금까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고구려에서 남하해온 집단이 경기도 일대 임진강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시점 또한 2세기 후반이니, 온조왕의 정착을 처음으로 허락해준 마한왕과, 박혁거세와 갈등을 빚은 마한왕이 서로 존재 시기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추론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마한왕은 목지국의 거수였을 개연성이 높다.
  • 자녀로는 장남 남해 차차웅, 신라 시조 묘의 제사를 총괄한 신라의 첫 여성 제사장인 대신녀 아로공주 등 1남 1녀가 있다.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역사왜곡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어 교과서인 《국어독본》에는 박혁거세의 알을 내지의 어느 족장의 아내가 낳았는데, 불길하다 해서 상자에 담아 바다로 띄웠고, 그것이 경주 바다에 닿았다고 썼다. 하지만 《 삼국사기》, 《 삼국유사》를 비롯해 어느 역사서에도 박혁거세의 알이 바다 건너 외국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으므로 대놓고 날조를 한 셈이다.[31]

8. 대중매체에서

  • 2003년 개봉한 영화 < 천년호>에서 배우 장효선이 연기한 박혁거세로 등장했다.

9.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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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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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본기〉
一年夏四月十五日 혁거세가 거서간에 오르다
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알영이 왕비가 되다
八年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가다
九年春三月 살별이 왕량에 나타나다
十四年夏四月 살별이 삼에 나타나다[32]
十七年 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농사를 권하다
十九年春一月 변한이 항복하다
二十一年 금성을 쌓다
二十四年夏六月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六年春一月 궁실을 조성하다
三十年夏四月三十日 낙랑 사람들이 침입했다가 돌아가다
三十二年秋八月 일식이 일어나다
三十八年春二月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三十九年 왕이 마한 왕의 죽음에 조문하다
四十年 백제의 온조가 즉위하다
四十三年春二月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三年 동옥저가 말을 바치다
五十四年春二月 살별이 견우성에 나타나다
五十六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十九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年秋九月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나다
六十一年春三月 거서간이 세상을 떠나다

