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02

김인문(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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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괴뢰 국왕
김인문 | 金仁問
파일:김인문묘지.jpg
김인문의 묘 전경.
출생 629년
신라 금성
사망 694년 4월 29일 (향년 65세)[1]
당나라 장안
묘지 김인문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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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인문(仁問)
부모 부왕 태종 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김씨
형제 김법민
인수(仁壽)
골품 진골(眞骨)
관등 태대각간(太大角干)
업적 태종 무열왕 김유신을 도와 백제, 고구려 정벌 }}}}}}}}}

1. 개요2. 역임 관작3. 생애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진골 왕족으로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 군인이자 관료, 외교관. 그 중 아버지 김춘추를 이어받은 외교관으로서의 행적이 가장 주목받으며, 신라의 대 당나라 외교 전담으로 말하자면 당나라 주재 신라 대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2. 역임 관작

<colbgcolor=#4a2d5b><colcolor=white> 김인문의 신라 관작
관등 파진찬(波珍飡)
각간(角干)
대각간(大角干)
태대각간(太大角干) 사후 추증. 신라 천년 역사상 오로지 김유신과 본인만이 태대각간에 올랐다.
직위 압독주 총관(押督州 摠管) 압독주의 군주=총관=도독이다.
대당 총관(大幢 摠管) 신라의 중앙군인 9서당의 부지휘관.
<colbgcolor=#4a2d5b><colcolor=white> 김인문의 당 관작
무산계 품계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종 2품 무산계 품계. 서열 3위 품계다.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정 2품 무산계 품계. 서열 2위 품계로 이 품계 위엔 종 1품 표기대장군 하나 뿐이다.
직위 좌령군위 장군(左領軍衛 將軍) 좌령군위 소속 장군.
우효위 대장군(右驍衛 大將軍) 우효위 소속 대장군.
우효위 원외대장군(右驍衛 員外大將軍) 우효위 소속 원외대장군. 원외는 일종의 명예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행우무위위 대장군(行右武威衛 大將軍) 진군대장군 품계와 같이 받음, 우무위위 소속 대장군. 앞의 행 자는 행수법에 따라 붙은 것으로 보인다.
좌우림군 장군(左羽林軍 將軍) 보국대장군 품계와 같이 받음, 좌우림군 소속 장군.
훈위 상주국(上柱國) 최고위 훈위이다.
작위 임해군 개국공(臨海郡 開國公) 임해군을 봉지로 받은 공작.[2]
<colbgcolor=#4a2d5b><colcolor=white> 당이 강요한 김인문의 관작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종 1품 문산계 품계. 서열 1위 품계다.
작위 신라국왕(新羅國王) 김인문이 극구 사양해 받지 않았다.
직위 계림주 대도독(鷄林州 大都督) 신라국왕 대신 임명한 계림대도독부의 대도독.
당나라는 김인문에게 무산계 품계를 주고 무반직을 주어 무관으로 대우했다. 딱 한번 문관으로 대우했는데, 나당전쟁 와중에 신라 문무왕이 지속적으로 시비를 걸자 분노한 당 고종은 김인문에게 당 조정에서 가장 높은 품계[3]를 주고 신라국왕에 봉하여 신라에 보내려 했지만, 김인문이 죽어도 안가겠다며 버티자 결국 작위를 폐기하고 계림대도독부의 명목상 수장으로 박아 보내려 했다. 하지만 신라가 명목상 양보하는 스탠스를 취하자 당나라도 김인문의 관작을 되돌려서 없는 일로 했다.

3. 생애

어릴 때부터 유가 서적을 읽으며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부터가 '(仁)을 묻는다'라는 뜻인 '인문'이라는 부분에서 아직 고유어 이름이나 불교식 이름이 많았던 신라 중고기 사회 분위기치고는 굉장히 유학적인 이름이다. '인'은 유학이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궁극적인 덕목이다.

처음 기록에 나타난 행적은 진덕여왕 재위기[4] 당시 친당정책에 의해 651년, 23세 때 처음 당나라에 입조하여 653년까지 2년간 당에서 머물었다.[5] 이후 당고종의 측근에서 숙위(宿衛)하기도 하고 당나라와 신라를 왔다갔다하며 양국 간 중재에 힘썼다. 기록을 보면 황해를 건너 당나라에 넘어간 것이 7번이고, 당에서 체류한 시기를 합하면 22년이다. 당에 머무르면서 황제를 비롯한 고위층과 교류하면서 유학자적 식견을 한층 더 갖추게 되었다.