10. 관련 문서

11. 관련 서적

  • 삼국사기》 〈신라본기〉 1권 혁거세 거서간 ~ 일성 이사금
  • 삼국유사》 제1권 〈왕력〉(王曆) 제1(신라·고구려·백제·가락 및 후삼국의 연대표)
  • 정사 삼국지
  • 후한서》 〈동이열전〉
  • 《계림잡전》 〈한조〉
  • 《한산기》
  • 《고승전》
  • 《약본》
  • 화랑세기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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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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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나정 · 오릉
관련 문서 금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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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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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혁거세 거서간의 이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혁거세 거서간의 영정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 [2]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이 날 6부의 조상들이 자제들과 함께 모여 회의를 하던 중 나정 근처에 있는 백마를 보고 알을 발견하였고 그 알을 깨뜨리자 아이가 나왔다고 한다. [3] 삼국사기》 기록. 이기문(李基文)에 따르면 일설에 즉위시점이 "정월 15일"이라 전해진다고 한다. [4] 《삼국사기》의 기록. 이기문(李基文)에 따르면 일설에 즉위시점이 "정월 15일"이라 전해진다고 한다. [5] 삼국 중 가장 발전이 느렸던 신라가 기록상 건국 연도는 가장 빠르고, 즉위한 기원전 57년은 고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 건국 이전의 갑자년이라 신라의 건국을 고구려, 백제보다 빠른 갑자년으로 조작했다는 설이 현재로선 유력하다. 삼국사기 기년이 백제와 신라의 경우 워낙에 엉망진창이라 중국측 기록과는 물론이고 고고학과도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조선 멸망 이후 유입된 고조선 유민이 건국의 기반 집단인 6촌이라는 게 기록에서 명시된 사항이며 이는 고고학적 사실과도 부합하지만, 이 집단은 각기 남하 시점이 기원전 4~3세기 고조선의 한반도 퇴축, 위만조선 성립, 위만조선 멸망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 세 별도 조선계 집단인데다 2세기 후반에 이 세 조선계 집단에게 지배력을 확고히 관철한 낙랑계 집단이 2세기 중반에 등장하기 전에는 서로 연합도 못하고 팽팽하게 병립하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이미 한반도 남부나 부여보다 먼저 선진 문화를 경험한 고조선 유민의 영향으로 빨리 건국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성립 불가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초에 출현하자마자 주변 송국리 유형 문화인 집단 및 그전에 내려온 조선계 집단 등을 압도하면서 지배력을 확립한 준왕 집단과는 달리, 2세기 중반에 처음 등장한 낙랑인 집단은 선진적 기술을 보유했음에도 경주에 이미 있었던 조선계 집단들에게 통치의 동의를 받아낼 때까지 거의 수십 년은 걸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라 왕통의 시작이 《삼국사기》 기년과 맞지 않음은 명백하지만 고고학적으로 신라라는 국가상의 실체가 드러나는 2~3세기보다는 빨랐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건 신라라는 국가와는 완전히 별도의 사실로 봐야 한다. [6] 시조의 휘는 밝은 누리라는 뜻으로 실제 발음은 불거누리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는 일본어처럼 한자를 훈(뜻)과 음(소리)으로 읽었는데, 赫居世는 赫을 훈차, 居를 음차, 世를 훈차한 것이고, 弗矩內는 음차한 것이다. [7] 삼국사기》에는 태자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8] 삼국사기에는 남해왕의 친여동생이 아로공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9] 묘호의 사용이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때부터 확인이 되어 당대에 사용했을 확률은 낮다. [10] 두 명의 성인(聖人).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과 왕후 알영부인을 말한다. [11] 당시에는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2] 밀양 박씨, 반남 박씨, 함양 박씨, 순천 박씨, 무안 박씨, 죽산 박씨, 고령 박씨, 충주 박씨 등 소위 8박 및 강릉 박씨 등 기타 박씨. [13] 다른 성은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다른 한자문화권에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으나 박씨는 한국 고유 성씨다. [14] 또 다른 추정으론 석씨, 김씨가 박성 지파로 흡수되어 같은 왕족 계급 취급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김씨, 석씨는 박성 내에 김씨 지파, 석씨 지파였다는 것이다. 어차피 같은 집안이기 때문에 혁거세를 시조로 모시는데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15] 향가 같은 신라의 문화에서도 이와 같이 나타난다. [16] 赫은 '붉다' 외에도 '빛나다', '밝다'라는 뜻이 존재한다. [17] 《삼국유사》의 본문에 있는 저자 일연의 주석. [18]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 참고로 이 유민은 위만조선의 국상이었던 역계경이 고조선에서 진국으로 망명했을 때 함께 남하한 예맥인 일파라는 가설도 있다.고고학으로 봤을 때 낙랑인 집단이 2세기 중반에 경주에 처음 오기 전에는 기원전 4~3세기 고조선 한반도 퇴축, 위만 조선 성립기, 위만 조선 멸망기 이 세 시기에 각기 내려온 조선인 집단 세 부류가 있었던 걸로 드러났다. 이 일파는 위만 조선 멸망기 즈음 내려온 바로 그 부류일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 남부 고대사에서 문헌과 고고학 자료가 기년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19] 삼국유사》에는 흰 말(백마)이라고 되어있다. [20] 《삼국유사》에는 보랏빛(자줏빛) 혹은 푸른빛의 알이라고 되어있다. [21] 또는 푸른 빛 알이라고도 한다. <일연의 주석> [22] 동천사(東泉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 <일연의 주석> [23] 아마도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 <일연의 주석> [24]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이로부터 임금(王者)의 존칭으로 되었다. <일연의 주석> [25] 《삼국유사》에서는 주석으로 '지금의 창림사 자리다'라고 소개했다. '지금'이란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살던 고려 시대를 말한다. 현대에는 창림사도 사라지고 창림사지 삼층 석탑( 보물 제1867호)만 남아있다. [26] 사로 6촌장. 유리 이사금(제3대) 때 첫째 알천 양산촌에는 이씨, 둘째 돌산 고허촌에는 최씨, 셋째 취산 진지촌에는 정씨, 넷째 무산 대수촌에는 손씨, 다섯째 금산 가리촌에는 배씨, 여섯째 명활산 고야촌에는 설씨 성이 사성(賜姓)되었다. [27] 경주 일대의 통칭 가운데 계림(鷄林)이 있는데, 설화에서는 닭(鷄)이 아닌 말(馬)이 등장하고 있다. < 김알지 탄생 설화>에서는 멀쩡하게(?) 닭이 나왔음을 떠올려 보자. [28] 혁거세의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구정동·조양동 등 경주의 여러 고분에서는 철제품과 철제 무기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그 중 주목할 것이 철제 마구(말재갈)인데, 청동제 마구는 경주에서 나온 적이 없다. 이는 기마 세력이 철기도 함께 챙겨들고 왔다는 뜻이다. [29] 실제 역사에서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한건 좀 더 이후의 일이지만 훗날 김씨, 박씨, 석씨 등으로 소급될 서로 구분되는 집단은 성씨 사용 이전부터 존재했다. [30] 추수 후 쌓아놓은 곡식 더미를 말한다. [31] 이 《국어독본》에서는 석탈해 신화에서의 석탈해의 고향 다파나국을 일본이라고 못 박았다. 다만 석탈해 신화의 다파나국은 박혁거세 신화와 달리 일본 열도 어딘가라는 설도 나름 유력하긴 하다. [32] 여담이지만 이 혜성은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직후 관측되어 로마에서는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를 신격화하는 근거로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