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 북부 33개의 성을 점령해 큰 위기에 처했다. 656년 압독주(지금의 경북 경산시, 다른 이름은 압량주) 군주에 재직하면서 장산성을 쌓는 등 신라에 잠깐잠깐 머물 때는 신라의 내정을 맡기도 했다. 이 압독주는 대야성 전투(642년)로 백제에게 대야성을 내준 이후 백제에서 신라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는 경로의 핵심 방어거점이었으며 바로 전까지 김유신이 지키던 곳이기 때문에 이것도 단순한 일개 지방 행정경력이 아니라 신라의 국방체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김인문을 말할 때 보통 문관적인 면모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외교만 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서 큰 전투가 있을 때는 귀국해 지휘관으로 참여하기도 여러 번이었는데, 661년에 백제 부흥군과 교전해 이기기도 했고 661년 평양성 보급에 참여하는 등 2차, 3차 고구려-당 전쟁에 참여했고 그 중 668년 고구려 정벌 때는 항복한 보장왕을 당의 군영 앞에 데려다 놓고 당의 이세적 앞에서 보장왕의 죄를 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전투의 공으로 식읍 500호를 받았는데,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보면 무려 20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김인문의 후손인 김흔(金昕)이 보령시에 대대로 식읍을 물려받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고종이 김인문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인문이 당나라에 매여있는 입장이다보니 당나라에게 장기말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665년 8월에는 신라 웅진도독부를 동급으로 간주하는 웅령 회맹에 반강요로 참석하기도 했고[6] 670년 나당전쟁이 터지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형(문무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김인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라고 하는 등 이간시키려고 별짓을 다했고, 674년에는 형 문무왕이 멀쩡히 있는데도 동생 김인문을 문무왕 대신 명목상의 신라왕으로 책봉해 신라로 보내기도 했다. 중간에 끼인 김인문은 일단은 간곡히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졌다. 그러나 문무왕은 김인문의 입장을 이해하고 별달리 의심하지 않았고 김인문도 왕위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아 그냥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나당전쟁이 끝나고도 귀국하지 못했고 694년 66세의 나이로 당나라 장안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신라로 이장되었고 사후 김유신만이 받았던 관등인 태대각간이 추증되었다.[7]

훗날의 김주원은 김인문의 후손설과 김문왕의 후손설이 있다.[8] 김주원이 김인문의 후손이라면 김인문묘 바로 옆에 묻힌 김양도 김인문의 후손인 셈이다.

4. 기타

김인문의 무덤은 지금도 무열왕릉 바로 앞 도로변 맞은편에 김양의 묘와 함께 있어서 접근성이 좋다. 바로 옆에 중앙선 철길이 있어서 기차를 타고 경주에 오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면서 지름 29.9m, 높이 6.5m의 거대한[9] 김인문의 고분을 얼핏 보고 경주에 왔음을 실감한다.[10] 이 무덤은 오랫동안 각간묘(角干墓)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이 무덤 앞에 남아 귀부(공적을 새긴 비석을 받치기 위해 거북 모양으로 만든 받침돌)가 있다. 단 글이 써 있었을 비석 몸통은 무열왕릉비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떨어져나가 없어져 찾을 수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1931년에 근처에 있는 서악 서원에서 김인문묘비 비석 조각이 발견됐고 귀부의 이음매와 일치해 김인문의 것으로 판명나면서 김인문묘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 문무왕릉비처럼 비석이 있어서 거기에 김인문의 생애를 비롯한 당대의 기록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지만, 조선 말 이우의 '대동금석서'를 살펴보면 김인문묘 비편으로 등장하고 있어 17세기 이전에 비석은 파손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일제강점기 사진 자료에는 이미 비편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파일:김인문(황산벌).png
  • 2003년 영화 황산벌에서는 신라 왕자의 신분보다 당나라 관리의 신분이 좋다며 당나라에 빌붙는 인물로 묘사된다. 배우는 류승수. 다만 이는 영화의 각색이고 실제 김인문은 신라인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지켰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하는 말을 통역을 하면서 경상도 사투리로 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가관인데 끝에 당나라군에게 먹일 식량을 신라군은 7월 10일까지[11] 사비성 앞까지 운반해오라는 소정방에게 버럭하며 항의하는 김유신에게 "우리는 보급 부대도 없이 전투 병력만 왔다. 이 작전은 신라 왕 김춘추가 황제께 애걸해서 결정한 것이다. 당장 김춘추에게 전하라. 우리는 배를 돌려 돌아가겠노라고!"라고 하는 소정방의 대사( 중국어)를 가만 듣고는 깐죽거리는 얼굴로 "배 돌려 그냥 가까?"로 간결하게 초월번역으로 통역했다. 소정방의 심기가 안 좋은 상황을 아주 적절하게 통역한 것. 방금 전까지는 강경하게 나오다가 회군하겠다는 말에 대꾸를 할 수 없어 멍하니 김인문을 쳐다보는 김유신과 신라 장군들에게 "와 보는데? 통역 다 했구마."라고 대답하는 것은 나름 명장면.

파일:김인문(평양성).png
  • 2011년 영화 평양성에도 나오는데 당나라에서 섭섭한 대접을 받았는지 신라 군복을 입고 신라 선봉대의 지휘관 일을 하는데 중간에 낀 중간관리직의 애환을 보여준다. 본대로 오라는 당나라의 압박과 본대가지 말라는 김유신 사이에 끼여서 고생하고[12] 마지막에 다 해결되면서 김유신과 문무왕이 뒷처리를 다 김인문에게 맡기자는 말에 "왜 나는 설거지만 하노!"라며 분노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전승빈[13]이 맡았다. 작중 다소 다혈질로 묘사되는 형 문무왕과 달리 냉정하고 지적인 성향의 인물로 등장했다. 문무왕의 성격이 아버지보다 외삼촌 김유신을 닮았다면 김인문이 더 아버지를 닮은 느낌. 비담의 난 때도 활약하고 이후 아버지를 따라 외국을 돌아다니는 등 외교 활동을 하며 나당동맹 결성 이후에는 나당관계의 조정 역을 맡는다. 그러나 나당동맹에 대해 신라 내부에서 친당파와 반당파로 나뉘어지자 친당파의 영수 역을 맡아 형과 대립하는 구도가 되며[14][15] 자기 나름대로는 신라의 힘으로 대국 당나라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해서 당나라로부터 신라 왕에 책봉된 후 형과 만나서 이 점을 설득하지만 형이 당나라와의 항전 의사를 밝히고 결별을 표하자 주저앉아 오열한다. 나레이션으로 이후 신라에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죽었다고 언급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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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무왕과 함께 김춘추의 자식들 중 생몰년이 확실하게 나온 인물이다. 그 외 남매들은 추정. [2] 당나라로 부터 받은 작위이다. 봉지 임해군은 백제의 서해안 지방에 해당한다. 참고로 김유신은 고구려땅의 수도가 봉지인 평양군 개국공(平壤郡 開國公)에 임명되었다. [3] 무산계보단 문산계가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즉 개부의동삼사는 표기대장군보다 더 상위 품계이다. [4] 진덕여왕 시대는 차기 왕위를 김춘추가 물려받을 것이 유력했고 비담의 난으로 반대파도 저절로 사라진 상황이었으므로 실권은 김인문의 아버지인 김춘추와 외숙인 김유신에게 있었다. [5] 이 이전에는 바로 아랫동생인 김문왕이 숙위하고 있었다. 김문왕과 교대하며 숙위로 간 것. [6] 웅령 회맹으로 효과가 없다고 생각해 문무왕을 불러 다시 강요한 것이 더 유명한 취리산 회맹이다. [7] 김유신은 태대각간이 된 뒤 죽었고 김인문은 죽은 뒤 태대각간에 추존된 것이라서 태대각간 하면 김유신으로 보는 편이다. [8] 강릉 김씨 족보에서는 김문왕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9] 물론 경주에 있는 신라 왕, 귀족의 무덤치고는 약간 작은 편이지만 경주 아닌 곳에서는 이만한 크기의 무덤은 보기 힘들다. [10] 근처의 더 큰 무열왕릉은 담벼락과 숲 뒤에 있어서 바깥 도로와 철길에서는 잘 안 보인다. [11] 원래는 12일까지였는데 "내가 살(쌀) 배달꾼이가?"하며 발끈하는 김유신의 태도에 소정방이 10일까지 앞당겨버렸다. 물론 이것도 김유신이 발끈해서 하는 막말들을 옆에서 김인문이 얄밉게 통역을 해준 결과였다. [12] 문무왕에게 "지가 형이면 형이지 왕이라고 후방에 처박혀갖고 내만 왔다갔다 하고, 다 죽게 생겼는데!"라고 투덜거리며 빨리 안 오고 뭐하냐."며 화를 내는데, 이때 주고받는 대화가 은근 재미지다. # [13] 예명으로 본명은 전광진인데 근초고왕에서 사기, 징비록에서 송희립 역을 맡았다. [14] 그러나, 나당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친당파로써의 입지보다는 김춘추/김진주 vs 김유신/김법민 갈등 구도 속에서 어떻게든 춘추와 유신의 분열을 막고자 나름대로 동분서주하기도 하였는데, 북한산성에 있던 김유신이 연개소문과 회담한 것을 빌미로 김춘추가 김인문과 김진주에게 조사 차 파견을 보낼때 김인문은 김유신의 결백을 밝히러 가겠다며 사실상 갈등 해소를 목표로 했었으며, 이외에도 김법민을 태자자리에서 폐위하려는 김춘추를 보고 당황하기도 했으며, 김춘추를 만나러 가는 김유신을 김진주가 공격하려 들자 김인문 본인이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는 등 친당파라기보단 중재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5] 그나마 나당전쟁 발발 이후에는 당의 공격에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해 문무왕을 설득하려다 의절을 피하지 못했지만, 이전의 행보와 맞추어 보았을때, 김인문은 골수 친당파라기보단 신라와 가문을 보전하기 위해 당에게 무리하게 맞서는 것을 (어느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피하고자 하는 경우로 보이며, 실질적인 골수 친당파는 오히려 김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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